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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6화 (16/180)

< 그대들은 쓰레기다 (1) >

늦은 밤, 프리드리히 몬트라우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손자에게 방패막이가 되어주겠다고 말 한 것이 4개월 전의 일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부쳐서 시안이 어디로 간 것이냐, 왜 아버지 마음대로 시안을 다른 곳으로 보내냐, 언제 오는 것이냐고 묻던 아들 제로 몬트라우는 이제는 거의 체념한 것인지 시안이 잘 지내고 있는지만 말 해달라고 하는 지경이었다.

물론 편지에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써서 보냈지만 실상은 프리드리히 자신도 손자의 건강은 고사하고 생사 여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죽지는 않았겠지. 녀석....'

불안한 생각이 들 때마다 프리드리히는 서재에서 손자와 마주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오러를 자신과 비등할 정도로 내뿜으면서 마나를 움직였던 손자를.

누구에게 말 할 수도 없는 내용이지만 설령 말을 해도 노망이 났다고 손가락질 받을 터였다.

그 때, 프리드리히의 침실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할아버지."

시안이었다.

프리드리히가 침대 밖으로 헐레벌떡 나와 시안을 바라봤다.

"시안!"

고작 4개월, 100일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지만 시안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다.

키가 더 커졌고 몸이 더 탄탄해졌고 눈빛에 자신감이 넘쳤다.

먼저 밝히지 않는 이상 열 세 살의 나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2년 정도 걸릴 수도 있다더니?"

"잠시 들렀습니다."

"잘 했다. 잘 했어."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말도 말거라. 네 어미는 알겠다고 하는데 네 애비는 너를 어디에 숨겼냐며 난리가 아니더구나."

"아마 약속한 것을 두고 제가 회피한다고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시안은 아버지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기사 수업을 받겠다는 약속이었지만 지금은 기사가 문제가 아니었다.

"할아버지."

시안이 프리드리히를 쳐다봤다.

프리드리히는 시안의 눈을 보면서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아들인 제로가 어릴 때 자신에게 부탁하거나 원하는 것이 있으면 꼭 이런 눈빛을 했었다.

"말 해 보거라."

"제게 땅을 좀 주실 수 있으십니까?"

##

"이,이게 대체..."

몬트라우 성 안, 몬트라우 가문의 직계들만 알 수 있는 비밀공간에서 프리드리히는 계속 눈을 비비고 있었다.

자신이 늙어서 노망이 났거나,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프리드리히에게 털이 숭숭 난 큼지막한 손이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유, 말이음이님의 아부지의 아부지라고 하시던디 맞아유? 지는 도깨비 '이끼위의물'이라고 하구먼유."

"아... 도깨비.... 반갑네...."

프리드리히를 배려해서인지 이끼위의물은 아주 살짝 악수를 하고 다시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검은색 들개 쪽을 향해서 이리저리 손짓을 했다.

그러자 손에서 불길이 피어나 나비로 변해 팔랑팔랑 들개 쪽으로 날아갔다.

들개가 나비를 향해 앞발을 휘두르자, 흩어지려던 나비가 다시 뭉쳐 도깨비의 손으로 돌아갔다.

프리드리히의 눈이 커졌다.

많은 마법사를 봤지만 불을 저렇게 정교하고 세밀하게 다루는 마법사는 단언컨대 없었다.

"10명 정도의 도깨비가 거주할 산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곳이어야 합니다. 직접 보기를 원해 대표자를 데려왔습니다.

"다른 도깨비들도 저 자처럼 마법을 부리느냐?"

"전승의 내용 이상입니다. 불 마법에는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게다가 저 친구는 10명 중 2번째로 어린 도깨비입니다."

프리드리히의 눈이 빛났다.

은퇴 했지만 그 역시 공작으로써 셀 수 없는 복마전을 헤쳐 나온 존재.

가치를 헤아리는 눈이 남들보다 뒤지지 않았다.

"저들이 왜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냐?"

"크루슈 산맥 안쪽에 사는데, 괴물들의 폭주가 심해져 종족의 존속 위기에 있습니다."

프리드리히가 날카롭게 물었다.

"땅을 내어주는 조건으로 몬트라우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죄송하지만 몬트라우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저들과의 신의입니다. 저들은 몬트라우에 종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동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어차피 남는 산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 저들을 살게 해주고 출입을 금하면 됩니다."

프리드리히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었다.

"잘 했다. 내 마음의 빚은 적을수록 좋다, 하지만."

시안이 말을 받았다.

"하지만 타인에게 마음의 빚을 얹어두는 것은 많을수록 좋다."

손자가 기특한지 프리드리히가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헌데 시안, 저 들개는 무엇이냐?"

시안이 잠시 고민했다.

"오다 주웠습니다."

