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9)

게시글: 하,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살지 맙시다.

작성자: 맥초딩

서버: 라히브라 / 신성제국

내용: 어제 참 황당한 일을 겪어 몇 자 적습니다. 저는 그렇다 쳐도 다른 분들은 이런 일 안 당했으면 좋겠네요.

사건의 발단은 제가 알르키아 평온 근처에서 채집을 하게 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모비딕 풀을 채집 중이던 저는 우연히 ‘이현’이라는 유저와 마주쳤고, 그분도 모비딕 풀을 채집한다면서 영역을 나눠 채집하는 게 어떠냐, 라는 제안을 제게 하셨습니다.

전 일단 흔쾌히 허락했고, 서로 영역을 나눠 채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언제부턴지 이현님이 제 영역까지 들어와 채집을 하더군요. 열 받았지만, 참고 모른 척 봐드렸습니다. 근데 이게 한 번도 아니고 계속 그러니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자리 침범하지 말라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습니다. 근데 이현님이 대뜸 화를 내시더라고요ㅋㅋㅋㅋ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하고 무시하기로 했습니다. 근데 그 이후로 이현님이 채집은 안 하고 계속 제 쪽으로 와 제 채집을 스틸하더군요. 다른 곳에 뻔히 있는데도 제가 채집하는 것만 노리기에 심술부리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고요.

너무 열 받아서 저도 따질 거 다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제 말을 수긍하는 척 사라지더라고요? 여기서 눈치 챘어야 했는데, 제가 참 바보였습니다.

이현님이 사라지고 저는 다시 채집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 십분 정도 흘렀나? 지도 한쪽 부근이 전부 시뻘겋게 변했더라고요. 신마족인 줄 알고 너무 놀라서 재빨리 근처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가서 피했는데, 가만 보니 선공 몹들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몹들이 우글우글 달려오는데, 그 앞에 이현님이 있더라고요... 어이가 없긴 했지만, 일단 잠자코 지켜봤습니다. 제가 올라온 자리가 몹들 사정거리에 안 잡혔거든요. 절 죽이려고 일부러 몹을 몰아온 건지 모르겠는데, 이현님은 제가 사라지자 찾기 시작하더라고요. 여기저기 찾다가 제가 있는 쪽으로 오는데 장거리 법사들 공격을 맞고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었습니다.

저는 일단 살려줘야 될 것 같아서 몹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때까지 이현님께선 아무런 말도 없으셨고요. 몹이 다 가고 제가 바위 위에서 내려와 이현님께 부활을 해주고 있는데, 신마족 놈인 ‘루스’가 뒤치기를 하더라고요ㅋㅋㅋㅋㅋ

그냥 썰렸습니다. 어떻게 저항은 했는데, 루스 알잖아요? 이걸 어떻게 이깁니까? 제가 죽자마자 이현님이 바로 나가시더라고요?

아, 사실 좀 찝찝했는데... 못 살린 게 제 탓은 아니잖아요? 그냥 루스한테 뒤치기 당한 것도 서럽고 일진 안 좋겠다 생각해서 저도 바로 종료하고 루스 방명록에 가서 다음엔 제대로 겨뤄보자고 글을 썼습니다. 지금은 창피해서 삭제했는데요.

문제는 제가 쓴 글 밑에 밑에 이현님이 쓴 글이 있더라고요. 그 글을 보고 한동안 벙쪘습니다. 정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더라고요ㅋㅋㅋㅋ

고맙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린지... 곰곰이 생각하니 그게 절 죽여줘서 고맙다고 하는 말인 것 같더라고요. 정황상 그렇게밖에 생각할 도리가 없네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아니, 이현님, 저한테 뭐 불만 있으신가요? 채집하는데 배려도 충분히 해줬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은 아니라 화가 나셨나요?

어이가 없네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네요. 루스가 어떤 놈인지 알면 감사하다는 말은 절대 못 하죠. 하루에도 수백 명이 루스한테 썰리고 다닙니다. 아 예, 뭐 그건 게임 특성상 그런 부분이니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근데 절 죽인 직후 감사요? 허 참, 이걸 뭐라고 받아들여야 할지...

앞으로 제가 먼저 님 걸러 드립니다. 님 있는 팟은 절대 안 갈거고요, 베히아, 학살의대전장에서도 일순위로 썰어드리죠.

다른 분들도 ‘이현’ 이분 보면 피하세요. 저처럼 불똥 맞지 마시고ㅡㅡ 사과문 이런 거 바라지도 않습니다. 생각이 있으면 자진캐삭 하시고 조용히 사라지세요.

밑에 캡쳐본은 루스 방명록에 쓰인 글입니다.

(스크린샷_방명록 저격댓.jpg)

댓글수 [1021]

베스트 댓글

-나와일진/신성제국: 훗. 내가 배댓이 된다면 바지를 벗고 전장에 뛰어들어 신마족놈들에게 온 몸을 바치겠다.

-때쟁이오빠/신성제국: 애들이냐? ㅋㅋㅋㅋㅋㅋ

일반댓글

-힐러쟁쟁/신마제국: 둘이 해결하지 이걸 왜 굳이 다 보라고 쓰는 줄 모르겠네. 그리고 그 고맙다는 게 꼭 초딩님 겨냥해서 그런 거 아닐 수도 있잖아요.

└ 찔리는 게 있는가 보죠...

└ 그냥 즐기세요

-비샤비샤/신성제국: ㅎㄷㄷ 왜 하필 루스한테 가서 저ㅈㄹ? 나라도 열받겠다;;

-캐선장/신성제국: ㅅㅂ, 이러니까 루스가 우리 땅 와서 판치는 거 아니야ㅡㅡ 이현아 눈 깔고 다녀라 ^^ 형 보면 인사 잘 하고?

-화연/신성제국: 이현님 나름 유명한 분임. 발to the컨으로...

└ 아, ㅅㅂ 생각났다 ㅋㅋㅋㅋㅋㅋ

└ 앜ㅋㅋㅋㅋㅋ 이분이 그분이구나ㅋㅋㅋㅋㅋㅋ

-강짱/신성제국: 이게 메인까지 가는구나...

