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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30화 (30/180)

< 밤의 손님 (3) >

밤의 손님 (3)

"그렇다면 그대는 이타르의 후계자로군?"

마검사가 된 경위를 다 듣고 난 후에 한참을 생각하던 초대 황제, 레인 서비어가 엘리자벳 서비어의 입을 빌려 꺼낸 말이었다.

"후계자라 하기에는 많이 미숙하지만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잘못 찾아왔군. 저 서고 안에 이타르에 관련된 것은 없다네. 나의 깨달음을 적어 놓은 일기와 비전서만이 있지."

맥이 탁 풀렸다.

'여기도 아니었네.'

[그러게. 고생한 보람이 없어.]

황녀의 입이 열렸다.

여전히 낮고 굵은 목소리였다.

"헌데 말이네. 그대는 왜 사람들의 이타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아는가?"

"어찌하여 그런 것입니까?"

황제가 낮게 혼잣말을 했다.

"이타르의 후계라니······. 얄궂구나. 그대는 자격이 충분하니 보여주도록 하마."

나를 향해 황녀가 손을 뻗었다.

손에는 하얀 소용돌이 같은 것이 천천히 맴돌고 있었다.

"엇?"

##

눈을 뜨니 공터였다.

방금 전까지 있던 높은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투브와 황녀 역시 사라져 버렸다.

"투브!"

녀석의 이름을 부르며 주위를 살폈다.

멀리서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키기기기긱

황녀와의 충돌에서 들었던 소리, 마나 소드와 검에 둘러진 오러가 서로를 긁어대며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멀리서부터 엄청난 충격파가 이쪽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헉······."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나는 놀라 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갑옷을 입고 거대하다는 말도 아쉬울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오러를 검에 씌워 휘두르는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낡은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이 그 거대한 오러를 상대하고 있었다.

기사와 같은 차림새를 한 남자가 무섭게 검을 휘두르면 오러가 흉흉한 기세로 대지를 뒤집었다.

하지만 그 기세에도 내 눈은 낡은 후드에 고정되어 있었다.

후드를 쓴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은 분명 마나 소드였다.

그러나 내가 만들어내는 반투명한 마나 소드와는 달리 저 남자 것은 마나 소드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손에서 마나가 검, 도, 창, 도끼, 채찍, 방패 등으로 끊임없이 형체를 바꾸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무구들의 형태는 하나하나가 장인들이 벼려낸 것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두 명은 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쾅-

오러가 바위를 갈라 흙먼지가 풀풀 피어올랐다.

"끝났군."

기사가 검을 두르고 있던 오러를 몸 안으로 끌어들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굴과 자세는 긴장이 완연해 보였다.

"이 정도인가. 레인 서비어."

흙먼지 사이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무게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꽈드득-

노인의 손에 있던 검 위에 섬뜩한 소리를 내며 얼음이 얼어붙었다.

휘릭

얼음이 엉겨 있던 검을 휘두르자 검에서 얼음이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노인이 레인 서비어를 향해 움직였다.

동시에 검을 잡고 있지 않던 손에 여러 개의 마법진이 동시에 떠올랐다.

콰앙- 콰앙- 콰앙-

거인이 땅을 짓밟으면 날 것 같은 소리가 여러 번 공기를 흔들었다.

레인 서비어는 날아오는 얼음을 쳐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주위에 생겨난 암흑 구체와 땅에서 뻗어 나온 손을 피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무릎까지 감겨오는 흙을 떨쳐내려고 오러를 최대한 운용했지만 의도처럼 하는 것이 녹록치 않은지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쉬익

암흑 구체가 레인 서비어의 얼굴 앞에서 멈춰 섰다.

그의 움직임도 멈췄다.

다가온 노인이 암흑 구체를 없애고 천천히 마나 웨폰을 레인 서비어의 목에 가져다 댔다.

레인 서비어의 하체는 거의 땅에 잠겨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레인 서비어. 세인世人들은 자네가 최초의 황제가 될 것이라 하더군. 굉장해. 실제로 보니 더욱 굉장해."

노인이 후드를 뒤로 넘겼다.

완고하게 생겼으면서도 어딘가 장난기가 새어 나오는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세상사에 간섭하는 것은 취미가 아니지만 자네 때문에 세상에 피가 마르지 않고 있네. 나는 자네가 악인인지 확인해보고 싶었어."

"선과 악은 누가 구분 하는 거요? 노인장이 하는 거요?"

황제가 되기 전의 레인 서비어의 말투는 시정잡배와 별 다를 것이 없었다.

