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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4화 (14/180)

< 원시의 땅, 크루슈 (1) >

알렉스가 알고 있는 길을 통해 걸은 것이 하루 정도 지났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길 같지 않은데 알렉스는 절대 자신의 뒤를 벗어나지 말라고 하면서 나를 이끌었다.

그 덕인지 아직까지는 그다지 위협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경계선 바깥의 크루슈 산맥은 야생이라는 말로도 어울리지 않았다.

원시原始라는 말이 차라리 적합할 것 같았다.

제멋대로 대지를 뒤덮고 있는 넝쿨이 발을 잡아채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나무들이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멀리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들이 쫓고 쫓기고 잡고 잡아먹히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나무들이 만들어낸 그늘 때문에 어두컴컴한 곳이다.

게다가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뼈다귀를 부서트리고 쩝쩝거리는 소리들이 들리면 절로 소름이 돋기 마련이다.

하지만 알렉스는 침착하게 걸음을 옮겼다.

"안전한 거야?"

"지금 저희가 가고 있는 길 근처에는 괴물들이 다가오면 마취 시켜 잡아먹는 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안전합니다."

[맞아. 득시글 득시글하네.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이 놈 말을 듣는 게 좋겠어.]

투브가 내 키보다 더 크게 자란 풀 아래에서 말했다.

나름대로 걱정이 됐는지 짧은 다리로 펄쩍거리면서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위와 상호간섭 할 수 없는 걸 저렇게 써먹을 수도 있네.'

[제발 너도 나중에 이렇게 돼서 한 사람한테만 보이고 그 사람이랑만 얘기할 수 있는 상태가 되라.]

'그런 의미는 아니었고...'

[들어갈수록 익숙한 느낌이 들어.]

옆에서 투브가 코를 하늘로 치켜들고 말했다.

'잘 가고 있다는 뜻이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그렇겠지.]

쓰러져 있는 나무를 넘어가지 못해 끙끙거리는 투브를 들어 넘겨줬다.

[내가 원래의 몸만 가졌어도...]

'알아, 알아. 이런 나무 정도는 10개를 늘어놔도 도약 한 번에 넘었겠지.'

"나리, 어떤 독초가 풀 아래 숨겨져 있을지 모릅니다. 함부로 그렇게 뒤적거리시면 안 됩니다."

알렉스가 바로 달려와 나를 나무랐다.

오러를 돌리면 웬만한 독에는 잘 중독이 되지 않지만 이녀석은 나를 마법사라고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안 뒤적거렸어. 계속 가지."

뒤에서 알렉스가 '분명히 뒤적거렸는데..'하는 혼잣말이 들렸다.

[내 머리에 손 대봐.]

'왜?'

[해 봐. 어서]

"으아! 나리! 왜 이러십니까 정말! 아무것도 건들면 안 된다고 분명히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알렉스가 사색을 하고 뛰어왔다.

[재밌네.]

'대충 알 것 같네. 너와 나 사이의 상호작용을 다른 사람이 보면 다른 행동으로 보이는 거지?'

[눈치는 많이 늘었네. 내가 몸을 찾게 되면 사라질 현상 같은데 저 녀석이나 많이 놀려 먹어.]

'더 이상 놀려 먹었다가는 저 놈 놀라서 죽을 걸?'

"나리 같이 강하신 분께서는 체감 되지 않으시겠지만 이곳은 아주 위험합니다. 저 같이 평범한 놈은 스쳐도 죽는 곳이다, 이 말입니다."

"알았어, 알았어. 계속 가."

아래쪽에서 흐르는 계곡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고개를 박고 물을 마시려던 이름 모를 짐승이 옆에 있는 나무와 사투를 벌이면서 나는 소리였다.

"흡혈 나무군요. 멋모르고 접근했다가는 저렇게 산 채로 나무에게 흡수 당합니다."

알렉스가 아래를 흘낏 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무가 짐승의 몸에 가지를 꽂았다.

가지를 통해 피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나무가 줄기를 부르르 떨었다.

짐승은 꿈틀거리며 나무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눈동자의 빛이 갈수록 흐려지고 있었다.

듣고 읽은 적은 있지만 눈앞에서 실제로 보니 소름이 끼쳤다.

전생의 나는 인간들과 싸웠지만 이곳은 인간의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곳이었다.

