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화 (19/19)

외전3. 힐러의 후일기

블랙블과 길드쟁을 한 지 보름 정도가 지났다. 파란만장했던 하루는 역시나 자유 게시판의 메인으로 등극했다. 댓글러들의 예상대로 그날, 비연은 잡아간 게 이현이 아닌 맴맴돌이라는 걸 안 순간 땅을 치며 피눈물을 흘렸다는 후문이다. 물론 팀킬의 선두주자인 블랙블의 길드원들은 그 얘기에 파안대소를 하며 즐거워했다.

그 날의 일이 계기가 된 건지, 블랙블은 간혹 타협의 길드부지로 놀러와 친목의 PVP를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비연도 함께 나타나 바위틈에 숨어 기웃거렸지만, 시열의 눈에 띈 순간 다시 추격전을 벌이며 신마제국 땅을 헤집고 다녀야 했다. 그럴 때마다 이현은 시열을 뒤로하고 맴맴돌을 찾아가 그와 함께 미션을 깨며 하루를 보냈다. 덕분에 이현은 요새 심심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러던 중, 이현은 아주 오랜만에 ‘솔플’ 시절을 다시 겪게 되었다. 시열을 비롯해 김성훈과 삼인방, 맴맴돌의 부재 때문이었다.

“이현씨, 혼자 있을 수 있겠어요?”

“저요? 저 괜찮아요.”

시열의 눈동자에 미안함이 떠올랐다. 다른 때와 달리 단정하게 차려입은 시열에게서는 어른스러운 향기가 스며 나왔다. 아니, 향기라기보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분위기랄까, 이현이 가질 수 없는 어른미가 시열에겐 자연스럽게 배여 있었다.

“진짜 괜찮아요. 에르덴 하면서 잘 있을게요.”

고작 하루건만, 이현을 혼자 두는 게 미안한지 시열은 내내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런 시열에게 이현은 걱정 말라는 듯 씩씩하게 웃었다. 시열이 손을 뻗어 이현의 뺨을 슬쩍 문질렀다.

“되도록 빨리 다녀올게요. 나갈 일 있으면 연락하고요.”

오늘은 가족 모임으로 시열이 본가에 가는 날이었다. 본가라고 해봤자 같은 서울이었지만, 끝과 끝에 있는 위치라 오고 가는 데만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부모님 잘 뵙고 와요!”

이현은 손을 흔들며 문을 나서는 시열을 배웅했다. 한숨을 내쉬던 시열은 결국 피식 웃으며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열이 나가고, 이현은 커피 한잔을 타 컴퓨터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커피를 홀짝이며 PC를 켜고 에르덴에 접속했다.

—접속시간 AM. 10:12 / 남은 시간은 230시간입니다.

—신성의 축복을 그대에게! 에르덴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십시오!

—편지가 도착하였습니다.

—모든 던전의 입장 시간이 리셋되었습니다.

[길드/다이뜨자: 오 병아리 등장!]

[길드/묘냥이: 캬 역시 이현이야]

[길드/신이내린캐: 이야 집념 봐랔ㅋㅋㅋ 저 정돈 돼야 1퍼짘ㅋㅋㅋ]

[길드/백전승: 아닠ㅋㅋㅋㅋㅋ 새벽까지 하고 아침에 접속하는 거야?ㅋㅋㅋㅋ]

[길드/이현: 안녕하세요 꾸벅]

어제 새벽 늦게까지 이벤트 던전을 돌았기 때문인지, 길드존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심지어는 김성훈과 삼인방도 없었다. 너무 이른 시간에 왔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이현은 친구목록을 켜고 근래 친해진 맴맴돌을 찾았다. 그러나 무슨 날인지, 맴맴돌도 들어와 있지 않았다.

“…왜 다 없지?”

이현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웃고 떠드는 길드원들 사이에 쪼그려 앉았다. 이러고 조금만 있다가 채집이나 하러 가자. 그런 생각으로 앉아 있었는데, 이현의 캐릭 위로 이번 에르덴 업데이트에 대한 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현의 귀가 금세 쫑긋 세워졌다.

[길드/기토피아: 벨붕 만들면 사이트나 폭파시켜야겠다]

[길드/잘살아보세: ㅅㅂ 날개가 웬 말이야. 진짜 닭둘기에 오골계 되라는 심보인가ㅡㅡ]

[길드/묘냥이: 캐릭들 밸런스나 어케 하라해라. 무슨 공중피빕 도입이야]

[길드/다이뜨자: 공중 시스템 도입돼도 비행 가능 지역이랑 안되는 지역 생긴다는데 그럼 왜 도입하는겨]

[길드/백전승: 비행 불가능 지역은 활강 가능이란닼ㅋㅋㅋㅋㅋ ㅅㅂ 뭐 하는 수작이냐]

[길드/다이뜨자: 활강은 또 뭐다냐. 스키 타냐?]

[길드/신이내린캐: 베히아만 전 지역 비행 가능으로 돌리고, 그 외 맵들은 마을 근처만 공중전 가능이면 공중피빕 전투는 사실상 베히아만 가능한 거잖아 ㅅㅂ]

[길드/기토피아: 와놬ㅋㅋ 공중전 피빕이면 장거리 격수들만 유리한 거잖아. 아처 거너같은 캐스팅 없는 즉딜 직업들만 살판나겠네]

[길드/백전승: 밸붕 따위 개나 주라는 거지ㅋㅋㅋㅋ 공중 던전 시스템도 도입한단닼ㅋㅋㅋㅋㅋ 미챸ㅋㅋㅋ]

[길드/묘냥이: 아니 ㅅㅂ 그럼 성전도 공중전투 되는 거?]

[길드/다이뜨자: 오졌넼ㅋㅋㅋㅋㅋㅋ]

[길드/백전승: 왘앀ㅋㅋㅋㅋ 그건 좀 재밌겠넼ㅋㅋㅋㅋ]

[길드/신이내린캐: 애초 신성족이랑 신마족 넘들이 자꾸 닭둘기 오골계 하니까 지엠들이 날개시스템을 도입한 거 아녘ㅋㅋㅋㅋㅋ]

[길드/기토피아: 뭘 도입해도 타협은 타협이다 걱정 마랔ㅋㅋㅋㅋ]

[길드/백전승: 또 레전드 하나 세워줘야겠네ㅋㅋㅋㅋ]

기승전 자랑이네. 이현은 한심한 눈빛으로 길드원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뭐가 도입되든 이 기세로 봐선 전부 제패하고 탑을 세울 것 같았다.

“날개라….”

