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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9화 〉귀향 (219/274)



〈 219화 〉귀향

세레나가 입술을 악물고, 마리암이 제 눈가를 문지르는 동안에, 나는 그들에게 다가서며 숨을 내쉬었다.

왠지 쓰러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육신도 그리 피곤하지 않고, 머리도 그리 혼잡한  아니었으나 어쩐지 그런 기분이었다.

내가 다가서니, 세레나는내 모습을 보고 다가오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해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먼저 물었다.

"괜찮…습니까?"

괜찮지 않아보인다는 말인가.  몸에 둘러진 피와 역한 냄새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는 없었다. 나는 애써 피곤한 표정을 지우면서 겨우 대답했다.

"예, 괜찮죠. 세레나는  지냈어요?"

그 걱정을 안부로 치환하여 반응하니,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도 대답했다.


"다치긴 했지만 그렇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닙니다. 이정도야 좀 쉬면 나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세레나의 의구심 섞인 회색 외눈이 나를 향하고, 나는 그 눈을 보면서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하기엔 이목이 너무도 많았다.


"예, 진짜 괜찮다니까요. 좀 싸워서 피곤한 게 전부입니다.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허탈한 웃음에, 의구심 섞인 표정을 지운 세레나가 제 눈가를 슥슥 문질렀다. 슬쩍 붉어진 눈시울이 보여 괜히 마음이 어지러웠다.

"너무 늦게  거 아닙니까? 기다리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녀는그렇게 농담처럼 타박했으나, 진심으로 나를 탓하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감동하여 목이 메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세레나에게 눈을 두고서 멋쩍게 웃었다.


"이게 최대한 빨리 온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그냥… 그냥 해본 말입니다.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와줘서 고마워요."

눈물이 또륵, 그녀의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보건데 정말 위급했던 모양이었다. 도시의 상황만 보더라도 뻔했던 것이지만.


그녀가 흘린 눈물에는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내가 그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서, 애써 웃었다.


여러 감정이 감돌고, 할 말도 많지만 당장은 때가 아니었다. 그녀도 그걸 잘 아는지 다시 붉어지려는 눈시울을 문질러 닦고는 손으로 꾹꾹 누르며 눈물을 닦았다.


"드리고 싶은 말도 많고, 전할 말도 많지만 당장은 때가 아닐 겁니다. 나중의 기쁨으로 미뤄두도록 하고… 뒤에 있는 이들에 대해서 물어도 되겠습니까?"


세레나는 그렇게 다시  도시의 성주이자 카리스마 있는 외눈의 지도자로 돌아와서는 내게 질문했다.


"대륙 건너의 종교집단, 난민, 영지의 병사와 귀족들입니다. 수는 자세히 헤아린 건 아니지만 족히 오천은 될 겁니다."


"오천…."

그녀의 표정이 인상깊게 바뀌길래, 괜히 한 마디 덧붙였다.

"집단 구성이 그리 깔끔하진 않은 편이라 들어서는데 문제가 있긴 하겠지만, 받아줄  있을까요?"


세레나는  말에, 헛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제 없을 겁니다. 예, 분명히 들이는데 그 어떤 문제도 없을 겁니다. 이 도시에는… 이제 그리 많은 사람들이 살지 않으니까요."

예상하던 답변에 입을 다무니, 그녀는 쓰게 웃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죽었고, 병사들도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무너진 건물만 피해서 입주할 곳을 정하면 당장 입주해서 자유시민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중세 계급 잘 모르는데. 모든 행정적인 절차를 떠넘기다시피 했었던 내가 웃으니, 그녀는 허탈하게 웃으며 병사들을 흘긋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질문하자, 그녀의 외눈이 나를 향해왔다.

"몇 명이나 살아남았습니까?"

내 질문에 그녀는 노골적으로 당황하면서도, 솔직하게 망설였다.


"200명… 정도입니다. 정확하게는 236명… 아니,237명이군요."

탄식이 절로 나오는 숫자였다.

만명이 넘게 살고 있었던 도시에서 모두가 죽고, 지금은 237명만이 살아남아 있었다니.


그리고 그 책임 소재가 나에게 있다니.


나는그게 몹시 버겁고 한탄스러워, 잠시 침묵을 지켰다. 1만에 237을 빼고 나면 남는 목숨값은 고스란히 내 목에 올려져 있었다. 언제든 내 목을 쳐낼 수 있을 길로틴처럼.

