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화 〉겨울의 폭군
나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시장에 팔려나온 작물 같은 기분이었다.
나를 보면서 외치는 이, 내 앞에 마주보게 선 채로 방패와 칼을 들어올린 이에게 외치는 이까지.
다양한 이들이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내가 딛고 선 돌바닥이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식어갔다.
내 손에 쥐어진 나무막대를 손 안에서 굴렸다가, 가볍게 쥔다. 힘조절을 못하더라도 심각하게 다치진 않을테니, 감각을 익히는데는 최적이었다. 쥐었다가 펴니 나무막대가 기긱 하고 울었다.
대적하려고 검과 방패를 들어올린 기사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내 눈에 마주치는 그 벽안에는 선명한 공포가 떠돌았다. 열린 투구라서 그런지,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하기야, 긴장할만도 하지.
기사의 눈동자가 흘긋 아래를 보았다. 아래에는, 이미 쓰러져간 기사나 군주들의 병장기와 갑주 조각 따위가 박살나서 흩어져 있었다.
내가 직접 부순 것들이었지만, 새삼 내려다보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중에서는 아이템에 준하는 수준인 물건들도 있었고, 일반 농민들은 평생을 벌어도 못 벌만큼 비싼 갑주들도 널려 있었으니.
이것도 전부 자원인데.
한숨을 내쉬고서 막대를 들어올려 기사를 겨누니, 기사가 움찔했다가 얼굴을 붉히며 검을 부여잡았다. 도발이라고 받아들인 것인지 기사가 중심을 낮추는 게 보였다.
까딱까딱흔드는 막대에, 결국 기사는 인내심을 잃고 달려들었다.
폭음 하나 울리지 않는 돌격에 갑주가 철컥거리고, 내게 달려오는 기사는 검을 뒤로 숨기듯 들어올리더니 내리찍었다. 크게 움직인 손목이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검을 휘둘렀다.
내 머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공격은 충분히 매섭고 빠르다. 궤적은 비록 정직했으나, 이정도 속도면 어지간한 일반인은 받아낼 수도 없어보였다.
문제가 있다면 내가 일반인이 아니라는 거였다. 페인트랄 것도 없어보이는 직선적인 공격을 충분히 눈에 담다가, 슬쩍 물러났다. 내 앞 허공을 두들기며 지나치는 장검에서 바람 소리가 울리고, 다시 들어올려진다. 곧장 찔러오는 장검.
나는 그 찔러오는 궤적에 막대를 끼워넣으며, 손목을 슬쩍 움직여 털어냈다.
쩡!
아, 씨발.
힘조절은 또 다시 실패했다. 막대와 함께 장검이 부러지고, 부숴진 파편들이 어지럽에 튀어 기사를 위협했다. 기사는 제 갑주를 두들기는 장검파편 때문에 대응하지 못했다.
흠칫한 기사가 물러서려는 찰나, 나는 나무막대를 놓고서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풀파워면 의도치 않은 육편파티가 될테니, 적당히 힘을빼서.
가볍게 툭 치듯 주먹을 휘둘러, 갑주의 가장 두꺼워 보이는 가슴께를 두들겼다.
쩌어어엉!
"커헉…!"
가슴팍 갑주는 우그러졌고, 그걸 쳐맞은 기사는 몸을 활처럼 휘게 하며 뒤로 쏘아졌다. 나가떨어진 기사가 바닥을 구르더니, 쿨럭쿨럭 하는 소리를 흘리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씁, 나름 힘 뺀다고 뺀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거인의 힘은 끄고 불굴의 정신만 킬 걸 그랬나, 했으나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어야 나대지 않을 거라는 샤론의 말이 떠올라 생각을 치워냈다.
바닥에 떨어트렸던 막대를 발끝으로두드려 가득 쌓여있던 막대 틈으로 굴리니, 내 옆에 서있던 겨울의 신부가 내게 새 막대를 내밀었다.
나는 그 새 막대를 집어들고서, 소리쳤다.
"다음, 없습니까!"
금방이라도 죽이라며 소리를 지를 듯 했던 난민들도 입을 다물고, 한 켠에 모여있는 부상자들―주로 기사들과 귀족이었다.―도 조용해진 가운데, 나는 김이 빠져 숨을 내뱉었다.
조용해졌던 난민들이 다시 시끌시끌해지기 시작했다. 복작대며, 그들은 즐거운 광경을 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행복해 했다.
그래도 마냥 쓸모 없는 경연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나는 내가 쓰러트린 귀족들과 기사, 대전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하나 같이 골골대면서도 내게 여러 표정을 보내오고 있었다.
보통 귀족의 발단은 힘이기 마련이다. 이런 씹창난 세계일 수록 그건 심할테고, 힘이 곧 권력인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귀족 쯤 되면 당연하다는 듯이 무기술을 갈고 닦기 마련이고, 일국의 왕이나 거대한 영지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면 그 경향은 강하다. 힘이 곧 통치의 기반인 경우도 많다.
