〈 212화 〉대륙 충돌
생명의 태동조차 허락치 않을 법한 냉혹한 설원, 고저차조차 없이 심심하게 펼쳐진 지평선 위로 햇빛이 어른거리고, 인명 역시 희미하다. 생명 하나 살 것 같지 않은 설원 위로 느닷없이 죽음이 피어올랐다.
"커억…!"
가슴팍이 꿰뚫리고 침묵하는 이가 설원 위에 몸을 부딪히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죽어가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어떤 냉막한 인상의 전신갑주였다.
그 죽어나가는 모습은 무가치했다. 저항이랄 것도 없이, 무의미하게 죽는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 공포를 심었다.
뽑혀져 나온 심장이 펄떡대고, 그 광경에 준신들이 입술을 짓씹거나공포에 질린 채 제 병기를 쥐었다.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으, 으으으…."
초월의 반열에 들었다고 할 수 있을 준신들이며 뛰어난 전사인 그들이지만, 그들은 덤벼오는 이에게 이렇다 할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오히려 닿지도 못했다. 이 공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닌 것처럼, 그 존재는 능수능란하게 모든 공격을 빠져나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군주들의 아버지처럼 괴물의 팔을 떼어다 녹아내렸던 팔에다 붙여놓은 준신이 생각했다.
군주들의 아버지의 밑에서 빠져나오고, 그 신살자를 만나고도 살아남았다. 거래는 성공적이었다. 그 신살자는 그들을 쫓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쫓을 수도 없어보였다. 그들은 곧이어 일어났던 지진과 대참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에만 하더라도 이 설원을 따라 안전하게 벗어난 후에 도시로, 고향으로, 대륙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 생명 하나 자라지 않는 설원을 가로지르고자 생각했고, 영구동토라고 여겨지는 땅을 지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대뜸 지평선에서부터 날아온 저 존재가 드롭킥으로 제 동료 중 하나의 머리를 쪼개놓지만 않았더라면.
이후의 전개는 압도적이었다. 40명으로 출발했던 준신의 무리는 20명 밖에 남지 않았었다.
리더를 맡고 있는 준신은, 제 괴물의 팔로 무기를 쥐고서 뱃 속 깊이 들어찬 산소를 토해내며 함성을 뱉어냈다.
"끄으으아아아아아!!!!"
그리고 달려든다. 무기를 휘두른다. 크게 휘두르는 궤적이나, 그 보법으로 공격의 대부분을 가렸다. 몸으로 들이받을 듯 하다가 갑자기 몸을 틀며 쏘아내는 강격은, 분명 궤적이 큰 공격이나 읽어내기 어렵다. 갑자기 출수되는 공격은 빠르다.
깡!
능히 바위도 잘라낼 수 있으며, 성문은 한 번에 부술 수도 있을 공격. 그걸 가볍게 거검을 틀어 막아낸 이는, 숨소리 한 번 내지 않고 팔을 움직였다.
검이 비틀린다. 비틀리는 궤적을 따라, 맞닿은 쇠망치는 가벼이 궤적이 껶어나갔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망치가 바닥에 내려앉고, 휘둘렀던 준신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곧장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치닫는 앞차기를 보았다.
쩌억!
머리가 부숴진다. 그의 마지막 생각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준신의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지고, 앞차기를 내지른 존재가 다리를 거두며 거검을 쥐었다.
"으, 으아아아아!!!"
준신이다. 초월자다. 일반적인 병사들은 대적할 수도 없으며, 괴물 정도야 수만 충분하면 토벌하지 못할 것이 없노라고 자평했다. 그런 이들이, 마치 괴물을 만난 잡병처럼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까아아아앙!
거검과 검이 마주친다. 철검이 부딪혀 튕겨나고, 거검은 밀어붙인 그대로 내찔러진다.
퍼억!
뭉툭한 검끝. 그 끝에 찔린 몸뚱이가 반으로 갈라진다. 한 개인의 힘이라기에는 너무도 강력한 거력에, 다른 준신들이 헛숨을 삼키며 그 조우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달려들면 죽는다.
인간을 넘은 이들을 가벼이 쪼개버리는 강격들에, 그들은 어떤 존재를 떠올리면서도 달려들었다.
"죽여! 에워싸!"
누군가 외친 말이 기폭제가 되어, 그대로 철퇴, 창, 폴암이 달려든다. 휘둘러지는 공격은 만만치 않았다.
