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5화 (15/180)

< 원시의 땅, 크루슈 (2) >

검을 좌에서 우로 그었다.

나를 향해 날아오던 날카로운 발이 그 주인의 몸에서 분리되었다.

하피들이 더욱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늘에서 내리 꽂듯 공격해오기 때문에 신경 써야 할 것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마치 훈련을 거친 병사들처럼 시간차를 두고 발톱을 내리 꽂기 시작했다.

[폭포 쪽으로 가!]

"거기가 이 놈들 서식지라며!"

[내 말 들어서 손해 본 적 없잖아!]

내 지척까지 접근한 하피 하나를 통째로 구워버렸다.

남은 하피들이 더욱 더 흉흉한 기세를 뿜었다.

"방법은 있는 거지?"

[있으니까 좀 뛰어! 임마!]

몸 곳곳으로 오러를 보낸 후, 지축을 붕괴하는 것 같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

알렉스를 내려 보내고 지난 시간은 4일.

하지만 내가 체감하는 시간은 4주도 더 된 것 같았다.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내려놓아서는 안됐다.

땅이 무너지면서 괴물의 아가리가 적나라하게 벌어져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은 예사였으며 마법사들과는 다른 방식인 것 같긴 하지만 원시적인 형태로 마나를 활용하는 원숭이 비슷한 놈도 있었다.

잠을 자기 위해 땅굴을 파면 팔뚝만한 크기의 쥐가 나왔고, 하루를 보내고 밖으로 나오면 밤에 본 그 쥐가 나무만한 지네의 송곳니에 찔려 살점을 뜯어 먹히고 있었다.

이런 괴이의 땅을 정복할 생각과 시도를 한 선조님이 참 대단하다고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생각했다.

실상 우리 가문의 선조는 미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수 백 번씩 들었다.

[뭐 저런 걸 가지고 그러냐. 쟤네는 그래도 지능이 없잖아.]

"지능이 있는 놈들도 있어?"

[많지는 않은데 있긴 있어. 아직도 여기 살라나 모르겠다.]

"말은 통해?"

[자기네들끼리는 시끄럽게 떠드는데 나랑은 안 통해. 내가 지나가면 꽃이랑 과일 같은 걸 바치려고 하던데 귀찮아서 다 쫓아버렸어.]

나를 집어 삼키기 위해 거침없이 다가오는 걸귀를 일도양단一刀兩斷 하며 투브와 나눈 대화였다.

오러를 밀어올린 검으로 걸귀의 배를 찔러 헤집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들이미는 머리통을 통째로 얼렸다.

그리고 놈의 배에 걸려있는 검을 뽑아 목과 몸을 분리시켜 버렸다.

지휘부와 깔끔하게 분리되었는데도 움찔움찔하는 행동부는 생명의 경이라고 해야할까, 괴이의 극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을 멈추었다.

불필요한 생각은 생존의 필수요소가 아니었다.

4일의 시간 동안 나는 빠르게 강해졌다.

오러를 얼마 쓰고, 마나를 얼마 쓰고 하는 생각은 머리속에서나 해야 했다.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앞에 다가온 적을 처리하는 것 하나만을 생각하며 움직였다.

미지와의 조우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고 나의 성장 역시 시간에 구애 받지 않았다.

##

고막을 부술 듯이 귓전을 때리던 폭포소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사라졌다.

"폭포 소리가 안 나는데? 이럴 수가 있나? 모르는 사이 환각효과에 걸려들었나? 아닌데? 계속 오러 운용 중이었는데?"

산에 들어온 후 가장 혼란한 순간이었다.

시야 밖에서 들려오던 것이 사라지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모든 가능성을 헤아려야 했다.

[걱정이 그렇게 많아서 장군은 어떻게 됐대? 제대로 왔어. 따라와]

"웃기네. 걱정 되는 상황을 가정해서 그에 맞는 작전과 전략을 철저하게 수립하고 수행했으니 장군이...."

반박을 하며 투브의 뒤를 따랐다.

작은 언덕을 넘으니 폭포가 눈에 들어왔다.

폭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해서 그것을 지칭할 다른 명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질감에 몸을 흠칫 떨었다.

소리가 없었다.

엄청난 양의 물이 엄청난 높이에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아래로 낙하하고 있지만 자욱한 물보라와 선명한 무지개만 생길 뿐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

큰 소리를 너무 오래 들어 내 귀가 이상해진 것이 아닌가 해서 아무 소리나 내 보았다.

소리는 잘 나왔고 귀로 잘 흘러들었다.

[나도 처음엔 그랬지. 멀쩡하니까 걱정 마. 여기 '침묵의 폭포'는 물소리가 안나.]

"여기는 원래 이랬던 거야?"

[원래의 범위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이랬어.]

"알렉스는 이런 얘기 전혀 안 했는데?"

[하피의 영역이라는 것만 전해졌나보지. 네가 통과해온 길을 생각해 봐라. 사람들이 여길 올 수 있겠어?]

4일간 미친 듯이 베고 태우고 찌르고 얼리고 죽이며 뛰어왔던 길을 생각했다.

절로 머리가 좌우로 저어졌다.

군대와 기사, 마법사를 동원해서 이곳까지 진군할 이유도 없었다.

산에 사는 것들은 패전에 대한 막대한 보상금을 주지도 않았고 크루슈산맥의 험지는 비옥한 옥토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으니까.

"대단하네. 너 잡겠다고 이런 곳까지 군대를 끌고 온 내 선조님도."

