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가을의 마녀
나는 가을의 마녀가 들고 있는 고압, 고전력의 밀도 높은 창을 보며 생각했다.
형태는 분명 창이지만, 창이라기 보다는 SF에서 나오는 빔 병기랑 비슷하다.
밀도 높게 뭉쳐진 전력으로 인해 쇳덩이조차 쇳물로 만들 수 있을 고열을 뿜어내고 있고, 주변에 드리워지는 것만으로도 초목을 새까맣게 태우고 있었다.
창대는 평소에 쓰던 그대로의 형상이나, 창날은 보이지 않고 그 위를 새하얗게 보일 정도의 전기가 창날을 모사하여 자리하고 있다.
그 창을 보면서, 나는 가을의 마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창을 굳건히 쥔 채로 여유로운 미소를 흘렸다.
저 섬전은 그녀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게 분명했다. 만약 그녀에게도 피해를 입히는 종류라면 이렇게 미적댈 이유가 없을테니.
그녀는 스피드 타입이다.
겨울의 폭군 같은 파워 타입은 절대 아니고, 그렇다고 봄의 순례자 같은 물량 타입도 아니었다. 여름의 도살자처럼 기술적인 편은… 맞나? 그건 확신할 수 없었다.
어쨌든 간에, 그녀의 힘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분명 겨울의 폭군이나 나에 비하자면 힘이 딸리는 편이고, 그 힘이라고 할 것마저도 나와 마지막으로 싸웠던 모습의 봄의 순례자보다 약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준신은 가볍게 넘는 신체 능력을 갖고 있는 건 확실했다.
몇 번 격돌한 걸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냥 힘 자체는 그렇게 강력한 편이 아니라지만, 저 가공할 속력 탓에 압도적인 공격력을 갖추고 있다고.
그 속력 역시 체내에 받아들인 전격을 응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 그런 권능을 갖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형태는 그런 속력을 갖추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지면을 내달리는 스파크도 없었고, 등골이 저릿하는 전류 특유의 감촉도 없었다.
그저 압도적인 열과 전격. 열로 인해 달궈진 공기가 폭풍처럼 몰아치는 가운데, 주변을 흘긋 보았다.
거목들은 닿지도 않았음에도 새까맣게 타들어 뒤틀렸다. 저 창이 뿜어내는 열이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화염 면역을 넘어 화염으로 회복하는 내가, 저 열에는 저항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순 없으나 믿고 들어갔다가 반토막 나는 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최대한 피하는 게 좋아보였다.
하지만 어떻게?
저 족히 길이만 하더라도 6m에 달할 거대한 창날은, 피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짐작하자면… 피하는 게 문제가 아닐테지. 짐작한 것을 겨우 억누르며 거검을 움켜쥐니, 가을의 마녀가 창을 돌렸다.
돌아가는 자루를 따라 휘몰아치는 폭풍이 거칠어지고, 그 몰아치는 형국이 나를 깎아내려는 용오름처럼 느껴졌다.
온다. 불현듯 느껴진 감각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쿠오오오오오!!!!
몸을 횡으로 던지니, 지면을 가르며 파고들어간 창날이 위로 쏘아졌다. 푸른 줄기를 주변에흩뿌리며 지면에서 튀어나온다. 그렇게 튀어나오는 모습에는 그 어떤 저항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나.
내 예상이 들어맞았음에 섬뜩한 감각이 뒷골을 타고 흐른다.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지만, 그 창의 궤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루를 돌려 올려치는 공격에 이어서, 가을의 마녀는 무게 하나 없는 듯 6m가 넘어가는 거창을 가볍게 휘돌려 횡으로 휘두른다. 높은 횡베기. 창날이 노리는 건 내 머리.
수확하듯 머리를 따내려는 시도에, 무릎을 앞으로 빼며 몸을 뒤로 젖혔다. 지면에 가깝게 몸을 눕히니 내 머리 위로 참격이 지나가며 질풍을 동반했다. 우짖는 우레와도 같은 소리에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킨다.
멈추면 죽는다. 저 연속 공격에는 망설임도, 저항도 없다. 지면을 가르든, 나무를 가르든 감속하지 않는다.