##

"참말 좋은 땅이네유. 증말루 그냥 주시는 거여유?"

공작령 내의 산지를 샅샅이 뒤져 발견한 험지에 도깨비들이 모두 이주했다.

부지 탐색만 한 달, 이들을 데리고 이동하는 데 또다시 두 달이 걸렸다.

도깨비들은 새 보금자리가 될 곳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예. 이곳은 이제 여러분들의 땅입니다. 이미 철저하게 통제해서 인간과 마주칠 일은 없을 겁니다. 저도 찾아오지 않겠습니다."

"무슨 말씸을 그리 섭섭게 하신대유? 종종 투브님이랑 들르셔가지고는 같이 씨름두 허구, 술도 마시구 그러면 좋잖어유. 언제든 오셔유"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술 얘기를 하니 술이 땡겼다.

몸은 미성년이지만 속은 중년인데....

"뭐 해드릴 만한 것이 없을래나? 잠시만 고대루 계셔유."

장로도깨비가 들고 있던 방망이로 내 머리를 살짝 쳤다.

따뜻한 기운이 몸을 타고 흘렀다.

"웜마? 몸에 있는 불순한 찌끄레기들을 다 태우는 것인디, 말이음이님은 워째 재 한 톨 안 날린대유?"

이들에게 변환인자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서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사람이 또 있었는디? 지도 어릴 때 봐서 가물가물 허네유. 뭐시깽이드라? 이달이? 일돌이? 뭐 그런 이름이었는디?"

장로도깨비가 혼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랑 비슷해?

"이타르?"

[이타르가 왜 나와.]

"맞어유! 맞어! 이타르! 우째 아신대유?"

놀랍게도 대마법사 이타르의 이름이 나왔다.

'얘네가 이타르를 안대!'

[나도 어릴 때 몇 번 보고 못 봤는데?]

'장로도깨비가 어릴 때 봤다는데? 그럼 적어도 3,4천년 전이잖아. 너는 천 년 넘게 살았다며.'

[응. 천 년 넘게 살았지. 딱 천 년을 산 게 아니야. 천 년 이후부터는 번거로워서 나이를 잊은거지.]

투브.... 생각보다 훨씬 늙은이었다.

지금이라도 존댓말을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쳐갔지만 그냥 뻔뻔하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

[이타르를 어떻게 아냐고 물어봐.]

장로도깨비가 우리에게 해 준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기 그지 없었다.

이타르는 도깨비들과 어울려 살면서 불 마법을 배워 갔다는데, 1년 만에 수천 년간 쌓인 도깨비들의 불 마법을 모두 배우고 새로운 체계의 불 마법을 창안해서 알려주고 갔단다.

그가 떠날 때, 언제 다시 올 것이냐는 도깨비들의 질문에 앞으로 바빠질 것이라면서 힘들 것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를 묻자 세상의 모든 마법을 모아 후세에 전달하는 마법 도서관을 만들 것이라 답했다고 한다.

[나도 기억난다. 그것 때문에 세상의 마법을 모으기 위해 여행 중이라고 했어.]

'너는 꼭 기억이 늦게 난다?'

[나이 먹어 봐, 임마. 기억 못하는 것 보다 훨씬 낫지.]

"여튼, 다른 걸 드려야 허겄네유."

장로도깨비가 방망이를 들어 내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댔다.

"쬐끔 아플 수도 있어유."

"윽..!"

방망이와 가슴이 닿은 부분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윗옷을 벗어 확인해 보니 조그만 그림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지들만큼은 아녀두, 불을 다룰 때 훨씬 편해질 거여유. 조그만 성의여유. 감사하구먼유."

##

"마법 도서관이라... 만들지 못 한 걸까? 아니면 만들었는데 사라진 걸까?"

[글쎄다. 설령 만들지 못했더라도 그 흔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할 텐데...]

"이름도 기억 못하는데, 흔적이 남아 있겠어?"

[그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인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지성체, 특히 마나를 다룰 줄 알면 이타르를 찬양했는데 지금은 이름도 모르잖아.]

저택 내의 으리으리한 방, 그 동안의 피로했던 몸을 푹신한 침대에 파묻고 투브와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가진 오러와 쓸 수 있는 마나만으로도 전생에서 날 음모에 빠트렸던 놈들을 당장 죽이기에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평화의 시대에 벌어지는 참상은 비일상이지만 혼란의 시대에 벌어지는 참상은 일상이다.

분리 운동.

제국 수립 이래 가장 큰 혼란.

그것이 다가오고 있다.

그 때가 되면 숨겨두었던 송곳니를 꺼내 놈들의 숨통을 끊을 것이다.

놈들도 만만치는 않을 터, 반항할 새도 없이 보내기 위해 송곳니를 날카롭게 갈아두어야 한다.

