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데(1) >
엔데 (1)
"여긴 너와 나 밖에 없으니 목적을 이야기해 보거라."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제게 진노하셨다.' 라는 소문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할아버지가 앞에 놓여있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래서?"
"꼴도 보기 싫다며 다른 왕국의 지인에게 교육을 맡겨버렸다. 그게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정도가 어떨까합니다."
"제뉴인 공작가의 장자씩이나 되는 녀석이 사라지고 싶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70을 넘겨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는 몸이지만 정신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원래 가족들과 멀어지는 것은 조금 더 이후의 일로 계획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멀리 나온 김에 마음을 굳게 먹었다.
마음은 연약해서 주위의 환경에 쉽게 물든다.
지금은 강철 같은 마음이라고 하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무뎌져 버릴까 두려웠다.
강철을 벼려내어 닿는 것은 무엇이든 베어 넘기는 검이 되느냐, 그저 그런 쇳덩이가 되어 창고에 처박히느냐, 그것을 결정해야 할 때가 지금이다.
이건 커다란 도박이다.
할아버지는 전생에서 만난 적이 거의 없다.
돌아가시기 전에 몇 번 뵌 것이 전부다.
그러나 아버지가 종종 말씀하시길 남자답고 호방한 것을 굉장히 좋아하신다고 하여 이렇게 도박의 주사위를 던지고 있는 참이었다.
"사춘기가 심하게 왔구나. 못 들은 것으로 할 테니 며칠 쉬다 가거라."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네 나이 대의 아이들이 하기 쉬운 착각이다."
"저 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열 세 살짜리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늙어가는 이 할애비도 할 수 있을게다."
오러를 끌어올렸다.
몸 주위에서 아지랑이처럼 오러가 피어올랐다.
"이제 패륜까지 저지르려고 하느냐 시안! 오냐, 아무도 모르게 남부의 정글에 있는 교화소로 보내주마! 감히!"
할아버지도 늙었지만 몬트라우의 피를 가진 사람, 정교하게 오러를 피워냈다.
오러를 거두지 않은 채로 손을 들어 마나를 움직였다.
반대편에 있는 책장에서 책이 뽑혀 내 손으로 날아왔다.
머리가 울렸다.
"마..마법...."
"이래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 어떻게 된 것이냐....오러와 마법이라니..."
할아버지가 놀란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자리에 털썩 앉으면서 오러를 가라앉혔다.
나도 그에 맞춰 오러를 회수하고 마나를 끌어들이는 것도 멈췄다.
머리가 울리는 것이 멈췄다.
[멋진 척은 다 해놓고 쓰러져야 했는데... 에잉...]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 사실을 누가 또 알고 있느냐."
"없습니다. 누군가 이 사실을 알고 소문이라도 낸다면 끌려가 실험체로 쓰일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내게는 드러낸 것이냐?"
"아직 완벽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을 만들어 주실 분은 할아버지 뿐이십니다."
할아버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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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버릇 없이 굴길래, 내가 아는 지인에게 보냈네. 문제 될 것이 있는가?"
프리드리히 몬트라우, 전대의 제뉴인 공작 앞에서 한스는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각하.. 문제 될 것은 없으나 일이 이렇게 되면 호위인 제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걱정 할 것 없네. 이미 아들에게 연락을 보냈네. 며느리에게는... 좀 미안한 짓을 했구먼."
"공자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겠습니다."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네."
"각하!"
"그럼 할애비 앞에서 오러를 뿜는 놈을 가만 둬!"
노인은 거하게 호통을 한 번 치고 허리를 숙여 거친 숨을 뿜었다.
옆에 있던 집사가 얼른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중년의 시녀 하나가 한스에게 다가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각하께서는 기력이 예전 같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각하를 불편하게 하시면 안 됩니다. 나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스가 나간 후, 노인의 호흡이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주위의 인원을 물린 후, 프리드리히는 언제 그랬냐는 듯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어제 손자가 앉아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오러를 운용하면서 마나를 다룬다.... 녀석이 활약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갈 것 같아서 아쉽구먼.'
그리고 프리드리히는 한 가지 생각을 더 했다.
'눌하스. 덩치만 큰 녀석, 손녀가 얼마나 영특한지 보라고? 내 손자는 오러랑 마나를 같이 다룬다. 바보 같은 녀석아!'
친구에게 이겼다는 기쁨에 솟아나는 웃음을 프리드리히는 감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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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2년이라고 한 거야?]
"2년 후면 할아버지 돌아가시거든. 그 전에 한 번은 더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
할아버지께서 내어주신 말을 탄 채, 앞에 투브를 얹고 달리는 중이었다.
"너 기억 안 나? 네가 선조님과 만난 곳이 어디인지?"
[너도 맨 처음에 돌아와서 '여기가 이랬나? 아닌데...' 이거 얼마나 많이 한 줄 알아? 겨우 30년, 40년을 거슬러 와도 그런 녀석이....]
[내가 있던 때는 천 년 단위로 몇 번을 거슬러 올라야 하는 줄 알아? 달라진 게 얼만데!]
아무것도 모르면, 내가 다 찾아?
분하지만 저 녀석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단 한 쪽에 말을 멈추고 지도를 폈다.
"일단 이 길로 가면 엔데라는 작은 도시가 있어. 제뉴인 지방에 전해오기로는 네가 쓰러진 곳이 여기라고 하거든? 이쪽으로 간다?"
[거 참. 쓰러진 게 아니래도 그러네.]
"대충 그러려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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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잠시 신원 확인이 있겠습니다. 신원을 증명하실 물건이 있으십니까?"
