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9)

7. 힐러의 생존기

야경을 보러 간 날 이후, 이현에게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생겨났다. 거창하게 변화라고 했지만, 사실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봐야 했다.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주변에서 지지고 볶고 난리라고 해야 할까. 이현이 요즘 느끼는 주변사태가 바로 이러했다. 그렇게 느낀 첫 번째 이유는 언제부터인지 주변에 따라붙은 웬 신성족 유저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그 유저를 경계하는 시열이 행동 때문이었다. 무슨 억하심정인지, 이현을 쫓아다니기 시작한 신성족 유저는 접속한 순간부터 집에 갈 때까지 이현의 주변을 기웃거렸다. 주변을 얼쩡거리며 따라다니기만 할 뿐, 이현에게 별다른 위해도 가하진 않았는데, 문제는 그 놈을 죽이려고 해봐도 쥐새끼처럼 잽싸 죽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죽일 수가 없었다. 그가 회피력 만렙이라고 정평이 난 아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 그 신성족 아처 유저는 이현이 접속하자마자 귀신같이 나타나 이현의 주변을 기웃거렸다.

[신성제국/비연: 이현아! 오늘은 베히아 안 가?!]

[이현: 아, 좀 저리가여!]

[신성제국/비연: 심심한데 같이 좀 놀자]

저 새낀 대체 정체가 뭐지? 허구한 날 와서 하는 소리라곤 고백 같은 말들뿐이었다. 너를 위해 서버 이전을 했다느니, 정말 보고 싶었다느니, 같이 놀자느니, 아주 듣다 보면 가관이 따로 없었다. 거머리 저리가라였다.

[이현: 저 할 거 있으니까 저리가여]

[신성제국/비연: 우리 오늘은 어디 갈까? 응?]

“우리 같은 소리 하네!”

이현은 무기를 꺼내들고 냅다 비연에게 달려들었다. 이현이 황소처럼 달려들자 비연은 뒤로 점프하며 공격을 날래게 피하기 시작했다. 회피 스킬과 이속 스킬, 교묘한 스킬 거리를 이용한 무한 회피기였다. 심지어 너무 잘 피해서 한 대도 맞지 않았다.

[신성제국/비연: 매번 느끼지만 이현이 진짜 잘하네]

[이현: 한 대 맞고나 얘기해!]

[신성제국/비연: 맞아줘? 그럴까? 그럼 놀래?]

[이현: 너나 노세요]

손가락 가운데 이모티콘을 날린 이현은 재빨리 귀환 스킬을 눌러 비연이 올 수 없는 길드 부지로 이동했다. 아침 10시. 아직 삼인방과 시열이 접속하지 않은 시각이었다. 어제 새벽 3시까지 레바니호를 돌다 헤어졌으니, 접속하지 않은 게 비단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삼인방과 루스 대신 이현을 반긴 건, 일찍부터 들어와 있는 타협의 길드원들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길드원들이 접속해 있었다.

[길드/신이내린캐: 엇 병아리 왔네?ㅋㅋ]

[길드/이현: 안녕하세요]

[길드/기토피아: 아니, 어제 새벽까지 있던 거 본 거 같은데ㅋㅋㅋ 잠도 안 잔거야?ㅋㅋ]

[길드/코코볼 : 와ㅋㅋㅋㅋ 집념봐라ㅋㅋㅋ]

[길드/백전승: 루스도 없는데 병아리 혼자 뭐하려고? 내가 놀아줘요?ㅋㅋㅋㅋㅋ]

[길드/다이뜨자: 놀아주기 하면 또 나지ㅋㅋㅋㅋ 이현씨, 이리 와요]

[길드/묘냥이: 도랏냨ㅋㅋㅋㅋ]

[길드/신이내린캐: 저 새1끼 루스 흉내낸거 봐라ㅋㅋㅋㅋㅋㅋ]

[길드/코코볼: 미챴ㅋㅋㅋㅋ 강탈각이네ㅋㅋㅋ]

쉴 새 없이 올라오는 길드 글을 뒤로하고 이현은 길드 부지에 있는 창고지기에게 달려가 베히아에 갈 아이템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 즈음, 흑백이 들어와 일일퀘의 공적 획득치를 검사한다고 했으니 최대한 많은 업적을 이뤄놔야 했다.

[길드/기토피아: 저새1끼 또 왔네]

그때였다. 길드 부지 안에서 웃고 떠들며 앉아있던 길드원들이 무기를 꺼내 들기 시작한 건. 의아한 표정으로 이현은 화면을 돌려 부지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새 어떻게 알고 나타난 건지, 비연이 손을 흔들며 존재감을 어필하고 있었다.

[길드/묘냥이: 와... 저넘 저거 진짜 끈질기네]

[길드/다이뜨자: 개발려놓고도 아직 정신이 못 차렸네]

[길드/신이내린캐: 저번엔 길드넘들 데리고 삐약이 내놓으라고 ㅈㄹ을 떨며 쳐들어오더니 오늘은 왜 혼자라냐?]

[길드/백전승: 그때 대박이었지ㅋㅋㅋ 간만에 제대로 된 놈들이었어ㅋㅋ]

[길드/코코볼: 루디섭이랬던가? 거기 섭 1위 길드였다는데 나름 잘하는 편이었겠지]

[길드/기토피아: 우리한텐 쨉도 안됐지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다이뜨자: ㅋㅋㅋㅋㅋ 기승전 자랑질]

[길드/묘냥이: 근데 왜 죄다 섭이전을 왔대냐?]

[길드/신이내린캐: 우리 병아리 힐러님 보고 싶다고 섭이전을 하셨단다, 개발넘들이ㅋㅋㅋ]

[길드/코코볼: 요새 우리 섭이 핫하긴 하짘ㅋㅋㅋㅋㅋ]

[길드/백전승: 우리섭 만원이라 이전 못하게 막은건 다들 아냐?ㅋㅋㅋㅋ 이정도닼ㅋㅋㅋ]

보고 싶은 거 좋아하네. 이현은 보고 있던 길드채팅창을 한쪽으로 치우고 제 이름을 부르짖고 있는 비연을 노려보았다. 비연이 있던 곳은 ‘루디카나’ 섭이라는 신성족 우세섭이었는데, 근래에는 재미도 없고 할 짓도 없어 출석만 찍으며 하루를 심.심.하.게.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 게시글에 이현의 얘기가 올라오면서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섭이전까지 결심하게 되었단다.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릴 하고 자빠졌어.”

더 어이가 없는 건 루디카나 섭 1위 길드가 ‘블랙블’이었는데, 거기 속해 있던 비연이 섭이전을 하자, 무슨 흥미로운 냄새라도 맡았는지 블랙블 전체가 넘어와 신성족에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는 것이다. 말로는 원래 다들 접을 생각이라 마지막으로 될 대로 되라 라는 심정으로 왔는데, 사건 사고의 온상을 겪고 보니 재밌어서 접을 생각이 사라졌단다. 그 말에 이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길드/다이뜨자: 안 되겠다. 루스 불러라]

[길드/묘냥이: 이야, 저넘들 리셋된 공적 쌓으려면 피를 토해야 될 텐데 여기서 이러고 있네?ㅋㅋㅋㅋ]

[길드/신이내린캐: 공적 필요없나ㅋㅋㅋ 접는다는 얘기 종종 돌았었는데 섭이전한 거 보니 미련도 없었나봄?]

[길드/백전승: ㅅㅂ 이러다 종족이전도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겄네]

[길드/다이뜨자: 디질ㅋㅋ 그럼 주겨야지]

[길드/코코볼: 밥그릇 싸움 오지겠넼ㅋㅋㅋㅋ]

[길드/기토피아: 이번 성전 재밌겠는디ㅋㅋㅋㅋ]

하나 둘, 도핑을 하며 길드의 고성을 벗어나는 게 떼로 달려들어 죽이려는 심산인가 보다. 이현은 혹여 말려들기라도 할까,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포탈을 타고 베히아 포탈 원석이 있는 마을로 이동했다. 물론, 비연을 애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살벌하게 달려드는 길드원들의 뒷모습을 보며 분명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은데, 그런 애도의 마음은 이현이 베히아에 도착해 일일 퀘스트를 주는 NPC앞에 선 순간 순식간에 불타 없어졌다. 그도 그럴 게, 퀘스트를 주는 NPC 뒤로 누군가가 춤을 추며 이현을 반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성제국/비연: 이현아 왜 이렇게 늦었어ㅋㅋ]

비연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이현은 얼굴을 감싸며 책상 위로 엎어졌다. 저놈을 어떻게 없애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니, 그냥 루스 불러다가 죽여 달라고 할까.

[신성제국/비연: 이현아! 일일퀘 하려고? 내가 도와줄까? 응?]

[이현: 안 도와줘도 되거든요]

[신성제국/비연: 눈이 침침한 게 갑자기 글이 잘 안 보이네]

그냥 욕을 할까? 잠시 심각한 고민에 빠졌지만 이현은 또 메인이라도 탈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NPC에게 일일 퀘스트를 받아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신성제국/비연: 이현아 근데 성전 나올거야?]

[이현: 몰라요]

[신성제국/비연: 에이, 그러지 말고 말해줘라. 우리 길드도 이번에 나갈 건데 이현이 나오면 난 빠져서 이현이랑 놀아야지ㅋㅋ]

[이현: 저 나가도 님하고 안 놀아요]

[신성제국/비연: 나온다는 거지? 아 근데 여명도 나온다던데 그러면 이번에 타협이 지는 거 아니야?]

[이현: 저희 안 져요]

[신성제국/비연: 이현아 니가 아무리 이뻐도 그건 아니다ㅋㅋ 우리랑 여명 나오면 끝난 거지 뭐]

“이 새끼가 진짜…!”

일일 퀘스트고 뭐고 그냥 이놈부터 잡아? 이현은 눈을 뾰족하게 뜬 채 버프를 쫙 돌리기 시작했다. 이속 증가, 방어력 증가, 체력 증가, 마력 증가, 자연 회복량 증가, 공속 증가 주문서까지 깡그리 먹자 어느새 화면 위쪽에 10개나 되는 버프목록이 생성되었다.

[신성제국/비연: 이현아 나 죽이려고?]

[이현: 그래, 이 **야]

[신성제국/비연: 나도 그냥 종족 바꿀까? 그럼 이현이 못살게 구는 넘들 주겨줄 수 있는데]

[이현: 너부터 죽어라 좀!]

[신성제국/비연: 이현아... 귀엽게 왜 그래]

비연을 죽인다고 달려들고는 있는데, 어째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이현은 잽싸게 도망치는 비연을 따라 주변 일대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겨우 따라잡아 스킬을 날리면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채고 비연은 마법공격 회피 스킬을 써 공격을 무효화 시켰다.

결국 이현은 도중에 쫓는 걸 포기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흑백에게 나중에 1:1 조언이라도 구하던가 해야지, 이건 무슨 제자리 뛰기도 아니고 피 말리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신성제국/비연: 이현아 벌써 지쳤어? 그러게 나는 쫓는 거 아니라니까]

이젠 화도 안 나는 게 아무래도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며칠 이렇게 대꾸도 않고 가만히 지내다 보면 맥초딩처럼 떨어져나가겠지. 그런 생각으로 이현은 멘탈을 회복하고 캐릭을 번쩍 일으켰다. 화면 위로 파티수락 창이 뜬 것도 그때였다. 파티신청자는 다름 아닌 루스였다.

—파티제안을 수락하였습니다.

파티를 제안하고 들어가 목록을 보니, 삼인방도 함께 파티가 되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어 인사를 건넬까 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싸한 것 같아 이현은 그냥 얌전히 있기로 했다. 혹여 근처에 있을까, 큰 맵을 켰는데 별로 표시된 파티원 넷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신성제국/비연: 근데 이현이는 템도 좋은데 굳이 공적을 모아야 되나?]

[신성제국/비연: 아. 비품 같은 거 사려고? 아님 악세?]

[신성제국/비연: 이현이 갑옷 천억 골드 들었다며? 대단하네. 그럼 현질로 얼마나 든거지? 천은 넘겠지? 이현아, 미안한데 나한테 와도 난 그렇게는 못 해줄 거 같아. 내가 아직 대학생이라]

“어디서… 김칫국이야!”

아주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현이 기겁한 표정으로 비연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삼인방과 루스는 착실히 움직여 이현에게 다다른 상태였다. 타는 목을 가라앉힌다고 이현이 생수를 원샷하고 탁 내려놓았을 때, 삼인방과 루스가 비연을 사방에서 덮쳤다.