그럼 날개 달고 다니나? 그건 좀 귀엽겠다. 이현은 혼자 실실 웃으며 길드원들 사이에 쪼그려 앉은 제 캐릭을 바라보았다. 예쁘게 생긴 날개였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업데이트 사항을 얼마나 주워듣고 있었을까, 길드원들이 이벤트 던전 열렸다고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길드/백전승: 삐약이도 같이 던전 갈래?]

[길드/이현: 어... 저 채집할 거예요]

[길드/신이내린캐: 이얔ㅋㅋㅋㅋ 예쁜 스완다 캐려고?]

[길드/기토피아: 비연 새1끼 조심하고 뭔일 있음 콜하자ㅋㅋㅋㅋ]

[길드/이현: 네!]

활기찬 대답을 끝으로 이현은 잽싸게 길드존을 뛰쳐 나왔다. 그리고 구석구석을 쑤시고 다니며 채집물을 캐기 시작했다. 간혹 근처에 퀘스트 NPC가 있으면 퀘스트를 받아 몹이 득실거리는 부락에 가서 열심히 솔플도 했다. 그렇게 쏘다니며 열심히 혼자 놀고 있었더니, 어느새 안개귀 부락이라는 필드 정예몹의 서식지에 들어와 있었다.

“일단 부활 스킬을 걸어놓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이현은 자기 부활 스킬을 걸어놓고 정예몹들을 슬금슬금 피하며 구석으로 다녔다. 안개귀 부락은 만렙 유저들도 어려워하는 정예 몹들이었다. 대부분 오진 않았지만, 간혹 네임드를 잡기 위해 포스를 맺고 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고로, 최대한 조심조심 다녀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이현의 노력은 지도 위에 나타난 붉은 점에 의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크기나 빠르기로 보아 분명 신성족이 틀림없었다. 식겁한 이현은 재빨리 전투태세를 갖추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탭을 눌러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신성족 유저를 지정했다.

[랙블: 안 도망가네]

자신감이 아주 하늘을 찌르네. 이현은 떫은 표정으로 랙블을 향해 즉시 시전 공격 스킬을 날렸다. 그러나 그보다 상대방의 기습이 더 빨랐다.

—신성제국의 ‘랙블’이 사용한 일격 기습으로 1490의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일격 기습 연계 스킬 출혈에 저항하였습니다.

[랙블: 아 훈장이었네]

무심하게 들리는 말투가 어쩐지 거슬렸다. 이현은 재빨리 방어 스킬을 두르고 어쌔신 유저의 발을 묶었다. 다행히 디버프는 성공적으로 들어갔다. 뒤로 텀블링한 이현은 즉시 광역 가시를 소환하고 딜이 강한 마법을 캐스팅했다.

[이현: 훈장이라 보태준 거 있냐]

[랙블: 설마]

비연과는 다른 의미로 열 받게 하는 놈이었다. 무슨 자신감인지 구속 디버프도 풀지 않고 얌전히 묶여 있는 모습이, 마치 죽기 전에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봐,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 여유로움의 의미를 이현은 얼마 가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처음은 어찌어찌 호각으로 싸우는 듯했는데, 뒤로 갈수록 이현이 밀러더니 어느 순간에 크리티컬이 터져 그대로 죽어 버렸다.

“아, 왜!”

아냐. 이건 운 좋게 크리티컬이 터져서 그런 거야. 무기빨도 있을 거야. 이현은 게임화면을 내려 랙블의 방명록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무기와 방어구를 낱낱이 살피기 시작했다. 살핀 후에는 조용히 다시 게임으로 돌아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템이 너무 좋은 탓이었다. 심지어 무기에는 마석과는 다른 특정 능력치를 부여해주는 주신석이라는 게 박혀 있었는데, 이현이 죽은 게 아무래도 이 때문인 듯했다.

크리티컬 확률 증가 옵션이 붙어 있었는데, 절대적인 기준으로 무려 30%나 증가하는 옵션이었다. 게다가 그가 죽이고 다닌 신마족의 킬 수도 어마어마했다. 그걸 보자마자 이현은 저가 죽은 걸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

근데 왜 공적이 없지. 누적 킬 수에 비해 공적이 터무니없이 낮았다. 이현은 주변을 살살 살피다, 랙블이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자기 부활 스킬 효력으로 화면에 뜬 부활확인을 눌렀다. 그러나 살아남과 동시에 옆에 은신해 있던 랙블에게 다시 발려 죽었다. 이현이 살아나자마자 몸을 숨기고 있던 랙블이 이현을 다시 죽인 것이다.

—사망하였습니다.

—45,600의 공적을 잃었습니다.

“이 새끼가!”

오랜만에 육성으로 쌍욕이 튀어나왔다. 이현은 자신의 주변을 얼쩡거리는 랙블을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그러다 무언가 눈에 익은 단어를 깨닫고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랙블의 머리 위에 비연과 똑같은 길드명이 걸려 있었다. 캐릭을 클릭하자, 아니나 다를까 블랙블 길드의 길드문양이 마우스 옆에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앞에 명시된 등급.

“…길드… 마스터?”

그러니까, 지금 이현의 앞에 있는 놈이 바로 자유 게시판에 파다하게 퍼진 그 유명한 블랙블의 길마라는 소리였다. 그걸 깨닫자마자 이현은 현타에 빠져 축 늘어졌다. 저런 놈을 내가 어떻게 이겨. 비연보다 더 잘한다고 소문이란 소문은 다 났던데. 어쩐지 너무 여유롭다 했다.

“아니, 왜 자기네 땅 놔두고 여기 와서 이래….”

복귀한다더니, 하자마자 포탈 타냐? 이현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면에 뜬 귀환을 눌렀다. 까맣게 물들던 화면은 로딩화면과 함께 근처 마을로 전환되었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푸념처럼 자리 잡았을 때였다. 전화벨이 에르덴 배경음을 밀어내고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발신자는 김성훈이었다. 이를 본 이현은 힘없는 태도로 전화를 받았다.

“어….”

<목소리 봐라. 왜 또.>

랙블인지 럭블인지, 하는 놈이 나만 죽이잖아! 이현은 마음의 소리를 내뱉으려다 이미 죽은 거 어쩌나 싶어서, 한숨을 폭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

“네가 안 들어와서.”

<지랄 말고, 애들 오늘 온다는데 너도 와라.>

“어디로? 니네 집?”

