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변의 물결 (1) >
품격 있는 옷을 차려입은 남자가 네모난 통에 손을 집어넣었다.
통에서 나온 손에는 작게 접힌 종이가 하나 들어있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 종이에 적힌 말이 무엇일지 상상하며 긴장하고 있었다.
남자가 뽑은 종이를 단상에 있는 여자에게 전해주었다.
단상 위의 여인이 천천히 종이를 펴고 안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찬성."
동시에 누군가는 탄성을, 누군가는 탄식을, 누군가는 고함을 질렀다.
귀족원 본회의장이 순식간에 소란해졌다.
"정숙! 정숙해 주십시오!"
마법을 통해 증폭되는 귀족원 회의 의장, 바네사 발터, 아크라파소 후작의 목소리에 시장과 같던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정리하겠습니다."
날카로운 말투였다.
"제2054회 귀족원 최고 회의 안건, '그란트 유제프, 케이신리 백작과 휘긴 유제프, 팔스타인 백작 간의 영지전'은 일곱 공작 가문, 열여덟의 후작 및 변경백 가문. 총 스물다섯의 표결권자 중 두 개의 변경백 가문, 세 개의 궁정백 가문인 다섯을 뺀 스무 가문의 대리인을 포함한 표결권자들의 투표에 따라 찬성 열하나, 반대 아홉으로 절반을 넘어 가결되었습니다."
"제정신들이 아니군······."
제로 몬트라우, 제뉴인 공작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누군가는 흠칫하며 몸을 사렸지만, 누군가는 제뉴인 공작이 반대나 기권을 한 것일지 아니면 무기명투표라는 점을 이용해서 찬성에 표를 던지고 저렇게 연기를 하는 것일지 궁리하기 바빴다.
쾅!
눌하스 바크하임, 산탄다르 공작이 주먹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탁자를 치고 일어나 소리쳤다.
"이런 미친놈들! 영지전이라니! 제정신으로 투표를 하긴 한 게야? 이건 제국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을 때나 행해졌던 야만의 흔적인데, 그걸 지금 와서 다시 하겠다고? 애초에 이런 안건이 왜 본 회의에 올라온 게야!"
산탄다르 공작이 아직 단상 위에 있는 의장을 째려봤다.
동갑내기였던 전대 제뉴인 공작, 프리드리히 몬트라우가 은퇴하고 고위 귀족 중 최연장자이자 제국 최고의 곡창지대인 산탄다르의 주인이니만큼 그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회의장이 침묵에 빠져들었다.
바네사 발터, 아크라파소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도 이 안건에 대해 지속해서 반려했지만 카몰 후작가의 후계가 계속 비어있어 귀족 사회에 혼란을 야기하는 상황이라 판단 되어 안건을 상정했습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스타리옷 유제프, 카몰 후작에게 집중되었다.
아들인 스테판 유제프가 죽은 이후로 저택 밖으로 얼굴 한 번 보이지 않다가 등장한 그는 피골이 상접했다는 말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자 카몰 후작이 한마디를 했다.
"유제프가의 가주이자 카몰 후작인 나, 스타리옷 유제프는 귀족원의 결정에 대해 어떠한 반발 사항도 없으며 영지전의 승자를 유제프 가문의 적법한 후계자로 맞겠소."
"스타리옷!"
충격적인 발언에 회의장이 술렁였다.
카몰 후작이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친 산탄다르 공작을 한 번 흘낏 바라보았다.
"그렇게 소리치지 않으셔도 잘 들립니다, 각하. 몸이 좋지 않아 먼저 퇴장해도 되겠습니까? 의장?"
난장판이 되어버린 회의장 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아크라파소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가합니다."
카몰 후작은 이곳의 아수라장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일어서서 회의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후······."
자리에 앉아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를 되짚던 산탄다르 공작의 옆에서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괜찮으십니까, 각하?"
"몰트, 자네였군."
몰트 비텔스바흐 궁정백이었다.
궁정백의 작위는 아무래도 귀족보다는 황실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라 귀족원의 독립적 기능을 위해 표결에는 참여할 수 없지만, 결과와 귀족원의 분위기를 황실에 전달하기 위해 파견되어 나와 있었다.