[베리베리: 어이쿠 여기 웬 생닭 한 마리가!]

[꼬마천재: 이 새1끼는 왜 자꾸 기웃거리고 ㅈㄹ이냐]

[마초: 야야, 닭털 좀 살살 뽑아라. 사방이 닭털이다]

회피기를 쓰며 재빨리 뒤로 빠진 비연이 물약과 공적템으로 버텨봤지만, 한꺼번에 덤벼드는 다굴에는 아무리 그라도 대책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비연은 얼마 안 가 장렬하게 사망하고 말았다.

[신성제국/비연: 와 너무하네. 어떻게 4:1로 이러냐]

[베리베리: 다굴에 장사없는 거 모르나ㅋㅋㅋㅋㅋ]

[마초: 닭둘기 털은 우리 뼝아리 몸에 안 좋다 캬캬캬]

[꼬마천재: 이거 진짜 미1친놈이네. 저번에 길드 끌고 와서 개털리고도 아직도 포기를 못했냐]

[베리베리: 저넘 엑저 밀어내고 아처 1위 찍었던데]

[마초: 나도 어쌔신 1위다]

[꼬마천재: 나도 거너 1위다]

사망해 뻗어있는 비연을 빙 둘러싼 채 삼인방은 자랑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이현에 대한 것들도 많았다. 우리 힐러님이 어떻다느니, 우리 병아리가 최고라느니, 거기에 나중에는 아주 비연까지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저러다 아주 모임 갖겠네.”

저럴 땐 그냥 모른 척 무념무상 있는 게 최고다. 이현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괜히 뒷목을 주물렀다. 루스가 삼인방 무리에서 빠져나와 충격적인 발언을 내뱉은 것도 그때였다.

[루스: 이현씨, 아침에 왜 이렇게 일찍 갔어요]

[이현: 저요?]

[루스: 어제 나 때문에 무리해서 힘들었을 텐데.]

[루스: 걸을 수는 있었어요? 일어났는데 없어서 놀랐잖아요, 응?]

나? 나?! 나 어제 우리 집에서 잤는데…? 이현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루스의 말에 주변일대가 아주 조용해졌다. 이게 바로 이현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중 두 번째로 난리인 ‘루스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요새 루스는 이현의 주변 일에 대해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했는데, 그게 어느 정도냐면 견제를 넘어 사기를 칠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루스가 말하는 저 말은 거의 사기수준이란 소리였다. 아니, 아예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이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고민하다 일단 밥이라도 만들자는 심정으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비연을 쫓아낼 수 있기를 바라며 말이다.

[이현: 괜찮아요... 어, 그게 힘들긴 했는데]

[루스: 어떻게 갔어요]

[이현: 기어서...?]

[루스: 이따 갈게요. 무리하지 말고 있어요]

[이현: 네!]

온다는 소리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이현은 씩씩하게 대답하며 헤실거렸다. 그러다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는 뒤늦게야 뜨끔한 마음으로 화면을 돌려 삼인방을 돌아보았다. 언제 살아난 건지 비연과 삼인방이 함께 일렬로 서서 이현과 루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충격에 빠진 듯 말이 없었다.

제일 먼저 반응한 건 비연이었다. 모두가 굳어 움직일 줄 모를 때, 비연이 느닷없이 땅에 엎드려 좌절모드로 땅을 치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타협을 향해 때 아닌 선전포고를 했다.

[신성제국/비연: 안 되겠네. 이현이 봐서 봐주려고 했는데 이번 성전 때 타협 다 죽여야겠네. 아, 이현이 빼고]

[마초: 어휴 제발 좀 그래라]

[베리베리: 길드 몰고 와서 전멸한 게 누구였더랔ㅋㅋㅋ]

[꼬마천재: 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그 와중에 나는 또 빼준단다. 아주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비연을 바라보던 이현은 ‘이현이는 내가 못 죽이지’라는 말이 다시 올라왔을 때에야 바보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루스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그래, 역시 여기가 제일 좋지. 이현은 루스의 옆구리에 안착한 후에야 다시 미소를 찾을 수 있었다. 옆에서 치고받고 싸우든 말든, 이현은 시종일관 루스의 옆에만 딱 붙어있었다. 어쩐지 시열의 캐릭이 다른 날보다 더 만족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앞으로 일주일. 이 날은 성전을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

[신성제국/흑백: 성전에서는 길드원들 위주로 파티를 맺어요. 중요한 건 여기서 힐러들은 힐 포지션을 포기하고 공격수로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현: 그럼 힐은 누가 해요?]

[신성제국/흑백: 각자 스스로 살아남아야 해요. 물약을 먹든, 회피기를 쓰든, 공적템으로 버티든, 성전에서는 각자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반대로 힐러도 격수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마공을 맞추고 가야 돼요]

마공은 마법공격력이다. 힐러는 물리공격력 계열이 아닌, 마법공격력 계열이라 캐스팅격수라고도 불렸다. 흑백의 말을 종합하자면, 성전에서는 힐러도 힐이 아닌 격수 노릇을 해야 한다는 건데 그러면 파티의 생존력은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는 소리였다.

[신성제국/흑백: 성전이 워낙 복잡하고 정신없어요. 뒤돌아보면 같은 팀이 벌써 죽어있고, 나도 죽어요. 물론 힐이 팀의 생존력을 좌우하기는 하는데, 성전에서는 이게 쓸모가 없어요.]

[이현: 그럼 상태 이상도 무시해요?]

[신성제국/흑백: 그건 큰 문제 없으면 되도록 풀어주면서 해요. 정화나 청명은 즉시 시전되는 스킬이니까 시전범위 안에 있는 팀원들이 상태 이상 걸렸을 때는 풀어주는 게 좋아요. 근데 의무는 아니니까 괜히 나서서 하지 않아도 다들 이해할 겁니다]

이현이 그간 힐러를 하면서 느낀 게 있다면, 힐러가 많은 희생을 자처하며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한다는 점에 있었다. 거의 본능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힐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이현: 살리고 싶으면 어떡해요?]

[신성제국/흑백: 이현씨. 우리 여명 길드가 왜 성전 참여 안 하는지 알아요?]

[이현: 이득이 없어서요?]

[신성제국/흑백: 그 말도 맞아요. 여명 길드 초창기 때는 성전에 줄곧 참여했었거든요. 근데 하다보니까 다들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여명은 성전에 참여 안 하기로 했습니다. 이건 직접 해봐야 아는 고충이에요. 힐러만이 느끼는 고충이고, 힐러만이 겪는 어떤 딜레마라고 할 수 있어요.]

딜레마라는 소리에 이현은 흑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러나 꼬집어 언급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직접 겪어봐야 분명히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현: 그럼 흑백님은 이번 성전 나오시나요?]

[신성제국/흑백: 나갔으면 좋겠어요, 안 나갔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말하면 거면, 백퍼센트 나온다는 거다. 이현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흑백을 흘겨봤다. 그 사이, 이현의 대답을 포기한 흑백이 웃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신성제국/흑백: 그때 가보면 알겠죠, 뭐ㅎ 그때까지 길드원들하고 전략 잘 짜고, 건강히 무사히 잘 나와요]

[이현: 네]

[신성제국/흑백: 성전 끝나고 다 같이 한 번 봐요. 시열이한테 말해 놓을 테니까 함께 봐요]

[이현: 네! 그때 꼭 봐요, 흑백님]

[신성제국/흑백: 씩씩하네]

그게 흑백과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더 이상 가르쳐 줄 게 없다며 돌아서는 흑백의 뒷모습이 몹시 아쉬워서 이현은 한참이나 그의 캐릭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실 성전에 대해 조언을 얻기 위해 부른 건데, 흑백은 각 길드마다 전술과 전략이 달라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말로 거절을 대신했다.

결론은 스스로의 역량대로 싸워야 한다는 소리였다. 순간이나마 의욕이 불타올랐다. 루스가 길드 메시지로 모두를 고성 안으로 호출한 것도 그때였다. 화면 위로 대자만 한 주황색 글이 떠올랐는데, 가만 보니 길드 마스터만 쓸 수 있는 호출 스킬이었다.

[길드/루스: 모두 고성으로 모이세요. 성전 일로 의논할 게 있습니다]

길드 부지 사냥터에서 이현은 재빨리 고성 안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대부분 포탈을 타고 왔는지, 고성 안으로 들어서자 포탈 근처에 길드원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길드/루스: 성전 참여 못 하는 사람은 미리 말씀하세요]

[길드/묘냥이: 파티는 어케 짤거임? 힐러님하고 확실님 들어왔으니까 새로 짜야 되지 않나?]

[길드/기토피아: 힐러님 우리쪽 보내라ㅋㅋㅋㅋ 내가 병아리는 꼭 지킨다]

[길드/신이내린캐: 야, 저놈 좀 강탈시켜랔ㅋㅋㅋ]

[길드/코코볼: 이번엔 반드시 내가 2조 파장 한다!]

[길드/백전승: ㅈ1랄들을 떠세요 다들ㅋㅋㅋㅋㅋ]

[길드/꼬마천재: 걍 다들 빠지시죠?ㅋㅋ]

[길드/잘살아보세: 왘ㅋㅋㅋ 너무하네ㅋㅋㅋ 나도 껴주라. 베리놈 빼고]

[길드/꼬마천재: 콜]

[길드/베리베리: ㅋㅋㅋㅋㅋ디질라고 환장을 하셨나]

[길드/기토피아: 나보다 무빙 느린 새1끼들 다 빠져랔ㅋㅋㅋ 이것들이 어디서 지금ㅋㅋㅋ]

[길드/신이내린캐: 저 상그지넘이 어디서 무빙드립을 치고 ㅈ1랄ㅋㅋㅋㅋ]

뭐 이리 개판이야. 이현은 길드창에 올라오는 어수선한 글들을 읽다 말고 캐릭을 움직여 루스를 찾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이 모여 있는 제일 안쪽에 루스가 버젓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의 옆으로 냅다 달려간 이현은 루스의 옆에 자리를 잡고 캐릭을 앉혔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가 끝나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길드/루스: 전원 출석이면 이번 파티도 5조로 나눠서 갑니다. 1조는 저를 포함해서 베리, 마초, 꼬마, 그리고 이현씨랑 확실님 이렇게 갈게요. 나머지는 알아서 짜고]

[길드/코코볼: 내가 2조 파장한다. 때려죽여도 이번엔 나다]

[길드/기토피아: 내가 3조 가마ㅋㅋ]

[길드/백전승: 그럼 난 이번에 4조로 ㄱㄱ]

[길드/신이내린캐: 이거 지금 나보고 5조를 하라는 거지?ㅋㅋㅋㅋ 어이없는 것들일셐ㅋㅋㅋ]

[길드/기토피아: 니가 이제껏 해먹은 걸 생각해라, 개넘의 자식아]

[길드/코코볼: 필요없고, 다 나를 찬양해라ㅋㅋㅋㅋ 드디어 출격조다!]

[길드/백전승: 2조 한 번 했다고 아주 오지넼ㅋㅋㅋㅋ]

[길드/신이내린캐: 아오, 병아리 넘겨라. 5조 된 것도 서러운데 힐링이라도 해야지, 이건 뭐 다 속이 시커먼 넘들 뿐이냐]

[길드/마초: 디지고 싶음?ㅋㅋㅋㅋ 5조는 방어나 오지게 하고 있으셔ㅋㅋ]

[길드/신이내린캐: 1조 넘들 안되겠넼ㅋㅋㅋ 버르장머리가 아주ㅋㅋㅋ]

[길드/베리베리: 아오, 성전 전에 함 떠야겠네ㅋㅋㅋㅋㅋ 어디 강림조한테 대를 들고 자빠졌어!]

[길드/기토피아: 자신 있음 다 덤벼라ㅋㅋㅋㅋ 피토하게 해주마, 상그지들아ㅋㅋㅋ]

[길드/백전승: ㅎㅎㅎㅎㅎㅎ 죄다 미치셨고만?]

[길드/꼬마천재: 어휴 새대가리들이 또 시작이네. 4조 얼렁 뒷정리나 해라]

얘들은 웃음이 나오나? 이현은 오가는 말 속에 자리한 ‘ㅋㅋㅋ’를 보며 질린다는 표정을 내지었다. 오히려 저렇게 나오니까 뭔가 더 살벌한 게, 금방이라도 싸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늘 있는 일인 듯, 루스는 중재조차 하지 않았다.

