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스타인으로 (1) >
"네? 팔스타인요? 제가 잘못 들었습니까?"
황당한 목소리로 내가 아버지께 말했다.
"잘 들었다. 팔스타인. 휘긴 유제프 백작의 영지."
"거길 제가 왜 갑니까?"
"영지전 관리관이다."
"관리관요?"
"그래. 나도 이제 와 찾아보고 하는 말이지만 영지전에는 인원과 물자의 제한 같은 엄격한 규율이 존재한다고 하는구나. 그걸 감시·감독하는 역할이 필요한데, 귀족 측에서 하나, 황실에서 하나, 군부에서 하나. 이렇게 세 명이 영지전의 참관인이 되어서 규정에 어긋난 일을 잡아내야 한다는구나. 그 일을 하는 것이 영지전 관리관이다."
그런 규정도 있구나······.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그 관리관이란 것을 왜 제가 합니까? 저 말고도 귀족들이 많지 않습니까."
내 말에 아버지가 조금 곤란한 얼굴을 했다.
"개입하지 않겠다고 대외적으로 입장을 밝힌 곳이 우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대표가 아홉 곳이 나왔다면서요."
"영지전에 반대하는 가문이 아홉이 있었지. 하지만 그건 영지전 자체에 대한 반대였을 뿐, 영지전이 결정되자 각자 이득을 취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게야. 그 때문에 귀족원 측에서도 이 관리관 선정에 아주 애를 겪었단다. 한쪽에 유리한 판정을 하는 사람을 관리관의 자리에 앉혀서는 안 되니까."
"그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외가인 로제가문의 영지인 누이론트는 팔스타인에 있지 않습니까, 제가 팔스타인 백작 측에 유리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내가 귀족원 측에 주장했던 논리였다."
"그런데요?"
"카몰 후작이 네가 관리관이 되기를 원했다. 죄는 없을지 모르나 이번 영지전에 있어 네 도의적 책임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도의는 무슨.
모의 전투에 이겨보려고 자기 아들을 전장에 밀어 넣은 사람이 도의를 논했단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그 정도는 아버지 선에서 잘라낼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물론. 아직 네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했지."
"그런데요?"
"모의 전투에서 보여준 네 활약은 기사 이상의 것이며 나이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규율의 적용과 전장의 승패를 논의할 수 있으면 된다는 반박을 하더구나."
"카몰 후작이요?"
"아니 다른 귀족들이. 괜히 자신들이 관리관으로 지정되었다가 패배한 쪽의 원망을 사는 것이 두려웠겠지. 중립을 선언한 공작가의 자제이니 승패와 관계없이 원한 관계에서는 자유롭지 않겠느냐."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위험 하나 부담하지 않고 뒤에 숨어서 야금야금 이득이나 취하겠다는 속셈들 아닌가.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을 참고 계속 물었다.
"아버지, 말씀하시면서도 제가 관리관이 되어야 하는 논리가 빈약하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맞다. 내가 치우라고 하면 단박에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는 정도의 논리지."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황실 측의 관리관이 네가 관리관으로 오기를 강력하게 희망했기 때문이다."
황실 측?
아. 귀족 하나 황실 하나 군부 하나?
"황실 측의 관리관이 누구신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왠지 아버지의 입에서 나올 사람을 알 것 같았다.
"2 황자마마시다."
바그안트 서비어!
썩을 놈이!
전생에서도 그렇게 굴려 놓고 이번 생마저 굴릴 셈이냐!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잃어버렸다.
아버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영지전의 1차 이해관계자와 황실 관리관의 공통된 요청을 거절하기에는 녹록지 않더구나. 2 황자마마와 동행하게 되는 만큼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니 좋게 생각하고 다녀오는 것이 좋을 듯싶구나."
2황자랑 붙어 있다는 것이 힘든 일인데요······.
이쯤 되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아마 아버지도 그렇게 크게 거부 의사를 밝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작은 것이라도 공적을 세워 공작자리를 이어받기를 기대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일단 빠져나갈 수는 없는 것 같으니 단념하고 최대한의 정보를 모아야 했다.
"군부 측 관리관은 누구입니까?"
"4군단장인 페제 베이카 장군이다."