[뭔 개소리야? 혼자 왔구만.]

선조님이 미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점점 더 굳어지고 있었다.

##

[준비해.]

투브의 신호에 맞춰 허공에 공기를 잔뜩 응집시켰다.

하피들이 잔뜩 성이난 채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더.]

선두에 있는 하피의 잔뜩 성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이제 놈의 미간에 난 깃털의 결까지도 보일 지경이다.

[지금!]

한 순간에 공기를 해방시켰다.

쿠와아아아-

하피들의 펄럭거리는 날갯짓만 가득했던 폭포에 억눌렸던 공기가 팽창하면서 굉음이 발생했다.

그 굉음과 충격파에 하피들이 바닥과 폭포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낄낄낄낄. 저 놈들 옛날이랑 달라진 게 없어. 간만에 보니까 또 이렇게 기분 좋은 광경이 또 있을까 싶네.]

"나한테 악취미 어쩌구하더니 진짜 악취미는 그쪽이었네."

먹먹해진 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오러와 마나로 보호했지만 완벽하지 않았나보다.

하피는 소리에 굉장히 민감한 종족이라 침묵의 폭포에 이렇게 대규모로 모여 생활하는 것이라고 한다.

소리에 얼마나 민감하냐면 소리를 낼 수 있음에도 자기들끼리 몸짓 언어로 소통을 하고 공중에서 낙하할 때 가장 소리가 적게 나는 녀석이 우두머리로 추대 되는 정도.

때문에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면 극도의 공포에 빠져서 감각을 상실하고 바닥으로 추락한다는 것이 저기서 바닥을 구르면서 신나게 웃고 있는 녀석의 설명....

[크하하 저 멍청한 놈들 꼬라지 보게!]

"야! 일어나봐!"

[뭐야!]

내가 마나로 투브를 들어 올렸다.

뒹굴던 자리에 아주 얕게나마 풀이 녀석의 몸 모양으로 뉘여져 있었다.

그걸 보고 신났는지 투브가 주위를 펄쩍펄쩍 뛰었다.

[드디어 물질계와 이어지고 있군!]

"제대로 가고 있긴 한가봐."

상당한 정도의 마나를 끌어모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무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는 자신이 자랑스러울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마나 소드를 만들어 보고 싶었지만 저번처럼 쓰러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루 빨리 이 녀석과의 약속을 마무리 짓고 나만의 무기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아닌가....'

한편으로는 정말로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아쉽기도 했다.

입이 걸고 뻑하면 성질 내고 가끔은 경박하기도 했지만 몇 년 간 내게 꾸준히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내가 이런 감상에 빠져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저 똥개새끼는 누운 풀 한 번 보고, 떠 가는 하피 한 번 보고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녀석의 옆구리를 가볍게 밀었다.

"가자! 똥개 놈아!"

[한동안 그 소리 안 하더니!]

소리 없이 떨어지는 물보라를 맞으며 계속해서 위쪽으로 향했다.

##

"저비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저비스 포츠라니는 책을 한 가득 안은 채로 뒤를 돌아봤다.

멀리서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오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무슨 존댓말이야. 아카데미 안이야. 편하게 해."

나이가 자신보다 1살 어린데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아카데미 안이니 말을 놓으라고 하는 이 소녀는 캐슬린 몬트라우제뉴인 공작가의 장녀이자 자신과 함께 내년에 아카데미를 조기졸업하고 제국대학 편입과정을 밟을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소녀였다.

"저는 존댓말이 편하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시안에게 약초를 얻어 간 날 이후, 로킨 포츠라니 백작은 제뉴인 저택을 방문할 일이 있을 때마다 저비스를 데려갔다.

확실하게 자신의 아들에게 공작가의 후계의 눈도장을 찍게 하고 싶어서였다.

다행히 시안은 저비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주 잘 대해주고 집에 갈 때마다 구하기 힘든 책이나 약초를 한 다발씩 안겨 보내곤 했다.

그 과정에서 오빠 껌딱지였던 캐슬린과 저비스가 안면을 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빠 소식 들은 거 없어? 오빠가 귀족네 애들 다 싫어하는데 너는 좀 아끼잖아."

"형님 소식은..."

저비스는 시안을 자연스레 형님이라 칭하려다 혼자 놀라서 손을 가져다 입을 막았다.

사적인 자리가 아닌 곳에서 백작가의 자식이 공작가문의 장자에게 형님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크게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저비스의 품에 안겨있던 책이 후두둑 떨어졌다.

시안 몬트라우가 제뉴인에 있는 프리드리히 몬트라우를 예방하러 갔다가 사라진 일은 한 달이 넘게 지났지만 귀족들을 넘어 일반인들에게서까지 뜨거운 화제였다.

모종의 단체에 납치를 당했다는 설부터 시작해서 악마화가 진행되어 지하감옥에 가두어놨다는 둥 소문은 날이 갈수록 몸집을 불려갔다.

"조심 좀 해라. 조심 좀. 이래서 약재는 잘 섞겠어?"

캐슬린이 손을 휙 휘두르자 바닥에 널려있던 책이 알아서 쌓여 한쪽에 놓였다.

"말해도 돼. 차단막 쳐놨어."

"형님 소식은 저도 들은 것이 없습니다."

"정말이야?"

의심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않는 캐슬린이었다.

"제가 왜 감추겠습니까. 소식을 듣게 된다면 가장 먼저 아가씨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약속한거야!"

차단막을 거둬들이고 가려는 캐슬린에게 저비스가 물었다.

