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 1화 (1/19)

1. 힐러의 생존기

<에르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신성제국/라히브라 서버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달칵―

<라히브라 서버에 접속자가 많아 대기 중입니다.>

<접속 대기 인원: 234명 / 접속 소요 예상시간: 16분…>

<자동 대기 신청을 하시겠습니까? 대기 / 다른 서버 선택 / 종료>

달칵―

겜알못으로 지냈던 중고등학교 시절, 채이현은 게임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며 혀를 차곤 했다. 그 당시 그의 친구들이 핸드폰 게임에 미쳐있던 때라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채이현이 그럴 때마다 그의 친구들은 네가 아직 뭘 몰라서 그러는 거라며 타박했지만, 채이현은 성적이나 올리고 덤비라며 오히려 친구들을 나무랐다.

이현에게 게임이란 그런 것이었다. 할 짓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이상한 취미. 핸드폰 게임에 정신이 팔려 비틀비틀 길을 걷는 사람들을 볼 때면, 그 생각은 더 강렬하게 이현의 머릿속에 자리했다. 게임의 가치는 이현에게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정관념 속에 살아가던 이현은 우연치 않게 제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게임을 만나게 되었다. 게임과 인연이라고는 쥐뿔도 없을 것 같던 그가 게임을 하게 된 건, 대학 입학 후 1학기를 이수하고 입대한 군대에서 중학교 동창인 김성훈과 조우하게 되면서였다. 그래도 얼굴 몇 번 봤다고, 낯선 곳에서 만난 김성훈과 채이현은 금세 친해졌다. 중학교 땐 데면데면했으나, 그것마저도 추억이라고 그들은 금세 의형제가 되어 동고동락을 함께했다. 휴가도 맞춰 나와 밤을 새우며 술을 마실 정도니 그 우애가 퍽 두텁기는 했다.

이현과 달리 김성훈은 또래답게 참 게임에 관심이 많은 친구였다. 게임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현과 달리 김성훈은 게임에 애정을 쏟았고, 자신의 오덕기질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다. 자대에서는 자유롭게 게임 얘기를 할 수가 없으니, 휴가 나온 그의 입에서 쉴 새 없이 게임 얘기가 나오는 것도 기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의 수다를 듣는 사람이 하필 함께 휴가 나온 이현이라는 점이랄까.

밤새 술을 마시며 김성훈은 신이나 조잘거렸다. 건강한 남자라면 한 번쯤 나와야 될 ‘이성’에 대한 주제도 게임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얼마나 그렇게 술에 취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을까. 잠깐 존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렸을 때 이현은 놀랍게도 피시방 구석 자리에 앉아 마우스를 쥐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같은 생각은 할 틈도 없었다. 이현은 너무 졸렸고, 묵직한 피로감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현은 그대로 피시방 의자에 웅크려 앉아 졸기 시작했다. 간혹 옆에서 김성훈이 팔을 툭툭 쳤지만, 밀려오는 수마를 이겨낼 재간은 없었다.

“야, 채이현. 그만 좀 일어나라. 얘는 뭔 소새끼처럼 웅크려 자고 있어.”

개새끼든 소새끼든 좀 줘 봐, 덮고 자게. 몽롱한 정신으로 그리 말했던가. 김성훈은 포기하지 않고 쉴 새 없이 이현을 흔들어 깨웠다. 술 처먹고 피시방 온 것도 억울한데, 잠도 못 자게 하니 무려 서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현은 김성훈의 집념을 이길 수 없었고, 결국엔 충혈된 눈을 겨우 떠 모니터를 바라봐야 했다.

모니터에는 ‘에르덴’이라는 게임의 타이틀 화면이 켜져 있었다. 창공에서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사람의 형체가 빛가루처럼 흩날리는 모습이었다.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졸린 마음에 휩쓸려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도 아니면 옆에서 살살 꾀는 목소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라든가.

이현이 마우스를 잡은 건 한참 뒤였다.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이현의 인생은 전과 후로 나뉘게 되었다.

‘에르덴’을 만나기 전과 그 후로 말이다.

