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힐러의 현생기
“그래서 늦을 거 같다?”
“…네.”
이현은 시열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딘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바라보는 시열의 시선이 침묵과 함께 이현을 옭아맸다. 무섭긴 했지만, 이현에게도 그런대로 사정은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오늘이 바로 김성훈과 함께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친구들을 보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시열을 만나기 이전부터 꾸준히 봐왔던 이들이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현 역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한 번 빠지면, 의리가 없다는 말로 시작해 사람을 아주 역적으로 몰아가는지라 도저히 빠질 엄두가 안 났다.
이현은 결국 시열에게 협상을 시도했다.
“3시! 아니, 2시까지 들어올게요!”
“5시에 만난다고 했던 거 같은데.”
“…1시는 안 될까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현의 모습이 꼭 애원하는 것만 같았다. 시열은 뒤늦게야 피식 웃으며 이현의 볼을 약하게 꼬집었다.
“술 적당히 마시고, 들어올 때 연락해요. 데리러 갈 테니까.”
“진짜요? 저 그럼 늦어도 돼요?”
“친구는 보게 해줘야죠.”
손가락을 꼼질 거리는 이현의 귓가에 시열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한쪽 눈을 감고 간지러움을 참던 이현은 시열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들이밀며 파고들었다.
“아무한테나 가서 에르덴 하자고 안 할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린데, 괜찮습니다.”
이현은 기대조차 안 한다는 듯 말하는 시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잔잔한 미소가 어째서인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이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 미소를 애써 외면했다. 이유야 어쨌든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모임에 나가야 했다. 고로, 오늘은 쥐죽은 듯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시열과 함께 산 지도 어느덧 두 달이 다 되었다. 후끈한 여름의 계절에서 말도 살찐다는 시원한 가을로 접어들었다. 얇은 옷이 두꺼워질 동안, 이현도 시열의 마음에 소리 없이 취해갔다. 깨달았을 땐,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에게 흠뻑 젖어든 후였다. 그의 애정과 호의가 이현의 마음속에 깊게 스며든 것이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다 기억날 정도로 또렷한 건 아니었다. 같은 일상, 함께하는 아침은 오늘이 어제인 듯, 어제가 오늘인 듯 변함없는 하루를 선사했다. 어쩌면 지루할 지도 모를 일상이지만, 이현은 시열의 존재 하나로 매일을 다른 날처럼 살았다.
“이제 오냐?”
시열의 허락을 맡자마자 도망치듯 나온 이현이 향한 곳은 김성훈의 집이었다. 반팔차림으로 집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는 김성훈에게 이현은 청춘이다, 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뭐야, 씻지도 않았잖아.”
“시간도 남았는데, 뭘 그리 서둘러.”
그래놓고, 나한테는 겁나 일찍 오라고 그 난리를 쳤단 말이지? 이현의 눈매가 금세 뾰족해졌다. 뭐라 버럭 소리치려는 이현에게 김성훈은 미리 사 놓은 미적지근한 캔커피를 건네며 고개를 까딱였다.
“춥다, 들어가자.”
“긴팔이나 입고 말해.”
“이건 잠옷이다, 새끼야.”
아웅다웅 다투며 김성훈이 혼자 사는 집으로 들어간 이현은, 그때부터 제 칩처럼 눌러앉아 약속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허락은 맡았냐?”
“이따 데리러 온댔어.”
“몇 시에 빠질 줄 알고?”
“…그래서 그런데 나 1시에….”
“능력 되면 잘 빠져나가 보든가.”
잘해봐라. 이현은 김성훈의 영혼 없는 격려를 듣고서야 제가 터무니없는 약속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새벽 1시가 뭐냐. 한 번 모였다 하면, 동이 틀 때까지 퍼마시는 놈들인데 제아무리 애인과의 약속이라 한들 보내줄 리가 만무했다. 아니, 오히려 얼굴 한 번 보자며 성화를 부릴지도 몰랐다.
“나 없어져도 찾으면 안 된다?”
“옆방이나 쳐들어가지 말고 그런 소리를 하던가.”
너는 왜 술 먹고 에르덴을 외치고 다니고 그러냐…. 이현은 스스로를 타박하며 우울한 표정으로 캔커피를 홀짝였다. 미적지근한 커피에선 뚜렷한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커피는 차가워야 맛있는데.
“씻고 나올 테니까, 머리나 굴리고 있어라.”
넌 걱정 없어 좋겠다. 이현은 기지개를 켜고 욕실로 향하는 김성훈을 부러운 시선으로 보며 소파 위로 흐느적 드러누웠다. 잠깐 화장실 간다고 하고 빠져나와서 김성훈한테만 간다고 연락할까? 그럼 나중에 그놈들이 죽이려나.
“에이,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하하, 웃으며 이현은 일말의 희망을 기대했다. 믿음이 배신당한 것은 그로부터 2시간 뒤였다. 정확히는 작정이라도 한 듯 무장을 한 채 나타난 동창 놈들을 마주했을 때다.
“오늘 일찍 빠지는 새끼들 내 손에 다 죽는다.”
“무려 두 달만인데, 설마 중간에 빠지는 새끼가 있으려고. 안 그러냐, 이현아?”
“요새 애인 생겼다고 입 찢어진 놈 누구냐? 그놈 상판 먼저 술독에 빠뜨려야지, 안 되겠네.”
“이야, 이현이 손가락에 저 금붙이 뭐냐? 저게 그 말로만 듣던 커플링이라는 거냐?”
“…….”
이현은 일단 조용히 김성훈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어째 하는 말들이 죄다 저를 겨냥한 것 같은 게, 아무래도 도망가려는 속내를 간파당한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근 두 달간, 모임을 미뤄왔던 게 바로 이현이기 때문이었다. 동창놈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도 비단 무리는 아니었다.
“…설마. 하하, 설마 도중에 누가 빠지려고….”
이현은 결국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는 김성훈이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차고 있었다.
결국 이현은 동창놈들한테 목줄이 매인 채 여기저기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당구를 좋아하는 놈이 있어, 1차는 당구장에서 2시간이나 허비했다. 물론 도중부터는 이현도 오기가 생겨 이를 바락바락 갈고 덤벼들었다.
“2차 스크린 야구장 어떠냐?”
“콜.”
“좋지.”
“내가 오늘 아주 이를 갈고 왔다, 새끼들아.”
“3차 선술집 콜?”
“야, 야. 가기 전에 채이현 입에 뭐 좀 욱여넣어라.”
“밥 먹고 왔거든?”
“넌 밥 가지고 안 되는 거 모르냐?”
“채이현, 저거 철도 5분 만에 소화시키는 거 모르냐? 소용없으니까 용쓰지 마라.”
“철도 소화시키면, 씨발 대체 뭘 먹여야 되는 건데.”
“야구장에 간식 파니까 거기서 좀 뭐 좀 사다 먹여.”
얘들은 왜 쓸데없이 심각하냐. 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의논하는 친구놈들을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누가 보면 뭐 아주 대단한 일이라도 논의하는 줄 알겠다.
“가서 생각하자.”
“안 되면 뭐, 나와서 뭐 먹… 야, 저기 붕어빵 판다.”
“어딨냐? 만 원어치면 야구 칠 동안 되겠냐?”
모두의 시선이 몰린 곳에는 붕어빵을 팔고 있는 작은 포장마차가 있었다. 추워질 무렵이라 하나둘, 거리 밖으로 붕어빵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현이 홀린 듯 붕어빵을 멍하니 바라보자 한 명이 잽싸게 튀어가 붕어빵을 한가득 사 왔다. 그리고 그걸 대뜸 이현에게 안겨주는데, 따끈따끈한 게 절로 군침이 돌았다.
“야구칠 동안 얌전히 앉아서 이거나 먹고 있어라, 알겠냐?”
어째 말하는 게 어르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이현은 말없이 붕어빵을 야금야금 먹으며 친구들을 뒤따랐다. 그리고 친구 놈들이 돌아가며 스크린 야구를 칠 동안, 이현은 얌전히 앉아 붕어빵을 거덜 냈다. 물론 다 먹진 않았다. 4개 정도 남았을 때, 종이봉투를 밀봉하고 외투 주머니에 잘 넣었다. 나중에 시열에게 가져다줄 생각이었다.
“다 먹었냐?”
“다는 아니고, 시열씨 갖다 주려고.”
“아주 눈물겹네.”