왕족이라면 정통성이라던가 이것저것 따지겠지만, 고작 하급 귀족이나 토호 정도에 불과하다면 그렇지도 않을 터였다.
나는 어깨에 막대를 얹어 톡톡 두드리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비싸보이는 갑주나 의상을 두른 이들은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내 시선에 쫄아들었다.
이런 행사를 벌인 목적은 그래서였다.
안 그래도 귀족 비율이 꽤 되는 난민들인데, 그 중에서 누군가는 분명 이 거대한 도시와 비옥한 토지, 첨단이라고 할 수 있을 설비를 보고서 탐을 낼 게 뻔했다.
그렇게 권력욕을 내보이며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면, 그걸 사전에 차단하지 못한다면 막상 겨울의 폭군과 싸워야 하는 순간에는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그 모든 시도를 봉쇄하고 한동안은 얌전히 있도록 만들기 위해, 나는 이런 행사를 벌였다.
하지만 그것도 꽤 고역이었다. 그렇게 힘들진 않았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했다.
내가 잘못 후려쳐서 다리가 날아갔던 도일레흐 남작을 떠올리며 가까스로 힘을 줄여서 죽지 않고, 불구가 되지 않도록 손을 쓴다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문득 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권력을 탐한다면 무기를 꺼내들고 앞으로 나오라! 네 권력을 얻어낼 용사를 기용해도 좋다! 누구든 내게서 승리한다면 이 도시는 물론이고 권좌를 주겠다! 제 주인께 영광을 바치고자 하는 이도 좋다! 나를 죽여도 상관 없다! 이는 순백교단과 가을, 여름의 교단 모두 보증하는 일이다!'
그러니 내빼기엔 뭣했다.
당장에 내가 선을 그어둔 원 밖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기사단장, 가을의 마녀, 성녀가 있었으니 물러서면 모양이 살지 않았다. 내 정통성 자체가 존나 흔들릴테고.
그래서 나는 내가 말했던대로 권력을 탐내는 모든 귀족들의 대전사는 물론이고 귀족 본인, 부귀영화를 노리고자 하는 기사들까지 모두 상대하게 되었다.
내가 부러뜨려 먹은 귀족, 기사들의 무기만 한데 모아 녹여도 성문을 새로 달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내게 더 이상 덤비고자 하는 이들은 없어보였다. 내 어깨를 두드리던 막대를 대충 내던졌다.
"더 이상 도전하고자 하는 이가 없다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한동안은 내 통치와권력에 부디 불만을 가지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아니면 조져버린다고 말할까 싶어 흘긋 귀족들을 바라보니, 그들은 내 기색에 쫄아서 덜덜 떨거나 제 부상을 더듬으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언젠가 다시 개최할테니 그때를 노려도 좋겠지. 이만 해산해라!"
내가 외치는 말을 마지막으로, 귀족들이나 난민들은 부산스럽게 대화를 나누거나 자리를 뜨거나 하며 광장에서 멀어져갔다.
그 광경을 멀거니 바라보던 나는 내게 다가와 슬쩍 옷과 외투를 내미는 겨울의 신부에게서 옷을 받아들어 껴입었다.
간단한 셔츠를 헐벗은 상체에 두르고, 그 위에 중세풍 털가죽 옷 같은 걸 둘렀다.
난민들과 귀족이 떠나는 빈자리로, 경비병들이나 성전사들이 걸어와 자리를 치우는 것을 보며, 나는 슬쩍 자리를 떴다.
이 뒤에도 일이 많았으니.
자리를 뜬 내가 도달한 곳은 난민 집단의 대표들을 그러모은 회의장이었다. 그들은 한데 모여서 내게 인사를 하거나 감사를 표했고, 나는 그런 그들을 만류하며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의 주제는 별 거라고 할 것까지도 없었다.
겨울의 폭군을 직접 목격하거나 들은 게 있다면 정보를 달라는 것과 거인에 대한 정보와 함께 생김새에 대한 설명을 해달라는 것.
난민들은 별 이견 없이 내게 협조했고, 나는 그렇게 거인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함께 겨울의 폭군에 대한 뜬소문들을 수집했다.
정보는 이렇다할 큰도움이 되는 것은 없었으나, 2회차의 거인들이 게임에서의 거인과 차이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점으로도 충분해보였다.
적어도 전략을 수립할 순 있을테니까.
그 뒤에는 간단한 절차였다. 건강하고 사지 멀쩡한 이들에게 경비대에 들어갈 기회를 주고, 그 기회를 제 난민 집단에 뿌리라고 지시한 후에는 회의실을 나서 사전에 지시했던대로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모여있는 숙련병과 용병 등 병역에 종사한 이들에게 우선권을 주어, 그들에게 조금 더 높은 자리를 약속하며 경비대에 들어간다면 보상을 약속했다. 대부분이 동의했으나 동의하지 못하고 뻗대는 이들도 있었다.
