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9)

6. 힐러의 현란기

맥강딩을 이기고 일주일이 흘렀다. 그 사이 이현에게는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일단, 조롱 섞인 귓속말이 줄게 되었고 지나갈 때 마주치는 유저들의 태도가 살갑게 바뀌었다. 늘 비아냥거리던 말들의 연속이었는데, 그날 이후 무슨 유명인사라도 만난 듯 유저들이 이현을 보면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평판이 좋아진 걸까, 개중엔 같이 파티를 가자고 하는 유저들도 있었다. 그런 제안을 받을 때마다 이현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아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루스와 삼인방, 김성훈과 가는 고정 파티가 생겼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일 만큼 안 좋은 일도 생겼다. 안 좋은 일의 시작은 메인 퀘스트, 즉 아직 깨지 않은 베히아의 퀘스트를 흑백이 트집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신성제국/흑백: 그러니까 지금 베히아에 가기 싫다?]

[이현: 아뇨...그건 아니고...]

[신성제국/흑백: 그건 아닌데, 아직도 베히아의 메인퀘를 못깼어요?]

[신성제국/흑백: 이현씨]

[이현: 네...]

[신성제국/흑백: 여기서 죽을래요 갈래요? 응? 선택권 줄게. 한 백번 죽으면 뭐, 가고 싶을 것 같아서.]

흑백의 겁박을 듣자마자 이현은 처음으로 베히아에 갈 결심을 했다. 평소라면 말렸을 삼인방이 그날따라 말 한마디 안 하는 게 평소에 말을 안 했을 뿐, 이현이 베히아에 안 가는 게 답답하긴 했던 것 같았다. 이현이 베히아에 가겠다고 한 마디만 했을 뿐인데, 광란의 춤을 춘 것을 보면 말이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이현은 결국 그날 마을 상공에 자리한 포탈 원석을 타고 베히아에 입성하게 되었다. 첫 발자국을 새긴 셈이었다.

[베리베리: 오예! 첫 입성!]

[마초: ㅋㅋㅋㅋㅋ 푸득거리는거 봐라]

[꼬마천재: 괜찮다니까 그러네]

너희가 아무리 그래도 난 안 볼란다. 이현은 루스의 옆구리로 파고들며 시야를 바닥으로 내렸다. 주변도 어두침침한데 지도는 죄다 새빨간 점들로 가득했다. 언제 어느 때 신성족 놈들이 나타나 뒤치기를 할지 모르는 곳이다. 가만히 서서 있기에 이현은 아직 심장이 크질 못했다.

게다가 아까부터 들려오는 집착이 담긴 말이 신경을 더욱 거슬리게 만들었다.

[신성제국/맥강딩: 한판 더 하자고! 야! 야!!]

집착어린 글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현에게 공개적인 패배를 당했던 맥강딩이었다. 그날 이후, 틈만 나면 나타나 주구장창 다시 하자고 외치는데 떼어놔도 다시 나타나는 게 정말 바퀴벌레 생명력과 맞먹었다.

“저건 대체 어떻게 알고 나타나는 건데….”

저 새끼를 어떻게 떼어내지? 이현은 루스의 옆구리에 캐릭을 욱여넣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꼬마천재: 저 새1낀 왜 또 와서 ㅈ1랄이냐]

[베리베리: 아이고, 할 짓도 없다]

[마초: 가서 썰어버릴까]

제발 좀 그래주라. 이현은 지도를 염탐하며 두 손을 맞잡고 응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이번 겜생은 글러먹었나 보다. 이현은 한숨을 내쉬다 한 발짝 멀어진 루스를 깨닫고 재빨리 달려가 다시 그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이현이 파고들자마자 루스는 다시 한 발짝 뒤로 멀어졌다. 이현도 다시 냉큼 움직였다.

[꼬마천재: 뭐하냐;;]

[베리베리: 나도 껴줘! 뱀뱀!]

[마초: 올 유인하기!]

유인? 그 말을 듣자마자 이현은 루스에게서 등을 돌리고 재빨리 삼인방의 옆구리로 달려들었다. 베히아에 도착하고 루스가 처음으로 채팅을 친 것도 그때였다.

[루스: 제 옆에 있는 게 더 안전할 텐데요]

그 말을 보자마자 이현은 다시 방향을 틀어 루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래, 유인이고 뭐고 일단 살고 봐야지. 여전히, 만렙이 되어서도 살고자 하는 집착은 대단했다.

[마초: 자, 이제 신성족 썰러가자!]

[꼬마천재: 우리섭 곧 성전이니까 미리 준비시키면 되겠네]

[베리베리: 오오! 그거 좋다! 힐러님 이리와요! 내가 잘 알려줄게요!]

성전은 서버 내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대규모 공성전으로, 신성족과 신마족이 신의 계시를 받고 서로의 요새를 지키며 공성을 벌이는 에르덴의 가장 큰 PVP 이벤트였다.

소규모 요새전과는 판이 다른 대규모 이벤트인지라 자주 열리지는 않았지만, 최고난이도의 중요 콘텐츠인 만큼 어마어마한 보상이 걸려있어 늘 참여인원이 2천 명을 넘나들었다. 각 종족당 약 천 명 이상이 이 이벤트에 참여한다고 보면 됐다.

물론 유저들이 가장 열광하는 보상은 승리했을 때 지급되는 공적이었다. 그 공적치는 적팀을 죽인 킬수와 별개로, 승리했을 때 길드 기여도 순위로 차등 지급되었다.

[이현: 저 성전 안 해요]

내가 그걸 왜 해. 죽으려고 가나. 이현은 루스의 옆에 바짝 붙은 채 투덜거리듯 말했다. 성전에 가느니 그 시간에 열심히 채집을 하고 다니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겠다.

[마초: 힐러님아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응?]

[이현: 싫어요!]

[꼬마천재: 그러다 또 흑백한테 혼날라]

[이현: ...저 안 가면 안 돼요?]

[베리베리: 오구오구, 흑백 무서워쪄요?]

흑백이 거론되자 이현은 금세 비굴해졌다. 예전에 한 번 이현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성전을 본 적이 있었다. 열광하는 남들과 달리 이현은 그때, 두 종족이 통 뭘 하며 싸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본인들 요새를 지킨다고 용을 쓰는 것 같긴 한데, 벌떼처럼 달려드는지라 정확한 상환판단도 어려울 정도였다.

[이현: 그냥 다 죽던데...]

[베리베리: 허걱! 죽는다니요! 난 성전에서 죽은 적 한 번도 없음요!]

[꼬마천재: 나도]

[마초: 타협은 안 죽지 암.]

[베리베라: 강림은 루스가 하니까 걱정마여]

[꼬마천재: 아, 슬슬 성전이니까 또 루스 강림영상 메인타겠네]

“그게 그렇게 대단한가….”

이현은 루스를 힐끗 바라보다 화면을 내리고 에르덴 홈페이지에 들어가 ‘루스 강림’이라는 말을 게시판에 쳤다. 검색되는 글과 영상이 생각보다 많은 데다, 댓글수와 관심수가 여타 메인글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그중 가장 최근 걸 찾아 들어간 이현은 스크린샷을 대충 훑어보고 화면을 내려 댓글창을 보았다. 그렇게 싸잡아 욕을 먹던 루스와 타협이 여기에선 무슨 신이라도 되는 양 칭송받고 있었다.

“…야.”

이현은 댓글을 쭉 훑던 중, 궁금한 게 있어 옆에서 물약을 제조하고 있는 김성훈의 팔뚝을 툭툭 쳤다. 뭐냐는 듯 바라보던 김성훈에게 이현은 한 댓글을 가리키며 물었다.

