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26화 〉가을의 마녀 (226/274)



〈 226화 〉가을의 마녀

나는 눈 앞에 떠있는 메세지를 보고서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감은 눈꺼풀이 아릿하긴 했지만, 다시 뜰 때에 눈 앞에 떠있는 메세지가 바뀌진 않았다. 오히려 메세지는 또렷하게 떠있었다.

그래서 나는 눈을 비볐다. 눈에서 찔끔 눈물이 솟도록 비비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보고, 눈을 끌어올려서 다른 메세지를 보았다.


[신을 죽이고 게임을 클리어 하십시오. 4/5]


[권능 - 가을의 마녀를 획득합니다.]


메세지가 나한테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고 있었다. 결국 내 무익한 시도는 아무런 가치도 없이 사그라들었고, 결국 그 메세지를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권능 가을의 마녀.

해체해서 읽어보자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권능은 내가 자주 쓰는 그것들이고, 가을의 마녀는 방금 내가 죽인 것이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붙어읽으니 무척이나 이상했다.


권능으로 습득한 것이 가을의 마녀라고?

무슨 권능인데?


뭐하는 권능인데?


왜  권능인데?


혼란스러워 눈을 깜빡이면서도 생각했다.


다른 신을 죽였을 때에도 권능을 손에 넣은 적이 있긴 했지만, 그 권능에서 신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담겨 있진 않았다.


봄의 순례자는 실상 내가 막타를 친 게 아니었고, 여름의 도살자는 화신 강림을 남겼다. 군주들의 아버지는 뭐가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사례가 하나 밖에 없는지라짐작이 쉽진 않았지만, 어쨌든 다른 권능들로 눈을 돌릴 수는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상했다.


내가 가진 권능은 하나 같이 신의 이름이 직접 담기진 않았다.


화신 강림, 거인의 힘, 불굴의 정신, 화염 부여, 영혼 발화.  기능에 충실한 이름일 뿐, 신의 이름이 직접 담겨져 그 기능을 추리할 수도 없게 하진 않았다.

그럼 도대체 이 권능은 무엇인가. 떠있는 메세지를 물끄러미 보지만, 그 기능이 떠오르진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는  단 하나였으나, 그건 설마하니 아니겠거니 하면서 머리를 흙바닥에 쳐박았다. 진탕에 가까운 흙이 물컹이고, 헬멧이 주륵 열려 공기를 받아들인다. 타버린 냄새가 역했다.

때마침 내 몸을 두르고 있던 후광이 걷히며, 영혼 발화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탈력감도 찾아와 내 몸을 잠식했다.


"…윽."


여전히 적응 안되는 감각이었다. 그야말로 마비라도 되는 듯한 감각. 사고라도 당했다가 일어난  몸에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았다.


아, 모르겠다.


일단 사용해보면 알겠지만, 굳이 이걸 사용해서 리스크를 지고 싶진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최악이 맞다면, 그야말로 끔찍할테니.


차라리 사용하려거든 몸이 회복된 후에 하는 게 맞았다. 피가 흘러나오는 등짝이나 창에 꿰뚫린 배 따위가 아릿한 가운데, 갑자기 눈 앞에 다른 메세지가 떠오르며 귓전에서 음성이 울렸다.


[가을의 마녀가 발동됩니다.]


…뭐?

이런 씨발.


몸을 일으키려는데 내 몸뚱이는 상상 이상으로 병신인 상태였다. 일으키려는 동작 하나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나는 얼굴부터 바닥에 쳐박혔다. 입에 흙이 들어오는 듯 했지만, 그따위 것이 중요하진 않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달리 있었다. 엎어진 채로 몸을 일으키려고 팔에 힘을 주는데,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그건 발소리였다. 맨발에 가까운, 가벼운 신발이 내는 소리였다. 바스라지는 잿더미의 소리였다. 그 위로 사락대는 천의 소리 역시 들려오고, 나는 숨을 들이키면서 눈만 끌어올렸다.

그 자리에는 가을의 마녀가 서있었다. 길게 늘어진 드레스의 밑단 너머에는, 그 어떤 의복도 보이지 않았다. 매끈하게 뻗은 다리 정도만이 보이고 있었다.


아, 좆됐네 씨발.


"…진짜? 진짜 이럴 거냐?"

나는 무의식적으로 나오려는 욕설을 눌러담으며 뱉어냈고, 가을의 마녀는 눈웃음을 지었다.

"놀랐느냐?"

씨발, 놀라지.

그리고 좆같기도 하고.

닥쳐올 미래를 생각하며 이를 가니, 가을의 마녀가 그런  눈을 물끄러미 보면서 슬쩍 몸을 숙였다.

쭈그려 앉은 탓에 접혀진 드레스 자락이 그녀의 바디라인을 강조하고, 슬쩍 열려진 다리 사이로 속옷한 올 없는 음부가 눈에 들어왔지만 지금은 그깟 거에 눈이 갈 때가 아니었다.