어쨌거나, 부족했던 병사의 수는 불어나고 있었다. 내 병사가 아닌 이들도, 본래 병사가 아닌 이들도 병사로 탈바꿈되었다.
그 모든 일정을 소화했을 때에는, 해는 서서히 지고 있었다. 찾아오는 쌀쌀함에 내 팔을 쓸어내리고서 성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마주치는 난민들은 물론이고 경비병들, 교단의 사람들마저도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표했다.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성벽으로 향하는 길은 찾아오는 추위에 식어있었다.
겨울의 신부는 그 모든 일정과 내 소소한 일탈에도 군말 없이 뒤따랐다. 나와 그녀는 마치 몇년은 된 듯 느껴지는, 이 도시에서 처음 겪었던 데이트를 떠올리며 성벽을 걸어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난민들은 한결 같이 내게만 시선을 보냈다. 내 바로 뒤에 있는 겨울의 신부는 인지하지 못한 듯 했다.
나는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창백한 성벽으로 올랐다.
넓찍한 계단을 올라 내려다본 도시는 북적대고 있었다. 받아들인 난민들이 적지 않은 걸 감안하면 당연했지만, 한 편으로는 여전히 도시의 여러 부분은 어둑하고 인기척마저 떠돌지 않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게 내가 부족했던 탓이라고 생각하며 왠지 가슴 한 켠이 답답하여 숨을 쉬기 힘들었다. 눈을 질끈 감고서 숨을 고르니, 겨울의 신부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한결 같았다. 처음 이 도시의 아래의 하수구에 봤을 때부터,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변함 없는 모습을 눈에 새기며 몸을 돌려 도시 밖을 보았다.
드리워진 붉은 장막이 쌀쌀한 공기 사이로 이율배반적인 색채를 흩뿌리고, 지평까지 뻗은 산과 숲의 조화는 내게 침착함을 전해주었다.
나는 열심히 했다. 도시 인근에는 괴물 하나 나오지 않는다.
아니면….
내뱉는 숨이 길게 이어져, 입김이 되었다. 그 늘어지는 숨결에 성벽에 기대어 안도했다.
"피곤하지 않으신가요?"
문득 겨울의 신부가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말을 찾다가 픽 웃었다.
"그렇죠, 피곤하네요."
겨울의 신부가 조용히 있는 와중에, 덧붙였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는데."
겨울의 신부는 동의하는 건지, 아니면 대답할 말이 없는 건지, 혹은 설득할 자신이 없는 건지 조용했다. 그녀는 조용히 내 옆자리를 지켰다. 그 은은한 존재감은 너무도 옅어,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보였다.
침묵이 감돌았다.
한창 노을을 바라보던 내가 성벽을 짚으며, 넌저시 말했다.
"겨울님의 정체는 뭐죠?"
되묻는 말도, 의아해 하는 음성도 없었다. 그저 조용했다.
그 불편한 적막에 내가 괜히 웃으니, 그 고요함은 나를 반기며 서서히 주변에 어둠을 흩뿌렸다. 싸늘해지는 공기에도 내 몸은 여전히 뜨거웠다. 영혼 발화 같은 권능 때문인지, 거인의 힘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의 무언의 긍정 때문인지는 알 수없었다.
"세계를 돌릴 수도 있으며, 세계를 돌려도 그 기억을 간직하는 사람."
"…."
"마치 세계에 속하지도 않는 듯, 접촉하거나 내가 알려야만 인지되는 사람."
"…."
"그 강력하고 전능에 가까운 신들마저도 인지하지 못하고, 세상의 자연적인 작용인 듯 튀어나오는 괴물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 기척이 너무 옅어 나조차도 자주 놓치고는 하는 사람."
그녀는 여전히 조용했다. 고개를 돌리기엔 두려우면서도 궁금해서, 입을 꾹 닫고 있다가 토해내듯 말했다.
"제가 굳이 정체를 말하지 않도록, 직접 말해주세요."
내 애원과 함께 태양은 져간다. 지평 너머로 넘어가, 그 맨들맨들하고 타오르는 머리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 싸늘함 사이로 섞여있는 창백함. 성벽에 기대니 피부에 닭살이 돋는 게 느껴졌다.
기척도 없이, 겨울의 신부는 내 옆에 서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슬픈 듯, 기쁜 듯 애매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은 알아줬으면 했으나, 알지 못했으면 하는 이의 표정이었다. 복잡한 두 가지의 욕구가 동시에 이뤄지며 부정당해서, 슬퍼하며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다그치려던 그 어떤 시도도 목청 너머에서 나오지 못하고 녹아 사라지고, 둔중하게 내려앉는 가슴팍의 감촉에 입을 달싹였다.
나는 겨울의 신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두 눈을 감은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언제나.
"…창조신이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죠?"
결국 그녀는 굴복했다. 비스듬히 내린 고개에, 짓씹는 입술에, 제 손목을 그러쥐는 손길에, 그녀는 대답 하나 없이 긍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