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러와 마나 (3) >
거짓말.
다 거짓말이다.
침대에 누워 나를 향해 아버지가 하셨던 말들은 다 거짓말이다.
-피로가 쌓여 잠시 어지러웠던 것 뿐이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해라 시안, 아비는 아무렇지 않다.
-제뉴인 공작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새어나가서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미안하오, 일라이자. 오랜만에 집에 온 당신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줘서 미안하오, 금방 일어날테니 걱정 마시오.
-캐슬린, 울지 말거라. 몸 약한 네가 걱정되는구나.
지금의 발작은 6개월에 한 번 수준이지만 점점 빈도가 잦아진다.
4개월, 3개월, 2개월, 한 달, 2주, 1주....
발작의 빈도가 잦아질수록 회복도 느려져 자연히 아버지께서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 틈을 타 제뉴인 공작가에 대한 다른 귀족들의 견제는 심화되고, 이름 높았던 송곳니 기사단마저 몇몇을 빼고는 와해 되다시피 한다.
자신은 괜찮으니 곧 일어날 것이라는 말.
동요하지 말라는 말.
다 거짓말이다.
앞으로의 일을 알 수 없어서 만들어지는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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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그려 앉아 무릎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방의 저편, 늑대의 노란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캐슬린...."
[그대로 잠든 줄 알았더니?]
"캐슬린은 오러도 배운 적이 없고 경지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왜 병에 걸린 거지?"
[궁금한 게 참 많은 녀석이야.]
똥개가 앞다리를 내리고 엉덩이를 올리더니 한 번 기지개를 쭉 폈다.
[네 동생은 마나의 축복이 깃들어있어.]
"개소리. 마나의 축복이 깃든 사람은 어릴 때부터..."
똥개가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그렇지, 티가 나지. 물건을 흔든다거나, 바람을 불러 일으킨다거나?]
전생의 캐슬린은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캐슬린에게 마나의 축복이 깃들어 있다니?
[마나의 축복은 식물 가꾸기 같은 거야. 작은 화분에 씨앗을 심어 싹을 틔우고, 때가 되면 커진 몸에 맞게 화분도 키워나가고 그런 거.]
처음 듣는 소리였다.
마나의 한도는 개인 별로 다르지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 마나 이론의 가장 기본이었다.
허나 저 똥개는 지금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조치만 있다면 마나의 한도를 늘릴 수 있다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헌데 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네 동생을 가질 때, 이미 네 아버지는 마나 결석에 걸린 상태였어. 몸 안에 그득한 마나가 새로운 몸을 찾았으니 그쪽으로 일부 흘러 들어갔겠지?]
"마나의 축복이 깃드는데 그 전에 이미 마나가 자리를 잡았으니...."
[똥멍청이는 아니네. 네 동생의 상태는 비유하자면 조그마한 접시 위에 한 줌의 흙이 올려져 있는 상태에서 거대한 소나무가 뿌리를 박고 접시를 틀어 쥐고 있는 상태야.]
"그걸 네가 어떻게 낫게 할 수 있다는 건데."
[나는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영수(靈獸:신령한 짐승)야. 고기가 아닌 마나를 먹고 살지. 인간의 몸에 붙은 마나 정도는 떼어내서 먹을 수 있어.]
"그렇게 해서 네가 얻을 수 있는 건? 그 마나가 전부야?"
[마나를 먹는 건 내가 얻는 게 아니지. 그건 부산물이야. 내가 네 가족들의 병을 없애주는 대신, 내가 메조와 거래를 했던 곳으로 데려다 줘.]
똥개를 바라봤다.
어린 강아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별 차이가 없는 체구였지만 눈, 그 샛노란 눈은 틀림 없는 맹수의 눈이었다.
그 맹수의 눈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놈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전생에서 가족들을 잃었다.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족들을 잃을 수는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최소한의 발버둥이라도 쳐야 했다.
생각을 정리한 뒤, 똥개에게 말했다.
"좋아, 거래를 하자. 대신,"
[대신?]
"내게 마나를 심어."
전생에서 수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마법사들이 죽어나가자 제국은 마나의 축복을 통해서가 아닌, 인공적으로 마나를 심어 마법사를 만드는 연구에 착수했었다.
엄청난 희생을 기반으로 연구는 성공했다.
어마어마한 자원이 투입되기에 양산할 수는 없지만 인공적인 마법사가 탄생한 것이다.
비록 그렇게 만들어진 마법사들은 마나의 축복을 받은 마법사들보다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역할을 수행할 정도는 됐었다.
나는 그렇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마법사가 어떻게 마나를 사용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게는 힘이 필요하다.
오러와 더불어 마나가 있다면 내 성장은 더욱 빨라질 것이다.
[미친놈인가? 당장이야 괜찮을지 몰라도 네가 마나나 오러 중 하나만 경지에 이르면 바로 결석이 생긴다니까? 네 아버지 꼴이 난다고!]
"넌 마나를 먹는다며? 내게 결석이 생기면 네가 먹어치워."
그 말에 늑대의 입이 닫혔다.
