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22화 〉가을의 마녀 (222/274)



〈 222화 〉가을의 마녀

늘어선 장비들과 놓여있는, 깔끔하게 정비되고 닦아진 파워아머.


한동안 괴물의 체액과 피를 뒤집어 쓰다시피 했던지라 냄새가 안 빠지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겨울의 신부는 내 생각 이상으로 유능했다.

특유의 기계 향기를 풍기는 파워아머를 물끄러미 보면서, 내 전신에 사슬갑주를 둘렀다. 주르륵 뻗어지는 사슬갑주가 내 전신을 뒤덮고, 로봇 영화의 거대 로봇에라도 오르는 기분으로 파워아머에 다가섰다.

[사용자 식별 완료]


[신성과 동기화 중]

[동기화 완료]


 개의 알아볼 수 있는 메세지와  개의 알아볼 수 없는 메세지가 일제히 나타나 내 시야를 가득히 메웠다가 사라지고, 파워아머가 닫힌다.

챠캉, 챠르르륵

금속끼리 맞물리는소리가 들리더니 파워아머가 완전히 닫힌 후에  사슬갑주가 몸에서 빠져나가 파워아머 내부를 메웠다.

꽉 찬 충만함과 답답함 사이에서 왕복하던 감각이 완전히 안정되고, 그제야 파워아머의 굳어있던 팔이 내 손을 따라 움직였다.


허리춤에 여름의 도살자를 죽이고 빼앗은 도끼, 낙인을 집어넣고, 왼쪽 전완부의 갑옷에 심해 엘프들을 죽이고 빼앗은 방패를 동여멘다.

동여멘다고 할 것도 없이, 가져다댄 방패는 자동적으로 파워아머가 인식하고 고정시켰다.

고정된 방패가 단단히 붙어있나확인하고서, 벽에 기대어있던 거검을 집어들어 벨트와 함께 등에 짊어졌다.

그리고 손을 뻗어 위치를 확인했다.

거검은 달리는 중에 뽑을 수 있도록 손이 닿는 거리에 있었고, 도끼는 꺼내어 휘두르거나 던질 수 있도록 단단히 고정되었다.

몇 번 더 손을 뻗어 준비가 됐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밖으로 나섰다. 방 바깥에서는 메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이는 나를 보면서, 잠시 망설였다. 그 망설이는 갈색 눈동자가 내 형체를 띄고서 어지러이 흔들렸다.

"정말 괜찮아?"

대답하지 않으니, 메이가 재차 물었다.

"진짜 오늘이야?"


"…응, 오늘 해야지."

 대답에, 메이는 무엇을 느꼈는지 다시 입을 꾹 닫았다.

"진짜, 지이인짜 괜찮은 거 맞아?"

일부러 말을 늘이는 꼴이 귀여웠으나, 정곡이었다. 생긋 웃으니 메이가 드러난 내 얼굴을 보고서 불안하게 눈을 깜빡였다.


"괜찮지 않아도 해야지."


괜찮지 않다고 돌려서 말하니, 메이는 역시나 걱정하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

메이의 표정도 이해가 갔으나, 내게 선택권이 많진 않았다.


도시의 재건은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내가 한동안 적극적으로 괴물들을 나서서 사냥했기 때문인지, 근처에서 괴물은 보이지 않았으며 그나마 보이던 것들도 도시를 피해 달아나는 괴물들이었다.


사람들은 안정적으로 새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고, 얼마 남지 않은 고대의 도시 거주 시민들은 새로운 이웃에게 익숙해졌다.


순백교단의 교회가 지어지고, 난민들이그에 헌금을 냈다. 여름을 섬기는 교단은 순백교단을 쉽게 융화시켜  일부러 받아들였다. 일종의 교파가 되었다.

아주 잠시 자리를 비우는 정도로 문제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현재의 생활은 안정되어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신을 죽이는 정도의  싸움이라면, 분명히 이목과 의도치 않은 관심을끌어모을테니.


