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달음 (2) >
깨달음 (2)
"도련님, 알버트입니다."
"들어와."
알버트가 연무장 문을 열고 들어섰다.
연무장 바닥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알버트가 말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생겼어."
알버트와 투브 모두 왜 그러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긴, 연회 중에 모두를 뒤로하고 나와서 연무장에 와 있으니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알버트는 오랜 세월 동안 이타르가 남긴 책을 필사 해 왔잖아."
"그렇습니다."
"그럼 혹시 원본이 없어지더라도 다시 만들 수 있어?"
"시간이 좀 걸리기야 하겠지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써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워낙 많이 들춰봤으니까요."
알버트의 표정이 굳었다.
"혹시 그걸 누구에게 주신 겁니까?"
품에서 책을 꺼내 보여줬다.
"설마 이걸 누구 줬겠어?"
그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이 책은 이타르가 남겼다.
그러나 안에 있는 내용은 하나도 알아 볼 수가 없다.
이타르는 책을 남기면서 해석, 독해, 이해가 아니라 '활용'을 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한스 단장이 했던 말.
-시험을 통과하는 것보다 그것이 제 능력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기사의 방법입니다.
나는 마검사의 방법을 찾아야한다.
일어나 손에 이타르의 책을 들었다.
"후우······."
심호흡을 한 번 깊게 했다.
불안하긴 했다.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이 맞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시도는 해야 했다.
두려워서 멈춰 있는 것 보다는 실패하더라도 발걸음을 떼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눈앞으로 이타르의 책을 던졌다.
허공에 뜬 책이 내려오며 안의 종잇장들이 사정없이 펄럭거렸다.
오른손에 마나 소드를 만들어냈다.
'제발······! 제발!!'
마나 소드로 책을 아래에서 위로 그어버렸다.
마검사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본 결과 나온 행동이었다.
마나 소드는 마검사말고는 만들지 못하니 가장 확실한 증명일 것이다.
투둑
반으로 잘린 이타르의 책이 종잇장을 흩뿌리며 연무장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미친 짓에 얼이 나갔는지 뒤에 있는 알버트와 투브도 아무 말이 없었다.
[뭐야······. 왜······.]
투브가 정신을 차렸는지 한 마디를 했다.
알버트를 볼 면목이 없었다.
이타르가 남긴 뜻을 이으려고 긴 세월 동안 책을 보관해 왔을 텐데 내가 한 행동으로 다 무너져내렸다.
뒤를 돌아볼 자신이 없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미안······. 내가 너무 급했나봐······. 그래도 깔끔하게 잘라 냈으니까, 다시 이으면 어떻게 볼 수 있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알버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분노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알버트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투브? 투브 맞지? 너 마나 웨폰을 만들 수 있게 됐어?"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내가 서 있는 곳을 경계로 해서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곳은 연무장, 지금 보고 있는 곳은 온갖 책, 약품, 실험도구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 가운데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중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길게 내려오는 후드를 입고 긴 소매를 팔목까지 걷어 올린 모습이었다.
둥글둥글한 눈매와 어딘가 장난기가 묻어나오는 저 남자의 얼굴을 본 기억이 났다.
내가 알고 있는 남자는 저 얼굴에서 조금 더 살이 빠지고 주름이 많이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이타르?]
내 기억보다 젊은 이타르의 시선이 투브와 나 사이를 몇 번 왕복했다.
"투브 네가 어떻게 여기 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마검사는 이쪽의 소년이지?"
그리고 뚜벅 뚜벅 다가와서 내 팔을 잡고 안으로 끌어당겼다.
"서 있지 말고 들어와. 묻고 싶은 게 많아."
묻고 싶은 게 많은 건 제 쪽인데요······.
안쪽으로 끌어 당겨지면서 뒤를 보니 연무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책장만이 가득했다.
"앉아, 앉아. 투브 너도 이리 와."
쓰레기 더미로 착각할만한 거대한 잡동사니의 산에서 이타르가 의자를 두 개 꺼내서 하나는 자신의 뒤에 놓고 다른 하나는 내 쪽으로 밀어줬다.
너무 경황이 없어 서서 이타르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이타르에요? 대마법사 이타르 카누아?"
이타르가 활짝 웃었다.
"아직 그렇게 기억되고 있니? 영광이네. 네 질문에 답하자면 아쉽지만 이타르 카누아 본인은 아니란다. 아니, 본인은 맞는데 본체는 아니라고 해야 하나?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알버트는 만났니? 제발 만났다고 해줘."
고개를 끄덕였다.
