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힐러의 현모기
[레옹프리오: 탭현아~~~ 개개신이 뭔지 아니~~~~~]
[공작새: 이현아~ 제보 좀 하게 그만 니네땅 좀 가라]
[띵작띵작: 탭현아, 나도 무기 맥강 좀 해보자!!!!]
길드 부지 밖에서 돗자리를 펴고 앉아 외치는 신마족들의 작태에 이현은 채집을 하다 말고 무기를 꺼내들고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식겁한 유저들이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통쾌한 모습들이었다.
물론 그건 이현을 보고 달아나는 게 아니었다. 이현의 뒤에 버티고 있는 루스의 후환이 두려워 그러는 것이다. 요 근래 이현이 여기저기 쏘다닐 때마다 루스는 마치 금붕어 똥처럼 따라붙어 경호 아닌 경호를 해줬는데, 마주치는 적들마다 루스를 보자마자 달아나는 게 아무래도 루스가 여기저기 행패를 좀 많이 부리고 다닌 모양이었다.
덕분에 이현은 에르덴을 해온 이래, 처음으로 통쾌함에 젖어 살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나대다가 은신하고 잠복해있던 어쌔신한테 기습을 당해 썰리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좌절해 울 때면, 루스가 대신 철저한 복수를 해주었다.
[태풍이: 탭현아, 루스한테 개개신 좀 물어봐라ㅋㅋㅋ 무슨 반응인지 같이 좀 보자ㅋㅋㅋㅋ]
식겁해 달아나는 와중에도 유저들은 뭐가 그리 궁금한지 개개신에 대해 물어왔다. 그놈의 개개신이 뭐기에 며칠간 이렇게 찾아와 못살게 구는지, 이현은 슬슬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스는 물론, 근처에 발발거리며 뛰어다니는 베리와 꼬마에게 물었다간 왠지 엄청나게 시달릴 것 같아 차마 묻지는 못했다.
[베리베리: ㅅㅂ, 저 인절미 새ㄲ1들이 아직도 개개신 타령이네]
[꼬마천재: 캐삭이나 해라, 미1친 넘들아ㅡㅡ]
저렇게 나오니 차마 물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슬쩍 물어봐야지. 이현은 혼자만의 다짐을 마음에 새기며 다시 루스의 곁으로 돌아가 채집을 하기 시작했다. 그간 느낀 게 있다면, 신성족 땅이든, 신마족 땅이든, 루스의 곁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루스 곁에 있으면 어쩐지 채집도 잘 되는 느낌이었다.
[꼬마천재: 힐러님 왜 자꾸 채집하심? 이제 그만할 때도 된 것 같은데]
[베리베리: 어차피 옮기지도 못하는데... 하지마여 주륵...]
[꼬마천재: 돈이라도 가지고 가려고? 우리가 준다니까. 빨리 캐삭ㄱㄱ]
아니, 이것들은 질리지도 않나…. 이현은 채집을 하다 말고 앞으로 튀어나가며 분노의 타자치기를 시전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스완다는 아주아주 희귀한 아이템이다.
[신성제국/이현: 싫어요! 스완다 정산하고 갈 거예요]
[베리베리: 아니... 대체 얼마나 부자가 되고 싶은 거야...]
[꼬마천재: 내가 스완다 찾아다 캐줄 테니까 이전ㄱㄱ]
[베리베리: 거목의 신전 근처에 스완다 개많다는 제보 있는데 같이 가시져!]
[신성제국/이현: ...진짜요?]
[베리베리: ㅋㅋㅋㅋㅋㅋ 아고 그럼요. 엄청 많아요]
[꼬마천재: ㅋㅋㅋㅋㅋㅋ루스 진짜 어디서 이런 걸ㅋㅋㅋㅋ]
스완다면 아니었음 진짜 바로 뛰쳐나갔을 텐데, 그놈의 스완다가 뭔지 이현은 베리와 꼬마 앞에 얌전히 쪼그려 앉았다. 더 들어보겠다는 무언의 태도였다. 그러나 이현이 바닥에 앉자마자 꼬마와 베리는 땅을 굴러다니며 ‘ㅋㅋㅋㅋㅋ’를 연발했다.
그 모습에 이현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뒤에서 루스가 이현을 부른 것도 그때였다.
[루스: 이현씨]
데굴데굴 구르는 꼬마와 베리를 버려두고 이현은 잽싸게 화면을 돌려 루스한테 달려갔다.
[루스: 이현씨 못 먹는 거 있어요?]
[신성제국/이현: 아니요. 저 다 잘 먹어요. 잘 먹는데... 스완다가 안 팔려요]
[루스: 그랬어요?]
왜 내 것만 안 팔리지? 다른 놈들 건 올리면 바로 사가던데. 이현은 괜히 판매진행중인 상태창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리 높게 올린 것도 아닌데도, 누가 사주라도 했는지 이현의 스완다는 며칠째 팔리지 않고 있었다.
[꼬마천재: 거 너무 집착해서 그렇다니까]
[베리베리: ㅇㅇ 걍 넘어와요]
심지어 이것도 집착이란다. 이현은 간만에 현타온 표정으로 피시방 천장을 응시했다. 오늘따라 칙칙해 보이는 게 마치 제 앞날 같았다. 그런가? 내가 너무 집착해서 애들이 나만 비껴가나?
[베리베리: 현모하기 전까지 넘어온다더니ㅋㅋㅋㅋ 큰일났네]
[꼬마천재: 그러게ㅋㅋㅋ]
[신성제국/이현: 왜요?]
[베리베리: 그야...]
[꼬마천재: 내일이 현모날이니까]
[베리베리: ㅋㅋㅋㅋㅋㅋ 어이쿠! 현모날까지 캐삭 안하면 뭐라고 했더라?]
[꼬마천재: 그 옛날 유행하던 ‘장’소리를 내뱉었지ㅋㅋㅋㅋㅋ 물마시고 있었는데 아놔, 그 소리에 모니터에 뿜었잖아ㅋㅋㅋㅋㅋ 장이 뭐야ㅋㅋㅋㅋ]
[베리베리: 에잇! 제 손에 장을 지질게요!]
“나 그렇게 안 했거든?!”
어디서 약을 팔고 있어! 이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니터를 잡고 탈탈 흔들었다. 남는 자리가 없어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던 김성훈의 살벌한 시선이 날아들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대신 귓속말이 날아들었다.
[귓속말/확실한놈님으로부터: 자리에 앉아라, 등1신아 ㅡㅡ 쪽팔린다]
그 글을 보자마자 이현은 번개 같은 속도로 자리에 앉아 타자를 두드렸다.
[귓속말/확실한놈님께: 개객기야. 너 낼 현모인거 알았냐?]
[귓속말/확실한놈님으로부터: ㅇㅇ]
“아 왜 말을 안 해줘!”
[귓속말/확실한놈님으로부터: 일주일 전부터 말했다, 새1ㄲ1야. 낼 예쁘게 씻고나 와라]
누가 들으면 안 씻고 다니는 줄 알겠네. 이현은 김성훈에게 욕을 한바가지 날려주고 다시 일반채팅창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베리와 꼬마가 열심히 이현을 찾고 있었다.
[베리베리: 힐러님, 힐러님.]
[꼬마천재: 당장 캐삭ㄱㄱ]
[신성제국/이현: 캐삭 하긴 할건데요. 그게 마음의 준비도 해야 하고... 또 아직 창고 정리도 못했는데, 오늘 다 정리하고 가면 늦을 거고...]
[신성제국/이현: 그러니까 그냥 현모 지나고 하면 안돼요? 진짜 꼭 할게요]
[베리베리: 오구오구! 그렇게 해여!]
[루스: 천천히 해도 되니까 이현씨 편할 때 해요]
[신성제국/이현: 감사합니다!]
루스의 말에 암울한 표정으로 있던 이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이현은 루스에게 다가가 ‘기쁨의 포옹’을 해주고 텀블링을 하며 그의 주변을 뛰어다녔다.
[꼬마천재: 그건 그거고! 그래서 현모장소 어디임?]
[베리베리: 츠쿠요미ㄱㄱ]
[꼬마천재: ㅋㅋㅋㅋ 진짜 거기 갈거임? 길마님 주머니 각오 좀 하셔야겠는데ㅋㅋㅋㅋ]
츠쿠요미? 베리와 꼬마의 채팅을 보던 이현의 눈이 껌뻑거렸다. 이현이 모임할 때 가는 선술집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현이 알기로 서울 내 ‘츠쿠요미’ 이름을 딴 선술집은 하나였다.
[루스: 예약했으니까 거기로 내일 7시까지 모여]
[꼬마천재: 올ㅋㅋㅋ 개멋지다!ㅋㅋㅋ 겁나 땡겨주마ㅋㅋㅋ]
[베리베리 오예!! 비싼거다, 비싼 거!]
[루스: 대략 20명 쯤 온다니까 미리 와서 정리 좀 하고.]
[꼬마천재: 누구 말씀인데ㅋㅋㅋㅋ 걱정마시죠]
[베리베리: 1빠로 도착해 있겠음]
[루스: 이현씨는 천천히 와요]
안 가고 싶다. 심각하게 가기 싫다. 침을 꿀꺽 삼킨 이현은 주먹을 말았다 폈다 꼼지락거리다가 루스가 돌아봤을 때에야 알았다며 공손히 대답했다. 더불어 꼭 가겠다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아, 씨…. 거기잖아.”
안보고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이다. 심지어는 그곳 사장님은 이현을 ‘주님 친구’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주님 친구’는 별다른 뜻이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의 호칭.
그러니까, ‘츠쿠요미’ 선술집은 김성훈이 건물주로 있는 가게였다. 심지어는 3층까지가 선술집의 규모였다. 호화스러운데다 접대나 회식용 룸 형식으로 운영되는 곳이기 때문에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가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김성훈이 루스랑 작당이라도 했나….”