***

이현이 에르덴에서 힐러를 하면서 겪은 일은 무궁무진했다. 뭐가 그리 무궁무진하냐고 묻는다면, 이현은 친히 제 옆에 데려다 놓고 직접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제가 겪은 모든 일들을 말이다.

가장 충격적인 게 언제였더라. 제대를 하고 김성훈을 따라 본격적으로 게임에 뛰어든 이현은 어느 날인가 솔플(솔로 플레이)을 하다가 모니터 화면 끄트머리에서부터 달려오는 유저를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이현을 보자마자 미친놈처럼 웃음을 흘렸었다.

[포도: ㅎㅎㅎㅎㅎ]

처음엔 언제 봤다고 웃는가 했다. 그러다가 친목질인가 싶어 이현도 똑같이 그를 따라 웃었다.

[이현: ㅎㅎㅎㅎㅎ]

직후 그 유저가 쫓기던 몹에 맞아 죽어버렸다. 아니, 사실 이현은 그가 몹에 쫓기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주뼛거리다 몹이 뒤로 빠졌을 때에야 다가가 부활해주었는데, 그 유저는 일어나자마자 대뜸 욕부터 내뱉었다.

[포도: 아, ㅅㅂ... 님 왜 웃음? 왜 처 웃고 지이랄임?]

[이현: 님이 먼저 웃었잖아요?]

[포도: 힐을 달라고 힐을ㅡㅡ 아놔, 흐흐흐흐가 아니라 힐힐힐힐 이라고]

뭐라 반박도 못했다.

뒤늦게 온 김성훈이 그걸 보고 힐 맡겼냐며 대신 따져줬지만, 덕분에 그 날은 충격에 인던도 안 돌았다.

그 외에도 던전을 돌 때 정화가 조금이라도 늦으면 죽일 것처럼 달려든다던가, 지들이 쫄을 못 잡아 놓고 죽은 탓을 힐러에게 돌린다던가, 하는 걸 겪고 보니 힐러가 참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나 레이드로 상대 종족과 대결할 때마다 듣게 되는 ‘상대쪽 힐러 컨 쩌네요ㅎ’라는 소리는 아주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에 들게 했다. 강철멘탈과 심장을 가진 이현도 거기선 제법 타격을 입었다. 괜히 움츠러들고.

팔자에도 없는 게임 좀 해보겠다고 김성훈의 꼬드김에 넘어가 가장 쉽다던 힐러를 택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살살 웃으며 말했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겜알못이던 이현은 얄팍한 의심조차 안 했었다.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 셈이다.

힐러가 쉽다고? 힐러가 쉽다고 하는 놈들이 있다면 이번에도 역시 친히 옆에 데려다 놓고 보여주고 싶었다. 열 손가락도 모자라 나중에 발가락까지 들어다 키보드를 눌러야 하는 힐러의 고충을.

사실 이현이 발가락까지 쓰는 일은 없었다. 이현의 캐릭터에 따라붙는 발컨이라는 명망이 유저들 사이에서 파다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유저들은 이현을 파티에 끼워주지 않았고, 설령 받아주더라도 늘 루팅1을 포기하라는 조건을 붙였다. 면접도 안 보고 귀족대우를 하며 데려가는 힐러에게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이현이 에르덴에서 자주 어울리는 사람은 늘 한정되어 있었다. 아니, 딱 한 명이었다. 군대에서 의형제 드립을 쳤던 김성훈 말이다.

“야, 똑바로 하라고! 힐이 안 들어오잖아, 새끼야!”

“네 방어구가 후진 걸 왜 내 탓을 하고 지랄?”

“어디서 지금 풀강을 한 내 방어구 탓을… 야야! 야! 뒤에 로머! 가지 마! 가지… 이 새끼가 진짜!”

“헐… 애드났다.”

“아오, 때려쳐! 채이현 이건 어째 순탄히 넘어가는 날이 없어!”

이현의 옆에서 온갖 욕을 퍼부으며 성질을 내는 이 사내로 말할 것 같으면, 군 제대 후 매일같이 피시방에 붙어 앉아 이현과 함께 게임을 하고 있는 돈 많고 시간 많은 백수 놈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이현을 게임의 세계로 끌어들인 악의 장본인이었다.