└ 그니까요...

-나무잎마을/신성제국: 루스 팔아먹고 메인되니까 좋냐? ㅉㅉ

-날치알/신마제국: 루스 이 개자식이 문제네. 루스 넌 빨리 사과문 올려라! 힐러님은 진리다.

└ 님, 도랏?ㅋㅋㅋㅋ 글 좀 제대로 보고 와라

-남심장/신마제국: 이야ㅋㅋㅋㅋ 이현아 형이 놀아주랴?ㅋㅋㅋㅋ

-별검/신성제국: 선공몹 몰아와서 지가 뒤지는 건 뭐야? 이현아 어디 가서 우리섭이라고 말하고 다니지 마라...

-하이트데이/신성제국: 루스는 걍 보면 ㅌㅌㅌㅌ

└ 어케 도망감? 난 순삭이던데...

└ 지도 잘 쳐보고 있으면 도망 가능함

└ 루스는 ㅅ1발 없어져야 할 4대 악임.

-개개념/신성제국: 아 요새 개념 없이 게임하는 새1끼들이 많네

└ 심심했는데, 포탈 한 번 타야겠넼ㅋㅋㅋㅋ

└ 넘어오기만 해봐라, ㅅㅂ

└ 포탈 앞에서 대기타야지 안되겠네ㅉ

-스무디/신마제국: ㅋㅋㅋㅋ 고맙다고 글 쓴 놈이나, 그걸 섭게에 올리는 놈이나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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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좀 괜찮냐?”

“아니.”

이현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나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비아냥거리는 귓속말이 날아왔다. 이렇게 많은 귓속말을 받은 적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일일이 차단하는 것도 벅차 이현은 결국 채팅창에서 귓속말 단락을 삭제해야했다.

“맥초딩 이 새끼… 잡히기만 해봐라.”

김성훈은 해명글을 올리자고 했지만, 해명글을 올린다고 이 상황이 반전될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평생 들을 욕도 이미 다 먹은 상태고.

“증거도 없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증거가 없었다. 스크린샷이라도 찍어둘 걸 후회하며, 이현은 김성훈이 건네는 커피를 힘없이 쪽 빨아 마셨다.

“아, 새끼. 땅굴까지 기어들어가겠네. 던전 돌아줘?”

“…아니. 유저들 없는데서 솔플할 거야. 너도 오늘은 길드팟 가야된다면서.”

“길드팟이야 언제든 갈 수 있으니까.”

“됐어. 이따 고기나 사줘.”

“알겠다, 알겠어.”

힘없이 축 늘어진 이현에게 새 음료수를 사서 건네준 김성훈은 힘내, 라는 말을 끝으로 길드 파티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가 된 이현은 바글바글한 유저들을 뚫고 솔플 인던을 찾아 나섰다. 간혹 이현을 알아보고 일반채팅으로 욕을 섞어 비꼬는 이들도 있었지만, 끈질기게 쫓아오거나 맥초딩처럼 얼쩡거리지는 않았다. 그걸 위안으로 삼으며 이현은 유저들이 잘 찾지 않는 LV.80 인던인 화산봉우리에서 혼자 닥사2를 시작했다.

―번뇌의 일격으로 스크리마에게 891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번뇌의 일격 연속기 번뇌의 낙인 효과가 발생했습니다. 스크리마의 방어력이 하락되었습니다.

도마뱀처럼 생긴 스크리마의 머리 위로 무거운 돌덩이가 쿵쿵 내려앉았다. 번뇌의 일격은 힐러의 가장 기본적인 스킬로 공격 트리의 가장 첫 번째 기술이었다. 솔플로 특화된 이현은 힐보다 공격 스킬을 더 많이 배운 상태였지만, 이마저도 레벨이 부족해 연속기 마지막 단계는 아직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베힐라오!]

스피커에서 새어나오는 주문은 스킬 이름과 다른 발음이었지만, 나름대로의 규칙을 갖고 있었다. 힐러라는 직업이 발음할 수 있는 주문은 총 3가지였는데, 베힐라오는 공격. 세르히즈는 힐. 오비아는 성력스킬이었다. 성력스킬은 사냥으로 쌓이는 기력을 이용한 스킬로, 일반 스킬보다 더 강하고 좋기 때문에 궁극기로 불리는 스킬이었다. 단, 쿨타임이 길고 기력을 쌓기가 힘들어 자주는 쓸 수 없는 스킬이었다.

―스크리마에게 470의 데미지를 받았습니다.

―출혈을 입었습니다. 초당 40만큼의 데미지를 받습니다.

[세르히즈!]

재빨리 힐과 정화를 사용해 피를 회복한 이현은 원거리 공격인 휘두르기를 쓰고 뒤로 재빨리 빠졌다. 스태프에 맞은 스크리마는 스턴에 걸려 해롱거리다 이현이 다시 공격 스킬을 퍼부었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스크리마를 쓰러뜨렸습니다.

―스크리마로부터 19800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그렇게도 재밌는지 화면을 보는 이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했다. 비록 솔플이지만 이현은 제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간혹 쏠쏠한 아이템이 나오면 실실 웃기까지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닥사를 하던 이현은 제법 차오른 경험치 칸을 보고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정신없이 죽이는 동안 잃어버린 경험치가 복구되어 렙업이 코앞이었다. 게임 배경음을 흥얼거리며 이현은 마지막 먹잇감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거대한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스크리마를 발견하곤 곧장 그리로 달려들었다.

스킬 단축키를 탁탁 누르며 이현이 스크리마에게 막 캐스팅을 시전 했을 때였다. 도중 캐스팅이 파훼되고 캐릭이 우뚝 멈췄다. 그와 동시에 화면 위로 새빨간 글이 빠르게 올라왔다.

―신마제국의 ‘베리베리’가 사용한 침묵의 활로로 침묵 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2분 동안 스킬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신마제국의 ‘꼬마천재’가 사용한 발등묶기로 속박상태가 되었습니다. 30초 동안 이동이 불가합니다.

