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9)

게시글: 이현이 요새 왜 이러냐, 진짜;;

작성자: 짜증열매

서버: 라히브라 / 신성제국

내용: 아니, 나만 발림? 아 요새 미치겠네ㅋㅋㅋㅋㅋ 베히아 퀘 좀 할라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공적을 탈취하냐ㅋㅋㅋㅋ

아니, 진짜 나만 마주치는 거?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포스 좀 짜서 이현이 좀 잡읍시다, 우리ㅋㅋㅋ 이현이 때문에 베히아를 못 간다는 게 말이나 됨?ㅋㅋㅋㅋㅋㅋ

아니, 이현아... 나 퀘 해야 한다고.... 진짜 왜 그러냐? 내가 뭐 원한 샀냐?ㅋㅋㅋㅋㅋㅋ 담에 나 좀 보면 그냥 지나쳐줘라. 형이 나중에 신컨되면 너 못 본 척해줄 테니까. 알겠냐? 아니, 알겠지...?

다 같이 우리 공생하면서 좀 살자... 너 발컨적 생각 좀 해라....

댓글수[1309]

베스트 댓글

-도륵도/신성제국: 이젠 하다하다 이현이가 무섭냐?ㅋㅋㅋㅋㅋㅋ

-뱀치기/신성제국: ㅉㅉ 이현이 위치 좀 불러봐라, 내가 대신 가서 빌어줄 테니까...

일반댓글

-화비강림/신성제국: 어제보니까 탭현이 자기 통수친 넘들 겁나 쫓고 있더라...

└ 얼마나 억울했으면 베히아를 제집처럼 쑤시고 다니겠냐;

└ 아씤ㅋㅋㅋ 탭현이좀 진짜 어떻게 해봐라ㅋㅋㅋㅋ 미치겠넼ㅋㅋ

└ 난 ㅅㅂ 지금도 퀘를 못하고 있다

└ 팟좀 짜봐랔ㅋㅋㅋ 진짜 이현이좀 잡자...

└ 타협넘들한테 개발리고 싶냐?

-비기칼/신성제국: 아오, 이현이좀 누가 잡아가라 제발

└ 너도 썰렸냐?

└ 뭐라하지 마라. 이현이 신마족이다.

└ 이현이 훈장 달았더라...

└ ㅅㅂ 내가 아는 그 훈장 맞냐? 레알?

-랜덤/신성제국: 몇 번 발렸냐? ㅅㅂ 난 한 자리에서 3번 발렸다ㅡㅡ

└ 3번?ㅋㅋㅋㅋㅋ 븅1신들이네ㅋㅋㅋㅋㅋ 그래도 난 5번이다...

└ 한쿨에 디져본 새1끼들 아니면 다 아닥해라.

└ 난 왜 이현이한테 죽는 게 이렇게 뿌듯하냐...

└ 와낰ㅋㅋㅋㅋ 디지고 싶냐?ㅋㅋㅋㅋ

└ 너 어디냐? 본캐로 와서 씨부렁거려라, 새1꺄

-로디오디/신마제국: ㅋㅋㅋㅋㅋㅋ 있을 때 잘하지 그랬냐, 닭대갈들아

└ 니가 키웠냐? 지가 키운 것처럼 얘기하고 자빠졌냐

└ 타협이 들으면 아주 거품 물겠네ㅋㅋㅋㅋ

└ 오골계들 이현이부심 쩌네ㅋㅋㅋㅋㅋ 다들 지들이 얼싸안고 키운 것처럼 ㅈㄹ이냐

└ 이현이 템은 보고 와서 지껄이는 거냐?ㅋㅋㅋ 니 템보다 좋다, 새1끼야

└ 요즘 이현이 억현이라는 소문 돌더라...

-러브밍/신마제국: 억현? 지1랄들 마라ㅋㅋㅋㅋㅋ 천억이란닼ㅋㅋㅋ

└ 뭔솔? 누가 설명 좀 해봐라

└ 루스가 해준 탭현이 템이 총 천억골드 들었답디다...

└ 천억이 에르덴에서 통용할 수 있는 금액이라고?

└ ㅁㅊ... 이현이 실제로 본 넘들 있냐? 대체 얼마나 예쁜거야;;

└ 예쁘겠지... 그러니 타협넘들 싸그리 미쳐 날뛰는거 아니겠냐고...

-라이트/신성제국: 포스는 진작 짜서 가봤다... 탭현이 한 대 때리자마자 여기저기서 타협넘들 튀어나오더라... 하, 그냥 개발렸다.

└ 친위대냐ㅋㅋㅋㅋㅋ

└ 타협넘들 아주 베히아에 기지 하나 세울 기세네;

└ 세울 뿐이겠냐? ㅅㅂ 요즘 탭현이 베히아 떠돈다고 요새전에서 요새란 요새는 다 처1먹고 계신다

└ 와낰ㅋㅋㅋㅋ 그래서 신마족 점령요새가 많았던 거고만

└ 얘네 뭐냐;; 이러다 오골계 우세섭 되는 거 아냐?

└ 하... 이미 우세섭이다...

-녹차쿠쿠/신성제국: 걱정마라. 이번 성전 여명길드 나온다는 소문 돌더라

└ 여명이 나온다고?ㅋㅋㅋㅋㅋ

└ 여명 이제껏 성전 안 나온 거 모르냐?

└ 여명은 대체 왜 안 나오는 거냐?

└ 힐러들은 성전에서 이득이 크게 없음. 팟해도 힐하면서 딜하는 갭이 커서 먹는 공적치도 없고, 성전에서는 딜이 우선적이라 딜 안되는 힐러들은 1순위로 순삭되니까.

