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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31화 (31/180)

< 깨달음 (1) >

깨달음 (1)

아버지가 계신 서재에 들어가지 못하고 저택 뒤에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고즈넉하고 평안한 분위기가 있는 곳이라 어머니가 이곳을 아주 좋아하셨다.

"다녀왔습니다."

"시안!"

마침 차를 드시고 계시던 어머니가 일어나 나를 맞았다.

어머니의 눈 밑이 퀭했다.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한숨도 주무시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나를 와락 안으셨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갑자기 황궁이 폐쇄 되었다는데 아무리 주위에 연락을 돌려봐도 무슨 일인지 아는 사람이 없어서 걱정했어."

처음 돌아왔을 때와 비교하면 키가 훌쩍 컸지만 어머니가 보기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겠지.

"괜찮아요. 2 황자마마 배려로 편하게 있다 왔어요."

"그래, 시종장이 직접 연락을 보내왔더라. 추후에 꼭 답례 편지를 보내도록 해."

어디 다친 곳이 없나 내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시던 어머니가 좀 진정이 되셨는지 심호흡을 하고 의자에 앉으셨다.

"아버지께 인사는 드렸지?"

"아직요. 손님이 와 계신다고 하네요. 귀족원에서 보낸 사람 같다는데, 무슨 일이에요?"

어머니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카몰 후작가의 문제가 복잡해지려나 봐."

역시, 예상은 했지만 스테판이 죽은 것 때문에 귀족사회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성년이 되기 전이라 얻을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기회에 어머니를 통해 많은 것을 들어두고 싶었다.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요?"

"일단 유제프 가문의 다른 귀족들이 자신이 가문의 정통 후계자이자 카몰 후작의 후계라고 나선 상황이야. 백작 하나에 남작 셋이라고 들었어. 게다가 다른 가문의 사람과 결혼한 유제프 가문 사람들도 자기 자식을 내세우고 있는 판국이야."

"카몰 후작이 그걸 용납해요?"

"저택에만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구나."

귀족은 가문이나 개인이 걸린 문제에서는 다른 귀족을 미친 듯이 견제하지만 귀족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귀족이라는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기에 혈안이 되어있기도 했다.

그 결과가 귀족들 간의 결혼이었다.

어디 백작의 4녀가 어디 남작 3남의 부인이 되고, 그 아들이 장성해 어디 후작의 방계핏줄의 양자로 들어가고······ 하는 복잡하게 꼬인 족보가 그것을 증명했다.

모르긴 몰라도 일곱 공작 가문의 직계들 족보만 정리해도 방 하나를 채우기는 넉넉할 정도일 것이다.

여튼, 이런 복잡성 때문에 이름 있는 가문일수록 정통성 있는 적자의 힘이 강했다.

후작가의 적장자가 죽었으니 눈독 들이는 귀족들이 셀 수 없을 것이다.

"영지전을 준비하는 곳도 있다는 소문이 들려."

"네?"

귀를 의심했다.

영지전.

귀족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마지막 방책.

가문의 기사단과 제한된 수의 영민을 동원할 수 있는 소규모 전쟁인 영지전에 관한 법령이 있긴 있었다.

귀족원에 영지전에 대한 세부 내용을 제출 해야 하며, 그럼 귀족원은 당위성을 검토해 언제까지 답을 주고 그것에 맞춰 뭘 준비하고, 다른 가문들은 영지전을 시행한 두 가문에 대해 10년 동안 영지전을 신청할 수 없으며······ 기타 등등.

제국 초기, 아직 국가의 기틀이 완전히 잡히지 않았을 무렵, 전쟁을 경험한 병사들을 보유하고 있던 귀족들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자 초대 황제가 -그럼 판을 깔아 줄 테니 한 번 싸워봐라. 대신 허용한 범위에서 머리카락만큼이라도 벗어나면 직접 죽이겠다.

라고 해서 만들어진 것이 시초인 것으로 전해오고 있었다.

법 제정 초기에는 실제로 몇 번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지만 제국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이걸 신청했다가는 귀족 사회에서 극렬한 지탄을 받고 매장 당하기 딱 좋아서 사문화 된 법이었다.

그런 영지전을 꺼내 들다니, 그것도 백작이나 남작들이.

뒤를 봐주는 세력이 있다는 소리였다.

"저희랑은 상관없지 않나요? 귀족원에서 사람까지 보낼 이유가 있나요?"

몬트라우 가문은 유제프 가문과는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다.

"영지전을 준비하는 쪽에서 다른 가문의 기사단원을 돈을 주고 임대 해서 자신의 가문 기사단으로 위장 시킨다는 소문이 있어. 주의하라고 네 아버지께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닌가 싶네."

입이 떡 벌어졌다.