내가 밟고 있는 원시의 땅이 어떤 곳인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저 앞에 가고 있는 알렉스의 뒤로 얼른 따라 붙었다.

##

그 날 밤, 나와 알렉스는 작은 불을 피워놓고 앉았다.

멀리서 어느 짐승인지 괴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

"걸귀乞鬼입니다. 항상 배고파하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괴물이지요."

"이쪽으로 오는 것 같아?"

"그렇지는 않습니다. 온다고 해도 마취 식물을 뜯어먹다 먼저 잠들 겁니다."

[자기 새끼도 잡아먹는 놈들이라 금방 없어질 줄 알았더니 아직도 있나 보네.]

꺼져 가는 불에 공기를 넣으려고 알렉스가 나뭇가지로 불을 뒤적거렸다.

"여기 앞쪽부터는 마취 식물이 없는 것 같은데, 왜 말하지 않았지?"

알렉스의 손이 멈췄다.

투브가 미리 살펴보고 내게 준 정보였다.

우리가 움직이는 경로는 마취 식물의 군집과 비슷하니 더 이상은 못 간다고 내게 말을 해야 했다.

"아..알고 계셨습니까..."

내 앞에 알렉스가 무릎을 꿇었다.

"죽이지만 말아주십쇼, 나리.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역시, 내가 자신을 어떻게 할지 무서워서 말을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사실 그게 가장 간편하긴 해."

"나리!...."

"엔데에서 네 패거리와 여급을 죽이지 않은 건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아 그렇게 했던 건데 여기서는 너를 죽여도 복잡해질 일이 전혀 없을 것 같거든."

알렉스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내 발치에 매달렸다.

떨리는 손에서 불안이 그대로 느껴졌다.

첫날 내가 그의 목에 만들어 놓은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제발...제발..."

"너를 여기서 돌려보내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뭐지? 내 행적이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기 원했는데 이미 몇 명을 살려 보냈어. 몇 주간 동행한 널 살려 보내는 건 내키지가 않아."

"절대... 그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지 않겠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원래 살던 산으로 돌아가 밖으로 나오지 않겠습니다.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나리."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지? 알렉스?"

알렉스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온통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의 덜덜 떠는 손이 허리춤 뒤로 향했다.

찰칵

풀을 헤치고 나갈 때 필요할 것이라며 사서 허리춤에 메고 다니던 단도가 뽑혀 나왔다.

"말 하는 것이 걱정 되신다면 혀를 자르겠습니다. 저는 글을 읽지 못하지만 그림이라도 그릴까 걱정 된다 하시면 손가락도 자르겠습니다. 목숨만...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나리."

단도를 들고 찌를까 해서 오러를 돌리고 있던 내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알렉스가 눈을 감고 한 손으로 혀를 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단도를 잡은 채 천천히 가져다 댔다.

날이 잘 서있는 단도가 혀에 닿는 순간, 피 한 방울이 단도를 타고 또륵 굴러 떨어졌다.

일어나 단검을 들고 있는 알렉스의 손목을 잡았다.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긴장이 풀렸는지 픽 쓰러졌다.

투브가 쓰러진 알렉스 옆으로 가서 킁킁대더니 나를 보고 말했다.

[이런 악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죄 없는 영민의 혀와 손가락을 뺏을 생각은 없어.'

[부모님을 속이고 이렇게 가문에서 나와 있으면서 영민 생각? 솔직하지 못하네.]

'피냄새 맡고 짐승과 괴물들이 접근 할 것 같아서 못 자르게 한 거야.'

[애초에 살려 보내려고 했지? 이 놈이 정말로 말하지 않을 놈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거잖아.]

'시끄러워.'

똥개녀석, 늙다리 아니랄까봐 눈치는 더럽게 빠르다.

##

"같이 다니면서 봤겠지? 네가 어디로 숨어도 나는 찾아낼 수 있어."

어제 다친 혀 때문에 아직 말을 못하는 알렉스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혀가 나아 나에 대한 말이 하고 싶어 근질근질하거든."

피싯

원래 알렉스의 목에 있던 상처 반대편에 한 번 더 상처를 냈다.

가혹해도 확실한 공포를 심어줘야 했다.

알렉스의 손이 새로운 상처를 막았다.