꼬우면 너도 애인 하나 만들어라. 이현은 씩 웃으며 김성훈에게만 겨우 들릴 만큼 속삭였다. 이현이 남자와 사귀는 걸 아는 이는 아직 김성훈밖에 없었다. 다들 좋은 친구들이지만, 그런 것까지 말할 용기는 아직 이현에게 없었다.
“야, 채이현 다 먹었단다. 슬슬 가자.”
“진짜 다 먹었냐? 와, 대단하네.”
“내가 뭐랬냐. 저거 한 시간이면 먹는다니까.”
“저건 저렇게 먹는데 왜 살이 안 찌는지 모르겠네.”
“야, 그만 나와라. 술이나 마시러 가자.”
마시고 있던 캔맥주는 술도 아닌지, 사내 다섯은 슬슬 술이나 먹으러 가자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활기를 되찾은 모습을 보니, 오늘 정말 각오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최후의 결전을 앞둔 사람처럼 모두와 함께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술집은 모일 때마다 찾는 곳이었다. 언제나 끝은 그곳이었다. 돈이 엄청 깨지는 걸 매번 체감함에도 모두는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부어라 마셔라했다. 마음 맞는 친구 사이에 돈을 아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짜 나는 얘네 둘이 군대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것도 나름 인연 아니냐?”
“그러게. 중학교 때는 일면식이 뭐야, 그냥 휙 지나치는 사이였잖아. 새끼들이 어깨동무하고 나타났을 때 내가 얼마나 까무러쳤는지 아냐?”
“야, 근데 웃기는 게 우리도 죄다 얼굴만 알았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잖아. 둘이 친구랍시고 소개해줘서 말 트고 친해진 거지.”
말 그대로 김성훈과 이현은 중학교 때 얼굴만 알 뿐,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얼굴을 봐도 인사 한 번 나누지 않는, 그런 사이였다. 당연히 친구들도 달랐고 노는 무리도 달랐다. 김성훈은 제법 논다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반면, 이현은 공부 꽤나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으니 접전이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런 두 놈들이 같은 군대에서 동고동락해서는 전우랍시고 어울려 다니는데, 술자리에서 처음 이현을 소개받은 모두는 까무러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김성훈과 채이현 둘 다 중학교 때 접전만 없다 뿐 전교에 이름을 날리던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채이현. 전교에서 채이현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니, 이현의 얼굴을 모르는 자들도 이름 석 자는 다 기억했다.
“채이현, 저걸 선생님들이 오죽 예뻐했어야지. 전교 1등, 2등 자리 다 해먹는데 저놈 이름 모르면 간첩이었지.”
“생긴 건 또 오죽 반반하냐? 진짜 저건 여우야, 여우.”
“왜 자꾸 여우래!”
“성질머리 봐라. 이게 예쁘다, 예쁘다 하니까 눈꼬리가 아주 산꼭대기에 있네.”
지금 이현의 눈앞에 있는 이들은 전부 김성훈의 친구들이었다. 이현은 김성훈과 친해지고 제대 후 성훈의 친구들을 소개받았는데, 사실 처음엔 잘 어울리지 못했다. 소개받은 이들이 중학교 때 안 좋은 쪽으로 날고 기던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좋게 말해선 자유분방하고, 나쁘게 말하면 발라당 까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이 어색하고 낯설 뿐, 친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겉모습과 소문 때문에 꺼린 게 미안할 정도로 다들 좋은 녀석들이었다. 의리 하나에 목숨까지 걸 정도로 우애가 남달랐고, 안 좋은 일이나 좋은 일도 자기 일처럼 슬퍼하고 기뻐해 줬다.
그날 이후, 이현에게는 다른 친구들이 생겨났다. 대단하게 잘난 건 없지만, 넉살 좋고 우애 좋은 친구들 말이다.
“마시자, 마셔. 오랜만에 봤는데 아주 제대로 말아야지.”
“내가 오늘도 에르덴 들어야 쓰겄냐? 게임에 영혼 판 새끼들 좀 구제해 봐라.”
“이현이 쟤 좀 묶어 놔라. 내가, 씨발 쪽팔려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겠다. 하루 이틀이지, 뭐 매일 옆방 가서 홍보 질이야.”
“푸핫! 아, 에르덴 얘기 오랜만에 듣네.”
“그러지 말고 너네도 에르덴 하자.”
“하, 벌써 취했냐?”
좋을 대로 술잔을 부딪치고 잔을 기울이는 모습들이 전부 즐거워 보였다. 그 안에는 이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현은 그만 먹으라고 투덜거리는 말과 달리 제 앞으로 밀어주는 안주들을 집어 먹으며 ‘건배’가 튀어나올 때마다 술잔을 들고 원샷 했다.
얼마나 그렇게 웃고 떠들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을까, 소재 거리가 떨어지자 대화의 내용은 자연스레 이현의 ‘연애’ 얘기로 쏠렸다.
“친구들 버리니까 좋냐?”
“그래, 인마. 우리 버리니까 세상이 아주 찬란하지?”
“혈색 좋아진 거 보면 모르냐.”
이현은 알딸딸한 정신 속에 제 뺨을 슬쩍 매만졌다. 그러다 시열을 떠올리곤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안 좋아.”
의외의 말에 술잔을 들던 친구놈들이 돌연 행동을 멈추었다. 장난으로 던진 말에 개구리가 맞아 죽은 꼴이었다. 이현은 쩍 굳어진 친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벌게진 눈을 깜빡이며 우물거리듯 말했다.
“에르덴이… 안 해줘.”
“에이 씨! 저거 취했잖아!”
“아오, 겁나 놀랐네!”
“에르덴이 잘못했다, 그래.”
“에르덴이 안 해줘. 안 안아줘….”
날뛰는 무리 속에 김성훈만 유일하게 말이 없었다. 이현의 말에 한숨을 내쉬는 성훈과 달리 다른 이들은 위로한답시고 이현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불쌍한 놈…. 이리 와라. 형이 안아주마.”
“딱한 놈일세. 자, 술이나 마셔라.”
“누구냐, 우리 이현이 보고 못났다고 한 게.”
“데려와 봐라, 상판 좀 보자.”
얼싸안을 기세로 위로하는 친구놈들 사이에서 이현은 우울한 표정으로 술을 홀짝였다. 고민이 있어 보이기는 한데, 쉽사리 털어놓지 않는 걸 보니 꽤 속앓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야, 야. 그만 먹여. 저러다 또 튀어 나가서 홍보할라.”
“이현아, 걱정마라. 오늘은 형이 대신 나가서 홍보해줄 테니까.”
“저 새끼도 취했냐?”
오늘따라 술이 유독 쓰게 느껴졌다. 이현은 술잔을 찰랑찰랑 흔들다 원샷을 하고 빈 잔을 머리 위로 붓는 시늉을 했다. 탈탈 터는 모습을 본 친구들이 너도나도 술잔을 들어 올렸다.
“마시고 죽자!”
“죽자는데 죽어야지!”
“그래, 뒤져보자.”
“에휴, 건배나 하자.”
그 뒤부터는 그냥 죽자 살자 다들 입안으로 술만 털어 넣었다. 이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안주를 뒤로하고 이현은 따라주는 족족 술을 원샷 하고 잔을 머리 위로 뒤집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마시고 꾸벅꾸벅 졸다 눈을 떴을 때였다. 게슴츠레 눈을 뜬 이현의 눈앞에는 아직까지도 웃고 떠들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어, 깼냐?”
“속은 괜찮냐? 물 좀 마셔.”
“아. 전화 오던데 확인해봐.”
이현은 멍한 정신으로 품을 뒤적거리며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옆을 봤는데, 어딜 갔는지, 김성훈이 보이지가 않았다. 이현은 빨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손등을 문지르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나갔다 올게….”
“10분 내로 안 오면 잡으러 간다.”
“한눈팔지 말고 와라.”
“재깍 안 오면 성훈이한테 혼난다, 너.”
고개만 대충 끄덕인 이현은 엉금엉금 기어 방 안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장 신발을 신고 화장실 옆에 딸린 휴게실로 들어갔다. 흐릿한 시야로 핸드폰을 찾아 홀딩을 풀자, 흐릿하게 보이는 글자가 화면 위에 드러났다. 읽으려 해봤지만, 시야가 흔들거려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며… 몇 시야….”
심지어는 숫자도 보이지가 않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게슴츠레 뜨고 봐도 보이지가 않았다.
“어….”
