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의 웃는 모습이 스쳐간다.
"개새끼들...."
다들 웃는 낯을 하고 와서 칼을 꼽았다.
그 덕에 내 화려한 의복이 온통 붉게 젖어 들어가는 중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전통 있는 공작가의 적통이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개선식 저녁에 친구라고 믿었던 개새끼들의 배신 때문에 이름 모를 숲에서 죽어간다니.
3류 소설에나 등장할 설정 아닌가.
하지만 현실은 소설보다 잔혹하다.
시야가 흐려진다. 이제 숨을 쉬는 것도 편치 않다.
몸에서 힘이 빠진다.
"시발...."
눈 앞이 환해졌다.
아무 것도 없는 흰 공간이 나를 반겼다.
공간의 한 복판에 털이 검은 강아지 한 마리가 몸을 말고 앉아 있었다.
'책에서 읽은 저승사자와는 많이 다른데?'
그쪽으로 다가가니 강아지가 귀를 쫑긋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본 강아지가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뒈졌냐?"
응?
"뭐??"
"뒈져서 온 거 맞지?"
강아지가 말을 하는 것, 나에게 뒈졌냐고 물어보는 것.
어떤 것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하고 있으니 강아지가 쉴 새 없이 말을 이었다.
"괜한 걸 물어봤네. 뒈졌으니까 여기 왔겠지. 어후 오래도 기다렸네. 야!"
"어? 응? 네?"
"나는 계약대로 하는 것 뿐이다? 불만 있으면 나중에 니네 선조 만나서 얘기해라?"
대체 이 똥개가 뭐라고 지껄이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 순간, 똥개가 내 가슴팍을 향해 달려들었다.
##
"도련님? 도련님?"
기억 속의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알버트 하인리히.
내 예절교육 선생이었던 사람.
참 엄했었지....
"시안 도련님? 오늘은 손님이 오신다고 했지 않습니까. 어서 일어 나시죠."
참 집요하게도 귀찮게 하는 걸 보니 그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
"알버트?"
"일어나셨군요. 나오셔서 의복을 갈아 입으시지요."
진짜 알버트다.
죽기 전에 과거의 기억을 보여준다는데 과거체험 중인가?
다급하게 나를 침대 밖으로 끌어내는 알버트의 손길에 하염없이 몸을 맡겼다.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때를 보여준다더니 진짜인가 보네. 이 시절에는 정말 걱정 하나 없이 매일 매일이 즐거웠지.'
그러던 중 침대 아래에 몸을 말고 자고 있는 검은 강아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내 품 속에 뛰어든 강아지였다.
저택에 개를 들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저 개새끼...."
알버트가 나를 돌아봤다.
화난 도깨비의 얼굴이다.
철썩 철썩
"개새끼라니요! 공작 각하께서 들으셨다면 경을 치셨을 겁니다! 그런 단어는 몬트라우 가문 장자의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엉덩이에 작렬하는 알버트의 손길.
이건 꿈이 아니다.
왜인지 몰라도 나는 과거로 돌아왔나 보다.
근데 내가 맞는 걸 웃으면서 보고 있는 저 개새끼는 대체 뭐란 말인가.
< 탐나는 재능 >
탐나는 재능
먼저 한 가지 짚고 시작하자.
나는 망나니가 아니다.
근엄하신 아버지와 자애로우신 어머니 아래서 자라....
아, 이건 아닌가.
공작가문을 이을 적장자다운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는 하며 살아왔다는 거다.
물론, 귀족가문 아들내미, 딸내미들 중에 개차반 많다.
소문이 아니라 내가 정확히 아는 것만 해도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은 가뿐히 넘어갈거다.
뻑하면 하녀와 영주민을 임신시켜 영지 내에 자신의 핏줄이 그득했던 카콜 백작의 셋째 아들.
고아원에서 애들을 입양하고 마법으로 고문한 뒤 버리는 게 취미였던 사사리안 남작의 첫째 딸.
황실 성기사단의 일원이면서 악마 숭배에 열 올렸던 리온하트 후작의 첫째 아들 등등적어도 이런 인간 언저리의 삶을 영위하는 놈들과는 다르다, 이 말이다.
이쯤 설명하면 꼭 사람들은 제 멋대로 오해를 시작한다.
