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9)

4. 힐러의 이전기

현모가 있던 날로부터 정확히 이틀이 지났다. 현모 날 맥초딩과 키보드 배틀을 떴던 삼인방은 그거로도 모자랐는지, 맥초딩이 부활 포인트로 지정한 마을까지 찾아내 그 새벽 아주 난리를 피워댔다. 한 명이 부활 포인트 앞에 있는 NPC들의 어그로를 끌면 셋은 강제 부활한 맥초딩을 썰고 썰어 공적을 아주 탈탈 털어가는 것이다.

결국 맥초딩은 강제종료로 게임을 끝냈고, 그걸 본 삼인방은 이겼다며 만세 삼창을 불렀다. 이현이 캐삭을 한 건 그 후였다.

그래, 결국은 캐삭을 했다. 심지어는 모두 팔짱까지 끼고 보고 있던 터라 그렇게 신경 썼던 외형도 대충 만들고 접속해야 했다. 다른 직업을 해볼까 하다가, 모두 힐러를 밀기에 별 수 없이 다시 힐러를 택했다. 그리고 닉네임은… 사심을 담아 지었다. 최대한의 사심을 담아 말이다.

“아오, 저 오토새끼!”

키보드를 탁 치며 이현은 채집물을 스틸한 오토유저를 노려보았다. 하라는 사냥은 안하고 채집물을 찾아다니며 올린 지, 이틀 째. 이현은 어느덧 LV.10이 되어 있었다. 그걸 본 김성훈이 옆에서 지랄을 해댔다.

“이 새끼는 하라는 사냥은 안 하고 또 채집물을 캐고 있어.”

답 없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김성훈의 캐릭은 벌써 LV.60대 후반을 향하고 있었다. 그걸 힐끗 본 이현은 아주 잠깐 흔들렸다. 아, 나도 그냥 렙업이나 할까.

“너 잊었나본데, 메인 스토리 진행 안 하면 전직 못 한다.”

“뭐?!”

“그러니까 퀘스트 받고 사냥 좀 하라고, 이 등신아!”

이현은 곧장 퀘스트 창을 열어 메인 스토리 진행 부분을 확인했다. 김성훈의 말대로 LV.10 때 받는 퀘스트에 전직 스토리가 들어가 있었다. 하도 오래돼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면 되잖아….”

이현은 그 길로 퀘스트를 찾아다니며 사냥터를 전전하기 시작했다. 퀘스트도 하다 보니 생각보다 적성에 맞아 이현은 금세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신성제국과 다른 신마제국의 분위기와 진행방식에 매료가 된 것이다.

“레벨 20때까지는 그 맵에서 못 벗어나니까 전직하면 말해. 노가다 장소 알려줄 테니까.”

이현이 현재 있는 맵은 ‘노스카나’라는 맵이었다. 초보들이 맨 처음 시작하는 스타트 맵이었다. 이 맵은 오로지 초보만을 위한 곳이라 포탈도 없었고 상대 진영 종족이 넘어올 수 없게 설정된 곳이다. 고로, 뒤치기를 당할 걱정은 없다는 소리였다.

“아, 그리고 길드 가입 20때부터라고 루스가 그때 가입시켜준다더라.”

“별로 상관없는데.”

“그래, 겁나 털리고 나면 길드가 또 그리워지겠지.”

이현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빨리 LV.20을 찍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안 그래도 하루에 세 번 씩 찾아와 렙업에 대한 묘한 압박을 주는 루스와 삼인방 때문에 슬슬 하려고 하긴 했다.

그때부터 이현은 채집의 유혹을 뿌리치고 열심히 전직을 향해 달렸다. 딴 길로 안 새고 하라는 대로 해서인지, 한 시간 후 이현은 전직을 하고 힐러라는 정식 명칭을 얻을 수 있었다. 김성훈이 알려준 닥사 부락 앞에 앉아 새로 배운 스킬을 하단 스킬바에 넣고 정리하던 이현에게 낯선 유저들이 말을 걸어온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개냥이: 님]

[살구콩: 힐러님아]

스킬을 정리하던 이현의 눈이 깜빡거렸다. 말을 걸어온 이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어쌔씬이었고, 한 명은 마도사였다.

[스완나: ?]

[개냥이: 같이 팟 ㄱㄱ?]

[살구콩: 닥사팟이요]

이현은 잠시 고민하다 자리싸움이라도 일어날까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현이 허락하자마자 곧장 파티 제안이 들어왔다. 수락을 누르고 파티를 결성한 이현은 두 사람에게 버프를 걸어주고 바로 출발을 외쳤다.

사냥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닥치고 몹만 잡고 있었더니, 렙이 훅훅 올라 어느새 LV.18이 되어 있었다. 2업만 하면 이 맵에서 벗어나 길드를 가입할 수 있게 된다. 그건 즉, 한 시간마다 귓속말을 날리며 안부를 묻는 삼인방에게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개냥이: 캬 어쌔신 할맛나네]

[살구콩: 어쌔신 손맛 좀 있져ㅋㅋ 저도 첨에 어쌔신이었는데 탱커로 갈아타고 그대로 본캐로 눌러앉았어욬ㅋㅋ 근데 어쌔신 만큼 손맛 좋은 직업은 없을 듯]

[개냥이: 전 본캐 거넌데ㅎㅎ 살구님 본캐 그럼 탱커?]

[살구콩: 네ㅎ 이번에 마도 스킬업뎃 상향 됐길래 함 키워보려고요]

[개냥이: 전 본캐 접을라고 키움요]

[살구콩: 헐;; 거너 좋지 않나...?]

[개냥이: ㅋㅋㅋㅋ 길드가 좀 ㅈㄹ 같아서 나오려고요. 저격질 쩔어여]

[살구콩: ㅎㄷㄷ;; 저격질...]

[개냥이: 지들 길드 아니면 갈 곳 없을 줄 아나]

[살구콩: 저희 길드 들어오시져ㅋㅋ 신생 길드라 고인물들 없습니다ㅋㅋㅋ]

[개냥이: 오, 좋네욬ㅋㅋ 이참에 스완님도 같이 가시져ㅋㅋ]

[살구콩: 아... 근데 스완님, 그거 부캐?]

열심히 스태프를 휘두르며 닥사하는 이현에게 난데없이 질문이 날아들었다. 이현은 귀찮음을 뒤로하고 짤막하게 대답해 주었다.

[스완나: 본캐요]

[살구콩: 그래서 그랬구나ㅎㅎ;]

[개냥이: ㅋㅋ어쩐지 너무 못한다 했네]

아니, 뭘 보고 못한다는 건데. 이현은 도끼눈을 뜨고 화면을 돌려 뒤를 휙 돌아봤다. 배를 잡고 웃고 있는 두 캐릭이 화면 가득 채워졌다.

[살구콩: 스완님, 저희 길드 오시졐ㅋㅋㅋ 제가 잘 키워드리겠음]

[개냥이: 세상 진지하게 하더라니 뉴비였네ㅋㅋ]

[스완나: 저 오라는 곳 있어요]

[개냥이: 헐, 얘기 벌써 끝난 거?]

[스완나: 네]

[살구콩: 어디요?]

[스완나: 타협은 없다요]

가만히 서 있던 유저들이 땅바닥을 구르기 시작한 건 이현의 말이 채팅창 위로 떠올랐을 때였다. 채팅창을 가득 채우는 건, ‘ㅋㅋㅋㅋㅋ’였다.

