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검사의 종자 (1) >
제뉴인으로 떠나기 전 언젠가 투브와 나눴던 대화.
'너는 마나 결석을 먹잖아.'
[응.]
'그건 마나를 다루는 게 아니야? 너는 마법을 쓸 수 없어?'
[흠... 어려운 걸 묻는군. 정확히 말하면 마나가 오러와 결합해서 굳어진 형태인 '마나 결석'을 먹을 수 있는 거야. 안 먹어도 전혀 지장 없어. 호흡만으로 마나가 내 에너지원이 되거든.]
'마법은?'
[인간들이 보기에 단순한 형태의 마법 정도는 쓸 수 있지. 순간적으로 내 발톱이나 이빨을 강화 한다던가, 공중에 딛고 뛸 수 있는 발판을 만든다던가 하는 종류의 마법. 근데 그런 잡스러운 것 없이도 난 강하잖아?]
투브를 쳐다봤다.
강아지의 모습으로 펄쩍펄쩍 뛰는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녀석도 나를 쳐다봤다.
[너, 무슨 생각해. 내가 원래의 몸만...]
'예, 예 원래의 몸만 찾으면 무지막지하게 강하시겠죠.'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네가 평소처럼 마나를 호흡으로 흡수하는 게 아니라, 나처럼 의식하고 몸 안에 담아두거나 그걸 꺼내 쓸 수 있으면 어떻게 돼?'
[그건 변환인자를 가진 너랑 이타르 밖에 못한다니까?]
'그래도 억지로라도 담아둔다고 치면?'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냐는 표정으로 투브가 나를 봤다.
[죽지. 허용되지 않는 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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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 더 확인하겠습니다. 중앙도서관장 쿠모 라네아가 시안 공자님께 독대를 청했다. 관장실에서 차를 마신 후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니 알 수 없는 공간이었다. 무언가 부서지고 타는 냄새가 났다. 문을 부수고 나와 길을 찾던 중 다시 한 번 정신을 잃었다."
내 앞에 앉은 남자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서류뭉치를 넘겼다.
탁
소리 나게 서류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남자가 나에게 눈을 맞췄다.
"이것이 이스타냐 대위에게 진술하신 내용입니다. 틀린 부분이 있습니까?"
"없네."
나발드 지하임.
이명, 마나 없는 마법사.
마나의 축복이 깃들지 않았음에도 마법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마법 관련 사고에 대한 역학조사를 잘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마법사가 아닌 자를 극도로 배척하는 마법사 협회에서 그를 고문으로 초빙할 정도였으니 실력은 의심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허나 그것은 미래의 일이고 지금은 수도방위병단 제 1 마법대대 소속 조사관이다.
제 2 마법대대는 부대의 구성원만 마법사와 관련 인력일 뿐 수도방위 병단 내의 다른 부대와 비슷하게 수도 근처에 주둔하면서 순찰과 방어를 맡지만 제 1 마법대대는 제 2 마법대대의 구성원 중 실력자들만 뽑아 정보와 기무, 보안에 관련된 일만 전문적으로 다룬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란 소리였다.
"도서관장이 공자님께 독대를 신청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공작 가문의 후계 정도 되면 얼굴 보자는 사람이 보통 많은 게 아니오."
"알고 있습니다."
나발드의 눈빛이 안경 너머로 빛났다.
"제가 궁금한 것은 왜 그런 많은 요청 중 도서관장의 요청만 받아들이셨냐 하는 것이지요. 6개월 넘게 수도에서 사라지기 이전이나 이후나 다른 귀족들의 초대나 방문에도 일절 얼굴 한 번 보이시지 않던 분이 말입니다."
"...."
"그가 공자님께서 원하는 무언가를 제공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가 콧등에 걸쳐있는 안경을 다시 한 번 위로 밀어 올렸다.
"금서 구역에 출입을 요청하신 기록이 있다고 하더군요."
"나발드라 했나? 무례하군."
후작 이상 귀족의 금서 구역 출입 기록은 밖으로 반출되지 않는다.
정보원이 있다는 소리다.
의자의 손걸이에 멋들어지게 장식된 늑대를 톡톡 두드렸다.
더 이상의 발언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신호다.
"하하하. 물론 이건 일개 조사관의 소문을 종합한 조그만 추리입니다. 높으신 분의 지식욕을 방해할 의도는 없습니다."
너무 나갔다고 생각했는지 나발드가 한 수 물렀다.
"무례하지만 능력은 있군."
내 말에 나발드와 책상 옆에 서 있던 알버트의 눈이 커졌다.
나발드는 금세 평정을 찾았다.
그의 눈이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은 아이처럼 반짝였다.