손 틈새로 붉은 액체가 비어져 나왔다.

"상처를 다시 한 번 보고 과연 말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

품에서 패를 꺼내 던졌다.

"말을 맡겼다는 증표야. 카트리로 가서 찾아 써. 데려가서 산에서 밭을 갈든, 팔아서 땅을 사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패와 나 사이를 알렉스의 시선이 왕복했다.

"편하게 온 대가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다시 한번 찾아가서 상을 내릴게."

패를 챙기던 알렉스의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고개를 빠르게 좌우로 저었다.

다친 혀가 뺨에 닿아 벌어졌는지 피가 입술 사이로 흐른 후에야 알렉스의 고개가 멈췄다.

[푸하하하, 너 오지 말라는데? 하긴 저렇게 엉망진창을 만들었는데 다시 찾아간다고 하면 쟤가 반갑다고 하겠냐?]

'일부러 그런 거야. 내가 언제 등장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어야 다른 생각을 안 해.'

[...독한 새끼...]

전장에서 적군의 포로나 고위직을 마주해서 정보를 캐고 공포를 심어주는 일은 밥 먹듯 많이 했던 일이다.

이런 순박한 녀석 구슬리는 것은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 그 때는 주위의 부하들을 이용해서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했어야했는데 지금은 내가 직접 완급을 조절할 수 있다.

마나로 알렉스의 얼굴을 살짝 밀어 뒤쪽으로 향하게 했다.

"내려 가. 모든 것을 잊는 것이 좋겠지? 만약 내 얘기를 하면?"

"후후이다(죽습니다)."

이제 대답이 칼같이 나왔다.

그동안의 교육이 멋지게 효과를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알렉스가 패를 잡아들고 깊게 인사한 뒤 헐레벌떡 뛰어 내려갔다.

인기척이 사라지고 뒤로 돌아 올라가야 할 곳을 봤다.

"일단은 가야 할 곳이 폭포니까 물을 따라 올라가면 되겠지?"

[조심해야 할 거다. 이곳은 네가 있던 곳과 달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공격하는 곳이 아니야.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골통 빠개지는 건 순식간이야.]

"그럼, 가지 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데까지는 최대한 도와야지.]

그래도 내가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는지 점차 협조적이 되고 있는 투브였다.

정말로 몸을 얻어 떠나면 심심할 것 같기도 하다.

"가보자고."

혹시모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오러를 끌어올렸다.

감각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인간 아닌 것들의 영역으로 발을 옮겼다.

##

카트리에서 남쪽으로 말을 두 마리 끌고 가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연신 목을 만지며 조용히 말했다.

"아아하(살았다)..."

남자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아어(살았어)...이하(씨바)......"

혀를 다쳤는지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발음이 새는 소리였다.

집으로 향하는 알렉스의 걸음이 급해졌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실감나지 않았다.

샛길을 다 내려오고, 패를 내밀어 맡긴 말을 찾을 때까지도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손으로 목을 쓰다듬었다.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두 개의 상처.

이 상처의 감각만이 자신이 겪은 몇 주의 일이 현실이고, 그것을 겪어내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었다.

저기 앞에 자신이 안내했던 샛길의 입구가 보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길이 있는지도 모르는, 그저 그런 계곡이었다.

알렉스가 쿵쿵 뛰는 심장을 억누른 채 심호흡을 하며 그 곳을 넘어섰다.

마법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거든 너를 찾아 큰 상을 내리겠다.

소름 끼치게 끔찍했다.

필사적으로 거부의사를 표시했으나 그쪽이 알아들었는가는 별개의 문제였다.

집으로 가서 더 깊은 산 속으로 거처를 옯기자고 부모님께 제안할 생각이었다.

한참을 더 가서 알렉스는 생각했다.

'나리의 곁에 있던 그 검은 건 뭐였을까? 산을 올라갈수록 점점 진해지는 것 같던데....'

알렉스는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냈다.

그 마법사에 대한 것은 말은 물론이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 사실은 경험을 통해 몸과 마음에 깊게 새겨지지 않았는가.

돌아가서 짐승 가죽이나 벗기고, 약초나 캐는 것이 이제 그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업이었다.

누가 때려 죽인대도 그 숭고한 일을 버릴 생각은 없었다.

알렉스의 발걸음에 한층 더 속도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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