[개냥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살구콩: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냥이: ㅋㅋㅋㅋㅋ아니ㅋㅋㅋㅋㅋㅋ 님ㅋㅋㅋㅋ]

[살구콩: ㅋㅋㅋㅋㅋ ‘타협은 있다’ 아님?ㅋㅋㅋㅋㅋ]

[개냥이: 아놔ㅋㅋㅋㅋ 타협ㅋㅋㅋㅋ 타협이래ㅋㅋㅋㅋㅋ]

[살구콩: 님ㅋㅋㅋㅋ 타협이 님 받아준대요?ㅋㅋㅋㅋ]

[개냥이: ㅋㅋㅋㅋ희망사항 말고ㅋㅋㅋ 님 들어가는 길드 말하라고욬ㅋㅋ]

[살구콩: 그러니까ㅋㅋㅋ ‘타협은 있다’ 아니냐곸ㅋㅋㅋ]

[개냥이: 루스 말고ㅋㅋㅋㅋ 리스 있는 곳 맞죠? ㅋㅋㅋㅋㅋ]

이현의 눈동자가 김성훈의 화면으로 조용히 옮겨졌다. 혹시 길드명을 잘못 말했을까봐 김성훈 캐릭 위에 떠 있는 길드명을 확인했는데 ‘타협은 없다’가 맞았다. 이현은 다시 시선을 옮겨 자신의 모니터로 돌아왔다. 두 캐릭이 끝을 모르고 웃고 있었다. 이현의 표정이 점차 시무룩해졌다.

아니… 왜 안 믿는데…. 이번 신마제국의 여정도 어쩐지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현은 울상을 짓고 다시 ‘ㅋㅋㅋㅋ’가 떠오른 화면을 응시했다.

루스와 삼인방이 몹시도 보고 싶은 날이었다.

***

―‘키키아’로부터 4090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레벨 업을 하였습니다.

―신규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반복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퀘스트 목록을 확인하여 주십시오.

[베리베리: 오예! 42!]

[꼬마천재: 그러게 금방이라니까]

[마초: 켈켈켈켈]

왜 지들이 더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이현은 정예몹들 사이에서 광란의 춤을 추는 삼인방을 보다 상태창에 표시된 렙을 확인했다. 고작 한 시간 쩔을 받고 찍은 게 무려 LV.42이다. 다 ‘키키아’라는 독수리 머리를 가진 정예부락 던전에서 몹몰이를 해준 루스와 삼인방 덕분이었다.

LV.20이 된 다음날. 이현은 접속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삼인방에 의해 그 길로 길드 부지로 끌려가 길드에 가입해야 했다. 이현이 루스의 길드가입 제안을 수락하자마자 길드는 아주 난리가 났다. 길드 고성 안에서부터 환호성을 지르며 길드원들이 죄다 뛰쳐나온 것이다.

[길드/잘살아보세: 힐러님이다!!!!!]

[길드/기토피아: 타협 만세이!!!]

[길드/코코볼: 실화냐!!]

[길드/다이뜨자: 진짜냐! 미1친 놈들아!!]

[길드/신이내린캐: 와씨!! 실화다!! 만세이!!]

닉네임도 바꿨건만, 타협 길드원들은 스완나가 이현이라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다. 여기저기서 달려드는 파리 떼에 이현은 루스의 뒤로 캐릭을 숨기고 으르렁댔다.

[길드/신이내린캐: 와 닉넴봐라ㅋㅋㅋㅋ]

[길드/다이뜨자: 스완다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니ㅋㅋ]

[길드/코코볼: 스완다가 안되니까 스완나로 지은 거 봐라ㅋㅋㅋ]

[길드/기토피아: 야망 한 번 크네ㅋㅋㅋ]

내가 스완다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안 거냐. 이현은 매의 눈을 한 채 여기저기를 쏘아보며 제보자들을 추렸다. 삼인방이 쩔을 해주겠다면 나선 건 그 직후였다.

[베리베리: 길드 들어왔겠다! 힐러님, 이제 가시져! 폭풍렙업을 하러]

[꼬마천재: 광렙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겠음]

[마초: 캬 업어키워 줘야겠네]

[루스: 이현씨, 할리타 마을로 와요]

“나 이제 스완나라고.”

이현은 투덜거리면서도 루스의 말대로 할리타 마을로 이동했다. 다음에 만나면 ‘스완나’를 세뇌시켜 주리라 다짐하며 말이다.

루스일행이 이현을 데리고 간 곳은 ‘키키아 부락’이라는 고렙 사냥터였다. 달달 떨며 따라오는 이현을 사방에서 둘러싼 채 키키아의 부락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루스는, 이현을 구석에 앉혀두고 예고도 없이 몹몰이를 시작했다.

한 번 몰아올 때 10~20마리씩 몰아와 이현의 경험치 획득범위에 들어서면 광역기를 사용해 전부 싸잡아 해치우는 것이었다. 네 명이서 그렇게 한 시간을 투자하자, 상전처럼 앉아 있던 이현의 렙은 금세 올라 벌써 LV.40대 중반에 이르렀다.

“와… 완전 신세계네.”

처음으로 루스와 삼인방이 예뻐 보이는 날이었다. 그래, 오늘을 위해 그렇게 발리고 썰렸던 건가보다.

[꼬마천재: 힐러님 이제 거기 가도 될 것 같은데?]

[마초: 어디? 거신전?]

거신전? 커피를 마시며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의 고개가 모로 틀어졌다. 신성제국에 있는 ‘타락한 여신의 신전’ 같은 건가? 이현은 즉각 키보드를 두드렸다.

[스완나: 여신전 같은 거요...?]

[루스: 네, 희귀템 나오는 입장던전이에요. 이현씨 거기 가고 싶으면 가고요]

[스완나: 좋은 거 나와요?]

[루스: 음, 좋진 않은데.]

[스완나: 잠시만요]

[루스: 네]

이현은 잠시 화면을 내려 홈페이지를 켜고 거신전을 찾아보았다. 정확한 이름은 ‘거신병의 신전’이었으나, 유저들은 줄여서 ‘거신전’이라고 불렀다. 역시나 신성제국에 있는 타락한 여신의 신전과 같은 개념의 입장던전이었다. 배치된 몹과 보스만 다를뿐, 맵이나 퀘스트의 구성은 전부 똑같았다. 그러나 입장퀘가 있고, 레벨 제한이 47부터인걸 감안했을 때 아직 이현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스완나: 들어가려면 입장퀘 해야 하잖아요]

[꼬마천재: ㄴㄴ지금은 없어짐. 거기 닭들 천국이라 입장퀘 도중 겁나 썰린 유저들이 작당하고 민원 넣어서 싸이트 폭파시킨 적 있었거든요]

[마초: 캬, 그때 나도 한 표 넣었었는데]

신성족 당시, 발컨이라는 낙인 덕분에 파티에 들지 못했던 이현은 던전의 꽃이라 불리는 타락한 여신전을 가지 못했었다. 김성훈이 구경이라도 시켜준다며 가자고 꼬드겼지만, 가면 더 배만 아파질 것 같아 이현은 그 시절 눈물의 솔플을 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그랬던 터라, 사실 아주 조금 흥미가 생겼다. 보스몹까지 잡아보지도 못한 터라, 한 번 쯤은 가고 싶었다. 신성제국에서 풀지 못한 여한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스와나: 그럼요...]

[루스: 괜찮으니까 말해봐요]

[스완나: 진짜요?]

[루스: 네]

[스완나: 그럼 갈게요!]

[루스: 알았어요. 그럼 여기서 47까지만 올리고 가요]

루스의 말에 이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옆에서 김성훈이 살벌한 어투로 앉으라고 말하고서야 도로 앉아 루스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레이더 화면에 거대한 붉은 점이 잡힌 것도 그때였다.

“야. 저거 뭔지 아냐?”

“뭔데.”

“새? 저 새 같이 생긴 거.”

고개를 빼고 이현의 모니터를 바라보던 김성훈이 ‘푸핫’하고 웃음을 터뜨린 건, 거대한 새의 윤곽이 화면 속에 거대하게 자리 잡혔을 때였다. 화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새 아래에는 이현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는 베리가 있었다.

안 보인다 했더니, 웬 이상한 생물 하나를 달고 나타났다.

―고대의 영물 ‘피닉스’가 출현하였습니다.