<그래. 술 퍼마신다는데 싫으면 오지 말고.>

이현은 잠시 고민했다. 맴맴돌은 들어올 낌새도 없지, 날은 더더욱 아닌 것 같지, 그냥 이쯤하고 접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마침 시열도 없겠다, 이현은 그러겠노라 흔쾌히 대답했다.

“콜.”

<4시까지 와라. 시열 형한테 허락 잘 맡고.>

“시열씨 부모님 뵈러 가서 어차피 없어….”

<채이현, 이거 또 질질 짜지. 그럼 지금 오든가.>

이 새끼는 내가 매일 우는 줄 아나. 이현은 으르렁거릴 힘도 없어 알겠다며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에르덴을 종료하고 욕실로 향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친구 놈들 볼 생각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이현은 씻기 전에 시열에게 오늘 성훈이네 놀러 갈 테니 걱정 말라는 문자 하나를 남겨 놓았다. 시열에게 알았다는 문자가 온 건, 한참 뒤였다.

***

“요 쪼그마한 게 그래도 형들 모인다니까 온 거 봐라. 기특하다, 기특해.”

“물리고 싶냐?”

“어허, 이놈의 눈꼬리가 또 산꼭대기로 가려고 하네.”

“지들은 눈이 하나인 주제에.”

“야, 야… 채이현 이거 안 되겠네. 우리더러 눈이 하나란다.”

“이야, 이현이가 우릴 지능적으로 보내네.”

“와…. 이거 지금 우리 못생겼다고 맥이는 거지? 이현이가 참 많이 컸네, 컸어. 안 그러냐, 성훈아?”

이현은 제가 말해도 웃긴 건지 키득키득 웃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오늘 모인 이들은 모임 때 보는 친구 놈들이었다. 정기적인 모임이 아니더라도 시간 날 때마다 간혹 이렇게 술을 마시곤 하는데, 술자리는 늘 김성훈의 집에서 잡혔다.

“야, 우리 눈이 하나면 대체 어떻게 생겨야 멀쩡한 거냐?”

“이현이 그렇게 안 봤는데, 눈이 아주 천장에 달렸네.”

“지 여친 말고 뭐가 눈에 보이겠냐?”

“여친 아닌데?”

모든 이의 시선이 이현에게 향했다. 김성훈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현은 제 술잔에 술을 따르며 씩 웃었다.

“여친 아니고, 좋은 사람.”

“아이고, 그러세요?”

“애인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냐? 내가 더럽고 치사해서 조만간 하나 만든다.”

“에잇, 마시자! 마셔!”

술병째 들고 외치는 친구 놈들을 보며 이현은 술잔을 옆으로 밀고 맥주병을 하나 들었다. 소주 놔두고 왜 맥주를 드냐고 노려보는 시선을 무시하며, 이현은 해맑게 건배를 외쳤다. 술병들이 가볍게 부딪쳤다.

“마시고 죽어 보자!”

“오늘 집에 갈 놈 없길 바란다, 알겠냐?”

“채이현 좀 잡아 놔라. 쟤 집에 못 가게 아주 묶어놓자.”

“중간에 빠질 생각일랑 마라.”

작정한 듯 바라보는 시선들이 빠진다고 하면 아주 죽일 기세였다. 이현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언의 답을 듣고서야 모두는 신나게 술을 들이켰다. 이현의 시선이 김성훈에게 고정되었다. 저 좀 살려달라는 눈빛을 보내길 한참, 김성훈이 복화술을 쓰며 말했다.

“나 보지 마라.”

이런 놈도 친구라고. 이현은 배신당한 표정으로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시열에게 말할 핑계거리를 끊임없이 찾았다.

차라리 시열씨한테도 본가에서 자고 오라고 할까? 그런 생각으로 정신없이 건배하길 한참, 컨디션이 안 좋긴 했는지, 평소보다 덜 마신 것 같은데 취기가 금방 올라왔다. 시야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현은 고개를 꾸벅거렸다.

“야.”

이현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돌아갔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를 본 김성훈이 한숨을 내쉬며 이현에게 손을 뻗었다. 그대로, 작은 머리통이 아래로 기울어졌다. 툭 닿은 곳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단단한 허벅다리 위였다.

“내가 이따 연락해줄 테니까, 자라.”

시열씨가 에르덴에 가야 되는데. 꾸물꾸물 몸을 말며 이현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속삭였다. 몇 번 그렇게 웅얼거리던 이현은 잠시 후, 까무룩 잠들었다. 이현이 잠들고 나서야 말없이 지켜보던 이들이 하나둘 말을 걸었다.

“자는 거 세상 예쁜 거 봐라. 아주 세상 모르게 자지.”

“저놈은 누가 업어 가도 모를 거다.”

“세상 험한데 저래서 되겠냐? 저건 뭐….”

“남이 업어가고도 남지.”

오가는 말이라곤 전부 걱정스러운 말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게 있다면, 생각보다 이현이 눈치가 빠르고 제 처지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선 술이 떡이 될 정도로 마시지 않았다.

“야. 그래도 우리니까 마음 놓고 마시는 거 아니겠냐? 채이현 저거 어디 가서 술 이렇게 마시진 않아.”

“자기도 아는 거지. 중학교 때 모르냐? 선배 같지도 않은 놈들이 그렇게 찝쩍거렸는데, 고등학교 때는 오죽했겠냐고.”

“딴 놈들한테 가서도 이럴까 봐 걱정이다, 어휴.”

“채이현, 쟤가 생각보다 눈치 빨라서 지한테 안 좋은 건 또 단박에 눈치챈다. 걱정 마라.”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김성훈 뒤에 숨어서 우리 경계하는 거 못 봤냐?”

“이야, 그 얄팍한 경계심?”

“하핫, 맞는 말이네. 그래도 다 우리가 좋은 놈이라 마음 놓은 거 아니겠냐?”

“동감. 우리 말고 누구한테 또 이러겠냐.”

성훈의 시선이 쌕쌕거리며 자고 있는 이현에게 닿았다.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모습이, 걱정 어린 말들이 오갈 정도로 무방비해 보이긴 했다. 그래도 어떤 본능이 있는 건지, 이현은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이런 모습을 보였다. 그 기준은 모호했지만, 저에게 해가 될 사람을 판단하는 데에는 제법 좋은 눈썰미를 가지고 있었다.

“성훈아, 바닥도 찬데 여우 새끼 좀 방에다 재우자.”

술병을 기울이던 성훈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술을 마신다고 보일러를 낮췄더니 바닥이 살짝 차긴 했다. 성훈은 술병을 내려놓고 늘어지는 이현의 몸을 일으켰다. 옆에 앉아 있던 친구 놈도 돕겠다고 같이 부축하는데, 상을 툭 치는 바람에 옆에 있던 소주가 엎어져 그대로 이현에게 쏟아지고 말았다.