“논타겟팅이 뭐야?”

“뜬금없이 뭔… 아.”

김성훈의 시선이 이현이 가리키고 있는 댓글로 향했다. 그곳에는 ‘강림’을 한 루스의 논타겟팅 무빙에 대한 열렬한 찬양글이 적혀 있었다.

강림은 성전 때, 신의 계시를 받아 변신할 수 있는 걸 말한다. 캐릭의 20배가 되는 크기로 형상화해 커지는데, 모든 능력치가 월등히 높아져 같은 강림자가 아니면 죽일 수 없다고 봐야 했다. 강림자의 스킬 한 방에 유저들 몇 십이 그냥 뻗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었다. 게다가 강림자에게 죽은 유저는 부활을 넣어줘도 다시 살아날 수 없었다.

“에르덴은 기본적으로 타겟팅 방식 게임이야. 근데, 성전에서 강림한 유저는 강림할 동안 논타겟팅 방식으로 전환돼. 대상이 마우스나 키로 잡히지 않고 직접 화면에 맞춰 조준해서 맞추는 방식이야. 총싸움 알지? 그거라고 보면 돼.”

“이게 어려워?”

“나도 논타겟팅 게임은 좀 해봤는데, 강림버전은… 도저히 못하겠더라. 일단 강림하면 일반 캐릭의 20배 정도 커지니까 움직임도 달라지고, 거리제한이나 스킬제한도 생겨나. 논타겟팅 조준점이 움직이는 구간마다 나타나고, 스킬 쓸 때는 최대 8개까지 생성돼서 하나하나 다 맞추면서 써야 겨우 연계스킬이 발동돼. 공식홈에 시뮬레이션 있으니까 한번 해 봐.”

“…그걸 하는 사람이 있다고?”

“보면 모르겠냐? 근 1년 동안 내가 신성족 하면서 성전을 이겨본 적이 없다. 왜겠냐?”

“왜?”

“루스가 강림해서 다 쓸어버려서 그렇다, 얌마. 그러니까 형한테 잘해라.”

어…그래. 시열이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몰랐다. 덕분에 이현은 잠시 얼떨떨해졌다. 그러나 다시 게임으로 돌아가 냉큼 루스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역시 루스밖에 믿을 게 없었다.

[베리베리: 우리가 안 죽게 잘 알려줄게여!]

[꼬마천재: 걍 루스 강림할 동안만 버팁시다, 커피 사줄 테니까]

[이현: 강림하는데 얼마나 걸려요?]

[마초: 일단 성전 시작되기 전에 각 종족은 고성 심층부에 있는 강림방까지 소모전을 해야 되는데, 여기에 1순위로 도착하는 길드한테 강림할 수 있는 열쇠가 주어짐.]

[꼬마천재: 신마족 쪽은 우리 길드가 항상 1순위로 도착해서 강림은 늘 루스가 하고, 강림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정확히 15분.]

[마초: 루스가 우리 길드넘들 중에 강림 컨트롤을 제일 잘해서 루스가 강림하는 거고]

“15분?!”

이현이 식겁해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베리베리: 강림준비에 들어갔을 때가 진정한 성전의 시작이에요! 그리고 그 15분 동안 서로가 피 터지게 싸웁니다! 우리도 루스 지키면서 피 터지게 싸워야 해여. 일단 강림하면 압승이라 반대편 진영에서 강림 못 하게 하려고 수단방법 안 가리고 덤비지요!]

[이현: 강림은 딱 1명만 하죠?]

[꼬마천재: 양 진영 1명씩. 신성족도 1명, 신마족도 1명 이렇게. 만약 양쪽 다 강림 성공하면, 그때부턴 강림자들끼리 싸워서 승부 봐야 하고.]

[마초: 만약 한쪽만 강림 성공하면... 뭐 학살당하는 거지 캬캬! 우리는 항상 루스가 강림해서 이겼었지!]

[베리베리: 이게 다 루스를 잘 지켜준 우리의 덕이지! 그러니까 힐러님도 걱정 마여! 내 옆에 꼭 붙어 있으면 되여!]

[꼬마천재: 공적 꼭 얻게 해줄 테니까 걱정 말고]

그거 아주 눈물 나게 고맙다. 이현은 부디 그 날이 오지 않길 빌며 유인하는 루스를 따라 다시 후다닥 따라붙었다. 도대체 어디로 유인하나 했더니, 베히아의 필드 내에 무작위로 배치된 분쟁불가 안전지대인 ‘공간균열지대’였다.

―분쟁불가 지역인 ‘공간균열지대’로 들어왔습니다.

깃발이 꽂힌 균열지대에는 창고지기와 상인, 균열지대 간 이동시켜주는 비행사가 있었다. 엄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이현은 그제야 안심하며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난데없이 던전 얘기가 튀어나온 것도 그때였다.

[베리베리: 오! 마침 레바니호 열렸는데! 여기 가여, 힐러님!]

[꼬마천재: 공적 얻을 수 있는 PVP 레이드 던전인데, 신성족 견제하면서 열쇠 얻고 보물방 가서 먼저 보물 먹으면 승리. 패배해도 보상으로 공적 주니까 갑시다.]

싫은데…. 싫은데도 차마 싫다는 소리를 하지 못하겠다. 흑백이 이현에게 일주일 내로 공적을 모아 검사받으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었다.

[마초: 성전 전에 경험 좀 쌓아야지!]

레바니호는 베히아 맵에서만 갈 수 있는 레이드 던전이었다. 5시간마다 오픈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그 중 3시간 동안은 ‘온’으로 입장횟수에 제한이 없었지만, 이후 2시간 동안은 ‘오프’로 전환되기 때문에 입장을 할 수 없었다. 베히아에 온 적 없던 이현에게는 낯선 던전이기도 했다.

[꼬마천재: 오늘 여기 가고 내일부터 미션하면 되겠네]

베히아는 LV.25부터 올 수 있는 지역이었다. 신성족, 신마족의 자유로운 PVP를 위해 파생된 맵으로, 거점지 외의 모든 것을 공유하며 싸우는 PVP 활발 지역이었다. 베히아가 인기 있는 이유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곧 공적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지나다니는 몹을 죽여도 공적이 들어왔고, 퀘스트의 보상에도 공적이 포함되었다. 심지어 베히아에서 상대 종족을 죽였을 시, 일반 맵에서 죽인 것보다 1.5배 더 많은 공적치가 들어오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베히아에서 기습이란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일단 어디라도 가자.”

이러고 서성거리다 기습으로 죽느니, 차라리 어디든 들어가 목숨이라도 부지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이현은 냉큼 던전에 가겠다고 대답했다. 이현의 대답에 안전지대로 따라 들어오던 삼인방은 다시 광란의 춤을 추었다. 그러나 그 광란의 춤은 몇 시간 후, 다른 의미로 변질되었다.

정확히는 이현이 레바니호라는 신세계를 경험하고 나왔을 때였다.

“…진짜… 재밌다.”

그냥 몇 번 하고 빠질 생각이었다. 분명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런 이현의 생각은 첫판을 돌고 나온 순간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레바니호 레이드는 신성족과 신마족이 6:6으로 붙어 정해진 시간 안에 배틀을 하며 레비아탄을 죽이고 열쇠를 얻어 보물방에 난입해 먼저 보물을 얻으면 승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근데 이게 PVP랑 절묘하게 섞인 거라 그런지 일반 던전에서 느끼는 것과는 다른 스릴과 재미가 있었다.

덕분에 신세계에 빠진 이현은 루스를 붙들고 그때부터 3시간 동안 레이드를 무한반복 했다. 그 결과, 지쳐 나가떨어진 삼인방이 바닥에 널브러지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신이 난 건 이현 혼자뿐이었다.