이현의 시선이 김성훈에게 향했다. 안정을 찾아가던 김성훈은 쫓기듯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는 베리를 보고 다시 육성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이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데, 어쩐지 그게 마치 격려를 하는 것만 같았다.

“와, 저거 보기 쉽지가 않은데. 채이현 이거 진짜 축캐네, 축캐야.”

“꺼져, 이 새끼야.”

도망가야 하나. 이현은 화면을 돌려 도망갈 구석을 찾기 시작했다. 루스와 꼬마, 마초도 때마침 베리를 본 건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었다. 꼬마와 마초는 그렇다 쳐도, 루스까지 물러날 줄은 몰랐다. 마우스를 움직여 거대한 새를 클릭하자, 화면 위로 떠오른 피통을 보니 네임드 급이었다.

[꼬마천재: 아 ㅅㅂ 저넘한테 맞으면 한 방인데]

[마초: 왜 여기로 오는데;;]

한방? 한방이라고? 이현은 곧 식겁한 표정으로 날갯짓을 하는 피닉스를 바라보았다. 그 아래 열심히 달리고 있는 베리의 모습이 어쩐지 저를 죽이고 달아났던 그때처럼 절박하게 느껴졌다.

[꼬마천재: 여기로 오지 마라ㅡㅡ 오면 디진다]

[베리베리: ㅎ;;]

[마초: 방향 틀어! 틀라고!]

[루스: 죽고 싶나보네.]

루스까지 이렇게 나오자, 베리도 무섭기는 했는지 즉각 왼쪽으로 방향을 틀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핑 쿨이 끝났는지, 이동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고 순식간에 피닉스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베리도 이를 깨닫고 재빨리 이속증가 주문서를 도핑한 듯 했으나, 그보다 빨리 피닉스의 부리가 베리에게 내리꽂혔다. 세상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상태창에는 베리의 참혹한 결말이 떠올랐다.

―‘베리베리’가 사망하였습니다.

[꼬마천재: 오만데 쑤시고 다니더니 내 저럴 줄 알았다, 하...]

목적인 베리가 죽자, 피닉스는 잠시 자리에 머무르는 듯 하다가 날개를 크게 퍼덕이며 몸을 돌렸다. 루스와 모두가 공격범위 밖에 있어 인지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대로 잠자코 있으면 되건만, 피닉스가 몸을 돌리자마자 베리가 불안한 대사를 중얼거렸다. 그걸 듣자마자 꼬마와 마초는 아주 난리가 났다.

[베리베리: 내가 죽은건...]

[꼬마천재: 왜 또;; 뭔데 그래...]

[마초: 뭐든 간에 하지마라;; 제발;]

[꼬마천재: 아 ㅅㅂ 하지 마라 진짜]

[베리베리: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욕설 사이로 베리의 몸이 찬란한 빛과 함께 되살아났다. 이현의 두 눈도 그에 따라 휘둥그레졌다.

―‘베리베리’가 부활하였습니다.

―‘베리베리’가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어난 지 0.1초만에 베리베리는 다시 바닥 위로 드러누웠다. 베리가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몸을 돌리던 피닉스가 부리로 베리를 콱 쪼아버린 탓이었다.

[꼬마천재: 추진력 같은 소리하네. 도랐냐? 가고나서 살아나든가ㅡㅡ 혼자 벌떡 일어나고 ㅈㄹ이야]

[마초: 대체 뭘 위한 추진력이냐?]

[꼬마천재: 걍 나가 뒤1져라 **]

[베리베리: ...힐러님. 저 살려줄거져? 주륵주륵]

이현은 잠시 고민했으나, 멀어지는 피닉스를 보고는 주춤거리다 한참이나 멀어졌을 때에야 한걸음에 달려가 베리를 살려주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미쳤다….”

그의 대사에 다른 의미로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현은 소생의 빛에 휩싸여 일어나는 베리를 남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루스: 이리와요, 이현씨]

루스가 이현을 부른 것도 그때였다. 끈질기게 베리 옆에 붙어 그의 주변을 빙빙 돌던 이현은 루스의 말에 냉큼 그에게 달려갔다. 그래도 화면은 여전히 베리에게 향해 있었다.

[루스: 옮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베리베리: ?]

[마초: ?]

[꼬마천재: ?]

[베리베리: ...그거 지금 나 욕하는 거지? 응? 그치? 이 ㅅㅂ놈아]

[꼬마천재: 아... 미친ㅋㅋㅋㅋ]

[마초: ㅋㅋㅋㅋㅋ그렇지! 옮으면 큰일이지!]

[꼬마천재: 저거 멋있다고 따라하기라도 하면ㅋㅋㅋ 미치지ㅋㅋㅋ]

[마초: ㅋㅋㅋㅋ 안아 키워야할 판ㅋㅋ]

그럴까…? 나도 나중에 해볼까? 이현은 혼자 진지한 모습으로 베리가 내뱉었던 대사를 몇 번이나 곱씹었다. 몇 번을 생각하고 떠올려 봐도 괜찮은 대사였다.

“추진력… 히힛, 추진력이다.”

“이거 또 미친 생각하고 자빠졌네.”

옆에서 김성훈이 혀를 차며 뭐라 했지만, 이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

[귓속말/베리베리님으로부터: 힐러님ㅠㅠ 어디에여... 이제 그만 저희랑 놀아요ㅠㅠ]

[귓속말/꼬마천재님으로부터: 어딘지 빨랑 불어요. 쫓아가서 깽판치기 전에]

[귓속말/마초님으로부터: 기웃... 기웃... 기웃]

아니, 이 새끼들은 왜 자꾸 아까부터 귓속말질이야. 나 할 거 있다고 몇 번이나 말해. 이현은 채팅창 위로 떠오른 글을 보고 지친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씨알도 안 먹힐 말을 한 게 벌써 수십 번이다.

[귓속말/마초님께: 저 할 거 있다고요... 이제 그만해요. 그만요!]

[귓속말/마초님으로부터: 헉!]

[귓속말/베리베리님으로부터: 헉!]

[귓속말/꼬마천재님으로부터: 아 글쎄 채집보다 우리 쩔이 더 많이 오른다니까]

“나 채집하는 거 아니라고.”

내가 맨날 채집만 하고 사는 줄 아나. 아니, 왜 마초한테만 말했는데 나머지 두 놈도 다 아는 건데. 이현은 아우성중인 귓속말 단락을 안 보이는 구석으로 옮겨놓고 다시 선공 몹이 득실거리는 지옥의 땅을 내달렸다. 최종 목적지는 용암이 흐르는 거대한 산 중턱에 자리한 ‘거신병의 신전’이었다. 총총거리며 거멓게 탄 용암지대를 달리는 이현의 캐릭이 어쩐지 신이 난 듯 보였다.

실제로도 이현은 지금 신이 난 상태였다. 이틀 전, LV.47이 되자마자 가게 된 ‘거신병의 신전’ 덕분이었다. 흥미로 가본 거신전은 이현에게 새로운 문화충격을 선사해 주었다. 던전을 한 바퀴 돌고 나왔을 땐 넋을 잃기까지 할 정도였다. 에르덴의 꽃이라고 불리는 거신병의 신전을 경험한 소감은 간략했다.

‘완전 재밌잖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재밌어서, 이현은 넋을 되찾자마자 다시 가자며 루스한테 쪼르르 달려갔다. 결국 그 날은 거신병의 신전을 연달아 10번이나 돌고서야 루스일행과 헤어졌다. 그러나 집에 가는 척 헤어진 이현은 그거로도 모자랐는지, 루스일행이 로그아웃하자마자 저 혼자 다시 접속해 신전에 난입했다.

물론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몇 번이나 죽었다. 5번 정도 시도했었나, 6번째는 저도 모르게 앉아서 졸고 있더라. 결국 이현이 피시방을 나온 건 아침 해가 뜬 후였다.