“술 아깝게 저 새끼가!”

“잘한다, 잘해.”

“왜 여기서 소주가 엎어지고 그러냐. 성훈아, 남는 옷 있냐?”

“하아, 옷 갈아입히고 올 테니까 쏟은 것 좀 치워봐.”

이현을 훌쩍 업은 성훈은 친구들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그대로 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술 냄새가 아주 진동을 했다. 이현을 대충 침대에 눕힌 성훈은 한숨을 내쉬며 술에 젖은 웃옷을 잡아 들췄다. 그러나 들추자마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들춘 옷 밑으로 빼곡히 드러난 울혈 때문이었다.

“…….”

성훈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하얀 피부 위로 물리고 빨린 상처가 어지럽게 피어나 있었다. 집착을 엿본 기분이었다. 성훈은 움직이지 않는 손을 겨우 움직여 들춘 옷을 다시 잡아 내렸다. 그리고 이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홧홧함 사이로 알 수 없는 불쾌함이 치솟았다. 그건 질투를 닮아 있었다. 아니, 질투였다.

“나 뭐 하는 거냐….”

세상모르게 자는 이현의 뺨을 손끝으로 꾹 찌르며 성훈이 씁쓸한 어조로 속삭였다.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해 많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성훈의 기억과 마음속에 이현은 어린 모습 그대로였다. 처음 봤던 건, 중학교에 올라오고 얼마 되지 않아 이동수업을 하게 되었을 때였다. 음악수업이었는데, 이동 중 한 무리가 수군거리며 서 있는 걸 목격했다. 그 틈을 파고들자 무리 안에 있는 두 명의 남학생을 볼 수 있었다. 넘어진 건지, 까진 무릎을 잡고 울먹이는 학생과 그를 부축하려는 학생이었다.

넘어진 애는 덩치가 꽤 컸는데, 부축하려는 놈 덩치가 상당히 작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되었다. 수군거리는 틈 사이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나올 정도니 말 다 한 셈이었다. 그런데도 뭐가 그렇게 열심히인지, 써늘한 그 봄, 작은 학생은 땀까지 흘리며 다친 학생을 부축해 양호실로 데려갔다.

그 작은 애가 채이현이었다. 예뻤었다. 예쁘고, 멋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간질간질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다시 만났을 때에도 성훈의 눈에 이현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비쳤다. 그런데 그게 저만의 착각이라는 걸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멍청한 건 나였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랬다면 지금의 관계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렇다고 막연한 후회가 드는 건 또 아니었다. 성훈에게 이현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존재였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친구의 의미는 절대 변치 않는 성훈의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 있으면…앓지 말고 나한테 와라.”

위로든 뭐든 다 해줄 테니까. 성훈이 씩 웃으며 이현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친구 노릇 하기 참 힘들다며 투덜대자, 이현이 웅얼웅얼 대꾸하기 시작했다. 반박하는 것 같은 모습에 성훈은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웅얼거리던 이현은 성훈이 뺨을 놓자 다시 쌕쌕 자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성훈은 핸드폰을 꺼내 시열에게 연락했다. 몇 번의 신호음 후 시열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주소 하나 보내드릴게요. 여기로 오시면 됩니다.”

<곧 가죠.>

대화는 짧게 끝났다. 성훈은 전화를 끊자마자 이현이 예전에 놓고 간 여분의 옷을 찾아 준비했다. 제가 갈아입힐 수는 없으니, 시열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성훈이 한참이 지나도 안 오는 게 수상했는지, 거실에서 놀고 있던 친구 놈 한명이 성훈의 방으로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아직도 멀었냐? 뭐가 그리 오래 걸려.”

“가서 술이나 퍼마셔.”

“에이 씨, 술 냄새 쩌네. 안 갈아입혔냐?”

“싫다고 뻗대는데 무슨 수로. 그냥 둬.”

“김성훈 이거 개놈의 자식이네.”

“채이현 한 번 뻗대면 답 없는 거 모르냐? 됐으니까 나가자.”

성훈은 거짓말로 상황을 넘기며 친구 놈을 끌고 다시 거실로 나갔다. 저들끼리 무슨 재밌는 얘기를 하고 있던 건지, 남은 이들은 책상을 내리치며 웃고 있었다. 그 틈에 낀 성훈은 술병을 들고 건배를 외쳤다. 여기저기서 술병이 날아와 가볍게 닿았다. 챙 소리를 안주 삼아 성훈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열이 온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부어라 마셔라 술을 마시고 있던 모든 이들은 오밤중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고개를 빼고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 인터폰 너머의 사람을 확인한 성훈은 벌떡 일어나 현관문 쪽으로 가 문을 열어 주었다.

“늦게 오셨네요.”

“이현씨는요.”

점잖게 물어오는 목소리가 차갑게 잠겨 있었다. 추운 기운을 두른 시열에게 성훈은 따라오라며 안쪽 방을 가리켰다. 시열은 신발을 벗고 성훈을 따라 후끈하게 느껴지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평온한 표정으로 자고 있는 이현이 있었다. 시열이 들어오자 성훈은 방문을 닫고 그에게 여분의 옷을 넘겼다. 시열의 시선이 옷에서 성훈으로 느리게 흘러갔다.

“술을 엎었는데 제가 갈아입힐 수가 없어서요.”

“벗겨 봤다는 말로 들리네요.”

“예, 뭐.”

시열은 별말 없이 옷을 들고 이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리를 피해준다고 성훈이 나가자마자 이현의 허리를 당겨 안고 몸을 일으켰다.

“이현씨.”

“음….”

웅얼거리는 이현을 살살 달래며 시열이 술 냄새가 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추위에 움츠러드는 어깨가 시열의 품을 찾았다. 웅얼웅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시열의 품 안으로 흘러들었다. 시열의 입가에 미소가 피식 떠올랐다.

“이현씨 이렇게 취해서 어쩌나.”

이현이 피부로 위로 차가운 손길이 스쳤다. 집착과 애착의 흔적으로 가득한 피부가 서늘한 온도 때문인지 움찔 튀었다. 시열은 조곤조곤한 어조로 이현의 이름을 불렀다.

“이현씨.”

음미하듯 여운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몇 번 그렇게 이현의 이름을 부르자 웅얼거리던 이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깜빡깜빡하며 떠지는가 싶더니, 이현의 몽롱한 시선이 시열에게 향했다.

