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귀향
그렇게 도착한 고대의 도시는 생각 이상으로 상태가 좋지 못했다. 주현성은 그 끔찍한 참상을 눈에 새기면서 눈쌀을 찌푸렸다. 심기가 불편했다. 예상했던 일이었으나, 그것이 눈 앞으로 다가온 것을 보자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 때 샤론이 병기와 병사들을 끌고와 도시를 내놓으라며 강짜를 부렸었던 숲, 그 한 켠에서 벗어난 주현성이 앞으로 나아가고, 행렬이 그 뒤를 지치고 침울한 채로 뒤따랐다.
고대의 도시에서 주현성을 돕기 위해 차출되었던 병력들은 기뻐할 법도 하건만, 도시의 외관은 너무나도 처참했다.
그럴 여유도 없었지만.
겨우 숨을 돌리는 병사들 사이로, 측근들이 지친 얼굴로 물을 들이키거나 하면서 주현성을 눈으로 쫓았다.
함락된 듯 보이는 성벽은 손상이랄 게 없으나 성문은 크게 열려있었다. 그 어떤 거체라고 하더라도 쉬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게다가 그렇게 함락된 성벽 너머에서는 괴물들의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앞으로 다다르게 될 낙원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던 난민들의 표정은 물론이고, 병사들의 낯빛마저 차갑게 식어갔다.
주현성마저도, 그 소리와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고대의 도시가 함락된 원인은 그 때문이라고.
본래 고대의 도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지간하면 엔딩까지는 버티는 도시이며 휴식처이다. 어려운 게임이니 쉬어야 할 곳은 마땅했고, 그래서 고대의 도시는 그 어떤 침입과 외적에도 버텨냈었다.
게임에서는 그랬다. 허나 지금 고대의 도시는 함락된 것처럼 보였다.
대륙 충돌이 이 세계에 가한 변화가 상상 이상의 것이라는 말 밖에 되지 않아, 그는 불편한 낯과 칙칙한 감정으로 이를 까득 소리를 내며 갈았다.
자기자신에 대한 분노가 스멀대는 와중에, 그는 침착하게 도시를 바라보았다.
과연 이 도시가 아직 버티고 있는 걸까? 완전히 패배한 건 아닐까?
오는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그마저도 강행군을 강요하고 속도를 높여서 겨우 도달한 것이었으나, 그는 그 일주일 사이에 함락되지 않았을 거라고 자신할 수가 없었다.
칙칙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눈을 떨구던 주현성은, 다른 생각에 닿았다.
설령 그렇더라도 고대의 도시는 훌륭한 거점이다. 이보다 뛰어난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벽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고, 파손된 흔적은 없었다. 만약 들어가서 성문을 닫고 모든 괴물을 쳐죽인다면 다시 거점으로 삼을 순 있을 것이다.
만약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죽었다면 그는 큰 충격에 빠질 것이나, 그 충격 때문에 자신을 따라서 고대의 도시까지 달려온 이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책임이 무거웠다. 무겁게,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그 책임에 마땅히 응답하기 위해고개를 들어올렸다.
들어올린 시선에는 성벽이, 그 굳건한 성벽과 그 위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이 들어왔다. 그가 해야하는 일은 아직 많았다. 되돌릴 순 없으나, 할 수 있는 일은 남아있었다.
주현성은 안으로 들어서려다, 문득 멈칫했다.
그가 이대로 쳐들어가면, 행렬은 이대로 여기에 남게 된다. 그랬을 때 생존률이 얼마나 될지는 짐작하기 쉬웠다.
주현성은 그래서 멈춰선 채로 행렬을 돌아보았다.
도시를 청소할 때까지 행렬은 안전하게 보호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는 보호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탁 트인 곳보다는 괴물이 다소 있더라도 한면이 막힌 곳이 방어하기 좋아보였다.
그는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은 수립은 간단했으나 시행은 어려웠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방법이 없으리란 걸, 그의 측근들과 간부들은 쉬이 인정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여 제 의견을 묵살하고서 주현성을 뒤따라 도시로 향했다.
크게 열린 성문의 근처에는 병사들의 시체가 으깨진 채 그 살점마저 발라져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그 옆을 지나는 난민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움츠러들었고, 병사들은 그 광경을 눈에 담으면서 잔뜩 긴장한 채로 침을 삼켰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건 주현성 뿐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성벽을 타고 있던 괴물이나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괴물들이 고개를 휙휙 돌려 행렬을 보았다.
그 괴물들의 눈에 행렬은 그저 먹기 좋은 뷔페에 불과했으니, 그 괴물들은 지체 없이 다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다가온다. 난민들은 이렇게 가까이에서괴물을 보게 될 줄은 몰라 움츠러들면서도, 가장 앞에 있는 이를 보았다.
주현성은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깃발을 바닥에 꽂았다. 바닥에 꽂힌 기치가 거칠게 휘날리는 가운데, 주현성이 몸을 수그려 낮은 자세를 잡았다.