문득, 이현은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쩐지 아귀가 맞아떨어지듯 맞물리는 게 누가 짜고 치기라도 한 듯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루스가 돈이 대박 많은 놈이라는 걸.
“거기… 겁나 비싼데.”
돈이 어마어마하게 깨지는 곳.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비싼 회가 나오는 그런 곳에서 루스는 지금 현모를 하자는 것이었다. 4명이 먹을 때도 심지어 몇십은 나오는데, 무려 20명이나 되는 식대를 혼자 쏘겠단다.
이걸 바로 먹을 복은 있다고 하는 건가. 이유모를 식은땀과 함께 맥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현은 식은땀을 손등으로 대충 훔치며 근처에 놓인 생수를 원샷했다. 어쩐지 목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
“이거 또 딴 데로 샌 거 같은데….”
떠들썩한 분위기 사이에서 성훈은 남모르게 손목시계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6시 45분. 7시까지 모이기로 한 현모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건 딱 2명뿐이었다. 채이현과 꼬마천재. 꼬마천재는 근처라고 했으니, 남은 건 채이현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걸리더라도 태우고 오는 건데….’
일이 있어 다른 곳에 들른다고 채이현을 내버려 둔 게 잘못이었다. 어지간하면 데리러 가는데, 하필 오늘따라 여기저기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 채이현을 태우러 갈 수가 없었다. 결과는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다.
성훈은 버릇처럼 목덜미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채이현, 그놈이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엇, 확실님 술잔이 비었네요. 받으시죠.”
“마초님이 주시는 건데 당연히 받아야죠.”
“이야, 멀끔하게 생긴 것도 부러운데 싹싹하기까지. 크으,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
언제 한숨을 쉬었냐는 양, 성훈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마초에게 냉큼 잔을 내밀었다. 성훈이 존경해 마지않는 마초는 이름만큼이나 남자답고 호쾌한 성정의 사내였다. 물론 생긴 것도 다부지고 아주 건강하게 생겼다. 내일 모레면 30살이라고 우는 소리를 하는데, 사실 이미 30살은 넘어 보이는 외모를 가진 터라 성훈은 그저 하하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힐러님은 오고 있긴 하나? 빨리 보고 싶은데.”
그에 비해 사케잔을 빙빙 돌리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베리베리는 굉장한 동안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성훈보다 4살이나 많았지만,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고 있기 때문인지 무척이나 개구진 분위기를 풍겼다. 또래 같은 친숙함이 들 정도였다.
“하하, 걔가 어제 창고 정리한다고 글쎄 집에 안 가더라고요.”
“와, 미치겠다. 힐러님 진짜 귀엽네.”
“오긴 할 거예요. 그래도 약속은 지키거든요.”
성훈의 시선이 말없이 잔을 기울이고 있는 루스에게 옮겨졌다. 순간 루스와 성훈의 시선이 마주쳤다. 날카로운 눈매 안에 자리한 나른한 눈동자가 무심하게 성훈을 훑었다.
“…루스님 진짜 잘생기셨네요, 하하.”
아부를 담아 말했지만, 사실 반은 진담이었다. 절로 시선이 가는 외모가 부러우리만치 시선을 잡아끌었다. 맨 처음 현모 장소에 도착해 그를 봤을 때만 해도, 상당히 놀랐던 성훈이다. 그러나 그게 외모 때문은 아니었다. 지나친 익숙함 때문이었다.
“저 놈은 세상 혼자 삽니다. 같이 다니면 내가 다 짜증나요.”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옆 사람과 비교하게 되는 외모를 보니 그냥 납득이 갔다. 성훈은 애써 웃으며 ‘베리님도 잘 생기셨어요.’하고 아부성 발언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무안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는데, 한창 얘기중인 옆 테이블에 시선이 꽂혔다. 여자 남자가 섞인 자리였는데, 달릴 준비를 하는지 술병을 흔들며 시동들을 걸고 있었다. 오래 본 사람들인지 어울리는 데 다들 스스럼이 없었다.
20명 정도가 모인다고 해서 이거 개판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던 성훈은 생각보다 정돈된 분위기에 새삼 놀라고 말았다. 그렇다고 무겁다거나 그런 건 또 아니었다. 밝고 유쾌하게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현모를 즐기고 있었다. 물론 눈앞에 있는 음식과 술이 분위기를 띄우는 데 크게 한몫했지만 말이다.
“저희 길드는 일단 만났다 하면 소맥을 말아서 그냥 바로 들이붓는데, 여긴 그래도 시작이 좋네요.”
“우리도 꼬마 오면 미칩니다.”
“자, 꼬마 오기 전에 빨리 속이나 채워놓고 있읍시다.”
“그놈, 그거 말술이에요.”
뭐가 그리 무서운지 마초와 베리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앞에 있는 스끼다시와 회를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술잔을 머리 위로 들고 느닷없이 ‘타협 만세!’를 외쳤다.
“타협 만세!”
“타협 쩐다!”
“타협 만만세!”
‘만세’가 외쳐진 순간 매크로처럼 여기저기서 ‘타협 만세’가 터져 나왔다. 술잔을 들고 외쳤던 마초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매크로가 끝났을 때에야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술맛 좋다!”
“뭐야, 아직 7시도 안 됐는데 지들끼리 마시고 있어.”
낯선 목소리가 치고 나온 것도 그때였다. 성훈의 시선이 빠른 속도로 옆으로 향했다. 언제 들어온 건지, 양손 가득 커피 캐리어를 든 사나운 인상의 사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성훈이 앉은 테이블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왔냐?”
“헐, 뭔 커피를 그리 바리바리 사와? 미쳤냐?”
“꺼져. 너 줄 거 아니다. 뽀시래기 힐러님 드릴 거.”
뽀시래기 힐러란다. 속으로 픽 웃은 성훈은 저를 보는 시선을 깨닫고 냉큼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확실한놈입니다.”
“아, 확실님이에요? 꼬마천재예요. 힐러님은 아직 안 왔나?”
“곧 올 거예요, 하하….”
테이블 한쪽에 사온 커피를 올려둔 꼬마는 빈자리에 앉자마자 술잔을 낚아채며 씩 웃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각오하라는 듯 보여서, 성훈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켜야 했다. 그러나 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도로 술잔을 내려놓았다. 술 달라는 말 대신 튀어나온 건 뜻밖에도 웃음소리였다.
“아, 씨발…. 생각하니 웃기네.”
“뭐야, 혼자 처웃고 있어.”
“아니, 내가 방금 커피사러 간 카페에서 누굴 봤는데 개웃겨서.”
그러면서 꼬마는 모두에게 카페에서 있던 얘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웃겼는지, 말하는 도중에도 꼬마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니, 커피 사고 나오는데 문 근처에서 어떤 남자애가 허겁지겁 케익을 먹고 있더라고… 아, 씨… 아직도 웃기네.”
“먹는 게 웃기다고?”
“누가 쫓아오는지 그냥 막 입에 처넣는데, 입가에 생크림을 덕지덕지 묻히고 먹잖아.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 니들은 봐라, 나는 먹겠다 이러고 있었다니까.”
꼬마의 말이 이어질수록 성훈의 표정에 피곤함이 깃들었다. 종래는 이마를 짚고 그 얘기를 경청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살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오면서 힐끗 봤단 말이야? 내가 고개를 내밀고 쓱 보니까 케익을 아예 품안에 끌고 가서 먹는데 눈에 경계가 가득해. 무슨 내가 뺏어 먹냐고. 왜 경계를 해, 경계를… 아, 겁나 웃기네.”
“왜 혼자 웃고 지랄이야.”
“와, 씨…. 근데 오밀조밀 생긴 게 사내새끼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더라고. 사내놈 그렇게 생긴 거 진짜 처음 본다. 요즘 애들 유전자가 다르긴 달라.”
꼬마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살벌한 표정으로 경청하던 성훈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한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성훈에게 꽂혔다.
“잠시 여우새끼 좀 잡아올게요.”
“어?”
“여우?”
“어, 어… 그래요….”
얼떨떨한 모습으로 대답하는 이들을 등지고 성훈은 무서운 기세로 회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 뒷모습을 모두는 그저 눈만 껌뻑인 채 바라볼 뿐이었다. 성훈의 모습이 사라지자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레 꼬마에게 옮겨졌다.
“술이나 마셔.”
자작을 하며 꼬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서 캐리어에 든 커피를 차근차근 테이블 위에 정렬시키는데, 8개나 되는 커피를 늘어놓고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뿌듯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우리 2차는 서시열네 가서 깽판 좀 치자.”
“콜. 좋은 생각이다.”
“나도 콜.”
“확실님이랑 힐러님도 데려가자.”
“콜.”
“멋대로 정하지 마.”
저들끼리 짜고 작당하는 삼인방에게 루스가 술잔을 기울이며 대꾸했다. 무심한 듯 보이는 입매가 다른 날보다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모두 그걸 아는지, 평소보다 더 루스에게 치근덕거렸다.
“짜식, 오랜만에 집 구경 좀 하자.”
“멀쩡히 걸어갈 테니까 걱정 마라.”
“힐러님은 술 별로라고 했으니까, 우리 마실 동안 커피 쥐여주고.”
“뭐야, 그래서 사온 거야? 짜식, 간만에 머리 좀 썼네?”
얼마나 그렇게 술잔을 딱딱 부딪치며 웃음을 쏟아내고 있었을까, 별안간 닫힌 장지문 너머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왔다. 싸우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하나 둘,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소리가 들려오는 장지문 쪽을 바라보았다. 투닥거리는 목소리가 장지문을 뚫고 고요해진 회장 안을 가득 울렸다.