가을의 마녀는 한참 내 시선을 음미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곰곰히 생각해보았지. 뭘 줘야 아가가 나를 쓰러트린 것을 기뻐하고, 아가의 여정에 도움이 될지."


호의가 가득한 목소리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니, 가을의 마녀가 자세 그대로 턱을 괴었다. 큼직한 가슴이 팔과 무릎 사이에서 눌려 형태가 변했다.


"내가 가진 권능 따위, 네게 쥐어줘봤자 손가락이 늘어나는 정도의 편리함 밖에 없겠더구나. 익숙해지면 나름 즐거울 수도 있고 나름의 용처도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 과정은 힘겹고 번거롭지. 무엇보다 그다지 쓸모도 없고."

손가락 6개는 쓸모 없지 않겠느냐? 하는 말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가을의 마녀는 실실 웃었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선택지는 하나 밖에 없겠다고 여겼단다."

뭐를.

너무 건너뛴 말에 내가 고개를 옆으로 틀어 뺨을 흙더미에 쳐박은 채 말했다.


"무슨 말인데."


"아가에게 줄 가장 합당하고도 합리적인 포상은,  어미의 소유권이라는 것이지."


…무슨 말인데 진짜.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인상을 찌푸리니, 가을의 마녀의 보드라운 손이 뺨에 문질러졌다.

아오 씨발.


"제 새끼에게 인색한 어미는 없는 법이지. 그렇지 않느냐?"

"엄마 없어서 몰라, 씨발년아."

툭 쏘아붙이는 말에 가을의 마녀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럼 내가 아가의 첫 어미구나. 기뻐라."


씨발 이걸 이렇게 받는다고?

어이가 없으려니까, 가을의 마녀는 나를 안으며 일으켰다.

사지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는  보자니 부상이 심한데다 영혼 발화의 패널티가 겹치는 모양이었다.

"아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포상이니, 부디 만끽하거라."

뭐를?


빨통을?


확실히 촉감은 개쩔긴 했지만, 그거라면 메이라는 대체제도 있었다. 여력으로 반항하기 위해 몸을 틀려는데, 가을의 마녀가 내 피로한 몸뚱이를 제 품 안에 안더니 등을 토닥였다.

마치 해치려는 의사가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토닥이고 등을 쓸었다.

"이런 씨발."


탈진 상태라 저항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다름이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그걸 받고 있으니, 가을의 마녀는  등을 슬슬 쓸면서 제 가슴에 내 가슴팍을 눌렀다.

맞닿은 채로 맡는 가을의 마녀의 체향은, 뭔가 동물 특유의 꼬순내랑 엇비슷했다.

그 냄새가 먼저 내 비강을 찌르니 뒤이어 체온과 부드러운 살결 특유의 촉감, 은은하게 몰리는 하체의 열기와여체 특유의 은은한 향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한바퀴 돌아 그 향긋한 것에 뒤섞인 꼬순내 따위가 느껴졌다.

그에 나는 눈만 떨궈 가을의 마녀 발치를 보았다. 흙과 풀들은 그녀가 밟고 있는 탓에 짓눌려 있었다.

그게 의미하는  하나였다.


"너… 환상이나 정신이 아니라 실물이냐?"


"그래, 아가의 신성에 빌붙는 형태이나 내 형체를 유지했지.  권능 전부를 집약하여 하나로 만드는 탓에 약해진 면도 없지 않고, 권능을 쓰거나 하는데 아가의 신성에 의존하게 되겠지만… 나름 해볼만한 시도였지. 그렇지 않느냐, 나의 사랑스런 아들아."

씨발, 그게 된다고?


자기자신을 권능으로 줄여서 자기를 죽인 새끼한테 빌붙는 게?

 캐물으려는데, 그보다 먼저 가을의 마녀의 손가락이 내 입술 위에 닿았다.


"쉬잇, 아가는 피로하고 소모되었으니, 질문은 나중에 하자꾸나. 지금은 쉬고 움직일 때이니."


대답하려고 하지만, 가을의 마녀는 여전히 제 검지를 고집스럽게 내 입술에 덧대어 말을 막았다. 불만스럽게 입을 꾹 닫으니 그제야 손가락이 거둬졌다.


"아가가 지면에 쑤셔넣은  애병만 회수하고서 도시로 돌아가자꾸나."


그 말에 슬쩍 고개를 돌리니, 확실히 내가 꽂아넣은 창의 자루 끝자락이 슬쩍 보이고 있었다.


*


나는 창을 뽑아든 가을의 마녀에게 부축을 받으며 거닐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겨우 돌아와 간신히 걸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자세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가을의 마녀의 번개 탓인지, 아니면 영혼 발화를  상태에서 부상을  입었기 때문인지는 확신할  없었다.


 어깨에 제 팔을 두르고서,  큼직한 젖가슴을 내 옆구리에 붙이며 부축하던 가을의 마녀는 나를 돌아보며 무척이나 뿌듯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마 전에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제 목표는 시련을 이겨내고 세상을 구할 새끼를 만드는 거랬던가?