"아버지께 생기는 결석을 계속 네가 먹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건 너무 번거로워. 아버지께서 몇 달 씩 집에 안 계실 때도 많고."
[그래서 네 몸에 아버지와 동생에게 있던 마나를 심고 그걸 관리 하겠다? 푸하하하하 이거 내가 얼토당토 않은 놈을 살렸구만? 푸하하하하]
"거래, 할 거야?"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지. 양질의 먹이를 제공 하겠다는데. 내가 결석을 먹어 치우지 않으면 넌 죽게 될 테니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걱정할 이유도 없고. 거래 성립이다!]
지금 아버지의 방에는 사용인들 몇 명만이 있을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보겠다고 자리를 비켜달라는데 지키고 서 있을 사람을 없을 터, 몸을 일으켜 똥개, 아니 투브와 함께 방 밖으로 나섰다.
이 녀석과는 이제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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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몬트라우 , 제뉴인 공작이 자신의 침소에서 눈을 떴다.
그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응?'
몇 년 전부터 안쪽에서 느껴지던 돌 덩어리 같은 것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조심히, 아주 조심히 몸에 오러를 모았다.
조금만 오러를 모으려고 해도 극심한 고통에 흩어져 버리기 일쑤였던 오러가 미약하지만 천천히 모여들고 있었다.
공작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꿈틀
공작의 발치에 뭔가 걸렸다.
상체만을 침대에 걸쳐 놓고 자고 있는 그의 아들, 시안 몬트라우가 보였다.
'녀석.... 그리 걱정이 되었느냐.'
공작이 움직이는 낌새를 보이자 시안 역시 눈을 떴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별 것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괜찮다."
제뉴인 공작은 아들의 손을 붙잡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오러를 모으지 못한다는 사실은 극소수만 알고 있는 비밀 중의 비밀이었다.
'웨폰 마스터'가 오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의 강함에 매료되어 모였던 기사단의 이탈이 이어질 것이고 종국에는 공작가에 대한 다른 귀족들의 극심한 견제와 모략이 있을 것이 당연해 감춰왔던 것이었다.
허나 이제 그런 걱정은 떨쳐내도 좋았다.
"아버지."
시안이 공작을 향해 말을 했다.
"의문이 많으시겠지만 그냥 들어주시길 부탁 드리겠습니다."
"무엇이냐?"
"저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쪽에 손을 대지 않으시겠다고 제게 약속해 주셨으면 합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제뉴인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누가 아들에게 내 상태를 말했다는 말인가.'
알버트? 포츠라니 백작? 다른 누군가?
'언젠가는 시안도 알았어야 할 일이다.'
공작이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약속하마. 네게 걱정을 끼쳐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쉬셔야 하는데 방해를 한 것 같습니다. 돌아가 보겠습니다."
돌아서 문을 열고 나가는 시안의 뒷모습을 보고 공작은 10살의 뒷모습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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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기대에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커헉! 허억..허억..."
고통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투브가 아버지의 목을 물어 뜯으니 일렁이는 기운이 딸려 나왔고, 녀석이 내 몸에 그것을 박은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아버지의 침대에 엎드려 기절해 있었다.
아버지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몸 안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콰앙! 우르르르
고통을 이기지 못한 내가 몸을 이리저리 내 던지는 바람에 책장과 가구들이 제자리를 잃고 마구잡이로 뒹굴었다.
쾅쾅! 쾅쾅!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괜찮으십니까?
사용인들이 내 방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크흐... 괜찮아! 내가 부를 때까지 들어오지 마!"
한바탕 소리를 친 이후에야 사용인들이 조용해졌다.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간신히 잦아들었다.
엉망이 된 방 안이 눈에 들어왔지만 정리할 기운 따위는 없었다.
침대에 엎어져 거친 숨을 내뿜고 있는 가운데 투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봐도 미친놈이야. 억지로 마나를 심어 놨으니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고 해도 좋을 거야.]
"캐슬린... 캐슬린은 어떻게 되는 거지?"
[네 동생은 마나의 축복이 깃든 몸, 그릇에 맞는 원래의 마나만 남겨 놓을 거야.]
"캐슬린에게서 떼어낸 마나도 나한테 심어."
[지금 느끼는 고통도 보통이 아닐 텐데 다시 한 번 겪겠다고?]
"죽지는 않았잖아? 한 번 죽어보니 웬만한 고통은 고통으로도 안 느껴져."
[식은땀을 그렇게 흘리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는 거래를 했어. 나는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있는 거야."
잠이 쏟아지는 가운데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투브, 현재를 볼 수 있다고 했지?"
[그렇지.]
"나는 어떻게 보이지?"
[...... 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이런 녀석은.... 아니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서 그런가... 흐흐...."
이제는 쏟아지는 잠에 저항 할 수 없었다.
그 사이로 투브의 말이 들렸다.
[이 녀석이 예전의 그 놈처럼 마나와 오러를 전부 다루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마검사가 또 탄생하는 건가? 그럴 리는 없겠지?]
마검사... 마검사라.... 듣기에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듣기만 해도 강력한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