“아, 내 경험치….”

“경험치 같은 소리 하네. 너 그냥 렙업할 생각 때려쳐라. 안되겠다. 내가 돌아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건 뭐 조류도 아니고 매일 로머한테 걸리냐.”

신랄한 목소리를 등지고 이현은 울적한 표정으로 까맣게 변한 화면을 바라보았다. 로머는 움직이는 선제공격 몹이었다. 로머에 걸리면, 주변 몹들도 다 달려드는 애드에 걸릴 확률이 높아 되도록 주의해야 하는 몹이었다.

죽어 누워있는 이현의 캐릭 앞에는 늘 그렇듯 혼자 살아남은 김성훈의 캐릭이 은신을 한 채 서 있었다. 이를 보자마자 이현은 김성훈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지만 살겠다고 은신을 쓰냐! 이 치사한 새끼!”

“와, 채이현 얼굴에 철판 깐 거 봐라. 얌마, 넌 할 말 없어. 자힐하고 멀티힐도 많은 놈이 저기서 죽고 자빠졌냐.”

몹들이 스멀스멀 멀어지자 김성훈은 부활석을 이용해 이현을 살려주었다. 소생의 빛과 함께 바닥에 누워있던 캐릭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야, 이러니까 네가 솔플밖에 못하는 거 아니야. 대체 명망이 어느 정도면 유저들이 다 널 피하고 있냐? 게시판이나 공략집 좀 들어가서 스킬 순서랑 트리 좀 공부하고 무빙 좀 연습해라. 안 그럼 너 영영 솔플인생이다.”

“봐도 모르는 걸 어쩔.”

“이 새끼는 꼭 알려줘도 이 지랄이지. 던전 제한시간 다 됐다. 하아, 오늘도 실패네… 아, 모르겠다. 나 오늘은 약속 있어서 이 이상 못 해주니까 솔플이나 하면서 놀아라. 너 좋아하는 채집을 하든가.”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김성훈의 시선을 모른 척 피한 이현은 혹여 또 몹에게 걸릴까, 바로 텔레포트 스킬을 쓰고 마을로 귀환했다.

“나 간다. 적당히 하다 가라.”

“빨리 가.”

“하, 새끼. 채집하다 신마족 놈들한테 탈탈 털려버려라.”

“아오, 저것도 친구라고!”

길길이 날뛰는 이현을 뒤로한 채 김성훈은 낄낄거리며 사라졌다. 다음에 물 마실 때 뒤통수를 후려갈겨 주마. 남모르게 사이다 복수를 다짐한 이현은 결의에 찬 시선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텔레포트 주변에는 유저들이 바글바글했다. 몇 년간 게임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어마어마한 인원이었다.

“또 채집이나 해야겠다.”

이현이 하고 있는 ‘에르덴’이라는 게임은 MMORPG로, 몇 년간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아주 핫한 PC게임이었다. 사람들이 유독 에르덴에 열광하는 이유는 필드 내 PVP 시스템과 그래픽 수준이 타 게임에 비해 월등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접근성 좋은 타겟팅 방식과 고퀄리티의 커스터마이징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를 열광케 했다.

PVP가 유명한 이유는 종족편성 시스템 덕이 컸다. 에르덴에는 크게 3개의 종족이 있었는데, 유저들이 택할 수 있는 종족은 ‘신성족’과 ‘신마족’이었다. 남은 한 종족은 신을 배신하고 타락한 ‘레비아탄’으로 유저들의 공공의 적으로서 레이드나 던전용으로 많이 등장했다.

신성한 신을 모시는 신성족과 타락한 신을 모시는 신마족은 함께 할 수 없는 앙숙인 관계였다. 주둔지와 활동지가 다른 두 종족은 지옥의 바다를 두고 각기 다른 대륙에 존재했는데, 몇 시간마다 랜덤으로 생기는 ‘포탈’을 타고 서로 간의 영역이나 주둔지에 침범할 수 있었다. 이때 두 종족은 PVP를 뜰 수 있었고, 필드 내 그 어느 곳이든 상대 종족을 제재 없이 척살할 수 있었다.