시열씨한테 연락해야 되는데. 없는 정신에 그리 생각하며 통화목록을 켰지만, 큰 글씨조차 잘 보이지 않아 포기해야 했다. 이현의 표정이 삽시간에 시무룩해졌다. 이현은 울 것 같이 벌게진 눈가를 문지르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신의 방을 찾아 움직였다.
“…저거….”
김성훈 신발 같은데. 그러다 문득 흐릿한 시야 속에 김성훈의 운동화로 추정되는 신발이 들어왔다. 이현의 시선이 장지문으로 고정되었다. 그새 돌아왔나 싶어서 이현은 반가운 마음으로 곧장 미닫이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리고 꾹 참고 있던 말을 외쳤다.
“에르덴 하자!”
그리고 시열씨한테 연락도 좀 해주라. 이현이 헤실헤실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다시 에르덴을 외쳤다. 여기저기 바람 빠지는 한숨 소리가 나온 건 그 직후였다.
“어째 한 번도 빗나가질 않냐.”
“이현씨, 오늘 혼 좀 나겠는데.”
들어본 적 있는 낯익은 목소리에 이현의 고개가 갸웃 틀어졌다. 흐리멍덩한 시선이 방 안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지나쳤다. 그리고 그 시선이 턱을 괸 채 앉은 사내에게 닿았을 때, 이현의 시선이 깜빡거렸다.
“어… 시열씨…?”
아닌가? 이현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시열에게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폭이 한 걸음 남짓 남았을 때, 예고도 없이 손목이 잡혀 밑으로 당겨졌다. 휘청 넘어진 곳은 사내의 품 안이었다. 놀란 이현이 버둥거리며 빠져나오려고 하자 미열을 띤 손이 목덜미에 닿았다.
“이현씨, 몇 시까지 들어온다고 했더라.”
깜짝 놀란 이현이 고개를 번쩍 들자, 큰 손이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쓸었다. 흐릿한 시야에 떠오른 건 시열이었다. 안개가 낀 듯 희미했지만, 분명 시열이 맞았다.
그를 알아보자마자 이현은 활짝 웃었다.
“시열씨.”
“흐음, 이렇게 좋아할 게 아닌데.”
“어… 왜요?”
“오늘 이현씨 혼낼 거라서요.”
이현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도륵 굴렸다. 그러나 곧 시열의 품 안으로 꼬물꼬물 파고들며 뺨을 비볐다. 한 번 만 용서해달라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연락도 안 하고, 아주 재밌었나 봅니다.”
“번호가… 안 보여서요.”
“얼마나 마셨는데 이럴까.”
이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시열의 앞에 내밀었다. 종이봉투를 열고 꺼낸 건, 시열을 주려고 남겨둔 붕어빵이었다. 이현은 붕어빵을 꺼내 시열의 입가에 대어주고는 헤실 웃었다.
“시열씨 주려고 안 먹었어요.”
“그랬어요?”
“네에…. 근데 얘 죽은 거 같아요….”
쭈글쭈글 변한 붕어빵은 반쯤 찌그러져 있었다. 손으로 잡아 펴던 이현은 결국 포기하고 다른 붕어빵을 꺼냈다. 그러나 다른 붕어빵도 마찬가지였다. 이현은 포기하지 않고 다른 붕어빵을 또 꺼냈다. 홀쭉하긴 했지만, 다른 것들보다 양호한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이현은 혹여 구겨질까 냉큼 붕어빵을 시열의 입가에 대어주었다.
시열은 피식 웃으며 붕어빵을 한 입 베어 먹었다. 그걸 본 이현은 배시시 웃으며 시열이 먹은 곳을 저도 한 입 베어 먹었다. 그리고는 시열에게 다시 붕어빵을 불쑥 내밀었다. 시열은 다시 말없이 붕어빵을 먹어주었다.
그렇게 붕어빵 하나를 사이좋게 나눠 먹고 나자, 이현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현씨, 물 조금만 마셔 봐요.”
“…네.”
입에 대어주는 물을 꼴깍꼴깍 마신 이현은 허벅다리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에 이끌린 듯, 시열의 다리를 베고 몸을 말았다. 외투를 덮어주자 이현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숨죽여 지켜보던 이들이 그제야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렇게 구는데 어떻게 혼내냐.”
“이현씨 보면 묘하게 마음이 약해진단 말이야.”
“자꾸 봐주면 버릇 나빠집니다.”
그 자리에는 김성훈도 껴 있었다. 이현이 꾸벅꾸벅 조는 사이, 꼬마에게 연락을 받은 성훈이 잠깐 친구들을 버리고 옆방에 합석한 것이었다. 물론 그는 이현이 이 방으로 찾아오리란 걸 어느 정도 짐작했었다. 아니, 비단 성훈 뿐만은 아니었다.
“성훈씨는 친구들한테 안 가봐도 돼요?”
“연락해서 괜찮아요. 지들끼리 알아서 마시겠죠.”
“이야, 멋진 친구네.”
“하하, 별말씀을요.”
시열이 이곳에 온 건 12시 즈음이었다. 그로부터 세 시간이 흘렀으니, 꽤나 오래 있었다고 봐야 했다. 물론 시열은 즉흥적인 마음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이현에게 모임이 있다고 들은 순간 이미 시열은 이곳에 올 결심을 한 후였다. 그래서 ‘괜찮다’고 한 것이었다. 언제고 제가 데리고 갈 수 있으니까.
“너무 막 혼내진 마라, 시열아.”
“그래, 붕어빵을 생각해.”
글쎄. 혼낼 수나 있으려나. 시열은 미미한 미소를 짓고 이현의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쓰다듬었다. 세상 모르게 자는 모습마저 예뻤다. 뺨을 훑는 손길이 간지러운지, 한 차례 이현이 어깨를 움츠리며 웅얼거렸다.
“애 좀 자게 내버려둬라.”
“집에 안 가냐? 집가서 재워야지, 찬 바닥에 재우면 쓰나.”
꼬마와 흑백이 혀를 차며 말하는 사이에도 시열은 나름 고민 중이었다. 깨우고 싶지 않은데, 웅얼거리는 걸 보니 업는다고 움직이면 그대로 깰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재우기엔 마음이 편치 못했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시열은 막잔이나 하자며 술잔을 드는 흑백의 말에 잔에 술을 따르고 짧게 건배했다.
“가자.”
“이현씨 안 깨게 잘 좀 업어봐라.”
“대리 불러줄 테니까 좀 있어봐.”
“이현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저는 가서 친구들 좀 챙기겠습니다.”
“그래요. 다음에 봐요, 성훈씨.”
허리를 꾸벅 숙이고 옆방으로 건너가는 성훈의 뒷모습을 쫓던 이들은 비몽사몽 한 채 웅얼거리는 이현을 시열의 등에 업히고 외투를 잘 덮어주었다.
***
이현이 눈을 뜬 건, 집에 도착해 시열이 씻긴다고 이현의 옷을 벗기고 있던 때였다. 훌렁훌렁 벗겨지는 옷을 보던 이현은 몽롱한 시선으로 시열을 올려다보았다. 한 번, 두 번 깜빡이던 눈동자는 얼마 안 가 시열을 담아냈다.
“시열씨…?”
“이현씨, 팔 좀 들어볼래요.”
반사적으로 팔을 들자 웃옷이 훌렁 벗겨졌다. 추위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아직까지도 정신이 또렷하지 않은 게, 술기운이 남아있는 듯했다.
“이현씨, 씻을 수 있겠어요?”
“네….”
“머리 아픕니까?”
이현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고개를 저었다. 몸이 축축 가라앉고, 노곤함에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런데도 씻어야 한다는 생각은 강해서, 바지까지 훌렁 벗고 욕실로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앞에 있을 테니까, 못하겠으면 불러요.”
“네.”
찬물로 씻고 정신 좀 차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막상 찬물을 틀고 손을 대어보니 그 생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감기 걸리겠지, 라는 궁색한 변명을 속삭이며 이현은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시열은 샤워를 하고 나온 이현의 머리카락을 꼼꼼히 말려준 후에야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시열이 씻을 동안, 이현은 찬물을 들이켜며 술을 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얼마나 마신 건지, 몇 번을 들이켜도 알딸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이현은 술을 깨는 것을 포기하고 침대에 앉아 시열이 나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이현씨 혼나야겠네.”