└ 힐러도 딜 된다, 새1끼야ㅡㅡ

└ 성전 참여 안하고도 길드 순위가 섭길드 3위인 거 보면 모르겠냐 ㅅㅂ

└ 2위 아님? 악신 길드 요새 분열나서 2위 여명이라던데

└ 아니, 그럼 대체 왜 참여를 안 하는건데;;

└ 니가 흑백한데 직접 가서 물어보고 좀 알려줘라.

└ 나도 ㄹ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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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제국/카도도: 아 저리 좀 가라고!]

[신성제국/비도도: ** 잘못했다잖아!]

[신성제국/묘기대첩: 와나 환장하겄네;]

[신성제국/비도도: 그만 쫓아올 때 안 됐냐ㅅㅂ]

[시성제국/카도도: ** 미치겠네ㅋㅋㅋㅋ]

“그러게 누가 내 뒤통수를 치랬냐!”

이현은 눈을 매처럼 뜬 채 모니터를 바라보며 도망가는 유저들의 뒤를 잽싸게 따라붙었다. 숨 막히는 추격전 끝에 신성족 유저들은 하나 둘, 이현의 손에 명을 달리하고 바닥에 엎어졌다. 도중에 동료를 팔아넘기고 빠져나간 유저가 한 명 있긴 했지만, 이현의 집념에 그 유저도 얼마 안가 붙잡히고 말았다.

[신성제국/묘기대첩: 이현아 우리 말로 하자, 말로;]

이현은 공격력 증가 버프를 두르고 씩 웃었다. 신컨의 길로 들어서며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애원조로 살려 달라 애걸복걸하던 이들이 풀어주면 죄다 뒤통수를 친다는 것이었다.

“이러고 아주 제대로 뒤통수를 치려고?”

지들이 먼저 뒤통수를 쳐 놓고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이현은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고 있는 유저에게 냅다 주신의 격전을 날리고 스턴이 걸리자마자 사정없이 후려패기 시작했다. 템이 워낙 좋아서인지, 스턴이 풀리기도 전에 상대 유저는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렸다.

“이거지!”

승리의 모션을 취하는 캐릭을 보며 이현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오늘 하루 킬 수만 벌써 30명이다. 이건 전부 혹독한 훈련의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시열의 집에서 자고 난 이후, 일주일간 이현은 지옥을 넘나들었다.

그 전까지는 1:1 매칭으로 배웠었는데, 다음날부터 이현은 여명 길드 3명을 상대로 다수의 매칭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실전처럼 하는지라, 하루에도 몇십 번은 죽었다. 가지고 있던 공적을 다 뺏길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그 결과, 이현은 홀로 3명까지 상대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물론 직업군이나 특정 상황에 따라 승패가 달라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다수의 적을 봐도 겁먹지 않을 정도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신성제국/흑백: 이 정도면 괜찮네. 잘했어요 이현씨.]

펄쩍펄쩍 뛰고 있는 캐릭 뒤로 흑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스와 삼인방도 보이는 게 아무래도 걱정되어 금방 쫓아온 듯했다. 이현은 흑백 앞으로 다다다 달려가 싱글벙글하며 타자를 쳤다.

[이현: 저 잘했죠?]

[신성제국/흑백: 네ㅎ 이제 가르칠 것도 없겠네]

[이현: 진짜요?]

[신성제국/흑백: 연계스킬도 잘 했고, 전환속도도 그만하면 차차 익숙해질 것 같고... 음, 힐에서 딜로 락 전환할 때 좀 머뭇거리는 것 같긴 한데, 그건 이현씨가 얼마나 연습하느냐에 따라 달라니까 자주 해보는 수밖에 없어요]

[이현: 네!]

[신성제국/흑백: 그럼 이제 악세가 문젠데...]

[이현: 악세요?]

흑백이 말하는 ‘악세’는 악세사리를 뜻했다. 방어구 외에 상태 이상 확률이나 보조 능력치를 올려주는 템으로, 귀고리, 목걸이, 반지 등이 여기에 속했다.

[신성제국/흑백: 루스가 해준 게 좋긴 한데, 힐러는 베히아 요새에서 나오는 전용 악세 있어요. 그거 껴야 딜이 보충 되고 보조 능력치가 오르는데, 이거 얻는 게 진짜 힘듭니다.]

[꼬마천재: 힐러님 줄려고 엄청 돌았는데, 잘 안 나오더라]

[베리베리: 피토할 정도로 돌았는데... 주륵]

[마초: 그래도 얼추 구하긴 했는데 목걸이가 안 나왔지... 그넘의 목걸이]

“아….”

흑백한테 개인레슨을 받고 있을 때, 할 일이 있다며 사라진 게 다 악세를 얻기 위해서였나 보다. 이현은 감격에 젖은 시선으로 삼인방을 바라보았다.

[신성제국/흑백: 귀고리 2개, 목걸이 1개, 반지 2개해서 총 5개를 베히아 템으로 해야 악세 세트 효과를 얻을 수 있어요. 세트 착용하면 숨겨진 효과가 나오는데, 이것 때문에 힐러들이 악세에 집착합니다.]

[신성제국/흑백: 근데 이 숨겨진 세트효과가 랜덤 능력치에요. 좋은 게 나올 수도 있고, 아닌 게 나올 수도 있는데... 일단 좋은게 나오길 빌어야죠. 이현씨는 목걸이만 얻으면 되니까 그나마 다행이네]

[이현: 흑백님은 다 구했어요?]

[신성제국/흑백: 아뇨. 저도 아직 다 못 구했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구해. 이현은 상태창을 열어 착용하고 있는 악세사리를 쭉 훑었다. 이것도 나름 좋은 거 같은데, 그냥 이거 차고 다니면 안 되나?

[신성제국/흑백: 그러니까 오늘부터 이현씨는 무한 던전 돌기 해야 합니다. 알겠죠?]

