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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33화 (33/180)

< 깨달음 (3) >

깨달음(3)

내가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자 이타르가 웃느라 눈가에 맺힌 눈물을 쓱하니 닦고 말했다.

"정말 위대한 기사가 있다고 쳐. 그 기사는 검이 아니라 삼지창을 무기로 썼다고 하자. 그럼 기사들이 모두 삼지창만 쓸까? 물론 삼지창을 쓰는 사람은 많아지겠지. 그런데 삼지창이 자신의 손에 안 맞는 기사도 있지 않을까?"

이타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내 표정이 조금씩 펴지자 이타르가 팔짱을 끼고 웃었다.

"그래, 내가 마나만으로 무기를 만들어내는 건 다른 사람보다 마나를 느끼고 변환할 수 있는 정도가 월등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네가 그 방법을 따라할 필요는 없어. 사실 이런 말하면 좀 재수 없겠지만 따라 할 수도 없을 걸? 아마 투브나 알버트가 네게 도움을 준다고 내가 마나 웨폰을 만들고 그걸 쓰는 방법을 말해 준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네게는 독이 된 것 같네."

"그렇다면······."

"너는 지금 나를 어떻게 만나고 있지?"

"마검사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타르의 눈이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호수와도 같이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눈이었다.

"나는 마나만을 다룰 줄 알아. 너는 마나만이 아니라 오러도 다룰 줄 알잖아. 엄청난 힘을 두 가지나 다룰 줄 알면서, 고작 마나만 쓰는 마법사의 방식을 따라 할 거야?"

대마법사인 이타르가 나를 위해서 자신을 '고작 마나만 쓰는 마법사' 라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마검사지만 그것이 같은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이타르의 손에서 마나 스태프가 생겼다.

다시 그곳으로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

이타르가 마나 스태프를 들어 올려 나를 가리켰다.

"시안이라는 마검사는 어떤 방법으로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을까?"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번개가 고정관념이라는 벽을 마구 내리쳤다.

투둑

벽에 얕은 균열이 생기고 이내 그곳에서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다.

쾅-

균열의 한 가운데 다시 한 번 내리친 번개 덕에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몸의 안쪽에서는 오러가, 바깥에서는 마나가 연인처럼 서로를 갈구했다.

"제겐 저만의 방법이 있다는 말씀을 길게 하셨네요."

"답을 알려주는 것과 답을 찾아가게 이끌어 주는 것의 차이 아닐까?"

오러와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감각을 예전에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이타르의 반지를 끼웠을 때였다.

다만 그때는 세계가 나에게 맞춰져 있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내가 세계에 맞춰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훨씬 안정적이고 고고했다.

마나 소드를 왼손에서 만들어냈다.

빠르고 견고하게 마나 소드가 솟아 올랐다.

[오!]

처음을 제외하고는 내 마나 소드를 보고 이렇다 저렇다 평을 하지 않던 투브가 감탄할 정도로 단단한 외형과 예리함을 겸비하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의 마나 소드는 항상 양손검이었지만 이번에는 검신이 조금 짧은, 한손검이었다.

"그게 네가 선택한 방식이야?"

"아직 안 끝났습니다."

비어 있던 오른손에 오러를 집중 시켰다.

붉다 못해서 검은색이 된 오러가 손에 일렁였다.

그 위에 여러 마법 술식과 마법진이 재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마나 소드 때문에 마나를 마법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니 남은 마나와 오러를 오른손에 모아 변환 과정을 오러로 보조한다?"

한 눈에 내 해답을 간파한 이타르였다.

"멋져! 너 말고는 그 누구도 절대 불가능한 방법이야."

이타르의 몸이 공중으로 살짝 떠올랐다.

"자, 연습 같은 실전, 실전 같은 연습. 알지?"

나를 향하고 있던 마나 스태프 끝이 까닥거렸다.

"들어와. 봐줄게."

##

구름 하나 없이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사각사각하고 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 밖에 없던 시야에 투브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괜찮냐?]

'죽겠다 야. 예상은 했지만 이건 너무한데?'

몸을 일으켜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평화롭고 한가로웠던 들판이 나와 이타르가 대련을 한 흔적으로 온통 뒤집어져 있었다.

가장 치열했던 전장에 비견될 만한 수준이었다.

부웅-

이타르가 내 쪽으로 날아왔다.

후드의 이곳 저곳이 그슬리고 찢긴 상태였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내 모습과는 달리 이타르는 옷만 조금 손상 되었을 뿐이었다.

"한 번도 상대해보지 않은 유형의 상대라서 애 좀 먹었네."

저건 분명히 거짓말이다.

대마법사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느꼈다.

크게 움직일 필요도 없이 이타르가 마나 웨폰을 바꾸는 것 만으로 내 마나 소드의 검로를 거의 완벽하게 차단당했다.

빈틈이라고 생각해서 오른손의 마법을 쑤셔 넣으면 그것은 다른 마법으로 막아냈다.

