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화 〉겨울의 폭군
겨울의 신부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답하려고 했지만, 차마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제 팔을 움켜쥔 채, 안 그래도 하얀 손이 더욱 하얗게 보일 정도로 강하게 쥐고 있었다.
덜덜 떠는 모습에서는 공포가 미약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내가 할 행동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노을을 등지며 성벽에몸을 걸치니, 겨울의 신부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굳게 걸어닫은 두 눈 위에는 그 어떤 기척도 없었다. 눈동자를 굴리지 않고도 그녀는 나를 응시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말씀드릴까요."
겨울의 신부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부터 말해야 하려나… 사실 저도 겨울님이 창조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건 아니예요. 꽤 많은 단서가 있었고, 본인도 알아주길 바라시는지 제게 힌트를 남기시고는 했으니까요."
"…네에."
"우선 4신들이 창조신을 찢어죽이고 그 신성을 탐했다는 부분 때문이었어요. 정확히는, 그 부분에서 결부시켜서 생각할 수 있는 신성에 대한 제 얄팍한 지식 때문이었죠."
신성은 곧 생명이다. 생명을 신성으로 바꿀 수도 있고, 신성을 가진 존재들은 생명력이 더욱 강해 강대한 신체 능력을 지닌다.
그리고 그렇게 강대한 생명이자 신성을 가진 존재는, 눈에 띄지 않더라도 신격과 괴물들이 눈치챌 수 있기 마련이다.
괴물들을 상대하면서 특히나 느꼈던 것이지만, 괴물들은 인간의 생명 내지는 신성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는 듯 싶었다.
처음 의심했던 것이 확신이 된 계기는, 카타콤에서의 기괴한 거미를 상대하면서였다.
놈은 시각 정보 하나 없이 나를 쫓아다녔고, 성유물에 집착했다.
신성을 그득히 담은 성유물을.
"그래서 생각했죠. 창조신이 신성은 물론이고 영과 육을 찬탈당하여 비루해졌다면, 신성이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면, 인간은 물론이고 괴물과 신격들도 눈치채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고요."
겨울의 신부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반응을 보면 정곡이었다.
물론 이것 뿐이라면 확정짓지도 않았을 거다. 내가 짚어낼 것은 더 있었다.
"두번째는 저와 메이가 처음 들을 용어로 대화할 때, 겨울님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겨울님이 사양하고 물러서는 성격이라는 걸 잘 알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과하게 반응이 없었어요. 마치 그 정보들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심지어 대화를 따라가지 못할 법한 때에도 그녀는 별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적절한 때에 도움을 줬다. 다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여기까지라면 플레이어를 돕는 존재라 그런 거라고 무마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겨울의 신부님이 제공해주는 기능들 중… 그 무엇 하나 파괴적인 게 없더군요. 전부 창조적이었죠. 무기를 수리하거나, 장비를 수리하거나, 간단한 도구를 만들거나, 포션을 만들거나.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포션이겠죠."
겨울의 신부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우물쭈물 하고 있었다.
"저는 한 번도 겨울님이 포션을 만드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만들 도구가 없음에도 항상 겨울님은 포션을 만들어주셨죠. 남은 게 이것 뿐이라며 나름 알리바이를 구하려고 하신 적도 있었지만… 나중엔 그러시지도 않았죠. 그나마 고기에 쓰던 해독 시약은 직접 만드시긴 했지만, 그건 대량 제조라서 그런 것 같더군요."
"…."
겨울의 신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채로, 고개조차 끄덕이지 못했다. 나름 잘 숨겼다고 여긴 건지 아니면 어떻게 생각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해치려면 진즉 할 수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그 행동에 적의는 없을테지.
"예전에 여름의 도살자와 싸울 때 도움이 됐었던 빙결석도 그랬었죠. 감옥에서 가져왔다고는 하셨는데… 저는 거기서 빙결석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긴 했는데 최근엔 갑자기 떠올라 수상하더라고요. 제 거검을 달고 다니는 벨트도 그런 물건인 것 같았고요."
역시 그녀의 제작품이었는지, 겨울의 신부는 제 손을 저미는 듯 쥐었다가 펴며 괴롭혔다.
"마지막으로 순백교단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들과 접선하게 된 계기였던 수도원에서의 전투 이후, 그들은 한꺼번에 계시를 받았습니다. 수도원은 물론이고 대성당까지요. 막상 거기서 또 이상하더군요. 수도원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시를 받았는데, 대성당에서는 일부 사람 밖에 계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대성당에서는 정말 간부라고 할 수 있을 이들만 소수 받았고, 의식을 잃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녀가 창조신이고, 그녀가 계시를 내린 거라면, 발원지일 수도원에서 더 많은 이들이 계시를 받은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시스템 메세지가 창조신의 것이라는 건 순백교단의 사제 아무나 잡고 물어봐도 알 수 있을테니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신격들의 위치. 이건… 진즉 해주셨으면 좋았을텐데 뒤늦게 한 걸 보니 나름의 사정이 있으신 거 같고. 마침 겨울님이 기도하고 있던 기둥에도 새겨져 있었죠. 거기서부터 눈치채주길 바라셨죠?"