―신마제국의 ‘루스’가 사용한 포획에 구속 상태가 되었습니다.

“뭐야, 뭐야, 뭐야…!”

순식간에 이현의 캐릭이 새빨간 이름을 머리에 달고 있는 신마족 앞으로 끌려갔다. 나타난 신마족들은 총 3명이었다. 그 사이에는 구면의 유저도 한 명 끼어 있었다. 이 사달 속에 연루된 신마제국의 탱커, ‘루스’말이다.

“…….”

이현의 시선이 자연스레 옆에 있는 김성훈에게 향했다. 그러나 다시 원래대로 옮겨졌다. 헤드셋까지 끼고 톡을 하고 있는 김성훈의 모습이 무섭도록 진지해서 도저히 도움을 요청할 수가 없었다.

레벨 업이 코앞인데, 왜 자꾸 여기저기서 방해하는지 모르겠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킨 이현은 저를 묶어놓고 얘기하는 신마족들을 쳐다보며 조심스레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아주 공손한 태도로 말이다.

[신마제국/꼬마천재: 겨우 찾았네 ㅅㅂ]

[신마제국/베리베리: 내가 여기 있을 것 같다고 했잖아, ㅅㄲ들아]

[이현: 저... 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신마제국/꼬마천재: ㄴㄴ안 죽임. 죽일 것 같았으면 벌써 쓱싹쓱싹.]

[신마제국/베리베리: 철컹철컹]

[신마제국/꼬마천재: 철컹철컹은 뭐야ㅋㅋㅋㅋㅋㅋㅋ 경찰서냐ㅋㅋㅋㅋ]

저들끼리 웃고 떠드는데 어째 포스들이 남달랐다. 딱 봐도 엄청 강해 보이는 유저들이었다. 캐릭터를 클릭하자 역시나 전부 만렙에 방어구나 무기도 다 고가였다.

[이현: 저요, 렙업 해야 되는데... 놔주시면 안 되겠죠?]

최대한 불쌍한 척을 하며 이현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포획으로 묶인 이현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루스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채팅창의 가장 밑에 눈에 띄는 글이 떠올랐다.

[신마제국/루스: 우리 아는 사이 같은데.]

[이현: 저희요? 전 모르는데요]

[신마제국/루스: 그럴 리가.]

[이현: 진짜 몰라요]

[신마제국/루스: 근데 왜 고맙다고 했을까.]

[이현: 아]

[신마제국/루스: 왜, 뭐가 고마운지 듣고 싶은데요.]

어쩐지 능글능글 물어오는 모습이 다 아는데도 찌르는 느낌이었다. 설마 이걸 물으러 직접 온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이현은 다시 공손한 태도로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아니, 비굴하다고 하는 게 더 정확했다.

[이현: 그게요 게시판 보면요...]

[신마제국/루스: 네]

[이현: 어제요, 그러니까 어떤 놈이 저를 괴롭혔는데 너무 분해서 씩씩거리고 있었거든요. 근데 그때 루스님이 나타나서 그 사람 썰어주셨어요.]

[신마제국/루스: 그래서 고맙다?]

[이현: 네]

[신마제국/루스: 아닌 것 같은데.]

“뭔 의심이 이렇게 많아…!”

아니, 애초에 왜 내가 심문을 받고 있는 건데? 루스의 잘생긴 커뮤징 캐릭을 한 번 노려본 이현은 화면 맨 위에 뜬 디버프 시간을 확인했다. 거의 다 풀려 포획 디버프가 깜빡이고 있었다.

[신마제국/루스: 내가 누구 썰면서 고맙다는 말은 또 처음 들어서요.]

[이현: 네. 그렇죠?]

[신마제국/루스: 고마운 짓은 하지도 않았는데 그러니까 의심이 되잖아.]

[이현: ...그렇죠.]

[신마제국/루스: 그래서 대체 어떤 놈인가 해서 보러 왔는데, 생각보다 너무 불쌍해 보여서...]

[이현: 네...]

[신마제국/루스: 좀 도와줄까 합니다.]

[이현: 어떻게요?]

[신마제국/루스: 뭐, 이것저것.]

[이현: 그럼 저 안 죽여요?]

[신마제국/루스: 봐서?]

“이 새끼가!”

이현이 씩씩거릴 동안 신마족놈들은 다시 저들끼리 시시덕거렸다. 그 주제가 어쩐지 골리는 것만 같았다.

[신마제국/베리베리: ㅊㅋㅊㅋ 저희에게 잡힌 것을 환영합니다]

[신마제국/꼬마천재: 우리 길드로 ㄱㄱ]

[신마제국/베리베리: 잘 보살펴 드리죠. 친절히... 철컹철컹!]

[신마제국/꼬마천재: ㅁ1친ㅋㅋㅋㅋㅋㅋㅋㅋ]

여기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지? 이현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디버프는 이미 풀려 있었다. 방향키를 살짝 눌러보자 이동하는 걸 봐선 포획도 풀린 것 같은데, 무턱대고 등을 돌리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신마제국/루스: 도망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건데. 확 죽이는 수가 있어서요]

[이현: 네? 도망요? 제가요?]

[신마제국/루스: 아니면 뭐]

[이현: 근데 저 렙업 해야 돼서요... 놔주시면 안 될까요?]

[신마제국/루스: 그러죠]

[이현: 진짜요?]

[신마제국/루스: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놔주기가 싫네.]

[이현: 설마요; 아쉬워서 죽을 것 같은데]

[신마제국/루스: 그럼 더 있다가 가야겠네]

[신마제국/베리베리: 외치기나 할까? 신성족 애들좀 더 오라고 해봐.]

[신마제국/꼬마천재: 뭐 하나 붙잡고 철컹철컹 하시려고? ㅅㅂㅋㅋㅋㅋㅋ]

[신마제국/베리베리: 저 힐러는 루스꺼라, 쩝...]