[길드/루스: 각자 편성된 조 포지션 팟원들한테 잘 알려주고 파장들은 알아서 위치랑 자리 기억해서 차질없게 준비하세요]

아무래도 각 조마다 맡고 있는 포지션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파티원들을 이끌고 잘 해내는 데에는 역시 파티장의 역할은 중요한 법이다. 지금 선정된 파티장들이 전부 타협의 중심인원들이니, 큰 걱정은 없었지만 성전 때도 이렇게 티격태격하는 건 아닌지 이현은 혼자 심각해졌다.

[길드/루스: 이현씨는 오늘부터 성전 날까지 ‘성역의 전장’ 요새로 가서 예행연습을 할 겁니다. 지리도 익히고, 포지션도 익혀야 해서 당분간은 던전이나 공적퀘를 못할 거예요]

[길드/이현: 네. 근데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길드/루스: 걱정 마요. 누구보다 잘 할 테니까]

[길드/꼬마천재: 힐러님이야 금방이지]

[길드/베리베리: 제가 잘 알려줄게여! 걱정마요]

[길드/마초: 확실이는 성전 많이 해봤다고 했으니까 포지션만 익히면 될 것 같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루스는 그 전쟁판에서 다른 길드원들을 방치하고 나와 버렸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루스를 잡지 않는 게, 아주 으르렁거리는 데 제대로 정신이 팔린 모양이었다. 덕분에 이현은 루스와 삼인방, 김성훈과 함께 베히아에 있는 ‘성역의 전장’으로 조용히 갈 수 있었다.

“하아, 이제 시작이구나.”

성역의 전장은 공중에 뜬 부유섬에 있는 전쟁터였다. 양쪽 진영 끝에 거대한 요새가 각각 있었는데, 한쪽은 신마족 요새였고, 한쪽은 신성족 요새였다. 양쪽 요새를 두고 펼쳐진 황무지에서부터 신마족과 신성족은 상대편 ‘강림’을 막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루스: 지금은 성전이 아니라서, 신성족 요새 쪽으로 가는 길에 결계가 쳐져 있을 겁니다. 성전때는 결계가 해제돼서 양 종족이 오가며 싸울 수 있어요]

루스의 말대로 지금은 황무지 한가운데 투명한 막이 생성되어 있었다. 그쪽으로 한번 가볼까생각하던 이현은 신마족 요새 안으로 들어가는 모두를 보고 냉큼 뒤따랐다.

[루스: 길은 여기서부터 기억하면 됩니다]

[이현: 네]

요새 안에는 이현의 팀 말고도 많은 유저들이 있었다. 모두 처음 하는 자기 길드원들이나 포지션 등을 정하기 위해 이현의 팀처럼 예행연습을 하러 온 것이었다. 그 틈 사이에서 혹여나 길을 잃을까 이현은 루스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자나 깨나 역시 믿을 건, 루스밖에 없었다.

***

삼 일간을 그렇게 성역의 전장을 오가며 코칭을 받았을 때였다. 늦은 밤, 게임을 끝내고 나온 이현은 문득 집에 가다 허전한 느낌이 들어 집 앞에 가만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요새 들어 시열이 많이 떠오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단단히 홀린 모양이었다.

결국 이현은 큰 결심을 하고 몸을 돌렸다. 밤 11시. 늦은 시각이었지만, 방금까지 게임을 같이 하고 있었기에 시열이 자고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가서 깜짝 놀래켜줘야지.”

혼자 실없이 웃으며 이현은 길가에 나와 택시를 잡고 시열이 사는 아파트를 외쳤다. 목청도 크다며 ‘허허’ 웃던 아저씨는 행복한 표정의 이현을 보고는 날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오밤중이라 차도 별로 안 막혀서인지, 이현이 시열의 집 근처에 도착한 건 15분 후였다. 시열의 아파트로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산 이현은 봉지를 흔들며 시열의 집으로 향했다.

띵동—

언제든 오라며 시열이 만들어 준 스페어 카드로 공동현관을 돌파한 이현은 25층에 내리자마자 바로 보이는 현관문의 벨을 눌렀다. 잠자코 기다리자, 잠시 후 인터폰 너머로 시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은 인터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마자 냉큼 외쳤다.

[누구세….]

“시열씨!! 저예요!”

[…이현씨?]

“네!”

인터폰 너머로 시열의 놀란 듯 얼떨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래켜주려고 한 의도가 제법 먹힌 모양이었다. 이현은 시열이 문을 따줄 때까지 시종일관 싱글벙글 웃으며 있었다. 문은 예고도 없이 불쑥 열렸다. 놀란 시열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현은 그 너른 품에 불쑥 파고들었다.

“놀랐죠? 깜짝 놀래켜주려고 왔어요.”

“그랬어요? 착하네.”

이현의 뺨을 살살 쓰다듬으며 시열이 속삭이듯 말했다. 다정함이 느껴지는 말이 가슴을 따뜻하게 데웠다.

“일단 들어와요, 이현씨.”

“우리 같이 아이스크림 먹어요, 네?”

“알겠어요, 들어와요.”

“네!”

이현이 냉큼 시열의 집안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이현은 봉지를 풀어헤치고 테이블 위에 사온 것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큰 아이스크림과 커피 4개가 줄줄이 나왔다.

“이현씨, 밤에 위험하니까 보고 싶으면 연락해요. 데리러 갈 테니까.”

부엌에서 수저를 들고 온 시열이 이현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현은 아이스크림 뚜껑을 열고 한입 퍼먹은 후에야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열씨 힘들잖아요.”

“생각해줘서 기특하긴 한데, 안 힘듭니다.”

이현씨 만나는 게 힘들 리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은 시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늘한 눈매가 다정함을 담으려 애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어… 시열씨도 같이 먹어요.”

이현이 시열의 소매를 끌어 잡고 제 옆에 앉혔다. 그러다 문득, 이현은 곤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시열의 모습을 알아챘다. 아이스크림을 보는 시선이 어딘지 탐탁치가 않았다.

“시열씨 아이스크림 싫어해요?”

“음, 좋아합니다.”

“아닌 것 같은데….”

“단지, 단 건 잘 못 먹어서요.”

단 거? 지금 단 걸 못 먹는다고 한 거야? 이현은 입을 살짝 벌리고 제법 놀란 얼굴을 했다. 아니, 시열을 만나면서 처음 안 사실이었다. 이렇게나 무관심했나, 하는 생각이 얼핏 스치면서 이현은 죄책감에 조금 미안해졌다.

“…몰랐어요.”

“말을 안 했으니까요. 신경 쓰지 말아요.”

가만 생각해보니, 이현은 시열의 취향을 몰랐다. 뭐가 좋고 뭐가 싫은지도 몰랐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대화조차 제대로 나눠보지 않았다. 아주 당연한 것인데도.

“시열씨 뭐 좋아해요?”

시열은 대답 대신 이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선에 옭아매진 기분이었다.

“이현씨.”

“…네.”

“저는 이현씨가 이렇게 다가와 주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여기서 욕심내면 끝이 없을 것 같아요. 나, 이현씨 그렇게 순수하게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서.”

귀 끝이 화끈거렸다. 이 말에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지 모르겠다. 이현은 두 손으로 귀를 감싸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할 말은 잊지 않았다.

“그래도… 시열씨에 대해 알고 싶어요.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답답하고, 또 어차피 앞으로 알게 될 거 좀 더 빨리 알면 더 좋은 거고…. 그리고….”

“…네.”

“그, 그냥 알고 싶어요.”

알고 싶다. 이유야 많지만, 이현은 뒷말을 생략했다. 사실 아직까지도 시열에 대한 감정의 기준은 몹시 모호했다. 좋아한다는 게 이런 건가, 싶다가도 시열의 태도를 보면 너무 큰 격차를 느꼈다. 시열이 드러내는 건 사랑이 분명한데, 이현이 느끼기에 저가 드러내는 건 사랑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시열씨에 비하면 아직 많이 부족하고 작지만…. 그래도, 좋아요. 그냥… 좋다는 것밖에는 표현을 못 하겠어요.”

호감과 호의에 먼저 취했다. 어떤 전환점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서서히 물들었다. 시열과 함께할 때마다 느꼈던 감정을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상대에게 취해가는 건 설레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시열씨에 대해 좀 더 많이… 알고 싶어요.”

이 감정이 더 발전해 시열의 감정과 같은 크기가 되면, 그땐 제가 놓지 못할 지도 몰랐다. 물론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현은 그게 그리 멀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만큼 이현의 안에 시열은 차츰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물들고, 취해가고 있었다.

“이현씨.”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턱 끝에 간지러운 손길이 닿았다. 흠칫 놀란 이현이 저도 모르게 움칫하자, 턱 끝을 스친 손이 이현의 목덜미를 감고 잡아당겼다.

“아….”

쪽, 하고 입술이 닿았다. 가벼웠던 키스는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입술을 가르고 파고든 혀가 낯설게 입안에 스며들었다. 놀라서 떠는 이현의 허리를 당겨 안고 시열이 뒷목을 잡아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탄성 같은 한숨이 목울대를 타고 흘러나왔다.

“하아….”

얽히는 혀가 뜨거웠다. 이현은 제가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아니, 잊었다. 깨달았을 땐 이미 시열의 품 안에서 헐떡이며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흐느끼듯 숨을 내쉬는 이현의 입술 위로 시열은 한참이나 제 애욕을 쏟아냈다.

“하아, 숨… 흐으….”

호흡하듯 내뱉은 말은 시열에게 삼켜졌다. 뺨을 나른하게 쓰는 손길은 온화하기 그지없는데,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탐하는 행위는 제법 사나웠다. 마치 집착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현씨.”

“!”

옷 안으로 차가운 손이 파고들었다. 허리를 훑고 올라간 손은 이현의 등을 여기저기 쓸다가 그대로 힘을 주어 꽉 끌어안았다. 이현의 목에 시열의 입술이 닿은 것도 그때였다. 습한 숨이 쇄골을 간지럽혔다.

시열은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그렇게 이현을 안고 있었다. 간혹 목을 핥거나 허리를 쓰다듬긴 했지만, 그 이상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현씨와 이런 걸 하고 싶은 겁니다.”

시열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기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현이 어깨를 웅크리자, 시열이 피식 웃으며 이현의 등을 다독였다.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얼핏 피식 웃는 웃음 속에 한숨이 섞인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너무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도 많이 참고 있는 거니까.”

“…그… 시열씨….”

“네.”

이현의 귓가에 달래는 듯한 입맞춤이 쏟아졌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킨 이현은 시열의 품안으로 파고들며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태도로 얼기설기한 말을 내뱉었다.

“…그, 싫은 건 아닌데요…. 아니, 하기는 할 건데… 당장 마음의 준비가 안 됐기도 하고…. 모, 모르기도 하니까 그게, 물론 시열씨가 알려주면 되긴 하는데…. 그게 또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 돼요? 잘 할게요….”

고개를 슬쩍 들고 바라보는 모습이 마치, 고양이가 눈을 올망졸망 뜨고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열은 어쩔까, 하는 표정으로 이현을 내려다보다가 이현의 턱을 살짝 들고 다시 입을 맞췄다. 다짜고짜 혀부터 집어넣자 이현이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그 혀를 얽고 빨던 시열은 이현이 귀 끝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때에야 입술을 떼고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알았어요, 천천히 갈게요.”

“…진짜요?”

“네.”

불안하게 바라보는 이현의 눈가에 입을 맞춰주며 시열은 염려 말라는 듯 그 등을 나른하게 쓸어주었다. 금세 이현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현의 고백에 어떤 큰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천천히’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는 건지, 이현은 그날 시열의 품에서 잠들 때까지 바짝 붙어 그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집요하게 물어댔다.

물론 시열이 곱게 대답해 준 건 아니었다. 대답해 줄 때마다 이현의 뺨이며 입술에 짧은 키스를 쏟아냈다. 그런데도 뭐가 그리 믿음직한지, 이현은 늦은 밤까지 시열의 품에서 웅얼거리다 까무룩 잠들었다.

문득 잠들기 전, 이현은 이마에 간지러운 숨이 닿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잘 자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

시열의 집과 제집을 오가며 격주로 지내다 보니, 벌써 주말이 성큼 다가왔다. 성전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성전은 모든 직장인들을 배려해서인지, 항상 일요일 날 진행되었다. 그래서인지 성전 전날은 참여인원으로 늘 떠들썩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 성전 참여인원이 두 종족을 합해 2190명에서 마감되었으니, 이번 성전은 또 어떨지 벌써부터 관심이 뜨거웠다.