겨울의 신부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푹 떨궜다.
나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안 말했던 겁니까?"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어올렸다. 표정이 은은하게 슬퍼보이는 것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으나 울진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께서… 비밀로 해달라고 하셨었어요."
…내가?
1회차 얘기인가.
내가 왜 그랬을지, 2회차인 나는 알 수 없었다. 1회차의 기억이 없으니 짐작 정도만 겨우 할 수 있었다.
아마 여정에 방해가 되거나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어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고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요?"
"…당신께서는 이유를 말씀해주지 않으셨어요. 그저 그리 해달라며 제 손을 부여잡고 부탁하셨어요."
그럼 이유를 모를만도 한데.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 싶어 바라보니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제 팔을 쓸었다.
"그럼 다시 묻겠는데… 왜 그런 모습인가요?"
그녀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하길래, 대답이 나오기 전에 말했다.
"취향이 아니라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예뻐서 좋아요. 근데… 왜 그런 모습이죠? 원래 모습인가요?"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신성을 품은 영과 육을 모두 먹혀, 제게 남은 약소한 힘으로 할 수 있는건 이 몸을 만들어내는 게 전부였답니다. 제게 남은 건 오직 이 육신이니… 제게 선택권은 없었어요."
"그 육신에 생명은 없는 겁니까?"
"예에… 전혀 없어요."
전혀?
그거 사실상… 괴물이랑 다를 바가 없는 거 아닌가.
내 표정을 볼 수도 없는 그녀는 내 감정을 어떻게 읽어냈는지 한 발짝 다가왔다.
다가와, 내게 슬금슬금 손을 뻗어오다가 멈추었다. 거두며 접는 손아귀에는 그 무엇도 들려있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벙긋거린다. 그보다 먼저 내가 질문했다.
"저를 데려온건 겨울님입니까?"
"…완전히 제 독단은 아니었어요. 당신께서… 이 세계에 다가오려는 걸 느껴 끌어당겼어요. 저는… 저는 당신께서 저를 만나러 돌아오신 줄 알고…."
슬픈 표정으로 이어나가는 말에, 나는 잠시 입을 닫았다.
창조신도 여성이구나. 하기야, 지구에서 떠도는 온갖 신화에서도 신은 굉장히 인간적이지 않던가.
그럼 의문이 하나 남는다. 그녀가 신이 맞다면, 이 세계는 무엇인가.
"이 세계는 뭐죠?"
겨울의 신부는 잠시 망설였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듯 보였다. 명확히 답을 알고 있으나, 그대답이 내게 충분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그녀는 생각하다가 머리를 흔들더니 고개를 숙였다.
"게임은 맞습니까?"
"아뇨… 정말,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나시나요?"
그녀는 이제는 당황스러운 듯 보였다. 당황스러운 듯한 모습으로, 그녀는 내게 다가와 내 뺨에 손을 얹었다. 얹어진 손이 내 뺨을 쓸어내리니 은은한 한기가 느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께서 처음 여기에 오셨을 때는, 16살이셨어요."
그건 알고 있는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싶어서 그녀를 내려다보니, 겨울의 신부의 옅은 생기를 띄는 입술이 열렸다.
"정말 그 게임을, 10년간 해오셨나요?"
"…어?"
문득 기억을 더듬어보니, 16살 때 이 게임을 했던 기억은 없었다. 이 게임을 처음 시작한 건 발매했던 5년 전.지금 내 나이가 26살이니, 적당히 잡아도 시간이 맞질 않았다.
5년의 간극은 단순히 메운다고 메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황하여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의 손이 내 뺨에 한기를 전해 나를 침착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이마를 쓸어대는 손길에 겨우 진정했다.
"…그럼 여기는 뭐죠?"
"다른 세계… 현성님이 하셨던 이야기에 따르면 이세계라고 해요."
1회차의 내가 했던 말인가.
여전히 남는 의문은 있었다. 어떻게 칼라미티 사가는 존재하고, 이 세계랑 유사한 걸 넘어 너무 비슷한 것인지.
초반에만 몇 번 보았던 컷씬…이라고 해야할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겨울의 신부는 내 질문을 듣기도 전에 대답했다.
"당신께서는 세계를 되감아달라고 하셨고, 저는 죽어가던 당신을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내드렸어요. 그 과정에서… 당신의 영에 새겨진 흔적들이 그 세계에 퍼져나간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게 되는 건가.
뭔가 말이 되는 듯, 안되는 듯 모호한 이야기였다.