그래도 귀족들이 고고한 척하며 물 아래에서는 죽어라고 발로 물을 밀어내는 백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 정도면 귀족이 아니라 진흙탕에서 싸움을 벌이는 개새끼라고 해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개새끼들도 남의 집안 양자가 되기 위해서 싸우지는 않는다.

##

아버지께 올라가니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네가 혐의 자체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좋든 싫든 너는 사건의 당사자이니 접근하려는 사람이 많을 것이야. 정신 단단히 차리고 처신 바로 하도록 해라."

그랬다가는 당장에 반 죽여 놓겠습니다, 아버지. 하는 말은 잠시 넣어두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알아서 잘 하리라 믿고 있겠다."

나가려는 나를 아버지가 불렀다.

"참, 오늘 저녁에 기사단원들 숙소에서 승전 연회가 있을 예정이니 꼭 참석해 달라고 한스가 부탁하더구나."

모의 전투이긴 심심치 않게 사상자가 발생하는 기사단 간의 전투다.

전투에서 승리한 셈이니 그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시일이 꽤 흐르지 않았습니까? 아직까지도 연회를 안 열어주신 이유가 있습니까?"

"너나 나나 바쁘지 않았느냐, 수사관이 저택에까지 들어올 정도로 어수선하기도 했고."

하긴, 일반 기사도 아니고 후작 가문의 후계자가 죽었는데 대놓고 승전 연회를 여는 것은 도의 상 보기 안 좋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고로 밝혀진 것 아닙니까? 저는 몰라도 기사들은 충분히 축하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사실 2 황자의 초대를 받았을 때, 내가 없는 동안 승전 연회를 아버지가 열어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도 그리 생각한다. 헌데 한스가 승리의 가장 큰 주역인 네가 없는 승전 연회가 무슨 의미가 있냐면서 차라리 하지 말자고 하더구나."

아버지가 내 눈치를 살짝 보는 것 같더니 계속 말했다.

"헌데 그럴 수는 없지. 아주 성대하게 승전 연회를 열 셈이다. 감히 송곳니 기사단에게 도전하려는 기사단들의 콧대를 눌러주기 위해!"

아버지의 벌름거리는 콧구멍으로 뜨거운 김이 나올 것 같았다.

저렇게나 기사단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신 분이 대체 밖에서는 어떻게 참고 지내시는지 궁금했다.

"시간 되면 부를 테니, 쉬고 있거라."

전생에서 송곳니 기사단의 승전 연회에는 딱 한 번 참석해 봤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무렵이었을 거다.

그때 어땠더라······?

##

[더! 더!]

초대 황제의 기억에서 목격한 이타르의 얘기를 해주자 투브가 듣고 신났는지 내게 더 이야기를 내놓으라고 종용했다.

"없어. 이게 끝이야."

[끊임없이 변화하는 마나 웨폰이라니! 나랑 만났을 때 보다 이타르는 훨씬 높은 경지에 올랐구나!]

"말로만 설명하는 게 아쉽다. 네가 그걸 봤어야 해. 영웅들의 무구도 그것처럼 찬란할 수가 없을 걸?"

[내가 예전에 그랬지? 이타르의 마나 소드는 정말 아름다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답다라는 말로는 한참 부족했다.

또한 마나 소드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반대편 손으로는 여러 개의 마법을 시전 하는 모습까지.

같은 마검사라고는 하지만 내가 너무 초라해 보였다.

두 손으로 뺨을 착- 때렸다.

"정신 차리자 시안! 할 수 있다!"

[미쳤나······.]

책상의 비밀 공간에 숨겨둔 이타르의 책을 꺼내서 폈다.

뺨까지 쳐 가면서 마음을 굳게 다잡았지만 책을 펴는 순간 막막한 것은 여전했다.

책을 주르르륵 넘기면서 혹시나 내가 본 이타르의 행동이나 동작과 비슷한 그림이 없나 찾았다.

[골 때리네 진짜.]

옆에 와서 책을 보고 있던 투브마저도 슥 보더니 한 쪽으로 가버렸다.

책의 귀퉁이를 아주 조금 찢어내도, 마나를 책 주위로 끌어다 모아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몰라!"

책을 덮고 투브와 놀고 있으니 밖에서 알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승전 연회에 갈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승전 연회라고 하니까 왜 이리 뭔가 께름칙하지?

##

"부어라! 마셔라!"

"공자님! 아니, 작은 주인님! 술 한 잔 드셔 보시지 않겠습니까? 이게 아주 기가 막힙니다!"

"저기 공자님 옆에 있는 개가 그 늑대야? 고놈 참 잘 생겼네."

께름칙한 이유를 알았다.

자발적으로 금욕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송곳니 기사단원들에게 이 날은 고삐가 풀어지는 날이다.