"와! 다행이야! 우연히 마검사가 된 소년이 우연히 길에서 이 책을 주워 우연히 마나 소드로 책을 건드렸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거든. 알버트는 잘 지내니? 아니, 이건 조금 나중에 물어보고."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었다는 알버트의 말이 한 번에 이해가 됐다.
머리가 좋아서 그런건지는 모르겠는데 끊임없이 다른 쪽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사방팔방에 제멋대로 얽히고 설킨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까지.
알버트가 고생을 많이 했겠구나 싶었다.
"너도 변환인자가 있지?"
이타르가 간절한 눈빛을 하고 물었다.
"있대요."
"으아아아아! 만세!! 만났다!!"
이타르가 나를 안고 방방 뛰었다.
"너는 모를 거야, 내가 얼마나 변환인자를 가진 사람을 만나고 싶어 했는지! 최고다! 만세! 그럼 마나만으로 마나 소드를 만드니? 아니면 오러를 같이 사용하니?"
"오러를 기반으로 마나를 끌어들여요."
"그게 가능하니? 이론만 세워놓고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음 마검사는 당연히 변환인자를 몸에 가지고 있는 마법사일 줄 알았어! 세상에나!"
어느새 나도 모르게 술술 대답을 하고 있었다.
이타르는 본인의 열정을 주위 사람에게까지 전파시키는 사람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내가 물었다.
"잠깐만요!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저는 지금 이 상황이 하나도 이해가 안 돼요."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네."
이타르가 의자에 털썩 앉더니 설명을 쏟아냈다.
"나는 마법 도서관도 세우고 싶고, 다음 마검사를 보고 싶기도 했어. 이 얘기는 알버트에게 들었지?"
"네."
"고맙게도 알버트가 내 마음을 알아서 마검사를 찾아준다고 하지 뭐니, 그건 정말 고마운 일인데 나는 내 눈으로 마검사를 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지금까지의 기억을 조금 떼어내서 마법으로 이렇게 인물화 시켜 책에 넣어놨던 거야. 오로지 너······. 이름이 뭐니?"
이타르는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이름을 지금에서야물어봤다.
"시안이요. 시안 몬트라우."
"멋진 이름이네. 그래, 시안 너를 보기 위해!"
기억을 떼서 인물로 만들 수 있다는 마법이 있다는 것도 처음 듣는데 그걸 실행하고 성공한 사람이 앞에 있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런 마법을 써도 돼요?"
"본체의 건망증이 좀 심해지긴 할 건데, 괜찮을 거야. 나는 머리가 좋아서 잊어버린 것도 금방 기억해내거든. 여튼, 내가 지금까지 연구한 마검사에 대한 것을 네게 알려 줄 수 있어. 아쉽게도 단 한 번 뿐이긴 하지만."
이타르가 발치에서 꼬리를 흔들던 투브를 집어 들어 품에 안았다.
"이렇게 조용한 녀석이 아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구나?"
손으로 내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이타르가 내게 말했다.
"자, 네 얘기를 해줘, 시안."
##
이타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투브 덕에 죽을 위기에서 회귀한 것부터 시작해서 몸에 마나회로를 새겨 마나를 감지할 수 있게 된 것, 마나 소드를 만든 것 등등.
가족에게도 숨겨야 했던 이야기를 이렇게라도 털어 놓으니 한결 가벼워졌다.
처음 시작이 어려웠지 입을 떼자 말이 쉬지 않고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하는 데서 그런 것도 있지만 끊이지 않고 '와!', '정말?', '엄청난데?' 하면서 추임새를 넣는 이타르 때문에 나도 모르게 신나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투브가 널 회귀하게 한 건 네 선조와의 서약이니까 그럴 수 있어. 말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거든. 애초에 마법도 말에 생각을 담은 것이 시작이니까. 특히나 강대한 자들의 말은 세계도 무시 할 수가 없어."
뭔가 엄청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맥락을 잡기 힘들었다.
'노인이 된 이타르가 레인 서비어에게 선문답을 하던 것이 젊은 시절부터 그랬구나······.'
"그런데 투브의 말을 너만 들을 수 있다는 거랑 서약을 지켰는데도 투브가 자유롭게 되지 않았다는 건 이상해. 시간이 오래 지나서 서약의 구성이 틀어졌다고 할 수 없어. 서약 내용이 명확했어. 서약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 개입 한 건가?"
한참 혼잣말을 하던 이타르가 내게 물었다.
"네 선조와 투브의 계약 내용을 아는 사람이 있니?"
"그건 저도 모르죠······. 그런데 전설상으로는 투브는 죽었다고 전해졌어요."
"어렵네······."
