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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27화 (27/180)

< 초대 (2) >

초대 (2)

최초의 황제는 어디서 온 인물일까.

혹자는 동쪽 바다를 건너온 다른 대륙의 사람이라고 했고, 혹자는 지상으로 잠시간의 유희를 즐기러 내려왔다가 길을 잃어버린 천인天人이 아닐까 추측했다.

지금에 와서는 제국 곳곳의 마을이 자신들이 황제가 나고 자란 마을이라고 선전하는 판국이었지만 제대로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정도로 황가의 핏줄이 가진 외모는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윤기가 도는 회색 머릿결에 조각도 빛을 잃을 아름다운 외모, 무엇보다 평소에는 빛을 머금은 물방울처럼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나다가 오러를 운용하기 시작하면 백색으로 변하는 그들의 눈동자까지.

세상천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황가만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서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고 있는 사람, 바그안트 서비어는 묘사와 완벽하게 부합하는 외형을 하고 있었다.

"카몰 후작가의 일은 너무 염려치 말게."

어색한 안부 인사 후에 황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얼른 고개를 숙였다.

"목격자들의 증언도 그렇고 모의 전투에서 발생한 사고였을 뿐이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말만 하는 것이 아닐세. 내 직접 사건 보고서를 읽어 보고 하는 말이야."

2 황자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이니 황실 측에서도 내 무죄를 지지한다는 확실한 입장 표명이었다.

스테판을 죽인 것은 운이 많이 따르긴 했지만 누구도 내 힘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몸이 달아올랐다.

"차가 입맛에 맞지 않나, 몬트라우 백?"

회색 머리칼을 넘기며 2 황자가 물었다.

아버지가 공작이고 내가 작위를 받게 되면 백작伯爵부터 시작할 가능성이 농후하니 백이라 칭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듣기에 거북했다.

"백이라니요, 저는 아직 소년일 뿐입니다. 시안이라 칭하시지요, 황자마마."

"안 될 말이지. 그대가 제뉴인 공의 뒤를 이을 것이 확실시 되는 상황이 아닌가. 지금부터 미리 익숙해지는 것이 좋을 것이야. 성년이 채 5년도 남지 않지 않았는가."

다시 한 번 차를 홀짝 들이킨 2 황자가 찻잔 너머로 내게 시선을 보냈다.

"더 빨리 독립하고 싶으면 말하게. 이번 모의 전투의 활약상을 폐하께서도 들으셨으니 내가 권유 드리면 성년이 되기 전에도 작위를 내리시지 않겠나?"

"과분한 처사입니다. 아직 아버지께 배울 것이 많은데 어찌 독립을 생각하겠습니까."

당했다.

아버지가 2 황자에게 나를 보낸 것은 후계구도에서 몸을 뺄 수 없게 내 존재를 황실에 보여 눈도장을 찍으려는 셈이고 인재 욕심이 남달랐던 2 황자는 그것에 더해서 자신의 사람이 되지 않겠냐고 나를 떠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럴려고 보고서 어쩌구 얘기를 했구만? 안 넘어간다.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도로 보고서 얘기를 꺼낸 것일지도 몰랐다.

상관 없었다. 영향력이 있건 말건 완벽 범죄였을 테니까.

대체 어떤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아버지는 황태자, 지금은 황태자에 봉해지지 않았지. 여튼 1 황자보다는 2 황자와 가깝게 지내셨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티나게 2 황자 쪽으로 기울지는 않으셨을 거다.

내가 이쪽에 온 만큼 1 황자 쪽에도 뭔가를 했겠지.

미래의 나는 한창 분리 운동을 제압하고 돌아오니 다른 사람이 황궁의 주인이 되어 있어 놀랐었다.

형을 부정하고 황위에 올라 정통성이 흔들리는 황제, 분리 운동 제압을 성공적으로 마친 장군.

당시의 황제에게는 내가 큰 위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0년 넘게 대륙을 누비며 전장을 찾아다닌 나는 그런 복잡한 정치판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편안히 쉬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수도에서 100여km 떨어진 곳에 군대를 두고 혼자 황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현재의 1 황자이자 내게 군권을 맡긴 황제가 하사한 망토를 반납했다.

낡고 해져서 등에 그려진 황실의 문양도 알아보지 못하게 된 그 망토를 반납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장군 시안 몬트라우는 현 황제에게 군권을 반납하고 지지한다.

이 행위로 인해 전前황제파의 기세가 많이 죽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후에도 귀족의 삶보다는 군인의 삶을 살았다.

귀족원에 얼굴 정도는 비췄지만 아버지가 죽어가고 몬트라우 가문이 무너져가는 동안 어떻게든 물어 뜯으려고만 했던 다른 귀족들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었다.

반란을 일으킬 명분과 힘이 있었음에도 아무 말하지 않고 자신을 지지한 내 모습에 감동한 건지 바그안트 서비어는 이어지는 왕국 정벌에서 내게 대장군의 직위를 하사했다.