“이 새끼는 꼭 시간 맞춰 오라고 하면 딴 데로 새고 있어. 그 상황에서 케익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어?!”
“아, 왜! 아직 7시 아니잖아!”
“7시 되기 1분전이다, 새끼야!”
“그것만 먹고 오려고 했거든?! 그리고 별로 먹지도 않았다!”
“입에 묻은 크림이나 닦고 얘기해!”
“머, 먹다 보면 입에 좀 묻을 수도 있지! 왜, 뭐!”
“좀 같은 소리 하네! 볼에도 다 묻었다, 이 새끼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 속에 차츰 호기심이 실리기 시작했다. 기웃기웃거리며 사람들이 고개를 빼고 그림자를 쫓았을 때였다. 예고도 없이 장지문이 열리고 목덜미를 붙잡힌 사내가 밀쳐지듯 안으로 들어왔다.
피부가 희고 뽀얀 사내였다. 그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작은 케이크 상자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혼이 난 게 억울한지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뾰로통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인사 안 하지, 채이현.”
호통처럼 쏟아진 소리에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내가 충격으로 굳어진 회장 안의 사람들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현에게 머물렀다. 정확히는 생크림이 묻은 입가와 뺨에.
“안녕하세요. 에르덴에서 힐러로 활동하고 있는 ‘이현’입니다.”
여기저기서 술잔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건, 이현이 허리를 펴고 생긋 웃었을 때였다.
***
빨리 먹고 안 가면 김성훈이 언제 쫓아올지 모르는데. 이현은 케이크를 전투적으로 퍼먹으며 문 쪽을 몇 번이나 주시했다. 그러다 음식을 잘못 삼켜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켁켁거리며 가슴을 두드리던 이현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도 그때였다. 정확히는 케이크를 마지막 한 입 남겨뒀을 때였다.
고개를 슬쩍 든 이현의 시야에 들어온 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성훈이었다.
“한눈파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뭐, 맨날 어디 가서 처먹고 있어!”
“딸꾹.”
“딸꾹질을 하고 지랄이야! 곱게라도 처먹든가!”
“딸꾹.”
그 뒤로는 꼼짝없이 잡혀 질질 끌려갔는데, 가는 도중에도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아주 개고생을 해야 했다. 물론 목덜미가 잡힌 채 말이다.
“이야, 이현이 또 어디 가서 뭐 처먹고 있었구먼?”
“어떻게 알았어요?”
이현의 눈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 크게 뜨였다. 그런 이현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주인 형이 씩 웃어주었다.
“요거 아주 물건이네, 하하! 네 얼굴 딱 보면 안다, 요놈아.”
“형, 이따가 얘기해요. 이 새끼 지금 잡혀가는 거라.”
“어이쿠! 그래, 올라가 봐라. 이현이 왔으니 서비스 더 넣어주마.”
“형, 형! 나 꼬치 넣어줘요! 닭꼬치!”
“이 새낀 그새 또 처먹을 생각을 하고 있어.”
“밥, 딸꾹! 밥 안 먹었거든?”
그리고 이거 놔! 김성훈이 잡고 있는 뒷덜미로 이현이 손을 뻗으며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단체 예약 손님만 받는 3층에 도착했다. 그리고 떠들썩한 룸 안으로 던져지듯 밀쳐졌다. 하도 실랑이를 벌여서인지, 딸꾹질도 멈췄다.
“인사 안 하지, 채이현.”
부루퉁한 표정으로 있었더니, 뒤에서 김성훈의 호통이 날아들었다. 이현은 미적거리다 허리를 꾸벅 숙이며 회장 안의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그래도 첫 인상은 좋게 남겨야 할 것 같아 인사한 후에는 생긋 웃었다.
“…….”
회장 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고 있는데, 덕분에 이현도 멀뚱히 서서 눈만 깜빡였다. 여기저기서 외침이 터져 나온 건 한참이 흘렀을 때였다.
“쩌네!!”
“상남자네!”
“크게 될 놈일세!”
“크으, 예쁘다!!”
외침이 터져 나온 순간 사람들 반응도 극과 극을 달렸다. 배를 잡고 웃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충격 받은 얼굴로 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술잔까지 들고 외쳐대는 모습이 그렇게 열렬할 수가 없었다.
뜨거운 환영에 이현이 멀뚱히 서 있자, 김성훈이 다시 이현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일렬로 늘어진 좌식 테이블을 지나 룸의 가장 안쪽으로 간 김성훈은 루스 옆, 빈자리에 이현을 눌러 앉히고 그 옆에 피곤한 한숨을 내쉬며 앉았다.
“힐러님, 이따가 여기도 와요!”
“에이, 이쪽에 앉지. 여기도 자리 있는데.”
“그러지 말고, 힐러님 여기….”
“에잇, 타협 만세이!!!”
휘파람과 함께 튀어나온 소리들은 마초가 벌떡 일어나 동굴 같은 목소리로 ‘타협 만세!’를 외친 순간 매크로를 끝으로 잠잠해졌다. 호랑이가 포효하는 것 같은 외침이었다. 그 모습을 이현은 눈을 크게 뜬 채 지켜보았다.
와, 저 사람한텐 덤비지 말아야겠다. 생긴 것도 호랑이 같은 마초를 보며 이현은 남몰래 다짐했다. 그러다 문득 맞은편을 보게 되었는데, 어딘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내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그러니까…. 아까 그… 예쁜 놈이 힐러님이라고?”
“그냥… 완전… 진짜 뽀시래기네.”
“그러게… 근데….”
“근데… 진짜, 생긴 게….”
“…푸핫!”
“…푸핫!”
둘은 한 마디씩 주고받다, 거의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테이블까지 내려치며 웃는 모습에 이현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 서렸다. 아니, 왜 남의 얼굴을 보고 웃는데.
중간 중간 나오는 말이 전부 ‘케이크’ 타령이었다. 간혹 ‘크림’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김성훈이 뺏을지도 모르는 케이크 상자를 사수하느라 이현은 그 말을 끝까지 경청하지 못했다.
“이현씨.”
그때였다. 옆에서 부드러운 중저음이 들려온 건. 이현의 시선이 옆으로 홱 돌아갔다. 부드럽지만, 어딘지 무섭게 생긴 사람이 웃으며 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생긴 거 같긴 한데, 눈이 써늘했기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참 차가워 보였다.
그냥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가 ‘루스’라는 것을. 이현은 아주 조용히 자세를 바꿔 무릎을 꿇고 앉았다. 웃음을 거두던 베리와 꼬마는 그걸 보고 다시 쓰러졌다.
“…안녕하세요.”
“이현씨, 뭐 맛있는 거 먹고 왔나 보네요.”
“…커피만 사가지고 오려고 했는데 직원분이 이벤트 중이라고 커피 사면 케이크가 반값이라잖아요.”
“흐음, 그래요?”
“…많이는 아니고요…. 두 개… 아니, 세 갠가….”
“맛있게 먹었나 보네. 입가에 다 묻힌 거 보니까.”
“…….”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현이 손등으로 제 뺨과 입가를 재빨리 훑었다. 루스의 말대로 손등에 생크림이 묻어났다. 닦을까 고민하던 이현은 루스가 휴지를 뽑는다고 고개를 돌린 순간 손등에 묻은 생크림을 잽싸게 핥아 먹었다. 물론 바로 호통이 날아들었다.
“그걸 또 처먹고 있어!”
“흐, 흘린 것도 아닌데 뭐.”
혹여나 남은 케이크를 뺏길까, 이현이 몸을 뒤로 쭉 빼며 김성훈을 경계했다. 그 모습에 김성훈이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자자, 이현님 배고픈 거 같은데 일단 먹이고 시작합시다.”
마초가 잔을 들고 씩 웃으며 말했다. 이현도 제 앞에 있는 술잔을 집어 들었지만, 도로 내려놓았다. 꼬마가 커피 하나를 이현의 손에 쥐여주었기 때문이었다.
“힐러님은 이거.”
“많이 먹어요, 힐러님.”
“그리고 좀 편한대로 앉자. 우리 좀 그만 웃기고.”
이현은 건네주는 커피를 쪽 빨아 마시며 무릎을 슬쩍 풀었다. 물론 풀 때 루스의 눈치를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배고팠을 텐데 먹어요, 이현씨.”
“네.”
루스의 허락까지 받고 나자, 이현은 생글생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두가 까무러칠 대식이 시작되었다. 그냥, 다 이현의 입으로 들어갔다. 유일하게 그 입으로 들어가지 않은 건 ‘회’였다. 자연스레 모두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스끼다시나 사이드를 피해야 했고, 술안주로 회만 집어먹었다.
“저 몸에 어떻게 저게 다 들어가냐….”
“한 번도 젓가락질을 안 멈췄어….”
“씹지도 않고 삼키는 거 같은데….”
그렇게 많던 음식이 슬슬 동이 나고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던 이현이 슬금슬금 옆 테이블을 넘보기 시작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꼬마와 베리는 술도 잊고 벙쪘다. 실로 심각하게 그들은 이현의 배를 몇 번이나 바라보았다. 희한하게 납작한 그 배를.
“이현씨. 더 시켜줄 테니까 그쪽 테이블꺼 먹지 말고 이리와요.”
“진짜요? 그럼 저 그거요.”
“어떤 거요.”
“꼬치구이요.”
서비스로 넣어준 꼬치구이가 모자라던 참이었다. 이현은 옆 테이블로 몰래 팔을 뻗다 들려온 루스의 말에 냉큼 대답했다. 그러나 딱 거기서 제한이 걸렸다. 철천지원수인 김성훈에 의해 말이다.
“야, 너 그만 처먹어.”
“아, 왜! 아직 다 안 먹었는데.”