-보는 눈이 많아서 그렇지 네놈도 다를 것이 없다.
-이름뿐인 공작가문인데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몸 사리는 것이 아니냐.
에휴, 이미 귀를 틀어막고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는 데 내 말이 들리기는 하겠는가.
근데 후자는 부정할 수 없어 조금 슬프다.
아버님이 원인 모를 병으로 투병하시면서 제뉴인 공작가의 명성과 영향력이 점점 떨어졌었지.
물론 내가 작위를 이어받은 후에는 다 옛말이 되었지만.
생각하니 또 열 받네.
이번 전쟁만 마치면 내가 역사 상 최초의 대공이 될 거라고들 그랬는데.
거기서 뒤통수를 쳐?
너, 내 앞에서 쭈뼛 쭈뼛 숨고 있는 너, 이 새끼야.
##
"허.... 난감하군. 공작 각하께 급히 전해야 할 물건인데...."
"오늘 아침, 급한 일이 있으시다고 입궐하셨습니다. 가지고 오신 것은 잘 맡아 두었다가 공작 각하께 전하겠습니다."
집사장인 케인즈가 말했다.
로킨 포츠라니, 포츠라니 백작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당황스럽겠지, 아버지께 소개할 요량으로 아들까지 데리고 왔는데 아버지가 안 계시니.
그런데 이대로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다.
"안 돼. 여기 있어야해."
포츠라니 가문은 마법제약으로 이름 높은 곳, 아마 포츠라니 백작 옆에 놓인 조그마한 상자는 아버지의 고통을 가라앉힐 진통 효과가 있는 차일 것이다.
지금도 신선도 유지를 위해 포츠라니 백작이 상자를 향해 미량의 마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상자만 남겨둔 채 백작이 떠난다면 안의 내용물은 다 삭아 없어질지도 모른다.
"시안 공자님?"
"아버님께서 말씀 하신 거야. 최대한 빠르게 업무 마치고 올 테니 포츠라니 백작 잘 대접하라고."
포츠라니 가문은 우리 가문의 허가 하에 제뉴인 지방 곳곳에 약국을 열어 상당한 부를 쌓고 있다.
공작 가문의 적장자가 가지 말라면 가지 말아야지, 어떻게 하겠는가.
"맞습니다. 이 물건은 제가 공작 각하께 직접 전해야합니다.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시안 공자님의 배려, 감사합니다."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너는 이리와. 나랑 놀자."
이게 아이라서 좋은 점이다.
열 다섯만 되었어도 이 어색한 공기 속에서 서로 궁금하지 않은 질문을 하며 시간을 보냈어야 할 텐데, 열 살짜리 어린애가 무엇을 하든 사람들은 그닥 신경 쓰지 않는다.
내 말에 포츠라니 백작 옆에 찰싹 붙어 있던 남자 아이가 자기 아버지의 눈치를 봤다.
놀자는 말에 본능적으로 반응했지만 분명 행동 조심하라는 얘기를 자기 아버지께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왔을 것이다.
백작은 오히려 화색이 되었다.
제국에 일곱 밖에 없는 공작 가문의 후계와 자신의 아들이 얼굴을 터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이득으로 돌아올지 알기에.
얼굴이야 익히지.
근데 나는 개선식 때 나오는 술에 마법사들도 감지 못할 약을 탄 놈이랑 하하호호 할 만큼 성격이 좋지는 못하다.
[야, 아까 그거 용린차(龍鱗茶)냐?]
복도를 걸어가는데 똥개가 말을 걸었다.
며칠 같이 살아본 결과, 이 똥개는 내 몸에 예속되어있다.
똥개는 나만 볼 수 있고, 똥개의 말은 내게만 들린다.
내게서 일정 범위 이상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근데 예속된 것 치고는 무지하게 건방지다.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니네 아버지 병은 저걸로 치료 못해.]
[저건 그냥 임시방편이다.]
[저 백작보다는 네 뒤의 꼬마가 소질이 훨씬 좋은데, 이 놈을 키워보지?]
발걸음이 멈췄다.
잔뜩 주눅이 든 채 조심스레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꼬마의 이름은 저비스 포츠라니.