[길드/루스: 그럼 참여자는 모두 내일 늦지 않게 준비하세요]

[길드/다이뜨자: 늦은 새1끼들은 알아서 자진탈퇴나 해랔ㅋㅋㅋㅋ]

[길드/마초: 너나 제발 늦지 마라]

[길드/루스: 각 팀 포지션 잘 분배해서 내일 보죠. 이번에도 이깁시다]

[길드/베리베리: 오예!]

[길드/신이내린캐: ㅋㅋㅋㅋㅋ성전하면 타협아니겠냐]

[길드/백전승: 맡겨만 주시라ㅋㅋㅋ다 발라주마]

[길드/꼬마천재: 타협 만세 한 번 외쳐 줘야짘ㅋㅋㅋㅋ]

여기저기서 타협 만세가 쏟아졌다. 그걸 보던 이현은 저도 한 번 해볼까, 해서 소심하게 모두가 외칠 때 가운데 껴서 ‘만세!’하고 외쳤다.

[길드/코코볼: 힐러님 봐랔ㅋㅋㅋㅋ 타협 다 됐어ㅋㅋㅋㅋ]

[길드/기토피아: 내가 힐러님 봐서 이번에 기록 경신해준다]

[길드/잘살아보세: 우리 삐약님 성전 첨인데, 최다득템 하게 해줘야 않겠냐?ㅋㅋㅋ]

[길드/백전승: 이야, 경신하면 또 나지]

[길드/신이내린캐: ㅈㄹ들을 해라 아주ㅋㅋㅋㅋ]

웃으며 디스를 해대는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와 이현은 그간 ‘성역의 전장’을 오가며 익힌 길을 떠올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오가며 익힌 덕분인지, 보지 않아도 세세히 떠올랐다. 루스가 이현에게 다가와 말을 건 것도 그때였다.

[루스: 이현씨,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어요]

[이현: 오늘 시열씨네 가도 돼요?]

[루스: 데리러 갈게요]

[이현: 네!]

이현은 벌써부터 신이 나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요새 시열의 집에 자주 가서 많은 시간을 보내서인지,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뭐를 좋아하고 뭐를 싫어하는지, 혹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등 이제는 표정이나 말투만 들어도 짐작이 가능했다. 물론 그건 이현이 시열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여 얻은 결과였다.

“내가 꼭 성전은 이기고 만다.”

나 아직 다 기억한다, 이 얍삽한 놈들아. 타협을 싸잡아 욕했던 신성족 유저들을 떠올리며 이현이 이를 갈았다. 반드시 이겨 그놈들의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러니까… 한 번 만 더 가서 지리 좀 익혀야지.”

이현은 시열이 오기 전에 성역의 전장을 한 번 더 돌기로 했다. 아직 아웅다웅 떠들고 있는 길드원들 몰래 빠져나와 마을로 이동한 이현은 곧장 포탈을 타고 베히아에 있는 성역의 전장으로 향했다.

성역의 전장은 많은 유저들로 붐비고 있었다. 심지어는 결계로 나눈 신성족 영역 너머에도 유저들이 상당했다. 간혹 시비가 붙어 PVP를 뜨는 유저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유저들은 포지션을 정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신성제국/비연: 이현아!! 이현아!!!!]

성역의 전장을 쭉 돌다 우연히 결계가 나뉜 전장에 다다랐을 때였다. 이현은 저를 부르는 외침을 보고 화면을 돌려 결계 너머를 돌아보았다. 결계 너머에서 한 유저가 폴짝폴짝 뛰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신성제국/비연: 이현아 뭐해! 이쁘게 왜 혼자 돌아다녀ㅋㅋㅋ]

[신성제국/비연: 아니지, 위험하게지]

[신성제국/비연: 난 내부조에 투입됐는데 이현이도 내부조야? 아, 루스인가 리스인가 하는 새1끼가 강림자니까 이현이도 그 팀에 편성됐나??]

[신성제국/비연: 그럼 난 외부조로 바꿔야겠다ㅋㅋㅋ 어차피 우리 길드는 이번에 달리기 안 하니까 내가 가서 놀아줄게]

쟤는 왜 자기팀 포지션을 다 까발리고 그러냐. 이현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비연을 보다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 뒤에서 비연을 까내리는 그의 길드원들의 글이 채팅창을 가득 채우는 게, 아무래도 나름 중요한 작전 포지션이었나보다.

“오기만 해봐라, 필살기부터 날려주마.”

제일 먼저 비연을 죽이기로 다짐한 이현은 전장을 한 바퀴 쭉 돌고서야 신마족 강림요새로 재빠르게 달려 들어갔다. 마지막 예행이었다. 루스가 알려준 길을 세 번이나 돌고 나서야 이현은 마을로 돌아와 내일 있을 성전을 위해 장비점검을 시작했다.

결전을 앞둔 날치고 아직 실감이 안 나서인지 그다지 떨리지도 않았다. 실전을 앞둔 마지막 밤이었다. 이로써 모든 준비는 끝났다.

***

상쾌한 아침이었다. 오랜만에 단잠에 빠져 잤더니,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열의 품으로 슬금슬금 파고든 이현은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슬쩍 비볐다. 시열과 함께 에르덴에 대해 떠들던 어젯밤이 또다시 그리워졌다.

“오늘도 자고 가야지.”

“나야 좋은데, 이현씨는 좀 위험할 것 같은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이현의 허리가 강하게 당겨졌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흠칫 놀란 이현이 올려다보자 시열의 몽롱한 시선이 이현에게 닿았다. 아직 깨지 않은 그늘 진 눈동자가 이현을 담고 있었다.

“왜요…?”

“자꾸 이렇게 귀엽게 굴어서요.”

내가 언제 귀엽게 굴었다고…. 이현은 괜히 시열의 시선을 피하며 우물거렸다. 이현의 이마에 한숨 같은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웃음이 스며든 키스였다.

“일어날까요.”

늘 말로는 잡아먹을 것처럼 굴어도, 시열은 조금씩 보폭을 줄여 다가왔다. 가끔 그 보폭이 클 때도 있었지만, 괜찮다. 지금의 시열이라면.

“배고프죠? 시간 있으니까 밥해줄게요.”

“네!”

이불을 걷고 재빨리 일어나자, 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못 들은 척 이현은 씩씩하게 방을 나서며 시열을 불렀다. 앞으로 두 시간 뒤인, 11시에 성전이 시작된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이현은 다가오는 시열의 손을 꼭 잡았다.

시열이 해준 아침을 먹고 이현은 곧장 에르덴에 접속했다. 아직 1시간이 남았는데도 이미 길드원들은 전원 모여 있었다. 이현과 루스가 나란히 들어오자 여기저기서 반가운 인사가 쏟아졌다.

[길드/베리베리: 왔다!! 드디어 왔다고!]

[길드/다이뜨자: 엇 둘이 동시에 왔네ㅋㅋㅋ]

[길드/꼬마천재: 됐고, 뒤에 오는 새1끼들 버려라]

[길드/마초: 6시부터 와있었다고 아주 개오바를 떨어대넼ㅋㅋㅋㅋ]

[길드/신이내린캐: 늦을 것 같음 말해라, 루스야ㅋㅋㅋㅋ 길드는 내가 잘 살펴주마]

[길드/코코볼: 신캐가 길마 되면 다 같이 해외원정 좀 돌잨ㅋㅋㅋㅋ 우리 길드 원칙을 저 넘이 잊은 것 같은데, 재산 탕진 좀 시켜줘야겠네]

[길드/잘살아보세: ㅋㅋㅋ개웃기넼ㅋㅋㅋㅋㅋ]

[길드/베리베리: 콜!! 콜콜!]

얘들은 어째 맨날 싸우는 것 같냐. 이현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길드원들을 쭉 훑어보다가 문득 평소와 다른 외향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망토 같은 것을 등 뒤에 착용하고 있었는데, 팀마다 색이 달랐다.

“이현씨, 거래할 테니까 받아요.”

“네? 아, 네!”

이현은 시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면 위로 떠오른 거래수락 창을 보고 즉시 확인을 눌렀다. 시열이 준 건, 길드 내에서 쓰는 망토였다. 거래 후 이현도 망토를 착용했는데, 가장 눈에 띄는 은빛 망토였다. 가만 보니 베리와 마초, 꼬마와 김성훈도 같은 색의 망토를 착용하고 있었다.

“각 조마다 망토 색이 달라요. 1조는 은색인데, 대부분 은색은 내부조로 편성돼서 강림하는 달리기 팀입니다.”

달리기 팀이란 요새의 내부에서 달리기 시합을 벌여 강림 영역에 가장 먼저 도착해야 하는, 길드 내 가장 딜이 세고, 빠르고, 컨이 좋은 유저들을 일컬었다.

[길드/마초: 크으... 간만에 차니 간지 쩌네]

[길드/베리베리: 오예! 단체 스샷 ㄱㄱ]

[길드/다이뜨자: 스샷 좋짘ㅋㅋㅋㅋ]

[길드/꼬마천재: 말 나온 김에 찍게 다 모여봐라]

[길드/살잘아보세: 스샷ㅋㅋㅋㅋ추억돋네ㅋㅋㅋㅋ]

[길드/백전승: 찍을거면 좀 멋지게 좀 찍어봐라. 또 좀비처럼 찍어대지 말고]

[길드/기토피아: 그때 좀비컨셉 제안한 거 누구냐, ㅅㅂ]

[길드/신이내린캐: 그때 타협넘들 죄다 미1쳤다고 소문 쫙 났었짘ㅋㅋㅋ]

[길드/다이뜨자: 내가 그때 ㅅㅂ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냐?ㅡㅡ 얼굴을 못 들고 다녔다, 이 개객기들아]

[길드/코코볼: 알았으니까 좀 모여봐라, 닭넘들아]

하도 모이라고 으름장을 놓는지라, 이현도 루스를 따라 무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옹기종기 모인 길드원들이 멋진 포즈를 취한다고 가지고 있는 모션을 방출하는데, 이현은 나중에 흑역사가 탄생할까 그냥 얌전히 서 있었다. 그래도 처음 찍어보는 길드 스샷인지라, 이현도 들뜨기는 마찬가지였다.

[길드/기토피아: 각 팀마다 영상 잘 찍고 반납해라. 형님이 잘 편집해서 올려주마]

[길드/루스: 이제 슬슬 이동할 테니까 파장들 팀원들 잘 챙겨서 이동하세요]

루스의 말을 끝으로 길드채팅창에는 더 이상 잡담이 떠오르지 않았다. 각자 관리하고 있는 파티채팅을 이용하는지, 수긍하는 모션을 끝으로 모두 베히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동하죠, 이현씨.”

“네.”

슬슬 성전이 다가오니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현은 짧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시열의 뒤를 따라나섰다. 역시나 ‘성역의 전장’은 수많은 유저들로 붐비고 있었다. 성전은 최다 규모의 PVP이벤트 콘텐츠라 참여 인원수가 많았는데, 양 종족의 밸런스를 위해 관리자가 직접 나서 어느 정도 인원이 차면 입장을 제한시켰다. 아직 규정된 컷트라인까지 닿지 않아서인지, 이현이 도착했을 땐 입장이 제한되지 않은 상태였다.

[파티/루스: 강림 달리기 시작되면 확실님과 마초가 먼저 가서 길 뚫을게요. 어글은 뒤로 넘기고 열쇠보스 먼저 찾아서 제보해주세요]

[파티/확실한놈: 네]

[파티/마초: 맡겨만 주시라]

‘강림’은 각 종족 길드순위 20위권 안에 있는 길드에게만 우선권이 주어지는 아주 중요한 퀘스트였다. 20위권 내에 속한 길드들은 강림의 기회를 얻기 위해 같은 종족 길드끼리 소모전을 하는데, 이를 가리켜 유저들은 ‘달리기’라고 칭했다. 성전이 시작되기 15분 전에 정해진 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회랑이 열리면 네임드가 가진 강림방의 열쇠를 얻어 먼저 강림방에 도착해야 하는 일종의 달리기 시스템이었다.

[파티/루스: 1번 회랑문 앞으로 모이세요]

시열의 말에 바글바글한 인원을 뚫고 모두는 강림방으로 갈 수 있는 회랑의 문 앞에 섰다. 시열이 회랑의 문을 클릭해 길드 이름과 길드 공적, 길드 마스터만 아는 고유 인식번호를 입력하는 동안 모두는 캐릭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을 풀고 있었다. 10분 뒤면, 이제 회랑의 문이 열릴 것이다. 그때, 미친 듯이 달려 열쇠를 가진 네임드를 찾아 죽이고 재빨리 강림방에 도달해야 했다.