"아가씨 그런데 지금 수업시간 아니십니까?"

"시시해. 선생들 다 오빠보다 못 가르쳐."

캐슬린이 몸을 띄워 건물 너머로 사라졌다.

분명 아카데미 교내에서는 모든 종류의 이동 마법이 금지되어 있는데 왜 캐슬린에게 마법 경보가 발동하지 않는지 저비스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

달려드는 하피들에게 공기폭탄을 먹여가며 폭포를 벗어난지 1주일.

흐르는 물을 마시고 괴물의 고기를 구워 먹으며 나아갔다.

모르긴 몰라도 보통 사람 같으면 정체 모를 병에 걸려 10번은 더 죽었을 텐데 마나와 오러, 무엇보다 변환인자인지 덕인지 날이 갈수록 기운이 넘쳤다.

폭포를 지난 이후로 지도는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사람의 발이 거의 닿지 않은 곳이라 지도가 부정확했다.

오직 투브의 기억과 직감만을 믿고 나아갔다.

너무 불확실 한 것 아니냐고?

산의 안쪽으로 향해가면서 투브의 외형이 바뀌고 있었다.

무릎까지 간신히 오던 녀석의 머리가 내 골반 옆에서 흔들렸다.

주둥이가 길어지고 눈빛이 깊어졌다.

검은 털이 찬란하게 빛났다.

강인한 근육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투브가 밟은 땅에는 단단하게 녀석의 발자국이 찍혔다.

[여기다! 다 왔어! 이제 기억이 나네!]

달라지지 않은 것은 저 말투 뿐이었다.

나무들이 우거진 숲 사이에 너른 공터가 있었다.

"선조님은 참 깊이도 들어오셨네...."

[내 말이! 진짜 그 놈도 제 정신은 아니었지...]

분명 선조를 욕하고 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단신으로 늑대 하나 잡겠다고 여기까지 올라오는 사람을 표현하는 말로 미쳤다는 단어 외에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서 뭘 해야 하는데?"

옆에 있던 바위 위에 있던 낙엽을 털어내고 올라앉았다.

[남의 얼굴에 그렇게 엉덩이를 대면 어떻게 하나?]

"응?"

투브가 내가 앉아있던 바위로 달려들었다.

놀라서 얼른 몸을 피했다.

녀석의 몸이 바위로 빨려 들어갔다.

바위가 부르르 떨며 자신의 위에 덮인 세월의 흔적들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낙엽, 이끼, 흙이 차례로 떨어져 나가고 나서야 내 키의 절반만한 그것이 바위가 아니라 어느 짐승의 머리뼈였다는 것을 알았다.

머리 밖에 남지 않은 뼈가 포효했다.

머리 뒤로 빠르게 뼈들이 생겼다.

목, 등, 꼬리, 앞다리, 앞발, 뒷다리, 뒷발.

이어서 그 토대가 되는 뼈에서 빠르게 근육이 솟아 올랐다.

보기만 해도 생명력이 터져 나오는 선홍빛 근육.

그 위에 지방이 붙고 가죽이 덮이고 털이 올랐다.

전설이 살아났다.

투브가 눈을 떴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녀석이 고개를 위로 치켜 들었다.

아우우우우-

늑대의 울음소리가 온 골짜기를 울렸다.

오랜 시간 패자覇者가 없던 땅에 왕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다시 한 번 소개하지. 알다시피 내 이름은 투브. 몰아치는 검은 폭풍. 늑대들의... 야! 왜 그래!]

몸에 힘이 풀렸다.

원시의 땅이 내 눈 앞으로 다가왔다.

< 망했어! >

망했어!

"각하! 각하! 돌파 개시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강심장은 강심장이신가 봅니다. 이런 상황에 각하처럼 편히 주무시는 분은 처음 봅니다."

"..로하나스..."

중년의 로하나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 난 수많은 상처, 손질할 틈이 없어 빛을 잃은 무구, 항상 뒤로 가지런히 넘겨 묶던 머리가 아니라 정돈이 안 된 채로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지만 분명 로하나스였다.

놀라는 것도 잠시, 자연스럽게 내가 물었다.

"마법사 지원은 어떻게 되었는가."

"전이 마법사 요청은 본국에서 거절했습니다. 한정된 자원인 전이 마법사를 불리한 전황에 투입할 수 없다고 합니다... 쓰레기 같은 놈들..."

"그런가, 원군은?"

"그것도 요원합니다. 귀족원의 반대가 큰 것 같습니다. 막시밀리앙 그 새끼를 견습 기사 시절에 죽여 놨어야 하는데...."

"말 조심하라, 로하나스. 그는 엄연히 푸른매 기사단 단장이다."

내 말에 로하나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예, 단장 좋지요. 저희가 온갖 고생을 하며 구를 때 수도 방위를 이유로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는 푸른매 기사단의 단장 아닙니까. 수도 방위는 개뿔!"

로하나스가 한 마디를 더 했다.

"그 새끼들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푸른매 기사단으로 넘어간 예전의 송곳니 기사단 동료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생각만 해도 분한지 로하나스의 주먹이 떨렸다.

내가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가서 참모들을 모으게. 마지막으로 작전을 점검하지."

로하나스가 재빠르게 막사 밖으로 뛰어나갔다.

##

슬금슬금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우리가 있는 이곳은 주시수 평원, 제국과 반란군의 운명이 갈린 대규모 회전會戰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다만 아직은 회전이 이루어지기 전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포위를 뚫고 난 뒤, 후속부대와의 합류에 성공하고 재정비를 한 후에 회전이 벌어졌었다.

