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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6화 (6/180)

< 기사단 (2) >

기사단 (2)

사내들의 흥분이 눈에 잡힐 듯 들끓고 있었다.

연무장 좌우로 마련된 좌석에 앉은 정식 기사들은 연무장에서 벌어지는 일에 눈을 떼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날 것의 승부에 뛰어들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그들의 심정을 나타내듯 어느 기사는 계속해서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고, 다른 기사는 계속 옆에 놓아둔 자신의 애병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풀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졌습니다."

호기롭게 덤벼들었다가 열 합도 버티지 못하고 무기를 놓친 채 연무장의 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견습 기사가 분하다는 듯이 자그맣게 말했다.

분해 할 것 없다.

네 앞의 두 녀석도 너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다음."

검을 회수해서 검집에 밀어 넣고 내가 말했다.

다리가 풀려 일어서지 못하는 견습기사를 부축하기 위해 시종 두 명이 뛰어 들어왔다.

아무리 내가 전생에서 오러를 익히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전장에서 셀 수 없는 기사들의 영웅적인 무위를 지켜봤고 이번 생에서는 괴물 같은 검사에게 직접 수업을 받고 있다.

예상대로 견습기사들은 내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무기가 그리는 궤적과 오러의 운용에 치기와 미숙함이 묻어 나왔다.

그것들이 만들어 낸 빈틈에 내 검을 찔러 넣어 그들의 중심을 무너트리는 것은 아기 팔을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오히려 너무 쉽게 이기는 것처럼 보일까봐 수를 접어주기까지 해야 했다.

뚜벅. 뚜벅.

패배한 견습 기사가 연무장 밖으로 나가고 다음 견습 기사가 들어오는 동안, 나는 왼손을 검의 손잡이에 얹고 오른손을 옆으로 늘어트린 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연무장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얼굴이 흥분으로 물들고 있는 기사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너희의 주인 될 사람이다.' 하는 무언의 시위.

단 한 명의 기사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잡아먹을 듯 강렬한 투기를 발산해왔다.

내 눈길이 아버지 옆에 서 있는 한스에게 이르렀을 때, 한스의 눈은 먹이감을 사냥하는 맹수의 눈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누구보다 기사의 긍지를 중요시하는 한스다.

앞의 꼬마에게 자신의 마음과 긍지를 바칠 것인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어이, 올라온다.]

뒤를 보니 어깨가 떡 벌어진 견습 기사가 장창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강건해 보이지만 어딘가 흐릿함이 머무는 잿빛 눈동자, 짧게 자른 금발.

분명 눈에 익은 얼굴이다.

"막시밀리앙이라 합니다."

견습기사들은 성(姓)을 잃는다.

권위나 배경에 매몰되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를 믿고 정진하라는 뜻.

그러나 이 견습 기사의 이름을 들은 순간 나는 이 녀석이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이 났다.

막시밀리앙 베베르.

베베르 백작가의 넷째 아들.

송곳니 기사단의 견습 기사 생활을 마치고 본가인 베베르 백작가로 돌아가 백작가의 기사단인 '푸른매 기사단' 소속이 되어 5년 후에는 푸른매 기사단의 단장의 위치에 오른다.

아버지 사후 흔들리는 송곳니 기사단에 접근하여 기사들에게 오러도 못 다루는 주인을 섬길 것이냐고 이간질 했고, 그 결과 송곳니 기사단은 약 20명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내가 장군의 자리에 올라 다시 권력을 잡은 이후에도 온갖 중상모략과 정치로 내 앞길을 방해했었다.

마지막 연회에서도 이 녀석이 구석에서 나를 흘끔거리던 기억이 난다.

"저는 앞의 녀석들과는 다를 겁니다. 패배하시더라도 괘념치 마셨으면 합니다."

건방지고 남을 내려다보는 태도는 전생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저 모양이었다고 생각하니 더 소름이 끼쳤다.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간사한데 오러는 나름 다루네. 이런 놈들이 권력을 잡으면 나라가 망하는 거야. 내가 한 두번 본 게 아니다?]