[이현: 저희 또 해요!]

이현의 외침에 널브러져 있던 삼인방이 미친 듯이 달려들어 루스에게 가는 이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베리베리: 내가 봤을 때!! 힐러님은 강림을 못해도 이겨!]

[꼬마천재: 와! 신컨 다 됐네! 더 이상의 컨은 사치다 진짜]

[마초: 이번 성전도 우리가 이겼네! 캬! 고만해도 되겠어!]

“아 좀 비켜봐!”

앞을 가로막고 버티는 삼인방을 피해 이현은 시야를 이리저리 돌렸다. 뒤에 느긋이 서 있는 루스의 모습이 발광하는 손짓에 가려 보이지가 않았다. 아니, 한 판만 더 하자고!

[이현: 한 판만 더 해요!]

[베리베리: 아니! 힐러님!!! 상대편이 불쌍하지도 않아요? 주륵주륵]

[꼬마천재: 사치라니까!]

[마초: 이만하면 신이다!]

[이현: 저 아직 멀었어요]

[베리베리: 헉!]

[마초: 헉!]

[꼬마천재: 집념봐라;]

그렇게 하기 싫은가. 이현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 시무룩하게 섰다. 레이드를 돈 게 생각나는 것만 해도 7판 정도이니, 삼인방이 이렇게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채집보다 재밌는 걸 찾았는데, 이대로 가기엔 좀 아쉬웠다.

[루스: 이현씨. 어차피 이제 레이드 시간 끝났으니까 내일 다시 돌아줄게요]

[베리베리: 억! 그르네?! 끝났네?! 끝났다!]

상태창 하단에 뜬 시간을 확인하자, 벌써 밤 11시가 다 되어 있었다. 옆에서 하품을 하는 김성훈을 본 이현은 잠시 고민하다 오늘은 그만 포기하기로 했다.

[이현: 내일 진짜 또 돌아줘야 해요?]

[마초: 아고고 걱정맙시다ㅋㅋ]

[베리베리: 내가 내일 체력 비축하고 온다!]

[꼬마천재: 늦었다. 늦게 다니면 못써요]

“야, 안 가냐?”

때 마침 옆에서 김성훈이 손목시계를 보며 이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현은 고민도 않고 손을 홱홱 흔들었다.

“먼저 가라.”

“미쳤냐? 웬만하면 그만하고 들어가라.”

“싫거든!”

“아오, 이걸 진짜!”

뻗어오는 손을 피해 이현이 몸을 뒤로 쭉 뺐다. 김성훈은 잠시 고민하다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카운터에 가서 커피 두 개를 사와, 하나를 이현에게 휙 던져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안 가냐?”

“밤길 위험하다, 새끼야.”

예전엔 내 얼굴이 무기라더만. 이현은 투덜거리며 커피를 따고 목을 축였다.

“몇 시까지 할 건데.”

“채집하다 레바니호 열리면 그거 몇 번 돌다 갈 거야.”

“아주 폐인 납셨네. 새벽 1시까지 기다렸다 그걸 돌고 가겠다고?”

“응. 커피의 힘으로.”

“이걸 진짜 때릴 수도 없고…. 하아, 같이 돌아줄 테니까 두 번만 돌고 가라. 알겠냐?”

별수 없다는 듯 김성훈이 심란한 톤으로 말했다. 이현은 신이 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군이 생긴 든든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루스: 이현씨, 늦었는데 집에 가야죠.]

[이현: 저 좀 더 있다 가려고요]

사실대로 안 말하면 쫓아올 것 같아 정직하게 대답한 건데, 설마 그것 때문에 뒤를 밟히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루스와 더불어 삼인방이 졸졸 따라다니며 감시하고 있었을 줄은. 어쩐지 그 이후에 물고 늘어져도 모자랄 삼인방이 왜 그렇게 조용히 보내주나 했다.

미행당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루스 일행과 헤어지고 채집으로 시간을 보내다 레바니호 던전에 가기 위해 이현이 다시 베히아로 왔을 때였다. 좀 더 정확히는 시비에 걸려 탈탈 털리고 사망했을 때였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시간이 다 되어 이현은 벌벌 떨며 김성훈을 따라 베히아의 중심부에 있는 레바니호 근처로 이동했다. 가는 동안은 꽤 순조로웠다. 벌벌 떤 게 민망할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레바니호 던전 앞을 제집인 양 차지하고 있는 신성족을 마주한 뒤로는 그야말로 고난과 역경의 시작이었다.

“아, 왜 여기서 그러는데!”

“닭들이네.”

레바니호 던전 앞에는 세 명의 신성족이 수문장처럼 서 있었다. 꼬장을 부리는 전형적인 닭들의 모습이었다. 이미 한바탕 한 모양인지, 그 유저들의 주위에는 사망한 신마족이 무더기로 널려 있었다.

[신성제국/모기: 엇 탭현이네ㅋㅋㅋㅋ]

[신성제국/드랑드랑: 어디]

[신성제국/호우비: 와 진짜네ㅋㅋㅋㅋㅋ]

[신성제국/드랑드랑: 왘ㅋㅋㅋ 나 이현이 첨봄ㅋㅋㅋㅋ]

나름 숨는다고 김성훈의 캐릭 뒤로 몸을 감추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금세 들키고 말았다. 아주 귀신같은 눈썰미였다. 다행히 근처에 안전지대가 있어, 이현은 김성훈을 따라 그곳으로 냉큼 캐릭을 밀어 넣었다.

신성족 유저들이 무기를 꺼내 들고 안전지대 쪽으로 온 것도 그때였다. 무기를 들고 안전지대를 빙빙 도는 유저들의 이름 옆에는 전부 훈장이 달려 있었다. 공적이 어마어마한 순위권 유저라는 뜻이었다.

[신성제국/모기: 이현아ㅋㅋㅋ 뭐하니?]

[신성제국/호우비: 이리 나와라 좀ㅋㅋㅋㅋ]

[신성제국/드랑드랑: 컨 좀 늘었던데 좀 놀자ㅋㅋ]

[이현: 싫은데요]

이현은 김성훈의 캐릭에 바짝 붙은 채 으르렁댔다. 바로 코앞에 던전의 입구가 있는데도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신성제국/모기: 와ㅋㅋㅋ 싫단다ㅋㅋㅋ]

[신성제국/드랑드랑: 템이 나보다 좋던데 왜 쫄고 그래ㅋㅋ]

[신성제국/호우비: 템 봤냐?ㅋㅋㅋㅋ 미1쳤더랔ㅋㅋ]

[신성제국/모기: **건 루스지ㅋㅋ 그걸 해다 바치고 있엌ㅋㅋ]

[신성제국/드랑드랑: 왜ㅋㅋㅋㅋ 이현이랑 루스 세기말 사랑 중이라잖앜ㅋㅋㅋ]

“야. 던전 돌 거냐? 돌 거면 죽이고.”

“그러고는 싶은데….”

자신감 없는 투로 이현이 말끝을 흐렸다. 덤비고는 싶은데 개발릴까봐 선듯 덤빌 생각이 안 들었다. 상대는 전부 훈장을 달고 있는 유저들이었다. 적어도 이현보다는 컨이 좋을 게 틀림없었다.

[신성제국/모기: 탭현아 왜 말이 없어?ㅋㅋㅋ]

[신성제국/호우비: 쫄았네ㅋㅋ 이래서 성전 나오겠냐?ㅋㅋ]

[신성제국/드랑드랑: 엇 탭현이 성전도 나오려고?ㅋㅋㅋ 말아먹겠네]

[신성제국/호우비: ㅋㅋㅋㅋ 왴ㅋㅋ 루스가 열일한다잖아]

[신성제국/모기: 열일 갖고 되겠냐?ㅋㅋㅋㅋ *빠질거 같은디ㅋㅋㅋ]

“아니, 근데 이것들이 아까부터 왜 자꾸 루스 가지고 지랄들이야!”

