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검사의 종자 (2) >
"몸은 좀 괜찮은 것이냐."
내가 작위를 포기 하겠다 선언한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와 마주하는 자리다.
그래도 몸 걱정을 해주시는 것을 보니 나름 걱정이 되셨나 보다.
"괜찮습니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작위는 포기한다고 하고서 신분은 잘 이용하는 것 같더구나. 금서 구역 출입에, 포츠라니 백작의 아들을 오라 가라 하는 것을 보니."
"작위를 포기하겠다 말씀드린 것이지 몬트라우 성을 버리겠다고 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능청스러운 내 답에 아버지는 속이 타는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아까보다 더 많은 양이었다.
작위를 포기하겠다는 것은 오로지 힘을 길러 복수에만 전념하겠다는 내 나름대로의 의지 표현이었다.
지금이야 어려서 큰 제약이 없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수많은 제약이 나를 가로막을 것이다.
당장 열다섯만 되면 딸 있는 귀족들이 죄다 예방한답시고 저택을 찾아온다.
미래의 며느리감을 공작의 눈에 들게 하려는 뻔한 수다.
성년인 열여덟이 되면 진정한 의미의 제뉴인 공작가의 후계가 되어 내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온갖 파티, 사교 모임과 같은 곳에 참여 해야 했다.
공작이라는 대귀족이 짊어져야 할 숙명 같은 것이었다.
그런 쓸모없는 일에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금전적인 도움도 필요 없었다.
-시안, 할애비는 곧 떠날 몸이니 내 개인 재산을 조금씩 네 앞으로 돌려주마.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큰일을 하는데 쓰거라.
도깨비들을 데려와 정착 시키자 할아버지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었다.
공작을 수십 년 지낸 분의 개인 재산이었다.
소규모 백작령의 몇 년 예산은 될 정도의 부富였다.
지금의 내 관심사는 복수, 분리 운동, 이타르.
이 셋 밖에 없었다.
작위를 잇고, 공작이 되는 것은 내 목표에 방해가 되었으면 방해가 되었지 도움 될 것이 없다는 판단 하에 행한 행동이었다.
"네가 후계 자리를 원치 않는다면 강요하지는 않겠다."
"!"
"어차피 내가 물려줘야 네가 공작이 될 수 있는데, 내가 죽기 전에 갑자기 넘기면 될 것이 아니더냐?"
"아버지!"
"농이다 농. 너도 내게 무지막지한 발언을 그렇게 던지는데, 나라고 못할 것 있느냐?"
빙긋 웃던 아버지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나는 아버지의 인맥이 크루슈 산맥에 있는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갑자기 나온 아버지의 말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표정이라니... 아비를 너무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 제국의 공작이다. 눈과 귀가 되어 줄 자들은 차고 넘치는 자리다."
"그렇다면..."
"걱정 말거라. 네가 그 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니. 눈과 귀에게 목숨을 버리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아버지가 나와 눈을 맞췄다.
"시안. 제뉴인의 일도 그렇고, 어제의 일도 그렇고. 네가 우리에게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작위를 계승하지 않겠다는 것도 한 때의 치기가 아닌 것이겠지.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에는 네가 나보다 더 어른인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이렇게 속을 털어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슴이 찡했다.
"하지만 네가 작위를 잇지 않겠다고 해도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은 용납할 수 없구나. 캐슬린은 아직 어리고 그 자리의 무거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일단은 네가 성년이 되면 너를 후계로 공표하마. 황실의 초대 같은 정말 중요한 행사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직접 너를 귀찮게 하는 것들을 막아주면 되겠느냐? 캐슬린이 성장하고 직접 의사를 물어본 후, 그때 후계 자리를 넘기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그 편이 잡음이 생기지 않는 방법인 것 같구나."
아버지가 저렇게까지 말하시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캐슬린은 마법사가 되었으니 제국의 관리를 받아야 하는데 공작에 오르면 그런 것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 모두에게 유리하다 할 수 있었다.
"제뉴인 공작이 후계에게 명하는 것이 아니다. 제로 몬트라우라는 아비가 아들 시안 몬트라우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는 진심을 어찌 거절한단 말인가.
눈앞이 흐려질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나가 보아도 좋다. 너를 데리고 나온 개가 위급하다 들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 하거라."
"그리 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주에 송곳니 기사단과 강철바위 기사단의 모의 전투가 있으니 참석 했으면 하는구나. 기사단원들이 네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이를 박박 갈고 있으니 한 번 얼굴이라도 비추는 것이 어떻겠느냐."