그 다음날부터 이현은 루스와 삼인방의 연락을 외면하고 홀로 거신병의 신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도전하니 그래도 노하우가 생겨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로머 5마리까지는 해치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현이 홀로서기의 도전을 멈춘 것은 점심 즈음 느지막이 나타난 김성훈이 파티를 하라며 제안했을 때였다.

“뭘 혼자 씨름하고 자빠졌냐. 밖에 유저들 겁나 많은데 파티하면 될 거 아니야.”

거신전의 입구 앞에 우글우글 모여 있던 유저들을 떠올리며 이현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발컨이라며 또 손가락질 받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단 로머 5마리까지는 잡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한 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힐러를 모집한다는 팟에 지원한 건데, 거기서 설마 살구콩이랑 개냥이를 만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파티/살구콩: ㅎㅇ]

[파티/개냥이: 하이요]

[파티/행곡: 안녕하세요]

[파티/스시아: ㅎㅇ]

[파티/스완나: 안냐세요]

파티에 참가하자마자 쏟아지는 인사에 이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마지막에 가서야 느릿하게 인사를 건넸다. 기억하지 못하길 바랐건만, 살구콩과 개냥이는 생각보다 기억력이 좋은 듯 했다.

[파티/살구콩: 읭? 헐ㅋㅋㅋ 그분이넼ㅋㅋ]

[파티/개냥이: 헐ㅋㅋㅋ]

[파티/살구콩: 타협간다던 일은 어찌 되셨는지ㅋㅋㅋ]

[파티/개냥이: 길드 비공개인거 보면 뭐...ㅎ]

아, 저 새끼들을 어떡하지…. 이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ㅋㅋㅋㅋ’를 남발하는 개냥이와 살구콩을 노려보았다. 비꼬는 건지, 조롱하는 건지 모를 말로 도발을 하고 있었다. 확 열이 뻗쳤지만, 이현은 시비에 걸릴 수 있으니 고렙이 되기 전까지는 길드 비공개로 다니라던 루스의 말을 떠올리고 필사적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파티/살구콩: 아닠ㅋㅋㅋ 왜 길드 비공개에요 스완님]

[파티/개냥이: 타협이 안 받아준대요?ㅋㅋㅋㅋ]

[파티/스시아: 뭐지, 이 상황은;;]

[파티/행곡: ㅎㅎ...]

[파티/스완나: 아는 사람이 다른데 오라고 그래서 거기 안 갔어요]

[파티/살구콩: ㅋㅋㅋㅋ안갔대ㅋㅋ]

[파티/개냥이: 안 간거죠?ㅋㅋ 못 간게 아니곸ㅋㅋ]

“왜 시비야!”

이현은 오랜만에 손가락을 세워 독수리 타법 시전 준비를 했다. 길드로 물고 늘어지던 살구와 개냥이는 그새 영역을 넓혀 이현의 실력에 대해서도 간섭하기 시작했다.

[파티/살구콩: 스완님 쩔 겁나 받았나 보네요ㅎㅎ 렙이 높네]

[파티/개냥이: 엇ㅋㅋㅋ 어떻게 컨은 좀 느셨나요?ㅋ]

[파티/살구콩: 비공개 길드원들이 고생 좀 하셨겠네]

개냥이와 살구콩 머리 위에는 ‘턴업’이라는 길드명이 떠 있었다. 길드에 들어오네 마네 하더니 결국 살구콩이 개냥이 길드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파티/살구콩: 스완님 그때처럼 하는 거 아니져?]

[파티/개냥이: 도랏ㅋㅋㅋ 그때처럼 하면 미친거짘ㅋㅋ]

결국 이현은 참지 못하고 독수리 타법을 치기 시작했다.

[파티/스완나: 얻다대고 미쳤? 님들이나 잘해요]

[파티/살구콩: 살벌하시네]

[파티/개냥이: 누군 걱정도 못하나;]

[파티/행곡: 자자, 그만 하고 마지막 한 분 오면 바로 갈테니까 대기 타세요]

―‘맴맴돌’님이 파티에 참가했습니다.

행곡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지막 6번째 자리가 채워졌다. 어디 두고 보자는 심보로 이현은 힐스킬을 장전하고 거신전에 입장하는 파티원을 따라 거대한 철문을 클릭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즉각 예를 누르자, 순식간에 캐릭이 어두운 지하신전으로 이동되었다. 깜빡거리는 캐릭들 사이에서 이현은 마음을 가다듬고 대상지정 tab을 눌러 탱커로 대상을 고정시켰다.

‘괜찮아. 그냥 1번하고 2번만 죽어라 누르면 돼. 피통 녹색으로 변하면 정화하고, 도트힐 가끔 넣어주고 하면 될 거야.’

1번과 2번은 쿨타임이 따로 도는 힐스킬이었다. 캐스팅 시간이 1번은 1초, 2번은 2초다. 그러나 1번은 캐스팅이 짧은 대신, 2초라는 재사용 쿨타임이 적용됐다. 그에 비해 2번 스킬은 재사용 쿨타임이 아예 없다. 초음엔 뭣도 모르고 캐스팅 시간이 짧은 게 그냥 다 좋은 건 줄 알고 1번만 죽어라 사용했었는데, 어느 날 김성훈이 힐이 너무 안 들어온다며 봐주더니 둘 다 쓰라고 해서 그때부터 번갈아 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파티/행곡: 갈게요. 바짝 따라오세요]

[파티/스시아: ㄱㄱ]

탱커의 뒤를 재빨리 따라붙은 이현은 행곡이 로머를 붙잡고 공격하자마자 바로 1번과 2번을 미친 듯이 눌렀다. 쉴 새 없이 눌러서인지, 첫 번째 방에 있는 몹을 다 죽일 때까지 탱커는 내내 만피를 유지했다.

“이거지!”

어쩐지 시작이 좋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현은 탱커의 뒤를 따라 달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파티를 하는 건데, 괜히 혼자 씨름하고 앉아 있었다.

“쩔보다 훨씬 재밌네.”

유저들과 함께 달리고 있는 제 캐릭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심지어는 뒤따라오고 있는 개냥이와 살구콩마저 예뻐 보일 정도였다. 그 정도로 이현은 지금 감격에 젖은 채였다.

그러나 그 감격은 첫 번째 방을 넘어 두 번째 동굴 방에 들어선 순간 소리없이 사라져 버렸다. 정말 다행인 게 있다면, 그 이유에 이현이 포함되지 않는 것이랄까.

[파티/맴맴돌: 헐... ㅈㅅㅈㅅ]

[파티/행곡: ㅌㅌㅌ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이현은 ‘ㅌㅌㅌ’를 외치는 행곡의 말에 냉큼 뒤를 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도사인 맴맴돌이 탱커가 지정한 몹을 점사하지 않고 옆에 있는 다른 몹을 건드려 애드가 난 것이었다. 덕분에 파티원들은 죽지 않기 위해 돌아온 길을 다시 미친 듯이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더한 발컨이 있을 줄이야….”

이래가지곤 내가 뭘 실수해도 발컨인 티가 안 나겠다. 이현은 측은한 시선으로 파티창 가장 밑에 있는 맴맴돌을 바라보았다. 거멓게 된 상태창을 보니 그새 또 죽은 모양이었다. 이번엔 제발 살리기 좋은 명당자리에서 죽어있기를 이현은 남몰래 기도했다.

[파티/맴맴돌: ㅈㅅ;; 아니, 오늘 왜 이러지...]

이현은 들어왔던 입장문 앞까지 도망친 후, 뒤늦게 도망쳐온 길드원들에게 힐을 넣어주었다. 다행인 게 있다면 맴맴돌 빼고는 전부 살아 도망쳐왔다는 것이다. 이게 몇 번이나 계속되자 살구콩과 개냥이도 어이가 없는지 처음엔 웃다 지금은 말도 안하고 있었다.