“시열씨….”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현의 입술에 시열의 입술이 닿았다.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시열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 게 한계였는지, 이현은 그대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시열은 스르륵 무너지는 이현의 몸을 안고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이현이 곧장 시열의 품 안으로 꼬물꼬물 파고들었다.
“시열씨….”
“네.”
“이제요….”
“네.”
“이제… 저 그만….”
“네.”
“…안아주면 안 돼요…?”
“그럴게요.”
“시열씨랑요…. 시열씨… 랑….”
“네.”
“…자고… 싶은데….”
이런 거 말고요, 하고 울리는 목소리에 시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를 받아줄 날이 멀다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기다림의 시간은 짧게 끝났다. 제 옷자락을 꼭 쥐고 잠든 이현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시열은 술기운으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귓가에 입술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힘들 텐데 괜찮겠어요, 이현씨?”
나 꽤 집요한데.
“으응….”
웅얼거리는 이현의 뺨을 간지럽게 쓰다듬은 시열은 칭얼거리듯 움직이는 이현의 등을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문득 술집에서 붕어빵 봉투를 주섬주섬 꺼내던 이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붕어빵이 죽었다며 달아오른 뺨을 실룩거리고 시무룩해하던 표정까지. 시열은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제지하며 이현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안락하고 포근한 온기가 품 안 가득 번져 들었다.
***
내, 내가 어제 몇 시에 들어왔더라. 이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시열의 눈치를 살폈다. 필름이 끊긴 건지, 부어라 마셔라 한 이후의 일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게다가 집에는 어떻게 온 건지, 김성훈한테 몰래 연락해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이라곤 ‘무운을 빈다’라는 살 떨리는 말뿐이었다.
분명 어딘가에 가서 또 에르덴을 외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공기가 이렇게 삭막할 리가. 일단 잘못했다고 할까. 그런 생각으로 이현이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탁, 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이 눈앞에 놓였다. 시선을 내려서 보자 꿀물이었다.
“이현씨.”
이현의 뺨 위로 시열의 큰 손이 닿았다. 뺨과 귀를 다 덮고 저를 보도록 고개를 끌어올린 시열은 피식 웃으며 이현을 바라보았다.
“날도 좋은데, 나갈까요.”
이현의 눈동자가 깜빡거렸다. 몇 번 깜빡인 후에는 눈동자를 도륵 굴리고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현은 시열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며 쾌활하게 말했다.
“우리 영화 보러 가요.”
“영화 보고 싶어요?”
“네!”
“가야죠, 그럼.”
이현은 냉큼 꿀물을 들고 호호 불어 마시기 시작했다. 꿀물을 마신 후에는 시열과 함께 나갈 채비를 했다. 포근한 햇살이 떨어지는 한낮의 거리는 북적대던 밤과 달리 사람들이 없었다. 평일 낮인 걸 감안해도 유독 더 그런 느낌이었다. 그건 영화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열의 차를 타고 가까운 영화관을 찾은 이현은 한산한 영화관을 둘러보다 생각해둔 액션 영화 표를 2장 끊었다.
시열과 처음으로 보는 영화였다. 별거 아닌 일인데, 괜히 설레고 두근거렸다. 이현은 팝콘 대신 커피를 사 들고 시열과 상영관을 찾아 들어갔다. 밖과 달리 안쪽에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다행히 이현이 끊은 자리는 사람들이 없는 맨 뒤쪽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시열이 손을 잡아 왔다. 온기가 가득한 손이었다. 이현의 시선이 반듯하게 앉은 시열에게 향했다. 날카롭게 떨어지는 옆모습이 차갑게 보이는 한편 평온하게 느껴졌다. 잔잔하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었다.
“시작하네요.”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시열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미소를 띤 목소리가 이현을 흔들어 깨웠다. 저도 모르게 숨을 흡, 들이마신 이현은 새빨개진 얼굴을 홱 돌려 화면을 바라보았다. 확 끼쳐온 열기에 수습을 못 하고 있던 차, 상영관 내부를 밝히던 희미한 등이 전부 소등되었다.
사위가 어두워져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쳤을 때였다. 이어져 있던 손이 당겨지고 이현의 뺨에 시열의 손길이 닿았다. 그리고 그 짧은 찰나, 입술 위로 뜨거운 숨이 떨어졌다. 놀라 벌어진 입술 사이를 파고든 시열은 이현의 뒷목을 눌러 잡고 깊게 혀를 섞었다.
“흐….”
키스는 영화의 첫 대사가 나올 때에야 끝이 났다. 헐떡이는 이현의 숨소리가 대사에 묻혀 가라앉았다. 손은 여전히 시열에게 꼭 잡힌 채였다. 영화의 한 장면도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현은 방방 뛰어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느라 애를 써야 했다. 집중해보려고 해도, 이어진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시열의 온기가 강렬했던 키스를 쫓게 만들었다. 이현은 결국 영화를 포기해야 했다.
“이현씨.”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잔잔한 목소리와 함께 손이 꽉 쥐어졌다. 이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시열을 바라보았다. 어둑한 눈동자가 이현의 얼굴을 쫓아 내려갔다.
“나갈까요.”
고민은 없었다. 이현은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홧홧해졌다. 잡힌 손이 당겨지고 몸이 일으켜지는 순간까지도 이현은 얼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무슨 정신으로 차를 탔는지도 몰랐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저를 보지 않던 시열의 거뭇한 눈동자였다. 돌아오는 내내 시열은 말이 없었다. 이현은 없는 정신으로 손가락을 꼼질 거리며 긴장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숨이 턱턱 막힐 만큼 탁한 공기가 맴돌았다.
그 공기에 삼켜진 건, 시열의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신발을 벗자마자 이현은 그대로 벽에 내몰려 시열에게 삼켜졌다.
“하아, 하….”
무서울 정도로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숨이 막혀 헐떡여도, 시열은 이현의 뒷목을 눌러 잡고 진득하게 혀를 섞었다. 혀를 얽고 빨며 타액을 섞고, 헐떡이는 숨을 집어삼켰다. 시열이 집요한 키스를 끝낸 건, 이현이 시열의 품으로 미끄러졌을 때였다.
“이현씨….”
“!”
후들거리며 선 이현의 옷 안으로 시열의 뜨거운 손이 파고들었다. 허리를 쓸고 올라간 손이 음미하듯 척추를 하나하나 만지며 지나쳤다. 이현의 어깨가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희게 드러난 이현의 목덜미를 이를 세워 문 시열은 흠칫 놀라는 몸을 다독이기라도 하듯 꼭 안아 주었다.
“이렇게 겁먹어서 어쩝니까.”
“…그래도… 안아주면 안 돼요?”
“이현씨 많이 울 텐데.”
봐줄 생각 없어서요. 낮은 목소리였다. 열기가 스며든 목소리는 뜨거웠다. 으, 소리를 내며 이현이 시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슬쩍 들고 시열을 올려다보았다. 발갛게 물든 눈가가 애처로울 만큼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도 안아 주세요….”
가을철 단풍이 물드는 것처럼, 이현도 소리 없이 물들어 버렸다. 시열의 숨결과 고동에 그대로 사로잡혔다. 그런데도, 이따금씩 갈증이 일었다. 그에게 새겨지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마음이 충족될 수 있는 것이면 되었다. 그게 무엇이든, 이현은 이미 시열의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괜찮았다.
“시열씨랑… 하고 싶어요.”
이현의 눈가를 살살 쓸며 시열이 고개를 기울여 이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벌어진 틈으로 혀를 비집어 넣자 뜨거운 살덩이가 닿아왔다. 그걸 휘감아 빨자, 뜨거운 숨이 신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쪽—
가볍게 닿았던 숨소리는 점차 거칠어졌다. 침실을 찾는 발걸음 뒤로 옷가지가 허물처럼 흔적을 남겨갔다. 정신없이 시열의 키스를 받아들이던 이현은 온기가 사라지는 느낌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자각했을 땐, 실오라기 하나 없이 침대에 눕혀진 후였다.
“하아….”
제 위에 올라탄 시열의 모습이 몹시도 낯설었다. 매일 밤 잠드는 품인데도 익숙지 않은 향기가 났다. 아니, 낯선 향기였다. 그 향기는 시열이 몸을 기울이자 더 진해졌다.
“이현씨….”
귓가에 간지러운 숨소리가 닿았다. 달래듯이 떨어진 입맞춤에 이현이 목을 움츠리자 시열이 이현의 뺨을 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욕망이 드러난 눈동자가 이현의 시야에 가득 드러났다. 발갛게 달아오른 이현의 눈가로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시, 시열씨….”