얼추 그런 뉘앙스였는데, 그걸 감안하면 지금 가을의 마녀는  성공작을 마주하고 있는 셈이었다.

저 표정이 진짜 대성한 아들을 보는 것이라는 거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었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거, 네가 권능이 됐다는 거. 어떻게  건데?"


"군주들의 아버지, 그 아이가  것을 보고 착안했지.신성을 끌어올려 마력으로 치환하는 것을 보자니, 못할 것도 없겠더구나. 역으로 작용하긴 했으나…."

그게 뭔데 씨발.

신성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나라서, 설명을 요구하는 듯이 바라보니 가을의 마녀는 뿌듯하게 웃었다.

"이 어미를 너무 띄워주는구나,아가. 학습은 시련의 기본 요소이니, 학습 없는 시련은 없고, 시련 없는 학습은 없는 법. 그를 관장하던 신으로써는 당연한 작용이란다."

 시선을 칭찬으로 여긴 것 같았다.

아니 씨발, 어케 했냐니까.

캐물으려는데, 어차피 들어봤자 쓸모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거 가지고 뭐하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근데 왜 그렇게 했는데?"

가을의 마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더니, 잠시  기품 있는 얼굴을 내게 돌렸다.


"아가, 내가 가진 권능 중에서 아가가 갖고자 하는 것이나 필요로 하는 것이 있었느냐?"

나는 있다고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생각해보니 가을의 마녀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유사하게 할  있었다.


그 압도적인속력은 탐나긴 했지만, 그 외의 것들은 그렇지도 않았다.

대부분 내가 할 수 있거나, 아이템으로 할 수 있는 것들 뿐이었다.


새로 얻어봤자 익히느라 머리만 복잡해진다. 수가 늘어나는 건 좋으나 고르는데 시간이 걸리면 문제가 생긴다. 싸움에서 고를 시간 따위는 없으니.

아까 가을의 마녀가 비유했던대로, 손가락이 여섯 개가 되는 정도의 편리함 밖에는 없어보였다.

"그러니 나 자체를 주고자 한 것이란다. 무엇보다, 아가는 어미가 없지 않느냐?"

"그거랑 뭔 상관인데, 미친년."


인상을 찡그리며 뱉으니, 가을의 마녀는 흡족하게 웃었다.


"어미가 없으니 어미를 주면 충분한 선물이겠노라고 생각했지."

진짜 개미친년이었다. 기가 차서 하, 하는 소리를 뱉으니 가을의 마녀가 눈을  접어 고혹적으로 웃었다.


"이 어미도 아가의 자태와 모습이 마음에 들어, 어여삐 여길  있겠더구나."

개인 욕망이네 씨발.

내가 대답하지 않으니, 가을의 마녀는 방실방실 웃다가 나를 부축하던 팔을 끌어당겨 껴안다시피 했다.


그렇게 껴안긴 채로 부축받던 나는, 저만치에서 도시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유도 있는 거 안다."

가을의 마녀는 불현듯 뱉어낸 말에 놀라운지 눈썹을 들어올렸다.

"어머, 눈치가 빠르구나."

당연하지.

"내가 신으로써 죽었으니,이제 겨울의 폭군, 죽음의 주인이자 멸망의 지배자가 움직이겠지."


내가 그래서? 하는 표정으로 물으니, 가을의 마녀는 대답했다.


"아가를 도울 이 하나 쯤 더 있어도 괜찮지 않겠느냐?"


 물음에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낸 건,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통수를 그렇게 쳐맞았는데 의심을 안 할 수가 있나. 가을의 마녀는 그런  의심을 읽어냈다.

"나의 아들아,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좋단다. 나는 네 것이니,  손에 쥐어진 무기를 의심하는 전사는 모양이 빠지지 않겠느냐?"


무기라. 의미심장한 발언에 물었다.


"넌 가을의 마녀가 맞냐? 가을의 마녀가 남긴 엇비슷한 무언가는 아니고?"


"어떤  같으냐?"


가을의 마녀가음흉한 표정으로 웃길래, 나는 잠시 그 눈빛을 바라보았다.

시험하고자 하는 기색이 가득하고, 미소에서는 불온함이 감돈다. 명확하게 가을의 마녀 본인이었다.

그럼 이 방식에 대해서생각해봐야 했다.


아마 여름과 봄이 내 정신세계 같은 것에서 대화를 나눴듯, 영혼 같은 걸 권능의 형태로 감싼 거겠지.

세세한 원리는 모르는 채 추론하니, 이게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네가 내 무기를 자처하겠다면, 팍팍 써줄테니까 나중에 딴 소리나 딴 마음 먹지 마라."

가을의 마녀는 내 호기로운 발언에 생긋 웃었다.


"기대하마."


나는 그렇게 그녀의 팔에 붙들린 채, 도시로 들어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