루스가 나랑 세기말 사랑을 하던, 사귀던 뭔 상관인데! 이현은 혼자 씩씩거리다 독수리타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김성훈은 딱히 말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먼저 나서기까지 했다.

[확실한놈: 요즘 닭둘기들이 머리가 비었나, 할 일이 없나 보네]

[이현: 아니 루스가 나랑 세기말 사랑을 하든 말든 뭔 상관?]

[신성제국/호우비: 오골계들 종족정신 쩌넼ㅋㅋㅋㅋ지들은 뭐 닭들 아닌가ㅋㅋㅋ]

[신성제국/드랑드랑: 상관있짘ㅋㅋㅋ 발컨한테 템주고 신컨이라 자게에 뿌리고 다니는데]

[신성제국/모기: 개오지넼ㅋㅋㅋㅋ 루스 욕 하니까 열 받았쪄요?]

[이현: 그럼 개1같지, 좋겠냐?]

[신성제국/모기: 그럼 나와서 한판 뜨던가ㅋㅋㅋ 왜 거기서 그러고 있냐고]

“아, 진짜…!”

그래, 내가 너흰 꼭 죽인다! 이현은 재빨리 주문서를 도핑하고 버프를 돌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김성훈도 이를 알아채고 풀 도핑에 들어갔다. 발컨 소리야 많이 들어 해탈의 경지에 도달했는데, 루스를 걸고넘어지니 이게 또 그렇게 열불 날 수가 없었다.

“간다.”

김성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현이 무기를 꺼내 들고 신성족 유저들에게 달려들었다. 첫 공격은 광역기 스킬이었다. 상태 이상 즉딜 마법 스킬이었는데, 미리 예상이라도 했는지 상대 유저들은 회피기를 써서 이현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버렸다.

[신성제국/호우비: 이현앜ㅋㅋㅋ 보고 잘 좀 배워라]

내 스승은 오직 흑백님뿐이다! 가르치려드는 신성족에게 이현은 사정 봐주지 않고, 흑백에게 배운 스킬 배합을 총동원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스스로조차 놀랄 정도의 역량을 보이며 김성훈과 합을 맞춰 열심히 덤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딱 거기까지였다. 초반에는 그래도 고군분투하며 갖은 꼼수와 아이템 빨로 버티긴 했는데, 뒤로 갈수록 일점사 저격이 심해져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게다가 도중에 스킬 순서가 한 번 꼬여 공격기회까지 놓치는 실수를 저질렀다.

당연히 결과는 참패로 끝났다. 훈장을 괜히 단 게 아닌 듯, 세 명의 신성족은 죽어 뻗어있는 이현과 김성훈의 앞에서 승리의 모션을 취하며 득의양양해 했다. 이를 본 이현의 몸이 축 늘어졌다. 걱정했던 그대로의 결과다. 티끌만큼 있던 자신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럼 그렇지.”

아직 갈 길이 멀구나. 한숨을 폭 내쉬며 이현은 저 때문에 열세에 몰려 죽은 김성훈의 캐릭을 짠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채팅창 위로 조롱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신성제국/모기: 그 좋은 템을 차고도 죽다닠ㅋㅋㅋ]

[신성제국/드랑드랑: 어이구ㅋㅋㅋ타협도 끝났네. 분명 요번 성전에서 개발린다ㅋㅋ]

[신성제국/모기: 우리 전문 발컨유저 탭현이가 알아서 망쳐줄 거다]

[신성제국/호우비: 루스도 훅 가겠넼ㅋㅋㅋㅋ]

[신성제국/드랑드랑: 훅 갈 뿐이겠냐?ㅋㅋㅋ 그렇게 가오 잡더니ㅋㅋㅋㅋ]

[신성제국/모기: 별것도 없는 새1끼들이 템빨만 서서 오지게도 해먹었지ㅋㅋㅋ 이번에 망한다에 한표 건닼ㅋㅋㅋ]

[신성제국/호우비: 내기ㄱ?]

맥강딩에게 온갖 욕을 들었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타협 운운하며 망할 것 같다고 하는 소리에 이현은 저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다. 그간 든 것도 정이라고 타협 식구들이 저 때문에 욕을 먹으니 왠지 모를 서러움이 밀려들어 왔다. 때문에, 눈물이 아주 찔끔 새어 나왔다. 딱 벼룩의 간만큼 말이다. 근데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챈 김성훈이 혀를 차며 옆에서 타박을 해댔다.

“질질 짜지, 채이현.”

“안 울거든!”

이현은 팔로 눈가를 쓱 훑어 닦고 코를 훌쩍이며 신성족 유저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전투적인 모습으로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내가 너희 때문이라도 성전은 꼭 참가한다. 기대해라, 반드시 이겨줄 테니까. 이현은 혼자만의 다짐을 가슴에 새겨 넣었다.

[이현: 입구 막고 꼬장질이나 하는 니들같은 개돼지들보다 타협이 백배는 낫거든. 새대가리들이 어디서 열폭질이야]

[신성제국/드랑드랑: ㅋㅋㅋㅋ혼자 푸드득 거리고 지1랄ㅋㅋㅋ]

[신성제국/모기: 와낰ㅋㅋ 백배란닼ㅋㅋㅋㅋ]

[신성제국/드랑드랑: 루스가 시키디?ㅋㅋㅋ]

이현의 말에 신성족 유저들이 바닥을 구르며 웃기 시작했다. 이현의 말은 되레 조롱이 되어 돌아왔다. 비웃는 것도 모자라 그들은 더 해보라고 부채질을 하며 부추기기까지 했다. 그쯤 되자 이현은 키보드에서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보아하니 그들은 도발이 목적인 듯 했다.

실실 웃으며 타협 좀 불러오라고 비꼬듯 말하는 것으로 보나, 템과 컨을 들먹이며 조롱하는 것으로 보나, 이현이 쌈닭처럼 다시 달려들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아주 알량한 수법이 따로 없었다. 여기서 걸려들어 살아나면, 그 다음엔 호구 등신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그래. 짖어라, 짖어.”

내가 다 캡쳐해서 신고해주마. 제법 전투적인 눈빛으로 화면을 보며 이현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현이 막 욕이 뜬 글을 캡쳐 했을 때였다. 눈을 한 번 깜빡거렸을 뿐인데, 그 사이 눈앞에 있던 세 명의 유저들이 이상한 동물로 변이되어 있었다. 놀란 이현이 흠칫하자, 화면 안으로 난입한 네 명의 유저들이 변이된 신성족을 무참히 도륙하기 시작했다.

[마초: 우리 병아리가 그런 거면 그런 거다, 이 썅넘들아!!]

[꼬마천재: 니들은 ㅅㅂ 세기말 사랑할 상대는 있냐?]

[베리베리: 뭐 이런 새ㄲ1들이 훈장을 다 달고 있냐ㅋㅋㅋㅋ 개어이ㅋㅋ]

[꼬마천재: 요즘 훈장 달기 드럽게 쉽네 ㅅ발]

[마초: 아, 새1끼들ㅋㅋㅋ 성전 갈 필요도 없다ㅅㅂ 캐삭이나 해라]

[베리베리: 신성족도 끝났네ㅋㅋㅋ 성전은 이번에도 우리가 잘 먹어주마]

[꼬마천재: 왜이리 훅가냐? 정도가 있지 텝빨좀 세우고 와라. 븅1신들아]

[베리베리: 와ㅋㅋㅋ 이것도 템이라고 차고 다니는 거?ㅋㅋㅋㅋ 아주 녹는다 녹아]

[마초: 템빨 세울 돈도 없으면 걍 접어라, 새1끼들아ㅋㅋㅋㅋ어디서 지금 천억들인 우리 병아리 앞에서 부심을 부리고 있어ㅋㅋㅋㅋ 템도 실력인 거 모르냐?]