"물론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지. 하지만, 죄 없는 사람들이 자네 때문에 피 흘리며 죽어 가는 것은 악이 아니겠나?"

레인 서비어가 말했다.

"내 덕에 끊임없는 전쟁과 폭압에 시달리던 수많은 사람들이 해방되고 새로운 꿈을 꾸고 있소. 그것도 악이요?"

"세상에는 온전한 선도, 온전한 악도 없네. 둘을 잘 비교 해야 하지."

레인 서비어의 눈이 커지면서 주위의 것을 뒤흔드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누군지는 몰라도 개소리 하지 마라!"

이를 바득 바득 갈아가며 레인 서비어가 소리쳤다.

"내게는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 이 힘을 두려워한 부모에게 버림받고, 괴물 취급을 받아가며 아득바득 살아온 나를 누가 평가 한단 말이냐! 내게 평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나 뿐이다!"

오러 실린 고함에 주위의 나무들이 부러져나갔다.

"이런 이런, 자네도 어쩔 수 없는 젊은이군. 조금 더 차분해지도록 하게."

노인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자네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았어. 확인해보고 싶다고 했지."

쭈그려 앉은 노인이 레인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자네는 대성 할 걸세. 나름대로 오래 살아온 늙은이의 말이니 믿어도 좋아. 허나 자네 같이 환히 빛나는 불들은 주위의 작은 불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집어삼키기 일쑤야. 그것은 너무 아쉬운 일이라네."

선문답 같은 노인의 말에 레인의 표정이 멍해졌다.

내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자네는 선도 악도 아니야. 그저 본인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이지. 나는 그런 사람을 싫어하지 않아. 대신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무슨 부탁?"

"위를 부수는 것은 말리지 않겠네. 대신 아래를 보살펴주게. 그리고 자네 마음의 그 불꽃이 사라지는 때가 오면 생겨나는 허무함을 메우기 위해 사람들을 희생 시키지 말아주게."

"쉽게 쉽게 말 하시오. 나는 배움이 짧아 어려운 말은 모르오."

하반신이 땅에 박혀 있어도 퉁명스레 할 말은 다 하는 레인이었다.

그런 레인이 우스웠는지 노인이 파- 하는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때가 되면 알게 되지 싶네. 부탁을 들어주겠나?"

"그러면 나를 죽이지 않을 거요?"

"나는 자네가 싫지 않아."

"알겠소, 노인장."

"믿고 있겠네."

짧은 대화 후 노인이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흙을 헤치고 나오던 레인이 그를 향해 물었다.

"노인장,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노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타르 카누아라고 한다네."

##

"으악-"

다시 원래의 그 공간이었다.

옆에는 투브가 있고, 앞에는 황녀의 몸을 빌린 초대 황제가 있었다.

"짐의 기억이다.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지."

"이타르를 만나셨군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초대 황제께서 내게 기억을 보여 주셨어. 폐하는 노인이 된 이타르와 검을 겨눠본 적이 있어!'

[과거 체험이라. 재밌네.]

"그렇네. 보았겠지만 승부라 할 것도 없었지. 그는 나를 농락했으니까."

황제가 고개를 들어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을 바라봤다.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어떤 기분일 것 같나? 만족? 성취? 환희? 경이?"

고개를 내려 황제가 나와 눈을 맞췄다.

"답은 두려움이네. 목표를 향해 오르기만 하다가 이제 본인이 남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기 때문이지."

오랜 벗을 대하는 것 같은 황제의 말투가 다시 처음의 위엄 있는 말투로 바뀌었다.

"짐은 두려웠다. 당장이라도 이타르가 나타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벌할까 무서웠다. 그 때도 그의 이름은 이미 전설과도 같이 흩어져 가고 있었지만 짐은 사람들이 아예 그를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이타르의 이름을 세상에서 지워나갔다."

세상에!

초대 황제가 그를 두려워해서 이타르의 이름과 자취를 지우는 작업이 진행 된 것이었다.

'사람들이 이타르를 모를만 했네. 절대 권력을 지닌 황제가 직접 명을 했으니 얼마나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잊혀져 갔겠어.'

[하지만 그런데도 완전히 잊혀진 건 아닌가 보지?]

투브의 말이 맞았다.

이타르의 정보를 요구한 사람이 더 있었다.

알음알음 이타르에 대한 것이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비록 그 후에 이타르를 다시 보지는 못했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그 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니 짐에게 세상을 바꿀 힘은 있었으나 참으로 작고 옹졸한 사내가 아니었나 한다. 허허허허."