[이현: 네]

[신성제국/흑백: 궁금하거나 잘 안 되는 거 있으면 연락하고요]

어쩐지 그게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졌다. 이현은 주춤거리다 흑백에게 꾸벅 인사하는 모션을 실행했다. 지옥의 시간을 생각하면 아름다운 헤어짐이었다.

[루스: 그럼 이현씨. 베히아 던전 좀 돌까요.]

[이현: 네!]

[마초: 캬, 내가 체력 충전하고 왔다!]

[베리베리: 목걸이 따위 금방이지!]

[꼬마천재: ㄱㄱ 후딱 갑시다]

베히아에는 수많은 요새가 있었는데, 그걸 차지하는 종족은 그곳에서 열리는 던전에 갈 수 있었다. 던전을 클리어 하고 얻는 것들은 공적으로 교환 가능한 보물과 착용 가능한 악세사리였다. 이현이 얻고자 하는 것도 그 악세사리 중 하나였다.

베히아에 있는 던전이라고는 PVP 던전인 레바니호밖에 가보지 않았던지라, 이현은 불안 반 설렘 반으로 루스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루스가 앞장선 곳은 얼음으로 무장된 거대한 요새였다.

―의식의 흐름 저편으로 가시겠습니까?

“여기 조심해야 될 거 있어?”

“보스방까지는 없을 거야. 다들 뭐, 템도 좋고 컨도 좋아서 죽진 않을 거다.”

김성훈의 대답을 들으며 이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던전 입장을 눌렀다. 지하 던전 아래로 이동하자마자 보인 건, 스타트 지점 앞에 돌아다니고 있는 로머들이었다. 인간형 뱀 모습을 한 ‘레비아탄’ 이었는데, 하나하나가 다 정예몹들이라 6명이 한 팀을 짜서 덤벼야 수월히 해치울 수 있는 몹이었다.

[루스: 갈게요]

도중에 합세한 김성훈까지 포함해, 파티 인원수는 총 6명이었다. 워낙 다들 컨도 좋고 템도 좋은 터라 그렇게 걱정되진 않았지만, 처음 가는 곳이라 이현은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이현은 사냥 도중 자리를 잘못 잡아 선공몹에 걸려 연이어 애드를 내고 모두를 몇 번이나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다.

[베리베리: 악! 저리가! 오지마!]

[꼬마천재: ㅅㅂ 말할 시간에 굴려!]

[마초: 덫덫덫!!]

[꼬마천재: 쿨이다 이 **들아!]

“그럼 그렇지, 채이현이 어디 가냐?”

“처, 처음 가봤는데 내가 구석에 몹이 숨어 있을 줄 알았냐고…!”

“큰소리치지.”

“…알았냐고.”

그래도 김성훈은 한 소리라도 하지, 다른 이들은 탓하기는커녕 싫은 소리나 눈치조차 주지 않았다. 그게 더 찔리게 한다는 걸 알기나 하는 건지, 몹이 정리되고 안정을 찾았을 때에도 모두는 다시 가자는 말뿐, 조심하라든가, 좀 잘 보고 하라든가, 하는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대신, 루스가 이현에게 따로 제안을 넣었다.

[루스: 이현씨, 이리와요. 제가 밟은 곳 잘 보고 따라오면 돼요. 괜찮아요.]

[이현: 네...]

[마초: 헉! 뼝아리 기 죽은 거 봐라!]

[베리베리: 루스 너 운전 똑바로 못하지!]

[꼬마천재: 와나, 탱커가 애드를 내면 쓰나]

아니, 애드는 내가 냈는데 왜 루스한테 그래. 이현은 루스에게 달려가 노발대발하는 삼인방을 보다 누명을 풀어주고자 천천히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김성훈이 글을 올렸다.

[확실한놈: 오늘 일진 보니 목걸이 보겠네요ㅋㅋㅋ]

나름 화제를 돌린다고 던진 말 같은데, 그 소리에 삼인방은 더 꽥꽥거렸다. 이현의 말은 먹히지도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루스가 한 마디 뱉을 때가 되어서야 삼인방의 발광은 중지되었다.

[루스: 한 명씩 좀 죽여야겠네]

[마초: 자, 이제 가자!]

[베리베리: 오늘 목걸이 나오겠네!]

[꼬마천재: 얼른 앞장서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모양새가 어쩐지 다들 한 번씩 당해본 듯했다. 이현은 앞장서는 루스의 뒤를 바짝 붙고 그가 밟은 자리만 그림자처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겨우 위험구간을 넘고, 각 방에 있는 중간 보스를 잡기 시작했을 때였다.

루스의 말도 안 되는 복수전이 시작되었다.

—‘마초’님이 사망하였습니다.

[마초: 허허... 서시열 이거 뒤끝 작렬이시네]

처음엔 마초부터 시작했다. 일부러 마초가 극딜을 하는 시점에 맞혀 루스가 칼을 접고 공격을 멈췄는데, 덕분에 어글이 마초에게 돌아가 손도 못 써보고 죽어버린 것이다. 의외로 베리와 꼬마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음 방의 사망자는 베리였다.

—‘베리베리’님이 사망하였습니다.

[베리베리: 허허허... 시열아... 일부러 그런 거 아니지? 응? 이 ㅅ발넘아?]

그리고 보스를 앞둔 마지막 방에서는 셋 다 죽었다. 귓속말로 루스가 뒤로 빠지라고 해서 빠진 것뿐인데, 빠진 순간 극딜 광역기가 날아들어 그대로 삼인방을 집어삼켰다. 원래는 루스가 어글을 먹고 순간방어로 막아내야 살 수 있는 기술이었는데, 루스가 그걸 안 하고 뒤로 빠지니 힐도 받지 못한 삼인방이 그대로 죽어 바닥에 드러누운 것이다.

—‘베리베리’님이 사망하였습니다.

—‘꼬마천재’님이 사망하였습니다.

—‘마초’님이 사망하였습니다.