“왜 이렇게….”
예쁩니까. 얼핏 시열이 웃은 것도 같았다. 그러나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미소의 형체가 떠오른 찰나, 시열이 사납게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진득한 욕망이 느껴지는 그런 키스였다. 새액, 새액 숨을 내쉬며 이현은 힘겹게 시열을 받아들였다. 턱이 덜덜 떨리고, 손끝이 절로 굽어드는 감각이 키스하는 내내 찾아왔다.
“…!”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손길을 느낀 것도 그때였다. 시열의 혀에 서툴게 제 혀를 문지르던 이현은 허벅지를 타고 오르는 손길에 놀라, 몸을 흠칫 떨었다. 깨닫고 몸을 비틀었을 땐 이미 시열의 손에 의해 다리가 벌어진 후였다. 나른한 손길이 덜덜 떠는 다리를 쓸고 올라가 이현의 성기를 잡아 쥐었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불에 덴 듯 홧홧한 감각이 치밀었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시열의 어깨를 잡아 밀었다. 그러나 금세 손목이 잡혀 살 안쪽이 깨물려야 했다.
“읏… 하….”
아릿한 감각 사이로 아찔한 쾌감이 느껴졌다. 기둥을 쓸고 귀두를 매만지는 손길에 이현의 다리가 오므라들었다. 큰 손이 예민한 살을 훑어 올릴 때마다, 이현은 시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몸을 떨었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마치 새 한 마리가 들어와 정신없이 날갯짓을 하며 휘젓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아… 시, 시열… 씨….”
이현의 턱이 바짝 당겨지고 입술 위로 뜨거운 숨이 닿았다. 키스는 이내 잡아먹을 것 같이 사나워졌다. 질척이는 소리가 헐떡이는 숨과 함께 뒤섞였다. 정신없이 탐해지는 사이에도 시열은 이현의 성기를 훑어 내리며 애무하고 있었다.
“아…!”
머릿속을 엉망으로 헤집던 열기는 얼마 가지 않아 사정과 함께 가라앉았다. 숨을 헐떡이며 이현은 제 정액으로 더럽혀진 시열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현의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가 사정의 여운 때문인지,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이현씨… 다리 조금만 벌려 봐요.”
어르듯 달래는 목소리와 함께 이현의 다리가 옆으로 벌어졌다. 허벅지가 뻐근하게 당겨올 정도로 벌어진 다리 사이로 시열이 허리를 들이밀고 들어왔다. 낯뜨거운 자세에 이현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자 시열이 가볍게 허리를 놀렸다. 짓눌리듯 맞닿은 서로의 성기가 느릿하게 비벼졌다.
“아… 흐….”
오싹한 기운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몸을 비틀며 떨어대던 이현은 허리를 타고 오르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느릿하게 피부를 스치고 올라온 손이 어르듯 유륜을 천천히 문질러댔다.
생소한 아픔이 피어난 건 그 직후였다. 앓는 소리가 나올 만큼 아릿하고, 홧홧한 감각이 허리 아래서부터 피어올랐다. 둔부를 가르고 무언가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현의 몸을 가르고 파고든 건, 시열의 손가락이었다. 이현의 정액을 묻혔는지, 들어오는데 뻑뻑함은 없었다.
“아… 아파요…. 시열씨….”
“쉬— 괜찮아요…. 천천히 할 테니까.”
달래듯 쏟아지는 키스를 받으며 이현은 꾸물꾸물 파고드는 고통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썼다. 내벽을 꾹꾹 누르며 파고든 손가락은 한참이나 느릿하게 안을 휘저었다. 어느 정도 길이 들었을 때쯤에는 손가락의 개수를 늘리고 앞뒤로 조금씩 깊게 찔러왔다. 입구 근처에서 움직이던 손가락이 살을 벌리며 깊게 찌르고 들어올 때마다 이현은 어깨를 떨며 흐느껴야 했다.
“많이 아픕니까….”
뜨거운 한숨이 이현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시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던 이현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한 채였다. 이현은 그저 찌릿한 통증에 숨을 쌔액 내쉬며 고통이 익숙해지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몸을 가르는 고통은 생각보다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흣…!”
살을 가르고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왔다. 이현의 눈이 질끈 감겼다. 내벽을 밀어내는 부피감에 허리가 덜덜 떨렸다. 거친 숨이 시열의 어깨 위를 뜨겁게 데웠다. 힘겹게 떨고 있는 이현이 안타까웠는지, 시열이 이현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입을 맞춰 주었다.
“흐으… 하….”
고작 손가락일 뿐인데도, 느껴지는 부피감이 상상을 초월했다. 허리가 아릿할 지경이었다. 느릿하게 들어온 손가락이 깊은 곳에 닿을 때면 찌릿찌릿한 아픔에 이현은 어깨를 굽히고 등을 움츠려야 했다. 시열은 이현이 그럴 때마다 위로라도 하는지 뺨이며 귀며, 여기저기에 키스를 퍼부어 주었다.
“아…! 흐윽….”
아픔에 축 늘어진 이현의 성기 위에 다시 시열의 손이 닿았다. 이현이 싫다며 바르작거렸지만, 예민해진 귀두를 문지르고 기둥을 훑는 손길을 막을 길은 없었다. 아래를 찌르던 손가락은 잠시 멈춘 채였다. 찾아든 쾌락에 이현은 금세 녹진하게 녹아내렸다. 시열은 부드럽게 풀려 늘어지는 이현의 가슴을 핥고 물며 쾌락 사이로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느릿하게, 천천히 내벽을 가르고 파고들자, 녹진해진 이현의 몸이 점차 유연하게 시열의 손을 받아냈다.
“이현씨.”
“흐… 흐읏….”
“많이 아프면 물어도 되니까….”
아프면 물라며 시열이 이현에게 대준 곳은 그의 어깨였다. 이현의 것을 잡아 쥐고 흔들던 손이 파들파들 떨고 있는 이현의 허벅지를 누르고 잡아 벌렸다. 시열은 그 사이로 제 허리를 들이밀고 열이 몰린 시선으로 이현을 내려다보았다. 살짝 찡그려진 인상이 어딘지 조급한 듯 보였다.
“하아, 조금만 참아 봐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벽을 찌르고 있던 손가락이 쑥 빠져나갔다. 시열은 옆으로 몸을 기울여 침대 협탁 서랍을 뒤졌다. 이현은 노곤한 듯 내려뜬 눈으로 시열의 몸을 낱낱이 살폈다. 이현의 시야에 단단하게 선 시열의 성기가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 지나치게 사나워서, 이현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움츠리고 말았다. 그러나 힘이 실린 손이 다리를 지그시 잡아 다시 벌렸다.
“안 보는 게 좋을 텐데.”
내가 봐도 사나워서요. 속삭이듯 떨어진 목소리에 서린 짙은 욕망을 깨달은 찰나, 이현의 엉덩이골 사이로 차가운 액체가 쏟아졌다. 써늘한 감각은 금세 뜨거워졌다. 홧홧한 느낌마저 일었다. 그 끝에 그보다 더 뜨거운 살이 닿았다.
“내 어깨 물어요.”
“!”
시열이 상체를 기울인 순간, 단단하고 뭉툭한 살덩이가 아래를 지그시 밀고 들어왔다.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눈물이 핑 돌 만큼 아픈 행위에 이현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그리고 시열의 말대로 그의 쇄골을 으득 깨물었다. 다정한 손길이 이현의 목덜미부터 허리까지 어르듯 스쳐 내려갔다.
“아…! 하흐… 아, 아파….”
“이현씨 이렇게 아파서 어쩌지….”
이현의 귓가에 더운 숨이 닿았다. 조금 거친 것도 같은 숨결이었다. 전혀 그만둘 생각이 없으면서, 말만은 다정했다. 입구를 지그시 누르고 진입하는 성기의 모양이 머릿속에 그대로 그려졌다. 아니, 고스란히 느껴졌다는 게 더 정확했다.
“흐으… 흐윽….”
서러운 눈물이 시열의 어깨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현의 뺨을 적시는 눈물을 핥아 마시며 시열은 바르르 떠는 내벽을 가르고 뿌리 끝까지 제 것을 천천히 새겨 넣었다. 느릿하게 파고들던 성기가 꽉 죄어 무는 내벽 끝에 다다른 순간, 시열이 탁한 숨을 내쉬며 눈을 찡그려 감았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뜨거움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현씨….”
