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혀진 이름 (3) >
"어떻게 반지를 낀 거야! 끼운 놈마다 족족 죽어갔는데!"
아라크네가 포효했다.
"놈을 생포해! 절대로 죽여서는 안 돼! 귀한 연구 재료다! 생포해!!"
거미들이 앞의 두 다리를 위로 치켜 들고 나머지 다리로 바닥을 치며 나를 위협했다.
[시안! 시안! 정신 차려!]
몽롱했다.
분명 모든 감각이 멀쩡한데 정신만이 몸과 분리되어 다른 어딘가로 날아 간 것 같았다.
오러를 끌어 올릴 수 없었다.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옆으로 눈을 돌렸다.
투브가 거미의 배를 가르고 있었다.
푸른 체액이 투브의 검은 털을 덮었다.
가볍게 몸을 털어 체액을 떨쳐낸 투브가 바로 옆의 다른 거미에게 달려들었다.
고개를 내려 손을 바라봤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왜 마나를 움직일 수 없지?
-이타르의 반지가 아니었던 건가?
정신이 들었다.
"마나를 느낄 수 없는 게 아니야."
[시안?]
이타르의 반지를 통해서 마나가 부드럽지만 힘차게 내 몸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지금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마나 그 자체야."
##
아라크네는 수천 년을 살았다.
다른 생물의 몸을 파먹고 들어가 의태擬態해 질긴 목숨을 이어갔다.
자신이 마나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마법을 배웠다.
어렵고 복잡해서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았다.
그러나 시간은 그녀의 편이었다.
그녀의 끝없는 탐구욕과 무한에 가까운 시간은 그녀를 강인한 마법사로 만들었다.
더 이상 마법으로는 상대할 자가 없다고 자부심을 가질 무렵 소문을 들었다.
-대마법사 이타르가 아니었다면 마법이 이렇게 발전할 수 없었을 거야.
-이타르는 세계에 강림한 마법의 신이야.
-이타르 카누아. 찬란한 그 이름에 축복이 내리길.
분했다.
길어봐야 한 세기를 사는 인간이 수 천 년을 사는 자신도 얻지 못한 대마법사의 칭호를 얻다니.
그러나 이타르가 창안한 수많은 새로운 마법과 개량한 기존의 마법을 보고 납득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법이라기에는 너무도 찬란하고 고고해서 한 편의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아라크네는 이타르를 만나기 위해 수소문했으나 그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얼굴도 모르는 작은 인간에게 느낀 열패감은 아라크네의 가슴속에서 날로 영역을 넓혔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타르를 뛰어넘고 싶었던 아라크네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마법사로만 이루어진 왕국을 만든다.
그것은 대마법사 이타르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마나의 축복을 받은 선택받은 자들의 왕국.
아라크네는 바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첫 번째 계획은 영수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신만큼, 혹은 자신 이상의 세월을 살아온 존재들.
하나 하나가 만만치 않았다.
험악한 산에 사는 늑대 하나에게 자신이 이끄는 일족이 전멸 당할 뻔 한 일이 있은 뒤, 아라크네는 영수보다는 인간을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녀 자신이 직접 마법사의 속을 파먹고 숨어들었다.
그러던 중 반지 하나에 마음을 빼앗겼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그런 낡은 반지.
하지만 그녀는 마나가 그 반지를 어루만지는 것을 보았다.
마나들은 그 반지의 주인을 그리워한 나머지 남겨진 반지의 주위에 몰려있었다.
수소문 결과 그것이 이타르의 반지라는 결론을 얻었다.
손에 들어온 반지를 조심스레 손에 끼운 순간, 반지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팔을 타고 올랐다.
아라크네는 재빠르게 팔을 잘라냈다.
어차피 팔은 탈피 몇 번이면 다시 자라난다.
퍼석
말라붙은 나무처럼 변한 팔이 바닥으로 떨어져 부숴졌다.
부서진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만이 여전히 빛났다.
누가 반지를 껴도 똑같았다.
모조리 죽어버렸다.