“어…. 시열씨가…에르덴이…뭐더라.”

“이현씨 혼나야겠네.”

“…저요?”

시열은 왜요? 하고 묻는 이현의 눈가에 입을 맞춰주고 성훈에게 건네받은 여분의 옷을 이현에게 입혀주기 시작했다. 이현이 몽롱한 눈을 깜빡이며 시열에게 매달려 왔다.

“시열씨….”

“네.”

“저 집에 잘 왔어요…?”

“그럼 얼마나 좋을까. 응?”

서로의 코끝이 스쳤다. 시열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는 이현의 입술에 닿은 순간 사라져버렸다. 입술을 가르고 뜨거운 혀가 파고들었다.

“흐….”

더운 숨이 좁은 입안을 맴돌았다. 혀를 얽고 문지르는 감각이 정신을 좀먹듯 아득하게 했다. 붕 뜬 감각이 따라붙고, 힘이 쭉 빠졌다. 그 나른함 사이에서 이현은 시열에게 매달려 헐떡거렸다.

시열이 입술을 뗀 건 이현이 그의 품 안으로 흐물흐물 녹아내렸을 때였다. 시열은 가쁜 숨을 내쉬는 이현의 등을 꽉 끌어안고 이현의 어깨에 입술을 깊게 묻었다.

“…어쩔까요.”

뼈째 다 씹어 삼키고 싶은데. 오싹한 말과는 달리 목소리는 몹시 다정하게 흘러나왔다.

“어… 그럼 저도요.”

가볍게 웃는 듯한 울림이 시열의 가슴팍으로 전해졌다. 시열이 고개를 들고 이현을 내려다보자 이현이 실실 웃는 낯으로 시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저도 시열씨…. 어… 뭐더라. 아! 깨물래요.”

“그럴래요?”

“네.”

“이현씨 후회할 텐데.”

“안 해요.”

시열은 대답 대신 웃으며 이현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꼬집힌 볼이 아팠는지, 술기운에 젖은 이현의 눈꼬리가 축 내려앉았다. 이현의 이마 위로 가벼운 입맞춤이 닿은 것도 그때였다.

“그만 가죠. 얼마나 잘 무는지 확인하러 가야겠네.”

“진짜요?”

“네. 그러니까 일어나 볼까요.”

시열은 이현의 어깨 위로 제 코트를 덮어주며 흐느적거리는 어깨를 잡아 부축해 일으켰다. 몇 번 비틀거리던 이현은 시열이 허리를 지탱해줬을 때에야 균형을 잡고 설 수 있었다. 시열의 도움으로 방을 나서자, 수문장처럼 문을 지키고 있는 성훈이 혀를 차며 이현을 반겼다. 이현은 성훈을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배웅은 못 한다…?”

“저 여우 새끼를 진짜 때릴 수도 없고….”

“한눈팔지 말고… 잘 가야 한다?”

성훈이 한숨과 함께 이마를 슬쩍 짚었다. 피곤함이 가득 실린 성훈의 모습에도 이현은 눈치 없이 계속 손을 흔들었다. 그런 이현의 이마를 검지를 툭 밀며 성훈은 시열에게 눈짓으로만 대충 인사를 하고 말없이 길을 비켜주었다.

“다음에 뵙죠.”

“네, 잘 가세요.”

마지막으로 눈인사를 한 시열이 이현을 데리고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그 뒤를 말없이 따르며 성훈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친구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시열씨….”

“네.”

“어디 가요?”

“이현씨 집이요.”

“우리 집… 우리 집 여긴데?”

“그랬어요?”

달래듯 쏟아지는 목소리가 귓가에 간지럽게 울렸다. 이현은 영문도 모른 채 시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제 신발을 찾아 신었다. 시열이 신으니 저도 똑같이 신은 것이다. 신은 다음에는 다시 성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이현의 말에 성훈은 고개만 슬쩍 끄덕여 주었다. 시열은 성훈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밖으로 이현을 이끌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이현의 모습이 사라지고, 현관문이 철컥 닫히자 거실에는 금세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미약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죄다 입을 쩍 벌린 채 현관문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성훈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태연한 모습으로 술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설명을 바라는 무수한 시선에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해 주었다.

“좋은 사람.”

좋은 사람. 그 말을 곱씹던 사내들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오만상을 짓는 친구들을 보며 성훈은 제 술잔에 소주를 따르고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버럭거리는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에이 씨!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니야!”

“사람인가 귀신인가 했네!”

“저게 사람이냐?! 여우 새끼가 우리더러 눈이 하나라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그게 문제냐?! 아니, 어쩌자고 술 취한 애를 덜컥 보내냐고!”

“딱 보니 보통내기가 아니더만! 당장 가서 다시 데려와, 이 새끼야!”

“…그것뿐이냐?”

성훈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 그 말에 버럭 소리치던 이들이 입을 다물고 성훈을 바라보았다. 성훈이 묻고자 하는 의미를 알아챈 탓이었다. 아주 잠깐 낯선 공기가 머물렀다.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아주 잠깐이었다.

“사람 좋다는 데 이유가 있겠냐?”

“난 모르겠다. 이현이는 그냥 이현이다.”

“편견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인데…. 별수 있겠냐? 친구인데.”

“난 조금 예상했던 일이라 별로 놀랍진 않다…. 그보다는 사람들 시선에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지.”

“야, 야. 이현이 생각보다 강철 멘탈이다, 걱정 마라.”

“맞아, 멘탈로는 아무도 못 이기지.”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질질 짤 때 술 마시면서 같이 세상에 맞서줘야 진정한 친구 아니겠냐?”

친구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성훈이 끝내는 피식 웃었다. 예전부터 우스갯소리로 성훈과 이현에게 ‘니들 둘이 그냥 사귀지 그러냐?’라는 말을 수시로 했던 이들이니, 은연중 편견이 옅어지긴 했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우애로는 이만한 친구들이 없다. 성훈은 다시 제 술잔에 소주를 따르고 벌컥 들이켰다. 입안을 알싸하게 맴도는 소주의 맛이 쓴 것 같기도, 단 것 같기도 했다.

***

몽롱한 정신으로 차창 밖을 지나치는 야경을 보던 이현은 차가 도시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시열을 돌아보았다. 야경에 반사된 시열의 옆모습이 유독 날카롭게 보였다.

“시열씨.”

“네.”

“어디 가요?”

“글쎄요.”

시열은 두루뭉술한 대답을 끝으로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현은 무언가 더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포기하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뺨에 뜨거운 온기가 닿은 것도 그때였다.