페제 베이카라는 이름을 듣자 2황자에 대한 원망이 사라졌다.
수많은 전략 전술 교범과 군사학 서적을 낸 시대의 명장이었다.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내 정신적 스승과 마찬가지였다.
"황자에 장군까지. 백작들의 영지전에 참여하는 관리관들 하나하나가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말은 바로 해야지. 황자에 장군에 공작가의 장자까지. 그 정도로 이 영지전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소리다. 제국 내부에서 무력이 충돌하는 것이 오랜 만이니 말이다."
충돌 이후 남아있는 불씨가 어디로 튈지는 누구도 상상하기 힘들었다.
일단은 내 눈으로 현장을 봐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제가 발을 빼기에는 늦은 상황 같군요. 출발은 언제입니까?"
"일주일 뒤, 황자마마의 일행과 같이 출발할 예정이다. 그때로부터 2주일 뒤, 일행이 도착하고 나면 3일간의 영지전이 치러질 예정이다."
##
"호위 기사로 누굴 데려가실 겁니까?"
한스 단장의 말이었다.
저번 연회 이후로 기사단과의 거리감이 부쩍 줄어든 나는 종종 기사단원들의 숙소에 방문하곤 했다.
내가 이곳에 오는 것만으로도 다른 기사들에게 좋은 자극제가 된다고 생각한 한스가 딱히 내 방문을 제지하지 않았던 것도 있다.
"호위 기사가 필요한가요?"
내 반문에 한스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여기서 팔스타인까지는 말을 갈아타면서 달려도 1주일 가까이 걸리는 곳입니다. 그런 긴 여행길에 공자님 혼자 보내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황자마마의 일행과 같이 다닌다고 했으니 불편한 일은 없을 건데요."
"아니지요! 공자님! 아무리 황실의 배려라고는 하지만 늘상 보던 저희만 못할 겁니다."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하는 것 같지?'
[딱 봐도 그렇네. 가고는 싶고, 직접 말은 못 하겠고.]
한스는 지금 내가 자신을 호위 기사로 지목해서 데려가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힘 조절을 해야 하는 모의 전투가 아니라 실제 전장에 가까운 영지전을 목격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목적은 오직 페제 장군을 보는 것뿐, 짐덩이리들을 달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붉은 방패 기사단 몇이 황자마마의 호위로 같이 올 것 같던데, 괜히 송곳니 기사단을 데려가면 안 좋게 보이지 않을까요? 대립하는 것 같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붉은 방패에 뒤지지 않는 송곳니의 모습을 보고 황자마마도 감탄하실 겁니다. 또한, 어찌 제국민으로써 황자마마께 대립을 하겠습니까. 황자마마의 존안을 뵙는 것만으로 공자님께서 지목하신 그 호.위.기.사에게는 평생의 영광일 것입니다."
[이제는 되는대로 막 가져다 붙이네.]
'그냥 데려가 달라고 말을 하지. 제뉴인 갈 때는 아버지한테 직접 호위로 가겠다고 말했다던데.'
[부상 당한 기사들도 있는데 영지전 보러 휙 떠나버리기는 자기도 미안하니까 너보고 데려가 달라고 은근슬쩍 돌려 말하는 것 같은데? 기사란 족속들도 어지간하다, 어지간해.]
"아버지께 호위 기사를 데려갈 수 있는지 여쭤볼게요."
한스의 얼굴이 희망으로 빛났다.
##
"그럴 필요 없다."
호위 기사를 데려갈 필요가 없다는 아버지의 말이었다.
"황자마마의 외출이니 통상적인 경비 인원 외에도 50명의 붉은 방패 기사단이 할당되었다고 들었다. 그들의 체계가 있을 것인데 괜히 우리 기사단원이 있으면 명령체계에 방해가 될 것이야. 특별히 황제 폐하의 친위대도 한 명 동행한다고 하니 호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마 아버지도 마음 같아서는 기사를 딸려 보내고 싶을 것이다.
멀리서나마 전장을 겪는 것은 큰 경험이 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여러 가지 역학관계를 고려해보셨을 때, 그냥 내가 손님처럼 황실 측과 동행하는 편이 괜찮으리라 판단하신 모양이었다.
내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괜히 세를 내보인다고 비슷한 수의 인원과 기사단을 준비하는 건 괜히 황실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었다.