변환인자 때문에 마법이 서로의 몸 가까이로 가면 급격히 위력이 약해지는데도 이타르의 마법은 스치기만 해도 몸 안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오러가 흔들릴 정도였다.

'굉장하다. 너무 굉장해!'

더 나아갈 경지가 있다는 것에 전율했다.

비록 이타르의 방법과는 다른, 나만의 방법으로 올라서야 하는 경지겠지만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머릿속이 환희로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큰 도움이 못 된 것 같아서 좀 미안하네?"

"도움이 안 되기는요. 마음 같아서는 여기에서 계속 있고 싶어요."

쿵-

지축이 흔들렸다.

"시간이 다 되어가네. 아쉽다. 이럴 거면 이 마법에 조금 더 힘을 쓸 걸. 마검사를 만나고 싶기는 했는데 만날 수 없으면 헛수고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마지막에 조금 힘을 뺐거든."

머쓱하게 이타르가 웃었다.

보는 사람도 웃음 짓게 하는 순수한 웃음이었다.

이타르가 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튕겼다.

고통을 호소하던 몸에서 고통이 사라졌다.

"어?"

"내가 만든 공간인데, 이 정도는 가뿐하지."

이타르의 안내에 따라 다시 원래 있던 연구실 같은 공간으로 들어왔다.

이곳도 흔들림의 여파는 피할 수 없었는지 책장들이 흔들리며 먼지를 털어냈다.

"내가 아직 유지되고 있으니 본체도 살아있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일단 다시 나를 찾아와 줬으면 해. 너에 대한 기억은 가지고 있지 않겠지만 무척 반가워 할 거야."

"어디 계시는 데요?"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타르의 표정이 아주 난처하게 변했다.

"나도 몰라."

"네?"

"이 때까지도 어디에 마법 도서관을 지을지 결정을 못했거든. 안에 들어갈 마법은 거의 다 모았는데 부지 선정이 여간 힘든 게 아니더라고."

'순수한거다······. 자기 주도적인거다······. 나쁜 사람이 아니다······.'

속으로 되뇌이며 마음을 가라 앉혔다.

이타르가 내게 되물었다.

"잠깐만, 내가 살아있는데 어디 있는 지를 몰라? 마법 도서관이 안 만들어졌어?"

아까는 내 얘기만 해서 이타르가 잊혀졌다는 걸 말 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상한 점을 느낀 모양이었다.

[아까 잘 피해서 얘기 하나 싶었는데······.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적당히 얼버무려야지. 평생 숙원으로 삼았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걸 들으면 기분이 어떻겠어.'

"마,만들어졌죠! 다만 이타르님께서는 다른 마법사에게 그곳의 관리를 맡기고 잠시 여행 중이신 것 같아요. 행방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 또 여행을 갔나 보네. 연구도 좋지만 여행은 더 좋아.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해 주거든. 너도 시간 날 때마다 여행을 다녀 봐."

"그, 그렇게 할게요."

별 의심 없이 이타르도 수긍하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쿠르릉 소리를 내며 공간이 흔들렸다.

"정말 가야 할 시간이야. 잠시만 기다려 봐."

이타르가 책상에 놓여있던 작은 나무 토막을 들고 와서 내게 건네줬다.

"이게 뭐에요?"

"알버트에게 가져다줄래? 선물이라고 전해줘."

크지 않은 나무 토막이라 품에 넣어도 움직이기가 불편하지는 않았다.

"하나 염려 되는 건······. 올 때는 바로 이쪽으로 왔지만 갈 때는 선택의 틈새를 지나게 될 거야."

"선택의 틈새요? 그건 뭔데요?"

"음······. 설명하기는 어려워. 다만 주위에 눈을 오래 두지 말고 놓인 길만 쭉 따라가. 명심해. 마음을 빼앗기면 스스로를 잃어버릴 수도 있어!"

이곳에 와서 처음 보는 이타르의 진지한 모습이었다.

쭈그려 앉아 투브와 눈을 맞춘 이타르가 투브에게도 당부를 했다.

"네게도 영향이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시안을 잘 지켜줘."

이제 방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책이 쏟아져 내리고 실험 기구들이 터져나갔다.

이타르가 헛차 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섰다.

그리고 말했다.

"시안, 투브. 즐거웠어."

"저도요. 감사합니다."

"안녕. 조심히 가."

이타르와 주위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투브만이 내 옆에 서 있었다.

발 아래 하얗게 빛이 생겼다.

마치 이쪽으로 오라는 듯, 빛이 쭉 이어져 있었다.

[괜찮은 사람이었지?]

"대마법사라고 하기도 했고 초대 황제 폐하의 기억에서 봤을 때는 좀 엄해 보였는데 되게 유쾌했어."

[많이 배우긴 했고?]

"많이 배웠지. 익히는 것은 내 몫이겠지만."

[스스로 익힐 생각도 하고, 기특하네.]