“왜 그러고 있어요, 이현씨.”

“…시열씨가 화난 것 같아서요.”

“그랬어요? 미안해요. 화 안 났어요.”

“그러면요…?”

때마침 신호가 걸렸는지, 사위가 고요한 어둠 속에서 시열이 손을 뻗어왔다. 이현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가볍게 입을 맞춰준 시열은 우울한 기색이 가득한 이현을 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현씨가 얼마나 잘 무는지 궁금해서.”

“…저요?”

“그래서 제가 뼈째 다 삼키려고 합니다.”

이현이 눈동자를 옆으로 도륵 굴렸다. 제가 그런 말을 언제 했나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아직 술기운이 가시지 않아 눈가며 볼이 잔뜩 붉었지만, 어눌했던 발음은 아까보단 나아져 있었다.

“어… 네. 잘 물게요.”

“이러다 이현씨 울 거 같은데.”

“네에…. 안 울어요.”

제대로 알아듣긴 한 건지, 이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열은 붉게 달아오른 이현의 눈가를 문지르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잠시 멈췄던 신호가 풀리고, 시열은 다시 운전대를 잡고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멈춘 건, 도시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 어느 외진 숲 근처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길 앞에 차가 멈춰서 있었다. 보이는 건 높게 뜬 보름달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이현이 막 시열을 돌아보았을 때였다. 시열이 손을 뻗어 이현이 앉은 의자 옆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딱, 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의자 등받이가 뒤로 확 젖혀졌다.

“!”

놀라 굳어진 이현의 몸 위로 시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현의 시선이 급히 시열을 찾았다. 나른하게 내리뜬 눈동자가 이현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찰나, 턱이 그대로 잡히고 잡아먹을 것 같은 키스가 쏟아졌다.

“응….”

억눌린 신음이 비좁은 차 안을 울렸다. 이현의 안전벨트가 달칵 풀리고, 뜨거운 손길이 옷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쓰다듬듯 간지럽게 살갗을 훑던 손은 이현이 달뜬 숨을 내뱉은 순간, 욕망을 담고 탐하기 시작했다.

“하… 흐….”

알싸한 알코올 향이 느껴지는 키스였다. 뜨거운 혀를 얽고 탐하던 시열은 이현의 유륜을 살살 문지르다 손끝을 세워 유두를 툭 긁어내렸다. 이현의 허리가 움찔 튀었다. 고통인지, 쾌락인지 모를 달뜬 숨이 시열의 숨과 섞였다.

“이현씨.”

“흐으….”

“다리 벌려 봐요.”

나른한 목소리가 나직이 흘렀다. 이현의 벌게진 눈이 시열에게 닿았다. 울 것 같은 눈동자가 열에 취해 풀려 있었다.

“어…. 시열…씨….”

“예쁘네.”

시열은 이현의 눈가를 살살 쓸며 눈을 접고 말했다. 가만히 바라보던 이현도 눈꼬리를 접고 따라 웃었다. 조금의 위기감도 없는 모습이었다.

“이현씨 이러면 안 될 텐데.”

“네….”

“그냥 잡아먹어야겠네.”

그 말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이현이 시열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를 바짝 끌어당겼다. 뜨겁게 뛰고 있는 서로의 가슴이 맞닿았다.

“…해요…?”

“안아줬으면 좋겠어요?”

“네….”

“이현씨 많이 취했나 보네.”

“아니요. 아니…안 취했어요. 그러니까 안아주면 안 돼요?”

시열은 대답 대신 다시 깊게 키스했다. 아랫입술을 혀로 핥고 미끄러지듯 입안으로 들어가 입천장을 세게 긁자, 이현이 턱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 입가에 쪽쪽 입을 맞추며 시열은 한 손으로 이현의 버클을 풀고 바지와 드로즈를 벗겨냈다. 뜨겁게 데워진 차 안의 공기가 후끈했기 때문인지, 맨살을 훑는 시열의 손이 지나치게 뜨거웠기 때문인지, 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성급해도 이해해요.”

더운 숨과 함께 목 안을 긁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욕망이 담긴, 아슬아슬한 이성의 한계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현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시열이 이현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몸을 기울여 왔다. 허리가 절로 굽어졌다.

“아…!”

불편한 자세에 이현이 허리를 비틀자, 맨다리를 훑던 손이 이현의 말랑한 성기를 잡고 살살 훑기 시작했다. 이현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그 여린 어깨와 목에 키스를 퍼부으며 시열은 얄팍한 허리를 끌어안고 단단해지기 시작한 성기를 애무했다. 기둥을 강하게 훑는가 하면, 손끝을 세워 예민해진 귀두를 살살 긁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이현은 시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잔뜩 흐느꼈다.

“하으…흑….”

“해도 됩니다, 이현씨.”

성기를 감싸듯 쥐고 강하게 쓸어내리던 시열이 어르듯 다정한 어조로 속삭였다. 어깨를 바르르 떨며 쾌락에 취해있던 이현은 그 말에 시열의 목을 꽉 끌어안고 그의 손안에 사정했다. 열에 들뜬 몽롱한 눈동자가 느릿하게 감겼다 뜨였다.

“시열 씨….”

잔뜩 풀린 목소리로 이현이 시열을 불렀다. 어눌한 발음이 녹진녹진 풀린 몸처럼 늘어져 있었다. 시열은 이현의 다리 사이로 허리를 꾹 밀어 넣으며 이현의 목을 슬쩍 깨물었다. 손가락은 더듬더듬 이현의 분문을 찾아 파고들고 있었다.

“네, 이현씨.”

“그냥… 그냥요… 해주….”

“이현씨 아파서 안 돼요.”

“…괜찮아요… 빨리….”

흐물흐물 풀린 아래로 시열의 손가락이 하나 파고들었다. 평소엔 그렇게 뻑뻑하더니, 지금은 술에 취해 늘어져서 그런지 안이 녹진녹진 풀어져 있었다. 칭얼거리는 이현의 입을 키스로 달래며 시열은 입구를 지그시 눌러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뜨거운 체온이 녹을 것 같은 열기를 전했다.

그 안을 크게 휘젓자 이현의 허리가 움찔 떨렸다. 힘없이 벌어진 무릎 아래로 제 팔을 감은 시열은 이현의 내벽 안을 느릿하게 찔러 올리기 시작했다.

“흐… 하아….”

싫다고 고개를 젓던 이현은 시열이 손가락을 하나 더 넣고 내벽을 긁어내리자 흠칫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느릿하게 안을 찌르던 손가락은 얼마 안 가 금세 빠져나갔다. 손가락 대신 닿은 건, 데일 것 같은 열기를 가진 시열의 성기였다.