그 두 종족 중 이현이 택한 건, 신성제국의 신성족이었다.

“제발… 오늘은 신마족 놈들이 없기를…!”

PVP가 자유로운 반면 그에 따른 피해자도 속출했다. 유저들은 필드를 쏘다니다 포탈을 타고 나타난 상대 종족에게 이유도 예고도 없이 척살되었는데, PVP를 싫어하는 유저들은 그 때문에 늘 몸을 사리며 다니기 일쑤였다.

그리고 이현 역시 그 기습에 수도 없이 당한 불쌍한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채집이나 솔플을 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기습을 하는 신마족 때문에 한때 게임을 접으려고 했을 정도니 말 다한 셈이었다.

[미월: 비단동굴 가실 분들 ‘여기’ 눌러주세요!]

[풍풍이: 힐러 오심 ㄱㄱ]

[개쎈멍뭉이: 탱 모십니다!! 탱 오시면 출발!]

높은 레벨대 지역으로 텔레포트하고 마을을 나오자 근처 만렙 인던 앞에서 유저들이 파티원들을 구하고 있었다. 묵묵히 그 앞을 지나쳐간 이현은 채집지도를 켜고 고급물약을 만들 재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모비딕 풀’ 채집에 성공했습니다!

―814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30분째 방해 없이 채집이 잘 되는 것을 보니 오늘 일진이 사납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이현은 빨대로 커피를 쪽쪽 빨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나 그 흥얼거림은 잠시 후 나타난 한 유저로 인해 뚝 끊이고 말았다.

[맥초딩: 이게 누구야?ㅋㅋㅋㅋ 힐러계의 이단아가 아니신가ㅋㅋㅋ]

일채에 뜬 말을 보자마자 이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맥초딩이라는 놈은 채집할 때 종종 만나는 아처 직업 유저로, 예전에 한 번 채집물을 스틸해 이현과 싸웠던 적이 있던 자였다. 게다가 일전에 던전을 돌다 만난 적이 있었는지 발컨인 이현의 실력을 꼬투리삼아 볼 때마다 이렇게 이단아라고 놀려대고 있었다.

[이현: ㄲㅈ셈]

[맥초딩: 와낰ㅋㅋㅋ 말하는 거 보소ㅋㅋㅋ]

깊은 빡침을 느꼈지만, 이현은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덤벼봤자 득도 없는 새끼라는 걸 진작 깨달은 까닭이었다.

이현은 맥초딩을 지나쳐 애초 목적대로 다시 채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맥초딩: 와, 막 무시하네? 뒤1지고 싶나]

그러나 맥초딩이 이현의 채집물을 스틸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원하는 대상물이 없습니다.

―원하는 대상물이 없습니다.

[맥초딩: ㅎㅎㅎㅎㅎ]

[이현: 뭐하시는 거?]

오늘 일진 좋다고 했던 거 취소다. 이현은 금세 전투적인 자세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제 캐릭도 평소보다 눈매가 더 치켜 올라가 보이는 게 어쩐지 단단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이현: 유치하게 이러지 말고 좀 ㄲㅈ라고요.]

[맥초딩: 내가 내 채집물 캐겠다는데 뭔 상관? 괜히 혼자 으르렁ㅋㅋㅋㅋ 개1새1끼인가 ㅋㅋㅋ]

[이현: 그럼 곱게 다른데 가서 캐든가. 왜 내걸 빼앗고 ㅈㄹ인데]

[맥초딩: 어디서 반말이야 ㅅㅂ]

분노로 뒷골이 당긴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이현은 남은 커피를 벌컥 들이켜고 다시 분노의 타자치기를 시전했다.

[이현: 너도 하는 반말을 왜 나는 하면 안 되는데? 누굴 호구로 아나, 초딩새1끼가]

[맥초딩: ㅉㅉ 지1랄도 뭣처럼 떠네.]

하마터면 키보드를 내려칠 뻔했다. 군대에서 갈고닦은 인내심이 여기서 발휘될 줄이야. 이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 가증스럽게 비꼬던 맥초딩은 사라져 있었다.