물론 회전의 결과는 대승리였다.

계획대로만 됐었다면 포위를 당할 일은 없었다.

오히려 이곳을 진작에 점령했을 것이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보급을 탄탄히 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했건만 보급 부대의 어느 멍청이가 전공을 탐내 주위에 있던 적의 거점을 건드리면서 수립해 놓은 작전이 다 꼬여버렸다.

계획을 올릴 때 제발 보급 부대 통솔자만은 노련한 사람으로 붙여 달라고 했건만 새파랗게 어린 귀족 놈이 붙더니만....

어느 귀족놈이 아들한테 공적하나 쥐어주고 논공행상 때 가문 이름 좀 빛내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살아 돌아가면 직접 목을 치리라.

보급이 끊긴 지 2주, 적들은 우리의 숨통을 조여 들어왔다.

"숲 안쪽에는 늪이 너무 많습니다. 기사들이 운신하기에 좋지 않은 환경입니다."

"숲으로 가야 더 많은 인원을 살려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기사들의 희생이 너무 커집니다."

"좌측에서 접근하는 적 부대의 지휘관이 저와 동문입니다. 제가 가서 설득하겠습니다."

"몰래 빠져나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저는 목숨을 걸고 제안 하는 겁니다!"

"저희 부대가 본진의 허리를 지키겠습니다."

"다른 부대와 기사단들의 희생으로 그쪽의 전력을 보존하겠다고 들리는 건 내 착각인가?"

"말씀이 심하신 것 아닙니까! 저희만큼 적의 습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부대도 없습니다!"

승전보가 울리던 전장에서는 서로의 공을 치하하기 바빴던 참모와 지휘관들이 죽을 위기에 놓이자 분열하고 있었다.

쾅-

로하나스가 오러를 실어 발을 굴렀다.

막사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고맙네, 로하나스."

내가 손으로 한 명을 지목했다.

협상을 하겠다는 자였다.

"반란군의 지휘관과 동문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대의 스승은 그대와 동문들에게 협상의 기본도 가르치지 않았나보군. 협상이란 강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약자에게 제안하는 것이다. 약자 된 입장에서 협상 자리에 나서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모르는가."

약자라는 말에 참모들의 고개가 떨어졌다.

연전연승의 부대에게 약자라는 말은 참 낯설었다.

"우리가 꺾이면 제국군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그대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묻겠다. 우리가 전쟁에서 패배했는가? 그대들과 마주 보고 있는 이곳은 지옥의 만찬장인가?"

침묵이 막사를 삼켰다.

"무력을 교환하는 것만이 전투가 아니다. 작전도 전투의 일부이니 이 전투에서 우리는 패했다. 묻겠다. 우리가 패배한 것이 전투인가, 전쟁인가?"

막사 안의 인원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전투에서 패했지만 전쟁에서 이길 것이다. 장군인 나, 시안 몬트라우가 그대들과 약속하겠다. 이 전쟁을 내가 승리로 이끌 것이다. 그리하기 위해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투에서 지고 전쟁에서 이기는 법도 있다.

그것을 실행하려면 지금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다.

눈빛이 돌아오기 시작한 참모와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하달 했다.

"송곳니와 검은강, 304 독립대대가 최후미에서 이동하며 적을 막는다. 스칸디르, 27마법부대 가용인원은?"

"45명 중 23명 전사, 3명 전투불능으로 전투에 참여 가능한 인원 19명입니다."

지도에서 현재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보다 조금 고지대를 찍었다.

"6983 공병대, 27마법부대와 함께 이곳에 남아 임시로 마법포탑을 세워 적을 저지한다. 그대들이 1초의 시간을 벌면 10명의 인원이 더 살아 갈 수 있다."

내 말에 두 부대의 지휘관들의 눈빛이 떨렸다.

"장군과 같은 전장에 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돌아와 내 손으로 직접 그대들을 거두겠다. 제국은 그대들을 기억할 것이다."

두 지휘관이 막사 밖으로 뛰쳐나가자 막사의 분위기가 비장함으로 가득 찼다.

동고동락하던 전우들을 뒤에 남겨 놓고 떠나는 작전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 돌아오겠다는 의지가 피어올랐다.

"황금매, 태양. 두 기사단이 갈라져 적을 유인한다. 쉽지 않은 길이 될 것이다."

"살아서 뵙겠습니다, 장군."

"장미가시, 본진의 선두에서 돌파한다. 할 수 있겠는가."

"접근하는 놈들을 모두 육편으로 만들겠습니다."

세 기사단장에게 별도의 지도를 나눠줬다.

그것을 들고 그들은 막사 밖으로 빠져나갔다.

남아있는 지휘관, 부대장들에게도 각자의 돌파 경로가 그려진 지도를 나눠줬다.

"미리 일러준 것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전장에서 길러진 그대들의 감각과 투지를 믿는다."

다들 고개를 들고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중 몇이나 살아남아 다시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을까.

"제군, 우리는 살아남아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돌아와 적을 박살 내고 전우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돌아가라. 작전 개시는 30분 후다."

다들 일어나 내게 경례를 올려 붙이고 사라졌다.

막사 안에는 나와 로하나스만이 남아있었다.

로하나스가 나를 향해 말했다.

"후퇴하는 병력의 1/3을 잃는 이것이 아마 각하의 몇 안 되는 패배 아니셨습니까? 사실 각하의 패배라고 하기는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봐도 기존 작전은 완벽했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안일함과 무능이 만들어낸 사태입니다."