“이현씨, 성전 할 동안은 신경 못 써줄 거예요.”

입력을 마쳤는지, 시열이 이현을 돌아보며 얘기했다. 이현은 냉큼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근데 저 못하면 어떡해요?”

“음, 글쎄요. 혼내줄까요.”

이현이 헉,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열의 모습을 보니 어째 농담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농담입니다, 이현씨. 못해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거짓말 아니죠?”

“네. 뭣하면 내가 이현씨 몫까지 다 할 테니까.”

그 말에 이현이 다시 슬금슬금 시열에게 다가왔다. 의심 어린 시선이 아주 잠시 시열에게 꽂혔다. 시열이 다시 한번 속삭이듯 말했다. 귀 끝이 화끈거리고 간질간질한 말이었다.

“반드시 이겨줄게요.”

이현은 괜히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열이 이현의 손을 조심히 잡아떼고 귓가에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춰주었다.

“그러니까 신경 못써주더라도 조금만 참고 있어요.”

“…네.”

화끈거림은 내내 이현을 따라다녔다. 화면을 돌아보자 방방 뛰고 있는 캐릭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현은 괜히 캐릭을 움직이며 총총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화면 위로 카운트다운이 떠올랐다.

[파티/루스: 준비]

[파티/확실한놈: 넵]

[파티/베리베리: 오키]

[파티/꼬마천재: ㄱㄱ]

[파티/마초: 이기자!]

[파티/이현: 열심히 할게요]

마지막으로 이현이 채팅창에 글을 올렸을 때였다. 화면에 ‘출격’이란 말이 떠오르고 회랑길이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방방 뛰던 김성훈과 마초가 동시에 무서운 속도로 튀어 나갔다.

주문서를 도핑한 이현은 재빨리 루스의 뒤를 따라나섰다. 길은 좁은 통로 길을 시작해 점차 넓어지는 구조로 나타났다. 가는 중간에 스턴이나 넉백에 걸린 몹이 방치된 걸 보아, 앞서 간 두 명이 어글을 뒤로 맡기고 간 모양이었다. 루스는 방치된 몹을 잡아가며 둘의 제보가 올 때까지 그들의 흔적을 뒤쫓았다. 그렇게 개미굴 같은 회랑의 통로를 여기저기 헤치며 준보스 방을 2개 지나쳤을 때였다. 3번 방에 막 들어서던 때, 마초로부터 제보가 들어왔다.

[파티/마초: 찾음]

[파티/마초: 5번 방 지나고 나오는 갈림길 오른쪽 방]

[파티/마초: 얼른 와라]

파티창을 힐끗 보자 마초의 피가 훅훅 달고 있는 게 보였다. 이현은 대상을 마초로 지정하고 힐을 준비했다. 그리고 마초가 있는 방에 도달하자마자 재빨리 힐을 넣어 마초의 피를 채워주었다. 그 때문인지, 열쇠보스 몹의 어글이 즉각 이현에게 튀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군!]

트롤 같이 생긴 게 검을 높이 들고 뛰어오는데, 그 모습이 제법 살벌했다. 예전이라면 무서워 벌벌 떨며 물러났겠지만, 지금의 이현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신컨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였다. 이 세상에 흑백보다 무서운 건 없었다. 고로 트롤 따위 전혀 무서울 게 없었다.

“구워삶아 주마!”

—‘주신의 격전’을 사용해 신의 하수인 ‘렙조드’에게 3209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잽싸게 근거리 스킬을 쏘자, 황소처럼 달려오던 렙조드가 공격을 맞고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그를 향해 공격이 쏟아졌다. 힐과 딜을 병행하며 파티원들을 보조하던 이현은 렙조드가 쓰러지고 열쇠 루팅이 정해지자마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쇠를 먹은 자는 시열이었다. 이제는 이 개미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강림방을 찾아야 했다.

[파티/루스: 나와 이현씨는 직진, 나머지는 알아서]

시열의 말에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한 명씩 그쪽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최종 방까지는 총 9개로 그중에서 랜덤으로 생겨나는 문을 찾아야 했다. 소모전은 분명했지만, 다른 길드도 지금쯤 엄청나게 헤매고 있을 테니 불공평한 시스템은 아니었다.

“이현씨, 9번째 방에서 갈림길 나오면 흩어지도록 하죠.”

“네.”

시열의 말대로 마지막 9번째 방으로 가는 길에서 갈림길이 나왔다. 이현은 왼쪽, 시열이 오른쪽을 맡고 찢어졌다. 이현은 달려드는 몹들의 다리를 묶고 일단 달려가는 데에만 온 전력을 쏟았다. 좁은 통로를 지나 나온 거대한 방 끝에는 붉은 보석이 박힌 흰색 철문이 있었다. 마우스로 클릭해보자, ‘강림방’이라는 표기가 떠올랐다.

“찾았어요!”

“네, 잘했어요.”

[파티/루스: 9번째 방으로 향하는 곳 갈림길 왼쪽 길로]

[파티/확실한놈: 넵]

[파티/베리베리: 예압]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는 데에는 순식간이었다. 먼저 나타난 시열이 재빨리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자 화면 위로 거대하게 클리어 시간이 떠오르고, 획득한 공적이 캐릭 별로 표기되었다. 그 다음은 [강림길드—타협은 없다]라는 문구가 화려한 임팩트와 함께 떠올랐다.

[도략궁: 아 이번엔 진짜 간발의 차이였어]

[신신당구: 아놔ㅋㅋㅋㅋ 쟤들은 진짜 왜 저렇게 빠르냐]

[쵸쵸비: 다행인줄 알아라. 강림해서 뭔욕을 먹으려고]

이현이 막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알림창을 없애고 강림방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일반 채팅창 위로 2등을 차지한 길드원들의 한탄이 쏟아졌다. 이현이 나온 입구 옆문에서 나온 ‘부랑자들’이라는 길드원들이었다.

[또도비: 어차피 안 될 줄 알았닼ㅋㅋㅋ]

클리어 시간을 보니 타협이 4분 02초였고, 부랑자가 4분 20초였다. 아깝다면 아까운 차이라 할 수 있었다. 2등을 기점으로 여기저기 일렬로 늘어져 있던 방에서 하나둘, 다른 길드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20개나 되는 방이 다 열리고서야 ‘달리기’는 중지되었다.

“이현씨, 성전 시작되면 전 강림준비 들어갈 겁니다. 15분 동안 침입에 대비해야 하니까 문 쪽 잘 주시하면서 도핑 계속 돌리고 있어요.”

“네.”

주변을 돌아보자 모든 길드가 자신들이 나온 문 쪽을 주시하며 경계하고 있었다. 성전까지 남은 시간은 약 5분 정도다. 1분 전부터는 카운트다운이 들어가는데, 그때 시열은 방 중앙에 있는 아티팩트 장치 위로 올라가 강림준비에 들어가야 했다. 그때가 바로 성전의 시작이었다.

“근데 적은 우리가 나온 문으로 다 와요?”

“대부분은 그렇게 오는데, 화면 돌려서 천장 보면 뚫려있을 거예요. 컨 되는 유저들은 바람길 타고 건너와서 위에서도 내려와요.”

바람길은 베히아 상공에 흐르는 바람으로, 섬과 섬을 오갈 수 있는 이동수단 중 하나였다. 시작점에서 타면 쉽게 이동할 수 있긴 한데, 문제는 도중에 타는 게 정말 어렵다는 것이다. 이 성역의 전장 위에도 바람길이 흐르기는 하는데, 시작점이 아니라 웬만한 컨이 아니고서야 타고 내려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위에서 내려오는 것도 잘 주시해야 해요.”

“…네.”

성전에 목숨 건 사람들이 참 많은가 봐. 이현은 착잡한 표정으로 뻥 뚫린 천장을 보다 다시 화면을 내려 문을 주시했다. 제발 다들 그냥 올바르게 문으로만 와라. 짧은 기도를 하며 이현은 카운트다운이 들어간 화면을 예리하게 주시했다.

[파티/베리베리: 힐러님! 걱정 말고 제 옆에만 있어여!]

[파티/꼬마천재: 너나 잘해]

[파티/마초: 병아리 때리면 골로 보내야지, 캬컄ㅋㅋㅋ]

[파티/꼬마천재: 힐러님은 힐 안줘도 되니까 부담갖지 말고요]

“이현씨는 위험하다 싶으면 뒤로 빠지고, 힐로 버티세요. 나머지는 잘 살아남을 거니까 무리해서 힐 할 필요 없어요.”

좋게 말하고 있지만, 결론은 힐을 주지 말라는 소리였다. 이현은 뭐라 말하려다 흑백의 말을 떠올리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딜레마’라고 했었다. 아직 직접 겪어보지 않아 뭐라 말할 순 없었지만, 힐을 바라지 않는 삼인방의 모습에서 이현은 원인 모를 섭섭함을 느꼈다.

“갈게요, 준비해요.”

잠깐 한눈팔고 있던 사이, 화면 위로 [성전 개시]라는 양피지 모양의 거대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그리고 양피지가 사라지자마자 화면 위로 새빨간 시간 알림 표기가 올라왔다. 루스가 강림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었다. 14분 59초. 14분 58초. 점차 시간이 줄고 있었다.

[파티/확실한놈: 야, 풀도핑하고 일단 뒤쪽으로 빠져있어. 하늘 잘 주시하고 만약 문쪽에서 적들 들어오면 움직이면서 원거리 딜 계속 넣어]

[파티/이현: ㅇㅇ]

[파티/꼬마천재: 그리고 힐은 즉힐만 최대한 사용하고, 만약 우리 중 누가 죽어도 힐러님 잘못 아니니까 괜히 자책하지 말고요]

[파티/이현: 네]

[파티/마초: 일단 루스 지키는 게 목적이니까, 루스 공격받게 되면 그넘부터 처리ㄱㄱ]

이미 밖에서는 외부 조로 편성된 팀이 출격해, 달려드는 신성족을 썰어내고 있을 터였다. 성전이 시작되면, 양 종족을 가로막고 있는 결계가 사라져 각 종족은 상대방의 영역으로 침범이 가능했다.

그리고 결계가 사라진 때야말로, 성전의 최대 진가가 발휘되었다. 유저들은 이때를 가리켜 다시없을 전율의 시간이라고 칭하곤 했다. 서로를 향해 벌떼처럼 달려드는 모습이 전쟁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할 정도로 웅장했기 때문이었다.

중계되는 화면으로 타 서버의 성전을 봤던 이현도 그 장면에서는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다. 그 정도로 긴장과 고조를 느꼈다. 이 맛에 모든 유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성전에 참여하나 했다. 처음으로 사람들이 성전에 열광하는 이유를 납득 했던 순간이었다.

[파티/마초: 신캐가 입구 뚫렸다고 조심하란다]

[파티/베리베리: 거참 못하시네그려]

[파티/꼬마천재: 끝나고 보자고해]

외부 팀으로부터 제보를 받은 건지, 주변에 있는 다른 길드원들도 외침으로 신성족 침입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이현은 파티원들에게 다시 버프를 걸어주고 하늘을 주시했다. 시열이 강림 준비에 들어간 지 딱 5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파티/꼬마천재: 온다]

꼬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도 한쪽이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옹기종기 모여 달려드는 붉은 점이 마치 개미 떼 같았다. 아처들이 하늘을 향해 활을 쏘아대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화면을 확대해보자 언제 온 건지, 바람길을 타고 온 신성족들이 위에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파티/마초: 위 조심]

뭐야 이거. 이거야 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밀고 들어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성족이 위고 아래고 떼를 지어 쳐들어왔다. 이때부터 신성족과 신마족의 베고 찌르는 난투전이 시작되었다.

“괜찮아요. 타깃 지정하고 한 명씩 차근히 죽여요. 피 달면 바로 즉힐쓰고 대상전환해서 공격자 찾고요.”

“어, 어… 악! 막 덤벼요!”

이현의 몸이 화면을 따라 좌우로 움직였다. 주위를 빙빙 돌며 개떼처럼 달려드는 적을 따돌린 이현은 비교적 한산한 곳에 와서야 숨을 고르고 근처에 있는 적을 타켓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실 제대로 하고 있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되는대로 마구잡이로 스킬 버튼을 누르며 정신없이 구르고 뛰었다.