질량이 없는 순수한 번개 그 자체니까. 바로 그녀의 손에서 돌아간 자루가 대각 방향을 향한다.
이번에는 내 좌반신 전체를 베어내려는 대각선 내려베기. 이제 막 일으킨 몸으로는 피할 수 없었다. 나는 바로 위로 튀어올랐다.
콰아아아아!!
대각선으로 내리찍어진 섬전의 창날이 지면을 파고들고, 침입을 허용한 토사가 어지러이 튀어오르며 뒤집힌다. 깍둑썰기를 당한 것처럼, 사각형으로 조각난 돌덩이와 흙더미가 솟아오른다.
그리고 창날이 뒤집힌다. 뒤집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방향을 전환한다.
역시 보던대로 방향 전환은 물론이고 휘두르는데도 그 어떤 부담이 없었다. 방향을 바꾼 섬뜩한 고열이 나를 향하고, 그걸 보면서 억지로 거검을 끌어올렸다.
뛰어오르는 건 안 좋았나. 생각하지만 푸념할 틈은 없었다. 격돌한다. 몸 가까이 부딪힌 거검 위로, 창날이 닿는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
"크으으으아아아아악!"
거검 위로 부딪힌 창날이 폭풍과 열, 전신을 마비시키는 전류로 내게 닿았다. 휘감는 뜨거운 공기에 숨이 차오름에도, 나는 거검을 몸에서 떼내지 못했다.
닿는 순간 내 몸을 두들기는 스파크가 그 모든 시도를 무용하게 만들었다.
지져지지면서도 파워아머가 억지로 제 외피를 수복하고 거인의 힘이 내 몸을 유지한다. 금방이라도 수십갈래로 찢겨질 것 같은 가운데, 내 몸이 튕겨난다.
쿠와아아아아
내 몸이 지나는 궤적에서 공기가 울부짖고, 내 전신의 저릿함이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려온다. 겨우 의식을 차리고 몸을 뒤집어 낙법을 취했다.
쿵, 쿵, 으직!
나무 서너개를 부수며 쏘아진 몸뚱이를 겨우 멈춰세운다. 바닥에 닿고서 튀어오르는 먼지와 함께 구른다. 그 모든 지랄이지나고 나서야 겨우 일어섰다.
가속은 아껴야 했다. 정말 몸이 반토막이 나려는 게 아니면 최대한 아껴야 한다. 거검을 고쳐쥐고 달려들려다가, 그대로 멈춰섰다.
가을의 마녀는 내가 일어나는 그 잠깐 사이에 튕겨져나간 나를 따라잡았다. 나를 향해 날아오는 가을의 마녀와 그녀의 짙은 미소를 보고서 이를 악물었다.
번개로 가속하지 않아도 신은 신, 저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질량 하나 존재하지 않는 번개의 거창은, 나를 쪼갤 준비를 하며 곧장 휘둘러졌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적의 동작으로 거검을 내리찍는다.
콰아아아앙!
번개의 창날에 닿는 순간 나는 이것이 실책임을 깨달았다.
질량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벼락의 응집체. 당연히 힘을 겨루거나 막아낼 것도 없었다. 거검에 닿는 순간, 창첨의 일렁임은 수천갈래로 갈라지며 전류를 흘렸다.
다행히 찍어내리는 궤적을 따라 흩어지기 때문인지, 내 몸엔 닿진 않았다. 어마어마한 고압전류로 인해 달궈진 공기가 후끈하게 주변을 휘감고, 난데 없이 일어난 돌풍에 내 몸이 떠올라 공중에 떴다.
아차, 공중은 안된다. 가을의 마녀가 떠오르는 나를 따라 고개를 들어올리더니 창을 돌렸다. 다시금 나를 향해 올려쳐지는 거창. 이건 써야만 했다.
투화아아악!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있을 수 없는 움직임으로 뒤로 가속해, 창날을 피해낸다. 겨우 스친 창에서는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뒤로 가속한 그대로 지면에 내려앉으니 발목이 시큰거렸다.
"씨발."
아직 저릿대는 것이 전류의 영향인 듯 보였다. 번개로 인해 일년에 몇명이나 죽는댔지?