“뭐야, 어디 갔어.”

화면을 이리저리 돌려 찾아봐도 그새 어디 갔는지, 맥초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화창을 봐도 그 이상 올라온 말은 없었다. 멍하니 앉아 눈을 깜빡이던 이현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금세 과거를 잊고 다시 채집에 나서기 시작했다.

―채집스킬이 12단계로 레벨 업 되었습니다.

흥얼흥얼 채집을 하던 이현은 채집스킬 레벨 업 소식에 뛸 듯이 기뻐했다. 앞으로 3업만 더 하면 최고급 물약을 제조할 수 있게 된다. 비록 당장 만들더라도 만렙이 되기 전까지는 등급 제한이 있어 쓰지 못했지만, 레벨이야 키우다 보면 오르는 법. 이현은 제 컨에 대한 걱정도 잊고 잠시나마 기뻐했다. 아주 잠시 말이다.

―‘모비딕 풀’의 채집을 시작합니다.

캐릭터가 모비딕 풀 앞에 자리를 잡고 채집을 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인벤토리를 켜놓고 채집한 개수를 확인하던 이현은 지도 한구석을 빨갛게 물들이는 수많은 개체를 확인하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처음엔 상대 종족인 신마족인줄 알았다. 그러나 화면을 돌려 확인한 결과, 그게 전부 선제공격 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족히 20마리는 넘어 보이는 수가 이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뭐, 뭐야….”

다급히 채집을 중지하고 캐릭터를 움직였지만, 그보다 먼저 누군가가 이현을 앞질러 튀어나갔다. 양 갈래머리를 곱게 땋아 내린 조그마한 여성 캐릭터였다. 그 캐릭을 보자 이현은 육성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맥초딩이었다. 놈이 선제공격 몬스터를 모아 일부러 끌고 온 것이었다.

[맥초딩: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동속도 증가 주문서와 버프까지 쓴 맥초딩은 이현을 빠르게 지나쳐 높은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보란 듯 약 올리는 모션을 취하는데, 진짜 때릴 수만 있다면 확 패죽이고 싶었다. 같은 종족을 공격할 수 없는 게 분한 건 또 처음이었다.

[맥초딩: 그것도 못 피하냐?ㅋㅋㅋㅋㅋ]

때아닌 날벼락을 맞은 이현은 죽기 살기로 피하다 결국 원거리 법사들의 공격을 맞고 그대로 죽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얌전히 죽을 걸, 피한다고 비싼 도핑주문서고 물약이고 다 먹었는데 재물낭비만 하고 말았다.

[맥초딩: 그러게 왜 덤벼서 지2랄ㅋㅋㅋㅋ 호구새1끼인갘ㅋㅋ 어떻게 힐러가 이것도 못피하고 죽냐고 ㅋㅋㅋㅋ 와, 힐러계 이단왕 하나 납셨네ㅋㅋㅋㅋ]

아오, 지는 얼마나 잘한다고! 이현은 이를 갈며 맥초딩을 노려보았다. 누가 와서 죽여주면 좋겠는데,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스멀스멀 멀어지는 몹들 뿐이었다. 화면에 떠 있는 마을 귀환 알림말이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렸다. 기실 귀환하면 그만일 뿐이었지만, 잃어버린 경험치가 아까워 쉽사리 귀환이 눌러지지가 않았다.

결국 이현은 마음을 다스리고 맥초딩이 떠날 때까지 기다리다 사냥을 하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렙업이 코앞인데, 마의 아홉수라 불리는 LV.79라 그런지 영 오를 기미가 없어 보였다.

[맥초딩: 어이가 털려 말도 안 나오시나? ㅋㅋㅋㅋ 아까 그 개당당한 태도는 가출하셨나?ㅋㅋㅋㅋ]

몇 번이나 엔터를 누르고 욕을 썼다 지웠는지 모르겠다. 캡쳐를 할까? 고뇌에 휩싸인 이현은 끝내 머리를 싸맸다. 제발 가라, 가. 주문처럼 그 말만을 속삭이며 온갖 모션을 취하는 맥초딩을 노려보고 있었을 때였다.

