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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28화 (28/180)

< 밤의 손님 (1) >

밤의 손님 (1)

[자냐?]

'자겠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황궁이 봉쇄된 지 4시간, 나는 지금 외국 대사에게 제공되는 방에 머물고 있었다.

궁에서 일하던 잡부나 식재료를 조달하는 사람 등등이 마구잡이로 황궁 내의 공터로 몰려 황실 경비대의 검문을 받고 허겁지겁 야영지를 배속 받는 것에 비하면 큰 호사였다.

더군다나 1 황녀의 실종은 아직까지는 극히 기밀사항일터, 영문도 모른 채로 궁에 갇힌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여전히 밖에서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치마를 끌며 이리 저리 움직이는 궁녀들의 소리,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기사들의 소리 등등 황궁이 이렇게 소란한 적이 있었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부산했다.

이런 상황에 움직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밤이 더 깊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시종장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황궁 시종장, 얄츠 이나타 백작.

북부의 태산이라 불리는 페익스 이나타, 히베아 변경백의 사촌이었다.

이나타 가문은 대대로 대륙 최북단의 히베아 지방의 조그만 영주였다.

얄궂게도 레인 서비어가 패도행을 시작한 곳이 히베아 지방이었고 그곳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압도적인 무력을 보고 그곳을 다스리던 두 형제가 레인 서비어의 가신이 되기를 가장 먼저 자청했다.

두려움에 시작한 투자가 대성공을 거두어서 레인 서비어는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막대한 공로 덕에 초대 황제가 형제를 직접 공작에 봉하려 했지만 극구 사양하며 제국을 안 밖에서 지키겠다며 형이 변경백의 작위를, 동생이 시종장의 지위를 요청했다 한다.

초대 황제는 매우 기뻐하며 요청을 수락한 뒤 이나타 가문에 대해 영구적인 면세혜택을 내렸다.

사실상 공작 이상의, 독립 왕국 수준의 자율성을 보장해준 것이다.

그 이후 같은 이나타 가문이지만 형의 핏줄은 히베아에서, 동생의 핏줄은 수도에서 제국을 지켜보게 되었다.

이런 뿌리 깊은 정통성 때문에 한 명은 변경백, 한 명은 백작이지만 웬만한 후작 정도는 눈도 못 마주치는 것이 이나타 가문의 위엄이었다.

"들어오세요."

전생에도 만난 적이 있었다.

굉장히 일처리가 빠르고 깐깐한 인물이었다.

황제보다는 황실에 충성하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2 황자가 형을 죽이고 황위에 올라 모두가 놀라고 당황했던 때에도 아무 내색 없이 입궁해서 자신의 할 일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시종장이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시종장, 얄츠 이나타입니다. 2 황자마마께서 굉장히 미안해 하고 계십니다. 공작각하께는 연락을 드렸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으십니다."

"황자마마도 이런 일이 있으실 줄 모르셨을테니 염려 마시라고 전해주세요. 집에 미리 연락 해 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그가 빙긋 웃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의젓하시군요. 다행입니다. 2 황자마마께서 걱정을 어찌나 하시던지 저를 직접 보내셨습니다."

"바쁘신 분이라고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 제가 죄송하게 됐습니다."

슬쩍 말을 던졌다.

"그런데 무슨 일로 황궁을 폐쇄한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단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이 나왔다.

"죄송합니다. 그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역시 깐깐하다.

황제에게도 직언을 서슴치 않는 공명정대의 대명사다웠다.

아마 내궁內宮은 지금 1 황녀를 찾느라 난리가 났을 것이다.

3일 뒤에 땅에서 솟은 것처럼 발견되긴 하지만······.

"그럼 언제쯤 나갈 수 있을까요?"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늦어도 내일 오후 전까지는 열리지 않을까 합니다. 계시는 동안 불편한 점이 없게 하라고 이미 일러두었습니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시종장이 다시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내가 한 마디를 더 했다.

"제가 자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 사람이 들어오지 말라고 전해주실 수 있나요?"

"그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자는 동안 개가 굉장히 예민해져서 누군가 들어오면 앞뒤 안 가리고 물 수도 있어서요. 정말 흥분하면 커지기도 하니까 조심해야 하거든요."

[아주 편한대로 날 팔아 먹는 것 같다?]

'너한테도 편한 길이야.'

투브가 윗입술을 올려 시종장을 향해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 보였다.

시종장이 황급히 방 밖으로 나갔다.

[봤냐? 뛰어 나가는 거? 푸하하하하]

'제발 주목 좀 안 받게 해 주라······.'

