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37화 (37/180)

< 팔스타인으로 (2) >

<엉겅퀴로부터>

<조금 더 세부적인 정보가 필요함. 보내온 정보로 계획을 실행하기에는 불확실한 부분이 많음. 특히 출발 날짜에 대한 것을 알아내는데 집중바람. 시안 몬트라우의 합류 여부 및 그의 오러 운용 정도에 대한 정보도 알아낼 필요가 있음. 그가 황실 측과 같이 움직인다고 해도 기존 계획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음. 이상>

##

<1 황자 생귀니엘 서비어가 영지전 관리관이 되지 않을까 했으나 2 황자 바그안트 서비어로 확정. 출발일은 아직 추정 중. 보안상의 이유로 밤중이나 새벽에 갑자기 출발할 가능성도 있음. 4대의 마차가 동원될 예정이며 2 황자는 불규칙한 시간대를 두고 마차를 바꿔 탈 예정이라는 듯. 시안 몬트라우는 현재 14살이지만 정식 기사단원들의 경지를 한참 뛰어넘었다는 소문이 있음. 황제의 친위대 중 한 명이 황자의 호위로 합류하는 것이 확인됨. '구름'이나 '승려'가 아닐까 함. 당초 상정한 범위 이상임. 계획의 대대적인 수정 혹은 재검토가 필요함>

##

<엉겅퀴로부터>

<고려하겠음. 추가적인 정보 수집 및 정기적인 연락 지속하도록>

##

"흐아아암"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니 투브가 날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 난 아직 성장기의 몸이야. 새벽에 깨서 이렇게 긴 여행을 하는 건 좋지 않아."

[누가 뭐래?]

몇 시간 전, 잘 자고 있던 나는 아버지가 흔드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시안. 얼른 채비하고 나오거라."

아버지가 조용하게 말했다.

"으······? 무슨 채비요?"

"3시간 후에 황자마마가 팔스타인으로 떠나신다. 너를 데리러 황실에서 온 사람들이 저택에 도착했다."

내가 잠이 덜 깼나? 아버지가 장난을 치시는 건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일 모레 출발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했지만 실은 오늘이다. 보안상의 이유로 말을 안 했지, 어서 씻고 옷 입고 나오거라. 네 짐은 미리 다 보내 놓았다. 시중들 사람도 그쪽에 다 있을 테니 불편한 것은 없을 게다."

아니, 당사자인 나한테는 귀띔 정도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꼭 기분 좋게 자던 사람을 깨워서 내보내야 하는 건가?

그렇게 졸린 눈을 비비며 마차에 올라 지금껏 달리고 있었다.

몇 시간 정도는 달렸는지 어느새 해가 뜨고 있었다.

창밖으로 아주 멀리서 여명을 받고 있는 수도의 성벽이 보였다.

수십만이 사는 도시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 모습이었다.

철커덕

앞의 마부가 내부와 연결된 작은 쪽창을 열었다.

바깥의 공기와 말들이 달리는 소음이 쏟아져 들어왔다.

"공자님, 곧 황자마마 일행과 합류하게 됩니다."

"합류하면 아침은 줘요?"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알겠어요. 그쪽 일행 보이면 말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다시 철커덕 소리를 내며 창이 닫혔다.

동시에 바깥의 소리와 내부가 거의 차단 되었다.

[기가 막히는데?]

"아마 저런 사소한 부분에도 다 마법처리가 되어 있을걸? 너도 느꼈잖아. 저 창문 닫힐 때 마나가 움직이는 거. 황실이나 되니까 이런 사소한 장치에도 명장급 장인들을 데려다가 저렇게 처리를 하는 거지."

실제로 마차 내부는 굉장히 안락하면서 동시에 고급스러웠다.

크기가 작긴 하지만 아늑한 침대도 있었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내부의 공기를 순환시키고 밖으로 배출하는 장치도 보였다.

그리고 마차 바닥에는 발이 닿는 부분과 별도로 구분된 공간이 있었다.

"여긴 왜 이렇게 만들어 놨지?"

만져보니 딱딱한 다른 바닥과는 다르게 카페트 같이 보들보들한 천이 깔려있었다.

'설마?'

위에 투브를 얹어 놓았다.

[와! 좋은데?]

침대도 누워보니 성인의 몸에 맞춘 크기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2 황자마마께서 아주 기뻐하시면서 보안장치를 갖춘 네 전용 마차를 제작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보안장치만 추가된 마차인 줄 알았는데 아마 나와 투브를 위해 만들어진 맞춤 마차인 것 같았다.

이렇게 외부로 반출된 황실의 물건은 대개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용도가 끝나면 철저한 감시하에 다 부수거나 불태워진다.

일회용이라는 말이다.

그런 일회용 물품을 맞춤형으로 제작하는 제국과 황실의 부와 권력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침대에 누워 잠이 들락 말락 하려는 참에 다시 쪽창이 열렸다.

"공자님! 곧 황자마마께 합류하게 됩니다."

좀 자려고 했더니만, 글렀다.

##

"너무 단출한 것 아닙니까?"

"오랜만이네, 몬트라우 백."하며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는 황자에게 내가 한 말이었다.

생각보다 외양이 허름한 마차와 몇 안 되는 호위 인원이 전부였다.