“그러다 또 체해서 나자빠지지. 좋은 말 할 때 그만 먹어라.”
“이현씨 체해요?”
이현은 루스의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아니요… 그런 거 안 해요.”
“안 하긴. 이거 한번 체하면 귀신이 돼서 나타납니다.”
“…….”
너는 왜 체를 하고 난리냐. 세상 다 잃은 표정으로 이현은 자신의 위장을 타박했다. 아, 커피나 마셔야겠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책상을 내려치며 베리베리가 소리친 것은.
“아! 나 힐러님 본 적 있어!”
모두의 시선이 베리에게 머물렀다. 베리는 아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핸드폰에서 무얼 열심히 찾더니 원하는 걸 찾았는지, 폰을 뒤집어 모두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이거잖아.”
이거라면서 보여준 베리의 화면에는 귀를 쑥 수그린 새끼 사막여우 사진이 떠 있었다. 일순 테이블 위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여우새끼 같다는 거지? 그런 거지? 이현의 얼굴에 불만이 그득그득 실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이현이 술을 먹기 시작한 건. 의외로 김성훈은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안절부절못한 건 베리와 꼬마, 마초였다. 그들은 이현이 원샷을 하고 잔을 머리 위로 뒤집을 때마다 머리를 싸매며 경악했다.
“안 말려도 돼요, 확실님?!”
“힐러님 저러다 훅 갈 거 같은데…!”
“뭐…. 쟤가 저래 보여도 술은 세서요. 그리고 취해도 곱게 취해서 딱 알아요. 같은 말만 무한 반복하다 자거든요.”
이현은 다시 사케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오늘따라 술이 단 게 아무래도 하늘이 돕나보다. 오늘 아주 다 털어먹고 가라는 듯.
“이현씨,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저 술 세요.”
“흐음….”
루스가 사케잔을 빙빙 돌리며 의미심장한 소리를 냈다. 그걸 보던 이현은 혹여 말릴까 사케를 낚아채 제 잔에 잽싸게 들이부었다. 루스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그저 이현에게 맞춰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그래서 힐러님 언제 옮겨요?”
“이제 옮겨도 되지 않나?”
“넘어오면 바로 쩔 해준다니까 그러네.”
난데없이 날아든 ‘캐삭’ 얘기에 이현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어물거렸다. 그러다 옆에 있는 루스랑 눈이 딱 마주쳤는데, 별 수 없이 울상을 짓고 대답했다.
“내 스완다 아직 안 팔렸는데….”
“거 힐러님이 너무 집착해서 그렇다니까.”
“우리가 5억 씩 줄 테니까 옮깁시다.”
아니, 옮길 거야. 옮길 거라고…. 이현의 표정이 점차 측은해졌다. 그게 불쌍해 보였는지, 루스가 고민하는 투로 질문을 던졌다.
“흐음, 이현씨 스완다가 그렇게 좋습니까?”
“…이왕 가는 거 채집한 거 팔고 목돈이라도 가져가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이현씨가 원하면 심어줄 수 있는데.”
모든 이의 시선이 루스의 얼굴로 꽂혔다. 이현은 루스가 한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심어준다는 게 무슨 뜻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스완다요?”
“네.”
그걸 어떻게 심지? 이현의 눈에 의심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 의구심과 의심은 주변에서 날아드는 말로 인해 한 꺼풀, 두 꺼풀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이야, 돈지랄을 하시려고?”
“그거 아니야? 캐쉬로 사서 뿌린다는 거.”
“그거 랜덤 채집물이라 희귀등급은 잘 안 나올 텐데.”
“스완다가 희귀등급이었어? 와, 매물 나온 거 보면 그 정돈 아닌 것 같은데.”
말을 종합해보면, 루스는 지금 캐쉬템 ‘채집씨앗’을 사서 스완다를 부지 안에 심어주겠다는 것이었다. 랜덤이라 스완다가 나올 확률이 적은 채집씨앗을 사서 말이다. 에르덴 내에 있는 채집물의 개수가 몇백 개를 넘어가는 걸 생각하면 효율성이 좋지 않은, 아니. 바보 등신이나 하는 짓거리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현은 그냥 옮긴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괜찮아요. 그냥 옮길게요….”
“이야, 우리 이현씨가 드디어 옮긴다네. 자, 한잔하고 우리 이따가 2차로 루스네 가서 종족 옮깁시다.”
이현은 우울한 낯빛을 한 채 마초가 내미는 술을 받았다. 그러나 술을 받고 있자니, 옆에서 김성훈의 말이 날아왔다.
“여우같다, 표정 좀 풀어라.”
아오, 이걸 진짜 죽일 수도 없고! 이현은 김성훈을 확 노려보며 고양이처럼 하악거렸다. 이현의 타는 속도 모르고 베리와 꼬마는 김성훈의 말에 미친 듯이 웃었다. 이현은 그나마 웃지 않고 있는 루스의 옆에 붙어 신세 한탄을 하며 술을 홀짝였다.
“취할 것 같으면 말해요, 이현씨.”
나른한 목소리가 다정하게 울렸다. 속삭이듯 들려오는 소리에 이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오늘은 얼마나 들어가려나. 조금씩 열이 올라오는 걸 보니 슬슬 취기가 돌 모양이긴 했다. 그래도 조금 더 먹고 싶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오랜만에 이렇게 기분 좋은 모임을 가졌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으로 얼마나 술잔을 기울였는지 모르겠다. 눈을 잠깐 감았던 것 같은데, 다시 떴을 때 이현은 앉아서 졸고 있었다. 옆을 보니 김성훈은 사라지고 없었다. 슬쩍 맞은편을 보자 마초 옆으로 아예 자리를 옮겨 둘만의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베리와 꼬마는 다른 테이블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현씨.”
옆에서 들려오는 자장가 같은 목소리에 이현의 고개가 돌아갔다. 루스가 피식 웃으며 술잔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그를 본 순간 이현은 버릇처럼 술주정을 부렸다.
“…에르덴해요.”
“네, 알겠어요.”
“같이… 에르덴해요….”
“자고나면 같이 해줄게요.”
“…에르덴 해야 되는데….”
“이리 와요.”
탁탁―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내리자 루스가 자신의 허벅다리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현은 슬금슬금 다가가 몸을 말고 루스의 다리 위로 누웠다. 큰손이 이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착하네.”
“에르덴이… 빨리 오랬는데….”
“그랬어요?”
“에르덴… 해요…?”
“네.”
룸 한쪽에 놓인 무릎담요를 이현의 몸 위에 덮어준 루스는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드는 이현의 등을 달래듯 살살 토닥였다. 이현은 한참이나 웅얼거리며 에르덴을 찾았다. 웅얼거림이 끊인 건, 이현이 까무룩 잠들었을 때였다. 루스는 옹알이 대신 긴 숨소리가 들려오고서야 손을 거두고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베리와 꼬마가 루스한테 말을 건 것도 그때였다.
“뭐야, 힐러님 자는 거야?”
“그래.”
“많이 마시더라니.”
“미친놈아, 네가 여우새끼 사진을 보여줘서 그런 거잖아.”
꼬마의 타박어린 말에도 베리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죽어도 자기 잘못은 없다는 듯이 말이다.
“난 닮은 걸 닮았다고 했을 뿐.”
“아…. 근데 진짜 눈꼬리 삭 올라간 게 그렇긴 하다.”
“사내새끼가 거기서 거기겠지, 했는데… 세상에나.”
“피부 뽀얀 거 봐라. 우리랑 유전자가 다르다니까.”
“그놈의 유전자 타령은.”
“틀린 말 했냐?”
“아, 갑자기 현타가 오네. 이번 생은 글렀어.”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베리는 루스와 잔을 딱 부딪치고 그대로 원샷을 했다. 한쪽에 빠져 에르덴의 방향성에 대해 심오한 토론을 하던 김성훈과 마초도 때에 맞춰 끼어들었다.
“뭐야, 왜 이리 다들 비실거리냐.”
“너만 하겠냐, 쌍놈아.”
“이래서 서시열네 가서 깽판 좀 치겠어?”
“지금 힐러님 주무신다, 이 쌍놈의 자식아.”
“확실님은 어쩔래요? 힐러님 자는데.”
베리의 말에 김성훈의 시선이 루스의 다리를 베고 자고 있는 이현에게 향했다. 한눈팔고 있었더니 그새 늘어져 자고 있다. 그래도 별탈 없이 잠든 게 어디인가 싶어, 성훈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회장 내 분위기도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여기저기 술에 취해 늘어지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이쯤 해산해 2차를 갈 사람은 따로 가고 빠질 사람은 빠지는 걸로 1차는 쫑을 내야 했다.
“우리 서시열네 갈 건데, 확실님도 가실래요? 저놈, 집 꽤 넓어서 다 잘 수 있어요.”
“서시열이요…?”
“아, 루스요. 우리 현모하면 항상 저놈 집에 가서 2차 때리고 밤새 놀다 자고 가거든요. 2차는 위스키 갑시다!”
성훈의 시선이 조용히 루스에게 향했다. 사실 거절할 수 있는 제안이었지만, 성훈도 술이 올라 알딸딸해 이현을 제대로 챙길 자신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성훈은 가겠노라 시원하게 대답했다.
“가죠, 뭐. 저도 좀 취해서 채이현, 저거 제대로 챙길 자신 없어요.”
“이야, 진정한 친구일세.”
“친구를 위해, 크으…. 확실님 진짜 사람 좋네.”
“우리가 돌아가면서 힐러님 챙겨드리죠.”
“자장자장 해주면 되지 않나?”
갈 길이 정해지자, 슬슬 마초와 베리, 꼬마는 루스를 돌아보며 깐족거리기 시작했다.
“자, 그럼… 우리의 물주님께선 슬슬 계산 좀 부탁합니다.”