##

덜커덕

조심스레 창문을 열었다.

창문 너머로 일정 거리마다 횃불이 꼽혀 있는 황궁의 통로와 짝을 지어 그 길을 순찰을 하는 병사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지금 나가면 되겠다.'

[밤 산책, 좋지요~]

강아지로 변한 투브를 들어 안아 먼저 밖으로 내놨다.

나도 이어서 몸을 밖으로 빼냈다.

[두 명, 온다.]

투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퉁이에서 병사 둘이 걸어 나왔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투브를 몸에 붙인 채 벽에 몸을 밀착했다.

두 명의 병사가 철커덕 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 앞을 지나갔을 때 나는 그들이 평범한 병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갑옷에 도는 은은한 붉은 빛, 가슴에 새겨진 방패 문양.

황제의 친위대를 제외하면 제국 최강의 무력단체로 손꼽히는 붉은 방패 기사단이었다.

[이야······. 진귀한 거 많이 보네. 저 빨간놈 하나 하나가 네 아버지와 비슷한데?]

'붉은 방패 기사단을 황궁 경비에 동원할 정도라니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빨리 볼 일 마쳐야 될 것 같아.'

[안일하게 생각했다면 대개 계획을 변경하거나 취소하지 않나?]

'오늘 범인이 안 나오면 내일부터는 더 경계가 심해질테니 변경은 할 수 없고, 취소도 안 돼. 언제 황궁에 이렇게 오래 머물 수 있을지 몰라.'

기사들이 멀어지고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한 번 돌리기 무섭게 바로 다시 모퉁이에서 소리가 들렸다.

가용 인원을 모두 동원해서 경비를 빽빽하게 돌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품에 투브를 넣고 몸을 날려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 마법으로 기척을 숨겼다.

숨겨져 있던 마법진이 침입자를 감지하고 발동 되려다가 변환인자 때문에 힘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황실 마법사들이 보면 거품 물겠구만.'

지붕 위에 올라서니 넓게 펼쳐진 황궁이 눈에 들어왔다.

횃불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저 불빛들을 피해 목표 지점에 도달하려면 한시바삐 움직여야 했다.

밤은 그리 길지 않았다.

##

2 황자, 바그안트 서비어는 밤이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사라진 동생, 엘리자벳 서비어 때문이었다.

수백 년 간 설치된 마법들이 교묘하게 겹겹이 연계되어 작동하는 것이 황궁의 수호체계였다.

허가 되지 않은 곳에서 마법으로 작은 불만 만들어내도 바로 목과 몸이 분리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고 엄격했다.

그런 황궁에서 황녀가 실종됐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늘그막에 낳은 딸이 사라진 것을 안 황제는 격노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딸과 범인을 찾으라는 명을 내렸다.

명이 떨어진지도 8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미 엘리자벳을 담당하던 유모는 물론이고 그곳에서 일하던 시종과 시녀들 모두 강도 높은 심문을 받고 있었다.

바그안트는 동생의 안위를 걱정함과 동시에 후계구도가 덜 복잡해지겠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어쩔 수 없다. 이것이 황가의 핏줄을 지닌 자의 숙명이다.'

욕지기가 나오는 것을 억누르며 바그안트는 자신을 합리화했다.

머릿속이 지저분해 지는 것 같았다.

창문을 열었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횃불과 경계인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답답해서 창문을 연 것인데 그 광경에 오히려 가슴이 더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창문을 닫으려는 순간 바그안트는 자신이 뭔가를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는 강렬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응?"

분명 창문을 닫기 전에 무언가가 건물의 지붕을 타 넘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다시 창문을 벌컥 열었을 때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지붕은 그저 지붕일 뿐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황궁의 건물 지붕을 타 넘을 녀석은 없겠지.'

심적으로 부담이 커서 잠시 헛것을 보았겠거니 하고 바그안트는 창문을 닫았다.

##

[여기야? 마구간인데?]

내 품에서 펄쩍 뛰어나온 투브가 물었다.

우리 지금 황궁의 마구간이 바라보이는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마구간이라고는 하지만 엄청난 수의 파발마와 황족들의 말이 관리되고 있는 곳이라 거대했다.

밤이 늦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순찰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 맞아. 개축 공사 도중에 마구간 한쪽이 주저앉았거든.'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제국의 주요 연락망이 파발이니까. 말은 늘 중요해. 범인이 말을 훔쳐 타고 도주할 가능성도 고려한다면 납득이 되는 숫자야.'