"당신이 돌아가실 때, 당신의 영에 새겨진 다른 흔적들은 이 세계에 남았어요. 당신께서 사용하시는 갑주도 그 일환이고,방패도 그렇죠. 아마 못 보셨던 것들이 많았을 거예요."
그걸로만 설명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나름 창조신인 그녀가 하는 말이니 틀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한참 그 정보를 씹어삼키다가 재문했다.
"시스템 메세지는요? 그러니까 이… 떠있는 거."
겨울의 신부는 내 조악한 설명에도 잘알아들은 것 같았다.
"당신의 적응을 돕기 위한 장치이자… 제가 당신을 돌볼 수 있는 도구예요. 신성이 남지 않아 조작이 예전만큼 능숙하진 않으나… 당신께서 과업을 해나가실 수록 더욱 다루기 쉬워졌어요."
"그럼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었어요?"
과업 얘기가 나와서 문득질문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 과업을 나는 잘 헤쳐나갔다. 이제 한 놈 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로.
영원히 숨길 수는 없는 법인데.
"만약 끝까지 눈치채지 못하신다면,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하고 말을 흐린 그녀는, 제 손목을 꾹 움켜쥐었다.
"눈치채신다면 분명 이 세계에 책임을 지려고 하실테니까, 당신께서 무익한 고통으로 제 몸을 태우는 것을 보고 싶진 않았어요. 그러니 게임이라며 납득시켜드리고, 다신 보지 못하는 게 슬프지만 돌려보내드릴 생각이었어요."
…꽤 맞는 말이었다. 지금의 나만 하더라도, 내가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가.
입을 닫고 있는 내 뺨에 다시 한기가 올라왔다. 겨울의 신부가 내 뺨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에서는 그녀 특유의 한 발 빼는 듯한, 겸양하는 애정이 짙었다.
"…이 세계는 원래 이럽니까? 회차는 또 뭐고요?"
"현성님께서 해오신 위업과 행적, 싸워온 이들의 신성은 물론이고 쌓아올리신 신성의 흔적이지요. 신성은 불어나고, 굴레는 헐거워졌어요. 그 부산물이예요. 세계를 돌리면서 신성이 남아 자연히 세계 전체에 더 많은 신성이 돌아가게 되었죠. 그리 많이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신성이 불어나?
그게 되는 건가?
그게 안되니까 굴레를 부수니 뭐니 하는 신들이 있었던 거 아닌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니 그녀는 잔잔하게 웃었다.
"신성이 늘어나요?"
"네에, 영원히 늘어나거나 자생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증진은…."
나는 그 말에 지금까지 떠올리던 계획을 머릿 속에서 재정리 해야했다.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그녀는 내 뺨을 문지르면서 애정을 드러내다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돌아갈 순 있나요."
"과업을 완료하시고 신성을 되찾으시면, 충분히 가능해요."
처음 시스템 메세지에 띄웠던 그대로인가.
"처음부터 이러실 생각이었어요?"
내 조금은 모진 질문에, 그녀는 얼어붙더니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흩날려 난데 없이 눈이라도 불어닥친 듯 내 시계가 하얗게 번졌다가 밤의 어둑함으로 채워졌다.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속삭이는 말과 내 손을 주무르는 손길, 고개를 떨구며 슬쩍 물들이는 얼굴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나는 그 모든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만약 당신께서 힘드시다면, 더 이상 나아가고 싶지 않으시다면, 신을 죽이는 걸 포기하고 당신과 도피할 수도 있어요.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도 있어요."
"그렇게 해달라는 건가요?"
"…."
겨울의 신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은하게 드러내는 욕심이, 그녀의 첫 욕심이 기가 차서 괜히 웃음이 새어나왔다. 웃어버리니 그녀는 내 손을 꾹 쥐었다.
"제가 안 그럴거라는 거 알고 하는 말이죠?"
나를 몇십년이고 봐왔을 그녀가 하는 말이라 더 기이했다.
내가 그런 선택지를 절대 고르지 않는다는 거, 잘 알고 있으면서.
겨울의 신부 역시 감안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순백에 가까운 머리칼을 더듬어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는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합니다. 곧 죽어도 할 거예요."
"네에."
"신도 죽일거고, 가능하면 세계도 구할 거고 굴레인지 뭔지도 가능하면 해결하고 싶어요."
"…네."
"한 세계를 만든 창조신이 왜 제 앞에서는 한 명의 여자인진 모르겠는데, 기왕 불러졌으니…."
"…."
"책임지죠. 원래 저 같은 사람은 짐이 무거울 수록 빛나는 법이니."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어올렸다. 굳게 닫은 두 눈꺼풀 위로 수심과 여러 감정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뺨을 슥슥 쓸어주었다.
"이제 힘 그만 숨기고, 뭘 할 수 있는지나 말해봐요. 창조신이라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