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 가짐(2) >
마음 가짐(2)
"괜찮아. 다가오지 마."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이셨습니다... 사람을 불러 오겠습니다."
"괜찮다고 했잖아!"
내 호통에 황급히 뛰어나가던 발소리가 멈췄다.
몸을 돌려 당황하는 소년을 바라봤다.
진한 갈색의 머리와 푸른 눈동자. 귀티가 흐르는 귀공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였다.
그러나 그 속의 추악함을 나는 알고 있다.
전생에서 내게 웃으며 다가와 술을 권하고 휘청이는 나를 부축한다는 핑계로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가장 먼저 칼을 찌른자.
내 귀에 대고 속삭이던 놈의 목소리가 기억에 생생하다.
-공작 각하, 당신은 너무 커져버리셨습니다. 내려오셔야지요.
레이바 비텔스바흐.
황제폐하를 측근에서 보필하는 궁정백宮庭栢가문의 장자.
서른 언저리에 궁정백 직위를 세습한 뒤, 사법의 수호자라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별칭에 걸맞게 분리운동 전후의 혼란한 제국을 잘 수습하여 실권자로 떠오른다......
지랄.
사법의 수호자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서 황실의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들개 같은 놈들이 비텔스바흐 놈들이다.
철저하고 말끔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으로 유명해 황실 사람들이 자기 배우자는 안 믿어도 비텔스바흐가는 믿는다는 소리가 만연했다.
그 이중적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자가 이 레이바 비텔스바흐였다.
낮에는 법률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법률의 허점과 맹점을 고민했지만 밤에는 초법적인 권한을 등에 업고 황실의 근심을 제거했으니.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 놈이 제 충성을 과시하려 벌인 일인가, 아니면 맡겨진 일을 처리한 것 뿐인가.'
생각하기도 싫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내 계획을 백지로 돌려야 할 수도 있었다.
황실이 개입했다면 명을 내린 것은 누구인가.
황실의 눈에 들고 싶은 방계 황족? 황태자전하? 황후마마?..... 황제 폐하?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가 혼란해졌다.
황가皇家는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이자 천외천天外天.
그곳과 적대하기 시작하면 제국에 발붙일 곳은 없다.
만약... 만여가지의 가능성 중 하나라도 황실의 입김이 있다면 반역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인가...
"나가 봐."
레이바를 향해 손을 저어 나가라는 표시를 했다.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마나로 다리 하나를 지져버리던지 오러를 두른 손으로 얼굴을 짓뭉갤 것 같았다.
레이바가 꾸벅 인사하고 황급히 나갔다.
옆에 있는 똥개에게 자조적으로 말을 걸었다.
"침착하게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쉽지 않네."
[병신.]
"그래, 병신이지. 냉정함을 유지하지 못하는 병신."
[그거 아닌데, 병신.]
[어떤 존재든 과거의 기억과 행적에서 자유롭기는 어려워. 네가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네 맘대로 하라고 말은 했지만 흔들리는 건 당연한 거야.]
[내가 왜 병신이라고 한 줄 알아? 흔들리는 와중에 뿌리가 단단히 박혀있으면 결국 자리를 잡는데 너는 시간이 있음에도 뿌리 박지 못했거든.]
[강해지고 싶다, 강해질 거다. 말이랑 행동을 아무리 하면 뭘 하냐? 정작 중요한 마음이 없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소리쳤다.
"웃기지마! 내가 그런 마음이 없다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
[자격? 당연한 걸 말하는데 자격이 필요해?]
똥개가 발코니에 놓인 테이블의 의자를 향해 뛰어 올라 앉았다.
[솔직히 이야기해. 방금 저 꼬맹이 봤을 때, 어떻게 더 잔혹하고 괴롭게 복수 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 지금부터 어떻게 조여들어가야 네 발 아래서 추하게 뒹구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생각했어? 뒤에 어떤 놈들이 있으며, 있다면 어디서 추적해 갈지 생각했어? 네가 가지고 있는 유리한 점을 모두 쏟아 부을 생각을 했냐고.]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그것들을 고민하지 않았다.
[나는 너를 읽을 수 없어. 하지만 방금 네 눈에 가득한 망설임은 읽을 필요도 없었지. 지들이 알아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거든.]
이제 의자도 모자라 테이블 위에 올라선 똥개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처음의 작은 강아지 같은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지금 나와 같은 눈높이에서 나를 집어삼킬 듯 보고 있는 저 노란 눈은 이 녀석이 과거 한 지역의 지배자였다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왜 견습 기사들과의 대련에서 보이지 않던 망설임이 복수의 직접적인 대상 앞에 있을 때 보이지? 네가 원하는 강함은 그런 건가? 약자 앞에서는 가차 없고, 강자 앞에서는 눈을 굴려 대는 그런 강함?]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적나라한 지적이 폐부를 찔러 헤집어 놓았다.
갈갈이 찢긴 폐가 목을 틀어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걸 강함이라고 부르려거든 그냥 편히 먹고 사는 걸 권하고 싶네. 부모님도 살아계시고 동생도 살아있는 그런 행복한 삶일테니. 나는 그냥 모른 체하고 있을게. 네가 죽으면 다른 곳으로 가거나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겠지 뭐.]
[저번에 말했었던 두 번째 의문점도 풀렸네. 지금 생에서 마음도 못 잡고 스스로를 못 믿는 놈이 지난 생이라고 달랐겠어?. 병신.]
온몸이 뜨거웠다.
가슴에서 시작되어 온 몸을 빠르게 휘젓는 건 무엇인가.
분노인가.
통한인가.
이건... 수치였다.