새빨간 글씨가 한쪽 채팅창을 가득 도배하기 시작했다. 그건 ‘신마족’이 스킬을 썼을 때 올라오는 알림이었다.

―신마제국의 ‘루스’가 신성제국의 ‘맥초딩’을 포획해 이동불가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신마제국의 ‘루스’가 폭염의 칼날을 사용해 신성제국의 ‘맥초딩’에게 830의 데미지를 주고 출혈을 남깁니다.

―신마제국의 ‘루스’의 폭염의 칼날 공격으로 신성제국의 ‘맥초딩’이 스턴에 걸렸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빨간 글씨가 도배되는 화면 너머에는 기습을 맞고 썰리고 있는 맥초딩이 있었다. 맥초딩을 기습한 자는 신마제국의 유저였다. 머리 위로 뜬 빨간색 아이디가 섬뜩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신성제국의 ‘맥초딩’이 암습 회피를 사용해 신마제국의 ‘루스’의 투혼의 칼날을 회피했습니다.

―신성제국의 ‘맥초딩’이 촉살의 화살을 사용해 신마제국의 ‘루스’에게 979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이현의 상태창에는 스킬명과 함께 양 종족의 데미지 수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는 PVP시 종족 간에 데미지가 제 3자에게도 공개되는 에르덴의 자체 시스템 덕분이었다. 이현이 양 종족의 PVP를 코앞에서 보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습을 당해 썰리던 맥초딩은 회피 스킬을 발동시켜 재빨리 상대와 거리를 벌리고 활을 꺼내 강공격을 퍼부었다. 그래도 핫바지는 아니었는지 거리를 두고 스킬을 쓰는 모습이 여간 능숙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를 잘못 만났다. 뭣도 모르는 이현이 보기에도 둘 사이의 격차가 눈에 띄게 드러났다. 신마제국의 ‘루스’라는 유저의 직업은 ‘탱커’였다. PVP 황제라 불리는 직업군이지만, 무빙과 리딩, 스킬의 거리조절 등이 어려워 유저들이 잘 택하지 않는 직업이었다.

어지간한 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직업군이라는 소리였다. 한데 그런 직업을 가지고 루스라는 유저는 놀랄 만큼의 무빙 실력을 보였다. 스킬을 쓰는 결단력과 전환성은 거의 압도적이었다.

―신마제국의 ‘루스’가 방패의 격조를 사용해 신성제국의 ‘맥초딩’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신마제국의 ‘루스’가 방패 방어술을 사용해 10초간 방어력이 기존 비율 대비 150% 향상되고, 스턴, 넉백, 구속으로부터 저항강화상태가 되었습니다.

루스는 스킬을 쓰는 와중에도 몇 번이고 무기스왑(무기교체)을 하며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까막눈인 이현이 봐도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거리를 벌려 활을 당기던 맥초딩은 몇 번의 포획 끝에 결국 루스의 칼에 베여 죽게 되었다.

섬광이 이는 칼날이 맥초딩의 몸을 사선으로 긁고 지나간 순간, 이현의 채팅창에는 루스의 승리 문구가 떠올랐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순간이었다.

―신마제국의 ‘루스’가 신성제국의 ‘맥초딩’을 쓰러트렸습니다.

“…김성훈이 이걸 봤어야 했는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PVP를 본 소감은 경이 그 자체였다. 반대로 엄청난 자괴감도 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이현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통쾌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까의 이현처럼 현타에 빠진 건지 맥초딩은 드러누운 상태로 말이 없었다.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꼴좋다, 초딩놈아.”

화려한 금속갑옷을 두른 은발의 남자 캐릭을 떠올리던 이현은 잠시 고민하다 그대로 게임을 종료시켰다. 물론 집에 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에르덴을 종료시키고 이현이 한 행동은 ‘루스’의 방명록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었다.

“욕 엄청 많네….”

루스의 방명록에는 수십만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대충 훑어봐도 입에 담기도 힘든 욕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코멘트를 천천히 훑어보던 이현은 저도 모르게 뺨을 긁적거렸다. 모두 그에게 기습을 당하고 복수심에 욕을 써놓은 것이었다.