[파티/행곡: 저희 이판 못 깰 것 같은데, 다른 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파티/스시아: 한 번만 더 해보고 안 되면 쫑내요]

[파티/맴맴돌: 진짜 죄송요ㅠㅠ 이번엔 정말 잘 할게요ㅠㅠ]

[파티/개냥이: ㅡㅡ]

[파티/살구콩: 저희 걍 빠질게요. 이게 한 번 더 한다고 어케 될 것 같진 않네요]

살구콩과 개냥이는 결국 빠지기로 했다. 이현은 던전 입장 열람창을 켜 신전 재입장 시간을 확인했다. 도망치는 걸 30분이나 하고 있었던지, 그새 재입장 가능으로 전환되어 있었다.

[파티/스완나: 저도 그냥 빠질게요]

[파티/행곡: 그래여... 그럼 걍 쫑내요]

[파티/맴맴돌: ㅠㅠ]

[파티/스시아: 수고하셨어요]

[파티/개냥이: ㅅㄱㅇ]

수고하라는 말과 함께 던전 밖을 나가는 팟원들을 본 이현은 마지막으로 맴맴돌을 살리기 위해 그가 누워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몹들이 없는 명당자리에 누워있는 걸 보니, 나름 이현을 생각해 자리라도 잡은 모양이었다. 이현은 딱한 심정으로 맴맴돌에게 부활스킬을 넣고 되돌아왔다. 파티원들의 상태창이 검게 물들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파티/행곡: 헐 닭있네요]

[파티/스완나: 신성족요?]

[파티/스시아: 지금 거신전 앞에 쫙 깔렸어여ㅠㅠ]

[파티/개냥이: 아오, 저 닭발**들이]

[파티/살구콩: 안되겠네;; 팟 쫑내지 마세요. 다시 거신전으로 들어갈 테니까...]

[파티/행곡: 지원부르져. 만렙님들 외창으로 위치 때리면 올 거예요]

[파티/개냥이: ㄴㄴ지금 베히아 쪽 일일퀘 떠서 만렙들 거기 몰렸어요]

[파티/행곡: 일단 섭외침으로 제보 때리고 안 되면... 걍 마을가든가 해야죠, 뭐]

[파티/스시아: 님들 저희 길드 만렙님들 오신대요]

[파티/살구콩: 저희도 몇명 온다네요]

[파티/스시아: 헐, 저 시키들 엑저 길드였네;;]

엑저? 이현은 맴맴돌과 함께 거신전 문 앞에 앉아 팟원들의 이야기를 지켜보았다. 말하는 걸 들어보면, 지금 현재 거신전 던전 입구 근처에 신성족들이 쫙 깔려있다는 건데 어떻게 살아서 다시 들어오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안 나간 게 천만다행이었다.

[파티/행곡: 아 ㅅㅂ 욕나오네]

[파티/개냥이: 엑저 저 **는 왜 괜히 와서 꼬장질이야]

[파티/스시아: ㅠㅠ]

닭들 꼬장 심하다는 소리가 이 뜻이었나 보다. 이현은 그냥 마을로 귀환할까 하다가 놀 곳도 없고 해서 일단 밖의 상황이 해결될 때가지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내 주제에 파티는 무슨…. 그냥 혼자 돌기나 해야겠다.”

“왜, 또.”

“엑저인지, 억저인지가 와서 난리라잖아…!”

“이 새끼는 왜 또 이를 세우고 지랄이야.”

으르렁거리는 이현의 머리통을 옆으로 밀고 김성훈이 재빠르게 이현의 모니터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올라오는 글을 토대로 상황을 파악한 김성훈은 딱하다는 듯 이현의 머리를 토닥였다.

“병아리가 렙 올리기 만만치가 않아?”

“몰라….”

“너도 길드 부르든가.”

김성훈의 말에 이현의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 그러나 금세 고개를 젓고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 없앴다.

“얘네가 부른다고 했어.”

“엑저 저거 아처계열 1위라 좀 힘들 텐데. 길드까지 와서 지랄하는 거 보면, 부활포트박고 정착한 것 같은데?”

이현은 그냥 하하 웃으며 김성훈의 말을 무시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 그러나 그 생각은 정확히 10분 후 갈기갈기 찢어졌다. 옆에서 들려오는 김성훈의 웃음소리가 거슬렸다.

“거 봐라. 내가 뭐랬냐.”

“…….”

[파티/스시아: 뭥미;;; 왜 다 죽는 건데]

[파티/행곡: 죽여도 바로 오는 거 보면 길드포트 박아놓고 자리 잡은 것 같은데요]

[파티/개냥이: 아 ㅅㅂ... 끝이 없네]

[파티/살구콩: 우리 길드 걍 순삭이네 ㅎㄷㄷ]

[파티/스시아: 헐ㅠㅠㅠㅠ]

[파티/맴맴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ㅎㄷㄷ]

던전 안에 있는 맴맴돌과 이현만 전개되는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나갈까 해도, 나가면 바로 썰릴 것 같아 이현과 맴맴돌은 안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쟁은 족족 나타나 썰어대는 신성제국 쪽 엑저 길드의 승리로 돌아갔다.

[파티/행곡: 제보해도 만렙님들 안 오는거 보니까 다들 베히아에 있는 것 같네요, 에휴]

[파티/스시아: 아ㅠㅠ 이게 뭐야]

[파티/개냥이: 와 미치넼ㅋㅋㅋ]

[파티/행곡: 안 될 것 같은데 걍 쫑내죠... 베히아 일퀘 3시간 뒤에 끝나니까 그때쯤 오면 어떻게든 되겠죠]

[파티/살구콩: 저 ㅅㅂ넘들 어케 못하나ㅋㅋㅋ 아 개열받네]

[파티/스시아: 저도 너무 짜증나서 귀환이 안 눌러짐요ㅠㅠ]

3시간? 3시간이라고? 파티원들의 말을 가만히 보고 있던 이현은 3시간이라는 말에 기겁을 토해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지금 저 닭들 때문에 거신전을 3시간이나 방치해야 한다는 건데, 뭐든 꽂히면 죽자 살자 덤벼드는 이현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현은 아주 오랜만에 현타온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천장이었다.

“야, 야. 그냥 길드에 부탁해봐라.”

“…….”

“부탁은 공손하게, 알겠냐?”

그래, 한 번 부탁이라도 해보자. 혹시 아는가, 정말 와서 도와줄지. 이현은 비장한 표정으로 길드창을 끌어올리고 아주 천천히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길드/스완나: 저요...]

[길드/루스: 네]

제일 먼저 대답한 건 루스였다. 무려 1초 만에 대답했다. 그리고 정확히 3초 후, 길드 채팅창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읽기 힘든 속도로 글들이 올라오는데, 죄다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지라 순간 이현은 김성훈이 무슨 말을 흘리기라도 한 줄 알았다.

[길드/마초: 캬, 드뎌!]

[길드/베리베리: 뭔데요!!]

[길드/꼬마천재: 왜요, 뭔데?]

[길드/기토피아: 무슨 문제있음?]

[길드/잘살아보세: 울지 말고, 언놈이 그래요]

[길드/다이뜨자: 뭐야, 누가 건드려요?]

[길드/코코볼: 루스 개빠르네ㅋㅋㅋㅋ]

[길드/불사조: 시비 걸렸어여?]