'동감이야.'

내가 네놈의 끔찍한 악몽이 되어주마.

날을 무디게 만들어 놓은 연습용 검을 빼들었다.

한 손으로 검의 끝을 바닥을 향하게 들고 다른 손을 앞으로 내밀어 손바닥이 하늘을 보게 했다.

까딱 까딱

그리고 입모양으로 막시밀리앙을 향해 말했다.

'들.어.와.'

내 행동에 주위의 기사들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막시밀리앙의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녀석도 나름 백작가의 자제로 태어나 견습 기사 생활을 거치면서 배운 게 있었는지 바로 달려들지는 않고 호흡을 고르며 장창을 바로잡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때의 막시밀리앙은 열일곱, 정식 기사 서품을 받는 열여덟까지는 한 해가 남았으니 견습 기사 중에는 물이 오를 대로 올라있는 상태일 것이다.

다른 견습 기사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말 역시 완전히 틀리다고는 할 수 없었다.

스륵 스륵

흥분을 가라앉힌 막시밀리앙이 창을 꽉 부여잡고 내 주위를 돌며 기회를 엿봤다.

오러를 발에 집중하고 있는지 큰 덩치를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낙엽이 서로를 스치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

파짓-

공기를 찢는 파공성을 내며 막시밀리앙의 창이 내 몸의 중심을 향해 섬광처럼 파고들었다.

분명 날을 죽인 연습용 창일텐데도 날이 오러로 견고하게 덮여 위협적인 예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땅을 향했던 검 끝을 들어올렸다.

"오오!"

몇몇 기사들이 탄성을 뱉었다.

검을 쓰는데 있어서 내려치는 것보다 올려치는 것이 힘을 싣기가 어렵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나의 올려치기 한 번에 창에 덮여있던 오러가 흩어졌다.

이대로는 절대 내 몸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챈 막시밀리앙이 재빠르게 창을 안쪽으로 당기며 자세를 다시 잡았다.

"한 수를 더 양보하겠다."

말을 마치고 나는 다시 처음처럼 칼을 아래로 내렸다.

네 살이나 어린 내게 자신의 공격이 쉽게 파훼 당한 것도 용납이 안 될 텐데 마치 고수가 하수에게 지도하듯 수를 양보하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막시밀리앙은 속이 뒤집히고 있을 것이다.

뿌득-

내 말에 막시밀리앙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는지 이를 한 번 갈아내고는 나를 향해 쇄도했다.

오러가 실려 있긴 했지만 견제의 의미가 강했던 첫 번째 공격과는 다르게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끝났군.]

똥개 녀석, 밉상이긴 해도 보는 것은 정확하다.

전력으로 임하는 상대에게는 나도 전력으로 대응해주는 것은 당연하다.

두 손으로 검을 잡고 다리로 땅을 밀어냈다.

"헉!!"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빠르기로 창의 간격 안으로 다가온 나를 보고 막시밀리앙이 당황했다.

극한까지 끌어올린 오러가 몸 안에서 뛰노는 것이 느껴졌다.

앞으로 한 걸음이면 내 이마와 막시밀리앙의 이마가 충돌할지도 모르는 거리에서 몸을 멈췄다.

그리고 그대로 검을 위쪽으로 밀어 올렸다.

쿠와아아아

오러를 뿜어내고 있는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작은 폭포를 연상케했다.

그래도 그동안 수련했던 시간을 헛으로 보낸 것은 아니었는지 막시밀리앙이 창을 몸 앞으로 가져다가 가로로 눕혀 내 검을 누르려했다.

콰앙

내 검과 막시밀리앙의 창대가 충돌하면서 폭음이 발생했다.

우리 둘의 주위로 강렬한 바람이 일었다.

한 숨 돌렸다고 생각했는지 막시밀리앙의 얼굴에 안도감이 내렸다.

그리고 창에 힘을 주어 나를 밀어내려고 시도했다.

뿌득

창대에서 난 소리에 막시밀리앙이 놀라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안타깝지만 내 검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몸 구석구석에 오러를 돌리고 검을 밀어 올렸다.