이현은 앉은 자리에서 분노의 마른세수를 했다. 완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김성훈한테 쓸어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에 이현은 슬그머니 김성훈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때 김성훈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왜 또 울상이야.”

“야… 나 좀 살려줘.”

“뭐 문제 있어?”

막 보스를 잡고 파티를 쫑냈는지 김성훈이 헤드셋을 벗고 이현에게 몸을 돌렸다. 이현은 대답 대신 자신의 화면을 눈짓하며 몸을 슬쩍 비켜주었다. 김성훈이 몸을 기울여 모니터를 보더니 이내 씩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헤드셋을 쓰고 파티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쩐지 신이 난 목소리였다.

“아우르스 지역 화산봉우리로 모여요. 오랜만에 오골계 좀 고아먹읍시다. 루스랑 꼬마천재, 베리베리 있답니다.”

에르덴에는 따로 종족 별칭이라는 게 존재했는데, 유저들 사이에서 신성족은 닭둘기, 신마족은 오골계라고 불리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오골계는 바로 신마족을 뜻했다.

김성훈의 말에 여기저기서 금방 포스가 결성되었다. 포스는 파티 4개가 합쳐진 것으로, 한 포스 참여 인원은 최대 24명까지였다. 3명 잡는데 포스까지 결성한 걸 보니 다들 아주 작정을 한 듯했다. 김성훈의 지시아래 포스는 즉시 아우르스 지역으로 귀환했다.

24명이나 되는 만렙 유저들이 인던의 먼지를 휩쓸고 달려가는 모습에 여기저기서 냄새를 맡은 유저들이 눈치 빠르게 따라붙기 시작했다. 인원은 점점 불어나 화산봉우리 근처에 다다랐을 땐, 40명 가까이 되는 유저들이 김성훈의 화면을 바글바글 채우고 있었다. 그게 또 장관이라 이현은 제 모니터를 등지고 김성훈 옆에 딱 붙어 김성훈의 리딩을 지켜보았다.

“어쌔신 은신 쓰고 접근하겠습니다. 탱커, 격수들 먼저 갈게요. 후방 힐러들 대기해 주세요. 전투 트리 힐러는 탱커와 함께 앞으로 나오세요. 힐러님들 보호 못해드리니까 잘 피하시길 바랍니다.”

“우와….”

“포획, 침묵 걸리면 그냥 캐릭 버리세요. 힐러들 디버프 유저 힐 주지 마시고 즉힐 되는대로 탱커들한테 넣어주세요. 침묵이랑 넉백, 속박 트리 가진 분들은 꼬마천재 일점사3 합니다. 탱커분들은 루스 일점사 하세요. 어쌔신 분들은 베리베리 일점사 합니다.”

김성훈의 말에 바글바글 자리한 유저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리에 맞게 대기한 유저들이 주문서 도핑을 끝냈을 때, 김성훈이 짧은 심호흡 후 숨죽인 유저들에게 말했다.

“갑시다!”

구경꾼인 이현만 그걸 보며 속 편하게 짝짝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태평함은 얼마 가지 못했다. 정확히는 자신의 모니터 화면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말이다.

“뭐, 뭐야! 왜 이렇게 인원이 늘어난 건데?!”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3명이었던 신마족놈들이 20명 가까이 늘어나 있었다. 아니,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재빨리 스크롤을 올려 대화창을 훑어본 이현은 올라온 채팅을 보고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신마제국/꼬마천재: 님. 힐러님. 힐러님아?]

[신마제국/베리베리: 대답이 없으시네]

[신마제국/루스: 냄새가 나는데]

[신마제국/베리베리: 꼬랑내? 닭둘기 꼬랑내?]

[신마제국/꼬마천재: 우선 빠져나갈 귀환포탈 문 좀 열어놓고...]

[신마제국/베리베리: 베히아 성전 때 쓰려고 아껴놓은 건데... 지금 써야 될 타이밍이지?]

[신마제국/꼬마천재: 뭔데]

[신마제국/베리베리: 격전지 소환 스크롤]

[신마제국/꼬마천재: 읭? 의읭? 그거 어케 구함?ㅋㅋㅋㅋ 아니, 그거 가지고 있으면서 ㅅ1발 나 저번에 포스한테 개발릴 때 가만 있었단 말이지? 상놈이네 이거]

[신마제국/베리베리: 루스가 구해다 줬다, 븅1신아.]

격전지 소환 스크롤. 타종족 지역에서 지원군을 부를 수 있는 소환 스크롤이었다. 말이야 쉽지, 사실 저걸 구하려면 베히아에서 부여해주는 퀘스트를 다 깨야 했는데, 그 퀘스트를 끝내려면 몇 달간 현찰로 몇 백만 원을 투자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려운 퀘스트였다. 한데 그 귀한 걸 지금 저 베리베리 놈이 가지고 있단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그냥 김성훈한테 도와달라고 한 죄밖에 없는데, 어느새 일이 커져 살 떨리는 사태가 되어 버렸다. 격전지 스크롤 회랑을 타고 나타난 신마족들을 보며 이현은 다시 깊은 현타에 빠져들었다. 이 와중에 아무도 저를 죽이지 않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신마제국/루스: 이거 건들지 마세요.]

루스가 가리킨 건 멍 때리고 있는 이현의 캐릭이었다. 참 눈물 나는 배려였다. 그래, 정말 고마워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냥 절벽으로 확 뛰어들어? 아니야… 한 마리만 죽이면 렙업이잖아. 근데 나한테 다들 왜 그러는데…. 나 렙업 좀 하자고.”

[신마제국/루스: 어쌔신들 은신 써서 후방 힐러들 점사하세요. 우리 쪽은 최대한 힐러 보호하고요. 나머지는 알아서들 하고, 이 녀석 죽이면 가만 안 둡니다]

“그래… 겁나 고맙다.”