지구에서의 기록이지만, 그것을 감안하자면 저 거창의 납득이 안 가는 위력을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입술을 짓씹으며 숨을 고르니, 가을의 마녀가 창을 한창 돌리다가 바로 잡았다.
횡으로 뻗은 창날 너머에서 새로운 열원으로 인한 피해가 생기고 있었다. 수목선이 타들어가는 것을 보며, 문득 게임 속 가을의 마녀의 보스룸이 떠올랐다.
새까맣게 탄, 단단한 나무들과 프랙탈 문양이 남발하는 파괴된 얇은 바위산의 땅. 영역이랄 것도 없는 폐허. 어째서 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차리자 탄식이 흘렀다.
저 공격은 난해했다.
질량이 없으니 내 자랑인 거력으로 압도할수 없다. 내 무기가 쓸모 없는 셈이었다.
공격 범위가 넓음에도 느리지 않고, 당연히 뒤따라야 할 준비 동작이나 공격 후의 딜레이가 없었다.
생각 이상으로 빡셌다. 게임에서 보았던 거라면 차라리 미리 대비라도 했겠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술이었다.
"그건 무슨 기술이지? …구전되는 것과는 다른데."
가을의 마녀는 금방이라도 나를 쪼갤듯 창을 휘두르던 때와는 달리,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겨울의 폭군을 보고 만들어낸 것이란다. 아가가 읽었던 구전에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 내가 이 기술을 만들어낸 것은 2백년 정도 밖에 안됐으니."
하, 헛웃음이 흘렀다. 이걸 누가 보고 2회차라고 한단 말인가. 탄식을 자아내면서도, 발목을 돌려 저릿함이 사라진 걸 알아차렸다.
"그럴 듯한 계책은 만들었느냐? 어미는 몸이 달아 더 기다리기 힘들구나."
여유로운 모습. 그야말로 여유 그 자체인 모습으로 나를 응시하던 가을의 마녀는, 일부러 기다려줬노라고 고하더니 창을 고쳐쥐었다.
"글쎄, 어떨 거 같은데?"
"내 공격을 유심히 보더구나. 뭔가 알아냈을테지. 그럼 아가가 가진 걸 활용하여 활로를 찾지 않겠느냐?"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잠시 잊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거검을 고쳐쥐고, 대답했다.
"어, 안 그래도 그랬지. 그래서 지금부터 한 방 먹여주려고."
"갸륵한 것."
가을의 마녀는 뿌듯한 미소를 짓더니, 창을 내게 겨누었다. 취해진 자세에서는 왠지 모를 살기가 떠돌았다.
나는 그 창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 창에는 질량이 없다. 그래서 연격에 무척이나 특화되어 있다. 힘겨루기로 밀어낼 수도 없고, 방어도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향해지는 공격에는 무력했다. 질량이 없어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 그건 방금 전 내리치는 것으로 확인했다.
물론 가벼운 공격이라면 저 창이 동반하는 폭풍과 뇌전으로 밀어내겠지만, 질량이 크고 힘이 강력하다면 그럴 수 없을 터.
그때 만들어질 빈틈을 노리는 것이 내 유일한 활로였다. 숨을 내쉬고서, 내가 가진 가장질량이 큰 것을 높이 들어올렸다. 거검이 햇빛을 난반사하며 섬뜩하게 빛났다.
가을의 마녀는 그런 나를 보고는 흥미로운 듯 고혹적인 미소를 짓더니, 창을 내찔러왔다.
쿠와아아아아아!!!!
과연, 본래 창은 휘두르는 게 아닌 찌르는 무기. 범위를 위해 휘둘렀으나, 갑작스러운 찌르기로도 그 거체는 충분한 위험이었다.
잘못 맞으면 그대로 반으로 갈라진다. 나는 마지막 가속을 써서 뒤로 빠졌다. 자세를 숙이거나, 뛰어오른들 연격의 희생양이 될테니까.
투화아아악!
가을의 마녀가 짓고 있던 미소에 의문이 떠오른다. 의아해하는 기색이 떠오른다.