내 침묵과 함께 세레나는 다가와  뺨에 손을 얹었다. 가까이 붙은 탓에 그녀의 셔츠에 피가 묻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는지 내게 웃어주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구하러 와주셨으니 탓하지 않습니다."

그런 게 아닌데.

하지만 나 때문에 모두 죽은 것이라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래서 웃었다.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세레나의 잿빛 머리칼이 노을 아래에서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간 그녀의체온이  뺨을 타는 것을 느끼다, 나는 문득 물었다.

"…헌데 다른 이들은 어딨습니까? 도시에 놔두고 온 간부들이 있었을텐데…."

"…코른은, 그러니까  대머리는 저 동굴에서 뻗어있습니다. 죽은  아니고, 싸우다 다쳐서 요양하고 있습니다. 그리 심각한 상처는 아니니 금방 일어나겠죠. 그리고… 샤론은…."


그녀는 대답하다 말고 곤란한 빛을 띄었다.


 표정에, 나는 괜히 불길한 생각들이 스쳐지나가는  멈출 수가 없었다.


다급해져, 황급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혹시 샤론씨에게 뭔가 문제라도…."

"아, 아뇨. 그건 아닌데… 그것이… 직접, 직접 보시면 아실 겁니다."

세레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곤란한 빛을 지우지 못했다. 그 곤란해하는 표정에서 감도는 감정은 좌절감과는 그 어떤 연관도 없어보였다.


도대체 뭐길래?

내가 의아해하며 재차 물으려는 찰나,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내성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누군가 내성에서 나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마치 무거운 걸 안고 있는 듯 조심스러운 걸음걸이. 그 속도에, 나는 무심결에 눈을 들어올렸다가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

샤론이었다. 샤론은 제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채,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서는 누군가 그녀의 팔을 붙들고 부축하고 있었는데, 눈을그대로 그녀의 몸선을따라 내리자마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샤론의 배는 크게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멈췄다.

사고도, 행동도.


내가 멈춰서있으니, 샤론은나를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그녀와 내가 눈이 마주치고, 그녀는 여러가지 표정을 지었다. 슬픔, 기쁨, 분노, 환희 따위에서 여러모로 감돌던 표정은, 이냐 그녀가 입술을 꾹 다물자 사라졌다. 다시 생겨나는 표정은 후련함에 가까웠다.


"애 이름은 정해뒀나, 귀공."

세레나는 여전히 곤란한 표정을 지은 채로 몸을 돌려 자리를 비켜주었고, 샤론은 제 옆의 시종 같은 이의 부축을 받으며 내게 다가왔다.나는 한참을 멍청하게 서있다가 겨우 샤론에게 몇 걸음을 다가섰다.


그녀의 배는 크게 부풀어, 그 흔적이 무엇인지 짐작할  있게 하고 있었다.

"이, 이거…."


말이 헛나왔다. 분명히 헛나온 거다. 내 굳어버린 뇌로는 나올 수 있는 어휘가 얼마 없었다. 샤론은 그런 내 말에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내 양뺨을 가볍게 잡았다.

"귀공의 새끼한테 이거라니. 말이 심하잖느냐. 으응?"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올린 샤론은, 내 뺨을 슥슥 쓸더니 행복하게 웃었다.

"난 귀공이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헌데 저 믿음이 부족한  명은 절망부터 해버리더구나. 웃기는 꼴이지. 귀공이안은 여자에게 씨나 뿌리고서 도망치는 한심한 남자일리가 없지 않느냐? 내가 고른 낭군인데. 암, 그렇고 말고."


나는 그녀의 음성에 여러 표정을 지어올렸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미안해야 하는 건지.

구분할 수 없어 입술을 벙긋거리니, 샤론이 씩 웃었다. 그녀의 자주색 눈동자가 금색 쌍커풀이 자라난 눈꺼풀 안으로 사라졌다.

"헌데 이 밖은 태교에 그다지 좋지 않은 풍경이구나. 귀공의 몸 역시 그렇고.  낭군 강한 건  알겠으니, 이만 안에 들어가자꾸나. 할 얘기가 많아."

샤론의 말에는 강압적이지 않은 권유가 담겨있었다. 내가 거부할 수 있을리가 없는 권유가. 내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난민들이 그런  뒷모습을 바라보는 걸 인지한 후에야 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


내성 안에 있던 이들 중 행정적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이들과 난민들  그런 일이 가능한 이들, 내 측근 중에서도 가능한 이들을 뽑아난민의 수속을 처리하는 동안, 나는 내성으로 들어서 어떤 방으로 옮겨졌다.