어째서인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니, 분명 겪어본 적 있는 상황이었다. 이현의 눈앞에서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 이들은 개개신에 빙의된 삼인방이었다. 아니, 그 외 한명이 더 있었다. 그는, 살벌한 조롱과 함께 베고 찌르고 쏘는 삼인방 사이에서 묵묵히 상대를 도륙하고 있는 루스였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삼인방, 아니. 사인방의 분노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이미 눈물은 쏙 들어간 지 오래였다. 이 와중에 왜 이렇게 ‘천억’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신나게 패고 지지는지, 얼마 안 가 신성족 유저들이 죽어 바닥에 드러눕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신성족 유저들은 입에 풀칠이라도 했는지 아주 조용했다. 그렇게 세 명의 신성족이 손을 잡고 나란히 죽자, 눈을 붉게 물들이고 있던 루스가 이현에게 다가와 부활석을 사용해 부활을 해주었다. 제일 먼저 물어온 건, 안부였다.

[루스: 이현씨 괜찮습니까?]

나? 나 괜찮은데. 이현의 눈이 껌뻑거렸다. 혹여 오해라도 할까 이현은 냉큼 타자를 쳤다.

[이현: 네]

[확실한놈: 괜찮긴요. 얘, 방금 엄청 울었습니다. 아주 엉엉 우는데 못 봐주겠더라고요]

“야, 내가 언제 그랬어!”

“한강되겠더만.”

버럭 소리치는 이현을 향해 김성훈이 놀리듯이 말했다. 이현은 김성훈을 죽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그 사이 채팅창은 발광하는 삼인방의 말로 가득 채워졌다. 화면을 힐끗 보자 아니나 다를까, 미쳐버린 삼인방이 진짜냐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발광하는 모습이 모두 김성훈의 말을 철썩 같이 믿는 눈치였다.

“그러게 왜 질질 짜고 그러냐.”

“이게 지금 어디서 개뻥을 치고 앉았어!”

이현은 눈을 홱 찢고 김성훈을 향해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독수리 발처럼 세운 손이 김성훈의 멱살을 막 잡아챘을 때였다. 김성훈이 화면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잡으러 온다는데, 어쩌냐.”

김성훈이 가리키는 화면 위에는 루스의 말이 떠올라 있었다. 간결하다면 간결한 말이었다.

[루스: 데리러 갈 테니까 20분 뒤에 나와요.]

대답조차 듣지 않고 루스는 그대로 로그아웃을 해버렸다. 남아있는 건, 씩씩거리며 뛰어다니고 있는 삼인방들뿐이었다. 이현의 시선이 다시 김성훈에게 옮겨졌다. 할 말 많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현에게 김성훈은 돌 굴러가는 소리를 지껄였다.

“위로해준다는 사람도 다 있고 채이현 사람 다 됐네.”

“위로 같은 소리 하네.”

그리고 언제는 사람 아니었냐? 매일 여우새끼, 여우새끼 하더니 이 새끼는 내가 진짜 여우새끼인 줄 아나. 이현은 김성훈의 멱살을 짤짤 흔들며 어떡할 거냐고 윽박질렀다. 김성훈도 지지 않고 이현의 뺨을 꼬집어 늘렸다.

“느어 이어 안 놔아?!”

“너부터 놔라.”

이현은 결국 제가 먼저 지쳐 김성훈의 멱살을 놔야 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붙잡고 울상인 이현에게 김성훈은 혼내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달래는 것도 아닌 듯한 말투로 툭 말했다. 얼핏 들으면 참 가볍게 들릴 만한 내용이었다.

“야, 야. 그만 질질 짜라. 굳이 오겠다는데 그냥 보면 되지.”

“안 운다고.”

대체 뭘 보고 운다는 건지, 김성훈의 생각을 도통 따라갈 수가 없었다. 혹여 제가 진짜 울고 있나 싶어서, 이현은 손등으로 제 눈가를 쓱 닦았다. 묻어나는 눈물이 쥐똥만큼도 없었다. 그래도 온다니까 이현은 오랜만이기도 해서 일단 보기로 했다. 위로해주러 온다는데 응석이라도 부려야 하나…?

응석, 응석하며 중얼거리던 이현의 시야에 저들끼리 아웅다웅하고 있는 삼인방의 대화가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베리베리: 바람길 타고 오는 게 아니었어. 개늦었잖아. 하... 아직도 개빡치네]

[꼬마천재: 내가 걍 던전 앞에서 대기타고 있자고 했잖아 ㅂ신들아]

[마초: 숨어서 가자고 지1랄한거 누구냐ㅋㅋㅋ]

[꼬마천재: 하, 말해 뭐하냐]

[베리베리: 하, 누구냐?]

[꼬마천재: 너다 이 새1끼야]

[마초: 상판 두꺼운 거 봐라]

[베리베리: 죽여야겠네]

[꼬마천재: 너라고 이 **야!]

“그러니까…. 이거 지금 나 미행했다는 거지?”

얘들은 왜 없어 보이게 미행을 하고 자빠졌냐. 이현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아웅다웅 싸우는 삼인방을 바라보았다. 저가 무슨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닌다고 미행까지 다 하는지 모르겠다. 삼인방은 그렇다 쳐도 설마 루스까지 미행에 동참할 줄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길 한참, 이현의 생각이 슬금슬금 다른 쪽으로 미치기 시작했다. 그간 겪었던 시열의 언행을 떠올려 보면, 퍽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내가 그렇게 좋나…?”

안 되겠네. 조금만 하려고 했는데, 오늘 응석 한 번 제대로 부려줘야겠어. 이현은 헤실헤실 웃으며 얼른 20분이 지나길 기다렸다. 생각보다 20분은 참 긴 시간이었다.

***

“이현씨, 오늘 좀 다른 거 같은데… 제 착각입니까?”

이현은 쿠키를 먹다 들려온 소리에 테이블 너머에 있는 시열을 바라보았다. 제 딴에는 볼 때마다 웃어주며 엄청난 응석을 부린 건데, 시열에게는 그다지 대단한 응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제야 알아챈 걸 보면 말이다. 이현은 오독거리며 먹던 쿠키를 재빨리 먹기 시작했다. 빨리 먹고 대답하려고 한 건데, 그런 이현을 보고 시열이 앞에서 작게 혀를 찼다.

“천천히 먹어요. 체합니다.”

“천천히 안 먹지, 채이현.”

그 말에 이현은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불과 삼십 분 전, 시열에게서 나오라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이현은 계산을 끝내고 부리나케 피시방을 나갔다. 그리고 차를 앞에 대고 나와 있는 시열에게 헤실헤실 웃으며 달려갔다.

시열이 이현을 보자마자 한 말은 ‘눈가가 빨가네.’라는 말이었다. 그야 팔로 열심히 문질렀으니 빨간 게 당연했지만, 시열은 그게 이현이 많이 울어 그런 것으로 짐작한 듯했다. 그리고 그 말은 뒤따라 나온 김성훈이 한 말로 인해 확신으로 굳어졌다.

“한강이 되도록 울었으니, 뭐 안 그렇겠어요?”