"로하나스?"

"게다가 돌아와 벌어진 주시수 회전에서 대승을 거두셨으니 멋지게 만회하신 셈입니다. 전공에만 신경 쓴 그 귀족도 벌하셨구요."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 로하나스가 내게 다가왔다.

"각하에게 주어졌던 수많은 승리의 순간이 아니라 가장 처절했던 순간을 떠올리시다니 제가 아는 각하다우십니다. 전술책과 전쟁사책을 제게 보여주시며 승리보다는 패배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각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곳은 과거입니다. 지금 각하가 계셔야할 곳은 과거가 아닙니다."

몸에서 맹렬하게 오러가 피어올랐다.

호흡을 할 때마다 대기에 가득한 마나가 느껴졌다.

로하나스가 빙그레 웃었다.

"뵙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그곳에서도 잘 하시리라 믿고 이만 떠나겠습니다."

로하나스의 모습이 변했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전혀 본 적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왼쪽 허리춤에 찬 두 개의 검이 특이했다.

남자의 검은 머리와 눈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신경 쓰지 마. 과거의 망령 정도로 생각해. 너와 비슷한 꼴로 쓰러졌던 기억이 나서 잠깐 온 것 뿐이야. 과거보다는 지금 네가 살고 있는 현재에 온 힘을 다해라. 내 할 말은 여기까지! 혹시라도 기억나면 똥개한테 고생 많았고 해방 축하한다고 전해줘!"

##

[....나!]

꿈을 꾸었다.

즐거운 꿈이었는지 끔찍한 꿈이었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손을 들어 얼굴로 쏟아지는 햇빛을 막았다.

꿈에서의 내 손은 주름이 생기기 시작하고 핏줄이 툭툭 불거진 성인의 손이었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손은 뼈가 강해지고 근육이 붙기 시작한 손이지만 아직은 주름 하나 없는 소년의 손이었다.

[그만 처 누워있고 일어나! 이 새끼야!]

"으헉!"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직도 약간 어지러운 기미가 남아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처럼 중간 정도의 크기가 된 투브와 온갖 괴물들의 사체였다.

지금도 투브는 식물인지 동물인지 알 수 없는 괴물의 목덜미에 올라타서 닥치는대로 살점을 뜯어내고 있었다.

괴물의 입에서 촉수 같은 것이 튀어나와 투브를 옭아매려고 시도했다.

서걱

옆에 놓여있던 검을 뽑아 그 촉수를 베어버렸다.

"어떻게 된 거야?"

[왕의 귀환을 인정 못 하겠다는거지.]

"왕께서 덕이 없으셨나 보네?"

[덕? 덕은 인간을 통치 할 때 필요한 거고.]

투브가 몸을 키우더니 다시 달려드는 괴물의 머리를 앞발로 짓뭉개 버렸다.

[이곳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지.]

다시 어지럼증이 오는 것 같았다.

내가 머리를 잡고 휘청이자 작아진 투브가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진짜 중독된 것 아니야?]

걱정은 되나 보네 짜식....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여기 정리부터 하자고."

공터로 밀려드는 괴물들을 다시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검의 이가 다 빠지고 종국에는 부러지기 직전의 상태가 될 때 쯤 괴물의 파도가 멈췄다.

##

[건드려도 안 일어나길래 땅에 묻어버리려고 했는데.]

내가 괴물들의 고기를 굽고 있는 것을 보고 투브가 말했다.

"농담도."

[농담 아니야. 아까 괴물들 오는 것 봤잖아. 땅에 묻어 놓고 나중에 꺼내려고 했어.]

논리는 납득이 되지만 소름 끼치는 방법이었다.

"나 얼마나 기절해있었어...?"

[몰라. 날 보고 기절해버리던데? 내가 좀 위엄 있긴 했나 봐.]

"나쁘지 않았어. 근데 왜 작아져 있어? 아까 커다란 모습이 원래 모습 아니야?"

[항상 그렇게 다니는 건 아니야. 작아서 좋은 점이 있고 커서 좋은 점이 있지.]

투브를 바라봤다.

노란 눈을 굴리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를 손으로 툭툭 만져줬다.

당장 버럭 할 줄 알았는데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약속은 지킨 거다?"

[기대 안 했는데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다시 몸을 키운 녀석이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부볐다.

마나가 나를 통해 녀석에게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별이네.]

"그렇네."

녀석의 윤기 나는 털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근데 원래 이렇게 너랑 가까이 있으면 마나가 네 쪽으로 흘러?"

내 말에 투브가 재빨리 몸을 뒤로 빼더니 나를 쳐다봤다.

작을 때는 몰랐는데 커진 몸으로 저렇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정말 멍청해 보인다.

[뭐? 다시 말해 봐.]

"네가 커지면 마나가 나한테 먼저 들어오고 네 쪽으로 가는데? 이것 때문에 어지러웠나?"

[설마..미친... 안돼...]

그리고 뒤돌아서 미친 듯이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뭐야, 저 헐레벌떡 뛰어가는 모습은. 갈 거면 멋있게 가야지.

1분도 안 되는 사이, 작아진 투브가 내 쪽으로 달려왔다.

"왜 다시 와?"

[망했어!]

"?"

[망했다고!]

"제발 알아들을 수 있게.."

투브가 외치는 소리에 나는 이어질 말을 잃어버렸다.

[범위만 넓어졌지 벗어날 수가 없어! 여전히 묶여 있다고!]