옆으로 다가온 제뉴인 공작이 궁정백에게 물었다.
이미 나올 대답을 알고 있으면서 혹시나 해서 답을 구하는 질문이었다.
"궁정백, 이것에 대한 폐하의 의중은 어떠신가?"
"아시다시피 귀족원 최고 회의의 결정이 황제 폐하나 황실의 뜻에 의해서 달라지는 경우는 역사 상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려하고 계시기는 하지만 최대한 저희 입장을 이해해 주실 것입니다."
저희라는 말을 듣고 제뉴인 공작이 생각했다.
'저희라니, 그대의 저희는 황실인가 귀족인가.'
비텔스바흐 가문이 사법의 수호자라는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아래에서는 황실의 검은 손이 되어 뒤치다꺼리한다는 사실은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 가문의 수장이 저희라는 말을 하자 굉장한 위화감을 느끼는 제뉴인 공작이었다.
이 일은 작게는 귀족들, 크게는 제국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이런 거대한 폭풍이 자신의 아들이 참여한 기사단 모의 전투에서 시작되었다.
제뉴인 공작의 머릿속에 나비효과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찔했다.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직감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변화라는 말로는 부족할지도 몰랐다.
평화의 시대, 통제받아온 힘이 터져 나올 적절한 이유와 명분을 찾았다.
절대 이 영지전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을 자신만 직감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주위에서 두셋씩 모여 쑥덕거리는 모습들이 제뉴인 공작의 눈에 들어왔다.
"사법계의 의견은 어떤가?"
산탄다르 공작이 몰트 궁정백에게 물었다.
"법관들 사이에서는 추후 개정을 통해서 조항의 변경이나 삭제를 한다면 모를까, 지금에 와서 귀족원 안건에까지 올라간 사항에 대해 입을 열기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입니다."
"민감한 문제이긴 하지······."
"다만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고는 있습니다만······."
궁정백이 말을 흐렸다.
"그쪽 역시 이번 결정 이후의 것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것이지 현재 상황을 무효라고 한다거나 영지전을 제기 한 두 귀족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는 쪽은 소수의견입니다."
"어찌 되었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무력밖에 없다는 말이겠구먼."
"그렇습니다."
"흐음······."
황실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 궁정백이 떠나자 제뉴인 공작도 일어섰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보자고."
의장에게 퇴장을 요청하고 바깥으로 나온 제뉴인 공작은 회의장 바깥의 모습에 더욱 머리가 아파왔다.
입장을 허락받지 못한 백작들이 옆에서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주인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제뉴인 지방의 영주들에게 연락을 돌려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한 자신의 판단이 현명했다고 제뉴인 공작은 생각했다.
멀리서 누군가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노년의 남성이 제뉴인 공작을 향해 급히 물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리처드 로제, 누이론트 백작.
제뉴인 공작부인인 일라이자 로제의 아버지이자 제뉴인 공작의 장인 되는 사람이었다.
"가결입니다."
"허어······. 몇 대 몇입니까?"
"11대9입니다. 무기명이었으니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누이론트 백작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눈에 혼란이 가득했다.
리처드 로제 백작의 영지인 누이론트는 영지전을 지목당한 측인 휘긴 유제프 백작의 영지인 팔스타인 내에 있었다.
원래 로제 가문은 유제프 가문의 가신이었으나 독립하여 영지를 하사받고 귀족의 지위를 얻은 가문이었다.
같은 백작이라고는 하나 가신에 가까운 협력관계였다.
팔스타인 백작 측에서 병력을 징발한다면 군말 없이 가문의 기사들과 영민들을 무장시켜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두 백작 간의 영지전이었지만 그 아래와 위로는 수많은 이해관계들이 얽혀있었다.
찬성을 던진 공작, 후작들은 그저 돈이나 물자들을 뒤로 보내주고 자신들의 저택에서 차나 마시고 있으면 그만이겠지만 직접 동원되어야 하는 영민, 기사들이 죽을 것이고 하위 귀족들 간의 권력 관계에도 큰 변동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누이론트 백작이 제뉴인 공작을 간절하게 쳐다봤다.