“아! 아, 아직… 흐읏!”
바들바들 떨며 제 어깨를 꽉 끌어안은 이현을 사랑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며 시열이 느릿하게 허리를 돌렸다. 흠칫거리는 다리가 금세 오므라들었다. 그 다리를 팔에 걸고 끌어올린 시열은 이현이 고개를 젖히는 순간 목울대를 깨물며 무게를 싣고 허리를 밀어 올렸다.
“!”
깊은 곳을 밀고 들어온 귀두가 어느 지점에 꾹 닿았다. 배 속이 찌릿 거리는 느낌에 이현이 허리를 비틀었다. 일순 시열의 것을 물어뜯을 것처럼 죄고 있던 내벽이 유연하게 풀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꽉 죄어들었다.
“이현씨… 내 어깨 꽉 안아요.”
조금 힘들 거예요, 라는 말이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이현은 없는 정신에 흐느끼며 시열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몸을 압박하고 있던 성기가 느릿하게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뒤로 빠지던 성기는 예고도 없이 퍽, 하고 안을 찍으며 들어왔다. 몸이 꿰뚫리는 느낌이었다. 다시 한번 찌릿한 느낌이 배 속을 울렸다.
“흐… 하아, 흑….”
시열은 여린 내벽을 짓이기듯 파고들며 이현의 입술을 찾았다. 혀를 얽고 빨자 거친 숨이 신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다정한 키스와 달리 아래는 봐주는 게 없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를 짓이기듯 덤벼드는 허리가 제법 사나웠다. 귀두만 겨우 남겨놓고 뒤로 뺐다 한 번에 뿌리 끝까지 안을 퍽 찌르는가 하면, 깊게 찔러 넣은 상태로 안을 들쑤시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이현은 숨을 헐떡이며 바들바들 떨어야 했다.
찌릿한 감각이 쾌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건, 시열이 팔에 건 이현의 다리를 좀 더 위로 끌어올렸을 때였다. 무릎이 어깨에 닿을 만큼 굽혀지고, 귀두가 종전과는 다른 곳을 찌르고 들어왔다. 조금 더 깊은 듯, 예민한 곳이었다. 드문드문 떠오르던 감각은 시열이 무게를 싣고 안을 퍽 찔러 올린 순간, 파도처럼 이현을 덮쳐왔다.
“응…! 흐윽…!”
“쉬— 울지 말고… 괜찮아요.”
“시, 시열씨… 흐으, 여기… 이상… 읏!”
“그랬어요? 하아, 미안해요….”
시열은 간지럽게 입을 맞추며 다정한 목소리로 이현을 달랬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아래를 탐하는 몸짓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이현이 말한 곳을 집요하게 찔러 올리기 시작했다. 이현의 성기를 만져주며 쾌락을 유도하던 시열은 이현의 성기가 다시 단단해지자, 그 후로는 완전히 손을 떼고 아래만 들쑤셨다.
“흐으, 싫… 아!”
이현은 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시열의 몸에 속절없이 흔들렸다. 쾌락에 녹아든 몸이 울긋불긋 예쁘게 물들었다. 시열은 그 어깨와 가슴 여기저기를 깨물며 여린 내벽을 헤집듯 제 것을 퍽퍽 밀어 넣었다. 그러다 이현이 참지 못하고 손톱을 세워 등을 긁어내리면 허리를 깊게 밀어 넣고 귀두로 안을 느릿하게 문질러댔다. 그럴 때마다 달달 떨어대는 이현의 모습이 안타깝고 예뻐서, 시열은 부드러운 키스를 퍼부으며 미안하다고 속삭여 주어야 했다.
열기로 가득한 행위는 몇 번이나 계속되었다. 이현의 온몸은 시열의 집착에 열꽃으로 뒤덮인 지 오래였다. 아릿한 감각 사이로 피어오르는 쾌락에 이현은 몇 번이나 시야가 하얗게 점멸되었다. 가슴이고, 등이고, 다리고 전부 붉은 자국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이현씨… 하아, 힘듭니까.”
“흐으…!”
대답 대신 이현은 겨우 버티고 있던 허리를 무너뜨렸다. 짐승처럼 엎드린 등 위로 시열의 키스가 쏟아졌다. 그러면서 그는 허리를 퍽 밀어 넣고 이현이 느끼는 지점을 귀두로 거칠게 비볐다.
“!”
굽어진 이현의 등이 바들바들 떨렸다.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결국 이현의 어깨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붉어진 눈가가 눈물로 젖어 엉망이었다. 노곤한 눈빛과 시선이 섹스의 여운으로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정액과 젤로 엉망인 아래는 그런데도 빈틈없이 시열의 것을 죄어 물고 있었다. 빠져나가면 아쉽다는 듯이 달라붙는 살은 아직 더 할 수 있다고 보채는 듯했다. 허리를 뒤로 슬쩍 물린 시열은 몸을 굽혀 이현의 등에 가슴을 붙였다. 그리고 이현의 어깨를 깨물며 그 안을 진탕 후볐다. 다리를 덜덜 떨며 버티고 있던 이현의 다리가 풀썩 꺾였을 때였다. 안을 뜨겁게 오가던 성기가 강한 힘과 함께 가장 깊숙한 곳에 박혔다. 뇌를 지르는 아찔한 쾌락에 이현이 몸을 떨며 사정을 했다.
일순 내벽이 꽉 죄어들고 땀에 젖은 시열의 등 근육이 꿈틀 움직였다. 열기로 들끓는 이현의 몸 안으로 정액이 울컥 쏟아졌다. 절정의 여운이 탁한 숨소리와 함께 쏟아졌다.
“하아, 이현씨.”
“하아하아… 흐으….”
절정에 탁하게 잠긴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현을 불렀다. 힘없이 늘어진 이현의 몸을 끌어올려 품에 안은 시열은 서러움이 가득한 눈가를 혀로 핥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시열씨… 힘들어요….”
“괜찮아요, 더 안 할게요.”
이현을 제 가슴 위에 눕힌 시열이 노곤하게 감기는 이현의 눈가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웅얼웅얼 거리는 목소리가 점차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깜빡이는 시선을 보던 시열은 제 품 안으로 파고드는 몸짓을 느끼곤 피식 웃었다. 그렇게 사납게 덤벼들었는데도, 자신을 갈구하는 몸짓에 원망이라곤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시열은 가물가물 감기는 눈을 보고서야 이현의 귓가에 나지막한 말을 속삭였다.
“많이 좋아합니다….”
웅얼거리는 이현의 목소리가 마치 저도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만 같았다. 고요한 숨소리가 찾아들고서야 시열은 제 집착으로 가득한 이현의 몸을 조심히 안아 들고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안에 잔뜩 쏟아놨으니, 전부 긁어내 빼줘야 했다. 어지간히 이성을 잃었다며, 시열은 저를 향해 혀를 찼다.
그래도 욕실로 향하는 시열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저를 받는다고 애를 써준 이현의 모습이 기특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세상 모르게 잠든 이현의 머리에 잔잔한 키스를 남기며 시열은 고생했다고 남모르게 속삭여 주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
시열이 이현과 처음 만난 건 시샘 달이 찾아온 몹시 추운 날이었다. 마지막 꽃샘추위라며 사람들은 저마다 옷을 겹겹이 껴입고 다녔다. 그 정도로 추웠던 날이었다. 그리고 시열의 기분도 그만큼이나 쌀쌀맞던 날이었다.
“야, 네가 세상사 심드렁하고 건조하게 사니까 네 부모님이 그러시는 거 아니겠냐?”
자주 가는 선술집은 바깥 날씨와 다르게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방 한편을 가득 채운 벚나무 그림이 눈발이 휘날리는 바깥과 달리 달콤한 봄을 연상시켰다. 술잔을 빙빙 돌리며 시열은 저를 타박하는 이정훈을 써늘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내가 잘못 했다?”
“오죽하면 그러시겠냐.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 만나봐. 그게 아니면 뭐든 집착할 만한 거라도 만들든지. 남들은 아등바등 산다고 그러는데 너 보면 그런 게 없다, 새끼야. 막말로 넌 내일 뒤진다고 해도 고개만 끄덕일 새끼잖아.”
“사귀는 거야 쉽지. 상대는 몸 주고 마음 주고 다 하니까. 근데 그 이후엔? 피곤한 일도 한두 번이지.”
“이거 가만 보니 개새끼네.”