결국 반지를 끼는 것은 포기하고 그 안에 담긴 힘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렇게 해서 한 약물을 얻어낼 수 있었다.
마나의 축복이 아주 미약한 사람이 장기복용하면 그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는 약물이었다.
아라크네는 자신이 속해있는 라네아 가문의 어린 아이들에게 몰래 음식에 타서 약물을 먹였다.
그들은 원래 산들바람을 일으킬 정도의 힘을 가졌으나 약물을 먹으면 돌풍을 불렀다.
약물을 먹은 사람들은 예외 없이 서른을 넘지 못하고 속이 삭아 들어 죽었다.
-이번에 라네아 가문의 마법사가 또 하나 죽었다는구만.
-그래도 라네아는 꾸준히 마법사가 나오잖아.
-참 모순적이야, 마나의 사랑을 받지만 유전병을 가진 가문이라니.
사람들은 그것이 라네아 가문만의 유전병인줄로 알았다.
아라크네는 마법사를 만들어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불멸의 마법사 왕국.
그 왕국을 통치하는 영생의 왕.
그것이 그녀가 품고 있는 꿈, 이타르를 넘어서는 마법사가 되는 방법이었다.
그러던 중 공작 가문의 한 소년이 대마법사에 대한 소문과 자료를 모으기 위해 중앙 도서관에 출입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좋아. 좋은 재료야.
그녀가 입맛을 다셨다.
소국의 왕 이상을 가진 것이 제국의 공작이다.
그 후계라니.
더욱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그녀의 다음 껍질이 되기에 좋았다.
그 소년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연구시설로 데려왔다.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
무한에 가까운 힘이 느껴졌다.
오른손에는 검은 번개가 혈관을 타고 흐르면서 밖으로 강력한 전류를 발산했다.
왼손에는 날카로운 얼음이 계속해서 손을 감싸고 있었지만 냉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맹렬한 바람이 끊임없이 내 몸을 감싸고 회전하고 있었다.
눈에서 불이 일었다.
시선만으로 수십 마리의 거미가 타들어가 몸을 옹송그린 채 죽었다.
매개한 연기와 탄 내가 피어올랐다.
걸음마다 대지가 뒤집혔다.
갈라진 바닥 사이 틈으로 무거운 골렘들이 끊임없이 낙하했다.
서로의 머리를 짓밟고 올라오려는 기계장치들의 관절에서 나는 소리가 기이한 공포를 자아냈다.
"막아! 놈을 막아! 이 곳이 파괴되면 안 된다! 생포하라는 건 취소야! 죽여서라도 막아!"
상체는 인간이고 하체는 거미인, 반인반주伴人半蛛의 괴물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아름다운 목소리였지만 당황이 가득 묻어있었다.
후우-
숨을 그쪽으로 내뿜었다.
내 입에서 나온 검은 연기가 괴물을 향해 퍼져나갔다.
아라크네의 주위 있던 거미들이 착착 벽을 쌓아 연기에 대항했다.
키이이익!-
연기에 닿은 거미들이 기괴하게 뒤틀려 죽었다.
전인미답의 경지.
전지전능.
천하무적.
극의.
무엇도 지금의 내 상태를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 형체를 지닌 신이었다.
엄청난 양의 마나를 마법으로 변환하고 있지만 전혀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평정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가 흐려졌다.
마나들이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날뛰어.
-이타르가 억눌렀던 우리들을 풀어줘.
-더 완벽해 질 수 있어 시안!
"크아아아아!"
인간의 것이 아닌 포효가 내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내 몸마저 마나로 변환되어 부스러지고 있었다.
일순간 정신이 든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털이 불타고 날카로운 바람에 상처 입어 피 흘리는 짐승이었다.
그 짐승은 얼굴의 반 정도가 얼어붙은 채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투브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반지 끼지 말라고 했잖아!]
살점이 뜯겨나가면서도 녀석은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투브의 송곳니가 내 손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
눈을 뜨니 나무로 짜맞춰 놓은 천장이 보였다.
기억이 흐릿했다.
"으으..."