“어이쿠, 물주님. 얼마가 나올지 후덜덜 하십니다?”
“손 바들바들 떨면서 이제 카드 긁는 건가요?”
“까분다.”
품에서 지갑을 꺼내든 루스가 카드를 빼 테이블 위로 내려놓자 깐족거리던 삼인방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잘 쓰다 돌려드리겠습니다, 물주님.”
“저, 부담되실 것 같은데… 저도 같이 낼까요? 저희가 멋대로 낀 것도 있고, 워낙 많이… 먹은 것 같아서요.”
성훈의 시선이 세상모르게 잠든 이현에게 향했다. 실컷 깐족거리던 삼인방의 시선도 이현에게 몰려들었다. 이를 본 루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됐어요. 애초 이현씨 사주려고 만든 자리니까.”
나른한 톤의 목소리에 견제가 담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착각일까. 그걸 깨달은 성훈이 막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성훈을 향해 삼인방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저 새끼 강남에 건물이 몇 갠데 그런 걱정을!”
“능력 돼서 산다는 거니까 걱정 맙시다.”
“저놈 걱정은 하는 게 아닙니다. 절.대.”
“이게 저놈이 항상 다 내는 것 같겠지만, 우리도 돌아가면서 냅니다. 걱정할 거 하등 없어요.”
“애초 힐러님을 꾄 게 공짜를 어필해서인데, 여기서 내라고 하면 힐러님 캐삭 절대 안 할 거라고요.”
“빨리 집어넣어요. 2차도 저 자식 집 털러 가는 건데, 일일이 부담 느끼면 절대 같이 못 다닙니다.”
결국 성훈은 도로 지갑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뭐, ‘건물’ 얘기 나왔을 때부터 다시 넣을 생각이긴 했다. 강남이면 보통 잘사는 게 아닐 텐데, 삼인방이 이렇게 달려드는 것도 이해가 갔다.
“자, 그럼 슬슬 정리하고 갈까.”
목을 풀며 몸을 일으킨 마초가 사자후를 발휘해 모두에게 1차 해산을 알리자 여기저기 뻗어있던 사람들이 좀비처럼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래도 정신머리는 있는지, 저마다 룸을 기어나가는데,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했다.
“차 가져온 사람 대리 부르고.”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나서야 루스네 일행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현을 살살 달래 업은 그들은 건물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딱 맞춰 대리가 와 있던 참이라 모두 기다릴 것 없이 차를 타고 움직이려는데, 자기 차로 향하는 성훈을 본 모두의 시선에 놀라움이 서렸다.
“아니…. 확실님 어리다고 안 했나?”
“하하…. 이제와 말하지만, 저 루스님과 동종 업계라서요.”
“와, 이건 진짜… 세상 불공평하다, 진심.”
“에이, 다들 차 좋으신데요.”
“뭐, 베리는 잘나가는 프리랜서고, 마초는 프랜차이즈 매장 3개나 갖고 있는 사장이에요. 나도 확실님처럼 동종업계고.”
“이래서 우리가 끼리끼리 논다고 욕을 좀 먹어요. 근데, 와… 확실님은 진짜 상상도 못했네. 그럼 힐러님도?”
“아뇨. 쟤는 그냥… 혼자 자취하는데, 생활비 적당히 받을 정도요.”
“일단 이현씨 제가 데려갈게요.”
루스가 차 뒷좌석을 열고 이현을 조심히 앉히자 성훈은 제 차로 향하다 말고 다시 되돌아왔다. 생각해보니 차를 가져가지 않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헛걸음을 한 대리기사에게 수고비를 건네고 김성훈은 루스에게 다가가 같이 가도 되냐고 물었다.
“저도 루스님 차 같이 타면 안 될까요? 차 가져가기 좀 그런데.”
루스는 대리기사에게 차키를 건네고 성훈에게 작게 턱짓을 했다. 타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이었다. 그걸 본 성훈은 마초와 베리, 꼬마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루스의 차로 향했다.
“가서 뵙겠습니다.”
“아아, 그래요….”
그새 얼굴이 핼쑥해진 마초가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성훈은 활짝 열린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성훈이 타자마자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이현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앉은 성훈과 루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화려한 시내의 전경이 쉴 새 없이 지나치고, 차가 한참을 가다 신호에 걸렸을 때였다. 성훈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 구면인 것 같은데요, 루스님.”
맨 처음, 루스를 보고 놀랐던 이유. 지나치게 잘난 외모 탓도 있었지만, 성훈은 사실 다른 이유 때문에 더 놀랐었다. 그가 몇 번이나 마주했던 구면의 사내였기 때문이었다. 우연이라 할 수 없는 만남으로 마주쳤다. 그들이 현모를 하고 나온 선술집에서 말이다.
“꽤 자주 봤던 것 같은데요. 이현이는 기억 못 하는 것 같지만요.”
이현의 머리가 루스 쪽으로 스르르 미끄러졌다. 루스는 익숙한 손길로 이현의 머리를 제 어깨 위로 조심히 내리눌렀다. 긴 손가락이 이현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었다.
“늘 술에 취해 있었으니까요.”
나른한 목소리로 루스가 말했다. 성훈의 시선이 색색 자고 있는 이현의 얼굴로 향했다. 술을 잔뜩 마셔서인지 이현의 뺨이 달아올라 있었다. 성훈에게는 그 모습조차도 익숙했다.
“그래서 일부러 현모도 여기로 잡은 겁니까?”
“이현씨가 여길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루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의 시선과 관심은 오로지 이현에게만 향해 있었다. 남김없이 드러내는 애정이 몹시도 달았다.
“이현인 줄 어떻게 안 겁니까.”
“이현씨 술주정이 워낙 귀여워서요.”
에르덴, 에르덴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성훈은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술만 먹고 취하면 이현은 그놈의 에르덴, 에르덴 아주 노래를 불렀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처음 보는 사람한테 제가 하고 있는 곳의 서버와 아이디, 닉네임까지 다 까발릴 정도라는 것이다.
루스는 사실 이현의 술주정에 걸려든 운 나쁜 손님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느 날엔가 우연히 이현을 찾다 휴게실에서 이현의 술주정을 들어주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그 날은 정기모임이 있던 날이었는데,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며 나갔던 이현이 돌아오지 않아 성훈이 이를 갈며 찾으러 나갔던 날이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휴게실을 지나치는데, 성훈은 그곳에서 이현이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다. 가만 보니 몇 번 본 적 있던 사내였다. 이현을 찾으러 나갈 때마다 마주치던 사내.
그였다. 늘 이현의 술주정을 받아주고 챙겨주는.
‘같이 에르덴 하면… 안돼요?’
‘네, 할게요. 물 조금만 마셔 봐요.’
‘…에르덴은요…?’
‘물 마시면 같이 해 줄게요.’
‘네에….’
‘착하네.’
‘…이현요. 에르덴도 이현이요.’
‘흐음… 이연?’
‘네…. 에르덴…해요.’
‘물 조금만 더 마셔요.’
‘라히브라 서브… 섭에 있는데… 거기 이현이요….’
‘네.’
지금 생각해보면, 노렸다고밖에 할 수 없는 만남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기적으로 모일 때마다 그를 마주칠 리가. 우연치곤 지나치게 잦은 마주침이었다.
“하긴, 요즘 사람 뒤 캐는 게 뭐가 어렵겠어요. 돈도 많으신데. 근데 왜 이제 와 이럽니까.”
간 재는 것도 아니고. 성훈은 부러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루스의 시선이 성훈에게 옮겨진 것도 그때였다.
“뭘 잘못 알고 있나 본데, 이제야 인지한 겁니다. 이현씨가.”
루스는 그렇게 말하며 이현의 뺨을 손등으로 슬쩍 쓸었다. 꽤 고생했습니다. 작게 울리는 목소리에는 짙은 회포가 담겨 있었다.
“기억도 못 하는 애한테 참 많은 걸 바라셨네요. 만날 건수 하나 만들려고 잡아다가 현모까지 계획한 걸 대체 뭐라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하….”
“애석하게도 꽤 진심이라서요.”
“뭐든 즐길 땐 다 진심이죠.”
성훈의 말에 루스가 픽 웃었다. 제법 예리한 말이었다. 루스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는 잠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소 대신 차가운 시선이 성훈에게 날아들었다.
“제가 이현씨를 유흥거리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로 들리네요.”
“진심이라고 말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 못 봤습니다. 게다가, 이성도 아닌 동성이 그러는데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면 병신이죠.”
“그건 이현씨가 판단할 일이지, 그쪽이 판단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면….”
“…….”
“달리 딴 마음이 있습니까? 우애가 좀 깊어 보여야지. 안 그래요?”
성훈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루스는 이미 대답을 아는 듯했다.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 적막 속에서 성훈은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이현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그랬다. 확신하지 못할 감정에 휘둘렸을 때가. 그러나 성훈은 그 감정을 ‘우애’라고 단정 지었다. 성훈에게 지금의 이현은 ‘친구’였다. 그 이상은 없었다.
“착각하신 것 같네요.”
루스는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차 안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달리 적막했다. 차가 멈출 때까지 성훈과 루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둘 다 서로가 한 말을 조용히 곱씹을 뿐이었다.
***
얼마나 마셨더라. 낯선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현은 허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누구 다리를 베고 잔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의 일은 도무지 기억나질 않았다. 머리는 아프고, 속은 쓰린데 이놈의 배 속은 또 밥 달라고 난동을 부렸다. 무시하고 조금 더 잘까, 생각하던 이현은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두 번이나 울렸을 때에야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먹으면 될 거 아니야. 넌 어째 맨날 밥 달라고 아우성이냐.”