메이도 그걸 아는 건지 모르는지, 잠시 말이 없다가 문득 물었다. 물으며  망토 자락을 쥐었다.

"정말 죽여야 해?"


이미 했던 이야기였다. 떼를 쓰기는 커녕 내 의향에 전체적으로 맞춰주는 편이던 메이가 내게 간접적으로 가을의 마녀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청하고 있었다.


그 부탁을 거절할  밖에 없는 것이 가슴 아팠지만, 어쩔  없었다.

"응,  죽여야 해."

메이는 이유를 묻는 듯 나를 올려다봤다. 그 눈동자에 담긴 수심과 여러 감정이 어지러웠다.

"가을의 마녀는 애초에 이 순간을 위해서 나를 도왔던 거야. 만약… 내가 그녀와 싸우지 않겠노라고 한다면 가을의 마녀는 우리의 적이 되어 도시를 부수려고 할 거야."


내가 짊어져야 했던 시련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노라고 하면서 말이지.

어차피 적이 될 거라면, 도시에 해를 끼치지 않는 방향으로 상대하고 싶었다.


메이는 내 말을 믿는지, 불만스러워 하는 눈치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만 입을 꾹 닫고서 슬픈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꼭 돌아와야 해."

"응, 그럴게."


조막만한 손이 그제야 내 망토를 놓아주고, 세상 그 무엇보다 무거울 손아귀에서 벗어난 나는 복도를 가로질렀다. 한참 복도를 거닐다 계단이 있는 곳에 이르자, 겨울의 신부가 서있었다.

그녀는 묵묵히, 그리고 고아하게인사하고는 생긋 웃었다.


"안 말리세요?"

"네."

"왜요?"


"당신께서 이미 하셨던 위업, 두  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역시 그런가.


2회차인 이상, 신을 전부 죽였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로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순 없었다.

지금처럼 반신의 격에 오른 것도 아닌데 어떻게 4신을  쳐죽인단 말인가.


의문이었으나, 그녀는 확고하게 말했다.

내가 1회차에서 4신을 전부 죽였다고.

미미하게 웃으니, 그녀는 덧붙였다.


"당신께서 능히 가능하신 일, 가로막고 싶진 않아요. 그저… 당신께서 돌아오실 자리를 덥혀놓는 게 제가   있는 일의 전부겠지요."

다녀오세요, 하고 그녀는 문득 말하더니 비켜섰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지나쳤다.


바깥으로 나서니, 저택 바깥으로 내리쬐는 태양빛과 함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만명도 채 안될, 대부분이 병사라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는 이들이 대다수일 도시의 전경이 나를 반겼다.

대부분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하루를 충실하게 보내고 있었으나, 일부는 앞으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것처럼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나는  소수부터 다수까지, 내가 지나치는 길에 있는 모든 이들이 나를 주시하는 걸  수 있었다.


그들은 내가 뭘 하러 가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풀리길 바란다고  소리로 외쳐주었다.

그 시선들과 목소리가 멀어진다. 점차 교외, 성문으로 접어듬에 따라 인기척은 드물어졌다. 대신 신성이 짙어졌다. 숨을 쉬기에도 아릿할 정도의 신성에, 나는 하, 하고 숨을 토해내며 헬멧을 도로 머리에 씌웠다.


자동으로 튀어나온 헬멧이 내 머리를 감싸고, 성문 앞에 서있던 가을의 마녀가 보였다.

그녀는 등에 제 창을 짊어진 채로, 꼬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왔구나, 아가."


그 꼬리가 흔들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죽고 죽일 준비는 되었느냐?"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가을의 마녀는 흡족하게 웃으면서 앞장섰다. 당연하게도, 도시에서 싸우는 건 내가 바라는 게 아니었으니까.

"사람들한테 피해  주는 곳까지 가지."