"예?"
"가문의 자존심이 걸린 기사단 모의 전투다. 후계자가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 방금 승낙하지 않았느냐, 후계 자리를 네가 맡아 놓겠다고."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뻔뻔한 얼굴을 하고 계셨다.
당했다.
잠깐... 강철바위면.... 카몰 후작가.... 스테판 유제프도 참석 하는 건가?
"제가 참모로 참여해도 되겠습니까?"
"네가 직접? 흠... 참모로 참관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구나. 그리하도록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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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 오셨습니까."
투브가 옮겨진 창고 앞에서 집사장 케인즈가 나를 맞았다.
"왜 저택에 안 있고?"
"각하께서 이쪽으로 가서 인력과 물품을 통제하라는 명을 하셨습니다."
뒤쪽을 보니 마차에서 계속해서 약초나 조제기구들이 옮겨지고 있었다.
저비스가 요청한 물품들인 것 같았다.
"들어가시지요. 아가씨도 안쪽에 계십니다."
창고에 있던 짐을 다른 쪽으로 옮겼는지 내부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어있었다.
"그 약초는 이쪽으로! 거기! 조심해서 내려놔요! 깨지면 다시 구하지도 못해요!"
캐슬린이 잔뜩 날이 선 채로 짐을 나르는 사람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방긋거리며 웃는 캐슬린이 저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모두가 저절로 긴장하게 됐다.
"오빠! 아버지랑 얘기 잘 했어?"
"뭐 그냥. 잘 했다면 잘 했지. 저비스랑 투.. 아니 까망이는?"
"안쪽에. 저비스가 사람들 접근을 막아달래."
창고의 한 쪽에 마나가 일렁이는 곳이 보였다.
"저쪽 주위의 마나가 너무 불안정해서 내가 막을 쳐놓기는 했는데, 쉽지 않아. 오빠도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가면 변환인자 때문에 캐슬린이 만들어 놓은 벽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다가가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저비스가 뭐래? 할 수 있을 것 같대?"
"까망이 안에 마나가 꿈틀거린다며? 모르겠어. 일단 고통을 억누르는 것까지는 성공한 것 같은데 마나를 밖으로 빼는 데는 애 먹고 있나 봐."
캐슬린이 쉬지도 않고 말을 쏟아냈다.
"까망이 대체 뭐야? 마나가 생명체 안에 들어가 있는 것도 놀라운데, 그걸 버티고 있질 않나. 아무것도 안 먹고 싸지도 않고. 뭘 데리고 온 거야?"
"지금은 말 못해. 나중에 네가 공작이 되면 말 해줄지도 모르겠다?"
"심각한데 농담 할 거야!"
"원래 힘들 때일수록 이런 걸로 힘을 내는 거야..."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굳이 마나를 빼낼 필요가 없었다.
"네가 만든 막이니까, 안쪽에 영향 안 주고 통과할 수 있지?"
"최대한 적게 줄 수는 있어."
"가서 저비스한테 억지로 마나를 빼거나 억누르지 말고 성질만 바꿔서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수 있나 물어봐."
투브가 3단계로 변하는 데는 엄청난 마나를 필요로 했고, 그럴 때마다 중간 매개체인 나는 기절의 위기를 겪었다.
헌데 그 마나를 투브 몸 안에 있는 이타르의 반지가 충당할 수 있으면 투브도 자유롭게 변할 수 있고 나도 그 때마다 기절하지 않아도 된다.
억지로 뽑아낼 필요가 없었다.
캐슬린이 종이를 들고 나왔다.
"쉽지 않기는 한데, 제거하는 것 보다는 나은 방법일 것 같대. 대신 꾸준히 약 복용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데, 괜찮겠어?"
"죽는 것 보다 낫지. 그 종이는 뭐야?"
"성질 변화에 필요한 약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 천재는 천재인가 봐. 이런 걸 술술 내놓네."
종이를 케인즈에게 건네준 캐슬린이 다시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지시를 하기 시작했다.
안에 있어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 밖으로 나왔다.
답답했다.
폭주하는 나를 구하려다 저렇게 되었다는 사실과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그저 기도라는 것이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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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방울이 뺨을 타고 내려가다 턱에 걸렸다.
이내 위에서 내려온 다른 땀방울과 부딪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지하 연무장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잡념을 없애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오직 신체의 힘만 전달 받은 검이 상하 운동을 반복했다.
오러를 운용했으면 금세 증발했을 땀이 눈앞을 가렸다.