이쯤 되자, 이현은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김성훈이 저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거니와, 이제 와 정정해도 시열이 믿어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시열은 이현에게 커피 한잔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지금, 김성훈까지 껴서 셋은 넓은 카페 안에 들어와 커피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현의 앞에는 카페에서 파는 종류별 쿠키가 가득 놓여 있었다.

“저 오늘 다른 거 맞아요.”

겨우 손에 든 쿠키를 다 먹은 이현이 서둘러 시열을 보며 말했다. 시열은 별말이 없었다. 무언가 더 덧붙일까 하다가 이현은 생각에 잠긴 시열을 보고 조용히 다시 쿠키로 손을 뻗었다. 카페의 잔잔한 배경음악 사이로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 것도 그때였다.

“…잠시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벨소리의 주인은 시열이었다. 양해를 구하며 일어나는 시열을 힐끗 본 이현은 쿠키를 아작 씹으며 제 응석의 기준을 골똘히 생각했다. 사실, 응석이 아닌 민폐라거나.

“…그런가?”

민폐인가? 이현은 먹던 쿠키를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김성훈을 바라보았다. 객관적으로 물어보기 위해서 바라본 건데, 바라본 순간 도리어 깜짝 놀라고 말았다. 김성훈이 어딘지 심각한 표정으로 이현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현이 시선을 슬쩍 피하며 침을 꿀꺽 삼키자, 가만히 팔짱 낀 채 바라보고 있던 김성훈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일단 많이 생각하고 고민한 후에 말하는 거니까, 진지하게 들어줘.”

간혹 김성훈은 이현이 잘못된 선택이나 행동을 취했을 때, 이런 식으로 조언을 해주고는 했다. 물론 김성훈을 알고 지낸 날이 그리 많은 건 아니었다. 중학교 동창이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동창이었을 뿐, 당시에는 오고가며 봐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던 사이였다.

그러나 그래서인지 김성훈의 조언은 누구보다 더 뼈가 아팠다. 매번 놀리기는 했지만, 김성훈보다 더 객관적으로 이현을 판단하고 쓴소리를 해주는 이는 없었다.

“딱 몇 마디만 할게.”

“그, 그래.”

“저 사람한테 어설픈 마음으로 기대는 거면 그만해.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빨리 떨쳐내는 게 좋을 거다. 이 시간 이후로 나는 저 사람에 대해선 일절 신경 안 쓸 거고, 네가 어떤 행동을 해도 묵인하고 못 본 척할 거야. 그러니까 지금만이라도 생각하고 고민해.”

마음을 간파당한 기분이었다. 이도 저도 아닌 마음으로 지내는 이현에게, 김성훈의 말은 쓴 약이 되어 돌아왔다.

“어떤 선택이 옳은 거라는 말은 못 해주겠다. 근데 편견을 떠나 상대가 누구든 난, 지금처럼 어설픈 태도로 대하는 거 아니라고 봐.”

이현의 시선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안 그래도 요새 시열에 대한 생각으로 고민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긴 했다. 한데 그걸 콕 집어 얘기하니, 모르긴 몰라도 참 어중간해 보이긴 했나 보다.

“주제넘다고 생각할 수 있어. 나도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고. 분명 둘이 알아서 할 문제고, 너 스스로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몫인데 나서서 뭐라 하는 거, 엄청 꼴불견이겠지. 근데 난 네가 그 어떤 이유에서든 힘들어 하는 건 싫다. 어설프게 있다가 후회하는 거 보는 것도 싫고, 어쩌지 못해서 끌려다니는 것도 싫어.”

“…….”

“그러니까, 저 사람과의 관계… 진지하게 생각해봐. 피하지 말고.”

김성훈이 하는 말에는 신기하게도 힘이 있었다. 다그치는 거 같은데도, 그 안에는 배려와 격려가 있었다. 그 말을 곱씹으며 이현은 생각했다. 다그침의 마지막은 주눅 든 마음을 쓰다듬는 한 마디였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해도 존중해 줄 테니까.”

“…….”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목 안을 타고 올라온 감정이 마음을 뜨겁게 했다. 이현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시선으로 김성훈을 바라보았다. 김성훈은 성가시다는 표정 그대로 관자놀이를 짚은 채 이현을 바라보았다.

“어쩌겠냐, 이것도 친구라는데.”

그래, 우리 친구였지. 아니, 친구지. 이현은 감동에 젖어 벌떡 일어나 김성훈에게 냅다 달려들었다. 식겁한 김성훈이 재빨리 팔을 들어 막았지만, 테이블을 밀치고 다가오는 이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감동의 포옹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밀쳐진 테이블 위에 있던 커피가 넘어져 김성훈의 옷 위로 쏟아진 것이다.

“아오! 이 여우새끼를 진짜 죽여, 살려!”

양이 얼마 없어 바닥까지 쏟아지진 않았지만, 정통으로 커피를 맞은 김성훈의 셔츠는 갈색으로 물이 들어 버렸다. 감동은 짧았다. 얼룩덜룩 물이 든 옷을 보자마자 김성훈은 벌떡 일어나 주춤 물러서는 이현의 양 볼을 잡고 옆으로 쭉 늘렸다. 분노의 양볼 꼬집기였다.

“치, 친그라며서…!”

“하, 친구? 조용히 안 하지, 채이현.”

이현의 시선이 김성훈의 옷으로 향했다. 저가 봐도 저건 도저히 용서 못 할 범위였다. 이현은 결국 조용히 분노의 꼬집기를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꼬집기 공격이 멈춘 건, 통화를 끝내고 온 시열이 살벌하게 웃으며 김성훈을 제지했을 때였다.

“이현씨 아파 보이는데 그만하죠.”

눈빛부터 달라진 시열이 웃으며 말했다. 김성훈은 의외로 별말 없이 이현을 놓아주고 뒤로 물러났다. 물론 한숨까진 막을 길이 없었지만.

“하아,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저 녀석 좀 잘 부탁드려요.”

쟤 저러고 어떻게 가지? 이현은 양 볼을 감싼 채 죄책감과 미안함이 섞인 시선으로 김성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는데, 아깐 죽일 것 같더니 그래도 복수 한 번 했다고 가라앉았는지, 눈동자가 평온해져 있었다.

“옷 내가 빨아다줄까?”

“그래놓고 저번처럼 걸레짝 만들지. 됐다, 놀다 잘 가기나 해.”

김성훈은 이현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곤 나중에 보자는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다. 김성훈 대신 이현의 앞으로 시열이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뻗어진 손이 이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도 나갈까요?”

이현은 재빨리 남은 쿠키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커피를 원샷하고 나서야 자리정리를 끝낸 시열의 뒤를 쫓아갔다. 새벽 1시 반. 길거리가 조용하고, 공기가 맑은 시간이었다. 시열의 뒤를 졸졸 쫓아 그가 열어주는 차를 타자, 운전석에 탄 시열이 손을 뻗어왔다. 마치 이제까지 겨우 참고 있었다는 듯이.

“뺨은 안 아픕니까?”

아직도 빨간가? 이현은 뺨을 쓰다듬는 시열의 손을 힐끗 보다 질문을 상기하곤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안 아파요.”

“다행이네.”

얼굴이 너무 하얄 때, 김성훈은 혈색이 돌아야 한다며 자주 뺨을 꼬집었었다. 그게 면역이 된 건지, 웬만한 힘이 아니고서야 이제는 꼬집혀도 별로 아프지 않았다. 물론 아깐 좀 아팠지만.

“이현씨.”

조용한 차 안에 시열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몸과 마음을 녹진하게 하는, 잔잔한 목소리였다. 뺨을 쓰다듬던 손이 귓가를 스쳐 목덜미로 미끄러졌다. 홧홧한 감각이 솟았다. 저도 모르게 이현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오늘, 왜 그런 겁니까?”