지원을 해 줄 수 없냐고 돌려 묻고 있었다.
손을 대게 되면 좋건 싫건 한쪽 편을 드는 상황이 되어버리게 된다.
"추후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최대한 중립적인 발언만 한 후 제뉴인 공작은 귀족원을 빠져나왔다.
그의 뒤를 수많은 눈이 뒤따랐다.
##
"로제 가문에 지원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말에 오히려 아버지가 더 놀라셨다.
"일라이자, 조금 더 생각해 봐도 될 문제요."
"아니요, 시간을 더 가지면 당신만 곤란해져요. 당장 전령을 보내서 지원은 없다고 못 박으세요."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한참 고민에 빠져 있었다.
[네 행동의 결과가?]
'다른 결과를 불러온다.'
이렇게 되면 내가 미래의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무용지물에 가깝게 변해버린다.
전혀 새로운 분기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복수의 첫 단추를 끼운 것뿐인데 이렇게 거대한 결과가 되어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책상의 비밀공간에 숨겨놓은 미래의 일을 적어놓았던 노트를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할 수도 있었다.
'인물은 두고 사건은 다 폐기해야 하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화가 단단히 난 어머니와 그것을 말려보려는 아버지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너무하시네요! 당신이 아버지 도와드린 것이 몇 번인데 영지전에 도움을 바라시다니요!"
"나는 장인께 해 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소만?"
"없기는! 별장에 가서 보니 탑이 하나 늘었더만!"
"나는 모르는 일이요."
"호말론산 석재로 지었던데, 호말론이 제뉴인 안에 없다고는 하지 않겠죠?"
호말론은 질 좋은 석재의 산지로 유명한 지역으로, 제뉴인 지역 내에 있었다.
아버지가 힘을 썼음이 분명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도 참 순진하네요. 여튼! 아무것도 보내지 말아요. 물 한 방울도! 특히 인력은 더더욱 보내지 마요!"
"그래도 장인어른께 너무 말이 심하시오, 부인."
"저는 당신과 결혼한 순간부터 몬트라우가 사람이에요. 그리고 당신도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다 알아요. 사위 뜻을 존중해도 모자랄 판에 먼저 도와달라고 그러셨다고요? 로제 가문 조상들 보기에 부끄러워서 못 살겠네. 아니다, 전령 보내지 마세요."
어머니의 말에 나와 아버지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럼?"
"제가 직접 가서 담판 짓고 올 테니까 준비해주세요. 아마 어머니도 저랑 같은 생각이실 거에요."
어머니가 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여자만이 가주가 되는 아크라파소의 발터 가문에 당차기로는 뒤지지 않는다는 로제 가문 여인다웠다.
"일라이자. 제발 침착하시오. 당신 뜻대로 하겠소."
아버지가 당황해서 일어나 어머니를 진정시켰다.
내 옆에서 그걸 보고 있던 투브가 킥킥거렸다.
[네 아버지가 웨폰 마스터(weapon master)면 네 어머니는 웨폰 컨트롤러(weapon controller)냐? 크크크크]
'속 편해서 좋겠다.'
똑똑
아버지의 서재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게."
케인즈가 들어와 알렸다.
"가족 간의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손님이 와 계십니다."
"오늘 방문이 예정된 손님은 없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돌려보내게."
케인즈가 난처한 기색을 얼굴에 띄웠다.
"완고하게 각하를 뵈어야 한다고 합니다······. 제 영역을 넘어선 문제 같습니다."
"누구시죠?"
어머니가 물었다.
"시종장, 얄츠 이나타 백작의 전령입니다. 변경백 가문들의 입장을 알리러 왔답니다."
얄츠 이나타 백작은 시종장이기도 했지만, 황실의 최근거리에 있다는 특성 때문에 제국의 변방을 수호하는 두 변경백 가문들의 창구로도 기능했다.
그가 사람을 보내 변경백 가문들의 입장을 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귀족들의 물밑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평화의 시대가 끝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