3년 후부터 마법제약에 두각을 드러내서 12살의 나이에 제국 대학에 입학하는 희대의 천재다.
8년 과정의 제국 대학을 4년 만에 마치고 평생을 황실 소속 제약사로 살아가는 그런 천재.
40년쯤 뒤에는 제국의 마법제약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황제께서 직접 후작으로 봉하시기까지 한다.
근데 이 똥개가 이걸 알아본다고?
'너 어떻게 알아. 얘 소질이 좋은 걸.'
[보여.]
'뭐?'
[그냥 보인다고.]
[아까 네 옆에 서있던 집사는 충성심이 아주 높고 사리사욕이 없어. 백작은 머리는 좋은데 좀 소심하네. 뒤의 꼬마는 1000년 넘게 살아온 나도 거의 본 적 없을 정도로 마법과 약학에 뛰어나.]
'왜 그런 게 보인다고 말 안 했어.'
[네가 안 물어봐서.]
말을 마친 똥개가 내 방으로 휙 뛰어 들어갔다.
'저 새끼는 대체 정체가 뭐야?'
##
"와......"
내 방에 들어선 저비스가 벽 한 쪽을 가득 채운 책장을 보고 감탄했다.
보통 저 나이대의 애들은 방 반대편에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장난감에 관심을 가지는 쪽이 자연스럽지 않나?
천재는 천재인가보다.
사실 이전 생애에서도 내가 이 책장에 손을 대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공간이 모자라서 이쪽으로 밀려왔을 뿐, 나는 전쟁사와 전략 전술에만 관심이 있어서 그 외의 책은 다 불쏘시개 취급했다.
사실 지금 엄청나게 고민중이다.
원래 계획은 뼈도 못 추릴 만큼 패서 공포감을 심어준 다음 나만 보면 오줌을 질질 싸게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의 병도 그렇고 잘 밀어줘서 내 편으로 만드는 게 좋지 않나 하는 그런 고민.
저 똥개가 건방지기는 해도 범상치 않은 건 사실이니까 한 번 믿어봐?
"읽고 싶은 책 있어?"
내 목소리에 저비스가 움츠러들었다.
"아..아닙니다. 공자님... 없습니다."
포츠라니 백작이 사고치지 말라고 얼마나 윽박질렀는지 알겠다.
"무슨 공자님이야. 형이라고 불러. 말도 편하게 하고."
"아..안 됩니다! 제가 어찌 공자님께 그런 호칭을 쓸 수 있겠습니까."
7살짜리치고 말도 또박또박 잘 한다.
햐~ 전생에 내 술에 약만 안 탔어도 훨씬 이뻐 보였을 텐데.
그 일은 잠깐 잊고 잘 키우는 방향으로 노선을 틀자.
"너네 아버지한테 가서 네가 내 말을 안 듣는다고 한다?"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애는 애다.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건 안 됩니다."
"그럼 빨리 말 놓고 형이라고 해."
"혀...혀엉...."
[재밌네. 누가 네 뺨을 치거든 반대편 뺨도 내밀어라? 그런 건가? 아직 저 꼬맹이는 자기가 네 뺨을 세게 갈길 거라는 걸 모르니까 해당이 안 되나?]
'조용히 해 똥개 자식아. 3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야.'
[이 몸은 똥개가 아니야! 인류의 재앙! 몰아치는 검은 폭풍! 늑대들의 왕이다!]
유독 똥개라는 말에 저렇게 극렬하게 반응을 한다.
뭐 지금 보니 눈도 노랗고 기골도 좀 탄탄해 보이는 것이 늑대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지금은 조그만 강아지랑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똥개 자식.
"무슨 책 보고 싶어? 뭐 꺼내줄까?"
"저...저거요...."
저비스가 내 눈 높이보다 조금 더 위에 있는 책을 골랐다.
<제국 북부에 자생하는 약초와 그 쓰임>? 이딴 책이 내 방에 왜 있어.
아버지 병 때문에 가문의 의사와 약사들이 보던 게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나 보다.
책을 꺼내어주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책장을 넘기느라 정신이 없다.
저택이 시끌시끌해졌다.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책에 정신이 팔린 저비스를 두고 밖으로 나섰다.