그 덕에 편안히 쉬기는커녕 또다시 전장을 누벼야했다.

윗 놈들은 이래서······.

그 때를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불편한 것이 있는가?"

이런, 나도 모르게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나 보다.

"아닙니다. 귀한 차를 내어 주셔서 산지가 어디인가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차라네. 타칼튼 지방에서만 나는 붉은발꽃잎으로 우려낸 차지."

지금 많이 드셔 두는 게 좋을 겁니다.

분리 운동 때 제국에 반기를 든 타칼튼 백작의 자금줄이라 제가 다 불태우거든요.

귀띔이라도 해주려다가 참았다.

나를 굴린 것에 대한 소소한 복수였다.

투브가 말을 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기껏해야 스물 다섯, 많아야 서른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어떻게 너희 기사 단장 이상의 오러를 운용할 수 있는 거지? 양뿐만 아니라 질도 월등한데······.]

'아······. 너는 황가皇家, 아니 서비어 가문 사람을 처음 보겠구나?'

이타르와 내가 변환인자를 가지고 있는, 마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면 서비어 가문은 오러의 사랑을 받는다고 할 수 있었다.

개인 별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태아 때부터 본능적으로 오러를 익히고 세상에 나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강도의 수련을 해도 오러가 증진되는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질과 양이 탁월했음은 물론이다.

지금에 와서는 다른 가문들과 피가 많이 섞여 비슷한 정도의 수련과정을 거친 기사 세넷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는 정도였다.

기사들 중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기사들이 저런 행위가 가능했지만 서비어 가문의 인물은 기본적으로 황가의 인물이니 검술이나 체력 단련 외에도 제왕학, 외교학과 같은 다른 학문들에도 엄청난 시간을 쏟아야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시간 대비 말도 안 되는 효율과 재능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었다, 초대 황제였던 레인 서비어의 경우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화들이 전해 내려왔다.

주먹에 두른 오러만으로 기사단 하나를 몰살 시켰다던가, 검에 오러를 두르자 2m 가까이 오러가 뻗어 나왔다던가 하는, 전설이라 해도 고개를 갸우뚱할만한 정도의 일화가 수두룩했다.

오죽 했으면 오러를 운용하면 눈 전체가 하얗게 변하는 서비어가의 특수한 모습과 합쳐져서 초대 황제에게 붙여진 이명이 하얀 눈의 무신武神이었단다.

오로지 패도覇道를 걸어 제국이라는 거대한 집합체를 만들어낸 사람에게 붙을만한 이명이었다.

레인 서비어가 어디서 왔는지, 서비어 가문의 사람들이 오러를 운용하면 왜 눈이 하얗게 변하는 지에 대한 추측은 책장 몇 개를 꽉 채울 정도로 많았으나 정확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선조님과 동일한 시대 인물이 아니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야.

영수를 잡겠다고 위험 가득한 땅을 혼자서 들어가는 선조, 메조 스트라우.

맨 몸으로 시작해서 황제에 오른 레인 서비어.

둘이 같은 시대 인물이었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둘의 등쌀에 살 수가 없을 지경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할 정도로 오러가 흐르기에 적합한 몸, 호흡만으로도 순환하는 오러······. 굉장한 걸 보게 되는군.]

투브가 연신 감탄하며 2 황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시선을 느낀 건지 2 황자가 크흠하며 입을 열었다.

"그 개가 자네가 탔던 늑대인가? 온 수도에 화제라네."

"그렇습니다."

"한 번 보여줄 수 있겠나?"

"그것이······. 이 개와 저는 주종관계가 아닙니다. 따라서 변하는 것도 이 녀석의 마음이지 제가 왈가왈부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인가? 모의 전투장에 있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자네가 자유자재로 늑대를 조종하는 것처럼 보였다는데."

"정말입니다. 당시에도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을 뿐, 제 의사와는 관련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2 황자지만 내가 죽을 당시에 황제였던 사람이다.

불확실한 의심만 존재할 뿐이지만 용의선상에 놓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사람에게 굳이 내 패를 먼저 보여줄 이유는 없었다.

[거짓말이 날이 갈수록 는다? 이제는 황자한테까지 거짓말이 술술 나오네?]

'거짓말이라니, 전략적 발언이라고 수정해. 나는 장군이었어. 전략을 사용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야.'

[거짓말쟁이 장군 밑에 있었던 병사들의 고생이 훤히 보이는구만.]

웃기고 있네.

내가 통솔하는 부대는 연전연승에 생존률도 높아서 얼마나 선호도가 높았는데.

"아쉽군, 모습이 변화하는 생물을 볼 기회는 흔치 않아서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죄송합니다. 제 말을 들었다면 엉덩이를 걷어 차서라도 황자마마께 보여 드릴텐데 고집이 어찌나 질긴지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 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입니다."