허나 그 습격자는 피하지 않았다. 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몸을 살짝 틀었다.
까가각, 까가가가각!
철퇴가 칼자루로 튕겨내지고, 창날이 어깨 갑주를 꿰뚫으려다 그대로 갑주의 뾰족한 선을 따라 흘려진다.
이어 내리찍어지는 폴암을 몸을 뒤로 물리는 것으로 피한다.
그리고.
"커헉!"
"크아악!"
거검을 크게 휘둘러 세 명의 준신을 동시에 쪼갠다. 속도와 기술, 그 완력마저도 완벽에 가까웠다. 그렇게 쪼개져 나뒹구는 시체에서 신성이 흘러들어 그 존재에게 스며든다.
그 광경에 준신들은 저 존재가 무엇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으나, 오직 한 명만은 짐작하고 있었다.
준신이 되기 전에는 신을 섬기는 사제이자 성기사였던 이였다.
흉흉하게 흘려지는 살기, 전신에 두른 갑주와 손에 든 인간이 드는 걸 허락조차 안 하는, 그가 딛고 선 설원처럼 냉막한 거검.
그 인상착의에 맞는 이름을 떠올리던 사제가, 흠칫하며 물러섰다.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투구 속에 있는 습격자의 눈동자와.
"마, 막아!"
겨울의 폭군이 다시 달려든다. 그가 걷어차는 눈더미가 용오름처럼 치솟고, 휘두르는 검마다 눈보라가 잘려나가 지워진다. 그 궤적에 끼어든 이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 습격자는 주먹과 다리, 발과 검으로 준신들을 여유롭게 때려죽였다.
완벽하게 간합을 계산하여 피할 것도 없이 미리 몸을 물리고, 페이크를 섞어 혼동을 주면서도 그 완력과 기술이 압도적이었다.
둘러싸서 죽이려 노림수를 던지면 눈치챘는지 파고들어 무마한다. 그렇게 죽는다.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위치선점에 저항조차 못하고 죽는다.
성기사는 굳어있던 몸을 일깨우며 달려들었다. 높이 든 양손검이 휘둘러지고, 그 머리를 향해 쏘아진다.
깡!
겨울의 폭군은 그에 응답하듯, 검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듯 하더니 손목을 움직였다. 그에 뒤집힌 거검이 급작스럽게 궤도를 꺾어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성기사는 머리가 쪼개지기 전, 그 존재의 이름과 함께 다른 이름을 떠올렸다.
"겨울의 폭…."
퍼석!
그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널부러진 시체를 마지막으로, 설원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소리를 앗아가는 듯 불어오는 눈보라가 매서웠다.
그 눈보라 사이에서, 겨울의 폭군은 묵묵히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방향 너머, 왠지 익숙한 신성이 있었다.
무척이나 익숙하고 그리운 신성. 그는 거검을 단단히 쥐었다가 등으로 되돌렸다.
사람들은 그를 겨울의 폭군이라고 부르나, 그를 섬기는 이들은 그를 이렇게 부르기도 했다.
죽음의 주인.
그리고 죽음의 주인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영원할 설원을 가로질러, 마침내 제 숙원을 이루기 위해.
*
나와 측근들, 행렬은 빠르게 배에 올랐다.
배를 옮기는 방식은 조악하게도 내 손으로 직접 옮기는 것이었으나, 그 수가 6척 밖에 안되는데다 단단하여 옮기는 과정에서 불상사가 생기진 않았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안전 운행을 해야했지만, 적어도 해안 절벽 아래에 배 6척이 있는 풍경은 봐도 질리지 않았다.
괴물들의 시선을 끌지 않고 배를 옮길 수 있었으니, 조악한 것 쯤이야 참아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배에 오르며, 나는 난민들에게 말했던 것과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동대륙으로 떠나고 싶지 않으며, 서대륙에 남고자 하는 이들은 남아도 좋다. 내 전언은 간단하게 울려퍼졌고, 일부 병사들은 듣지 못한 이를 위해서 내 말을 크게 외쳤다.
문제라면 순백교단도 아닌 일반 난민들조차 떠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는 거였다.
평생 고향처럼 지내온 대륙을 떠나 다른 땅으로 가는 것인데, 그들은 떠나기는 커녕 별 반응도 없이 배에 올랐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이 지랄 중인데, 이 새끼들은 고향을 그냥 버려버리니.
기사단장은 그런 내게 다가와 말을 붙였다. 그에게 이에 대해 물어보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대전사님 곁에 있는 게 가장 생존 확률이 높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에이, 그건 좀 아니죠."