그래도 스스로 제법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 이름이 외침과 함께 터져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외침은 한 유저가 강림방 위에서부터 전쟁터가 된 방 한가운데 내려오기까지 계속되었다.

채팅창을 가득 차지하는 이름은 당연하게도, 이현의 이름이었다.

[신성제국/비연님의 외침: 이현아~!]

[신성제국/비연님의 외침: 이현아 어딨니]

[신성제국/비연님의 외침: 이현이 벌써 죽은 거야? 그러게 타협 같은 새1끼들 말고 나한테 오라니까. 타협 이 개1새1끼들은 대체 뭐했기에 이현이를 죽이고 있어]

아니, 저건 이 형국에 혼자 외치기를 하고 앉았어! 이현은 이를 바득바득 갈다, 옆에서 들려오는 탁탁거리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시열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돌아본 순간 후회해야 했다.

“…….”

시열이 살벌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검지로 책상을 탁탁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은 한창 외치기를 하고 있는 비연에게 향해 있었다. 어딘지 살기가 감도는 눈빛이었다. 이현은 혹여 불똥이라도 튈까, 모른 척 조용히 자신의 게임 화면으로 되돌아왔다. 이럴 땐 그냥 죽은 듯 얌전히 있는 게 최고였다.

화면 안에는 여전히 포기를 모르는 비연이 외치기를 하며 이현을 찾고 있었다. 이현은 진지하게 그냥 끝날 때까지 숨어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물론 그 생각은 비연의 외침 속에 금방 묻혀버렸다.

[신성제국/비연님의 외침: 찾았다! 이현이 살아있었네? 근데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ㅋㅋ]

누가 저놈 좀 안 죽여주나? 이현은 저를 돌아보는 몇몇 신성족을 피해 다시 주변을 빙빙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번 정도 돌았을까, 난데없이 이현의 앞으로 비연이 끼어들었다. 식겁한 것도 잠시, 이현은 분노와 짜증을 담아 비연을 향해 광역기를 후려갈겼다.

“그래, 너 오늘 잘 만났다.”

불꽃이 솟아오르는 화려한 임팩트와 함께 비연과 그의 길드원들의 피가 순식간에 훅 깎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현은 무기를 꺼내 들고 즉각 비연을 향해 덤벼들었다. 아니, 돌진했다.

[신성제국/비연: 이현아 잠깐! 잠깐 기다ㄹㅣ봐ㄱ]

[이현: 잠깐 같은 소리 하네!]

놀랍게도 그때부터 긴장이 풀리고 주변 보는 눈이 생겨났다. 언제 도망 다녔냐는 양, 이현은 날다시피 비연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비연은 내도록 ‘이현이한테 손대는 새1끼들 다 죽을 줄 알아.’라며 자기 길드원들을 겁박했다. 그 때문인지, 블랙블 길드 중에 이현을 건드는 자들은 없었다.

“저걸 들어주는 길드원이나, 말하는 놈이나.”

[신성제국/비연: 이현아 착하지? 진정하자 응?]

[이현: 그럼 같이 덤비던가]

[신성제국/비연: 죽더라도 내가 이현이는 못 때리지]

[이현: *같은 소리 하네!]

[신성제국/비연: 이현아... 하. 이쁘게 뭐 하는 짓이야]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본 적도 없으면서 걸핏하면 예쁘단다. 이현은 시전속도 주문서를 재빨리 도핑하고 딜이 높은 뇌전 마법을 캐스팅했다. 그걸 본 비연이 식겁해서는 헐레벌떡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스킬 딜존을 벗어나지 못하고 뇌전의 일격에 치명상을 입게 되었다.

“좋았어!”

훅 깎이는 비연의 피를 보며 이현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쭉쭉 깎이던 비연의 피가 어느 기점에서 갑자기 만피가 되었다. 누군가가 힐을 넣어준 것이었다.

[신성제국/흑백: 이야, 이현씨 인기 많네]

이현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비연의 어깨 너머로 황금빛 망토를 두른 유저들이 떼로 몰려오는 게 보였다. 스태프 대신 해머를 들고 신마족을 후려잡는 모습을 보니 아주 작정을 하고 온 듯했다. 그 선두에는 익숙하다 못해 질리게 봐왔던 캐릭이 있었다. 최고의 스승이자 최대의 적이라 할 수 있는, 지금 현재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여명 길드의 길마 ‘흑백’이었다.

[신성제국/흑백: 어디, 우리 이현씨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볼까요ㅎ]

[신성제국/비연: 우리 이현이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저세상이다]

[신성제국/흑백: 기껏 살려줬더니 하는 소리 봐라]

이현이 울상을 지었다. 힐끗 강림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8분이나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흑백과 비연을 붙들고 열심히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건데, 벌써부터 기가 빨리는 게 상대해줄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게다가 두 사람을 보아하니, 이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왜 지들끼리 싸우고 있어….”

여기서 이렇게 싸움 구경을 하느니, 구석에 숨어 지나가는 유저들 뒤치기나 하면서 얍삽하게 공적이나 취득하는 게 훨씬 나았다. 생각을 굳힌 이현은 서로 아웅다웅하는 흑백과 비연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베리와 마초, 꼬마가 뒤에서 두 사람을 덮쳤을 때, 잽싸게 줄행랑을 쳤다.

[마초: 한눈파는 거 보소ㅋㅋㅋ]

[꼬마천재: 이 새1끼들은 왜 남의 길드 힐러한테 찝쩍대고 난리냐]

[베리베리: 부러우면 니들도 한 명씩 영입하든가]

[신성제국/비연: 타협새1끼들이 가만 보니 간사하게 다굴질을 해. 두질라고]

[신성제국/흑백: 좀 **봐라]

불평하는 것치고 비연과 흑백은 삼인방의 공격을 지나치게 잘 피하고 있었다. 이현에게 맞았던 건 장난이었다는 듯, 회피하는 모습이 무슨 신들린 듯 날렵했다. 아처가 괜히 회피의 신으로 불리는 게 아니란 걸, 이현은 비연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

[신성제국/흑백: 이현씨, 스승이 한 수 가르쳐 준다는데 도망가서야 쓰나]

흑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줄행랑을 치는 이현의 앞으로 여명 길드원들이 하나둘 막아서기 시작했다. 해머를 빙빙 돌리며 위협하는 모습이 무슨 보스몹보다도 더 무서웠다. 이현은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재빨리 방향을 바꿔 도로 흑백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신성제국/흑백: 이현씨 참 열심히도 뛰어오네]

저건 덤비는 게 더 미친 짓이야. 이현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제가 비굴한 게 아님을 스스로에게 열심히 피력했다. 그래, 여기서는 차라리 젓가락을 들고 흑백에게 덤비는 게 더 나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저도 해머나 하나 준비해 놓는 건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어 와 이현은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그래도 이왕 덤비는 거 장렬하게 대항하자 싶어서 이현은 비장한 마음으로 법봉을 꺼내 들었다. 타켓팅의 대상은 흑백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해머를 들고 쫓아오던 힐러들이 이현에게 마법 스킬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안 돼! 회피 스킬…! 악, 맞았어!”

이현이 오두방정을 떨며 펄쩍 뛰었다. 시열의 존재는 잊은 지 오래였다. 난리를 치던 이현은 회피기를 사용해 캐릭을 앞으로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캐릭이 개구리처럼 두 손을 쭉 뻗어 몸을 굴렸을 때였다. 새까만 망토를 두른 웬 까마귀 집단이 이현을 쫓던 힐러집단을 뒤에서 한꺼번에 덮쳤다.

[신이내린캐: 이 새1끼들 봐라ㅋㅋㅋ]

[코코볼: 인간적으로 삐약이는 건들지 말라고 했다]

[다이뜨자: 여기 다 와있었고만ㅋㅋㅋㅋㅋ]

[백전승: 와낰ㅋㅋㅋ 왜 다 여와서 ㅈㄹ들이냐ㅋㅋㅋㅋ]

[기토피아: 떼로 덤벼드는 거 봐라]

[잘살아보세: 양심은 있냐, 흑백아?ㅋㅋㅋㅋ]

여명의 뒤를 노린 이들은 각 팀의 파장을 맡고 흩어졌던 타협의 길드원들이었다. 분명 2조와 3조는 출격조라 들었던 것 같은데, 왜 죄다 여기 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지금 타협이 무슨 원수라도 만난 모습으로 여명을 밟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엔 기습에 당해 맞고 있던 여명도 나중에는 하나둘 반격을 시작해, 주변은 금세 초토화가 되었다. 화려한 스킬이 난무하는 그 틈에서 이현만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

아무도 이현을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이현은 손가락을 꼼질거리다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타협의 틈에 섞여 여명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신성제국/비연: 와, 다들 너무하네. 이현이하고 놀려고 했더니]

[마초: 아주 추종자 납셨넼ㅋㅋㅋㅋ]

[꼬마천재: 작작 좀 해라 ㅅㅂ]

[베리베리: 우리랑 놀기도 바쁘다 ㅅ꺄]

[신성제국/비연: 나도 껴주면 좋겠는데]

[신성제국/흑백: 쟤 좀 제발 죽여봐라]

이현이 열심히 쟁판(전쟁터)에게 뛰고 있을 동안, 뒤에서는 삼인방이 흑백과 비연을 상대로 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며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잘 피하고 있던 비연이 동귀어진을 한답시고 자기 길드인 블랙블까지 끌어들이자, 쟁판은 금세 3개의 길드가 얽힌 희대의 싸움판으로 전락해 버렸다. 아주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베리베리: ㅋㅋㅋㅋㅋ이 무슨 상황]

[마초: 대환장파티ㅋㅋㅋㅋㅋ]

[신성제국/블블: 다들 그냥 죄다 미쳤가지고ㅋㅋㅋ]

[신성제국/렉가이: 와낰ㅋㅋㅋ 타협 이 시키들 뭐냐 대체ㅋㅋㅋ]

[신성제국/비타코: 생존력 봐라ㅋㅋㅋㅋ미쳤엌ㅋㅋㅋㅋ]

환장하는 싸움판에 끼어든 블랙블 사이에서 ‘ㅋㅋㅋㅋ’섞인 채팅이 쏟아졌다. 다굴은 기본이요, 열심히 때리다 뒤돌면 칼 맞는 이 상황이 뭐가 그리 재밌다고 웃는지,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현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정말 대단한 게, 이런 상황 속에서도 다들 죽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슨 수로 살아남는 건지 의아함을 넘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대단하네.”

실로 대단했다. 서버 내에 내로라하는 놈들의 실력이 이 정도인가 싶어, 감탄밖에 안 나왔다. 이현이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현이 공격이라도 받으면 귀신같이 나타난 삼인방과 타협이 그 유저를 총공격해 떼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이현은 점차 외따로 떨어졌다.

아니, 나도 좀 껴달라고. 무서움은 어느새 외로움으로 변해 있었다. 이러다 혼자 살아남아 또 다시 메인 타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불안해졌다. 안 그래도 자게에서 저를 신컨으로 몰고 가는데, 여기서 혼자 살아남으면 아주 루스를 뛰어넘는 귀재가 나타났다고 소문이 날지도 몰랐다.

그, 그럼 포스 짜고 잡으러 올지도 모르는데. 이현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이현의 걱정을 간파라도 한 듯, 갑작스레 화면에 포스 신청이 들어왔다. 가만 보니 강림을 준비하는 루스 대신 이현이 파티장이 되어 있어 이현에게 신청이 들어온 것이었다.

[길드/잘살아보세: 다들 포스ㄱㄱ]

이현은 잠시 망설이다 포스 신청을 받아들였다. 그와 동시에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 화면에 5개나 되는 파티가 작게 떠올랐다. 모두 20개가 넘는 버프목록 아래 자리한 피가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어….”

다들 어떻게 버티나 했더니, 온갖 버프와 물약, 회피 스킬로 생존기를 쓰며 연명하고 있었다. 저게 가능한가 싶어 빤히 쳐다봐도 이론으로만 와 닿을 뿐이었다.

그래도 두 길드를 상대로 싸우기엔 타협도 버겁기는 한 모양이었다. 점차 승기가 여명과 블랙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현도 열심히 적의 뒤를 노리며 공격해봤지만, 상대가 힐러들이라 금방 생명력을 채우는 탓에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 난데없이 싸움판 한가운데 ‘ㅎㅎㅎ’가 도배되기 시작했다.