고민하는 것 같던 이타르가 밝게 외쳤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와······. 뭐라고 해야 하지? 좋게 말하면 이타르는 엄청 자기 주도적이었네. 나쁘게 말하면······. 음······.'
[엄청 산만하지?]
'맞아! 산만해! 대마법사를 이렇게 말 하는 건 안 되겠지?'
[놔둬. 원래 저런 놈이야. 밝고 보기 좋잖아? 좀 산만하다고 해서 저 녀석이 대마법사가 아닌 것도 아니고.]
내가 해준 얘기를 들으면서 적어 두었던 것을 이리 저리 살펴보던 이타르가 나를 방에 있는 많은 문 중 하나로 이끌었다.
"이쪽으로 와.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알려줄게."
덜컥
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방 안으로 마구 밀려들어왔다.
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바람이 부는 들판이었다.
이타르가 문지방을 넘어섰다.
"내가 마검사 수련을 할 때 쓰는 곳이야. 넘어 와!"
투브와 내가 문을 넘어 들판으로 들어가자 문이 쾅 하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혹시 여기에 갇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도 문은 그 자리에 있었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저절로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투브도 같은 마음인지 바람을 맞으며 뛰어다니기 바빴다.
"자 일단."
이타르의 손에서 마나로 만든 지팡이가 생겨났다.
내가 마나 소드를 만들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이건 마나 스태프. 아무래도 마법사라 이게 익숙하네. 이걸로 보여줘도 괜찮지?"
"네, 괜찮아요."
스태프 위에 붉은 기운이 덮이기 시작했다.
화염 마법을 부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허공에 스태프를 휘두르자 감싸고 있던 붉은 기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면서 여러 갈래로 갈라져 화염의 벽을 세웠다.
'노인인 이타르의 마법은 더 정교했던 것 같은데······. 이 책을 쓸 때까지의 기억만 전해 줄 수 있어서 그런가? 조금 아쉽다.'
이타르가 말하길 책을 쓰던 때의 기억까지만 전해줄 수 있다고 했다.
못내 아쉬웠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다?"
이타르가 내 속마음을 읽었는지 정확히 물어왔다.
말할까 말하지 말까하다가 그냥 다 말해버렸다.
직접 배울 수 있는 귀한 기회인데 이왕이면 더 수준 높고 강력한 기술들을 배우고 싶었다.
"실은······."
##
"으아! 엄청나! 역시 나야! 쉬지 않고 발전했구나! 잠시만 기다려!"
이타르가 레인 서비어와 겨룰 때의 얘기를 해주었더니 이타르가 잔뜩 상기되어서는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책과 노트를 한 아름 들고 돌아왔다.
"다시 한 번만 말 해줘! 어차피 지금의 나는 널 위해 남겨둔 기억의 일부일 뿐이지만 그런 멋진 마법과 마나 웨폰을 듣고도 연구하지 않는다면 마법사가 아니지!"
내가 천천히 이야기 해주자 이타르는 내 얘기를 멈추고 책을 찾아보거나 마나 웨폰의 모습을 그렸다.
정말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미래에 자신이 쓰는 마법에 대해 탐구하던 이타르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는지 책과 노트를 한 쪽에 밀어두었다.
"네 덕에 너무 귀한 걸 알았어. 시간이 부족해서 여기서 다 알지는 못했지만 나머지는 미래의 내가 잘 했겠지. 자 이제 네가 막히는 부분을 봐줄게. 시간이 얼마 없어."
"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응. 2시간에서 3시간? 그 정도면 우리는 이별이야. 바깥의 시간은 아마 몇 초밖에 흐르지 않았을 테니까 걱정하지마."
"아니, 아니. 시간 제한이 있었어요?"
"그럼 여기 천 년, 만 년 눌러 앉아 있을 셈이었어? 오직 다음 마검사를 보기 위해 내 기억까지 희생한 마법이야. 계속 지속할 수는 없어."
"말을 해줬어야죠!"
이타르가 울상을 지었다.
"네 얘기가 너무 재밌는 걸 어떻게 해!"
아······.
이런 앞뒤 없는 사람의 종자이자 시종역을 했을 알버트가 불쌍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일단 자세를 잡았다.
시간이 촉박했다.
"잘 보고 잘 알려줘요."
"그래, 그래!"
이타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게 다가왔다.
마나 소드가 내 손에서 뻗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위에 마법을 부여하려 하자 마치 원래 의도한 모양처럼 마나가 마나 소드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마나 소드에 마법을 부여하려는데 같은 힘이라고 느끼는지 부여가 되지 않고 흡수 되어 버려요."
그걸 보고 있던 이타르가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하하하하.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단순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