말을 하려 했으나 기운이 없어 신음소리만 새어나왔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정신이 드십니까?"
"공자님께서 정신을 차리셨다!"
갸름한 생김새를 한 여성이 주위 사람을 물렸다.
"시끄러워! 안정이 최우선이야! 다들 조용 못해!"
그 여인의 한 마디에 주위의 모두가 조용해졌다.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큼큼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쉬어버린 목소리가 나왔다.
고개를 저었다.
"불편하시면 말씀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수도방위병단 제 2 마법대대 소속 이스타냐 하일입니다. 이곳은 홀란드 언덕 근처이고 약 1 시간 전, 폭음과 화염이 목격되어 신고를 받고 출동했습니다. 공자님께서는 제뉴인 공작가의 시안 몬트라우님이 맞으십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 감사드립니다. 이미 기별을 보냈으니 사람이 올 겁니다."
그때 밖에서 비명 소리가 났다.
"으아! 이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물지마!"
[야! 일어났으면 나 좀 들여보내!]
이스타냐가 곤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최초 발견자인 농부의 말에 따르면 검은 개가 공자님을 물고서 화염을 뚫고 나왔답니다. 지금 밖에 있는데, 굉장히 흉포합니다. 공자님과 아는... 사이 이십니까?"
동물과 아는 사이라고 말하기가 민망했는지 말끝을 흐리는 이스타냐였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이스타냐가 놀래서 나를 눕혔다.
문을 열고 투브를 안으로 들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여전히 쇳소리만 나왔다.
문을 향해 손짓했다.
"...문을 열라는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렸다.
"손을 대려다가 물린 병사만 셋 입니다. 흥분 상태라 위험합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내가 다시 한 번 용을 쓰며 몸을 일으키자 이스타냐가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문 열어! 들여보내!"
"대장! 위험합니다!"
"내가 책임진다!"
이스타냐가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 녹색의 방어 마법을 펼쳤다.
"열어!"
문이 열리고 투브가 걸어 들어왔다.
마나를 먹어 치료를 한 것인지 외관은 평소의 모습과 변함이 없었다.
[그 난리를 치고 팔자 좋다? 자빠져 있고?]
'반지랑 아라크네는? 어떻게 된 거야?'
투브는 자연스럽게 이스타냐의 방어 마법을 통과해서 내 쪽으로 걸어왔다.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반지는 내가 깨버렸어. 아라크네는 죽지는 않았을 거야. 어디로 도망쳤겠지. 아라크네가 너를 주시할 거야. 옆에 내가 있다지만 그 녀석은 자기를 숨기는데 능해. 골치 아파졌어.]
투브가 풀썩 뛰어 올라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스타냐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방어 마법을 해제하고 방 밖으로 병사들을 끌고 나갔다.
"쉬십시오. 밖에 있겠습니다. 가문 측에서 사람이 오면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복수, 이타르 카누아, 영수, 마법사, 마검사.... 많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이 단어들을 하나로 꿸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중간 중간 고리가 부족해서 꿰어지지 않았다.
'오늘 이 일도 과거와는 다른 결과로 돌아오겠지?'
내 예상이 맞다면 아라크네가 제국에 인공적인 마법사를 만드는 방법을 제공했고 그 핵심적인 부분이 이타르의 반지였다.
이타르의 반지는 파괴되었으니 이제 인공적으로 마법사를 만드는 방법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국은 분리 운동과 이어지는 왕국 정벌을 지탱하는 큰 힘을 잃었다.
내 말에도 불구하고 투브는 말이 없었다.
'왜 말이 없어? 평소에 이 말 그렇게 좋아하더니?'
전혀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이타르... 미친놈... 무슨 반지였길래.... 그거 좀 부쉈다고 날... 이렇게...]
몸을 일으켜 녀석을 살폈다.
'야! 왜 그래!'
투브의 숨결이 거칠었다.
흔들어 봐도 반응하지 않았다.
녀석의 몸이 끓는 것처럼 뜨거웠다.
마나가 투브의 몸 안에서 폭발할 듯 부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