[루스: 오늘 목걸이 나오겠네]

[꼬마천재: 아오 저 **를 그냥!]

[베리베리: 디지고 싶냐? 어?!]

[마초: 캬, 서시열 저거 저렇게 뒤끝있어서 세상 어떻게 사냐? 어? 이 개넘아]

와, 컨이 되니까 이렇게도 노는구나. 남들이 보기에 어떻든 이현은 혼자 감탄을 터뜨리며 놀라워했다. 그도 그럴 게, 다양한 수법으로 한 명씩 골로 보내는 게 여간해선 할 수 없는 기술이기 때문이었다.

[꼬마천재: 보스전에서도 이따위로 나오기만 해봐라 ㅅㅂ]

[베리베리: 설마... 힐러님 목걸이 줘야 되는데 설마...]

[마초: 이번판 볼만 하겠네ㅋㅋㅋㅋㅋ]

[베리베리: ㅅㅂ 나도 추진력 드립 치는 수가 있다]

[꼬마천재: 하기만 해봐라 **넘아]

이러다 피터지는 거 아니야? 불안한 심정으로 대화창을 바라보던 이현은 준보스를 죽이고 앉아있던 루스가 일어나자 저도 반사적으로 일어나 루스의 뒤로 바짝 붙었다. 루스는 삼인방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이현에게 말을 걸었다.

[루스: 이현씨. 여기서는 보스패턴이라는 게 있는데, 보스 피 50%때랑 25%때 조심해야 됩니다. 25%때는 보스몹이 연속 광역기랑 쫄을 소환해서 성력스킬로 버텨야 해요. 타이밍 맞춰서 말해줄 테니까 그때 쓰면 돼요.]

[이현: 네. 근데... 만약 타이밍 못 맞추면 어떡해요?]

[루스: 각자 생존기 쓰고 버틸 거라 크게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부담 갖지 말아요]

[베리베리: 괜찮아여 힐러님. 후딱입니다!]

[꼬마천재: 일단 보물방 2개 노리자]

[루스: 왼쪽은 마초, 오른쪽은 확실님이 가도록 하죠.]

[확실한놈: 네]

이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은 모두는 보스방 앞에서 다시 풀도핑에 들어갔다. 이현도 재빨리 버프를 돌리고 새 도핑에 들어갔다. 손을 풀기라도 하는지, 캐릭을 펄쩍펄쩍 뛰고 움직이던 삼인방은 루스가 이속 버프를 쓰고 보스방으로 달려든 순간 잽싸게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뛰어 들어가자 화면 위로 시간이 떠올랐다.

정확히 10분. 카운트다운이 들어가고 있었다.

[베리베리: 힐러님은 여기 있어요]

베리가 지정한 자리에 선 이현은 보스의 머리를 반대로 돌린 채 어글을 끌고 있는 루스에게 즉시 즉힐을 시전 했다. 그 직후엔 재빨리 적대치를 낮춰주는 스킬을 보스에게 걸었다.

[꼬마천재: 우리 힐러님 잘하네]

꼬마의 칭찬을 마지막으로 삼인방과 김성훈이 잽싸게 보스몹의 뒤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몹이 안정적으로 루스를 바라보고 있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워낙 잘하는 이들이라 그런 건지 딱히 이현이 힘들만한 건 없었다.

그러나 보스몹의 피가 50%가 되었을 때, 전체 광역기가 터져 나와 이현을 뺀 모두가 스턴에 빠졌다. 게다가 타이밍 안 좋게 루스에게 막 힐이 들어간 터라, 어글이 순식간에 이현에게 돌아갔다. 스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두를 제치고 보스가 이현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뭐, 뭐야! 오지 마!”

달려드는 폼이 마치 괴물이 덤벼드는 것 같았다. 당황한 이현은 즉시 방향을 틀어 방을 뱅뱅 돌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루스: 이현씨, 반 바퀴만 더 돌고 이쪽으로 끌고 와주세요]

[마초: 아이고 뼝아리가 고생이 많다]

[꼬마천재: ㅋㅋㅋㅋㅋㅋ진짜 잘 피하네]

이게 웃을 일이냐! 아니, 이런 말은 없었잖아! 이현은 몸을 반쯤 일으킨 채 키보드를 미친 듯이 눌렀다.

“악! 한 대 맞았어!”

“안 죽는 게 어디냐.”

“악, 악! 광역기! 쟤 광역기 쓴대!”

오두방정을 떠는 이현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김성훈은 스턴이 풀리자마자 재빨리 튀어나가 어글을 잡고 루스 쪽으로 보스를 끌고 갔다.

[베리베리: 이욜ㅋㅋㅋㅋ다 끝났넼ㅋㅋㅋ]

그래, 저 말을 들었을 땐 정말 다 끝난 줄 알고 다행이다 싶었다. 보스방에 들어가기 전에 들었던 마의 구간인 25%를 까맣게 잊은 채 말이다. 베리가 지정해준 자리로 돌아와 다시 열심히 힐을 하며 모두를 먹여 살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날아든 광역기에 피가 훅 달았다. 50%때보다도 강한 광역기였다. 마의 25%가 찾아온 것이다.

[루스: 이현씨, 성역스킬 ‘고결한 성운’ 써주세요]

고결한 성운은 엄청난 능력을 가진 넘사벽 스킬 중 하나였다. 차츰차츰 쌓이는 성역포인트로 쓸 수 있는 스킬이라 항상 쓸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음식 중에 성역포인트를 최대치로 쌓아주는 아이템이 있어 머리만 잘 쓰면 원하는 타이밍에 쓸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쓰면 스킬 쿨이 한 시간이라, 다시 쓰려면 한 시간 이후에나 가능했다.

—‘고귀한 성역수’를 마셨습니다.

—성역스킬 ‘고결한 성운’을 사용하였습니다.