< 불의 종족 >

불의 종족

[물질계에 구현이 되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왜 반쪽짜리냐고!]

결론부터 말하면, 여전히 투브와 나는 이어져 있는 상태다.

거대한 모습으로 변할 수는 있지만 그 순간 엄청난 양의 마나가 내게서 투브에게로 이동한다.

오러로 최대한 보조해주려고 해도 몇 분 정도 서 있는 것이 고작이다.

이걸 알아본다고 몇 번이나 기절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건 내게 익숙한 강아지의 모습이나 조금 커다란 개의 모습일 때는 마나 이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여전히 생각만으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

강아지의 모습을 1단계, 개의 모습을 2단계, 늑대의 모습을 3단계라고 이름 붙였더니 자기를 무슨 변신 골렘 취급한다며 화를 냈지만 이 호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왜지? 뭐가 문제지?]

지금도 내 앞에서 1단계와 2단계의 모습을 연달아 바꾸어가면서 공터를 이리저리 헤집고 있었다.

그리고는 옆에 와서 털썩 주저 앉았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인데, 선조님과 거래를 한 곳에 왔다고 해서 풀려날 거라는 건 그냥 네 추측 아니었어?"

[...그랬지.]

"그렇게 추측한 이유가 뭐야?"

[메조가 그랬거든. 거래가 시작된 곳에서 끝날 거라고.]

"합당한 추측이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도 가늠이 안 돼...]

녀석이 이렇게 기운 없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선조님.. 메조 몬트라우...

스치는 생각.

"있잖아... 혹시 선조님이 왼쪽에 검 두 개를 차고 다니셨어?"

[그랬나? 왼쪽에 두 개였나? 오른쪽에 두 개 였나? 두 개 맞을 걸? 특이해서 싸우면서 물어봤거든. 그러니까 팔이 두 개니까 검도 두 개를 들어야 한다고 그랬... 너 어떻게 알아?]

"아까 쓰러졌을 때 본 것 같은데?"

투브가 가슴팍으로 달려들었다.

2단계의 모습이라 달려드는 녀석을 막느라 몸이 휘청였다.

"으... 덩치가 커졌다는 자각을 좀 해..."

[뭐래! 메조가 뭐래!]

"잘 기억 안나. 과거, 현재 어쩌구 하시고 음.. 그래! 고생이랑 축하한다? 정확히 기억나는 건 아니야."

[고생하는 거 축하한다고?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는 소리야?]

"정확하지 않아."

[후손은 변환인자 가지고 있으면서 마나결석이 생긴다고 사기를 치고 선조는 나한테 엿을 먹여? 몬트라우 놈들!]

"나는 알고 그런 게 아니야! 선조님 말씀도 정확한 게 아니라니까!"

[닥쳐! 그건 변명이야!]

투브가 늑대 모습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마나가 그쪽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무릎이 휘청였다.

[나를 농락한 죄는 죽음으로 갚아라.]

거대해진 녀석이 쏘아보는 것 만으로도 위압감이 엄청난데, 마나까지 빨려 들어가고 있으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또 쓰러지기 전에 오러를 끌어올렸다.

"내가 죽으면 너도 어떻게 될지 몰라!"

[죽던가, 벗어나던가. 둘 중 하나겠지.]

"투브... 나는 너를 그대로 둘 수 있음에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 왔어."

[....]

"네가 내게 준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있어."

녀석의 눈이 떨렸다.

마나의 이동이 멈췄다.

뒤로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강아지의 모습을 한 투브가 내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너를 죽이는 건 단순한 분풀이만도 못하겠지. 시안 몬트라우가 내게 보여준 신뢰를 믿겠어.]

"후... 착하게 살아온 보람이 있네."

[지랄.]

손을 앞으로 뻗었다.

한 순간의 감정으로 내게 그런 짓을 한 것이 미안했는지 녀석이 쭈뼛쭈볏 다가와 손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손에 힘을 꽉 줬다.

[아! 아파! 미안해! 미안하다니까! 안 그럴게!]

진짜 뒤지는 줄 알았잖아. 이 새끼야.

그때, 괴물들의 시체로 막아 놓은 길목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마법으로 높게 쌓아 단단하게 굳혀 놓았는데 쿵쿵거리면서 그 벽을 부수려는 소리였다.

"젠장, 여기는 무슨 끝이 없어."

몇 번 더 꿈틀거리던 벽이 굉음과 함께 부서졌다.

벽이 부서진 틈으로 화염이 치솟았다.

괴물들의 역겨운 시체 잔해가 공터에 나뒹굴었다.

오러를 끌어 올렸다.

저 벽을 부순 걸로 보아 보통 놈은 아니다.

마나 소드를 써야 할 수도 있었다.

쿵쿵대는 발소리가 다가왔다.

발소리의 주인이 공터로 몸을 드러냈다.

"뭐여?"

##

"아들! 어제 들었는감?"

"뭘 들어유."

"늑대 울음소리."

"허구헌 날 저그 절벽에서 처 우는 것들이 늑대구먼 또 뭔 늑대 울음소리를 들어유."

"그게 아녀. 그 울음소리랑 달러. 다른 도깨비는 몰러두 나는 확실허게 알 수가 있어."

"괜히 또 투브인지 뭣인지 찾으러 간다고 나가다가 자빠져서 발목 부러지지 말고 집에 계셔유. 늙기도 늙으신 양반이."

"니가 그 분을 뵌 적이 없어서 그러는겨. 아부지 어릴 적에는 말여, 그분 터럭(털)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 을매나 영광스러웠는 줄 알어?"