"캐슬린이 몇 년 전, 마나의 축복이 깃든 건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아카데미 과정을 뛰어 넘고 제국 대학으로 편입하실 거라는 소문이 만연합니다."
"그 녀석이 아카데미와 제국 대학의 과정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하는 것 같기에 내가 신분을 이용해서 금서 구역에 있는 마법들을 보고 알려주려는 의도였네. 도서관장은 그런 내게 고대의 마법을 알려주겠다고 접근한 것이고."
"마법사가 아니신데 마법을 보고 알려주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술식을 외워서 적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나? 실제로는 외우지도 못할 만큼 긴 마법들이 전부라서 실망하긴 했네만."
캐슬린이 아카데미와 제국 대학의 과정으로 만족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 나머지는 전부 거짓말이었다.
캐슬린이 정규 과정에 흥미를 못 느끼는 것은 사실 나 때문이었다.
전쟁을 통해서 엄청 발전한 미래의 마법들을 내가 은근 슬쩍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40~50년 후의 미래 마법을 배우는 캐슬린이 현재의 마법에 성이 찰 리가 없었다.
"도서관장이 알려 주겠다던 마법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야 내가 알 리가 있나. 그 후 정신을 잃었는데."
"시설에 대한 것도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안에서 거미와 골렘들이 발견되었다는 소리는 들었네만 내가 목격한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나발드가 입맛을 다셨다.
당연히 아쉽겠지. 일부러 혼란을 유도하고 있으니까.
"공자님께서 데리고 계신다는 그 검은 개를 볼 수 있겠습니까?"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네. 사고 이후 예민해지기도 했고 현재... 몸이 좋지 않네."
알버트에게 눈짓을 했다.
"조사관님, 도련님께서는 큰일을 겪으셔서 휴식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이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나발드가 일어나 내게 허리를 숙였다.
"아니네. 앞으로도 수고해주게. 가능하면 조사에 적극 협조하겠네."
다시 오지 말라는 뜻이다.
사실 내게 조사를 요청하는 것도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거절하려는 것을 내가 받겠다고 했다.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 였다.
아라크네나 이타르의 반지, 무엇보다 내 행적을 감출 필요가 있었다.
"도련님, 저비스 포츠라니님께서 와 계십니다."
"데리고 내 방으로 올라와 줘."
"알겠습니다."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여니 한 쪽에 누워 눈도 뜨지 못한 채 가는 숨을 내쉬고 있는 투브와 그 옆에서 걱정스럽게 투브를 쓰다듬고 있는 캐슬린이 있었다.
"까망아.... 얼른 힘내서 일어나야지."
투브 옆에는 뼈다귀와 같은 것들이 잔뜩 포장되어 있었다.
녀석이 나를 끌고 나왔다는 것이 알려진 후 집안 사람들이 충성심 높은 개라면서 쾌유를 빌며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캐슬린, 잠깐만 나가 있을래?"
"왜?"
"저비스가 진찰 하러 왔어."
"알겠어. 진찰 끝나면 불러야 해?"
캐슬린이 밖으로 나갔다.
투브가 쓰러진 것은 어제였지만 녀석의 상태는 시시각각 안 좋아졌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녀석의 몸 안에서 끓고 있는 마나를 밖으로 빼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몸 안에 있는 마나결석이 만들어내는 고통을 억누르는 용린차가 생각이 났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비스를 부른 것이었다.
이미 저비스가 그의 아버지인 로빈 포츠라니 백작보다 마법제약에서 더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련님, 모시고 왔습니다."
뒤에서 알버트와 저비스가 들어왔다.
"형님, 오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누구와도 접견을 거부하셔서 인사 드리는 것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비스는 꼬맹이 때부터 예의 차리는 걸 참 좋아하더니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쟤 보이지? 검은 개."
"요새 데리고 다니신다는 것과 어제 일에서 형님을 구한 것이 저 개라고..."
"말 길어지는 거 안 좋아하는 거 알지? 너를 부른 이유는 하나야."
저비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필요하다는 거 다 구해다 줄 테니까 쟤 살려. 알겠어? 눈이라도 뜨게 만들어."
황당하다는 기색이 저비스의 눈에 어렸다.
"저는 수의사가 아닙니다, 형님."
원래라면 주종계약진이 맺어져 있으므로 저비스는 내 의사에 반항하지 못해야 했다.
허나 주종계약진은 6개월마다 '재계약'과정을 거쳐야하고 그것마저도 점점 효력이 약해져 10년의 시간이 지나면 효력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마법진을 개발한 마법사의 말이었다.
재계약 시기를 지나면 그 대상에게는 다시 주종계약을 걸 수 없었다.
과연 10년이 넘어가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내가 죽은 시점이 주종계약진이 개발된 지 10년이 채 안됐기 때문에 그 결과까지는 알 수 없었다.