성역스킬을 쓰자, 이현의 전투 상태창에 성역스킬 효과가 드러났다. 이현에게만 표시되는 성역스킬의 알림 메시지였다.

—20미터 안에 있는 사망한 아군 전체를 부활시키고, 넉백, 스턴, 밀림으로부터 저항하고 속성방어, 물리공격력, 물리방어력을 강화시킵니다. 또한, 아군 전체 체력의 20%만큼 20초 동안 2초 간격으로 체력이 회복됩니다. 체력이 회복될 동안 10초간은 10,000만큼의 데미지를 무력화 할 수 있는 실드가 생성됩니다.

넘사벽 스킬이라 불리는 고결한 성운의 스킬효과였다. 덕분에 연속 광역기에 노출된 모두는 위기의 순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물론 보스몹이 졸병을 소환했을 땐, 정말 전멸하는가 싶었다. 광역기에 피는 훅훅 달지, 졸병에 맞아 캐스팅은 계속 중지되지, 거리가 멀다고 힐은 들어가지도 않지, 도중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이현 쪽으로 몰려들지 않았다면 모두는 아마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보스몹이 이렇게 어려운지 처음 알았다. 결과는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승리를 거머쥔 이현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져 있을 때, 마초와 김성훈은 바쁘게 움직여 보물방을 열고 있었다. 시간은 4분 남짓 남아있었다.

[마초: 다깠음!!]

[확실한놈: 저도요]

카운트다운을 5초 남겨두고 들려온 말이었다. 남은 시간 안에 보물 상자를 여는 게 관건이었는지, 어느새 이현 빼고 모두 양쪽 보물방에서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루스: 이현씨 이리와요]

[이현: 네!]

루스의 위치를 찾은 이현은 왼쪽 보물방으로 후딱 달려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인 건 방 안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보물 상자였다.

[루스: 하나씩 먹고 가면 돼요]

[이현: 제가 다 먹어요?]

[루스: 이현씨 다 주려고 돈 겁니다]

어쩐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현은 괜히 무안해져 뺨을 긁적이며 보물 상자를 클릭했다. 상자 안에는 공적으로 전환 가능한 고대의 보물이 있었다. 전부 룻을 한 이현이 캐릭을 막 일으켰을 때였다. 난데없이 마초가 ‘헉’소리를 내뱉었다.

[마초: 헉!]

[베리베리: 왜! 뭐야!]

[꼬마천재: 나왔냐?!]

[마초: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꼬마천재: 진짜야?!]

제일 먼저 뛰어간 건 꼬마였다. 그 뒤로 베리도 미친 듯이 끝방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거의 동시에 베리와 꼬마의 말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

[베리베리: 헉!]

[꼬마천재: 와]

[마초: 캬 대박이넼ㅋㅋㅋㅋ]

[베리베리: 빨랑 와여 힐러님!!]

다급한 외침에 이현은 덩달아 다급해져 보물 상자들을 제치고 제일 끝방으로 달려갔다. 10개의 방을 지나치고 도착한 방은 다른 곳보다 넓고 웅장한 곳이었다. 화려하게 꾸며진 방에는 보석으로 세공된 거대한 보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 방방 뛰는 삼인방이 어서 열어보라고 난리인지라 이현은 감상도 잠시 바로 보물 상자를 클릭했다.

『성호의 결정 목걸이』

목걸이였다. 모두가 그렇게나 바라고, 구하기 위해 애썼던 목걸이가 화면에 떠 있었다. 이현은 한참이나 그걸 바라보다 획득하기를 눌러 모든 보물과 함께 목걸이를 획득했다. 몸을 숙여 줍는 모션을 취하고 있던 캐릭이 몸을 일으키자, 기다렸다는 듯 마초가 거래를 걸어왔다. 거래창에는 성호의 결정 귀고리 2개와 성호의 결정 반지 2개가 올라와 있었다.

[마초: 내가 봤을 때 우리 뼝아리는 축캐다, 캬!]

—거래를 완료하였습니다.

거래확인 버튼을 누르고 이현은 곧장 아이템 창을 켰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현은 루스가 해준 갑옷 다음으로 큰 애착을 느꼈다. 그건 스완다와는 다른 애착이었다.

[꼬마천재: 어여 착용 합시다!]

[베리베리: 세트효과 얼렁!]

캐릭 주위를 뱅글뱅글 도는 삼인방을 힐끗 보다 이현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모든 악세사리를 착용했다. 착용하자마자 보이는 반짝이는 악세사리가 참 예뻤다. 착용한 악세사리를 마우스로 클릭하자 세트효과 아래, 숨겨진 특수효과가 주황색으로 표시되었다.

—[스킬 랜덤 리셋효과] 1%의 확률로 사용한 스킬들 중 하나를 랜덤해 스킬의 쿨타임을 초기화합니다.

[꼬마천재: 효과 올려 봐요. 봐줄 테니까]

[이현: <스킬 랜덤 리셋효과> 이거래요. 확률은 1%로요]

이현의 말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침묵하는 모습으로 보아 그리 좋은 효과는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베리베리: 힐러님! 다시 구해줄게요!!]

[마초: 하나만 다시 구해도 리셋효과 바뀌니까, 우리 하나만 바꿉시다!]

[꼬마천재: 그게 안 좋은 건 아닌데, 말 그대로 랜덤이라 어떤 스킬이 리셋될 지 몰라서 실용성이 많이 없어요. 좋은 스킬보다는 일반스킬이 많이 리셋돼서, 좋은 효과는 못 보거든요. 그것보다는 체력이나 마력 30%증가 이런 게 좋은데... 일단 다시 구해요]

물론 다시 구하면 더 좋은 옵션을 장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현은 다른 걸 굳이 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 온 던전에서 처음으로 얻은 것이다. 옵션만 그저 그렇다 뿐이지 고유 능력치는 이전에 착용하고 있던 것보다 굉장히 좋았다. 나름 뜻깊게 얻었는데, 이걸 이대로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언제 또 목걸이가 나올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랬다.