팔이 뻐근해져 왔다.
고통으로라도 잡념을 몰아내고 싶었다.
"도련님, 안에 계십니까. 알버트입니다."
밖에서 알버트가 인기척을 냈다.
"들어와, 무슨 일 생겼어?"
"아닙니다. 방에 올라가 봤는데 계시지 않기에 이쪽에 계실까 해서 내려왔습니다."
"나를 너무 잘 아네."
"어렸을 때부터 제가 도련님을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알버트의 차림은 항상 입고 다니는 정복이 아니라 나와 수련 할 때만 입는 옷이었다.
"'생각을 없애기에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지요.' 왜 안해?"
"제가 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말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쪽에 놓여있는 목검을 집어 든 알버트가 검을 내 쪽으로 밀어 넣었다.
역시 그도 오러를 운용하지 않고 있었다.
여유롭게 알버트의 검을 받아 넘겼다.
뒤에 있던 발을 앞으로 옮기면서 무게 중심을 이동했다.
동시에 검이 알버트의 목으로 향하게 했다.
탁
분명 내 가슴을 향하고 있던 알버트의 검이 내 검로를 가로막았다.
검을 회수하고 거리를 벌린 뒤, 예전에 어느 기사 소설에서 본 말투를 따라했다.
"노야老爺, 오러를 쓰는 것은 너무한 처사가 아니오?"
알버트도 내게 장단을 맞췄다.
"같은 해라도 여명을 맞이하는 자와 황혼을 맞이하는 자가 보는 해는 다르지 않겠는가? 여명이 황혼에게 한 수 양보하시게."
피식 웃고 다시 알버트를 향해 검을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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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땀으로 젖어 들었다.
그것은 내 눈 앞에 있는 알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발을 가지런히 빗어 넘긴 노인의 신체 능력이 젊은이와 비등하다니, 다시 봐도 믿기 힘들었다.
"여기까지 하지. 목검에서 손 떼."
알버트가 손에서 목검을 놓자 내 손에 있던 목검과 함께 마법으로 날려 보내 정리대에 놓아두었다.
"너무 과감하십니다, 도련님. 마법까지 쓰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뭐 어때, 여긴 우리 말고 아무도 없는데. 그리고 알버트가 어디 가서 말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상대해 줘서 고마워. 씻고 똥개한테 가봐야겠네,"
연무장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알버트가 나를 향해 물었다.
"도련님, 마나 소드를 만들 줄도 아십니까?"
쾅
누가 들을세라 재빨리 연무장의 문을 닫았다.
고개를 돌려 돌아본 알버트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그건 누구에게 들은 거지?"
"부정하지 않으시는 걸 보니,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제게 그것을 보여 주실 수 있으십니까?"
"누구한테 들었는지 먼저 말 해."
"그것은...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제 주인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알버트의 주인?
알버트는 저택의 한 방에서 살고 있고 나와 캐슬린의 예절교육 담당이지만 몬트라우 가문에 대해 가신 서약을 하지 않았다.
대우는 가신 이상이지만 따지고 보면 엄연히 손님이었다.
그런 알버트에게 주인이라니?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몬트라우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기에 가신이 아닙니다. 제 주인은 따로 계십니다. 더 이상 밝힐 수 없는 내용이 많습니다."
알버트의 목소리는 담담한 듯 했지만 살짝 떨리고 있었다.
"도련님께서 마나 소드를 어떻게 알고 계신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들지 못하신다면 못하신다고 말씀해주시면 되고, 만드실 수 있다면 제게 단 한 번만 보여주시면 됩니다."
"내가 하지 않겠다고 하면?"
"도련님과 저는 대련을 마친 뒤 각자의 할 일을 하러 간 것이 되는 것이지요.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알 수 없었던 알버트의 내력이 궁금했다.
마나 소드를 알고 있는 것을 보아 마검사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오러를 폭발적으로 운용했다.
감각이 예민해지다가 어느 순간 고요한 물 속에 있는 것처럼 잠잠해졌다.
그 때를 노려 마나를 몸 안으로 빨아들였다.
다시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알버트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놀라움과 황홀함이 새어 나오는 눈이었다.
마나를 손으로 모아 곧게 뻗어 올렸다.
공기가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반투명한 마나 소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털썩
알버트가 천천히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마검사의 종자, 알버트 카누아. 당신께 충성을 올립니다."
갑작스러운 알버트의 말과 행동에 내 손에 있던 마나 소드가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