뿌득 뿌드득

검과 창대가 닿은 곳이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휘어지기 시작했다.

빠직-!

마침내 창대가 부러지며 창이 두동강 났다.

당황하고 있는 막시밀리앙의 배를 걷어찼다.

"우윽!"

그리고 배를 얻어맞은 녀석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오러를 회수한 검으로 막시밀리앙의 전신을 난타했다.

"기사의 길을 걷는 자가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는 데 소홀히 한 점!"

퍽!, 으윽-

"기회를 주었음에도 분노에 눈이 멀어 위험에 몸을 내던진 점!"

퍼버벅! 허억-

"무엇보다, 감히 내게 패배할 것이라 단언한 점!"

퍼억! 퍼억! .....

사실 네가 이토록 얻어맞는 이유는 전생의 너에게 있단다.

불쌍한 열 일곱의 막시밀리앙.

"중지! 중지!"

한스가 크게 외쳤다.

한바탕 매타작이 끝난 뒤, 연무장에 들리는 소리는 오줌을 지린 채 정신을 잃은 막시밀리앙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 밖에 없었다.

아들이 오줌을 지릴 정도로 맞았다는 것을 알면 베베르 백작이 길길이 날뛰겠지만 지금 막시밀리앙은 성(姓)을 잃은 견습 기사, 가문이 개입하는 것은 큰 불명예다.

정식 기사 서품을 한 해 앞둔 견습 기사가 견습도 아닌 13살짜리 애한테 두들겨 맞아 실신했다. 그것도 스스로가 승리를 단언한 대련에서.

막시밀리앙은 이 사실을 감추려고 애쓸 것이지 불명예를 감수하면서까지 본가에 알릴 위인은 아니다.

자신의 약점은 감춘 채 남의 약점을 틀어쥐기를 좋아했던 위인이니.

이것이 힘이다.

가문, 지위, 금전과 같은 잡다한 배경을 모두 제외한 오로지 내 개인의 힘.

내 앞을 막았던 녀석들을 단죄할 힘.

장군의 자리에 올라 다시 한 번 가문을 일으켜 세웠지만 이런 힘이 없어 시덥지 않은 중상모략에 시달리고, 종국에는 죽음에까지 이른 과거와는 다르다.

머리를 땅에 처박거나, 머리와 몸이 분리되거나.

내게 저항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두 가지 선택지다.

전율과 고양감이 온 몸 구석구석을 타고 흘렀다.

"막시밀리앙을 데리고 나오게"

한스의 지시에 시종 둘이 들것을 들고 뛰어들어왔다.

막시밀리앙을 들것 위로 올려놓던 시종이 주르륵 흐르는 노란 물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 한 번으로 막시밀리앙이 고분고분 말 잘 듣는 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뱀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전생의 막시밀리앙을 생각해 봤을 때 오히려 더 악독하고 집요하게 나를 괴롭히려 들 가능성이 더 높았다.

하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만약 놈이 그렇게 나온다면 더욱더 철저히 으스러트려서 오늘 당한 일이 차라리 나았다고 생각하게 해주면 될 뿐이다.

"그렇게까지 해야 했느냐."

더러워진 연무장을 정리하기 위해 마련된 잠시간의 쉬는 시간, 옆에 앉은 아버지의 물음이었다.

뜨끔했지만 태연한 척을 했다.

"저들은 강한 주인을 원한다. 아버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보여줬을 뿐입니다."

"시안. 네 오러와 검에 분노가 새겨져 있더구나."

"아직 제가 많이 부족한가 봅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아버지가 몇 초 정도 다른 곳을 쳐다보다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잘 했다. 몬트라우에게 패배라니... 안 될 말이지."

[이 양반도 참 솔직하지 못하구만.]

'내 말이.'

한스가 옆으로 다가왔다.

"각하, 마지막 대련이 준비 되었습니다."

이미 연무장에 올라와 있는 마지막 견습 기사가 보인다.

이번에도 아는 얼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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