[이현: 이게 좋아요. 다른 거 필요 없어요.]

[이현: 진짜 좋아요. 예뻐요]

[이현: 감사합니다]

진심을 담아 말한 건데, 삼인방에게는 그 말이 예의상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게, 마치 이걸 어쩔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잠시 후, 삼인방은 언제 침묵했냐는 듯 다시 방방 뛰며 이현의 주위를 정신없이 떠돌았다.

[베리베리: 울 힐러님이 그렇다는데, 뭐ㅋㅋㅋㅋㅋ]

[마초: 아이고 그랬쪄요?]

[꼬마천재: 그럼 됐다 됐어ㅋㅋ]

이현도 삼인방에 맞춰 방방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스와 김성훈까지 한 자리에 모였을 때에야, 모두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아주 엎드릴 기세였다.

어쩐지 하나 둘, 애착가는 물건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창고가 남아날는지 모를 일이다. 이현은 창고를 떠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누가 뭐래도 평생, 가지고 있을 생각이었다.

***

시열을 못 본 지 어느덧 일주일이나 되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흐르는 건지, 하루하루 연락을 주고받을 때마다 그저 신기했다. 전화는 대부분 시열이 먼저 이현에게 걸었다. 연인치곤 길지 않은, 안부만 묻다 끊는 짧은 통화였다. 그래서인지, 감질나달까. 그런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현씨, 보고 싶은데 가도 됩니까?]

핸드폰이 밝게 빛나자 이현은 잽싸게 주워들어 홀딩을 풀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시열이었다. 일주일의 짧은 시간 동안 이현에게도 변화는 있었다. 고작 일주일인데, 매일 밤 듣는 목소리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이현은 한참이나 메시지를 보다 뒤늦게야 ‘네’라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

“야, 오늘은 그만해야겠다. 시열씨 온대.”

“그래?”

옆에서 열심히 에르덴을 하고 있는 김성훈의 팔을 가볍게 툭 친 이현은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6시.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때라 뭘 해도 적당한 시각이었다. 이현이 로그아웃을 하고 게임을 끄자, 김성훈도 슬슬 정리하기 시작했다.

“같이 나가게?”

“피곤해서 오늘은 일찍 접으려고.”

“너 집에 가서 하는 거 다 알거든?”

“알면 됐다. 일단 나가자.”

이현의 머리를 한 번 헝클어드린 김성훈이 몸을 일으켰다. 나란히 계산을 하고 건물을 나오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게 보였다. 이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시열이 없다는 걸 확인하곤 김성훈에게 잠시 뒤를 맡겼다.

“나 시열씨 커피 좀 사올 테니까 시열씨 오면 무조건 붙잡고 있어. 무조건이다?”

“가다 한눈이나 팔지 마라.”

김성훈에게 말없이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준 이현은 잽싸게 몸을 돌려 큰길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현의 모습이 사라지고 성훈은 혼자 휑한 길 위에서 시열을 기다렸다. 시열이 도착한 건, 그로부터 5분이 지났을 때였다. 20분이 걸리는 거리를 10분 만에 온 걸 보니 아예 먼저 출발하고 메시지를 보냈던 모양이었다.

“이현씨가 안 보이네요.”

“이현이 잠깐 커피 사러 가서요.”

건물 앞에 차를 정차하고 내린 시열이 성훈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성훈은 작게 목인사를 하며 대꾸했다. 건조한 말투와 대화였다. 이현이 아니면 마주할 일조차 없다는 듯한, 그런 태도들이었다.

“…채이현, 저거요.”

한참이나 말없이 서 있던 성훈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많은 고민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엄청 웃긴 놈이에요.”

“…….”

“중학교 때 동창이었는데, 그땐 그렇게 친하지 않았거든요. 근데 군대 가서 자대배치 받고 보니 저놈이 동기더라고요. 낯선 곳에서 본 게 그땐 왜 이렇게 반갑던지, 금방… 친해졌어요. 이런 놈인가 싶을 정도로 해맑고 애가 참 그늘도 없어서, 그냥 가볍게 지내기 좋더라고요.”

시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고 성훈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채이현, 그 녀석이 선임들한테 이쁨은 또 엄청 받았거든요. 근데, 그걸 그렇게 부담스럽고 싫어했어요. 같은 동기놈들이 자기 때문에 피해 받을까 봐 꾹 참고 티는 안 냈는데, 동기놈들 보기에 그게 그렇게 좋아보이진 않잖아요? 동기놈들 짬나서 모일 때면 간혹 이현이 얘기도 나오는데, 그때마다 그냥 방관하고 그랬습니다. 그냥… 딱 그 정도 사이였어요.”

아, 좀 후회되네요. 아주 잠시 혼잣말이 들려왔다. 씁쓸한 웃음이 감도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제가 심한 독감에 걸린 적이 있었어요. 일등병 달고 지낸 겨울이었는데, 한파주의보 경보 발령되고 그랬던 때였죠. 주말동안 의무실에 입실해 앓아누워 있을 정도로 심했는데, 3일 지나고 복귀하니까 제 자리에 군복이 정갈히 개어져 있더라고요. 당연히 후임이 챙겼거니 했는데, 각까지 잡고 다린 거 보니 보통 정성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물어본 건데 아무도 대답을 안 해요. 나중에 후임이 눈치 살살 보며 와서 귓속말을 해주는데….”

성훈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때를 생각한 듯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채이현이 했대요.”

한파주의보가 내려온 때라 손발이 얼 만큼 추웠던 날이다. 독감에 정신없던 때였는데도, 뼛속까지 스며들던 추위를 성훈은 아직까지도 기억했다.