결국 이정훈은 설득을 포기하고 시열에게 술이나 퍼마시라며 성을 냈다. 시열의 연애는 줄곧 일방적인 사랑으로 시작되고 끝이 났다. 어려서부터 부족한 것 없이 자랐는데, 그런 환경이 시열에게는 독으로 작용된 것이다. 집착과 욕망. 활기와 활력. 시열에겐 그런 게 없었다.
“아저씨도 고생이 많으시네. 어쩌다 너 같은 개새끼를 얻으셔서. 안 그러냐, 쌍놈아?”
“적당히 해.”
“허, 이것 봐라? 지 욕하는 건 그래도 관심 있나 보다? 왜, 더 해주랴? 정신 번쩍 들게, 세상 살고 싶게 욕 좀 퍼부어 줘?”
시열이 술잔을 내려놓고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이정훈은 더 길길이 날뛰며 욕을 퍼부어댔다. 듣는 둥 마는 둥 심드렁한 시선으로 시열이 턱을 괸 채 눈발이 휘날리는 창밖을 막 내다보았을 때였다.
느닷없이 문이 벌컥 열리고 경쾌한, 활기가 가득한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앳된 듯, 씩씩한 목소리였다.
“에르덴 하자!!”
시열의 시선이 곧장 외침이 들려온 곳으로 옮겨졌다. 그곳엔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문을 연 그대로 만세를 하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아니, 소년과 사내 사이의 모호한 경계가 느껴지는 남자였다. 그는 다시 한번 경쾌한 어조로 소리쳤다.
“에르덴 하자, 에르덴!”
시열의 눈이 찰나 흔들렸다. 배시시 웃는 모습이 저와는 몹시도 달라서, 활기가 드러난 목소리에 활력이 가득해서, 실로 놀랐다. 에너지랄까, 저에게 없는 모든 걸 사내는 가지고 있었다.
“어, 어… 뭐야.”
이정훈의 황당한 목소리가 시열의 정신을 일깨웠다. 에르덴을 외치던 사내는 슬금슬금 기어들어와 시열의 옆에 앉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오밀조밀한 게 사내답지 않게 예쁜 자였다. 그래서인지, 바투 자른 머리도 잘 어울렸다. 아니, 귀여웠다.
“에르덴… 어, 성훈이 아니네…. 그럼… 음, 우리 에르덴 해요…?”
사악 올라간 눈매가 깜빡이는가 싶더니, 시열을 또렷이 담아냈다. 시열이 아무 말도 안 하자, 그는 다시 에르덴을 열창했다.
“에르덴이요… 이현인데, 에르덴… 해요.”
“…그게 뭡니까.”
“에르덴이… 에르덴인데.”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던 사내의 눈이 조금씩 잠기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활기를 띠며 에르덴을 외쳤던 게 거짓말인 양 눈가를 비비더니, 그대로 바닥에 꾸물꾸물 누워 시열의 다리를 베고 잠들었다.
그 일련의 사태에 방 안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열의 시선은 한시도 미인의 사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뻗어진 손길이 사내의 곤한 눈매를 슬쩍 매만졌다. 손끝에 뜨거움이 닿았다. 데일 것 같은 뜨거움이었다.
“뭐야, 이 웃긴 상황은.”
말과 달리 이정훈의 얼굴 위로는 황당함이 가득했다. 숨소리까지 색색 내쉬며 자는 게 여간해선 깰 것 같지가 않았다. 웃지 못할 상황은 열린 방문 사이로 뛰어 들어온 한 사내에 의해 금방 막을 내렸다.
제법 건장하고 멀끔하게 생긴 사내였는데, 그는 시열의 다리를 베고 잠든 사내를 보자마자 이를 으득 갈며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제 일행인데, 데려갈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하하, 그럴 수도 있죠.”
사람 좋게 웃으며 너스레를 떠는 이정훈과 달리 시열은 잠든 사내를 안아 드는 손길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마른 허리를 끌어안고 챙기는 솜씨가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했다. 문득, 시열은 제가 이를 악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선이 향한 곳은 칭얼거리는 사내의 허리를 강하게 안고 있는 단단한 팔이었다.
“야, 야! 채이현, 정신 안 차리지.”
“어… 에르….”
“알겠으니까 쏘다니지 좀 마라. 영업방해로 사장 형한테 혼나고 싶냐?”
사라지는 뒷모습을 쫓던 시열의 시선은 문이 닫히고도 한동안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시열을 이정훈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왜, 뭐 걸리는 거 있냐?”
시열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에서 시선을 떼고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단번에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야, 에르덴을 여기서 다 듣네.”
“그게 뭔데.”
“요새 나랑 강이한이 하는 건데, 왜 저번에 너한테도 권했었던 그거 있잖아.”
“게임?”
“근데 저걸 저렇게 홍보할 정도면 보통이 아닌데.”
홍보대사인가. 능글능글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이정훈을 보며 시열은 가만히 턱을 괴었다. 손끝에는 아직까지도 열기가 감돌았다. 제 손끝을 힐끗 보던 시열은 끝내 술과 함께 그 감각을 털어냈다. 그러나 정확히 20분 뒤, 다시 찾아온 목소리가 그 감각을 다시금 이끌어냈다. 말갛게 웃으며 에르덴을 외치는 모습이 복사꽃처럼 예쁘다고 생각했다.
“우리 에르덴 하자!”
턱을 괸 그대로 시열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 저렇게 씩씩하고 맑고 순할까. 슬금슬금 기어들어 온 이는 몇 번 더 에르덴을 열창하더니 다시 시열의 다리를 베고 까무룩 잠에 빠졌다. 시열의 손끝이 다시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로 향했다. 역시나 뜨거운 체온이 손끝에 느껴졌다.
친구라던 사내가 다시 찾아와 데려갈 때까지 시열은 그의 눈가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비단 손뿐만은 아니었다. 그 얼굴을 망막에 새기기라도 하듯 시열은 한시도 쉬지 않고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맞닿은 손끝이 간질간질 타올랐다.
그게 싫지 않아서, 아니. 사실 다시 느끼고 싶어서 시열은 일부러 구실을 만들기까지 했다. 확인하고 싶었다. 묘하게 붕 뜬 이 간질간질한 느낌의 정체를.
“저희 룸 옆방에 학생들 있던 것 같은데, 사장님하고 아는 사이 맞습니까? 채이연이랬던가요. 그분이요.”
“아, 이현이요? 알기야 아는데, 저 혹시 무슨 실례라도….”
“실례는 아니고, 그 학생이 휴게실에 흘린 제 지갑을 찾아줘서 보답이라도 할까 합니다. 일행이 있어 오늘은 그렇고, 다음에 꼭 사례를 하고 싶은데 다음에 오거든 이 번호로 연락 한 번 주시겠습니까? 여차하면 그 학생 옆방에 룸하나 잡아주시고요.”
“아, 그랬습니까? 그거라면 뭐… 예, 일단 알겠습니다.”
“본인은 부담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으니, 말씀은 삼가 주세요.”
“예, 그러죠.”
평소라면 하지 않을 구실을 만들었다. 묘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이정훈을 뒤로하고 시열은 열기로 가득한 손을 코트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화끈한 감각 때문인지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심보냐. 아니면, 뭐 수작이라도 부리려고?”
“글쎄.”
계절의 마지막 눈을 보며 시열이 피식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이정훈은 뒤늦게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웃는 것도 오랜만이라 뭐라 말도 못 하겠다.”
“날이 꽤….”
좋네. 시열이 흘러가는 투로 속삭였다. 그런 시열의 등을 툭 치며 이정훈이 어서 가자며 고갯짓을 했다.
“말이나 못 하면.”
그게 계기였다. 이현을 알게 된 계기, 그리고 에르덴을 시작하게 된 계기. 시열에게 이현은 건조한 땅에 내린 단비 같은 존재였다. 달고 달아서 다 마시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욕심은 많아서 전부 다 삼키고 싶었다. 그만큼 고맙고, 그만큼 사랑스러운 이였다.
“정말… 좋네.”
날씨가. 시열이 입가에 다시 미소가 맺혔다.
***
지잉— 지잉—
이현을 품에 안고 사색에 빠져있던 시열이 정신을 차린 건, 협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을 때였다. 한 번 시작된 진동은 거슬릴 만큼 계속되었다. 결국 시열은 팔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 위에는 초마다 올라오고 있는 메신저가 있었다. 발신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타협은 없다’ 전용 메신저 채팅방에서 길드원들이 죄다 시열을 찾고 있었다.