저 녀석이 하는 말에는 하나 틀림이 없었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도 알고 있고 시간도 많다.
누구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 있으면서 누구보다 멍청하게 굴었다.
분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아서라,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 동안 너를 진짜라고 생각해서 감화됐나 보다.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보는 눈이 없어져.]
내 눈을 다시 한 번 똑바로 바라보고 한 마디를 더 한 똥개가 바닥으로 내려왔다.
[메조 몬트라우, 네 선조는 나를 죽이려고 왔을 때 아무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어. 부끄러운 줄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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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나와 똥개는 기술자들과 마도공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마차 안에 있었다.
말들의 움직임이나 길가의 돌부리가 만들어내는 진동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 아주 편한 마차지만 연회에서 있었던 일로 우리 둘의 사이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창문 밖으로 거대한 근육이 위협적인 사람 하나가 자신의 덩치에 뒤지지 않는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할아버지를 뵈러 가는 여행에 송곳니 기사단 단장이 호위로 붙을 줄은 몰랐다.
한스는 직접 호위를 자청했다고 한다.
혼자만 온 것도 아니라 기사 단원 몇과 로하나스를 데리고 왔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했다.
전대 가주인 할아버지께 기사단을 대표해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실상은 내게 한 번 더 기사의 길을 걸을 것을 권유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아버지도 일부러 내가 승낙했다는 얘기를 하지 않고 한스를 붙였다.
조금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만 할 뿐이다.
"공자님. 원래는 오늘 워스푸스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계획이었습니다만 날씨가 심상치 않습니다. 앞에 보이는 민가의 협조를 얻어 일찌감치 쉬었다가 새벽녘에 비가 좀 그치면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아마 내 허락을 구하기 전에 이미 민가에 사람을 보내 놓았을 것이다.
그 정도의 일머리는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집주인이 순순히 허락했는지 마차가 민가의 뒷마당으로 들어섰다.
따라온 종자들과 기사 몇이 빠르게 하룻밤을 지낼 야영지를 세우기 시작했다.
"불편한 잠자리가 될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괜히 제가 내려간다고 말하면 영주들이랑 영민들만 힘들죠. 몇 곳만 들리고 할아버지만 뵙고 올라갈 거니까, 이게 좋아요."
편한 곳에서 잘 수야 있겠지만 아버지께 자신의 이름 한 번 말해 달라고 애걸복걸 할 것이 뻔한 영주들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야전의 생활은 익숙하다.
이 편이 나았다.
##
"더, 빠르게!"
"오러를 너무 믿지 마! 신체가 버텨주는 것 이상의 오러는 독이다!"
"핫!"
저녁을 먹고 난 후, 기사단원들은 공터에서 각자 짝을 맞춰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 소리에 내가 나와서 구경을 하고 있으니 한스가 내 뒤쪽으로 슥 다가왔다.
기사 단장의 호위라니.
영광스럽다.
"한스 단장."
"예, 공자님."
"강해지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한스가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강해지지 위한 행동, 강해질 것이라는 말,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
똥개는 내게 마지막이 없다고 했다.
마차를 타고 내려오는 내내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으나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궁금했다.
강함을 추구하는 기사들에게 강해지는 것은 어떻게 다가올지.
"끊임없이 오러를 운용해도 오러가 마르지 않는 경지에 이르는 것? 라이벌이나 적을 뛰어 넘는 것? 명성을 듣고 대련을 하고자 찾아오는 이들에게 패배를 선사하는 것?"
이런 저런 보기를 던졌으나 한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저는 말입니다, 공자님"
한스의 입이 떨어졌다.
"또래보다 덩치가 있고 힘이 조금 강한 것 외에는 별달리 내세울 것이 없는 견습 기사였습니다. 제 스승님조차 저보고 그저 그런 평범한 기사가 될 것이라고 말씀 하실 정도였으니 짐작이 가십니까? 헌데 전 평범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동기들이 연습을 마칠 때, 한 번 더 오러를 운용하고, 10번 더 칼을 휘두르고, 1시간 더 갑옷을 입고 뛰었습니다."
과거에서는 듣지 못했던 한스의 이야기였다.
그저 과묵하고 듬직한 기사였던 한스의 또 다른 면모였다.
"그 때의 동기들 중 아직까지 기사로 살아가는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공자님, 강함이 뭐라고 생각 하냐는 질문에 저는 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강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의 조그만한 재능과 질긴 노력을 믿었다는 말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과묵한 한스로 돌아가 버렸다.
##
그 날 밤, 나는 늦도록 잠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야."
아무 대답이 없었다.
"네 말대로 나는 병신이야."
[...]
"휘두를 힘은 있어도 마음은 잡지 못한 병신이라고."
[...]
"복수한다고 말을 하고 힘을 모으지만 나는 어렴풋이 '이 행복이 계속 되었으면'하고 생각하고 있었나 봐. '아무도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조금만 참으면 피를 볼 일은 없지 않을까.'...."
똥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귀가 이쪽으로 서 있는 걸 보니 듣고 있기는 한 것 같았다.
"근데 마음 잡았어. 뿌리 박았다고. 나는 그 새끼들 다 죽여야겠어."
아픈 말을 해야 했다.
".... 가족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투브를 안아 올렸다.
"투브. 도와줘. 네 도움이 필요해."
녀석은 내 품 안에서 거칠게 몸을 털더니 바닥으로 착지했다.
[멍청한 놈. 이제 알았네. 내 도움을 안 받으면 되는 게 없지?]
"쪼끄만 게 폼 잡기는...."
그 날 밤은 길었으나 우리의 이야기는 밤보다 더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