“채이현, 걔가 진짜… 저 의무실에서 골골대고 있을 때에도 몇 번이나 왔다 갔는지 몰라요. 기웃거리다 걸려서 선임한테 한소리까지 들었는데도, 계속 찾아 왔어요. 물수건 갈아주고 이불 덮어주고, 체온 재주고…. 나중엔 아예 의무병한테 출입금지까지 당했습니다. 근데 그러고도 모자라서 그 한파에 제 군복까지 가져다 얼음물에 손빨래를 했대요.”

하, 미친 거죠. 성훈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때는 그랬다. 자대에 배치된 세탁기 절반이 동파로 물이 안 나왔는데, 나오는 건 선임들 위주로 돌아가서 후임들은 눈치껏 선임 옷 사이에 제 옷을 같이 넣고 빨아야 했다. 그 여건도 안 되는 이들은 눈치껏 손빨래를 했는데, 자대 밖 수돗가 근처에서 빨래를 해야 했단다.

“후임이 그러더라고요. 채이현, 얘가… 동기들한테 입단속까지 시키고 달달 떨면서 그걸 빨았대요. 하필 그때가 동파라 보온재 설치된 수돗가밖에 물이 안 나왔대요. 얼음물이었을 텐데, 눈치 보며 빨고 널고 다림질했을 거 생각하니 진짜 이건… 미안하고 고마운 걸 떠나서 목이 탁 메더라고요. 그래놓고 물어보니까 뭐 나쁜 짓 했다고 시치미를 떼는지….”

호구도 그런 호구가 없었다. 그때 느꼈던, 미안함, 고마움, 속상함이 아직까지도 잊히지가 않았다.

“선임들 이쁨 한 몸에 받고 있겠다, 눈치껏 선임 거 빨 때 세탁기에 같이 넣고 돌리면 될 걸 말이라도 나올까, 혼자 호구짓이나 하고 있고…. 채이현, 얘는 진짜 답이 없더라고요. 저라면 생색이라도 냈을 텐데, 그게 뭐 감춰야 되는 거라고 말도 안 하고…. 미련하게 말이에요.”

그때부터였다. 성훈이 이현에게 진지하게 다가서기 시작한 게.

“얘가 그래요. 안 그런 거 같은데, 의외로 눈치도 있고 속 깊고 정 있고… 그냥 생각 없이 사는 거 같은데, 그렇지도 않아요. 한 번도 싫은 소리나 힘든 소리를 동기들 앞에서 한 적이 없거든요. 그때 생각한 게, 아직까지도 변하지가 않아요. 얘는 진짜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을 때까지 곁에 두고 지내야겠다고.”

그만큼 소중한 친구다. 한때는 친구 이상의 감정이 아닌가, 고민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깊은 우애를 느꼈다.

“그러니까 이현이… 힘들게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 그 자식 힘들어하는 거 못 봐요. 보고 싶지도 않고.”

시열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고개를 들자 길 저 끝에서 이현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시열이 입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얼핏 이현과 시선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몇 번 깜빡이는가 싶더니, 양손에 든 캐리어를 흔들며 이현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시열은 다시 속삭이듯 얘기했다.

“이현씨 울릴 일 없을 테니까.”

성훈은 땅거미가 내려앉은 땅을 바라보며 고개만 슬쩍 끄덕였다. 그거면 됐다.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시열씨!”

무거운 분위기 사이로 밝은 목소리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잽싸게 달려와 시열의 앞에 선 이현이 시열을 보며 웃었다.

“이현씨, 어딜 그렇게 갔다 와요.”

“커피요. 시열씨 커피 주려고요.”

손에 든 캐리어를 휙 든 이현이 커피를 꺼내 시열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를 꺼내 성훈에게 쥐여 주고, 남은 건 제가 쪽 빨아 마셨다.

“야, 넌 그만 좀 처먹어라. 잠 안 쳐 자냐?”

“커피 마셔도 잠 잘 자거든!”

“다시 한번 말해봐.”

“…이것만 마시고 안 마시려고 했어.”

성훈의 눈빛에 기가 죽은 이현은 시열의 등 뒤로 슬금슬금 피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잠 못 잘까 봐 카페라떼로 사온 건데, 뭐라고 하니 아주 억울해 죽을 것 같았다.

“제발 좀 그렇게 해라. 내일 접속할 때 연락하고.”

“가게?”

“그래, 있어 뭐하냐? 잘 놀다 들어가라.”

“어, 내일 봐.”

“오냐. 커피 잘 마실게.”

커피를 흔들며 말한 성훈은 마지막으로 시열에게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 등을 돌렸다. 이현의 뺨 위로 간지러운 손길이 닿은 건, 성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다.

“이현씨.”

시열의 손끝에는 시원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향을 깊게 들이마신 이현은 시열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저 안 보고 싶었습니까?”

부드럽게 휘는 눈매가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이현은 주변 눈치를 보며 시열의 품으로 슬금슬금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비밀 얘기를 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그랬어요?”

“네. 시열씨는요?”

“음, 글쎄요.”

시열의 말에 이현이 충격에 빠졌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인 듯, 시열을 보는 두 눈이 커다랗게 뜨여 있었다. 시열은 어쩔까, 하는 모습으로 이현을 내려다보다가 이현의 눈에 상심이 자리 잡혔을 때에야 이현의 뺨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현씨, 우리 드라이브 갈까요.”

묘한 친절이 담긴 게, 가슴을 간질간질하게 하는 말이었다. 이현은 고개를 홱 돌리고 귀를 빨갛게 물들인 채 작게 대답했다.

“…갈게요.”

***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야경을 본 지 한 시간은 된 듯했다. 서울근교로 나온 것 같은데, 서울에서 잘 벗어나지 않는 이현으로서는 봐도 어딘지 알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시열과 창밖을 번갈아 보며 조용히 있었는데, 깨달았을 땐 차가 웬 산속의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다. 비포장도로인 걸 보아,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 같았다.