아무리 내가 용력이 강하다고 한들, 평생 저들을 지켜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지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정도로 이 순례길은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어쩌면 고대의 도시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었고.
"아부가 아닌 진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 중 하나는 필시 대전사님을 따르는 겁니다."
그 말은 내가 저지른 일을 떠올리게 했다.
정말 그런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조금만 더 빠르게, 조금만 더 확실하게 했다면 대륙 전체가 이런 꼴이 되진 않았을테니까.
어쩌면 속죄하고자 무리한 짓을 벌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대전사님께서 무리하실 까닭은 아니지요."
그는 나를 다독이기 위해 뒤늦더라도 말했으나, 그에 쉬이 응하기엔 어려웠다.
"제가 무리하는 정도로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무리해야죠. 전 튼튼하니까요."
기사단장은 내 대답에 심려가 가득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한동안 선두에서 말 없이 서있다가, 배가 출발할 때가 되어서야 해산했다.
그렇게 배는 본래 적재량보다 한참 많은 사람들을 싣고 바다를 가로질렀다.
본래라면 위험해서 생각도 못할 방법이다. 하지만 괴물들이 죽어 바다가 깨끗하고,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아 긴 항행이 필요하지 않으니 얼마든지 이뤄낼 수 있는 방법처럼 보였다.
6천명을 좀 넘는 인원이 바다를 가로지르고, 6척의 배가 사람으로 가득 찬 채로 불안하게 수면을 가른다.
배 바닥에 가까운 최하층에서 노를 젓고 있을 병사들과 힘이 좋은 난민들에 의해, 배는 점차 동대륙으로 나아갔다.
나는 그 선두에 있는 배의 가장 선두에 서서, 주변을 흘겨보았다.
괴물의 흔적은 없었다.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경계를 풀지 않고 거검을 틀어쥐자,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지쳐보이십니다."
세네카였다. 세네카는 조금 길어져 제 날개뼈 위까지 내려오는 회색 단발을 짧게 묶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응시에는 불안감이 짙었다.
"괜찮습니다. 견딜만 해요."
"…대륙을 건넌 직후나, 대륙을 건너기 전 저희와 처음 만나 도시를 구해주셨을 때와는 달리 지금 현성씨 표정에선 여유는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그게티가 나나?
슬쩍 돌아보니,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무리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나는 그 말에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이기도 하거니와, 대답할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으니.
하지만 괜찮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무리하고 있는 건 맞았지만, 그게 내 뛰어난 신체를 감안했을 때는 무리가 아니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으니, 그녀는 조금 언성을 높였다.
"이 행렬에서 해야할 모든 일을 도맡아 이끄시면서, 전투까지 하시는데다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는데. 지치지 않을리가 없잖습니까."
"거인의 힘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지구력도 거인의 수준으로 올랐으니, 피로 정도야…."
"몸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신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보고 있기 힘들 정도예요."
세네카의 은근히 붉은 눈시울을 보고서, 나는 뭐라고 말하려던 그대로 다시 정면을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지금은 참을 때였다.
"진짜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해방자니까요."
그녀는 더 이상 내게 묻거나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내 뒤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 수록 배는 점점 더 동대륙으로 가까워졌고, 보이는 해안 절벽은 점차 뚜렷한 형상으로 우리를 가로막았다.
드디어 동대륙인가.
얼마만에 돌아가는 땅인지, 괜히 센치해지는 기분에 코를 움직이는데, 해안 절벽을 끼고 있는 산맥의 모퉁이에서 누군가 걸어나왔다.
"…어."
그들은 인간이었다.
일제히 무장을 하고, 이쪽을 흉흉하게 노려보고 있는 인간들.
동대륙에서 적대적인 인간이라고?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저들이 활을 꺼내들고 시위를 당기는 것에, 거검을 틀어쥐고서 몸을 날리려 했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날리기도 전에 대공이 내 앞을 가로막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갑자기 나타난 깨진 두개골의 해골 마법사는, 활을 꺼내들던 병사들이 굳는 걸 보고 나서야 안도하는 소리를 흘렸다.
그 안도하는 소리와 함께, 기습을 준비하던 절벽 위의 병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내리더니 무언가를 끌어올렸다.
그 끌어올려지는 깃발은 어딘가 익숙했다.
해양 도시이자 용의 도시로 이름이 높은, 발데가리아 공작령의 용 깃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