루스는 다시 한번 이현을 가리키며 죽이지 말라고 모두에게 못을 박았다. 이쯤 되니 이현도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이대로 있다가 틈을 봐 줄행랑이나 쳐야겠다. 이현이 그런 생각으로 움칫거리고 있을 때, 드디어 화산봉우리 입구에서 출발했던 신성족 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오골계 새끼들 격전지 스크롤 있습니다. 아처랑 거너들 격전지 회랑 먼저 파괴해주시고, 가죽 로브 점사 부탁드립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링 같은 격전지 회랑 위로 순식간에 화살비가 쏟아졌다. 그걸 보던 이현은 저도 모르게 김성훈의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어마어마한 숫자가 서로를 향해 벌떼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신마제국의 ‘용암’이 투철한 쇄격을 사용해 신성제국의 ‘민트캔디’에게 1200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신성제국의 ‘회색빛하늘’이 불꽃촉살을 사용해 신마제국의 ‘베르단디’에게 1870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신마제국의 ‘영걸’이 낙화의 분수를 사용해 주변 적들에게 광역기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신성제국의 ‘치유걸’이 사용한 치유의 손길로 신성제국의 ‘다덤벼’가 1980의 생명력을 회복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글이 사라지고 생겨났다. 붉게 물든 채팅창 너머로는 유저들이 온갖 스킬을 쓰며 상대편을 썰고 있었다. 확실히 쟁(PVP)에 특화된 내로라하는 유저들만 모인건지 현란한 스킬 사이로 잠깐잠깐 보이는 무빙 실력이 놀라다 못해 기가 막힐 정도였다. 찌르고 베고 후려치는 모습들이 무슨 물 만난 물고기들 같았다.

대부분 솔플을 하며 지냈던 이현은 실제로 이런 쟁이 있는지도 몰랐고, 저런 무빙들이 가능한지도 몰랐다. 어떻게 저런 컨트롤이 가능한지 심지어는 김성훈도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현은 쟁에 몰두한 김성훈에게서 떨어져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난리가 난 전쟁터 한복판에 이현의 캐릭만이 다른 세계 사람인 양, 고요히 서 있었다.

“어….”

진짜 안 건드네…? 화면을 돌려 주변을 훑어보니, 다들 이현을 등지고 날아다니고 있었다. 루스와 꼬마천재, 베리베리는 보이지도 않았다. 슬쩍 캐릭을 움직이던 이현은 옆에서 들려오는 김성훈의 말에 눈치를 살살 살피다 김성훈 캐릭인 ‘확실한놈’ 쪽으로 다다다 달려갔다.

“야, 이쪽으로 와. 광역기 있으니까 방어스킬 두르고.”

재빨리 보호 방어막을 두른 이현은 여기저기 쏟아지는 광역기를 피해 아처를 썰고 있는 김성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냉큼 그의 캐릭 뒤로 몸을 숨기고 힐을 넣어 주었다.

“나 먼저 간다!”

헤드셋을 쓰고 있어 김성훈이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현은 공격력 향상 버프를 마지막으로 걸어주고 그대로 등을 돌려 화산봉우리를 벗어났다.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스킬 효과음이 점차 멀어지고, 채팅창 위로 빠르게 올라가던 빨간 글씨가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신마족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채팅창 위로 더 이상 빨간 글씨가 올라오지 않자, 이현은 전력 질주를 멈추고 잠시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돌아본 순간 후회해야 했다.

“헉!”

이현의 뒤로 웬 신마족 놈이 검을 들고 쫓아오고 있던 탓이었다. 금방이라도 스킬을 날릴 것 같은 모습에 이현이 식겁해 달리자 채팅장 위로 빨간색 글이 올라왔다.

[신마제국/루스: 흐음, 줄행랑?]

‘루스’였다. 왜 하고많은 놈들 내버려두고 저를 쫓아오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화면을 돌려 바라본 루스 뒤로는 아니나 다를까 신성족 유저들이 욕을 하며 쫓아오고 있었다.

“저리가! 왜 따라오는데…!”

주문서는 물론 버프와 스킬까지 썼는데도 거리는 금방 좁혀졌다. 제 캐릭이 이렇게 불쌍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이현은 도망을 포기하고 공격 스킬을 캐스팅했다. 현재 배운 스킬 중 가장 강한 뇌전스킬이었다.

[베힐라오!]

Miss!

그럼 그렇지!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이현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 싸맸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 루스가 포획을 사용해 이현을 끌어당겼다.

―신마제국의 ‘루스’의 포획에 걸려들어 구속 상태가 되었습니다.

“내가 이것도 못 풀 줄 알고…!”

이거 저번에 김성훈이 어떻게 했던 것 같은데. 이현은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이며 키보드 여기저기를 누르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누르며 기도를 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이현이 스킬 칸이 있는 숫자를 눌렀을 때 캐릭이 포획에서 탁 풀려났다. 어쩌다 한 번 발동하는 이상 상태 해제 스킬이었다. 그러나 진짜 비극은 따로 있었다. 포획에 풀린 캐릭이 옆으로 밀려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어….”

이현의 눈동자가 깜빡거렸다. 그 눈동자에 떠오른 건 팔다리를 파닥거리며 추락하고 있는 불쌍한 제 캐릭이었다. 색이 분명했던 화면이 회색빛으로 물든 건, 팔다리를 휘적거리던 캐릭이 땅과 한 몸이 되어 죽었을 때였다.

그와 동시에 화면 위로 친숙한 문구가 떠올랐다.

―사망하였습니다.

그 상태 메시지를 보자마자 이현이 키보드를 뒤엎었다. 물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오, 안 해! 아홉수가 너무 심하잖아! 운영자들이 내 캐릭에 저주를 퍼부은 게 아니고서야 이럴 순 없어! 어떻게 79를 못 벗어나냐고…!”

옆에서는 아직 살아남은 김성훈이 열심히 PVP를 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씩씩거리던 이현은 김성훈의 모니터 화면에서 루스의 이름을 보자마자 김성훈의 옆에 붙어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현이 죽자마자 다시 쟁판으로 돌아온 건지 루스가 신성족들을 신랄하게 썰고 있었다. 치고 빠지며 스킬을 쓰는 솜씨가 욕 나올 만큼 대단했다. 힐끗 수를 헤아려보자, 신마족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무래도 회랑을 늦게 없애 그런 듯 했다.