남한산성이나 낙산공원 같은 유명명소를 갈 줄 알았는데, 근교까지 나온 걸 보아 사람 많은 곳을 피해 온 듯했다. 라이트 빛에 의지해 어둠을 헤치고 산길을 오르던 차는 평평한 지대에 다다라서야 멈추었다. 눈부신 전경이 시야에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아….”

사방이 탁 트인 평지였다. 울퉁불퉁한 돌이 자갈처럼 깔린 평지 끄트머리에는 탄성이 터져 나올 만큼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현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그런 경치였다.

“올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이현씨처럼 예쁠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생각 없이 야경을 바라보고 있길 한참, 옆에서 시열의 말이 들려왔다. 시열은 웃고 있었지만 즐거운 모습은 아니었다.

“저 많이 보고 싶었어요?”

“네.”

의외로 대답은 빨리 들려왔다. 아까와는 다른 대답에 이현이 헤실헤실 웃었다. 안전벨트를 푼 시열이 천천히 손을 뻗어왔다. 미열 같은 따뜻한 손이 이현의 뺨을 담았다.

“자나 깨나 이현씨 생각만 합니다.”

“아까는 아니라고 했으면서.”

“이렇게 바라보는데, 서운해서요.”

너무 순진한 시선이라. 타박하는 말에 이현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잠시 후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이현이 매고 있던 안전벨트가 풀렸다. 뺨을 매만지던 손길에 이끌린 듯, 이현은 시열의 품 안으로 기울어졌다. 너른 품에 푹 안긴 이현의 귓가에 시열의 한숨 같은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그래서 참은 건데… 안 그래도 될 것 같네.”

나른한 목소리가 짙게 울렸다. 이현은 머뭇거리다, 조금씩 시열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귓가에 닿던 입술이 목선을 타고 내려왔다.

가, 간지러운데. 이현은 이도 저도 못한 채 초조한 표정으로 시선을 굴렸다. 이현의 허리가 꽉 끌어안긴 것도 그때였다. 이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시열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김성훈씨한테 이현씨 얘기를 잠깐 들었습니다.”

“얘기요?”

“네.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이현씨가 너무 안쓰럽고 기특해서 꽉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시기심에 화도 나는 게…. 아무래도 제가 이현씨를 정말 많이 좋아하나 봅니다.”

이현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헤맸다. 낮은 목소리에 가슴이 뛰었다. 머뭇머뭇 눈치를 보던 이현은 꼬물꼬물 움직여 시열의 등에 팔을 두르고 꼭 껴안았다. 덩달아 이현의 허리도 강하게 당겨졌다.

“온전히 제가 다 갖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네요.”

“…가지면 되잖아요.”

시열의 손끝이 움칫 떨렸다. 느릿하게 고개를 든 시열의 시선 속에는 야경을 등진 이현이 있었다.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하고 있는 이현의 귓가가 어둠 속에서도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시열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달아오른 귓가를 감싸자, 움찔 떠는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누가 들으면 나는 뭐 좋아하지도 않는 줄 알겠네.”

이현은 시선을 피한 채로 투덜거리듯 불퉁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시열의 손이 이현의 목덜미로 향했다. 처음엔 간지럽게 스치듯 닿았다. 그러나 간지럽던 손길에 힘이 실리고, 서로의 숨이 가볍게 겹쳐졌다.

“아….”

깃털 같던 가벼운 입맞춤은 시열이 이현의 뒷목을 잡아 당긴 순간, 농밀해졌다. 거친 듯, 집요한 키스였다. 이현은 숨을 쌕쌕 내쉬며, 시열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겨우 그만큼밖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 그만….”

“애기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를 두고 시열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할 때마다 입술이 스치듯이 닿고 있었다. 쌔액 숨을 내쉬던 이현의 고개가 천천히 숙여졌다. 붉어진 목덜미가 먹음직스럽게 시열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현씨, 이 정도로 이러면 안 될 텐데.”

“…….”

“알겠어요. 안 할 테니까 고개 좀 들어봐요, 응?”

이현의 귓가에 습한 목소리가 닿았다. 이현이 슬쩍 고개를 들자, 시열이 달래듯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다정한, 가슴 설레는 온기가 입술 위에 머물렀다.

“이현씨, 나가서 야경 좀 보다 갈까요?”

온기가 남아 있는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지던 이현은 시열의 말에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먼저 손을 뻗은 건 이현이었다.

“이게 더 좋아요.”

시열의 품 안으로 이현이 머리를 들이밀며 파고들었다. 나올 것도 없는데, 밥 달라고 애교부리는 건가. 그런 생각으로 시열이 막 이현의 몸을 꼭 끌어안았을 때였다. 정말로 이현의 배 속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연달아 두 번이나 울리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잠깐의 침묵이 차 안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차 안에는 시열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적이 깨지자마자 이현은 식겁한 표정으로 배를 잡고 뒤로 휙 물러났다. 시열은 한참이나 웃었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는 까닭에 이현은 뭐라 말도 못 했다.

이현의 표정에 울상이 가득할 때 즈음, 시열은 웃음을 뒤로하고 이현의 뺨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이현씨, 뭐 먹고 싶습니까? 근처에 맛집 많은데.”

“맛집요? 그럼 저 고기요!”

“흐음, 너무 좋아하는데.”

“…사, 사실 저 고기 별로 안 좋아해요. 양도 적은 게, 비싸기만 하고….”

쓰라린 표정으로 말하는 이현에게 안전벨트를 매어준 시열은 축 처진 이현의 눈가를 살살 문지르며 달래는 어투로 얘기했다.

“이현씨 좋아하는 고기 먹으러 가죠.”

이현의 표정이 삽시간에 밝아졌다. 주먹까지 쥐고 좋아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좋은가보다. 시열은 그런 이현을 보다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마치 ‘이걸 어쩔까.’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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