적당히 맞춰주면서 실리만 챙기는 선이 좋았다.
다만 내 걱정은 그렇게 되면 계속 2황자와 동행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인데······.
그냥 따로 가면 안 되냐고 말이나 꺼내 볼까?
"2 황자마마께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마음이 그렇습니다. 귀족원 측에서 지원을 해 줄 것 같은데, 따로 가는 건 어떻습니까?"
"네가 관리관으로 확정됐다 하니 2 황자마마께서 아주 기뻐하시면서 보안장치를 갖춘 네 전용 마차를 제작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그것도 이미 제작에 들어간 것 같으니 힘들 듯싶구나."
진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보인다. 팔스타인으로 가는 길 내내 '몬트라우 백, 몬트라우백.' 하면서 어떻게 하면 나를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을지 머리 굴리는 2 황자가 보인다.
[황자가 너 엄청 좋아하는 것 같다?]
'끔찍한 소리 좀 하지 마라. 지난 삶에 그놈 때문에 온 대륙을 휘저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무릎이 삐걱 거리는 것 같아.'
아버지가 내 옆의 투브를 보고 말했다.
"그 개가 너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네가 위험에 빠지거든 도와주지 않겠느냐? 나는 저렇게 든든한 호위를 본 적이 없다."
투브가 앉은 채로 가슴을 쭉 폈다.
[나를 네 애완견처럼 알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뭐, 어쨌든 내 강함을 알아보는 것 같아 뿌듯하기는 하네.]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웃었다.
"하하하. 내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행동하는구나."
똑똑
노크 소리가 나더니 캐슬린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버지, 엄마가 좀 보자고 하세요."
아버지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아마 내가 관리관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을 어머니께 말씀드리지 않았겠지.
"곧 간다고 전해다오."
"네. 오빠는 오지 말래, 나랑 놀아."
캐슬린의 방에서 어디서 주워들은 척하면서 마법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 오러를 끌어올려 저택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사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어 오러를 끌어올릴 필요도 없긴 했다.
-당신 왜 그래요. 정말? 막으려면 막을 수도 있는 것 아니에요?
-내가 공작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잖소, 일라이자.
-열네 살 짜리 애한테 전장을 보여주는 게 아버지라는 사람이 할 행동은 아니잖아요.
-그나마 시안은 참관이지 않소, 나는 시안만 한 나이에 반란을 진압하러 나갔소.
-당신이랑 시안이랑 같아요? 그리고 말은 바로 하세요. 시아버지께서 출정하시고 따라 나간 것뿐이잖아요.
-흠······. 그것은 중요하지 않소. 어쨌든 귀족원과 황실에서 동시에 시안을 원하는데 내가 무슨 수로 안 된다고 하겠소. 이해를 좀 해주시오······.
-말이라도 못하면!
-일라이자. 진정하시오. 다 듣겠소.
-들으라고 하세요!
평소에 온화한 어머니가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정말 화가 났을 때 빼고는 아주 드문 일이기 때문에 저택 내의 모든 시종, 시녀, 집사들이 어디론가 몸을 감추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화를 좀 가라앉혀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다정한 모습을 보면 가정을 꾸리고 싶다가도 저렇게 아버지가 탈탈 털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되었다.
전생이나 이번 생이나 결혼은 하지 말아야지······.
##
<담쟁이덩굴로부터>
<황자나 황녀가 궁을 나설 것으로 예상됨. 2 황자, 바그안트 서비어가 유력함. 날짜는 오늘로부터 약 7일에서 10일 뒤. 통상적으로 제공되는 직계 황족의 호위 외에 붉은 방패 기사단이 추가로 호위에 합류할 것 같다는 정보가 있음. 황제의 친위대 중 하나가 호위로 합류할 것이라는 정보도 있으나 출처나 진위가 확실하지 않음. 팔스타인에 도착하는 것은 약 2주 후. 영지전 개전 3~5일 전에 도착할 것이라 추정. 제뉴인 공작가의 시안 몬트라우가 합류할지, 아니면 별도의 일행과 이동할지는 파악되지 않음. 두 가지 상황에 따른 방안 제시를 빠르게 해 주기를 바람. 이상, 기다리고 있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