이현은 미등이 켜진 넓은 방 안을 죽 훑다가, 방문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방 안은 사진에서나 보는 고급 호텔룸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순간, 호텔인가 싶기도 했다. 한쪽 테이블 위에 놓인 액자 안의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설마.”
이현은 애써 웃으며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설마, 루스의 집일라고. 그때부터 이현은 뒤꿈치를 들고 걷기 시작했다. 살금살금 문으로 가 아주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맨 처음 시야에 들어온 건, 벽면을 장식한 거대한 유리시계였다. 시계는 정확히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힐러… 기라… 겠네.”
“아하, 그… 하겠… 겠지.”
루스네 집 맞나봐. 멀리서 들려오는 여러 명의 말소리에 이현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말소리에는 김성훈의 목소리도 있었다. 친화력 하나는 진짜 본받을만했다. 어쩐지 지금 나가면 그대로 붙잡혀 술을 마시게 될 것 같아 이현은 도로 방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잠잠하던 배에서 다시 굶주린 소리가 들려왔다.
꼬르륵.
다행히 거실 쪽에서 놀고 있는 루스 일행은 듣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방 안으로 돌아가려던 이현은 덕분에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술 먹기 싫은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이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거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야에 케이크상자가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통로 끄트머리의 부엌으로 보이는 곳 테이블 위에 분홍색 작은 상자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이현을 붙잡아 올 때 김성훈이 안겨준 조각케이크였다.
이현은 모퉁이에 숨어 현재 위치와 케이크와의 거리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케이크가 놓인 곳은 거실이 한눈에 보이는 위치라, 나가면 바로 모두의 눈에 띄었다. 그런고로, 최대한 소리 없이 살금살금 접근해야 했다.
심호흡을 한 이현은 거실 쪽을 주시하며 뒤꿈치를 들고 캣워크를 시전 했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머리통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바라보며 도둑괭이처럼 움직여 겨우 테이블 앞에 도달했을 때였다. 예의를 차린다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술을 마시던 김성훈과 시선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너 뭐하냐?”
케이크 상자로 손을 뻗던 그대로, 그냥 딱 걸리고 말았다. 에이 씨! 저건 내 생에 도움이 안 돼!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이현이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여기저기서 반기는 말이 터져 나온 것도 그때였다.
“어, 힐러님이시네?”
“어? 힐러님 일어났네!”
“힐러님, 이리 와요! 한잔합시다!”
이현은 케이크를 빛의 속도로 낚아챘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도망가려 했다. 돌던 중 식탁 의자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을 부딪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악!”
이현의 비명소리에 거실에 앉아 있던 모두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주저앉아 발가락을 쥐고 있는 이현에게 다가오는데, 하나 같이 죄다 안쓰러워 죽겠다는 표정들이었다.
“가지가지 한다, 아주.”
“이현씨, 잠깐 볼게요.”
“으, 무지 아프겠네.”
“아이고, 울겠다.”
“조심 좀 하지, 으이그….”
레고를 밟았을 때보다 더 아팠다. 정말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현은 냉큼 양말을 벗고 찧은 새끼발가락을 살피기 시작했다. 발톱 아래로 피가 맺혀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이현은 급 현타에 빠져들었다.
“채이현, 이건 꼭 뭐 훔쳐 먹을라 하면 다쳐요.”
“이현씨, 잠깐 봐요. 약 발라줄게요.”
“시열아, 구급약 어디 있냐?!”
“야, 야. 건들지 마라. 아파 보인다.”
하아, 케이크 하나 먹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 이현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사내들이 소란을 떨어준 덕분에 이현의 새끼발가락에는 금세 약과 함께 데일밴드가 붙여졌다.
밴드가 붙여진 이후에는 당연하다는 듯 술상 앞에 앉혀졌다. 종류별 술이 안줏거리와 함께 술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걸 질린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현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눈앞에 술잔 대신 케익이 담긴 접시가 놓인 것도 그때였다.
“녹을까 봐 냉장고에 넣어뒀었는데, 다행이네요.”
어쩐지 너무 가볍다 했다. 이현은 저 멀리 패대기쳐진 케이크상자를 보다가, 허락을 구하듯 루스를 돌아보았다. 눈매를 부드럽게 접으며, 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자마자 이현은 포크를 잽싸게 쥐고 케익을 퍼먹기 시작했다.
“…선술집에서 먹은 건 다 어디로 간 건데.”
“더 들어갈 곳이 있었나 보지, 하하….”
“그럼. 곧 캐삭해야 하는데 잘 먹어야지.”
“그러네.”
케이크를 야금야금 먹고 있던 이현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캐삭’ 얘기에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정신없이 콜록거리며 물을 찾는데, 베리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이현에게 물을 쥐어주었다.
“우리 힐러님, 옮길 생각에 많이 설렜나 보다.”
묘한 압박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손에 쥐어준 물을 벌컥 들이켠 이현은 기침이 가라앉고서야 베리의 시선을 피하며 기어들어가듯 말했다.
“…바, 발가락 아픈데… 좀 이따가….”
“아이고, 오물거리는 거 봐라.”
“오구오구, 제가 업어다 드릴게요.”
아니, 나 마음의 준비 좀 하자고…. 불쌍한 시선으로 이현은 마지막 동아줄인 루스를 돌아보았다. 구원을 바라는 시선에도 루스는 그저 빙긋 웃어줄 뿐이었다. 역시, 너도 같은 놈이었어. 이현은 급격히 우울해졌다.
“자자,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요. 곧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데, 배가 고파서야 쓰나.”
“이름은 정했어요, 힐러님?”
“스완현 이런 거면 진짜 웃기겠다!”
그래, 스완다가 다 뭐야. 옮기면 쩔을 해준다는데. 돈도 준다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의외로 마음이 편해져 이현은 목적을 다시 만렙으로 잡고 마음을 다스렸다.
“할게요.”
이현이 몸을 벌떡 일으킨 건, 야금거리던 케이크를 모조리 먹어치웠을 때였다. 입술에 묻은 생크림을 혀로 핥아 먹고 이현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보는 삼인방에게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캐삭 할게요.”
비단 삼인방 뿐 아니라, 김성훈과 루스도 제법 놀란 눈치였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하는 생각이 민망함과 함께 스멀스멀 피어올랐을 때였다. 느닷없이 미친놈 삼인방이 만세를 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드디어 캐삭이다!”
“이야, 힐도성이다!”
“와, 씨! 제대로 땡겨주마!”
뭐, 뭐야. 이현은 괴성소리에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나고 말았다. 루스가 일어나 이현의 어깨를 잡아 쥐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이 이현을 어딘가로 이끌기 시작했다. 주춤주춤 움직여 도착한 곳은 복도 끝에 있던 방이었다.
“자, 캐삭하기 전에 작별인사나 합시다.”
2대가 나란히 붙어 있는 컴퓨터 앞에 이현을 앉히고 루스가 PC를 켜주자, 마초가 인심 쓴다는 듯 하하 웃으며 말했다. 이현은 그렇게 울상을 짓고 공들여 키웠던 힐러와 마지막 인사를 해야 했다.
“아니, 잠깐만. 전 재산이 4천이야?”
“…스완다에 목을 맨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어제 창고 정리했다면서 채집물은 그대로 있네?”
이현의 창고를 보자마자 꼬마와 베리, 마초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들은 이현의 뒤에서 창고를 보며 실로 놀랍다는 듯 내내 감탄사를 터뜨렸다. 4천은 뭐 돈도 아닌가…. 이현은 민망함에 괜히 거래중개 창만 열심히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저주에 걸린 스완다가 아직 팔리지 않은 채 있었다.
“내 스완다….”
“힐러님, 이제 포기합시다.”
“알겠어요. 내가 10억 준다, 줘.”
10억이고 뭐고, 일단 정리 좀 하자. 이현은 창고에 있는 돈과 채집물을 전부 꺼내 인벤토리에 넣고 상점으로 향했다. 평일 새벽이라 그런지, 마을에는 NPC들 말고는 돌아다니는 유저들이 없었다. 간혹 한두 명씩 보이기는 했지만, 금방 사라져버려 둘러보면 다시 혼자가 되어 있었다.
[신성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어서오세요, 여행자님. 좋은 물건이 있는데 보고 가시렵니까?]
상점에 들어가 상인을 클릭하자, 상인이 팔을 활짝 벌리며 이현을 환영했다. 파는 것이라곤 귀환주문서나 부활석 같은 소모품 아이템뿐이었다. 그걸 쭉 훑던 이현은 가지고 있는 모든 채집물을 팔고 나왔다. 그리고 마을 중앙에 있는 우편함으로 가서 소지하고 있는 돈을 김성훈의 캐릭인 ‘확실한놈’에게 보냈다.
“나중에 나 옮기고 꼭 줘야한다?”
“알겠다, 알겠어.”
에르덴은 한 서버당 한 종족만 선택할 수 있었다. 한번 그 종족을 정하면, 그 서버에서는 상대편 종족 캐릭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런고로, 이현이 신마족 쪽으로 옮기려면 아예 캐릭터를 삭제하고 다시 종족선택을 해서 가야 했다. 다행히 종족이 달라도 시세는 같아 타종족끼리도 현금을 옮기는 것은 가능했다. 대신, 현금을 제외한 모든 물품은 거래할 수 없었다.
“아, 확실님은 부계정으로 새로 하나 만들려고요?”
“네. 기존 길드는 탈퇴해놓은 상태고, 그냥 봐서 창고형으로 쓰려고요. 어차피 신마족에 같은 이름 생성도 가능하니까 그냥 두죠, 뭐.”
이현의 옆으로 한 캐릭이 따라붙은 것도 그때였다. 우편을 보내고 이제는 정말 캐릭터와 안녕을 고하려는데, 근처로 한 캐릭이 얼쩡거렸다. 대체 어떤 놈이 이렇게 치근덕거리나 싶어, 이현은 캐릭을 멈추고 따라붙은 유저를 클릭했다. 그러나 클릭한 지 1초 만에 육성으로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이 새끼…!”