김성훈은 이 와중에 혼자 베리베리를 쫓고 있었다. 베리베리는 소환사였는데, 다른 직업군보다 디버프 스킬과 상태 이상 스킬을 많이 가지고 있어 제압하기 까다로운 직업군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김성훈도 다른 때보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신마제국의 ‘베리베리’가 사용한 침묵의 활로로 침묵 상태가 되었습니다. 2분 동안 스킬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침묵에 빠진 김성훈은 바로 상태 이상 치료 물약을 먹어 침묵을 제거했다. 그리고 재빨리 베리베리와 거리를 좁히고 단검을 홱 휘두르며 스킬을 발동시켰다. 붉게 번져든 빛이 베리베리의 몸을 스친 순간 연속기가 터져, 어마어마한 데미지가 들어갔다.

―연쇄폭격을 사용해 신마제국의 ‘베리베리’에게 3500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크리티컬도 아닌데, 이만한 데미지가 들어간 건 딜이 상당하다는 뜻이었다. 감탄에 빠진 이현의 시선이 김성훈의 옆얼굴에 고정되었다. 그러나 베리베리가 사역수를 소환한 순간 판도는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에 더해 여기저기 쏟아지는 공격까지 피하느라 김성훈은 그 이후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했다. 결과는 당연히 패배였다.

“아, 죽었네.”

저항도 제대로 못해보고 맞이한 허무한 죽음에 맥이 탁 풀렸는지, 김성훈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너 엄청 잘한다….”

사실 그대로 말한 것뿐인데, 김성훈은 위로라고 생각했는지 피식 웃으며 모자 쓴 이현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저놈은 왜 안 죽어, 짜증나게.”

“루스? 저거 못 죽여. 저놈 컨도 컨인데, 상황판단도 빨라서 치고 빠지는 게 아주 대단한 놈이야. 감도 좋고. 단체로 덤비면 죽이기는 하는데… 섭에 1:1로 붙어서 저놈 이긴 사람 아무도 없어.”

“전체 순위가 4위더만.”

“야, 넌 아는 게 대체 뭐냐…. 공적 아이템 때문이잖아. 남들은 벌벌거리면서 사는 아이템을, 저놈은 수백 개씩 사서 채워 넣고 다닌 다더라. 그 정도에 4위면 뭐 1위나 다름없지.”

공적 아이템. 기존 아이템이랑 재사용 쿨타임이 따로 도는 희귀등급 아이템이었다. 공적으로 살 수 있는 것으로, 공적이 쥐꼬리만 한 이현은 구경도 못하는 아주 대단한 아이템이었다. 공적은 상대 종족을 죽이거나 레이드에서 승리를 하면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상대 종족 10명을 죽여야 겨우 물약 1개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모으기 어렵달까. 일종의 PVP 포인트라고 할 수 있었다.

“하… 결국 우리가 졌네.”

회색화면 너머에서 승리의 함성을 외치는 이들은 신마족 유저들이었다. 그 안에는 루스와 꼬마천재, 베리베리도 서 있었다. 저 난리통에 살아남은 걸 보니 진짜 잘하기는 잘하는가 보다.

“근데 왜 왔지?”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죽이려고 온 건 더더욱 아닌 것 같았다. 도무지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골똘히 루스의 음흉한 속셈을 생각하던 이현은 배 속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에 생각을 그만두고 김성훈을 툭툭 쳤다.

“왜.”

“밥 먹으러 가자.”

“이건 꼭 사준다고 하면 배 속에 거지가 있어.”

샌드위치를 4개나 먹어 치워놓고 더 들어가냐고. 김성훈의 타박에도 이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고기고기’하고 노래를 불러댔다. 그 노래에 결국 김성훈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했다.

“근데 애들은? 온다면서.”

“술 처먹고 뻗었지, 뭐. 새벽 5시까지 마셨다.”

“왜 넌 멀쩡한데?”

“내가 좀 대단해서.”

“지랄!”

“고기 먹고 싶지 않은가 보다? 이딴 식으로 나오는 거 보면.”

이현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원래 사주는 놈이 왕이다. 그걸 머릿속에 넣으며 이현은 김성훈의 뒤를 얌전히 따라갔다. 내일 있을 일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그리고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고기를 욱여넣었다. 김성훈의 지갑을 거덜 낼 기세로 말이다.

***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침 댓바람부터 피시방에 와서 에르덴을 한 게 잘못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깎인 경험치 좀 올리겠다고 혼자 인던에 나온 게 잘못이었을까. 이현은 허망한 표정으로 멍하니 자신의 캐릭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제 캐릭이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럴지도 몰랐다. 몹은 잡아보지도 못하고 ‘포획’에 걸려 무릎 꿇고 있으니 말이다.

“…나 렙업 해야 되는데.”

제 캐릭을 잡고 있는 유저는 희대의 앙숙관계인 신마족 유저였다. 그것도 어제 이현이 죽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루스’말이다.

[신마제국/루스: 또 보네요. 이런 우연이]

우연 같은 소리 하네. 분명 노린 거다. 팔짱을 낀 채 무릎 꿇은 제 캐릭을 내려다보고 있는 루스의 모습이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가 없다. 그러나 일단 죽으면 안 되니 나가는 말은 공손했다.

[이현: 하하... 안녕하세요]

[신마제국/루스: 반가운 눈치가 아닌 것 같은데.]

너라면 반갑겠냐. 이를 으득 간 이현은 분노의 타자를 치려다 마음을 다스렸다. 렙업을 해야 했다. 마의 79를 찍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다.

[이현: 반가워서 눈물이 다 나는데...]

[신마제국/루스: 얼마나 반가웠으면 도망을 다 갈까]

[이현: 제가 도망을 갔다고요? 못보고 지나친 거 아닐까요?]

[신마제국/루스: 흐음, 반대방향으로 달려가던데.]