"을매나 영광은 개뿔! 같은 야그(이야기) 육백년 간 들으면 을매나 지겨운 줄 알어유? 나갔다 올테니깐 얌전히 계셔유."

내 이름은 벼랑구른돌.

600살이 조금 넘은 도깨비다.

도깨비치고는 나름대로 젊은 나이다.

우리 아버지만 해도 2500살을 넘겼고 마을 장로님은 3000살이 넘었다고 하니까.

마을이라고 해봐야 10명 정도 사는 조그만 곳이다.

아버지 어렸을 적, 그러니까 적어도 2000년 전에는 지금보다 도깨비가 훨씬 많아서 200명은 되었다는데 승천하는 도깨비만 늘고 물건에서 변하는 도깨비는 줄어 이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사냥하러 나가는데 밖이 시끌시끌했다.

10명 밖에 살지 않는 곳에서 시끌시끌하다는 것은 재밌는 일이 이미 생겼거나, 재밌는 일이 곧 생길 증거다.

얼른 밖을 내다봤다.

마을에 유일한 내 또래의 도깨비 '이끼위의물'이 방망이를 어깨에 걸치고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저 놈 때문에 시끌시끌 한겨? 뭣땀시?'

이끼위의물 옆에 도깨비치고 맨들맨들하게 생긴 녀석 하나랑 검은 들개 하나가 같이 걸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런 녀석을 뭐라고 하더라?

"아부지."

"왜 그러는겨."

"도깨비랑 비슷하게 생겼는디 그 왜 키가 좀 작고 방망이를 안 들고 다니는 갸네들. 이름이 뭐라고 했쥬?"

"얼굴 허옇고 귀가 길쭉허면 엘프, 눈깔이 땅에 붙어 댕기면 드워프, 이도 저도 아녀 뵈면 인간이라고 혔잖냐. 허구헌 날 알려주면 뭣 허냐. 삼시 세끼 밥 처먹는 것 마냥 까 처먹는 것을."

"본 적이 있어야 알쥬. 그럼 저기 저것이 인간이여유?"

내 말에 누워 있던 아버지가 몸을 일으켰다.

"밥 잘 처먹고 헛소리하는 솜씨만 늘었나벼. 여그를 인간이 무슨 수로 온디야."

"한 번 보셔유. 지는 처음 보는 것이네유."

아버지가 창밖을 내다보더니 나를 붙들고 맨발로 뛰쳐나갔다.

아니, 그냥 뛰쳐나갔다. 우리는 맨발로 다니니까.

"아이고! 아이고! 저 분이 어쩐 일이시래! 빨리 안 나오고 뭣 허냐! 아이고! 이게 뭔 일이랴."

"좀 놓고 얘기하셔유. 아파 죽겄네. 왜 그런대유?"

"투브께서 오셨잖여! 아이고 못 뵌지 2천년은 넘은 것 같은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네 그려."

"늑대라면서유, 저건 인간 아녀유?"

아버지가 내 뒤통수를 갈겼다.

"저 인간 말고 이놈 자슥아. 옆에 저 분이 투브여. 얼른 나와. 인사 드려야 혀."

아버지한테 팔을 잡혀 밖에 나가보니 마을 구성원 모두가 나와서 무릎 꿇고 절을 하고 있었다.

"살다 보니께 이 양반들이 무릎 꿇는 걸 보고 참, 오래 살고 볼 일여."

800살 먹은 도깨비, 이끼위의물이 한 말이었다.

퍽, 퍽

아버지의 손바닥이 나와 이끼위의물의 뒤통수에 작렬했다.

"이놈 새끼덜 나무장작맹키로 빳빳하게 서 있을겨?. 빨리 인사 안 혀? 저 분이 여그 왕이여, 왕! 이 시끼들아!"

##

[얘네랑 말이 통한다고?]

'100% 되는 건 아닌데, 의사소통 정도는 무리 없어. 단어나 어미 같은 것들이 우리랑 좀 다르네.'

[신기하네. 얘네가 나랑 말 한 번 통해보겠다고 귀찮게 한 게 수 백년은 될 텐데.]

'너랑 인간이랑 도깨비가 같은 자리에 있던 적은 없을 거 아냐.'

[그건 그렇지.]

투브가 귀찮게 한다고 쫒아 보냈다는 지성체의 존재는 도깨비였다.

노는 걸 좋아하고, 오래된 물건에서 탄생한다는 도깨비.

정말로 이야기 속에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나고 자란 제뉴인 지방에 존재한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얘랑 같이 다니니까 정말 별걸 다 겪는다.

우리를 발견한 도깨비의 이름은 '이끼위의물'.

무슨 늑대가 이렇게 크게 우나 해서 와봤단다.

투브가 3단계 모습을 보여주자 긴가민가하면서 우리를 마을로 데려왔고, 지금 각자가 2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구의 도깨비들에게 계속해서 절을 받고 있다.

일단 투브와의 관계는 계속 이어져 가기로 잠정 합의가 됐다.

투브는 내 복수를 도와주고, 나는 투브가 내게서 해방되는 걸 도와주고.

얘기를 나눠본 결과, 내가 마검사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과 투브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려면 마나와 마법에 관한 수행이 더 필요하다는 것에 의견이 일치했다.

그런 의미에서 도깨비를 만난 것은 우연 중에서도 굉장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은 마나를 불로 바꾸는데 아주 능숙한 종족이다.