그 자세는 쉬이 피하기 위한 자세가 아니었다.
언제든 달려들기 위한 자세였다.
투콰아아앙!
바닥을 걷어차고, 주현성이 가속했다. 날아들듯 하면서 빠른 속도로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괴물을 향해 접근했다. 접근해서, 그대로 손을 뻗었다.
괴물은 그 희끗한 움직임에 의아해하면서 죽었다.
가속이 실린 주먹에 두들겨 맞은 괴물의 얼굴이 그대로 움푹 패였다. 주둥이가 머리 안쪽으로 말려들어가 선홍빛을 띄는 살점을 주르륵 쏟아냈다.
그 위로, 다른 괴물이 뛰어들었다. 주현성은 그 움직임을 보고서, 주먹을 휘둘렀다.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그저 마주 공격했다.
쩌어엉!
짧게 올려친 주먹에 괴물의 몸통이 쪼개지고, 이빨과 발톱이 파워아머를 긁으며 떨어졌다.
주현성은 그에 개의치도 않고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몸을 튕겨내듯이 도약하여, 바로 위에서 날아들던 새에게 주먹을 갈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새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주현성은 잠시 멈추었다.
행렬 전체가 성문에 들어왔다. 주현성은 제 행렬이 전부 있는 걸 확인한 후에 다시 달려들었다. 달려들며 외쳤다.
"성문 닫아!"
그 말에 반응한 건 몇 병사였다. 병사들은 괴물이 없는 틈을 타 성벽으로 올라갔다. 고대의 도시에 익숙한 병사들이었다.
그 병사들이 성문 바로 위에 있는 초소에 올라, 작게 나있는 레버를 끌어당겼다. 끌어당겨진 레버는 몇십개의 톱니바퀴와 맞물리더니 잡고 있던 성문을 떨어트렸다.
쿠우우웅
내려앉은 성문이 굳건히 대지에 자리하고, 난민들은 등 뒤에 생겨난 커다란 벽에 안심했다.
그러는 사이에 주현성은 괴물들을 쳐부쉈다.
가드도 없고, 회피도 없었다. 그럴 시간조차 아까웠다. 피해낼 것도 없이, 그대로 공격을 퍼부어 죽였다.
시체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내려앉는 소리가 축축할 무렵, 몇 측근이 그에게 다가왔다.
"성문을 닫았다네. 이제 출발해도 좋아."
"준비해. 안 멈출 거니까."
따라붙은 NM-21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 뒤에서 메이가 숨을 겨우 고르면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옆에서 제 무기를 더듬는 근위대장이 불안한 표정으로 제 면갑을 내렸다.
병사의 수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병력은 성문 앞 난민을 지키게 할 셈인지 성문을 중심으로 넓게 포진하고 있었다.
그것이 주현성의 계획이었다. 성문을 중심으로 버티고, 그 사이에 주현성을 비롯한 일부 별동대가 괴물들을 정리하며 길을 튼다. 더 나은 거점을 찾으면 돌아가 난민들을 데리고 이동한다.
싸움 방식 자체는 무모하기 짝이 없고 성급했으나, 전술적으로는 부족함이 그다지 없었다.
주현성은 그렇게 침착하게 밀어붙이고자 했다. 자신이 다치는 건 어떻게든 될 것이나, 자신 외의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쳐부순 괴물들이 쌓여있는 성문 앞 가도, 주현성은 괴물의 사체 위에 발을 올린 채 그 괴물들을 살폈다.
괴물들은 확실히 그간 동대륙에서 봐오던 것이 아니었다. 그 질과 양은 물론이거니와 형태조차 많이 달랐다. 좀 더 복잡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이런 괴물들이라면 고대의 도시가 밀린 것이 이상하진 않았다. 좀 더 원론적인 이유는 달리 있을 것이나, 주현성은 구태여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도시를 살폈다. 나아갈 방향을 찾기 위해서.
시민 피해와 병력 피해는 상당한 듯 보였다. 시체가 널려있었다. 잘 발라진 시체에서부터 먹다 말았는지 썩어버린 것, 완전히 부숴져 괴물인지 인간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는 것까지.
주현성은 그 시체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거라면 장소는 한정되어 있어. 아무 곳에서나 창칼을 휘둘러대면서 버티고 있진 않을 거야.'
고대의 도시에 남기고 왔던 이들 중 마리암만 하더라도 용병술이 꽤 뛰어난 편이었다. 그녀라면 괴물들을 상대로 버티는데 좋은 장소를 알고 있었을테고, 정 밀린다면 어디서 농성하는 게 좋을지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만약 살아있다면, 있을 곳은 내성이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가장 몸을 숨기거나 농성하기 좋은 곳 역시 내성이었다.
난민들을 데리고 간다면 거기였다. 거기에 사람들이 살아있든, 그렇지 않든.