[이현: 아닐걸요...?]

[신마제국/루스: 그럼 다행이네. 다른 건 아니고, 어제 그렇게 죽게 해서 미안해서요]

그 말에 이현의 눈동자가 도륵 굴러갔다. 진짠가? 저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현은 흘기듯 루스를 보다 의심을 가득 담고 물었다.

[이현: 진짜요?]

[신마제국/루스: 네]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죽으면 안 되니 이현은 이쯤에서 수긍하기로 했다. 어서 빨리 수긍하고 루스를 보내야 했다.

[신마제국/루스: 그래서 도와주려고 왔습니다]

[이현: 안 도와주셔도 돼요]

[신마제국/루스: 이왕 온 거 돕도록 하죠]

이현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제도 그래놓고 죽인 주제에, 오늘도 버젓이 와서 저러는 걸 보니 꿍꿍이가 있다고 밖에 생각할 길이 없었다. 의심의 눈초리로 루스를 바라보고 있길 한참, 이현은 도중에 어떤 깨달음을 얻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과 함께 이현은 재빨리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현: 루스님,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요]

[신마제국/루스: 말해보세요]

[이현: 저 남자예요]

[신마제국/루스: 그게 지금 상관이 있나?]

[이현: 루스님 여자세요?]

[신마제국/루스: 남자입니다]

“…근데 나한테 왜 저러지?”

이현은 루스가 의도적으로 접근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별을 밝힌 건데, 예상했던 반응에서 한참이나 빗나갔다. 꼬시려고 하는 게 아니면 대체 뭣 때문에 접근한 건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쥐뿔도 없는 공적은 아닐 테고.

[이현: 그럼 왜 그러세요?]

[신마제국/루스: 제가 어제 그랬던 것 같은데. 불쌍해서 좀 도와줄까 합니다, 라고]

[이현: 그래놓고 어제 저 죽였잖아요]

[신마제국/루스: 말은 바로 하죠. 그건 혼자 죽은 거지.]

아니, 꼭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잖아. 이현은 괜히 민망해져, 불퉁한 태도로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루스는 이현의 말을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남의 땅까지 쳐들어와서 치근덕거릴 리가.

[이현: 저 진짜 남자예요.]

[신마제국/루스: 다시 말하죠. 그게 지금 상관이 있나?]

[이현: 안 믿는 거 같아서요. 근데 진짜예요. 속이는 거 아니고, 진짜요.]

[신마제국/루스: 네]

[이현: 방명록 가면 남자로 나와 있어요]

[신마제국/루스: 압니다]

[이현: 그러니까 저 그냥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저 렙업 해야 된단 말이에요. 네?]

이현은 비굴함과 애원을 섞어 필사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팔짱 낀 채 서 있는 루스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현: 아니면 한 번만 죽어드릴게요. 죽이고 우리 그냥 쫑내요.]

[신마제국/루스: 공적도 없으면서 귀엽게도 말하네요]

[이현: 그야 저 죽여도 얻어가는 공적은 없겠지만... 사람이 너무 솔직하시네요... 마음 아프게]

[신마제국/루스: 이런, 아팠습니까?]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어쩐지 머리가 아파져 이현은 이마를 슬쩍 짚었다. 도저히 말이 안 통했다. 죽여 달라고 해도 안 죽이고, 그렇다고 도망가면 포획으로 끌어다 앞에 앉혀 놓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농락도 아주 이런 농락이 없었다.

[이현: 저 진짜 렙업 해야 된다고요ㅠㅠ 이러지 말고 우리 만렙돼서 봐요, 네?]

[신마제국/루스: 지금부터 하면 되겠네요]

[이현: 해도 돼요?]

[신마제국/루스: 뭐 도망만 안 간다면야]

[이현: 안 갈게요! 진짜 안 가요. 대신 저 죽이지 마세요. 진짜요]

[신마제국/루스: 봐서요]

맥초딩같이 개념 없이 덤비기라도 하면 마음껏 욕이라도 퍼부어줄 텐데, 루스는 다른 유저들과 달리 이모티콘이나 채팅용어를 쓰지 않았다. 덕분에 이현도 괜히 공손해지고, 채팅용어를 안 쓰게 되었다. 이게 사람 따라 간다고, 루스 위주로 맞춰지고 있는 게 스스로도 확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에르덴은 학생들보다 성인들 위주의 게임이라 대부분 유저들은 이모티콘을 사용하지 않았다. 많이 쓰이는 건, 욕을 가장한 줄임말이나 욕과 섞인 채팅용어 정도였다.

[이현: 그럼 저 사냥해도 되죠?]

[신마제국/루스: 해도 됩니다]

[이현: 감사요!]

포획이 풀리자마자 캐릭을 벌떡 일으킨 이현은 루스에게 감사의 모션을 취한 후, 근처에 돌아다니는 ‘에마누’를 잡기 시작했다. 에마누는 버섯처럼 생긴 몬스터로 독을 뿜는 LV.70대의 선공 몹이었다. 사실 어제 갔던 화산 봉우리를 가고 싶었지만, 어제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또 추락사를 할까 봐 그냥 평지에서 사냥하기로 한 것이다.

[베힐라오!]

―번뇌의 일격으로 에마누에게 891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번뇌의 일격 연속기 번뇌의 낙인 효과 발생했습니다. 에마누의 방어력이 하락되었습니다.

속박과 공격 스킬을 번갈아 사용하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에마누를 잡던 이현은 잠시 마력도 채우고 쉴 겸 해서 캐릭을 바닥에 앉혔다. 그러다 주변을 돌아봤는데, 제 땅으로 돌아간 건지 아까까지만 해도 있던 루스가 보이지 않았다.

“지루했나보지.”

말도 걸지 않고 닥사만 했으니, 보는 상대방은 지루했으리라. 진득하게 자리 잡고 솔플을 할 때마다 김성훈도 매번 질린다는 듯 쳐다볼 정도였으니, 루스라고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이제 5마리 정도만 잡으면 렙업이다!”