[길드/신이내린캐: 다들 왜이리 빨라;]

[길드/백전승: 어떤 씹1새ㄲ1가 그래요]

[길드/묘냥이: 미1친넘들아ㅋㅋㅋ 길창만 보고 있었냨ㅋㅋ]

[길드/잘살아보세: ㅋㅋㅋㅋ 이것들 봐라]

[길드/다이뜨자: 다들 지금 일퀘중 아님?ㅋㅋㅋ 도랏ㅋㅋㅋ]

[길드/기토피아: 루스 이 자식 스피드 뭔뎈ㅋㅋㅋㅋ]

[길드/신이내린캐: 루스 이거 지금 나랑 일퀘중인데 안하고 뒤로 빠졌엌ㅋㅋ]

[길드/묘냥이: 벌써부터 귀환타는 새ㄲ1들은 뭐얔ㅋㅋㅋ]

[길드/코코볼: 아, 간만에 눈이 번쩍 떠지네]

[길드/마초: 와나... 개개신 텨나오게 하네]

[길드/다이뜨자: 나도 오늘만 개개신 가입한다. 팟줘라]

[길드/꼬마천재: 어떤 ㅅㅂ넘들이 그러는데요]

어째서인지 다들 이현이 시비에 걸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신성족 꼬장 때문이라고 하면 괜한 걸로 불렀다고 죽이려나? 잠시 고민하던 이현은 다시 3시간을 떠올리고 용기 내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라는 불안과 희망을 안고.

[길드/스완나: 저 좀... 살려주세요]

[길드/코코볼: ?]

[길드/베리베리: 닭?]

[길드/신이내린캐: 닭이네]

[길드/백전승: 다들 연장 좀 챙겨라]

[길드/기토피아: 쪼그려 달달 떨고 있는게 상상이 간다ㅋㅋㅋ]

[길드/잘살아보세: 오랜만에 닭털 좀 뽑아야쓰겄네ㅎㅎㅎ]

[길드/마초: 어디십니까, 병아리 힐러님]

[길드/베리베리: 오예, 닭이다!!!! 어디?!]

[길드/꼬마천재: 이래놓고 거신전 하면, 내일부터 내가 깽판친다]

[길드/스완나: 거신전인데...]

[길드/꼬마천재: 하... 거기였단 말이지]

[길드/기토피아: 울겠다, 울겠어ㅋㅋㅋ]

[길드/다이뜨자: 아이고, 내가 불쌍해서 가준다]

[길드/신이내린캐: 닭둘기 새ㄲ1들 안되겠네... 개발라버려야지!!!]

[길드/루스: 얌전히 있어요. 곧 갈 테니까]

루스의 말을 마지막으로 길드는 잠시 조용해졌다. 어째 일이 좀 많이 커진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현은 최대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잘 해결되면 나중에 절이라도 하자.

[파티/행곡: 수고요. 저 그만 갑니다.]

[파티/스완나: 제보 보고 몇몇 만렙님들 지금 온대요]

[파티/행곡: 흠야...]

[파티/스시아: 저희 길원들 봘하고 다시 온다네요]

다들 아쉽기는 마찬가지인지, 이현의 말에 쉽사리 귀환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거신전이 중렙들이 놀 수 있는 유일한 보스던전이기 때문이었다. 이다음 입장던전은 LV.60제인 ‘레비아니아 소굴지’이다. 줄여서 ‘레비안’이라 불리는데, 거신전에서 나오는 템들로 도배를 해야 유저들과 파티를 맺고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고로, 믿는 구석이 없는 자들은 LV.60이 되기 전까지는 거신전에서 닥사를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파티/개냥이: 아 짜증나네 저 ㅅㅂ넘들]

[파티/행곡: 저 그럼 본캐로 올게요]

[파티/스시아: 네 수고요]

―‘행곡’님이 로그아웃 하였습니다.

본캐로 와서 가세 좀 하려는 것 같은데, 본캐가 이것뿐인 이현에게는 꿈같은 얘기일 뿐이었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이현은 손 놓은 채 루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랬는데… 타협도 개발리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래도 타협이 1위 길드라잖아. 승산은 있겠지.

“…야, 타협이 지진 않겠지…?”

급 불안해진 이현은 무언가를 제작 중인 김성훈에게 슬쩍 물었다. 김성훈은 별걸 다 걱정한다는 듯 혀를 차며 이현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냥 얌전히 앉아 구경이나 해라.”

“보이지도 않아서 구경도 못 하거든?”

“그럼 나가서 뒤지고 화면이나 돌리면서 구경하든가.”

진풍경일거라며 부추기는 김성훈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현은 제 옆에 죽은 듯 앉아 있는 맴맴돌을 클릭했다. 괜한 마음에 클릭한 건데, 길드가 없는 걸 보고 조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역시 발컨은 길드에 들어가기 힘든가보다.

“내가 놀아주고 싶다.”

스멀스멀 피어나는 동정심이 손끝까지 올라와 근질거렸다. 같이 논다고 하면 김성훈이 때리겠지? 김성훈을 슬쩍 보며 이현이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김성훈과 눈이 딱 마주쳤는데, 확 찡그려지는 인상을 보고 포기해야 했다.

“뭔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하지 마라.”

“…….”

이현은 말없이 자신의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길드창에 루스의 말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길드/루스: 이현씨 어딥니까]

[길드/스완나: 저 거신전 안에요]

[길드/루스: 일단 거기 있어요]

밖의 상황이 보고 싶긴 했지만, 떼로 달려들 적들이 무서워 이현은 일단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얌전히 기다렸다. 그렇게 한 5분 기다렸나, 욕으로 도배되던 파티창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파티/스시아: 헐... 뭐지]

[파티/개냥이: ?]

[파티/살구콩: 꼬마?]

[파티/스시아: 베리? 베리도 있는데요;]

[파티/살구콩: 뭐야;]

[파티/개냥이: 헐 타협이네;]

[파티/살구콩: 뭔데 떼로 달려오냐;]

[파티/스시아: ㅁㅊ 진짜 타협이네]

[파티/맴맴돌: 타협이 뭔데요?ㅠㅠ]

[파티/살구콩: 님 옆에 있는 사람한테 물어봐요]

[파티/개냥이: ㅋㅋㅋ스완님, 타협한테 인사좀 해야죠?]

[파티/스시아: 아니;; 타협이 여기 왜 왔대]

[파티/스시아: 저 ㅅㄲ들이 제보받고 올 넘들이 아닌데]

개냥이랑 살구콩은 끝까지 이현을 물고 늘어졌다. 그놈의 타협, 타협 아주 노래를 부르는데, 진짜라는 게 밝혀지면 아주 평생의 놀림거리로 전락될 것 같아 이현은 이놈들에게만은 절대 길드를 밝히지 않기로 다짐했다.

[파티/개냥이: 어이쿠, 스완님이 부르셨나봐욬ㅋㅋㅋ]

[파티/살구콩: 고마워서 어쩌낰ㅋㅋㅋ]

[파티/스완나: 아 그만 좀 해여]

[파티/살구콩: 뭐 찔리는 거 있나ㅋㅋㅋㅋ]

[파티/스완나: 아 진짜]

[파티/개냥이: 와 ** 루스도 왔네]

독수리 타법 준비를 하던 이현은 루스라는 단어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길드창을 바라보았다. 길드창에는 아무런 말도 올라오지 않았다. 이현의 시선이 다시 상황중계로 이어지고 있는 파티창으로 향했다.

[파티/스시아: 미쳤다... 걍 순삭이네]

[파티/개냥이: 아 ㅅㅂ 루스 저 ** 스킬쓰는거 봐라]

[파티/살구콩: 타협 **들 공적등급 사기네;; 뭔데 죄다 훈장 달았냐...]

[파티/개냥이: 미1친ㅅㄲ들이네]

[파티/스시아: 루스 엑저한테 뭐 앙갚음 있나? 걍 개패네;;]

[파티/개냥이: 쟤들 뭐 신들렸음? 무슨 신들린 듯이 썰고 있어;]

파티원들의 대화에 이현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갔다. 나보고 나오라고 하진 않겠지? 아닐 거야. 애써 마음을 다독이던 이현에게 루스가 반가운 말을 전한 건 잠시 후였다.

[길드/루스: 이현씨 나오세요]

“아, 왜!”

이현은 머리를 싸매며 도망갈 구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나가면 분명 미친 삼인방이 알은 척을 할 거고, 그러면 이현이 타협 길드인 걸 들키고 만다. 게다가 지금 나가면 신성족 놈들한테 썰려서 죽을 확률은 더더욱 높다.