범상치 않은 유저라는 생각은 했지만, 관심등록수가 무려 몇 십만이었다. 서버 내 공적치 랭킹은 탱커 기준 1위, 전체기준 4위. 괜스레 어깨가 움츠러드는 순위였다.

“대단하다…. 어, 현질도 엄청 했나보네.”

민망할 정도로 까대는 욕을 무시하고 이현은 루스의 방명록에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장황하게 남기지도 않았다. 간결하고, 간략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심만 남겼다. 글을 쓰고 엔터를 눌렀을 때, 이현의 글은 한참이나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그 사이 루스에게 기습을 당한 유저들이 찾아와 실시간으로 욕을 쓴 것이다.

“뭐야, 초딩놈도 있잖아.”

이현이 남긴 글 두 번째 위에는 맥초딩이 남긴 글도 있었다. 온갖 욕을 갖다 붙인 얼기설기한 말을 보니 퍽 분하고 억울하긴 했나보다. 그걸 보자 다시 통쾌해져 이현은 실실 웃으며 맥초딩의 방명록에 들어갔다.

“지도 잘한 거 하나 없고만, 어디서 적반하장이야?”

루스만큼은 아니었지만, 맥초딩의 방명록도 그리 깨끗하고 밝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강화된 무기나 방어구를 보니 제법 노력한 흔적은 엿보였다. 공적치 랭킹은 아처 기준 29위, 전체 기준 159위. 이현으로서는 꿈도 못 꿀 순위였다. 이놈이 그래도 핫바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성훈한테 그냥 종족이전이나 해서 이놈이나 죽이고 다니자고 할까. 그럼 캐삭해야 되나?”

김성훈이 키우는 어쌔신은 직업순위 6위에 전체 순위 27위였다.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사냥 가자며 귓속말이 오는 걸로 봐서는 컨도 제법인 것 같고, 무기나 방어구도 현질을 꽤 해서 공격력이나 속성저항도 상당했다. PVP를 하는 건 못 봐서 그쪽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럼 다시 키워야 되는 거…?”

이현은 눈동자를 도륵 굴리다 뒤늦게야 하하 웃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치워버렸다. 덕분에 충동적인 생각은 빨리 가라앉았다. 오늘은 이쯤 할까, 하고 시계를 힐끗 보니 벌써 밤 10시가 다 되어 있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몸을 일으킨 이현은 때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카운터로 향했다. 약속이 있다고 먼저 갔던 김성훈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어, 왜?”

<야, 지금 2차 왔는데 너도 와라. 애들이 너 보고 싶단다.>

보고 싶은 거 좋아하네. 술이나 잔뜩 먹일 거면서. 이현은 으르렁거리며 냉큼 싫다고 대답했다.

“싫거든! 댁들이나 많이 마시세요.”

<비싼 척하지.>

“가면 또 새벽까지 마실 거잖아. 싫어, 안 가! 집 가서 일찍 자고 내일 일찍 일어나서 피시방 올 거야.”

<지랄한다, 아주. 목숨 걸었네. 내가 겜생으로 끌어들였지만, 넌 진짜 대책 없다. 폐인이냐?>

카운터에 금액을 지불하고 나온 이현은 써늘한 밤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며 귀찮은 어조로 대답했다.

“사돈 남 말하시네.”

적어도 이현은 집에 가면 게임을 안 했지만, 김성훈은 집에서도 밤새 게임을 하다 다음날 정오가 지나서야 퀭한 모습으로 피시방에 나타났다. 누가 더 폐인이냐 묻는다면, 이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하루 20시간 가까이 에르덴을 하는 김성훈이야말로 진정한 폐인이라고 말이다.

<물어 뭐하냐. 알겠다, 알겠어. 내일 피시방에서 보자. 애들도 온단다. 죽빵 맞을 각오하고 나타나라.>

몽둥이라도 하나 챙겨가야 하나. 심각한 고민에 말도 안 하고 있던 이현은 ‘끊어’하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답도 않고 바로 통화를 종료시켰다. 그리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오늘은 어쩐지 통쾌해서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

집에 오자마자 씻고 잤던 것 같은데 눈을 뜨니 아침 8시가 넘어 있었다. 일찍 일어나려던 생각은 귀찮음 앞에 흐지부지해졌다. 얼마나 멍한 상태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을까, 징징 울려대는 핸드폰을 깨닫고 이현이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아들었다.