“…….”

이현은 어딘지 민망함이 들어 시열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응석을 부린다고 부렸는데, 상대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응석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진 것이다.

“말하기 싫습니까?”

목덜미를 간질거리던 손에 힘이 실리고, 이현의 몸이 기울어졌다. 코앞으로 시열의 얼굴이 다가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말하라고 어르고 있었다. 이현은 결국 입을 열었다.

“…응석 부리는 중이었는데….”

“응석이라…. 내가 생각하는 그 응석이 맞나 모르겠네.”

“맞을걸요….”

귓가에 픽,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덜미를 누르고 있던 손이 느슨해지고, 시열의 얼굴이 멀어졌다. 살았다, 하는 심정으로 이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열은 그때까지도 계속 웃고 있었다.

“이현씨, 응석 부리고 싶어요?”

알려줄게요, 하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러면서 시열은 팔을 슬쩍 벌리고 제 품을 툭툭 두드렸다. 어쩐지 하는 폼이 마치 동물에게 오라는 듯한 몸짓이었다.

“내, 내가 고양이인가….”

투덜거리면서도 이현은 시열이 두드리고 있는 품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뺨을 비볐다. 시열의 팔이 이현의 등을 가득 감쌌다.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 꼭 위로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생각은 좀 해봤습니까?”

귓가에 나른한 목소리가 닿았다. 이현은 고개를 슬쩍 들고 시열을 올려다보았다.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차갑거나 쌀쌀맞기보다, 진지하게 느껴졌다.

“생각해 봤는데요.”

“네.”

보고 싶다고 올 때마다 마주했던 시열을 볼 때마다 큰 변화가 있던 건 아니었다. 작은 변화들이었다. 오히려 너무 작아 느껴지지도 않았다. 지금에서야 고작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시열을 더 의식하게 만들었다.

시열을 만날 때마다 느꼈던 진중함, 가볍지 않게 느껴졌던 어떤 각오, 배려하며 다가오던 마음. 그게 조금씩 스며들었다. 단지 그것뿐인데, 돌이켜보니 자꾸 생각하고 있었다. 서시열이란 사람을.

“…만나볼게요.”

시열만큼 대단한 감정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커져가는 불씨를 느꼈다. 이것만으로도 이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은 만나보고 생각하기로 했다.

싫지 않은 느낌. 그건 어느새 설렘으로 변해 있었다.

“만나볼게요.”

“이현씨.”

시열의 손이 뜨겁게 느껴졌다. 턱을 받쳐 드는 손길이 낯선 반면, 몹시도 간지럽게 살갗을 훑었다. 시선이 떠오르고 이현의 시야에 미소를 띠고 있는 시열의 얼굴이 드러났다.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며, 시열이 겨우 들릴 듯이 속삭였다.

“키스해도 됩니까.”

나, 나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됐는데. 이현은 곧 안절부절못한 채 시선을 굴리기 시작했다.

“싫을까 봐. 나 한번 하면 꽤 집요해서요.”

“시, 싫지는 않은데….”

“좋지도 않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야… 해봐야 알지 않을까요…?”

이현은 침을 꼴깍 삼켰다. 입술에 닿은 손끝이 유독 생생히 느껴졌다. 그렇다고 또 싫은 건 아니라서, 이현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뜨거운 숨이 느껴진 건 그 직후였다. 간지러운 숨이었다. 그리고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가볍게 맞닿았던 입술은 금방 떨어졌다.

“많이 좋아합니다.”

가슴이 뛰었다. 시열에게 처음으로 듣는 고백이었다. 그게 어째서인지 조금은 천천히, 그리고 느긋이 가자고 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귓가에 열이 몰렸다. 이현은 시열의 품에 다시 파고들어 고양이처럼 머리를 부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현이 곤한 잠에서 깨어난 건, 옆자리의 써늘한 기운을 느꼈을 때였다. 비몽사몽 하며 옆자리를 더듬던 이현은 시열의 부재를 깨닫고,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들고 시열을 찾기 시작했다. 자기 전에 분명 시열의 품에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넓은 침대를 혼자 차지하고 있었다.

잘 떠지지 않는 뻑뻑한 눈을 깜빡이다, 이현은 문 옆에 희미한 빛을 띠고 있는 전자시계를 발견했다. 4시 20분. 아직 한밤중이었다. 이현이 시열의 집에 와서 씻고 누웠을 때가 2시 30분이었으니, 그로부터 약 2시간이 흐른 셈이었다.

화장실 갔나? 멍한 정신으로 꾸벅꾸벅 졸며 기다렸지만,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시열은 나타나지 않았다. 잠결에 기다리는 것도 잠시, 이현은 귀찮음을 무릅쓰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틀비틀 시열을 찾아 나섰다.

비척거리며 겨우 방문 앞까지 도달했을 때에야, 이현은 어렴풋한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문고리를 잡아 열자, 소리는 조금 더 커졌다.

이현은 잠시 고민하다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의 근원지는 불이 켜진 거실이었다.

“서시열, 이거 안 되겠네. 저번 현모도 안 부르더니만 이젠 아예 지들끼리만 놀지?”

“조용히 해. 이현씨 깨기 전에.”

“깨라고 그러는 거다. 너 보러 온 줄 아냐? 허… 눈빛 봐라, 아주 죽이겠네.”

거실로 가까워질수록 대화소리는 또렷해졌다. 두 사람의 목소리였다. 한 명은 시열이었고 다른 한 명은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이현은 벽에 딱 붙어 모퉁이 끝으로 소리 없이 이동했다. 그리고는 결전을 앞둔 사람처럼 비장하게 심호흡을 했다.

딱 1초만 보는 거야. 얼굴만 슬쩍 내밀고 재빨리 돌아오자. 이현은 심호흡을 끝내고 모퉁이 너머를 슬쩍 내다보았다. 밝은 거실 한가운데에 두 사내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시열과 누군지 모를 낯선 사람이었다.

이현은 재빨리 다시 모퉁이 뒤로 숨었다. 낯선 이는, 야밤에 찾아온 사람 치고 제집처럼 눌러 앉아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술을 마신 지 꽤 됐는지, 테이블 아래에 빈 술병이 몇 개 늘어져 있었다. 슬쩍 보니 맥주부터 시작해 소주, 그리고 양주도 있었다.

‘미, 미친 거지?’

여기서 걸리면 분명 같이 마시자고 할 게 뻔했다. 맛있어 보이는 안줏거리가 탐이 났지만, 이현은 이번만큼은 모른 척 지나가기로 했다. 본능이 지금은 곱게 들어가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방으로 가기 위해 살금살금 뒤꿈치를 들고 몸을 돌렸는데, 발밑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와 동시에 능청스럽고 능글맞은 목소리가 이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어딜 그렇게 살금살금 가요, 응?”

등 뒤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기 시작했다. 침을 꼴깍 삼킨 이현은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능글능글 웃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오한이 느껴지는 그런 미소였다.

이현의 피부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어쩐지 한창 들려오는 대화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했다.

“설마 스승 얼굴도 못 알아볼 리가. 그렇죠, 이현씨?”

능청스러운 태도로 사내가 눈매를 접고 말했다. 능구렁이 같은 눈매와 날렵한 얼굴선 때문인지, 웃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싸늘하게 느껴졌다. 시열과는 또 다른 느낌의 차가운 분위기였다. 시열이 차분한 느낌이라면, 이 사내는 잘 벼려진 뾰족한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이현은 그 순간 덫에 걸린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현씨.”

이현이 움직인 건, 능글맞게 웃고 있는 사내 옆으로 시열이 다가왔을 때였다. 저를 부르는 시열을 보자마자 이현은 슬금슬금 움직여 시열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가시를 세웠다.