장로도깨비의 말이 떠올랐다,

-마법 도서관은 세계에 중심에 짓고 싶다고 했어유.

이타르의 말이 정말 지리적인 위치의 세계의 중심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보가 너무 없어. 이타르는 너와 같은 마검사였으니 단편적인 정보라도 있으면 큰 도움이 될 텐데.]

"역시 수도로 가야 하나?"

좋든 싫든 정보가 모이는 곳이다.

행동은 빠를수록 좋았다.

##

"저는 작위를 잇지 않겠습니다. 캐슬린이 후대의 제뉴인 공작입니다."

7개월 만에 돌아온 집.

가족 모두를 모아 놓고 폭탄을 던졌다.

챙그랑.

캐슬린이 놓친 포크가 바닥에 부딪혔다.

"대체 아버지가 네게 무슨 말씀을 하셨길래...!"

"할아버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 생각입니다. 저는 작위를 잇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 어머니마저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고 나를 바라봤다.

"시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모이는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구나. 왜 그러는지 이야기를 해보는 게 어떻겠니?"

이미 몇 번이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가족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오히려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좋다.

현재의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내가 행한 일들로 인해 바뀔 미래.

그것들 중 가족은 가장 큰 변수다.

이전의 삶에서 존재하지 않았어야 하지만 내 결정으로 인해 존재하게 된 가족.

변화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을 때 비로소 한 눈에 보인다.

안에 있으면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갈 뿐.

모질고 매몰차더라도 이렇게 해야 한다.

"이 얘기는 추후 다시 하도록 하자. 올라가거라."

냉정함을 찾은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추후 이야기 하셔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계승권을 포기하겠습니다. 제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가주로서 저를 파문하시면 됩니다."

"시안!"

내 말에 분노가 폭발했는지 아버지 주위에서 오러가 뻗어 나왔다.

침착함의 대명사라고 불리는 아버지가 저렇게 오러를 갈무리하지 못할 정도라는 건 정말 화가 났다는 뜻이다.

재빠르게 어머니와 캐슬린 앞으로 가서 오러를 운용했다.

어머니는 평범한 일반인이고 캐슬린은 어리다.

아버지의 오러를 견딜 만큼 강하지 않다.

내가 자신의 오러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받아내는 것을 보고 아버지의 표정이 분노에서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몇 번을 이야기 하셔도 제 마음은 변함 없습니다. 올라가 보겠습니다."

아버지와 대치를 마친 후, 빠르게 말하고 방으로 올라왔다.

문을 닫고 바로 주저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많이 컸네. 아버지랑 대등하게 마주 보기도 하고.]

'허어.. 허어.... 대등은 무슨... 이 집엔 상식 이상의 사람이 너무 많아.'

##

다음 날, 아버지는 화가 많이 났는지 나를 찾지 않으셨다.

아래층에서 한스와 알버트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생사를 넘나드는 크루슈 산맥에서의 경험 덕에 오러의 운용이 더욱 몸에 익어 오감이 예민해진 덕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도련님께 잘 전달하겠습니다."

"꼭입니다. 알버트 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스가 내게 기사들과 수련하자고 제안하러 방문한 것 같았다.

아마 내가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온 것 같은데 그 동안 몸이 많이 달아있었나보다.

내려가서 모른체 한스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죠?."

"간만에 뵙습니다 공자님. 기사들이 공자님과의 수련을 기대하고 있어 전해드리려 왔습니다."

"그래요? 한 번 가보죠."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아직 여독이...."

"괜찮아."

아버지의 서재 쪽을 한 번 보고 말했다.

"누가 나 찾으면 바로 말 해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사단의 거처로 향하는 길, 내 옆을 쫄래쫄래 따라오는 투브를 보면서 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깍듯한 행동으로 보아 내가 일전의 견습 기사들과의 대련에서 보여준 모습에 예의를 표하고 있었다.

연무장에는 이미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네가 안 온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미리 모아놨대.]

'어떻게든 오게 하려는 심산이었나보지.'

"공자님, 앞으로 송곳니 기사단의 주인 되실 분이시니 한 말씀 부탁 드리겠습니다."

저번에 왔을 때는 쳐다도 안보더니 이제는 공자님에 이어서 주인 되실 분이다.

역시 사람이 실력이 있어야 대우를 받는다.

근데 이걸 어쩌나, 나는 작위를 이을 마음이 없는데?

단상에 오르자 기사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몇몇 기사들은 단상 아래에서 입을 쩍 벌리고 하품하고 있는 투브를 보고 '저건 뭔가...' 하고 바라보기도 했다.

"그대들은...."

하지만 내가 말을 시작하자 그런 기사들도 모두 내게 집중했다.

"그대들은 쓰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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