[길드/스완나: 저... 안 나가면 안돼요?]

[길드/루스: 네]

1초 만에 다시 대답이 돌아왔다. 왜 쓸데없이 대답은 빨리하는 건데. 이현은 우울한 표정으로 캐릭을 느릿느릿 일으켰다.

[길드/베리베리: 걱정마여 힐러님! 내가 곧 갈게여]

[길드/꼬마천재: 내가 주변에 덫 설치할게]

[길드/베리베리: 오는 넘들 변신 굴리고 속박 걸면 얼추]

[길드/마초: 난 지금 문앞이다ㅋㅋㅋ]

[길드/꼬마천재: 개빠르네]

[길드/루스: 이현씨 나와요]

결국 이현은 암울한 표정으로 굳게 닫힌 철문을 클릭해야 했다. 화면은 순식간에 어두운 지하동굴의 모습에서 용암호수가 보이는 높은 산 중턱의 필드로 전환되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문 앞에 무더기로 죽어 있는 수많은 유저들이었다. 구경이라도 하는지, 다들 귀환은 않고 가만히 드러누운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중에는 이현의 파티원들도 있었다.

[베리베리: 오예, 힐러님 나왔다!]

[마초: 캬 얼굴보기 힘드네]

우리 잠깐만 모른 체하자. 이현은 자신의 옆으로 오는 베리와 마초를 피해 재빨리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나 2초 후 다시 뒤로 뛰어 들어와야 했다. 엑저 길드와 타협이 코앞에서 벌떼처럼 달려들며 서로를 썰고 있던 탓이었다. 아주 저들끼리 신이 난 듯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헉, 소리가 나올만한 살벌함에 이현은 던전의 문 앞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베리와 마초도 냉큼 따라붙었다.

[베리베리: 걱정마요 힐러님. 내가 오면 다 변신 굴려줄테니까]

[마초: 캬캬, 내가 써는 게 더 빠름]

[베리베리: 꼬마가 덫도 설치 해놨어여! 여기, 저기, 조기, 보이죠?]

“안보여, 새끼야!”

이현은 들려오는 모든 말을 외면하고 돌무더기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욕먹더라도 안에 그냥 있을 걸 그랬다. 상태창을 도배하는 붉은 글씨들이 그렇게 살벌할 수가 없었다. 그 글들을 외면하며 이현은 캐릭을 웅크려 앉혔다. 파티창에 글이 올라온 것도 그때였다.

[파티/스시아: 스완님이 타협 부른 거였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현은 가만히 채팅창을 보다 옆에서 아우성거리는 베리와 마초를 힐끗 바라보았다. 얼마나 관찰했을까, 이현은 문득 마초와 베리가 길드창이 아닌 일반창으로 채팅을 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헉!”

아니, 이 새끼들은 왜 길드창 내버려두고 일반창에 치는 건데!

이현은 재빨리 길드 채팅창에 엄청난 속도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구구절절한 말은 한 줄을 넘어 두 줄까지 이어졌다. 내용은 즉, 베리와 마초에게 아주 잠깐만 저를 아는 체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이현이 막 엔터를 치려던 그때, 이현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전투태세로 온몸에 도핑과 버프를 두르고 있는 루스였다.

루스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일반 채팅’으로 이현에게 말을 걸었다. 세상 사람들 다 아는 그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말이다.

[루스: 이현씨, 이리와요]

…이 이름 부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 이제 어떡해… 개망했어.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진 느낌이었다. 이현은 그 틈에서 슬금슬금 도망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길드창에 올리려던 글을 지우고 루스에게 다가가는 척 캐릭을 움직였다. 파티창에는 개냥이와 살구콩의 채팅이 무서운 속도로 떠오르고 있었다.

[파티/살구콩: 이현?]

[파티/개냥이: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파티/살구콩: 뭐더라...]

[파티/개냥이: 뭐였지]

[파티/스시아: 님들;; 그거잖아요.]

[파티/살구콩: ?]

[파티/개냥이: 그거요?]

[파티/스시아: 그... 탭현이요;]

순식간이었다. 이현이 루스를 쌩 지나치고 튀어나간 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현의 등 뒤로 두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파티/살구콩: 헐]

[파티/개냥이: 헐]

―파티를 탈퇴하였습니다.

난 모르는 일이야! 이현은 뒤도 안 돌아보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아끼던 주문서고 뭐고 그냥 있는 대로 씹어 먹고, 버프며 스킬이며 이동속도를 증가시킬 수 있는 건 뭐든 사용했다. 절박하게 도망치는 이현의 모습이 베리와 마초의 눈에는 그리 딱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아우성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베리베리: 힐러님, 더 탭현이 같으니까 고만 가요ㅋㅋ 누가 봐도 힐러님이야ㅋㅋㅋ]

[마초: ㅋㅋㅋㅋㅋ병아리 달려가는 거 봐라]

[베리베리: 삐약삐약! 삐!! 뺙! 푸드덕! 프드득!]

[마초: ㅋㅋㅋㅋ개웃기넼ㅋㅋㅋㅋ]

“니들은 지금 이게 웃기냐!”

누군 지금 살자고 도망가는데, 웃기냐고! 아니, 애초에 이게 다 너희 때문이잖아! 이현은 베리의 말대로 뺙! 소리치며 푸드득거렸다. 그 모습을 김성훈은 턱을 괸 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아, 이 여우새끼를 대체 어쩌면 좋냐….”

“말 걸지 마. 나 지금 바쁘다.”

[길드/신이내린캐: 엇! 힐러님 저기 있네]

[길드/코코볼: 살아있었네, 휴]

[길드/기토피아: 어이쿠! 어딜 그렇게 귀엽게 달려가시나]

[길드/잘살아보세: 마초가 왜 병아리, 병아리 하나 했더닠ㅋㅋㅋㅋ]

[길드/다이뜨자: 머리 위에 뜬 거 봐라ㅋㅋㅋ]

[길드/묘냥이: 진짜 병아리넼ㅋㅋㅋㅋ]

[길드/백전승: 삐약삐약! 뺙뺙!]

“뺙뺙같은 소리 하네!”

너네는 닭이고 난 왜 병아리냐?! 여기저기서 나타나 기웃거리는 길드원들을 쏜살같이 쳐내며 이현은 오로지 앞만 보고 돌진했다. 그러나 비장하게 달려가던 이현의 도주계획은 얼마 가지 못해 화려한 죽음 속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위치도 모르는 곳에서 날아든 강속 화살 때문이었다. 쐐액 소리가 들려올 만큼 빠르게 날아온 화살촉이 이현의 등 뒤로 퍼버벅 박혔다.

―신성제국의 ‘엑저’가 사용한 혈촉의 화살로 2990의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신성제국의 ‘엑저’가 사용한 송곳 연사로 2195의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출혈을 입어 초당 300만큼의 데미지를 받습니다.

―사망하였습니다.

“아….”

단 3번의 공격으로 죽어 버렸다. 그냥 그대로 발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이 황당해 이현은 한동안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옆에서 혀를 차던 김성훈도, 열심히 떠들어대던 베리와 마초도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기웃기웃 거리던 길드원들도 모두 멈춰서 굳은 채였다. 다행히 쟁은 타협이 엑저 길드를 다 썰어버린 덕분에 소강상태에 접어든 상태였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화살이 날아왔던 방향으로 붉은 점이 다시 우글우글 몰려들기 시작했다. 부활포트에서 살아난 엑저 길드가 굴욕을 갚기 위해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길드 채팅창에 꼬마의 말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길드/꼬마천재: 하... 개빡치네]

꼬마의 말이 떠오른 순간, 멈춰있던 길드원들이 하나 둘, 무기를 꺼내들고 붉은 점이 응집한 곳으로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걸 보던 이현은 루스가 있던 거신전의 입구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새 어디로 모습을 감춘 건지, 루스와 덤앤더머가 보이지 않았다.