“숨는 거 봐라.”

저거 봐. 표정부터 싹 바뀌잖아. 이현은 차갑게 굳어진 사내의 표정을 보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현의 날 선 시선은 술상이 놓인 자리에 앉기까지 계속되었다.

“이현씨 주려고 맛있는 것도 사 왔는데, 섭섭하네.”

이현의 시선이 아주 잠깐 상 위에 차려진 음식으로 향했다. 거짓말은 아닌 듯, 먹음직스러운 야식이 잔뜩 놓여 있었다.

“더 자고 있지 그랬어요.”

음식과 낯선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던 이현의 뺨 위로 시열의 손이 닿았다. 미열이라고 할까, 따뜻한 손이었다. 이현은 냉큼 대답했다.

“시열씨가 없어서요.”

“그랬어요?”

“네…. 그래서 그런데, 저 다시 자러 가면 안 돼요?”

“안 돼요.”

대답은 낯선 사내에게서 들려왔다. 재밌는 걸 본다는 듯 흥미가 담긴 시선이 이현과 시열을 위아래로 훑고 지나갔다. 이현의 눈매가 다시 뾰족해졌다.

“어허, 스승한테 그러면 못 써요.”

“스승 같은 소….”

스승? 스승이라고? 내 스승은 흑백님밖에 없는데. 이현은 말을 내뱉다 말고, 입을 다문 채 능글맞은 사내를 열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시열도 제법 잘 웃는 편이었지만, 저 사내는 능글맞은 정도가 아예 달랐다.

“…흑백님이세요?”

“이제야 알아보네.”

“진짜요?”

이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경계심을 없애고 이현이 시열의 뒤에서 슬쩍 나왔다. 말은 안 해도 퍽 믿는 눈치였다.

“전뇌의 일격.”

“25미터!”

“주박.”

“15미터!”

이현은 거의 본능적으로 흑백의 말에 대답했다. 그건, 에르덴에서 핍박을 받으며 외웠던 스킬 제한거리였다.

“이현씨, 똑똑하네.”

흑백이 자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쯤 되자, 이현은 그가 흑백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안 믿는다고 하면 왠지 웃는 낯으로 흑백이 핍박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자러 간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현은 그 후 그대로 붙잡혀 흑백이 사온 야식을 먹어야 했다. 흑백이 특별히 사 왔다며 권했기 때문이었다. 이현은 거절의 말 한마디 없이 야식을 먹어치웠다.

“와…. 아직 어려서 그런가? 그냥 다 들어가네.”

“저 안 어려요.”

“솔직히 말해 봐요, 이현씨. 누가 뭐 준다고 하면 그냥 따라가죠?”

“안 따라가는데요.”

“아닌 것 같은데.”

말해 뭐하나, 어차피 안 믿을 거. 이현은 흑백의 시선을 외면한 채 다시 야식을 먹기 시작했다. 해탈의 경지에 들어선 이현의 모습을 보니, 이런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아본 듯했다.

“뭐… 이제 베히아 쓸고 다녀야 할 텐데, 아무렴 잘 먹어야지.”

흑백은 야식에 더해 쿠키까지 해치우고 있는 이현의 면상에 대고 웃으며 말했다. 이현이 어깨를 흠칫하자, 시열의 무서운 시선이 흑백에게 즉시 날아들었다.

“적당히 해.”

“왜. 열심히 배웠는데, 이제 열심히 써먹어야지. 안 그래요, 이현씨? 오늘도 엄청 썰리고 그렇게 펑펑 울었다면서.”

누구야. 아니, 그걸 왜 사방팔방 떠들고 다니는데. 이현은 속으로 씩씩거리며 소문의 출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삼인방밖에 없었다.

“저 펑펑 안 울었어요.”

“썰린 건 맞네. 그대로 발렸댔나?”

그렇게 막 발린 건 아닌데…. 이현은 흑백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오물거렸다. 뭐라고 할까 무서워, 시열의 옆으로 슬금슬금 붙기까지 했다. 어지간히도 몸을 사리고 있었다. 흑백이 도중 픽 웃을 정도로 말이다.

“이현씨, 내가 뭐 잡아먹어요? 왜 이리 겁을 먹어.”

“…제가요, 진짜 열심히 했는데요. 한꺼번에 덤비니까 스킬 순서도 꼬이고, 힐하면서 딜하는 게 배운 것보다 더 어려워서요…. 근데, 정말 도중까지는 잘 했어요. 피도 반피나 깎고 그랬는데, 김성훈 힐주다 다굴맞는 바람에….”

“그래서요?”

“…그… 다음부턴 잘할게요.”

이현은 마지막으로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호통이 날아들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새 무릎까지 꿇고 앉아 있었다. 그 기대에 부응이라도 해줄까, 고민하던 흑백은 저를 힐끔거리는 눈동자가 가엾어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화제를 바꿔 분위기를 가볍게 이끌었다.

“이현씨, 우리 구면인 거 알아요?”

“사람 잘못 본 거 같은데요…?”

“안 믿네. 이현씨 술에 잔뜩 취해가지고 에르덴 하자면서 외쳤었는데.”

이현의 몸이 멈칫했다.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얘기가 흑백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 그것도 모르나? 이현씨 첫 만남이, 술 취해서 우리 룸 들어온 건데.”

생글생글 웃는 흑백의 모습이 그가 하는 말에 대한 신빙성을 의심케 했다. 진심인지, 거짓인지 도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서시열하고 선술집에서 본 건데, 그때 이현씨가 우리 룸에 들어와서 에르덴 외치더니 서시열 다리 베고 그대로 까무룩 잤는데. 도중에 이현씨 친구가 찾으러 와서 데려가긴 했는데, 삼십 분 뒤엔가 다시 와서 에르덴 외치더니 다시 저놈 다리 베고 자고.”

거, 거짓말 같은데. 이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움츠렸다.

“거짓말 같죠? 사실인데 어쩌나. 어찌나 해맑게 에르덴을 하자며 꾀던지, 누가 보면 홍보대산 줄 알겠더라고.”

홍보대사라면 억울하지도 않지. 진짜냐는 듯 이현이 시열을 올려다보았다. 곤란한 듯 웃고 있는 시열의 얼굴을 보니, 진짜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내일부터 나한테 또 열심히 배워요, 응? 다시 제대로, 확실히, 잘 알려줄 테니까.”

이현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간의 지옥 같은 훈련이 머릿속을 배회했다. 그걸 또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오한이 들었다.

“복수는 해야지. 안 그래요?”

턱을 괴며 흑백이 눈꼬리를 접고 웃었다. 능글능글 웃는 모습이 거절의 대답은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이현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복수합시다. 도와줄 테니까.”

“하하…. 네. 복수… 복수 꼭 해야죠, 네.”

그냥 얌전히 집으로 들어갈 걸, 괜히 시열을 따라왔다 봉변만 당했다. 말 그대로 봉변이 따로 없었다. 이현은 그의 뒤를 졸졸 따라 들어왔던 몇 시간 전의 자신을 저주하며 다시 쿠키를 오도독 씹어 먹기 시작했다.

‘안 되겠네.’

이현은 위로해준답시고 제 등을 도닥이는 시열의 옆구리에 무의식적으로 파고들며 이글이글 눈을 빛냈다. 복수고 뭐고, 편한 삶을 약속받기 위해선 신컨의 길밖에 답이 없었다. 그래, 정말 이 방법밖에 없었다. 저 앞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사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신컨은 꼭 되어야 했다.

다른 의미로 투혼이 이는 날이었다. 그날, 다시 잠들기까지 이현의 집념 어린 눈빛은 흐려지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참 파란만장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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