하지만 내 계책을 눈치채진 못했다. 가속은 내 자세의 변화를 촉구하지 않는다. 그 점이 좋았다. 미리 자세를 잡고 힘을 끌어모으고 있었다면,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뭔가를 벌일 수 있었으니까.
나는 거검을 냅다 집어던졌다.
콰아아앙!
던지는 것임에도 소리는 폭음이었고, 내 거인의 힘과 영혼 발화의 능력치 상승이 겹쳐진 투로는 명확하게 난폭하며 강력했다.
거기에 폭군의 검 특유의 높은 질량이 더해지자, 날아가는 궤적은 느려진 인지속도에도 쫓기 힘들었다. 그래서 던진 즉시 그 궤적을 쫓아 달려들면서 도끼를 뽑아들었다.
파공성이 울리며 나아가는 거검을 보고서, 가을의 마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렇지, 아가는 검사조차 아니었지! 내가 실책했구나!"
그 환한 미소가 황홀경으로 바뀌고, 그녀는 창날에 둘러진 번개를 거두었다.
스르륵, 하는 소리가 날 법한 모습과 함께 사라진 벼락이 그녀의 몸으로 스며들고, 그녀는 꼬리를 세차게 흔들면서 창으로 거검을 내리찍었다.
투우우웅!
튕겨난 거검이 바닥에 쳐박히고, 창을 휘두른 가을의 마녀가 창대를 제 몸에 대고서 몸을 회전시키더니 자루를 높이 들어올린다.
그 위로 겹치는 내 도끼. 내가 내리찍은 도끼와 자루가 부딪힌다.
쩌어어어엉!!!
"…쳇."
충격파가 둥글게 퍼져 흙더미와 타버린 잿더미를 쏘아올리고, 그 사이에서 우리는 열과 뇌전으로 드글거리는 무기를 들이댄 채로 이를 갈고, 황홀해했다.
당초의 예상은 이게 아니었다. 거검이 거창에 부딪히고, 뇌전이 주변으로 튀어오르며 시선을 가려줬으면 했다. 그녀가 뒤늦게 창날을 거두면, 바로 그 뒤에서 달려들어서 습격하여 치명상을 먹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을의 마녀는 눈치챈 건지, 그 전에 번개를 거둬 시야를 확보했다.
노리고 했다면 꽤나 철두철미한 움직임이었다.
역시 우습게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거리를 좁혔으니, 이제는 내가 유리했다. 그 창날을 만들어내려고 하면 바로 공격을 때려박으면 그만이었다.
도끼를 찍어누르니, 가을의 마녀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흥분한 듯 달아오른 미소를 지었다.
"굉장한 힘이구나… 그렇지, 아가. 투사라면 자기가 능히 가능한 것을 중심으로 움직여야겠지."
짙은 만족감을 띄는 미소에, 내가 입가를 틀어올리니, 가을의 마녀가 속삭였다.
"그럼 나도 답지 않은 짓은 그만두겠노라."
뭐?
내가 잠시 의아해하는 순간, 벼락이 난데 없이 뿜어져 나왔다.
허나 그 벼락은 날 불태우지도, 흔적을 남기지도 않았다. 섬광과 함께 내 앞과 전방에서 가을의 마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뭐?"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남긴 스파크가 지면을 훑고, 나는 느려진 세상 속에서 갑자기 짓쳐드는창날을 보고는 도끼를 들어올렸다.
쩡!
내 오른쪽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 창날은, 가드하는 순간 도끼 위로 뇌전을 흘렸다. 내 손목이 저릿하게 마비되더니, 내 몸이 그대로 튕겨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씨발."
바닥을 구르다 자세를 바로 잡으니, 가을의 마녀는 내가 딛고 있던 자리에 서있었다.
전신에서 번개를 줄기줄기 흘리는 와중에, 두 눈은 섬전처럼 백열로 점멸하고 있었다.
눈에서 튀어오른 스파크가 주변을 떠도니, 내가 도끼를 손 안에서 돌리다 바로 잡았다.
이것이 가을의 마녀의 진심이었다.
그녀의 본래 특기인 스피드 특화였다.
나는 쉽지 않을 것을 짐작하며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