“이현씨.”

시열은 벌겋게 달아오른 이현의 눈가를 쓸며 그를 불렀다. 잔뜩 풀려 노곤해 보이는 이현의 시선이 시열을 찾아 올라갔다. 시열이 시트를 짚고 몸을 기울이자 이현이 팔을 뻗어 시열의 목을 끌어안았다. 분문을 지그시 누르던 귀두가 사나운 기세로 내벽을 밀고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흑!”

이현의 고개가 시열의 어깨에 묻혔다. 바들바들 떨며 견디는 이현의 귓가에 입을 맞춰주면서도 시열은 멈추지 않았다. 퍽, 소리가 날 만큼 허리를 들이밀고 안을 헤집었다. 녹녹하게 풀린 내벽은 시열의 성기를 야금야금 삼키며 부드럽게 죄어 물었다.

“내 허리에 다리 감아요.”

목 안을 긁는 듯한 목소리였다. 한편으로는 으르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현은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여 시열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안을 밀어 올리던 성기가 뒤로 슬쩍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다시 짓찧듯 강하게 안을 푹 찔러왔다. 내벽이 한 번에 밀려드는 게 느껴졌다.

“흐윽… 아!”

이현의 입술 위로 다시 키스가 떨어졌다. 흐느낌을 내뱉는 입술을 막고 혀를 밀어 넣은 시열은 그 상태로 허리를 움직여 안을 사납게 찔러 올렸다. 이현의 입술 사이로 희미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시열의 입술이 콱 깨물리고 녹진하게 풀어졌던 내벽이 순식간에 꽉 다물려 시열의 성기를 죄여 물었다. 마치 물어뜯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머릿속을 찌르는 잔인한 쾌감에 시열의 눈매가 설핏 찡그려졌다.

그러나 곧 이현의 다리 한쪽을 들어 올리고 시열은 그 안을 진탕 탐하기 시작했다. 다리 사이로 허리가 사납게 찧어질 때마다 이현은 고개를 젖히며 신음을 내뱉었다.

“흐윽… 응…!”

“하… 이현씨.”

이현의 목울대를 깨문 시열이 그대로 성기를 퍽 밀어 넣고 귀두로 안을 뭉근하게 비볐다. 내벽이 바르르 떨며 작은 진동을 전했다. 다정하나, 부드럽지는 않은 행위였다. 시열의 것이 깊은 곳을 찌르고 밀어 올릴 때마다 무섭도록 뜨거운 열기가 쾌락과 함께 이현을 덮쳤다. 어느 땐 눈앞이 새하얗게 탈색되기까지 할 정도였다.

“흑!”

내벽을 거칠게 밀고 들어오던 성기가 생소한 곳을 찍어 누른 순간, 이현이 참지 못하고 시열의 어깨를 콱 물었다. 그러나 사납게 덤벼드는 몸짓은 여전히 멈출 줄 몰랐다.

“하아… 힘들… 흣!”

“하아… 그랬어요? 미안해요, 이현씨.”

시열이 이현의 눈가를 부드럽게 닦아주며 달래듯이 키스해주었다. 거친 숨결이 서로의 입안을 어지럽게 오갔다. 들어 올린 이현의 다리를 제 허리에 감게 하고 시열은 다시 허리를 강하게 밀어 올렸다. 이현이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쾌락인지 고통인지 모를 아릿한 감각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짓이겼다.

시열은 품 안으로 움츠러드는 이현의 눈가와 뺨에 잔잔한 키스를 해주며 스르륵 풀리는 다리를 애무하듯 쓰다듬었다. 안 만큼이나 뜨거운 열기가 시열의 손안에 묻어났다.

“시, 시열씨… 흑….”

눈물로 흐려진 눈동자가 시열을 찾았다. 잔뜩 빨려 부은 입술이나,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가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제 것을 먹음직스럽게 삼킨 아래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벌어진 다리도, 안을 찌를 때마다 움찔움찔 어깨를 떠는 모습도 전부 다 사랑스러웠다.

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매달려오는 이현의 손길에 기대어 사납게 탐하길 몇 번이나 반복하는데도, 그 손은 시열을 절대 놓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시열은 안온함에 취했다. 머릿속은 타는 듯한 쾌락에 정신이 없는데도, 그와 다른 편안함에 마음에 놓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시열씨…. 더요…더… 흐으…!”

“쉬— 알겠어요….”

흉흉한 성기가 야무지게 무는 내벽을 가르고 깊은 곳을 쿡 찔렀다. 잔뜩 흐느끼면서도 보채는 이현의 입에 혀를 밀어 넣으며 시열은 그대로 빠르고 잘게 허리를 쳤다. 바르작거리는 다리를 팔에 감고 끌어올리자, 제법 아팠는지 이현이 허리를 비틀며 달달 떨었다. 그 허리를 한 팔에 감고 시열은 좁아 드는 살을 가르며 안을 퍽퍽 쑤셨다. 밀리고 딸려오는 내벽이 불에 덴 것 같은 뜨거움을 주었다.

“흑…! 아….”

그새 단단해진 이현의 성기가 울컥 액을 뱉어냈다. 움찔움찔 떠는 게 마치 아직 부족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달뜬 숨을 한 번 내쉰 시열은 손을 뻗어 이현의 성기를 쥐고 강하게 훑어 올렸다. 자극이 컸는지, 이현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시열은 드러난 목울대를 혀로 길게 핥으며 이현의 귀두를 엄지로 강하게 문질렀다. 이현의 눈이 질끈 감겼다.

바르르 떨던 이현은 시열이 안을 강하게 꿰뚫었을 때, 그의 손안에 탁한 정액을 쏟아냈다.

“흐읏…!”

“큭….”

사정으로 바짝 좁아진 내벽이 시열의 것을 물어뜯을 것 같이 잡아 죄었다. 오싹하게 덤벼드는 쾌락에 시열은 잠시 행위를 멈췄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사정을 끝낸 이현이 녹진하게 녹아들자마자 시열은 그대로 이현의 어깨를 눌러 잡고 그 안을 사납게 들쑤시기 시작했다.

“싫…아…! 자, 잠깐… 흑!”

사정으로 예민해진 안을 잔뜩 들쑤시자 이현이 고개를 저으며 흐느꼈다. 움찔움찔 떨던 내벽은 시열이 무게를 싣고 깊은 곳을 찌르자 다시 확 오므라들었다. 비틀기라도 하듯 성기를 꽉 죄는 내벽의 감각에 시열의 코끝이 찡그려졌다. 탁한 숨이 이현의 콧등 위로 떨어졌다. 쾌락이 담긴, 뜨거운 숨결이었다. 곧이어 행위는 격렬해졌다.