장대한 기골, 칠흑 같이 검은 머리, 몬트라우 남자들의 상징과도 같은 검은색과 붉은 색이 절묘하게 섞인 눈동자까지.
나의 아버지, 이번 대의 제뉴인 공작, 제로 몬트라우가 확실했다.
다만 어딘가 피로감이 늘어붙은 눈동자와 야위어가는 뺨이 병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케인즈, 포츠라니 백작은 이미 간 건가?"
"아닙니다. 공작 각하께서 말씀 하신 대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가 말 한대로?"
"그렇습니다. 시안 공자에게 포츠라니 백작을 잘 대접하라고 말씀하시고 입궐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아버지와 내 눈이 마주쳤다.
내가 인사하고 씩 웃으며 어서 들어가 보셔야 하지 않겠냐고 에스코트하듯 손을 들어올렸다.
아버지는 갸우뚱한 표정을 하더니 응접실로 들어갔다.
'됐다.'
이제 집 안의 모든 시선과 신경은 응접실로 집중 될 터, 계획을 가동할 차례다.
"이거 봐라~"
내가 큰 상자를 들고 방에 들어서자 책을 보고 있던 저비스가 얼른 달려와 도왔다.
고놈 빠릿빠릿하기도 하네.
"와...공자님...아니 형.... 이게 다 뭐예요?"
상자를 열자 아까 저비스가 보던 책에 나오던 약초들이 잘 말린 채로 몇 개씩 들어있었다.
방에 올라오기 전 하인을 불러 제약사들에게서 받아오게 한 것이다.
예상대로 저비스는 이런 저런 약초들을 만지는데 정신이 팔렸다.
"줄까?"
"이걸요?"
제국 북부는 불모지나 다름없어 그곳에서 자라는 약초들은 수도 적고 매우 귀하다.
그걸 준다니 눈이 커지는 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근데 그냥 줄 수는 없고, 나랑 약속을 하나 해야 해."
"할게요! 할게요! 형!"
"약속을 하는 건 좋은데 이건 우리만의 비밀이라 아무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돼. 괜찮아?"
귀한 약초 선물에 이어서 남자 꼬맹이들의 심장을 뛰게 하는 키워드 '우리만의 비밀', 넘어오지 않을 수가 없겠지.
저비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여기 손 대봐."
책상에서 종이와 펜을 가져온 뒤, 손을 올리게 했다.
나도 오른손을 올린 후 왼손으로 슥슥 마법진을 그렸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이런 어린애한테.....]
옆에 내려와서 그걸 보고 있던 똥개가 한 마디를 했다.
암, 미쳤지.
한 번 죽고 나니까 뵈는 게 없더라.
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건 50년 쯤 후에나 개발되는 '주종계약진'.
종된 자는 주인의 의지에 거역 할 수 없고 어떠한 형태의 상해도 가할 수 없다.
또한 이 계약의 장점은 마력이 필요 없고 본인이 말하지 않으면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래는 전쟁포로를 처리하기 위해 발명된 작품이다.
주종계약진은 6개월마다 '재계약'과정을 거쳐야하고 그것마저도 점점 효력이 약해져 10년의 시간이 지나면 효력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마법진을 개발한 마법사의 말이었다.
재계약 시기를 지나면 그 대상에게는 다시 주종계약을 걸 수 없었다.
뭘 모르는 어릴 때 맺을수록 효과가 좋고, 반대 의사를 지닌 성인과 강제로 맺을 수도 있지만 이 경우 주종계약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례도 있었다.
아무리 마법이라 해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쉽게 누를 수 없다는 증거였다.
이 녀석의 재능은 그런 귀찮은 과정을 통해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만한 가치가 있었다.
마법진이 다 그려지자 빛을 발하면서 절반은 내게, 나머지 절반은 저비스의 팔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몇 초 뒤, 팔을 타고 올라가던 마법진이 흔적도 없이 녹아 몸 속으로 사라졌다.
"책이랑 약초는 챙겨 줄 테니까 가는 길에 가져가. 우리만의 비밀인 거, 알지?"
저비스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이 녀석이 나를 해칠 일은 없다.
볼수록 참 똘똘하게 생긴 녀석이란 말이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망나니가 아니다.
그런데 한 번 죽고 과거로 돌아와 보니까.
냉혈한 정도는 충분히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