“…얘는 왜 또 아침부터 전화질이야.”

현타 오는 아침부터 전화한 인간은 그의 절친이자 웬수인 김성훈이었다. 긴 하품을 하며 목을 긁적이던 이현은 받지 말까, 하다가 나중에 더 귀찮아질 것 같아 일단 받기로 했다.

<너 지금 어디냐?>

“뭐, 뭐야. 왜 이렇게 살벌하게 말하는데.”

받자마자 들려온 살벌한 저음에 이현의 어깨가 깜짝 튀었다. 이현의 타박에도 김성훈은 냉큼 피시방으로 달려오라는 말만 살벌하게 내뱉을 뿐이었다.

<빨리 와라.>

“귀찮은데…. 씻지도 않았어.”

<어젠 씨발, 아침부터 겜한다고 지랄을…. 하, 말을 말자. 그냥 빨리 오기나 해. 빨리 와라.>

“씻고 밥 먹고 갈 건데?”

<그냥 오라고 좀! 밥 사줄 테니까 제발 좀 와라! 너 지금 그러고 있을 때 아니라고! 어디서 지금 나무늘보처럼 지랄을 떨어!>

“알겠어…. 가면 될 거 아니야.”

그렇다고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이현은 대답도 듣지 않고 우울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세수와 양치만 하고 모자를 눌러쓴 채 집을 나섰다. 엎어지면 코앞인 거리에 있는 피시방에 도착해 김성훈이 맡아놓은 음료와 샌드위치가 놓인 빈자리에 앉은 이현은 무서운 기세로 돌아보는 김성훈에게 음료를 흔들며 촐랑거렸다.

“이따 밥도 사줘야 한다?”

“이 여우새끼가 오늘따라 때려달라고 아우성이네.”

“사준다며!”

“누가 안 사준대? 배터지게 사줄 테니까 이거나 처먹고 있어.”

“이거 맛없는….”

“주는 대로 처드세요, 그냥.”

사준 게 어딘가 싶어 이현은 이내 말없이 빨대를 꽂아 음료를 쪽쪽 빨아먹기 시작했다. 음료를 다 먹고 난 후에는 샌드위치를 뜯어 입에 앙 물었다.

“어, 맛있네.”

“지금 먹을 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어?”

“왜?”

빵을 오물거리며 이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 반응에 오히려 기가 막힌 건 김성훈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현의 모습에 끝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됐고… 에르덴 홈페이지나 들어가 봐라. 메인에 딱 떠 있을 거다.”

김성훈의 말대로 이현은 다시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 에르덴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메인에 뜬 게시글을 클릭해 읽기 시작했다. 김성훈은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푸웃!”

“에이, 씨! 더럽게시리!”

“콜록, 콜록!”

빵을 우물거리던 이현이 입에 든 음식을 뿜은 건, 게시글 안에서 ‘이현’이라는 이름을 발견했을 때였다. 한참이나 콜록거리던 이현은 김성훈이 카운터에서 물티슈를 받아왔을 때, 모니터를 양손으로 붙잡고 자신의 코앞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낱낱이 읽기 시작했다.

“이 초딩새끼가 지금 뭐라고 씨부렁거리는 거야! 그리고 왜 이게 메인이야!”

“야, 놓고 얘기해. 놓고 좀 치우고 얘기하자. 야! 야! 모니터 망가지겠다!”

“이게 지금 어디서 약을 팔고 있어…!”

모니터를 탈탈 흔드는 모습이 마치 사람 멱살을 잡고 흔드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몰리는 시선에 김성훈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현을 잡아다 모니터에서 떨어뜨려놓았다. 그런데도 씩씩거리는 숨소리는 좀 체 가라앉을 기미가 없어 보였다.

‘아이고, 내 팔자야….’

김성훈의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괜히 보여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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