투브가 앞서서 걸어 나갔다.

[집에 가자.]

##

빛의 길은 꽤나 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주위에 알 수 없는 것들이 천천히 우리 곁을 지나갔다.

"저게 뭘까?"

[뭐?]

"안 보여? 우리 주위에 스쳐가는 것들?"

[나는 안 보여.]

신기한 일이었다.

스쳐가는 것들의 안에서 뭔가 움직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 보는 느낌이었다.

한 남자와 여자가 갓난아이를 안고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인가?'

검은 머리와 검붉은 눈동자의 남자가 마치 아버지 같았다.

'아닌가? 묘하게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인데?'

눈을 떼고 다른 장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발걸음이 턱하고 멈췄다.

"로하나스?"

앞서가던 투브가 내 말을 듣고 뒤를 돌아봤다.

내가 보고 있는 장면에서 젊은 로하나스가 배에 창이 꽂혀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로하나스를 죽게한 사람은······ 나였다.

장면들이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든 장면이 나였다.

농부의 옷을 입고 있는 시안, 왕이 된 시안, 황제를 죽인 시안, 할아버지가 되어 손자 손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안, 투브를 탄 암살자가 된 시안, 연금술을 배운 시안, 마법 실험에 실패해 괴물이 되어버린 시안, 아름다운 부인과 여행을 떠난 시안, 캐슬린과 권력 다툼을 하는 시안, 귀족원에 가서 회의를 하고 있는 시안, 한 쪽 눈을 잃은 투브와 함께 있는 시안······.

모든 것이 나였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꽉 다문 어금니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고개를 떨구고 양 손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신음이 새어 나왔다.

"끄으으······."

[왜 그래!]

투브가 놀라 달려왔다.

입도 열지 못하고 생각만 간신히 전했다.

'내가 너무 많아······. 이건······. 아마······. 일단 내 앞을 가려줘.'

투브가 늑대의 모습으로 변해 내 앞에 버티고 섰다.

얼굴에 투브의 부드러운 털이 스치는 감촉이 느껴졌다.

아우우우우-

습격을 받는다고 생각했는지 투브가 위협스러운 울음을 내질렀다.

그 소리에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울음소리 덕인지 모르겠지만 장면들이 다시 내게서 멀어졌다.

아직 고개를 들기 두려웠다.

잠시 후, 굳어 있던 몸이 조금씩 풀렸다.

[괜찮아? 왜 그런 거야?]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답했다.

"이것들은 아마도 내 선택에 따라 달라졌을 수 있는, 아니면 달라질 일들이야. 너는 못 보겠지만 나는 다양한 나를 봤어,"

이타르의 말이 생각났다,

-선택의 틈새

'이런 의미였나······.'

수도 없이 많은 선택의 연속인 삶, 그 속에서 달라졌을 삶을 보여주는 곳인 것 같았다.

일단 보지 않으면 내게 다가오지는 않는 것 같으니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손을 투브의 등허리에 얹고 말했다.

"보지 않으면 나를 불편하게 할 수는 없는 것 같아. 이대로 갈게. 안내를 해줘."

##

눈을 감고 있음에도 눈앞이 점점 밝아지는 느낌이 났다.

출구가 가까워 오고 있다고 막연하게 느꼈다.

그때 마침 투브가 말했다.

[다 왔어. 눈 떠도 될 것 같아.]

조심스럽게 눈을 뜨니 한 발자국 앞에 연무장이 보였다.

발을 앞으로 뻗어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바람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 자물쇠 같은 것을 채우는 소리가 차례로 났다.

"도······ 도련님?"

알버트의 목소리였다.

"이걸 그렇게 찢어버리시면 안됩니다!"

알버트가 달려와서 허겁지겁 연무장 바닥에 흩어진 이타르의 책을 수습해 모았다.

이타르의 말대로 몇 초의 시간, 아니 그것보다도 훨씬 적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내 앞에서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서 허둥지둥하고 있는 알버트를 보니 이타르가 전해주라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품속에 손을 넣어 나무토막을 만졌다.

"어?"

나무 토막의 느낌이 아니었다.

손에 닿는 느낌은 마지 조각상 같았다.

꺼내어 보니 웃고 있는 까까머리 소년을 조각한 작품이 나왔다.

왜 알버트에게 전해주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알버트."

"예, 도련님."

알버트가 책의 페이지를 맞추느라 연무장 바닥에 앉아서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선물이 있어."

"어휴, 이런 선물이면 10번이라도 사양하겠습니다, 도련님."

"그 책 말고. 이거."

내가 알버트의 손에 조각상을 쥐여 줬다.

퉁명스럽게 그 조각상을 보던 알렉스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양 손으로 투박해 보이는 그 조각상을 더듬더듬 훑었다.

"주인님을 만나셨군요."

알버트가 붉어진 눈을 하고 나를 향해 말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꼭 전해 달래."

"감사합니다······."

알버트가 과거의 자신이 새겨진 조각상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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