한 무리의 경비대원이 엔데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신원 확인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이 내게 다가와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 있냐고 물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말 없이 할아버지께서 주신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몬트라우가의 손님임을 증명함. 현장 책임자는 증명서를 가지고 있는 자가 통과 했다는 사실을 보고하지 말 것. 프리드리히 몬트라우할아버지의 직인이 찍힌 증명서를 보고 경비대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공작은 자신의 영지에서 왕과 같은 존재, 비록 은퇴한 뒤 노년을 즐기는 전대의 공작이라 해도 그 위엄은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런 말단의 병사는 남작의 직인도 본 적이 없을텐데 공작의 직인을 보게 되었으니 오줌이라도 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다.
"다니엘 슈미츠."
내가 가슴팍에 있는 명찰을 보고 그의 이름을 읽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장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시장이 나를 보자고 하거든 자네부터 찾아 책임을 묻겠네. 알겠나?"
"예, 옛!"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경비대원이 군기가 제대로 든 얼굴을 하고 경례를 올려붙였다.
말을 몰아 엔데의 내부로 들어섰다.
그리고 엔데의 중앙광장에 도착했을 때, 투브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놈들! 저딴 걸 만들어 놨다고? 날 뭘로 보는 거야!]
엔데의 중앙 광장에는 칼을 든 위엄 있는 표정의 남자가 늑대의 목덜미를 밟고 칼을 들어 내리 꽂으려는 모습의 동상이 서 있었다.
[내가 그 놈을 밟고 있었지! 아래 깔리다니! 말도 안 돼!]
[저렇게 작게 만들어 놓다니!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녀석에 이렇게 흥분하는 것은 내가 마나를 끌어당긴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처음이던가.
그 때보다 훨씬 더 흥분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분함을 못 이기겠는지 동상 위로 뛰어 올라가 긁고 물기를 반복했지만 지금까지처럼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분을 못 이기고 바닥에 자빠져 몸을 마구 비틀고 있었다.
녀석을 안아 들었다.
"나중에 일 잘 풀리면 동상 바꾸는 거 고려해 볼 테니까, 일단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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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에 말을 맡기고 방을 하나 잡았다.
아이 티를 벗어가고는 있지만 누가 봐도 아직은 소년인 내게 방을 주지 않겠다고 한 주인장은 2배의 요금을 내겠다는 내 말에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만 달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내줬다.
"느낌이 좀 와? 네가 쓰러진... 아니 거래를 한 곳이 여기래."
[전혀. 일단 나는 험한 산에 살았는데 여긴 너무 평지야. 세월이 흘렀어도 산이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는 없어.]
흠... 엔데에 내려오는 소문이 거짓이라는 말인가...
개척왕의 전설이 시작된 곳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엔데 사람들이 들으면 경을 칠 소리네.
쏠쏠한 관광수입도 문제가 될 테고...
투브의 말이 내게만 들리는 게 꽤나 다행이다.
지도를 펼쳤다.
엔데 주위의 산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며칠 정도는 산에서 헤매야 할 것 같았다.
험한 여정이 될 것 같았다.
"미처 물어보지 못했는데, 몸을 찾고 나랑 떨어지게 되면 뭘 할 거야?"
[일단 이 도시를 덮쳐서 저 빌어먹을 동상을 조각 하나 남지 않게 박살내고... 음...]
나를 보더니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을 했다.
[비밀이야.]
"인간을 해치거나 그런 일은 아니지?"
[내가 왜? 고기를 먹을 필요도 없는데?]
"전설 속에서는 한 입에 인간을 세 네 명씩 집어 삼켰다고...."
[웃기지 마. 전투불능으로 만들기는 했어도 죽이거나 먹지는 않았어. 내 영역 침범 안 했으면 너희는 내가 있는 줄도 몰랐을 거다. 내 영역으로 들어오는 인간들에게도 몇 번이고 경고를 했어.]
"선조들을 대신해서 사과를...."
[됐어,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는 거야. 게다가 양패구상의 위기에서 서로 간에 합의한 내용인데 사과는 무슨.]
보면 꼰대 같은데 은근 사고가 열려있단 말이야?
마나로 녀석을 허공으로 띄운 다음 둥실둥실 떠다니게 했다.
저렇게 당황할 때가 제일 귀엽다.
[또 왜 이래? 야!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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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봤냐? 여관 주인이 꼬박꼬박 존대 하면서 허리 굽히는 거?"
"어느 졸부 아들내미가 혼자 여행 나온 것 같던데?"
"귀족 아니야? 귀족이면 우린 다 죽어."
"준남작만 되도 기사나 용병을 고용해서 다니는 건 상식이야. 저 놈 절대 귀족 아니다."
여관 1층의 선술집, 세 명의 젊은이가 방으로 올라간 시안을 보고 쑥덕거리고 있었다.
"줄리! 잠깐만 이리 와 봐."
"왜?"
줄리라고 불린 선술집의 여급이 그들의 부름에 테이블로 다가왔다.
"아까 혼자 온 꼬맹이, 귀족이래? 옆에서 들었을 것 아니야."
"그냥 듣게?"
청년 하나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여급을 향해 튕겼다.
허공에서 회전하던 동전을 여급이 얼른 낚아챘다.
그녀는 테이블을 향해 허리를 숙인 채 조용하고 빠르게 말했다.
"신분은 안 밝혔는데 호위도 없고 일행도 없다고 했어."
"그래? 네가 보기에 귀족 같아?"
"그건 모르지? 나는 내가 아는 정보를 준 것 뿐이야."
"이러기야?"
동전 하나가 더 튕겨졌고 여급은 얼른 그것을 낚아채 역시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내일 아침, 일찌감치 갈 곳이 있다고 했어. 내가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그리고 여급은 허리를 피더니 카운터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여기 맥주 셋이요!"
"그걸 왜 네가 시켜!"
여급이 피식 웃고서 그들을 향해 말했다.
"자리세 별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