"내성으로 갑니다. 가는 길에 생존자가 있으면 구해내고, 괴물은 죽입시다."
그 간단한 제안에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호응할 생각인 것처럼 다들 병장기를 꺼내들고 자세를 취했다.
근위대장은 한술 더 떠, 장대망치를 어깨에 짊어진 채 주현성에게 다가와 말했다.
"뒤는 저희들이 맡을테니, 부디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생각해주십시오."
근위대장으로서는 드문 부탁이었다. 주현성은 그 부탁에 놀라워 하면서도, 대답 대신 주먹끼리 부딪혔다.
콰아아아앙!
울려퍼지는 천둥 같은 소리에 근위대장이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 행동에 담긴 뜻을 모르지 않아 막아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떠밀었다.
그에, 주현성은 빠르게 나아갔다.
나아가면서 모퉁이를 돌아 나타나는 괴물들을 쳐죽였다.
쳐죽이는 과정에서 가드나 회피는 필요 없었고, 그는 의도적으로 제 몸으로 공격을 받아들이면서 카운터를 꽂았다.
쩍 소리를 내며 부숴진 머리통이나 몸통이 쓰러지고, 그가 잡지 못한 괴물들이 뒤로 흘러가면 뒤에서 뒤따르던 병사들과 측근들이 처리했다.
휘두른 장대망치가 다리를 두들기면, 메이의 마법이 머리를 불태우고 그 몸통을 NM-21의 철권이 밀쳐냈다.
그렇게 쓰러져가는 괴물들이 쌓여가고, 뒤따르는 이들은 주현성의 속도와 광기에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전투를 이어나갔다.
반면, 주현성은 더 성급하게 주먹을 내질렀다.
무기를 꺼내어 휘둘러서 한 번에 한 놈씩 착실하게 쳐죽이는 것보다는, 주먹을 꽂아 한 놈이라도 더 무력화 시키고 멈춰세우는 것이 더 용이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주현성은 그래서 무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등에 짊어진 거검과 팔에 찬 방패 위로 피가 흩뿌려지고, 전신의 파워아머에 뇌수와 괴물의 장기가 끼얹어졌다.
이빨 자국과 발톱 자국이 파워아머 위에 새겨졌다가 지워지고, 신성이 흐릿하게 감돌았다.
뒤따르는 이들은 그 광경에 경악하면서도 어떻게든 보조하기 위해 빠른 호흡으로 주현성의 등을 쫓았다.
그렇게 괴물들이 밀려나고, 그들의 약진은 생각보다도 빠르게 내성까지 도달했다.
피범벅에 처절한 전투의 흔적을 남기며, 주현성은 멈춰섰다.
기억에 없는 성이었다. 그가 서대륙으로 자리를 옮겨 없는 동안, 증축된 것인지 눈에 익은 건물의 겉으로 돌과 강철로 이뤄진 것들이 둘러져 있었다.
이른바 내성이라고 칭해질만한 구조물이었다.
주현성은 그 내성과 증축된 영주성을 보면서 숨을 골랐고, 뒤따라온 이들 역시 고개가 땅에 닿을 정도로 크게 몸을 젖히며 숨을 몰아쉬거나 했다.
"사람이… 있나?"
주현성은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보이는 이는 없었으며 인기척 역시 없었다. 하늘을 종종 날아다니는 괴물들을 감안하면 당연하게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언제라도 뛰쳐들어갈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영주성을 보았다. 제발 누군가는 살아있기를.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 의미 없지 않기를. 그렇게 바라며 삭막한 성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의 바람은 맞아떨어졌다. 성의 위, 망루라고 할 수 있을 곳의 문이 덜컥 열리더니 누군가 걸어나왔다.
그는 걸어나오는 인물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외모에, 조금 더 붕대를 두르고 살이 빠진 듯 보였다.
그건 세레나였다.
뒤이어 마리암부터, 눈에 익지 않았으나 상태가 좋지 않아보이는 병사들이 걸어나왔다.
그들은 주현성의 피범벅인 모습에 경계하는지 눈쌀을 찌푸렸으나, 마리암과 세레나는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현성의 심처에서 여러 감정이 불어닥쳤다.반가움, 안도, 미안함, 죄책감, 책임감 따위의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어떻게 말하면 될지. 주현성은 입을 벙긋거리면서 고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겨우 말하려고 했다.
기 에 에 에 에 에 에!!!
괴물의 괴성이 들리지 않았으면 그랬을 것이다.
그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족히 집채만한 괴물이 날개를 달고, 그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주현성은 그 괴물을 눈에 담으며 나직하게 뇌까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
꽈릉, 하는 소리와 함께 맞부딪힌 주먹이 충격파를 흘렸다. 주현성은 그대로 자세를 숙였다.
"금방 끝내고 올테니."
그 말을 끝으로, 신살자는 거칠게 검은 연기를 피워내며 집채만한 새를 향해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