그 방에는 여러, 소박한 가재도구들과 화려한 가구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 중 화려한 침대와 그런 침대에 누운 화려한 외모의 여자가  눈을 잡아끌었다.

침대에 누워있던 샤론이 손짓하고, 내가 그 앞 의자에 앉는다. 앉자마자 샤론이 밝게 웃었다.

"어서 돌아오거라. 다른 이들은 말해줄 경황이 없으니 안주인 중 하나가 해야겠지."

금발의 여왕은, 내 애를 뱃속에 안아든 채로 내게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에서 떠도는 여러 감정에 나는 문득 말했다.

"언제부터…?"

"글쎄, 몇달은 됐겠구나. 귀공과 내가 몸을 섞은 게 몇 달 전이니, 그때부터 뿌려졌다 보는 게 맞겠지. 보거라, 만삭이지 않느냐."

정말로 그랬다. 임산부를  일이 많지 않아 가늠은 힘들었지만, 곧 태어날  같았다.


"그래도 애를 받아줄 의사 겸 마법사와 함께 지아비가 돌아왔으니, 천만다행이지. 하마터면 아비도 없이 낳을  했지 뭐냐."

그건 확실히 다행이었지만, 그렇긴 한데.


내가 말을 하지 못하니, 그녀는 그런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목을 붙잡았다.

붙잡아 제 배 위에 얹었다.


"그냥 보고만 있지 말고, 만져보거라. 원한다면 그 위에 아비가 왔노라고 속삭여도 좋지. 귀공을 닮아 기운찬지 지 어미의 배를 얼마나 차대는지…."

샤론은 정말 행복한 듯 웃었다. 그 웃음이 내게 현실을 돌려다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잔잔한 고동이 손바닥 위에서 흘렀다.

내 애가 생겼고.

그 애가 나올 예정이고.

내가 해야할 일은 여전히 많고.

하마터면  애와 함께 도시도 잃을 뻔 했다.


네 개의 깨달음이 뇌리를 메우니, 나는 입술을 짓씹어야 했다.

"…기쁘지 않느냐?"


그런  상념을 일깨운 건 샤론이었다. 샤론은 걱정되는지 크게 휘어놓은 눈썹으로 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쁘긴 한데…. 그게…."


말해도 괜찮을까? 걱정만 끼치거나, 나를 원망하는 게 아닐까?

대답을 알  없어 얼버무리려 하니, 그녀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후, 하는 한숨을 뱉었다.

"귀공은 언제나 걱정거리가 많았지. 항상 뭔가를 걱정하고, 계획하고, 싸워나가려고 했지. 종종 또 생각 없는 듯이 보이기도 했지만… 힘을 가진 이가 무게를 더 지는 건 당연하다는 듯이 일어나니 이해할 수 있지. 헌데…."

 뜬금 없는 말에 내가 눈을 들어올리니, 그녀는 배시시 웃더니 내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따뜻했다. 배도, 손도.

"난 귀공이  성히 돌아온 게 기쁘구나. 그러니, 걱정일랑 접어두거라. 적어도 제 자식과 함께할 때는 말이야. 나도 그리 좋은 어미는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그리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는데도, 귀공이 돌아온 게 기뻐서 가슴이 두근거리니."

미약하지만 자애가 감도는 미소였다. 마주치는 자주색 눈동자가 부드러웠다.

난 그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복잡한 심경을 담아 그녀의 배를 쓸었다.

쓸어내리는 손에서는 체온이 짙었고, 또한  수 없는 감정이 어지러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참 그 배를 쓸고 있으니, 샤론의 부드러운 손이 내 뺨에 툭툭 얹어졌다.


"책임감을 느껴주는 건 고맙지만, 귀공이 하는 과업에 방해가 된다면 잠시 잊어도 괜찮아. 가끔씩, 쉬려고 할 때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동할테니. 나는 귀공의 족쇄가 아니라 요람이 되고 싶네."

산모가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여왕이고, 반신의 첩이기에  수 있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에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겨우  마디를 뱉어냈다.

"고마워."

"뭘, 지아비 섬기는 건 여왕이나 왕족이라 할지라도 해야하는 일이니. 너무 개의치 않아도 돼."

그녀는 괜시리 그리 답하더니,  손을 쓸었다.


그 손은 부드러워서, 괜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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