모든 만악의 근원이자, 악의 화신인 맥초딩이었다. 루스와의 악연을 이어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개초딩새끼. 이현은 주변을 맴돌며 뛰어다니는 맥초딩에게 즉각 독수리 타법을 시전 했다. 이현이 열 받았을 때나 쓰는 타법이었다.
[이현: 너 잘 만났다, 이 색갸]
[맥초딩: ㅎㅎ;]
[이현: 웃어? 내 방명록에 글을 그따그로 써놓고 지금 웃음이 나온다고?]
[맥초딩: ㅈㅅㅈㅅ]
“그래 죄송하….”
이 새끼가 약을 잘못 먹었나, 갑자기 웬 사과지? 이현은 화면에 뜬 ‘ㅈㅅㅈㅅ’이란 글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현이 대답이 없자 맥초딩은 다시 방방 뛰며 사과를 했다.
[맥초딩: 죄송요. 사과할라 했는데 님이 요새 안 보여서 못했어요. 그리고 저 이제 캐삭함요]
[이현: 왜요??]
[맥초딩: 누가 저만 썰고 다녀서요. 짜증나서 걍 접으려고요]
[이현: 아, 네...]
그 누구가 마초라는 건 굳이 듣지 않아도 잘 알았다. 열심히 욕을 퍼부어주려던 이현은 공손하게 나오는 맥초딩 덕분에 저 역시 덩달아 예의가 발라졌다.
[맥초딩: 어차피 접을 거긴 한데... 쩝, 필요한 거 있음 드릴게여]
[이현: 없어여]
[맥초딩: 강화석 있는데 몇 개 드릴게요. 쓰든가 팔든가 맘대로 해요]
갑자기 이렇게 나오니까 꼭 다른 사람 같았다. 눈을 껌뻑이며 바라보던 이현의 앞으로 거래신청이 걸려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현은 거래를 거절했다. 그러나 다시 맥초딩이 거래를 걸어왔다. 수락하지 않으면 몇 번이나 할 작정인 듯했다. 결국 이현은 네 번째 걸려온 거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최상급 무기 강화석 X 6]
거래창에 올라온 건, 현존하는 등급 중 가장 높은 등급의 무기 강화석이었다. 이현이 단 한 번도 얻어본 적 없는 아이템이기도 했다. 그것 외에도 거래창에는 값비싼 재료 아이템이 줄지어 올라왔다. 그에 따라 이현의 입도 쩍 벌어졌다.
“…뭐야. 왜 갑자기 이러는데….”
“저 자식, 진짜 접나 본데?”
“정신 나간 게 아니고서야, 저럴 리가.”
“오, 좋은 재료 많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 대부분 만만치 않은 아이템인 듯했다. 이현은 침을 꿀꺽 삼키고 거래창을 종료시켰다.
[맥초딩: ?]
[이현: 저 안 받을래요]
[맥초딩: 부담ㄴㄴ 걍 받아여. 어차피 접으면 쓸데도 없는데]
나도 접어서 그런다, 이 새끼야. 이현은 큰 고뇌에 잠겨들었다. 준다는데 일단 받고, 다 버려버릴까. 무수한 생각이 오가는 와중에도 채팅창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맥초딩: 진짜 안 받음?]
[맥초딩: 이거 다 좋은 건데]
[맥초딩: 처치곤란이긴 하져. 그럼 걍 강화석만 받아요]
[맥초딩: 님, 대답점요. 저 가야돼요]
[맥초딩: 사과 좀 받아요]
[이현: 그럼 그것만요]
[맥초딩: ㅇㅇ]
이현은 결국 받고 버리는 것으로 스스로와 합의했다. 아무리 이놈이 미워도, 사과는 받아주고 끝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이렇게 매달리는데 좀 받자. 뒤에서 모르게 버리면 되잖아. 그런 생각으로 이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도 않고 화면에 뜬 창을 마우스로 딸칵 클릭했을 때였다.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힐러님, 그거 누르면 안돼요!”
“헉! 그거 아니야!”
“야! 그거 결투 신청인….”
―‘맥초딩’님의 결투제안을 수락하였습니다. 곧 결투가 시작됩니다.
―결투시작 5초 전
―결투시작 4초 전
―결투시작 3초 전
이게 뭐지, 할 겨를도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맥초딩의 닉네임이 붉은색으로 물든 후였다. 놀란 이현은 재빨리 백스텝을 누르고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결투시작’이 화면 정면에 떠올랐다.
[맥초딩: 븅1신ㅋㅋㅋㅋㅋㅋㅋㅋ]
―맥초딩이 사용한 다리묶기로 이동불가 상태가 되었습니다.
―맥초딩이 사용한 혈의 촉살로 1390의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정화쓰고 즉힐 시전해!”
“보호막 두르고 빽스텝 써요! 빽빽!”
“아, 저 새끼! 자기만 풀도핑에 버프까지 다 두르고 있어, 간사한 새끼가!”
고막을 울리는 외침에 본능적으로 이것저것 따라 해봤지만, 간사한 맥초딩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베리 때처럼 정정당당한 결투가 아니라 더 불리했지만, 일단 너무 당황해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결과는 예상한대로 이현의 참패였다. 화면 가득 떠오르는 참패의 문구가 아프도록 가슴을 찔러댔다.
―‘맥초딩’님과의 결투에서 패배하였습니다.
―3090의 공적치를 잃었습니다.
“…….”
모든 이의 시선이 조용히 이현의 얼굴로 향했다. 이현은 넋은 잃은 그대로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 안에서는 승리를 한 맥초딩이 화려한 모션을 뽐내며 구정물을 튀기고 있었다.
[맥초딩: 븅1신아ㅋㅋㅋㅋ 그걸 믿냨ㅋㅋㅋㅋ 아 개웃기네ㅋㅋㅋ]
[맥초딩: 아이고ㅋㅋㅋㅋ 이거 호구새1끼네ㅋㅋㅋ]
[맥초딩: 넘볼 걸 넘봐라, 새ㄲ1야ㅋㅋㅋ 주제에 강화석을 넘봐ㅋㅋ 요새 타협새1끼들이 잘해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냐?ㅋㅋㅋ]
[맥초딩: 아, 멘탈이 나가셨나? 말이 없으셔?ㅋㅋㅋ]
[맥초딩: ㅉㅉ 캐삭이나 해라, 발컨새ㄲㅑ]
루스와 삼인방이 살벌한 표정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야, 저번에 놓고 간 노트북 어디 있냐?”
“두 번째 서랍 열어봐.”
이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루스가 PC를 켜는 동안 미친놈 삼인방은 노트북을 찾아 어댑터를 연결하고 전원을 켰다.
“하하하, 요즘 애들이 참 개념이 없네.”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한텐 친히 개개신 좀 알려줘야지.”
“아, 또 개개신 나오게 만드네.”
PC의 화면이 켜지자마자 루스와 삼인방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에르덴을 켜고 안 보이는 속도로 아이디와 비번을 치고 접속했다. 정말… 손이 안 보일 정도의 빠르기였다.
“야, 흑백 있으면 불러라. 아주 조져 버리게.”
“들어와 있네.”
“포탈 시간 얼마 안 남았다. 부캐 들어가서 택시 태워줄 테니까 한 명씩 대기 타라.”
택시? 이현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김성훈은 진작 마초 쪽에 붙어 세상 진지한 모습으로 관람 중이었다. 옆에 있는 루스에게 ‘택시’가 뭔지 물어볼까 하다가 이현은 불똥이라도 튈까 싶어 그냥 얌전히 빠져있기로 했다.
“…내가 신마족으로 옮기기만 해봐라.”
만렙되면 제일 먼저 쫓아가 썰어주마, 개초딩새끼야! 패배로 허망하게 주저앉아 있는 제 캐릭 주변을 뱅뱅 돌고 있는 맥초딩을 노려보며 이현은 남모르게 이를 갈았다.
“포탈 탔어. 넘어왔으니까 소환 보내.”
이현의 시선이 꼬마의 노트북 화면으로 옮겨졌다. 모션을 안 끊기게 하려고 최대한 사양을 낮춘 건지, 그래픽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주변 경치나 사물은 인지할 수 있을 만큼이라서, 이현은 ‘부캐’라는 캐릭이 있는 곳이 이스키나 마을 주변인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저번에 부활포트 박살낸 것 중에 꼬마 것도 있던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애써 현실을 부정하며 이현은 꼬마천재의 부캐인 ‘꼬마달인’을 쳐다보았다. 직업이 베리와 같은 소환사였다. 그리고 직업을 본 후에야 이현은 ‘택시’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다음 놈 대기 타라.”
소환사는 동료를 소환할 수 있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기가 있는 곳으로 소환하는 걸 유저들이 유머를 섞어 ‘택시’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베리를 소환한 꼬마는 쿨타임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루스까지 소환하고서야 본캐로 접속했다. 그리고 꼬마가 본캐로 접속하는 동안 베리가 마초를 소환하고 쿨이 돌아오자마자 꼬마의 본캐를 소환했다.
“흑백놈 마을에 도착했단다.”
“자, 개개신 좀 보여주러 가볼까.”
“아주 조져주마.”
이현의 시선이 재빠르게 자신의 모니터 화면으로 향했다. 이 상황을 모르는 맥초딩만 신나서 이현을 조롱하고 있었다. 순간이나마 맥초딩이 몹시도 불쌍하게 느껴졌다.