박수를 탁 치며 이현은 다시 나 홀로 솔플 사냥에 나섰다. 이렇게 재밌는 솔플을 유저들은 왜 그렇게 몸부림까지 치며 싫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갑갑하고 칙칙한 던전과 달리 이 얼마나 아름답고 장황한 전경인가.

[베힐라오!]

―주신의 응보를 사용해 에마누에게 900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찬란한 빛이 에마누를 덮쳤다. 이슬비처럼 떨어지는 빛가루에 몸부림치던 에마누는 이현에게 마지막으로 독침을 날리고 그대로 버섯구이가 되어 죽어버렸다. 조금만 더 시전거리를 벌렸으면 맞지 않았을 공격이었다.

“김성훈이 봤으면 이것도 못 피하냐며 지랄지랄 했겠지.”

실제로 피할 수 있는 공격임에도 이현은 귀찮거나, 어차피 회복하면 그만인데 라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피하지 않았다. 그게 실상 그를 발컨으로 만드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좋았어! 이제 4마리…!”

오늘은 기필코 렙업을 하고 마리라. 비장한 표정을 한 채 이현은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제 피와 살이 될 몹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몹이 막 리젠되어 눈앞에 딱 떨어졌을 때였다. 스킬을 캐스팅 하던 이현의 캐릭 위로 붉은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캐릭이 뒤로 쭉 밀렸다. 기습이었다. 기습을 한 상대는 신마족 어쌔신 유저였다.

―신마제국의 ‘구우몬’이 은신을 해제하였습니다.

―신마제국의 ‘구우몬’이 사용한 혈격으로 560의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피격으로 공중속박 상태로 접어들어 30초간 스킬 사용이 중지됩니다.

“…….”

순식간에 당했다. 은신을 쓰고 접근한 탓에 눈치조차 못 챘다. 이현은 눈만 껌뻑이며 공중속박에 걸려 허공에 떠 있는 자신의 캐릭을 응시했다. 공격을 퍼붓는 어쌔신의 모션이 현란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이현은 화려한 스킬공격에 저항 한 번 못해보고 그대로 죽어버렸다. 이현이 죽고 어쌔신은 승리의 모션으로 양손에 쥔 단검을 휙 돌리며 공중제비를 한 번 했다. 쓸데없이 멋있는 모션이었다.

“내 경험치….”

이현의 표정이 암울해졌다. 열심히 쌓아올린 경험치가 다시 쭉 줄어들어 있었다. 이거야말로 완전 망캐였다. 저주받은 망캐. 심각하게 전직을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채팅창 위로 빨간 글이 올라온 건.

[신마제국/구우몬: 우리 이현이 여기 있었네?]

[이현: ?]

[신마제국/구우몬: 고맙다던 루스는 만났어? 둘이 쌍으로 ㅈㄹ 염1병 떨어야지.]

이현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구우몬은 지금 비꼬고 있는 것이다. 맥초딩이 자유게시판에 쓴 개같은 글을 보고 말이다.

[신마제국/구우몬: 형이 너 찾는다고 열라 졷빼고 다녔는데 인사라도 해야지ㅋㅋㅋ]

[이현: 유치하게 이러지 말고 ㄲㅓ져요]

[신마제국/구우몬: 이현이가 말버릇이 참 안 좋네. 다음에도 썰리고 싶어? 개념 없다더니 이렇게 없을 수가]

[이현: 개념은 니가 더 없거든 초딩색갸]

[신마제국/구우몬: ㅋㅋㅋㅋㅋ 아 뒷골땡기네 ㅅㅂ]

그냥 무시하고 마을로 귀환하면 끝날 일이었지만, 어쩐지 이대로 가면 호구로도 모자라 등신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이미 욕도 먹을 만큼 먹었겠다, 이현은 전투적으로 타자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 마디라도 해주고 가야겠다.

[이현: 관종이네. 내가 루스랑 염1병질을 하든 ㅈ1랄을 떨던 뭔 상관?]

[신마제국/구우몬: 관종ㅋㅋㅋㅋ 관종은 븅1신아, 너잖아. 심심했는데 겁나 활기가 돋아나네. 기대해라 이현아. 형이 날마다 썰어줄게. 루스한테 가서 꼰질러야지? 근데 그 새끼가 너 같은 걸 봐줄지 모르겠닼ㅋㅋㅋㅋㅋㅋ]

[이현: 너보단 낫거든요]

[신마제국/구우몬: 있는 척 개 오지넼ㅋㅋㅋㅋㅋ 지는 뭐 대단한 줄 아나. 발컨 주제에 어디서 오지는 척이야ㅋㅋㅋ 개념이나 챙겨갖고 다녀 새ㄲㅑ]

이현은 처음으로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격렬하게 사로잡혔다. 과거로 다시 돌아가 고맙다고 썼던 자신을 후려패고 싶었다. 그랬다면 루스는 물론 이 찌질한 새끼도 안 봤을 테고, 만렙은 찍고도 남았을 것이다.

[신마제국/구우몬: 왜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가 되셨나?ㅋㅋㅋ 이현이 멘탈 나갔어? 이리와, 형이 또 썰어줄게.]

“꺼져, 이 새끼야!”

이현은 구우구우거리는 구우몬에게 가운데 손가락 이모티콘을 날리고 재빨리 귀환 버튼을 눌렀다. 얼핏 지도 한쪽 면에 붉은 점이 잡힌 것도 같았으나, 금세 화면이 전환되어 그게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알아챌 수 없었다. 아주 잠깐 루스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뿐이었다.

“아, 고난기가 따로 없네.”

이거야말로 고난기였다. 그래도 루스한테 벗어났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현은 착잡함을 털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열심히 놀고 있었더니, 어느덧 점심이 되어 있었다.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하기로 한 이현은 캐릭을 잠수모드로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겜인생은 어렵구나….”

절로 푸념이 흘러나오는 하루였다. 그래도 구우몬에게 한 마디라도 해준 게 어디인가 싶어, 이현은 그걸 위안으로 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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