"한 번 보여 주실 수 있나요?"

"그려유, 뜨거울 텐게 저얼루 가 계셔유."

'벼랑구른돌'이 허공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거대한 불이 뿜어져 나와 새 모양으로 변해 하늘로 날아가다 사라졌다.

"엄청나네요. 방망이가 무슨 역할을 하길래 마나를 그렇게 끌어당기는 건가요?"

"이거유? 지도 몰러유. 그냥 영차-하고 휘두르면 불이 쿠와와- 하고 나가는거여유."

참 간편한 설명이었다.

내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자 투브가 물었다.

[얘네는 '어떻게'가 없을 걸? 그냥 하루하루 밥 먹고 장난치는 낙으로 사는 애들 같던데.]

'그러게. 도움이 안 되네.'

[근데 이게 전부인가? 예전엔 좀 많아 보였는데?]

투브의 말을 전해주자 장로도깨비 '바람사이나무가지'가 감격했다는 듯이 말했다.

"아이고, 기억 해주시는구먼유. 예전에야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많았쥬. 그런디 투브님이 사라지신 이후로 이 산의 괴물놈덜이 으찌나 날뛰는지 지들이 버틸 재간이 없더구먼유. 승천해버리는 놈덜은 많지... 지들은 다른 도깨비가 쓰던 물건에서 나는디 그게 워낙 뜨문뜨문 태어나는지라 날이 갈수록 머릿수가 주는 구먼유."

"물건에서 태어나요? 몇 년에 한 번요?"

"많을 때는 대애강 백에서 이백년에 하나? 그렇지 않었는가?"

주위의 도깨비들이 끄덕였다.

"근디 지금은 저희 머릿수가 워낙 줄어서 저그 저놈 있쥬? 벼랑구른돌. 저 놈이 600년 전에 난 후로는 끝이여유."

말을 전하니 투브가 놀란 표정을 했다.

[뭐야? 나 때문이라는 거야? 나는 얘네를 보호한 적이 없는데?]

'다른 괴물들이 네가 있어서 지금처럼 날뛰지는 않았대.'

[하긴 얘네는 자기들이 얼마나 강한지 관심이 없어.]

욕심이 났다.

엄청난 완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불의 마법에 특출난 존재.

마나를 다루니 다른 마법에 대한 내성도 높은 것 같았다.

마법사 하나가 전장에서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들은 하나하나가 전술무기 급의 잠재력이 있었다.

게다가 살면서 딱 한 번 '도깨비불'이라는 사념체로 변해 하루 정도 모든 물리적인 접촉을 회피할 수도 있단다.

"근디 말이음이님 어디서 본 것 같은디?"

내가 투브와 자신들을 이어준다고 이들은 나를 말이음이라고 불렀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듣기에 묘했다.

"뭔 헛소리여, 노망 난겨? 여기 인간이 몇이나 왔다고 거짓부렁이여."

"아, 가만 좀 있어봐. 기억이 날 것 같어... 그려! 메주! 다들 메주 기억 안나는겨? 칼 두 개 차고 혼자서 와가지고 씨름판 다 뒤집어 놓은 인간 있잖여. 그 인간 빼다 박었네, 빼다 박었어."

"음메? 메주 그 놈 그거 일주일치 술을 하루에 다 처마시고 떠난 놈 말하는겨? 말 듣고 보니께 그런 것 같기도 허네? 그 인간 씨름은 옴팡지게 잘 혔는디."

"...."

선조님은 들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던 것 같다.

이들이 선조님을 아는 것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선조인 메조 몬트라우님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맞습니다. 저는 그분의 후손입니다. 여러분,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안전하고 풍족한 땅으로 이주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는 여러분께 새 보금자리를 제공해 드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랑 아버지한테 부탁하면 공작령의 산 몇 개 정도는 완벽히 출입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을 품을 수 있다면 산 몇 개 정도는 그냥 내줄 수 있다.

"갑자기 와서 뭐라고 하는거여유. 우리가 암만 수가 줄어도 여기 터 잡은 지가 세월이 얼만디."

"이렇게 하나하나 줄어가는 걸 보고 계실 겁니까? 이대로 가면 도깨비라는 종족이 사라질 것 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장로 도깨비가 젊은 도깨비인 벼랑구른돌과 이끼위의물을 흘끔 바라봤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몰아붙였다.

"원하시면 인간의 발걸음을 아예 통제하겠습니다. 딱히 부탁을 드릴 일도 없을 겁니다. 그저 고대부터 내려온 한 종족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그렇습니다."

장로도깨비는 입을 꾹 다물고 있지만 뒤에 모여있는 다른 도깨비들이 소곤소곤 거리기 시작했다.

쐐기를 박았다.

"제가 제공해 드리는 땅은 투브님의 보호 아래 있기도 합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그랬어!]

투브가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그르렁 거렸다.

"보십쇼. 자신을 기다린 존재들을 지키려는 용맹함. 투브님께서는 그동안 당신들과 거리를 두려 하셨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왕이란 무엇입니까? 신음하는 자들을 보듬는 존재입니다."

"화 나신 것 아녀유?"

"당신들이 이렇게 될 때까지 찾아오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입니다. 걱정 하실 것 없습니다."

"말씀은 증말루 감사헌디... 지들끼리 야그를 좀 해봐야 겄네유."

도깨비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사람 좋은 웃음을 하고 있었다.

[이 새끼 이거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 보니까 훨씬 더 웃긴 새끼네?]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이름 좀 빌려 쓴다고 죽지는 않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