[맥초딩: 그러게 왜 덤벼서 지럴지럴을 해ㅋㅋ]
[맥초딩: 우리 호구새ㄲ1가 요새 조옷도 모르고 나대던데]
[맥초딩: 왈왈 컹컹 짖어대던 ㄱㅐ새ㄲ1는 어디가셨나ㅋㅋㅋㅋ]
[맥초딩: 무섭냐?ㅋㅋ 그러게, 발컨새ㄲ1가 왜 까불어]
이현은 조용히 스크롤을 올려 맥초딩과 얘기했던 모든 채팅을 스샷하기 시작했다. 혹여 루스 일행이 궁지에 몰리더라도 그들의 만행에 정당성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아, 내가 어쩌다 이놈하고 엮여서 이 고생인지. 스샷을 찍으며 이현은 살벌한 모습으로 게임에 임하는 루스와 삼인방을 힐끗 돌아보았다. 저렇게 살벌한 모습일 줄이야.
“9시 방향.”
“난 3시.”
“난 6시.”
“12시.”
루스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이스키나 마을로 4명의 신마족들이 침범했다. 교묘하게 NPC 선공레이더 망을 피해 마을로 들어온 이들은 쥐새끼처럼 움직이며 재빠르게 이현과 맥초딩이 있는 상점가 근처로 향했다. 이현의 옆으로 익숙한 캐릭이 다가온 것도 그때였다.
[흑백: 뭔 일인가 했더니, 하... 빡칠만 하네]
[맥초딩: 님 뭐임?]
[흑백: 니 개1같은 행동에 빡친 사람이지 뭐야.]
[맥초딩: 다짜고짜 반말을 하고 **이야]
[흑백: 개1같은 놈이 매너를 찾고 있네ㅋ 지가 한 건 생각도 않고]
소리 없이 나타나 맥초딩한테 시비를 건 유저는 여명 길드의 길마 흑백이었다. 현모 때 보자고 했었던, 루스의 친구 말이다. 이렇게 게임을 하고 있는 걸 보니 결국 현모 날짜를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다.
[맥초딩: ㅅㅂ, 별 미1친 새ㄲ1를 다 보네]
[흑백: 너만 하겠냐]
[맥초딩: 여명도 ㅅ1발 끝났네. 길마가 개또1라이인거 보니 답없다 ㅉㅉ]
쟤 어쩌려고 저러냐…. 이현은 짠한 시선으로 맥초딩을 보다 캐릭을 부활시키고 슬쩍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재빨리 버프와 도핑을 두르고 피를 채웠다. 만피가 된 후에는 무기를 꺼내들고 전투자세를 취했다. 맥초딩을 향해.
“내가 이대로는 못 간다, 새끼야.”
렙 차이가 심해 공격해도 미스가 뜨겠지만, 집중 스킬과 명중 스킬 쓰고 때리다 보면 한 대 정도는 맞을 것이다. 한 대면 충분했다.
이현이 맥초딩을 타겟으로 잡고 대결신청을 넣은 건, 지도 위로 붉은 점이 들어왔을 때였다. 이현의 상태창에는 바로 ‘수락’ 메시지가 떠올랐다.
―‘맥초딩’님과의 결투가 곧 시작됩니다.
[맥초딩: ㅋㅋㅋㅋ자진해서 상납을 하시네. 한 번 썰리더니 정신이 나갔나, 븅1신이]
[이현: 그래. 내 멘탈 쿠크다스다, 이 초딩색갸]
[맥초딩: 개어이ㅋㅋㅋ 나중에 질질 짜지말고 공적이나 준비해놔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맥초딩의 닉네임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거리를 벌리고 서 있던 이현은 방어 스킬을 두르고 맥초딩을 향해 달려갔다. 맥초딩도 그에 맞춰 이현을 조준하고 활시위를 당겼다. 맥초딩을 향해 붉은 점들이 달려든 것도 그때였다.
―신마제국의 ‘루스’가 폭염의 칼날을 사용해 신성제국의 ‘맥초딩’에게 1830의 데미지를 주고 출혈을 남깁니다.
―신마제국의 ‘베리베리’가 업화의 불길을 사용해 신성제국의 ‘맥초딩’에게 1900만큼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신마제국의 ‘마초’가 연쇄칼날을 사용해 신성제국의 ‘맥초딩’에게 2600만큼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신마제국의 ‘꼬마천재’가 총알난사를 사용해 신성제국의 ‘맥초딩’에게 2300만큼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가장 먼저 맥초딩을 덮친 건 포획 스킬이었다. 그 다음은 화려한 모션과 함께 극딜 스킬들이 쏟아졌다. 베고 찌르는 모습들이 무슨 철천지 원수라도 만난 듯 살벌했다. 그 와중에 깨알같이 쏟아지는 흑백의 활약.
―‘흑백’이 사용한 생명의 기도로 ‘맥초딩’이 1500만큼의 생명력을 회복하였습니다.
―‘흑백’이 사용한 광명의 기도로 ‘맥초딩’이 1820의 생명력을 회복하였습니다.
[맥초딩: 이 **들이 **려고]
루스와 삼인방은 극딜을 퍼부으며 썰다가도 맥초딩의 피가 바닥나면 스턴을 걸고 잠시 뒤로 물러났다 만피가 되기를 기다렸다. 물론 만피가 되면 다시 극딜을 시전하며 달려들었다. 흑백과의 호흡이 찰떡같은 게,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 했다.
덕분에 맥초딩에게 달려들던 이현은 잠시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힐끗 루스와 삼인방을 보자 안 보이는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그게 그렇게 무시무시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냥 표정 자체가 무서웠다.
“…….”
나, 그냥 캐삭이나 하고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이현은 아직 결투가 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맥초딩을 향해 공격 스킬을 퍼부었다.
Miss!
물론 예상대로 스킬을 쓰는 족족 빗나갔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이현은 명중률을 올려주는 스킬과 주문서, 버프를 쓰고 루스와 삼인방 사이를 파고 들어가 맥초딩에게 근접 공격인 ‘후려치기 역습’을 날렸다.
어떻게 안 건지, 이현이 사이로 파고들자마자 맥초딩을 향하던 모든 공격이 끊기고, 흑백의 힐도 중지되었다. 스턴에 걸려 해롱거리던 맥초딩은 이현이 날린 회심의 일격에 넉백에 걸려 뒤로 넘어졌다. 다른 이들이 먼저 저항 약화 디버프를 걸었기에 명중한 공격이었다. 이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뒤로 넘어진 맥초딩에게 다시 한번 근접 공격을 내리 꽂았다. 그와 동시에 손톱만큼 남아있던 맥초딩의 피가 훅 깎이고 이현의 화면 중앙에 승리자의 문구가 떠올랐다.
―‘맥초딩’님과의 결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900의 공적을 획득하였습니다.
―첫 번째 결투 타이틀을 획득하였습니다.
“명중했다!”
이현이 만세를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뻐 날뛰는 이현을 루스는 턱을 괸 채 웃으며 바라보았다. 반면 꼬마와 베리, 마초는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신마제국/베리베리: 하, 살면서 겪어본 아처 중 개최고 발컨아처였어]
[신마제국/꼬마천재: 나라면 그냥 나가 뒤1지겠다. 이건, ㅅ1발 사람의 컨이 아니야]
[신마제국/마초: 아, 콧구멍으로 컨을 쓰나. 발컨도 이보단 낫겠다ㅋㅋㅋㅋ 아 개어이없네]
[신마제국/베리베리: 왈왈 컹컹 짖는 개새ㄲㅣ도 아니고 븅1신이 어디서 나대ㅋㅋㅋㅋ]
이현에게 따로 귓속말이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귓속말이 걸려온 효과음을 귀신같이 들은 김성훈과 삼인방의 시선이 곧장 이현 쪽으로 몰려들었다.
[귓속말/맥초딩님으로부터: 남자새ㄲ1가 꼰지르기나 하고ㅋㅋㅋㅋㅋ 부1랄이나 떼라, 등1신아]
[귓속말/맥초딩님으로부터: 누가 이기나 해보자, 호구새ㄲㅑ]
얘는 어째 포기를 모르냐. 이현은 대답대신 가운데 손가락 이모티콘을 날려주었다. 그 사이 베리와 천재, 마초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다시 채팅창 위로는 개개신 드립이 떠올랐다.
[신마제국/꼬마천재: 와나, ㅅ1발ㅋㅋㅋ 남자새ㄲ1가 좉도 없이 귓말로 지1랄이냐ㅋㅋㅋ]
[신마제국/베리베리: 우리 누가 이기나 해볼까? ㅇㅇ? 부1랄 걸고 어때, ㅅ발놈아]
[신마제국/마초: 와... 자꾸 개개신을 소환하게 하네]
“…루스님.”
“네.”
이쯤 되니 이현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개개신이 도대체 뭔지. 가장 대답을 잘해줄 것 같은 루스를 붙들고 이현은 안 들리게 몸을 바짝 붙여 물었다.
“개개신이 뭐예요?”
“음….”
루스는 조금 곤란한 듯 웃었다. 말하기 곤란한 단어인가? 이현의 시선이 주변을 힐끗 돌아보았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날뛰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정상적인 단어 같지는 않았다. 결국 이현은 듣기를 포기하고 바짝 붙인 몸을 떼어냈다. 루스가 고개를 기울여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여준 것도 그때였다.
“…….”
‘개같은 놈들 개패듯 때려잡는 신마 갱생집단’이란다. 듣는 사람이 다 창피해지는 단어였다. 그것도 저들끼리 그렇게 지어놓고 이럴 때만 정의구현을 외치며 사용한단다. 귀까지 빨개진 이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왜 창피함은 주변사람의 몫인지 모르겠다. 아니, 저 새끼들 대체 몇 살인데 저래….
내가 저 새끼들이랑 노나 봐라. 이현은 근래 들어 가장 진지한 모습으로 필사의 결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