또한 뭘 모르는 어릴 때 맺을수록 효과가 좋고, 반대 의사를 지닌 성인과 강제로 맺을 수도 있지만 이 경우 주종계약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례도 있었다.
아무리 마법이라 해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쉽게 누를 수 없다는 증거였다.
처음 저비스와 주종계약을 할 때만 해도 몇 번의 재계약 과정을 통해 10년 동안 완전히 내 사람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또한 주종계약진을 자주 써먹으리라 다짐했지만 전쟁의 시기가 아닌지라 활용도가 극히 떨어졌다.
장군이었던 과거의 내가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고 하면 극히 소수의 인원을 빼고는 다 내 앞으로 데려올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공작가의 후계라고는 하지만 집에 있기도 힘든 요즘 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제뉴인과 크루슈 산맥에서 반 년 이상을 보내다 온 지금, 저비스는 현재 주종계약을 벗어난 상태였다.
본인은 그런 계약을 했는지, 벗어났는지도 모르겠지만.
"와서 봐. 내가 수의사를 부른 건지 마법제약 전문가를 부른 건지 알 수 있을 거니까."
의심 가득한 눈빛을 거두지 않고 있는 저비스가 투브에게로 다가가서 손을 올렸다.
오른손에서는 검은색 마나, 왼쪽 손에서는 흰 마나가 나오면서 투브의 몸 이곳저곳을 훑었다.
저비스의 눈 옆에서 작은 문자들이 끊임없이 일렁였다.
"무슨 마나가 이렇게.... 형님 대체 무슨 생물을 데리고 계신 겁니까?"
"궁금해 하지 마. 넌 그냥 나랑 차 마시러 왔다가 내 변덕에 잡혀있는 거고, 아무 것도 본 게 없어. 할 수 있겠어?"
저비스가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꼈다.
"형님께서 제게 해주신 게 얼만데 이 정도도 못 도와드리겠습니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부탁한다."
저비스가 책상 위에 놓여진 종이에 깃펜으로 무언가를 마구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이 앞뒤가 빽빽해졌을 무렵, 그걸 알버트에게 건네줬다.
"이것들이 필요합니다. 제뉴인 가문의 의사와 약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것도 있겠지만 없는 것도 있을 겁니다. 가능한 빠르게 준비해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나가 생물의 안에 머무는 것도 처음 보는데 심하게 요동치고 있습니다."
"더 필요한 건?"
"아무래도 이 곳은 저택 내부라 보는 눈이 많습니다. 부지 내에 사람들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이 있습니까?"
저택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안 쓰는 창고가 있었다.
"그럼 그곳으로 옮기겠습니다."
저비스가 투브를 안아들었다.
[손 대지마!]
머릿속에 투브의 외침이 강렬하게 울려 퍼졌다.
의식이 없는 투브가 3단계의 모습으로 변하면서 투브를 안고 있던 저비스가 방 한 쪽으로 튕겨나갔다.
"으앗!"
저비스의 외침에 방을 나가려던 알버트가 투브의 모습을 보고서 재빨리 오러를 발산하면서 투브를 제압하려 했다.
"알버트! 안 돼!"
내가 주위 마나를 안정시키면서 외쳤다.
오러와 마나를 다 다루는 것을 모르게 하는 것이 좋았지만 지금은 그것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알버트는 믿을만한 사람이기도 했고.
"놀라서 그래 놀라서. 물러서 알버트."
"도련님.. 마나를..."
"모른 척 해 줄 거지?"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해. 투브. 나 여기 있어. 괜찮아.'
[시안...]
투브 안 쪽에서 꿈틀대는 마나까지는 제어할 수 없지만 주위의 마나라도 안정시키니 다시 투브의 몸이 작아지고 잠에 빠져들었다.
뒤를 보니 튕겨 나갈 때의 충격으로 기절한 것인지 저비스는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으헉! 거대한 괴물이!"
손을 대서 흔드니 저비스가 깜짝 놀란 얼굴로 일어났다.
그리고 작아진 투브를 보고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저비스였다.
"함부로 만지면 어떻게 하냐. 마나가 불안정했는지 튕겨나갔어. 투브는 캐슬린보고 옮기라고 할 테니까 쉬고 있어. 준비되면 부를게."
저비스가 투브의 변한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아 거짓말을 했다.
어째 거짓말의 빈도가 늘어가는 것 같다.
저비스를 응접실에 데려다놓고 준비할 물품들이 적힌 종이를 들고 나서려는 알버트를 불렀다.
"알버트, 부탁 잊으면 안 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와 훈련하실 때 마나를 쓰신 적은 없으시겠지요?"
어색하게 웃었다.
알버트가 나가고 다른 사용인이 내게 다가왔다.
"공자님, 각하께서 찾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