[기토피아: 왜 끝이 없냐]

[신이내린캐: ㅎㅎ]

[코코볼: ㅎㅎㅎㅎ]

[잘살아보세: ㅎㅎㅎㅎㅎ]

채팅을 친 자는 타협의 길드원들이었다. 이현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저건 분명 힐을 달라는 표시였다. 분명했다. 저 ‘ㅎㅎㅎ’ 때문에 초반에 욕먹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부아가 치미는데, 또다시 그런 상황을 반복할 순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이현이 공적을 포기하고 힐을 하기 시작한 건.

이현은 즉각 스킬바를 힐스킬로 바꾸고 여기저기에 힐을 넣기 시작했다.

—‘빛의 기도’를 사용해 신마제국의 ‘코코볼’의 생명력을 2,690만큼 회복하였습니다.

—‘치유의 성운’을 사용해 신마제국의 ‘잘살아보세’의 생명력을 2,100만큼 회복하였습니다.

이현은 포스 파티 창을 확대해 옆에 펼쳐놓고 캐릭을 일일이 클릭하며 힐을 주었다. 처음엔 간에 기별도 안 가게 차더니, 쿨이 될 때마다 광역힐과 도트힐을 꾸준히 넣자 간당간당하던 길드원들이 피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시작했다.

[신성제국/흑백: 이현씨 먼저 죽여야 하나]

[마초: 우리부터 죽이고 나불거리시라]

[베리베리: 봤냐? 봤어?! 힐 들어온다!!!!]

[꼬마천재: 하... 니들이 얼마나 못했음 하다하다 힐을 다 주겠냐, ㅅ발넘들아]

[기토피아: ㅋㅋㅋㅋㅋㅋ병아리 땀흘리넼ㅋㅋ]

[잘살아보세: ㅋㅋㅋㅋㅋㅋ 파닥파닥 열심히 힐 하는 거 봐랔ㅋㅋㅋㅋ]

[코코볼: 크으, 이래서 다들 막둥이 막둥이 그러는 거고만ㅋㅋㅋㅋ]

[신성제국/흑백: 아주 이뻐 죽을 기세들이네]

누군 힐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누구는 떠드느라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현은 괜히 힐을 줬나 싶은 생각이 괘씸함과 함께 피어올랐다. 그냥 확 다 죽여 버릴까. 그런 생각으로 씩씩대며 힐을 하고 있었더니 강림 대기시간이 어느덧 4분 앞으로 좁혀졌다.

4분이면 버틸만 했다. 물론 그런 이현의 생각은 흑백과 비연을 필두로 여명과 블랙블이 ‘성역스킬’을 쓰기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스킬 중에도 필살기라 불리는 성역스킬이 여기저기서 쏟아지자 안정적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던 타협이 점차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싸우고 있던 타 길드 신마족 힐러들이 돕겠다고 힐을 주기는 하는데, 힐량이 딜 데미지를 못 따라가고 있었다. 열심히 힐을 하던 이현도 곧 한계를 마주하게 되었다.

[길드/기토피아: 성역스킬 있는 사람 지금 써라]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타협도 성역스킬로 여명과 블랙블에게 맞서기 시작했다. 성역스킬은 한 번 쓰면 쿨타임이 최소 30분 이상이어서,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필살기였다. 그러나 타협에 비해 상대편의 숫자가 꽤나 많아, 성역스킬로 덤벼도 전적으로 불리한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숫자에 밀린 타협 길드원들은 승기를 잡지 못한 채 하나 둘 죽기 시작했다. 사망자가 절반을 넘어가자 이현은 힐을 중단하고 부활을 넣어주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채 한 걸음을 떼지 못하고 우뚝 멈춰야 했다.

[길드/꼬마천재: 힐러님. 일단 거기 있어요]

[길드/잘살아보세: ㅇㅇ 움직이지 맙시다]

방해 되려나. 이현은 주변 눈치를 보며 기죽은 모습으로 ‘네’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가만히 있자니 왠지 모를 죄악감이 들어서, 가까이에 죽어 있는 길드원을 소환해 살리고 다시 힐을 했다.

그럼에도 길드원들이 죽는 건 끝끝내 막을 수가 없었다. 남은 시간은 3분 남짓이다. 다른 길드 유저들이 루스에게 가는 신성족을 막고 있긴 했지만, 타협이 죽으면 블랙블이나 여명이 곧장 루스를 공격할 게 뻔했다. 잠시 고민하던 이현은 제 성역 게이지를 확인했다.

‘고결한 성운’을 쓸 수 있는 성역 포인트는 4천이었다. 지금 이현이 가진 게이지 포인트는 3천 8백 정도 되었다. 딱 1명만 죽이면 된다.

이현은 즉시 피가 간당간당한 적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초가 신성족 유저 한 명을 열심히 바르고 있었다. 거리를 가늠하자, 다행히 딜존에 포함되는 거리였다. 이현은 곧장 무기를 꺼내 들고 장거리 스킬을 캐스팅했다. 그리고 마초가 극딜을 시전했을 때, 그 틈에 제 스킬을 끼어 넣었다.

—신성제국의 ‘소라비’님을 쓰러트렸습니다.

—1,930의 공적을 획득하였습니다.

한 명을 죽이자 예상대로 성역포인트가 꽉 차올라 순식간에 4천으로 채워졌다. 이현은 고민하지 않고 즉시 성역스킬인 ‘고결한 성운’을 발동시켰다. 전투창에 성역스킬명과 함께 그 아래 스킬 효과가 떠올랐다.

—성역스킬 ‘고결한 성운’을 사용하였습니다.

—20미터 안에 있는 사망한 아군 전체를 부활시키고, 넉백, 스턴, 밀림으로부터 저항하고 속성방어, 물리공격력, 물리방어력을 강화시킵니다. 또한, 아군 전체 체력의 20%만큼 20초 동안 2초 간격으로 체력이 회복됩니다. 체력이 회복될 동안 10초간은 10,000만큼의 데미지를 무력화 할 수 있는 실드가 생성됩니다.

[코코볼: 헐 지금 성운 들어온 거?]

[기토피아: 성운 들어왔다ㅋㅋㅋㅋ]

[잘살아보세: 퍼뜩 부활해라 새1끼들아]

[꼬마천재: 성운 받고도 죽는 **들 내가 다 **다]

역시. 이현은 하나 둘 되살아나는 포스 파티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범위가 ‘아군’인 건 역시 파티에 국한되지 않았다. 고결한 성운은 이현의 파티원 뿐 아니라 연맹을 맺은 포스원 전원을 되살리고 버프를 부여해 주었다.

비록 20초뿐이었지만, 재정비를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현은 다시 승기를 회복하고 날뛰는 길드원들에게 버프와 힐을 넣어주며 후방을 지원했다. 그렇게 20초간 한 자리에 서서 열심히 길드원들을 보조했을 때였다. 20초가 지나고 고결한 성운이 끝났을 때, 이현의 캐릭터 옆으로 어떤 스킬창이 반짝이며 떠올랐다.

“…아.”

이현의 입술 사이로 작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눈동자가 반짝이는 스킬창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처음이었다. 그건 한 번도 발동한 적 없던 악세사리 세트 옵션인 스킬 랜덤 리셋 효과였다.

이현이 시선이 포스 파티창으로 향했다. 오락가락하는 길드원들의 피가 아슬아슬한 경계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현은 더 생각할 것 없이 성역 포인트를 풀로 채워주는 ‘성역수’를 마시고 캐릭 옆에 깜빡거리는 스킬을 마우스로 클릭했다.

달칵—

이현의 눈이 한 번 깜빡였다. 마우스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는 생각이 스친 순간, 상태창 위로 성역스킬 발동 글이 떠올랐다.

—성역스킬 ‘고결한 성운’을 사용하였습니다.

—20미터 안에 있는 사망한 아군 전체를 부활시키고, 넉백, 스턴, 밀림으로부터 저항하고 속성방어, 물리공격력, 물리방어력을 강화시킵니다. 또한, 아군 전체 체력의 20%만큼 20초 동안 2초 간격으로 체력이 회복됩니다. 체력이 회복될 동안 10초간은 10,000만큼의 데미지를 무력화 할 수 있는 실드가 생성됩니다.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성역스킬이 발동된 직후, 길드원 사이에서 의문 어린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초: 읭?]

[베리베리: ??]

[꼬마천재: 설마;]

[신이내린캐: 뭐야?]

[코코볼: 뭐지;;]

[이현: 악세 리셋 효과에요]

이현의 말에 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러나 잠시 후 날고뛰는 등, 아주 난리가 났다. 튀어나오는 말은 죄다 찬양 섞인 말들뿐이었다.

[마초: 축캐보소ㅋㅋㅋㅋㅋㅋ]

[잘살아보세: 왘ㅋㅋㅋㅋ어느 길드 힐러냨ㅋㅋㅋㅋ아주 예뻐 죽겠넼ㅋㅋㅋㅋㅋ]

[백전승: 흑백아 봤냐?ㅋㅋㅋㅋㅋ 이 정도닼ㅋㅋㅋㅋ]

[기토피아: 이거지ㅋㅋㅋㅋ]

[베리베리: 저거야 말로 진정한 추진력이짘ㅋㅋㅋㅋㅋ]

이 정도면 이기겠지…? 이현은 주변 상황도 잊고 아주 잠깐 속 편한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생각은 여명과 블랙블이 이현을 타깃으로 잡고 달려들기 시작하면서 비명과 함께 사라졌다.

[신성제국/흑백: 그냥 이현씨부터 죽여야겠네]

“악, 오지 마! 저리 가!”

이현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적들이 일제히 이현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깔려있던 지뢰와 덫이 발동된 것도 그때였다. 화려한 폭발음과 함께 이현에게 달려오던 신성족 유저들이 주변에 깔려있던 덫과 지뢰에 걸려 공중포박 상태가 되었다. 모두 타협 길드의 거너와 아처의 작품이었다.

“뭐, 뭐야.”

상황을 모르는 이현만 혼자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중포박에 걸린 여명과 블랙블을 본 타협은 환호를 터뜨리며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다들 마치 이때만을 기다린 듯한 모습들이었다.

[꼬마천재: 담부턴 땅 좀 보고 다녀라]

[잘살아보세: 하, 허리 휘는 줄 알았네...]

[베리베리: 오예, 공중포박!]

[기토피아: 다들 아주 제대로 걸리셨넼ㅋㅋㅋㅋㅋㅋ]

[코코볼: 워째 한 놈도 안 빠지고 죄다 걸리냨ㅋㅋㅋㅋㅋ]

[신이내린캐: 와낰ㅋㅋㅋ 병아리 위력 보소ㅋㅋㅋㅋㅋㅋ]

[불사조: ㅋㅋㅋㅋ진짜 개재밌넼ㅋㅋㅋㅋㅋ]

이것 때문에 아까 움직이지 말라고 했던 건가. 이현은 전방 20미터 안에 떠 있는 적들을 열심히 후려패고 있는 길드원들을 존경스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열세에 몰린 것 같아보였는데, 확실히 경험자들은 달라도 뭐가 다르긴 했다.

[신성제국/비연: 이것도 못 피하냐? 걍 다 나가 디져라]

대단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이현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전부 공중속박에 걸린 줄 알았건만, 걸리지 않은 자가 한 명 있었다. 언제 나타난 건지, 비연이 이현의 뒤에서 기웃거리며 팀킬을 시전하고 있었다.

[신성제국/비연: 이현이 잘 살아 남았네ㅋㅋ]

“네 덕분이다, 이 새끼야!”

이현은 즉시 몸을 돌려 비연을 향해 법봉을 휘둘렀다. 뒤로 훌쩍 빠진 비연이 텀블링을 하며 피할 동안, 이현은 뇌전 스킬을 캐스팅했다. 길드원들의 애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베리베리: 잘 가라]

[마초: 장렬하게 가시겠네]

[기토피아: 혼자 사느라고 애썼다, 비연아]

[꼬마천재: 그러게 작작 좀 하지 그랬냐]

[백전승: 간만에 레전드 하나 나오겠네]

이현의 고개가 갸웃 틀어졌다. 뇌전 스킬의 효과를 기대하는 것 치고 지나치게 과장된 반응들이었다. 이현이 캐스팅 하던 뇌전 스킬은 비연이 딜존을 벗어난 탓에 발동되지 못하고 취소되었다. 거리가 멀어 사용할 수 없다는 시스템 알림이 스피커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그걸 본 이현이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을 때였다. 뒤로 텀블링을 하던 비연의 머리 위로 거대한 장검이 무서운 기세로 내리꽂혔다. 어마어마하게 큰, 거인의 무기 같은 검이었다. 그 검은 슬쩍 뽑히는가 싶더니 다시 쾅 하고 비연이 있던 곳으로 내리꽂혔다.