"하하하하. 그렇게 모질게 대하지는 말게. 말도 못하는 미물 아닌가."

'푸핫, 너보고 말도 못하는 미물이라는데?'

[황자고 뭐고 저 새끼를 콱 그냥······.]

그 후에도 의도를 감춘 채 서로 뜬구름을 잡는 소리가 몇 번 오갔다.

아무래도 2 황자는 나를 자신의 편으로 확고하게 만들고 싶은 것 같았다.

나를 이곳에 보내기는 했지만 아마 아버지는 1 황자에게도 섭하지 않을 대우를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 황자는 이 자리가 나를 포섭하기 위한 자리임과 동시에 실세 대귀족인 아버지의 지지를 얻어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제국은 선제후 제도를 택하고 있지 않아 귀족이 왕을 뽑을 수는 없지만 결국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추후 정치를 하기 편해진다는 점에서 황자들에게는 오히려 더 어려운 과제일 수도 있었다.

비록 형을 죽이기는 했지만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짠하기도 했다.

"내가 시간을 많이 뺏은 것 같군. 미안하네."

"그렇지 않습니다.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 몬트라우 백."

2 황자는 끝까지 몬트라우 백을 붙여가며 자신은 아직 미련이 남았음을 어필했다.

남자가 들러붙는 건 싫은데······.

"다시 뵙기를 염원하고 있겠습니다."

##

황궁 밖으로 나가는 길, 길 안내를 맡고 앞서가던 내관이 나를 독촉했다.

"공자님, 한 시간 후면 황궁의 문이 닫힙니다. 그때부터는 오직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한 시간이면 많이 남았네. 황궁에 들어올 일도 별로 없는데 구경 좀 하다 가자고."

내 말에 내관이 한숨을 푹 쉬었다.

내관이 발을 동동 구르는 것과 비교되게 내 발걸음은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나는 지금 일부러 늦장을 부리고 있었다.

[네가 말한 게 오늘 맞아?]

'몇 번이고 확인했어. 제 1 황녀 실종 사건. 오늘이야.'

일곱 살인 제 1 황녀가 황궁 안에서 실종된다.

범인을 찾기 위해 황궁이 폐쇄되고 3일 간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황궁에 갇히게 된다.

3일 뒤, 1 황녀는 자신의 방에서 발견된다.

무슨 일이 있냐는 질문에 그저 놀다 왔다는 말 뿐, 1 황녀는 그 외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1 황녀를 모시던 시종들과 시녀들이 죽음을 맞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 지어졌지만 뒷맛이 깔끔하지 않은 일종의 미제 사건이었다.

나는 그 동안 황궁에 있으면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비밀 창고에 들어갈 셈이었다.

분리 운동 진압 이후 황궁 개축 공사를 하면서 발견되는 공간인데, 비밀스러운 책들과 문서들이 발견 되었다는 말 뿐 황제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것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 책들은 발견 직후 어디론가 옮겨졌다.

대장군의 직위를 받은 뒤 나는 황제 앞에서 칼을 찰 수 있고 황궁 어디든 거닐 수 있는 권한을 허락 받았지만 그 비밀 문서가 있는 위치 만은 알지 못했다.

크게 관심 두지 않기도 했고.

지금에 와서야 그것이 이타르 카누아나 레인 서비어에 관련된 문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타르에 관련되어 있는 문서라면 횡재 하는 것이고 아니면 그냥 두고 나오면 되는 것이니 밑져야 본전인 셈이었다.

황궁에 들어올 기회는 흔치 않으니 시행할 기회는 지금 뿐이었다.

경비는 강화되겠지만 이미 내 머리에는 황궁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오러와 마나도 있으니 겁날 것이 없었다.

게다가 황자의 손님이라는 완벽한 알리바이까지!

완벽했다.

주위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쿵쿵 거리면서 문이 닫히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앞서가던 내관이 당황하며 말했다.

"왜 벌써 문이······! 공자님 여기 가만히 계셔야 합니다. 제가 상황을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내관이 뛰어간 후, 투브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둑질 같은데.]

'도둑질은 주인 있는 물건을 훔칠 때 도둑질이라고 하는 거고. 이건 주인 없는 물건이야. 도둑질은 아니지.'

[요새 한 마디도 안 진다?]

'지고 이기는 게 중요하냐? 오늘 밤부터 움직일 거니까 푹 자둬.'

하늘은 아직 노을빛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황궁을 털다니,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짓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긴장감과 흥분이 전신을 조여 들었다.

마치 모험을 떠나는 것 같았다.

'몸이 어려지니 마음도 어려지나봐.'

[나잇값 좀 해라.]

캐슬린이 손만 대면 좋다고 배를 뒤집어 까는 놈이 나잇값 타령은······.

"큰일 났습니다!"

내관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모른체하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재밌는 밤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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