이현의 흐느끼는 음성이 뜨거운 공기와 함께 차 안을 떠돌았다. 시열의 시야에 엉망으로 흐트러진 이현의 모습이 들어왔다.

“하아, 이현씨.”

시열의 몸이 기울어졌다. 이현의 입술을 찾아 진득하게 입을 맞추며 덤벼들던 시열은 잠시 후, 뜨겁고 깊은 곳에 성기를 박아 넣은 채로 강렬한 절정을 맞이했다.

녹을 것 같은 열기가 쾌락과 뒤섞여 강한 여운을 남겼다. 여운을 흘리듯 긴 숨을 내쉬며 시열은 노곤한 시선으로 저를 보는 이현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힘듭니까.”

이현은 대답 대신 가쁜 숨을 내쉬며 시열의 손에 뺨을 비볐다. 느릿하게 깜빡이던 속눈썹은 얼마 안 가 그대로 까무룩 감겨 버렸다. 시열의 손을 꼭 쥔 채, 곤하게 잠들어버렸다. 세상모르게 자는 이현의 입술을 톡톡 두드리던 시열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잘 자요, 이현씨.”

달아오른 공기로 후끈한 차 안에서 시열은 이현을 안은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사위가 고요해서인지 밤하늘이 유독 운치 있게 보였다. 충족감과 안온함이 가슴을 뜨겁게 채웠다. 시열은 한참이나 이현을 품에 안고 그렇게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열이 이현의 몸에서 제 것을 빼낸 건 한기를 깨달았을 때였다.

열기에 취해있던 몸이 식는 걸 깨달은 시열은 이현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기고 옷을 잘 여며 주었다. 그리고 제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차 히터를 세게 올린 후, 운전대를 잡았다.

차는 곧 매끄럽게 어두운 숲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깜빡깜빡.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더라. 이현은 익숙한 천장을 보며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려 애썼다. 드문드문 떠돌던 기억이 자리 잡기 시작한 건, 허리를 뒤틀다 훅 치고 올라오는 통증을 느꼈을 때였다.

‘시열씨… 더요… 더…. 흐으…!’

“…….”

이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왜 하필 저 말이 저렇게 생생하게 기억나는지 모르겠다. 결국 이현은 얼굴을 감싸며 소리 없이 괴로워했다. 시열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시열의 손에는 컵이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이현씨, 일어났습니까.”

“…네.”

이현이 시선을 슬쩍 피하며 작게 대답했다. 시열이 다가와 침대 협탁에 컵을 내려놓고 이현의 옆에 앉아 상체를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

“이현씨 어제 잘 물던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현은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어제의 기억 때문에 도저히 시열을 볼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보채고 칭얼거렸는지, 정말 술이 웬수였다.

“머리는 안 아픕니까? 꿀물 좀 탔는데, 좀 마셔 봐요.”

“…안 아파요.”

“그럼 허리가 아픈가.”

짓궂은 말에 이현의 귀 끝이 새빨개졌다. 옆에서 피식 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현의 귓가에 짧은 키스가 닿았다.

“이현씨 고개 좀 들어봐요.”

“…….”

이현이 머뭇머뭇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시열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현의 눈가에 금세 시열의 뜨거운 손길이 닿았다. 한쪽 눈을 슬쩍 감는 이현에게 시열은 꿀물을 내밀며 웃어주었다.

“이거 마시고 밥 먹어요.”

이현은 컵을 받아들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꿀물을 내려다보았다. 단내가 확 풍겨왔다. 한 모금 마시자 따뜻함이 목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시열씨.”

“네.”

턱을 괸 채 이현을 보고 있던 시열이 눈매를 접으며 대답했다. 시열에게 묻어있는 차가움이 눈 녹듯 사라지는 미소였다. 이현은 유달리 기분 좋아 보이는 시열을 힐끗 보다, 컵 표면을 살살 만지며 말했다.

“…앞으로 술 저, 적당히 마실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린데, 안 그래도 됩니다.”

어제처럼 제가 데리러 가면 되니까요. 기분 좋게 흘러나온 소리에 이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술이고 뭐고 앞으로 그냥 얌전히 있어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얼마나 꿀물을 홀짝이며 있었을까, 이현은 문득 어제 시열이 부모님을 뵈러 갔던 걸 떠올리고 시열을 돌아보았다.

“시열씨, 부모님 잘 뵙고 왔어요?”

“네. 이현씨 얘기를 해드렸는데, 좋아하시더군요.”

“네… 네? 네?! 제 얘기요?!”

이현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놀라 굳어진 이현과 달리 시열은 태연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현의 뺨을 살살 어루만지며 말했다.

“다음에는 같이 오라고 하시는데, 이현씨는 어떻습니까?”

이현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떠돌았다. 시열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무슨 말이 오갔는지도 모른다. 단지, 웃고 있는 시열의 모습만이 이현에게 안심을 전할 뿐이었다. 그 미소에 기대보기로 했다.

“…좋아하실까요?”

“좋아하실 겁니다.”

제가 이현씨를 사랑하니까요.

속삭이듯 들려온 소리에 이현이 흰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걱정도 잠시 가슴 속이 뜨거워졌다. 이현은 시열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그의 입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럼 갈게요!”

“씩씩하네.”

시열이 이현의 허리를 당겨 끌어안았다. 이현은 제가 먹던 꿀물을 힐끗 보더니 시열의 입가에 컵을 대어 주었다. 시열의 얼굴에 곤란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배시시 웃는 이현을 보고는 졌다는 듯 바람 빠진 웃음을 짓고 기울여주는 꿀물을 받아 마셨다.

“시열씨가 타준 꿀물 맛있는 거 알아요?”

“흐음, 매일 타줘야겠네요.”

다정한 말이었다. 입술 위로 깃털 같은 입맞춤이 닿았다. 애정이 느껴지는 키스에 이현은 팔을 뻗어 시열의 목을 끌어안았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현이 씩 웃자 시열도 마주 보고 웃어주었다.

간질간질함이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손안에는 여전히 시열이 준 컵이 들려 있었다. 이현은 손안에 든 컵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게 마치 시열의 온기와도 같아서, 이현은 차마 놓을 수가 없었다.

설렘이 느껴지는 그런 따뜻함이었다.

<힐러의 생존기>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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