그와 동시에 화면 위로 거대한 글씨가 먹물처럼 번져들었다. 안 보려야 안 볼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문구였다.

—신마제국의 ‘루스’가 성전의 강림에 성공하였습니다.

—신성제국의 ‘일격백’이 성전의 강림에 성공하였습니다.

“어어!”

강림! 이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양쪽 종족 다 강림에 성공한 것이다. 이현은 본능적으로 시열의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고 작은 타겟팅 초점이 화면 여기저기에 떠 있는 게 보였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타겟팅 초점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게, 여간 어려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강림이 되어 논타겟팅 시스템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어지럽게 돌아가는 시열의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이현은 도로 제 게임 화면으로 돌아왔다. 화면을 돌려 뒤를 보자, 기본 캐릭의 20배 정도 되는 크기의 전사가 비연에게 검을 꽂은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끼긱—

소름 끼치는 소음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 순간, 거대한 검이 다시 뽑혔다. 하늘 높이 치켜든 검 아래에는 사망한 비연이 돌무더기 사이에 엎어져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았던 검은 다시 무서운 속도로 비연이 있는 곳으로 내리꽂혔다.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주변 일대의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비단 소리만 대단한 게 아닌 듯, 강림방에 있던 모든 신성족이 그 일격에 전부 목숨을 잃고 쓰러졌다. 광역기 공격이었다.

[꼬마천재: 워워... 살벌하시네]

[베리베리: 오예ㅋㅋㅋㅋㅋ]

[신이내린캐: 밖으로 ㄱㄱ]

시열의 집념 어린 공격은 몇 번이나 계속되었다. 공격을 할 때마다 비연이 있는 자리만 내리꽂는 게, 아무래도 말은 안 해도 비연한테 맺힌 게 많은 듯했다. 시열이 공격을 멈추고 움직이기 시작한 건, 보다 못한 타협 길드원들이 작작하라고 소리쳤을 때였다.

[꼬마천재: 힐러님 이쪽으로ㄱㄱ]

[마초: 명당자리로ㅋㅋ]

[백전승: 이제 시작이다]

[이현: 다른 사람들 살리고 가면 안 돼요?]

[베리베리: 강림자가 강림한 이후부턴 죽은 유저들은 부활 못함요]

[마초: 부활 넣어도 못 살아남]

[꼬마천재: 이제부턴 강림자들 싸움이라]

이현은 죽어있는 길드 유저들을 뒤로하고 재빨리 삼인방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을 점프하며 따라가자 어느새 강림방 꼭대기 위에 도달했다. 광활한 전장이 한눈에 보이는 요새의 꼭대기였다.

[백전승: 여기가 명당이지ㅋㅋㅋ]

[마초: 캬! 신성족 강림자 일격백이네ㅋㅋㅋㅋ]

이현이 위로 올라올 동안 요새의 내부에서 빠져나온 건지, 요새 앞에는 거대한 검을 양손으로 쥔 시열이 장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상대 강림자 역시 광활한 전장의 끝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시열과 다른, 양손에 쌍검을 거머쥔 어쌔신이었다.

여기저기 살아남은 유저들이 재빨리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던 강림자들은 전장 한복판이 깨끗이 비워지자마자 서로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와….”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광경이 펼쳐졌다. 달려들던 두 강림자의 검이 허공에서 쾅, 하는 소음과 함께 맞닿았다. 이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두 강림자의 결투를 바라보았다. 너무 거대해서 느리게 보이는 광경이 오히려 엄청난 데미지의 무게감을 전해주었다. 비단 이현만의 생각은 아닌지, 모두 쥐 죽은 듯 입을 다문 채 강림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쾅!!

스피커를 타고 들려오는 소리에 어깨가 깜짝 떨렸다. 느리게 보였던 공격은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두 강림자 모두 논타겟팅 시스템에 익숙해져 속도를 올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속도는 어느 기점부터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마초: 시작이네]

루스의 공격속도가 상대 어쌔신보다 빨라졌다. 물론 쌍검을 쓰는 어쌔신이 두 번 공격할 때 루스는 한 번밖에 공격하지 못했지만, 점차 공격을 막고 반격을 하는 경지까지 컨을 끌어올렸다. 어쌔신이 스킬을 쓴다고 잠깐의 틈이라도 보이면 루스는 방패로 무기를 바꾸고 데미지를 막았다. 그런 다음엔 방패로 후려쳐 틈을 만들고 다시 검으로 무기를 교체해 연계 공격 패턴을 넣었다.

[기토피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기토피아: 개 잘해]

사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현은 저게 잘 하는 건지 아닌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옆에서 몇 개나 되는 타겟팅 초점을 완벽하게 맞춰 공격하는 시열을 보고 있자면, 잘한다는 말로 포장할 수 없는 수준인 건 알겠다.

쿠웅—!

어쌔신이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비틀 무너지는 어쌔신의 가슴 위를 루스의 거대한 검이 베고 지나갔다. 화면 위에 표시된 어쌔신의 피가 훅 달았다. 루스가 다시 검을 치켜든 사이, 어쌔신이 냉큼 뒤로 백스텝을 했다. 루스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쳤다.

아깝다. 이현은 으, 소리를 내며 아쉬워했다. 화면을 최대한 확대하자, 뒤로 물러난 어쌔신의 검이 푸르게 빛나는 게 보였다. 스킬을 쓸 모양인 듯했다. 어쌔신을 향해 달려드는 루스의 검도 붉은빛에 휩싸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저 스킬은 강림자들이 쓸 수 있는 궁극기 스킬로 논타겟팅 초점 전부를 게이지 바 안에 들어오게 해야 성공하는 스킬이었다. 만약 하나라도 실패하면 스킬은 발동되지 못하고, 성공했다 치더라도 정확한 범위에 넣지 못하면 공격력이 낮았다.

[꼬마천재: 둘 다 성공했네]

[마초: 공격력에서 판가름 나겠고만]

꼬마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두 강림자 모두 잠시 후 화려한 스킬을 쏟아냈다. 검을 높이 치켜들고 내리긋는 루스와 몸을 숙여 검을 횡으로 휘두르는 어쌔신의 모션이 동시에 발동되었다. 공격력은 루스가 한 수 위였다. 그러나 상대 역시 만만치 않았는지, 루스의 신형이 뒤로 쭉 밀려났다.

[베리베리: 오, 연습 좀 하고 왔나본데]

응원은 못 해줄망정 상대방 실력에 감탄이나 터뜨리고 앉았다. 이현은 삼인방을 뒤로하고 속으로 열렬한 응원을 외쳤다. 이겨라. 제발, 제발 꼭 이겨라.

이현의 바람이 닿았는지, 뒤로 쭉 밀려났던 루스가 다시 검을 고쳐 잡고 어쌔신에게 달려들었다. 검 위로 붉은빛이 다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또 스킬을 시전할 모양이었다.

“이겨라, 이겨라….”

속으로 중얼거린다는 게 그만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이현은 잽싸게 입을 틀어막고 몸을 웅숭그렸다. 물론 시선은 화면에 고정한 채로 말이다. 혹시 방해될까 싶어서 시열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쾅—!

다시 검이 맞닿았다. 그러나 맞닿은 검을 털어내듯 어쌔신을 뒤로 밀친 루스가 곧장 궁극기 스킬을 발동시켰다. 처음보다 빠른 속도였다. 그새 또 손에 익은 건지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뒤로 밀려난 어쌔신도 재빨리 스킬을 발동시켰지만, 먼저 타켓팅을 잡은 루스가 빨랐다.

[베리베리: 오예!]

[마초: 캬, 이거지]

높게 치켜든 검이 빠른 속도로 어쌔신의 어깨를 시작해 사선으로 내리그어졌다. 어마어마한 데미지가 들어간 걸로 봐선, 타겟팅 초점 전부 한가운데에 정확히 명중한 듯 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루스는 재빨리 검을 고쳐 잡고 어쌔신이 서 있는 지면에 검을 쾅 내리꽂았다.

비연을 죽였을 때 썼던 광역기 공격이었다. 그 일격으로 타겟팅이 빗겨난 건지, 어쌔신의 스킬이 도중 캔슬 되었다. 캔슬의 여파로 어쌔신은 스턴에 빠져 헤롱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루스는 다시 궁극기 스킬을 시전했다. 붉은 검이 아득히 검은 배경 위로 횃불처럼 떠올랐다. 살별처럼 늘어지는 빛이 향하는 곳은 어쌔신의 가슴팍이었다. 검 끝이 유황색 빛을 달고 사선으로 그어짐과 동시에 붉은 빛은 소멸되었다.

그리고 양손에 검을 쥔 거대한 그림자가 땅 위로 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

순간 어떤 희열이 이현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든 게 정지된 듯한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찰나였다.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신마족이 만세를 부르며 튀어나왔다. 이현의 주위에 서서 관망하고 있던 유저들도 일제히 펄쩍펄쩍 뛰어대기 시작했다.

화면 위로 황금빛 양피지가 화려한 이팩트와 함께 떠오른 건 그 직후였다. 그 안에는 루스의 공적 순위와 함께 ‘신마제국’의 승리에 대한 문구가 축하 메시지와 함께 떠올라 있었다. 그 아래에는 이번 성전에 가장 많은 공을 기여한 길드의 공적 순위표가 게재되어 있었다.

“이현씨.”

울컥 차오른 감정에 이현이 말도 못 하고 화면만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시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의 시선이 그제야 시열에게 향했다. 웃고 있는 시열의 모습을 보자 어째서인지 눈물이 차올랐다.

“시열씨….”

“왜 울어요.”

이현이 시열에게 달려든 건, 시열이 두 팔을 벌리며 이리오라고 속삭였을 때였다. 이현이 목을 꽉 끌어안고 매달리듯 안기자 시열이 이현의 몸을 번쩍 들어 책상 위에 앉혔다.

“이게 뭐라고 울어요, 이현씨.”

“이게 막… 져도 되는데, 지면 아깝고…. 시열씨가 이겼으면 좋겠는데, 진짜 너무 어려워 보여서 옆에서 방해될까 봐 말도 못 하고…. 그냥 막 뭔가 울컥 올려오는데, 이런 건 처음이라서… 모르겠어요.”

“횡설수설이네.”

피식 웃으며 시열이 이현의 등을 툭툭 토닥였다. 그러고는 울지 말라며 뺨이며 입술이며 위로의 키스를 해주었다.

“누굴 자꾸 홀리려고….”

우는 것도 이렇게 예쁩니까. 시열이 이현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어딘지 장난기가 스며든 억양이었지만, 반대로 더없이 진지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현은 눈물을 삼키며 애써 대답했다.

“…안 홀려요.”

“그래요?”

시열이 고개를 기울여 이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바람같이 가벼웠던 키스는 시열이 이현의 허리를 당겨 안은 순간, 달뜬 숨과 함께 깊어졌다. 움찔 떨어대는 이현의 혀를 얽고 제 숨을 밀어 넣던 시열은 이현의 몸이 녹진하게 풀려 제 품 안으로 미끄러졌을 때에야 입술을 떼고 물러났다.

“하아….”

“이현씨.”

이현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시열을 쫓아 올라갔다. 느슨하게 풀린 눈매가 시열의 시야 안에 들어왔다. 그 눈가를 엄지로 살살 문지르며 시열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건, 집착을 닮은 그의 바람이었다.

“우리 함께 살까요?”

이현의 눈이 깜빡거렸다. 몇 번 깜빡이던 눈동자가 끝내는 크게 뜨였다. 당혹감이 서린 표정에는 많은 게 드러났다. 혼란과 당황, 그리고 희미한 기쁨까지.

이현이 안정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벌겋게 변한 눈을 문지르며 이현은 시열을 괜히 한 번 흘겨봤다. 그러나 종래엔 시열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리듯 말했다.

“…생각해볼게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다. 서늘한 시열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제 허리를 꽉 끌어안은 이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시열은 고개를 기울여 이현의 귓가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많이… 좋아합니다, 이현씨.”

이현의 귀 끝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한참 뒤, 이현은 어렴풋한 목소리로 시열의 말에 화답해 주었다. 비록 작고 짧은 말이었지만, 제법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저도요.”

시열의 향기가 손끝에 뜨겁게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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