"그러자꾸나. 나 역시 괜히 내 자식에게 미움을 사고 싶진 않으니."


가을의 마녀가 먼저 성문을 나서고, 내가  뒤를 따랐다. 귀를 쫑긋거리고 꼬리를 살랑이는 가을의 마녀와 나란히, 나는 숲으로 접어들었다.


샤론이 처음 병력을 이끌고 나타났던 숲에서부터, 여름의 땅까지 가느라 지나쳤던 길까지.

나란히 걷기 시작하니, 가을의 마녀는 문득 웃었다.


"연인 같아 괜히 설레지 않느냐?"


"전혀."

"조금이라도 망설여준다면 귀염성이 있었을 것을, 그러고 싶지 않아 일부러 그러는 것이냐?"


"그래."


"매몰차구나. 그럼에도 나는 아가가 참 마음에 들어."

뭐라는 거야. 목을 풀며 걸음을 옮기니, 가을의 마녀가 내 보폭을 따라오다가 말했다.

"겨울의 폭군에 대해서는 잘 아느냐?"


"…조금은."


"그럼 겨울과 싸운다면 아가의 승산은 얼마나 되리라고보느냐?"


"글쎄, 언제나 그랬듯이 50대 50이겠지."

대충 대답했으나, 가을의 마녀는 노골적으로 즐거운 듯한 기색으로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깃든 즐거움에 눈을 돌리자 가을의 마녀는 금색 눈을 선연하게 마주친 채로 속삭였다.

"정확하구나."


나는  말에 솔직히 당황했다. 대충 던진 말임에도 긍정받은 것도 있었고, 내가 지금 존나 셀텐데도 고작 승률이 50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경악스러운 것도 있었다.

이런 걸로 거짓말할 년이 아니라는 걸 감안하면 충격은 더했다.

눈썹을 꿈틀거리자, 내 바이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을이 고아하게 웃으며 제 머리칼을 손으로 꼬았다.

"의외라고 생각했느냐?"


대답하지 않았다.


"신을 셋이나 죽인 신살자임에도 반 밖에 되지 않음이 놀라운 게냐?"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

가을의 마녀는 눈과 입으로 호선을 그리며 행복해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솔직한 것. 종종 귀엽구나. 겨울의 폭군 그는, 아가와 아주 비슷하단다. 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언젠가 갑자기 변해버렸지. 수천년은 되었을 것이라 확신하진 않지만."


변했다고?

육성으로 뱉지 않았으나 내 의문을 느낀 건지 그녀는 대답했다.


"그 아이가 익힌 것은 무나 기술이 아냐. 죽이고 부수는 법 그리고 이기는 법이지. 아가, 너처럼 말이다."

내가 그 말에 입을 다무니, 가을의 마녀가 썩 즐거운  말을 이어갔다.


"물론 수천년간 괴물을 사냥하고 인간을 죽여온 탓에 그의 기술이 아가보다 뛰어나긴 하겠지만, 겨울은 교활하고, 즉흥적이며, 한 편으로는  없이 격정적이란다. 너와 아주 비슷하지 않느냐?"

부정할 수 없었다. 특히 격정에 있어서는.


거인의 힘이 분노를 연료로 삼는다는 걸 떠올리니 더더욱 그랬다.

문득 가을의 마녀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금색 눈동자에 담긴 흥미와 즐거움이 짙어, 나는 괜히 어지러워지는  했다.

"나를 죽이면 그는 움직일 거다. 어쩌면 수천년간 도사리고 있던 제 영역을 해방하며 남하할지도 모르지. 때마침 대륙도 하나가 되었으니 치닫긴 쉽겠구나."


그 뒤는 네게 달렸단다. 하는 말에 내가 눈을 가늘게 뜨니 가을의 마녀는 배시시 웃었다.

그 시련이 닥쳐온다는 사실이 정말 즐거운  같았다.

"그렇게 강한 거냐?"