“아, 모르겠다. 그냥 구경이나 해야겠다.”

이미 죽은 거 그냥 마음 편히 구경이나 해야지. 깎일 공적이 없었다는 게 참 다행이랄까. 이현은 속편한 생각을 하며 턱까지 괴고 관전하기 시작했다. 이미 멘탈은 회복한 지 오래였다.

[다이뜨자: 아, 개개신 가입하길 잘했네]

[코코볼: 인간적으로 병아리는 건들지 말자]

[신이내린캐: 이야, 그렇게 처맞고도 정신을 못 차렸어?]

[불사조: 점사한 새ㄲ1 이리 좀 와봐라]

[기토피아: 개객기들아. 공적 준비는 좀 하고 왔냐?]

미친놈 삼인방으로도 모자라 타협놈들까지 죄다 일반창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차분했던 분위기는 엑저 길드가 무기를 꺼내들기 시작하자, 욕설이 난무하는 광란의 장으로 뒤바뀌었다.

[다이뜨자: 이 **들!!!!! 니들 **어!!!!]

[신이내린캐: ** 새ㄲㅣ들이!!!]

[불사조: 다 발라주마, 새1끼들아!!!]

[기토피아: 개발리고 울지나 마라, **들아!!]

[잘살아보세: ***들이 병아리를 건들고 **들이야!!!]

아니, 죽은 건 난데 왜 지들이 더 난리야….

이현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서로를 향해 떼로 달려드는 타협과 엑저 길드를 바라보았다. 잠잠하던 상태창은 다시 붉은 글씨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신마제국의 ‘기토피아’가 혈검 투혼을 사용해 신성제국의 ‘기로기로’에게 2590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신마제국의 ‘코코볼’이 복수 베기를 사용해 신성제국의 ‘강화지존’에게 2901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신마제국의 ‘다이뜨자’가 물리상쇄를 사용해 신성제국이 ‘화살비’의 강화강타를 무력화 하였습니다.

“진짜 잘 싸우네….”

“이제 알았냐?”

멀리서 봐도 타협이 강세라는 게 그냥 한눈에 보였다. 이현은 감탄과 함께 화면을 쓱쓱 돌리며 날아다니는 타협 길드원들을 바라보았다. 흑백 화면이라 화려한 스킬의 이펙트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타격소리와 함께 휘둘러지는 무기의 연계 동작이 실력의 경지를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 문제가 있다면, 조금 살벌하달까.

“…….”

무슨 일이 있어도 저놈들한테는 절대 덤비지 말자. 속으로 혼자만의 다짐을 새기며 이현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학살수준으로 썰고 있는 타협 사이로 루스가 뛰어든 것도 그때였다.

[길드/루스: 위에 부활포트 찾았으니까 다들 썰어 보내요]

[길드/꼬마천재: 엑저새ㄲ1들 봘포트 찾음]

[길드/마초: 캬캬캬!! 다 죽여서 이리로 보내시라!]

[길드/베리베리: 제대로 썰어주마!!]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저기 쑤시며 엑저 길드 부활포트를 찾고 있었나 보다. 삼인방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길드원들이 극딜을 시전해 엑저 놈들을 하나 둘 썰어 죽이기 시작했다.

[길드/기토피아: 위치 어디냐]

[길드/마초: 위치]

[길드/코코볼: ㄱㄱ]

[길드/신이내린캐: 니들 오늘 디1졌다, ㅅㅂ]

[길드/다이뜨자: 어디서 병아리를 건들고 ㅈ1랄]

이현의 시선이 자신의 캐릭으로 향했다. 자꾸 병아리, 병아리 거리는데 뭐 때문에 그러는지 슬슬 궁금해진 탓이었다. 별명의 출처는 생각보다 빨리 찾을 수 있었다. 스완나 이름 바로 옆에 떠 있는 아주 작은 그림. 그건 캐릭을 새로 생성한 초보자에게 붙는 타이틀 그림이었다.

“에이, 씨! 이게 왜 여기 있는데…!”

코딱지만 한 크기였다. 겨우 보일 만큼 작았는데, 그걸 대체 어떻게 보고 찾았는지 모르겠다. 있는지도 몰랐던 샛노란 병아리 그림이 이현에게 뺙! 소리라도 지르는 것 같았다. 없애려고 해봤지만, 의무적으로 붙는 건지 타이틀을 바꿔 봐도 그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 왜 안 사라져.”

“그거 캐릭 생성하면 한 달간은 의무적으로 붙어 있어서 못 없앤다. 그냥 얌전히 기다려라.”

이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한 달간 내내 병아리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서러워진 탓이었다. 이현이 서러워 몸부림칠 동안, 타협 길드원들은 마초가 제보한 위치로 모여들어 부활포트에서 살아난 엑저 길드를 학살하고 있었다.

살아나는 족족 썰어서인지, 그렇게 바글바글하던 놈들이 지금은 보이지도 않았다. 딱 한 명, 남아 있는 신성족이 있긴 했다. 바로, 루스가 잡고 후려패고 있는 ‘엑저’였다.

―신마제국의 ‘루스’가 방패 휘두르기로 신성제국의 ‘엑저’의 강화강타를 무력화 하였습니다.

―신마제국의 ‘루스’가 폭염의 칼날을 사용해 신성제국의 ‘엑저’에게 1890의 데미지를 주고 출혈을 남깁니다.

엑저가 장거리 딜러라 상대하기 여간 벅찬 게 아닐 텐데, 포획과 넉백딜로 거리를 좁히고 루스는 한쿨 연계스킬로 엑저를 차근차근 밟았다. 그게 장기전으로 되자, 승리는 자연스레 루스에게로 돌아갔다.

―신마제국의 ‘루스’가 신성제국의 ‘엑저’를 쓰러트렸습니다.

엑저가 몸을 비틀며 바닥 위로 쓰러지자마자 루스는 몸을 돌려 곧장 이현에게 다가갔다. 어째 다가오는 폼이 누구 하나 죽일 모습이라, 이현은 저도 모르게 쫄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그냥 거신전 안에 있을 걸 그랬다.

[루스: 이현씨 도망 잘 가네요]

이현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무서워서 소리는 못 치겠고, 그렇다고 수긍하자니 뭔가 억울했다.

[루스: 병아리라 이렇게 죽나]

이놈의 병아리소리, 진짜 어떻게 못 하나. 이현은 눈물을 머금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무서워서 큰 소리는 못쳤다.

[스완나: 병아리 아니에요...]

[루스: 그럼 뭡니까?]

루스가 부활석을 사용해 부활을 넣어주며 물었다. 화면에 뜬 부활 제안을 수락해 일어난 이현은 혹여 또 죽기라도 할까 루스의 옆에 바짝 붙어 생명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스완나: 스완나요]

루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루스의 대답 대신 상태창을 가득 채운 건, 엑저 길드의 사망소식이었다.

―신성제국의 ‘설희’가 사망하였습니다.

―신성제국의 ‘도신’이 사망하였습니다.

―신성제국의 ‘또또’가 사망하였습니다.

광란의 학살은 여전히, 거침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오싹함이 느껴지는 사망소식에 이현이 달달 떨며 루스의 옆구리로 파고들었을 때였다. 새빨간 글씨 사이로 흰색 글이 덜렁 올라왔다.

[루스: 병아리 맞네요]

우울한 표정으로 이현은 자신의 닉네임 옆에 붙은 작은 병아리 그림을 바라보았다. 병아리가 저를 향해 ‘뺙뺙!’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그게 어쩐지 그만 인정하라고 하는 것만 같아서, 이현은 우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제 다신 안 불러…. 내가 너희 부르나 봐라.

이현은 생애 다시없을 큰 다짐을 가슴에 새겨 넣었다. 더불어 빨리 병아리를 없애자는 야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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