무신이라 불렸던 남자의 덤덤한 자기고백이었다.

"짐이 두려워했던 자의 후계여. 그대에게 부탁할 것이 있노라."

"말씀하소서."

"이타르가 젊은 날의 짐에게 했던 것처럼 서비어 가문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는 존재가 되어다오. 견제 없는 힘은 자멸한다. 짐은 제국이 그렇게 무너져 가는 것은 볼 수 없다."

레인 서비어라는 남자가 맨몸으로 일군 제국을 얼마나 아끼는지 느껴졌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황제의 눈이 커졌다.

"저는 이타르만큼 강하지도 않을 뿐더러 다른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신념을 믿고 나아 가셨던 것처럼, 저는 제 신념을 믿고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기껏 과거로 돌아왔는데 제국의 똥받이나 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제 간신히 한 녀석에게 복수를 했을 뿐, 갈 길이 멀다.

황제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포기한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 짐도 신념의 무거움을 알고 있다. 미안하다. 욕심에 하지 않아야 할 말까지 했구나."

강권 하지 않을까 했는데 황제는 쉽게 포기했다.

[생각보다 시원시원한데? 세상을 가져본 사람은 이렇게 되는 건가?]

'그러게. 2 황자가 이런 면모를 배워야 할 텐데······.'

"잠이 오는구나. 어린 아이의 몸으로 그대와 너무 오랜 시간을 겨룬 것이 아닌가 싶다."

황제가 손을 올려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서 벽을 누르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생길 것이다. 이 아이도 함께 데려가거라."

잠이 오는 듯 고개를 까딱한 황제가 내게 다시 말했다.

"혹여라도 비전서를 욕심 내지는 말라. 짐이 아닌 자가 그곳에 들어가면 필히 죽는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곳이 드러나고 잠겨있는 문을 억지로 열려고 했다가 십수 명의 사람이 죽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이 안의 물건을 가져오지 못했는데, 가져와서 어딘가에 숨겼다는 소문만 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

"간만에 짐을 즐겁게 해주어서······ 고마웠······노라······."

털썩

몸을 앞뒤로 흔들던 황제가 바닥에 엎어졌다.

황제는 사라지고 그곳에는 새근새근 잠을 자는 7살의 황녀, 엘리자벳 서비어만 남아있었다.

##

"지금 바로 나가시면 됩니다."

얄츠 이나타 시종장이 나를 배웅했다.

마차를 타기 전 다신 한 번 그를 떠봤다.

"그런데 어제는 왜······?"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공자님."

역시나 깐깐했다.

내가 황녀를 그곳에서 데리고 나와 기사들이 순찰하는 곳에 적당히 놔두었으니 별 탈 없이 돌아갔을 것이다.

아마 나에 대한 것도 기억을 못할 것이고.

"다시 뵐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에라이, 내가 시종장을 다시 보는 건 다시 황궁에 온다는 소리인데 절대로 안 올 거다.

이곳은 어떤 것이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마굴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문이 닫히고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국 여기 온 소득은 없었던 거네.]

'무슨 소리야, 엄청난 걸 얻어 가는데.'

내 말에 투브가 고개를 들었다.

[뭘 얻었는데?]

'아! 너는 못 봤지?'

나는 이타르가 어떻게 마나 웨폰을 쓰는지, 어떤 식으로 마법을 사용해서 상대를 제압하는지 눈앞에서 똑똑히 봤다.

지금도 한 장면, 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가공할만한 이타르의 경지에 지금도 가슴이 쿵쿵 뛰었다.

궁금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투브에게 초대 황제의 말투를 따라했다.

'나는 마검사의 정수를 보았노라.'

[치사하게 굴 거야?]

달려드는 투브를 이리저리 막다 보니 창 밖으로 저택이 보였다.

미리 연락이 갔는지 알버트와 다른 사용인들이 문 앞에 나와 서 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도련님. 다녀 오신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쁘지 않았어! 이따가 지하에서 보자고!"

시원스레 나오는 답에 알버트가 놀랍다는 표정을 했다.

[뭔데! 알려 달라고!]

소리치는 투브를 방에 두고 아버지의 서재로 올라갔다.

얼른 잘 다녀왔다는 인사를 드리고 연무장으로 내려 갈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서재로 다가가자 집사인 케인즈가 나를 막아섰다.

"다녀오셨군요, 공자님. 인사는 조금 후에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 누구?"

"귀족원 측에서 보낸 사람 같습니다."

귀족원? 거기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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