내 질문에, 가을의 마녀가 비아냥대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잘 안다. 신들이 강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힘의 수준 자체는 같다. 특화된 방향성의 차이 정도만 있을 뿐, 정도의 차이가 있진 않다.


잡는 순서에 따라 강해지긴 하지만, 그게 이것과 같은 것 같진 않았다.


가을의 마녀가 하는 말은 마치, 겨울의 폭군이 처음부터 나머지 신들보다 강하다는 말처럼 들렸다.

뭔가 이상했다.

"뭔가 아는 눈치구나, 나의 아들아. 허나 그 고민은 나를 쓰러트린 후에 해도 좋지 않겠느냐?"

가을의 마녀는 내 침묵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그렇게 말하더니 멈춰섰다. 상념에 잠겨 미쳐 앞을 보고 있지 못하던 나는, 멈춰선 가을의 마녀의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야 여기가 공터임을 알았다.

도시는 보이지도 않았고, 근처에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츠즈즈즈


주변을 슥슥 둘러보다 앞을 도로 바라보니, 가을의 마녀는 나와 거리를 벌린 채 창을 꺼내들었다. 꺼내든 창에서 번개가 지직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싸울 때였다. 거검을 망설임 없이 뽑아내어 쥐니, 가을의 마녀가 즐거운 기색으로 웃었다.


"네 육욕을 받아줄 준비도 되었던 어미를 베는데, 어떤 유감도 없는 것이냐?"


"그딴 게 있겠냐."

안 그래도 피곤한데.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거검을 틀어져라 쥐니 가을의 마녀가 흡족해했다.

"그게 네 가장 사랑스러운 점이지, 아가. 죽이려거든 언제든, 뭐든지 죽일 수 있으니. 네 자신마저 죽여 이 먼 곳까지 저들을 이끌어 피난시키지않았느냐?"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온대.


가을의 마녀는 그리 말하더니 자세를 취했다. 창을 높게 잡고, 자세 역시 높다. 자신보다 거대할 괴물을 많이잡아왔음이 선연히 드러나는 자세였다.

그리고 유황의 냄새가 서서히 풍겨오기 시작했다. 재앙과 시련, 닥쳐올 참극의 냄새였다.

그 냄새에 코를 들썩이고, 거검을 앞으로 내미니 가을의 마녀 주변에서푸른 줄기 같은 것이 스스슥 돋아났다. 스파크였다.

그 줄기가 바닥을 내달린다. 내달리며, 슬쩍 자라난 잡초를 태워먹는다. 태워진 잡초는검게 변색되어 스러졌다.

내가 그에 맞춰 자세를 낮추니, 그녀는 말했다.

"허나 명심하거라, 네 자신을 죽여가며 싸우는 것으로는 내 옷깃에 이빨 하나 닿지 않음이라, 그대로 싸우려거든…."


말하다 말고, 가을의 마녀는 파직, 하는 소리를 흘리며 사라졌다.


사라지자, 동시에 음성이 울렸다.

[불굴의 정신이 발동됩니다.]


위기를 감지하는 척수반사 수준의 권능이, 내 시야를  잡아당겨 내 등뒤에 놓는다. 끌려나오는 영혼처럼 뒤로 물러난 시야 너머로, 무언가 희끗하게 다가온다. 다가오며 주변이 흔들린다.

거검을 휘두르려고 하지만, 그 휘두르는 궤적에는 그 무엇도 없었다. 허공을 가른 거검이 바닥에 쳐박히고, 먼지가 치솟는 틈으로 무언가 날아와 내 목 앞에서 멈췄다.

그건 창이었다.

그리고 가을의 마녀였다.

내 목 앞에서 멈춰선 창을 거두며, 가을의 마녀가 웃었다. 그동안 일이 없던, 호전적이나 자애로운, 이율배반적인 미소였다.


그녀가 그 미소를 띄며 속삭였다.

"죽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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