일단 상대적으로 경비 인원이 적은 마구간 옆의 말 먹이 창고로 숨어들었다.

여물을 담는 조그만 수레에 투브를 올려놓고 여물을 가득 실었다.

'답답해도 조금만 참아.'

수레를 덜그럭거리며 마구간으로 다가가니 경비원 하나가 나를 제지했다.

"멈춰! 들어 갈 수 없다!"

"말이 필요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미리 여물을 먹여두라는 지시입니다."

"그런 지시가 내려온 적은 없다. 너는 누구냐, 이곳에서 본 적이 없는 얼굴인 것 같은데?"

내가 잔뜩 화난 얼굴을 했다.

"여기까지 내려와서 말 먹이 주고 있는 것도 짜증나는데 빨리빨리 열어 주시죠?"

"허, 참! 못 연다고 하지 않았느냐!"

"제 상관이 누구인지 알고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어디서 굴러 먹다 온 지도 모르는 어린 녀석이!"

경비원이 주먹을 휘두르며 나를 위협했다.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저는 이나타 백작 각하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지시를 무시하시는 겁니까? 저도 이런 곳에 있을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나타 백작의 이름이 나오자 경비원들이 흠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종장으로서 황궁의 모든 대소사를 관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다.

"그것이 정말이냐?"

"확인해 보시지요. 그럴만한 배짱이 있으시다면 말이죠."

그리고 한시가 급하다는 듯 내가 발로 땅을 툭툭 찼다.

내가 한 말은 다 거짓말이지만 설마 저 경비원이 정말로 이나타 백작에게 지시를 내렸는지 묻지는 않을 것이다.

경비원들이 자기들끼리 수군대더니 결국 길을 텄다.

"빨리 볼일 마치고 나오시게. 그리고······. 위쪽에 말씀 한 번만······."

하대는 어디가고 존대를 해가며 내게 비굴한 웃음까지 지어 보이는 그였다.

"물론입니다. 협조가 빨라서 좋군요."

마구간에 들어와서 문을 닫으니 낮게 푸르릉거리는 말들의 소리가 들렸다.

투브가 수레에서 나와 몸에 붙어낸 지푸라기들을 털어냈다.

[너는 거짓말을 너무 잘해서 큰일이다. 큰일이야.]

'마나도 오러도 없는 사람이 믿을게 뭐가 있었겠어. 말빨 말고 있었겠냐?'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오러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기감이 더 예민하게 섰다.

그 상태에서 마나를 파동으로 바꿔 일정하게 바닥을 향해 쏘아 보냈다.

퉁-

땅에 흡수 되는 것이 아니라 빈 공간이 있는 것처럼 울림이 되어 돌아오는 마나가 있었다.

"찾았다."

여물을 들고 그 자리를 점거하고 있는 말을 옆으로 유인했다.

"절대로 모르겠네······."

모르긴 몰라도 수백 년 이상 말들의 발에 밟혀있었을 땅이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냥 단단하게 다져진 땅이었다.

마구간까지 와서 마나를 땅에 쏘아 보내는 자도 없었을 것이니 발견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빈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 되는 곳에 손을 뻗고 땅이 작게 파도 치는 것을 상상했다.

땅이 스스로 파도치며 퍼올려지더니 올려서 여는 것으로 보이는 작은 철판 하나가 나왔다.

마나의 변환을 멈췄다.

옆으로 퍼올려져 물처럼 찰랑이던 흙은 그 즉시 원래의 단단한 것으로 돌아갔다.

끼이이익-

철판을 여니 사람 하나가 간신히 통과할만한 구멍이 있었다.

안에서 상쾌한 바람이 밀려나왔다.

"가야겠지?"

[여기까지 와 놓고 안 가려고?]

"해 본 소리였어."

안으로 들어가서 철판을 닫으니 스륵스륵하면서 위에 흙이 덮이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자동으로 원래 상태를 회복하는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았다.

힘껏 밀어도 철판은 열리지 않았다.

[갇힌 건가?]

"안에서 바람이 올라오고 있어. 어딘가 다른 출구가 있거나 최소한 환기구 정도는 있을 거야."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한 거야.]

"황궁의 모든 건물은 출입구가 최소한 2개 이상으로 지어져. 그래야 불시의 암살 시도 같은 것에서 몸을 빨리 피할 수 있거든. 여기도 분명 누군가가 설계 했을 거니까 틀림 없어."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좁은 통로는 끝나고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 때, 여인의 목소리가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손님이 오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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