전생에서도 술은 한두 잔으로 족했던 나이기에 이런 거대한 술판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취하면 오러로 취기를 날리고 다시 술 마시고의 반복이었다.

[이럴려고 익힌 오러가 아닐텐데 이놈들······.]

계속 자신을 품에 안고 싶어 하는 기사단원을 피하면서 투브가 낮게 말했다.

연회 시작 전에 아버지는 오셔서 딱 한 마디만을 하셨다.

"추가적인 부상자만 발생하지 않는 범위에서 즐기도록"

바로 가시려고 하기에 잠깐 아버지를 붙잡았다.

"조금 더 있다 가시지 않구요."

"원래 상급자는 자리만 깔아주고 사라지는 것이 미덕이다, 시안."

멋지게 말씀을 하시고 가셨지만 아버지도 술을 즐기지 않으시니 이 자리에 있기 힘드셔서 자리를 뜨신 것이 아닐까 했다.

한스만이 내 옆에서 천천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말씀하세요."

내가 먼저 운을 띄우자 한스가 흠칫 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몰라요.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티나게 저를 흘낏흘낏 쳐다보시면 뭔가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는 것 아니에요?"

"괜찮으신가 했습니다."

"스테판요?"

"······."

전란의 시대를 살아와서 내가 죽음에 너무 무뎌졌던 것일까.

송곳니 기사단이라는 무력집단을 이끄는 기사단장인 한스조차도 이 평화의 시대에 누군가를 죽이거나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해봤을 것이다.

혹여 어린 내가 그 일에 충격 받지 않았을까 걱정해 주고 있는 것이다.

"괜찮아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여린 사람 아닙니다."

"공자님 나이에는 여린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게 여린 사람을 주인으로 맞이하면 단장 입장에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한스가 내 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였다.

눈에는 반짝임이 가득했다.

"각하께서 공자님이 작위에 흥미가 없다 하시던데, 흥미가 생기신 것입니까?"

이런, 말실수다.

"저는 여전합니다. 그런 소리는 밖에서 하지 마세요."

와아-

거대한 함성 소리가 들렸다.

한 무리의 기사들이 투브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환호하고 있었다.

"제뉴인 공작가, 몬트라우 가문의 상징! 검은 늑대가 송곳니 기사단을 수호한다!"

한 사람이 선창 했다.

"우리는!"

나머지 기사들이 외쳤다.

"무적이다!"

개의 모습으로 들썩 거리고 있는 투브도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이 놈들아! 내 덕에 이겼다!]

'어차피 들켰는데, 멋지게 한 번 보여줘!'

[오냐!]

투브가 아래로 펄쩍 뛰어 내렸다.

늑대의 모습으로 변한 투브가 고개를 위로 바짝 올려 들었다.

아우우우우-

공기를 찢고 울려 퍼지는 늑대의 울음소리에 기사들이 다들 잠시 넋이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최고다! 나는 송곳니에 뼈를 묻는다!"

"오늘 같은 날 마시고 죽자!"

기사들이 술을 없애는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아이고 죽겠다.]

'좀 멋있었다?'

[나는 항상 멋있지. 말이라고.]

강아지로 변해 내 발치에 와 있는 투브를 들어 올려 무릎에 올려놨다.

한스, 투브, 나.

제뉴인에 내려가던 길이 생각 났다.

그때 한스에게 큰 도움을 받았지.

본인은 모르겠지만.

혹시나 싶어 다시 말을 꺼냈다.

"한스 단장."

"예"

"단장이 존경하는 기사가 단장에게 시험을 제시해요. 그럼 어떠실 것 같은가요?"

"흠······."

한스가 팔짱을 꼈다.

거대한 덩치 때문에 위압적이었다.

"어떤 시험입니까?"

"그냥······. 기사의 능력에 관련된 시험? 자신이 남긴 길을 후인들이 잘 따라올 수 있는 것 인가를 보고 싶어한다고 하죠."

한스가 탁자를 치더니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그렇다면 저는 그 시험에 응하지 않겠습니다."

"그럼요?"

"저는 제가 존경하는 그 기사에게 결투를 신청하겠습니다. 시험을 통과하는 것보다 그것이 제 능력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기사의 방법입니다."

머릿속에 불이 일었다.

투브를 품에 안아 들었다.

"미안해요! 급한 일이 생겼어요! 사고 발생하지 않게 잘 조절하면서 연회 즐겨요!"

기사의 방법, 마검사의 방법.

마검사만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방에 들러 이타르의 책을 꺼내 들고 연무장으로 달렸다.

"어머!"

거침없이 달려가다 시녀 하나와 충돌할 뻔 했다.

"미안! 알버트한테 가서 지하 연무장으로 와달라고 좀 해줄래? 내가 찾는다고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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