“…….”
시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시간을 보자 밤 9시였다. 낮부터 시작한 섹스가 끝난 게 고작 한 시간 전이었다. 시열은 품 안에서 웅얼거리는 이현의 기척을 깨닫고 핸드폰을 켜 채팅방에 들어갔다.
[뭐여, 루스 오늘도 안 들어 오냐?!]
[루스야, 당장 길드장 넘겨라. 내가 잘 키우마]
[지랄ㅋㅋㅋㅋㅋ 재산 탕진 소리 또 나와야겠냐?ㅋㅋㅋ]
[빨랑 병아리 데리고 들어와라. 퍼뜩]
[이 시끼 어제도 안 들어오더만, 삼인방 뭐 허냐? 빨리 루스네 쳐들어가라]
[우리가 오늘 아주 위대한 일 좀 꾸미는데, 길마가 없어서야 쓰나]
[위대한 일 좋아하네. 또 자게 메인 타고 싶냐? ㅅㅂ]
[왜;; 니들 뭔 일 꾸미냐?;]
[타협 미쳤다고 또 광고할 거면 난 빠질란다]
[어허, 어딜 빠지시나. 차기 길마장 되실 분이]
[다이가 그래도 보는 눈은 있네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아, ㅅㅂ 이 새끼들 안 되겠네]
지칠 줄 모르고 올라오는 대화를 보던 시열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잠시 들어가겠다는 짤막한 답을 남겼다. 일단 들어가서 얼굴을 비추고 내일 다시 들어오겠다고 할 참이었다. 생각 같아선 핸드폰을 꺼놓고 이대로 이현의 곁에 있고 싶었지만, 일단 길드장을 맡고 있는 처지라 길드원들의 부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시열이 글을 남기자마자 모두는 빨리 들어오라며 성화를 부려댔다. 시열은 곤하게 자고 있는 이현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고 침대에서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시열은 긴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색색 자는 이현의 목 아래까지 이불을 덮어준 후에야 무거운 발걸음을 떼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제법 빠른 기세로 에르덴에 접속했다. 접속하자마자 보인 건, 길드 요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길드원들이었다. 그들은 시열이 오자 모두 쌍수를 들고 반겼다.
[길드/기토피아: 드뎌 오셨냐!!!]
[길드/코코볼: 루스야. 난 언제든 길마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
[길드/신이내린캐: 저 닭 새1끼를 진짴ㅋㅋㅋㅋ]
[길드/백전승: 읭? 힐러님은 왜 안 왔냐?]
[길드/베리베리: 주륵... 힐러님 주륵...]
[길드/루스: 본론부터 말하세요]
[길드/마초: 자, 일하자 개돼지들아]
[길드/다이뜨자: 왘ㅋㅋ 자게에서 우리더러 메기라던데ㅋㅋㅋㅋ]
[길드/기토피아: 삼인방들 요새 안 되겠넼ㅋㅋㅋㅋ 힐러님 믿고 개 까불지?ㅋㅋㅋ]
[길드/잘살아보세: 닭 넘들아 본론부터 말하라고]
[길드/묘냥이: 루스야ㅋㅋㅋ 요즘 모냥빠지게 채팅이 뭐냐? 르덴톡 나왔다는데 톡으로 갈아타자]
[길드/백전승: 콜]
[길드/코코볼: 콜]
[길드/기토피아: 콜]
[길드/꼬마천재: 전쟁터 되겠네]
화면 가득 올라오는 글에 시열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다들 찬성하는 분위기라 별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길드/루스: 전부 홈페이지 접속해서 르덴톡 깔고 접속해주세요. 방은 ‘타협11’이고 비번은 ‘타협4622’입니다.]
시열의 말에 전부 일사불란하게 알았다며 대답했다. 시열 역시 게임을 아래로 내리고 홈페이지에 있는 에르덴 전용 톡인 ‘르덴톡’을 깔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랍을 뒤져 헤드셋을 찾아 착용했다.
프로그램을 깔고, 말했던 대로 방을 만들자 하나둘 무서운 속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테스트를 하는지, 헤드셋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다 들어왔습니까?”
시열의 말에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대답이 들려왔다.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지는데,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시열은 일단 발언권을 없애고, 규칙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단 규칙 만들 테니 준수해 주세요. 전 규칙만 말해주고 바로 나가겠습니다. 방은 항상 열어놓을 테니 누구든 입장해서 사용해도 됩니다. 대신, 퀘스트나 던전 따로 돌게 될 시에는 사용을 금지합니다.”
발언권이 허락되지 않아, 길드원들은 대답 대신 채팅창에 알았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그리고 다른 길드원들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분명 불편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니 원하는 사람만 입장해 사용해 주세요. 만약 분쟁이 생기면 그분들은 바로 톡을 중지하고 따로 빠져 서로 원만히 해결한 후에 다시 입장해 주시길 바랍니다. 길드 톡 내에 분쟁이 3번 이상 생길 시 톡방은….”
“…시열씨.”
규칙을 읊던 시열의 귓가에 이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잘못들은 줄 알았는데,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몇 번이나 계속되자 그게 허성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시열은 곧장 헤드셋을 벗어 목에 걸고 반쯤 열린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시열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다리를 세우지 못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현이 기어서 시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시열은 재빨리 일어나 이현을 끌어올려 품에 안았다.
“이현씨, 많이 아픕니까?”
“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 허리도 아파요.”
“그랬어요? 미안해요. 더 자고 있지 그랬어요.”
“시열씨가 없어서요.”
“그래서 기어 왔어요? 이런, 많이 아팠겠네.”
“왜… 왜 이렇게 아파요?”
“내가 너무 괴롭혀서 그래요. 이현씨가 너무 예뻐서.”
“네에…. 그럼 그만 자러 가면 안 돼요?”
“이현씨 이렇게 아파서 어쩌나.”
눈가가 아직도 빨가네. 시열이 달래듯이 이현의 입가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졸렸는지, 이현은 시열의 품에서 금세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어지간히도 고됐던 모양이었다. 시열은 의자에 앉아 제 품에 이현을 눕히고 등을 다독여 주었다. 꾸벅꾸벅 졸던 이현은 금세 까무룩 잠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시열은 목에 걸린 헤드셋의 존재를 깨달았다.
톡방을 보자 그 많던 인원이 죄다 없어져 있었다. 시열의 시선이 게임 내 길드 채팅창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부 그쪽에 몰려 얘기 중이었다. 쉴 새 없이 올라오는 글을 읽은 시열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길드/코코볼: 게임은 역시 채팅하는 묘미 아니겠냐?]
[길드/잘살아보세: 하... 생각해보니 죄다 시커먼 놈들뿐인데, 내가 사내놈들 목소리 들어 뭐하냐]
[길드/백전승: 내가 사실 목이 안 좋아서 말을 많이 못 한다, 전우들아...]
[길드/신이내린캐: 하... 우리 실력에 톡하면서 겜해서 되겠냐? 안 그냐?]
[길드/기토피아: 손가락 운동이라도 하고 살아야 않겠냐? 내 봤을 때, 톡하면 우리 바로 개돼지 각이다]
[길드/묘냥이: 모냥 빠진다고 했던 새끼 누구냐? 줘패야겠네 ㅅㅂ]
[길드/다이뜨자: 타협 메기라고 떠들고 다니던 새1끼냐? 안 되겠다, 연장들 챙겨라]
[길드/꼬마천재: 지랄들을 해라.]
[길드/마초: 태세 전환 봐라]
[길드/베리베리: 온갖 핑계 다 나오시네그려]
“다 들었다는 거네.”
들을 수밖에 없나. 시열은 이현의 등을 나른하게 쓸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달게 퍼져 나갔다. 기울어진 고개를 제 어깨에 조심히 옮겨 눕힌 시열이 이현의 이마에 입을 쪽 맞췄다.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이 현실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길드존에서 놀던 길드원들은 이미 신성족들을 족치러 간다고 전부 요새를 빠져나간 후였다. 휑한 길드존을 보며 시열은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나쁘지 않았다. 깔끔히 씻긴 이현에게서는 시열이 쓰는 바디 제품 향기가 났다. 그 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시열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공연한 미소가 입가에 맴돌았다. 시열의 삶으로 파고든 건, 다른 게 아니었다.
가슴을 뜨겁게 채우는 활력이었다. 이제껏 그걸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