물론 마차의 내부는 내가 타고 온 마차 이상으로 고급스럽긴 했다.

"그런 걱정은 말게나, 이미 며칠 전부터 조금씩 인원들이 이동을 시작해서 지금쯤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걸세.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호위하며 이동할 것으로 생각했나? 하하하, 생각보다 몬트라우 백도 순진하군. 내가 출발한 것은커녕 황실의 관리관이 누군지 아는 사람도 몇 명 되지 않을 걸세."

황족은 궁에서 태어나 궁에서 죽는다는 말이 있었다.

그 정도로 그들이 궁 밖으로 몸을 움직이는 일은 드물다.

전생에서도 엘리자벳 서비어가 시집을 갈 때 말고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때의 행렬과 인원들이 엄청났기에 자연스레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하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헌데 그때와는 상황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마 멀리서 미리 자리를 잡고 같이 움직이던가, 그렇지 않다면 요충지를 미리 점거하고 교대하는 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늘 새벽에 출발한 이유도 그런 이유입니까? 자다가 불려 나왔습니다."

"자네한테는 미리 이야기 해 줄 법했는데, 제뉴인 공이 그렇게 하지 않은 모양이로군. 하하하 충신이야, 충신."

황자가 테이블을 가리켰다.

호화롭지는 않지만 정갈하게 조리된 요리들이 놓여있었다.

"시장할 것 같은데 들게. 먹으면서 이야기하지."

식사를 하는 동안 2 황자는 관리관이 해야 할 일과 이번 영지전에 대한 자세한 것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이번 영지전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

"그렇습니다. 귀족원과 황실에서도 그 부분을 두고 협의가 안 되어 난항을 겪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네. 아무래도 각자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으니 말일세."

귀족들은 규모가 커지기를 원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질 것이니까.

황실은 규모가 작아지기를 원한다.

귀족이 많은 힘을 가지는 것을 견제하고 피해를 줄여야 하니까.

"어차피 두 백작의 영지인 케이신리와 팔스타인은 붙어있으니 진짜 전쟁처럼 총동원이 가능하게 하자는 소리도 나왔네. 기간도 6개월로 하자더군."

"총동원 말씀입니까?"

"그렇네. 지지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들었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씹던 빵을 뱉을 뻔했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에게 전쟁은 마치 신화나 전설과 같은 단어다.

과거 영웅들이 활약했던 전쟁에 관한 이야기만 듣고 오로지 비장함과 낭만이 넘치는 줄로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장담할 수 있었다.

내가 그랬으니까.

처음 출정했을 때의 그 가슴 벅찬 기분을 잊지 못한다.

말 위에서 세상을 깔아보는 그 기분, 내 발자취 하나하나가 영웅의 서사시처럼 기록될 것이라는 그 행복한 상상.

다 말도 안 되는 부질 없는 것이라는 것을 느낀 것은 개전이 30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책에서 읽은 전장과 실제의 전장은 천지 차이라는 말도 부족했다.

책은 이성으로 읽어나가는 것이었지만 전장은 이성을 유지하기도 힘든 곳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 기사들의 오러에 몸이 두 동강이 되어 쓰러지는 병사, 잔뜩 뒤로 당겨져 있다가 앞으로 튕겨지는 활시위 소리, 분명 같은 부대의 전령인데 매 보고마다 달라지는 전령의 얼굴, 피가 범벅이 된 채로 뛰어 들어와 적습을 전하는 전령 등등.

그곳은 서사시나 음유시인의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아름답고 숭고한 곳이 아니었다.

생生과 생生이 서로를 죽음으로 내리 끌기 위해 악착같이 버둥대는 곳, 인간의 형상을 한 악귀들이 지상을 욕망하는 곳, 그곳이 전장이었다.

그런 지옥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총동원 같은 헛소리가 쉽게 나오고 그걸 지지하는 미친놈들이 있는 것이었다.

"어, 어찌 되었습니까?"

"분명 기록에는 그렇게 총동원이 허가된 영지전이 있기는 하나 그것을 지금에 와서 하자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지. 페제 베이카 장군도 몹시 역정을 냈다고 들었네."

내 기억이 맞다면 페제 베이카 장군은 사힘 지방 사람이다.

전쟁은 아니지만 끊임없는 이민족들의 침략에 노출된 지방에서 나고 자란 만큼 무력충돌이 가지고 올 여파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행히 그라도 정상인인 것 같았다.

황자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영지전의 명분이 카몰 후작의 후계자리가 오래 비어 있는 것은 좋지 않다는 이유인데 영지전을 그렇게 오래 끌어서는 안 될 노릇이지. 따라서 백작가에 허용된 기사단 수인 100명의 기사들을 모두 포함하여 총 인원은 양측 각각 2천명으로 제한 되었네."

바로 질문을 날렸다.

"지형과 범위, 양측 편제는 어떻게 됩니까?"

질문해놓고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군일 때의 버릇이 나왔다.

전투가 일어날 장소와 적군의 구성을 예측하는 것은 사전 준비의 기본이었다.

이 정보만 정확해도 어려운 전투에 승리할 수 있으며 반대로 이것이 불확실하면 아무리 병력 차이가 나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팔스타인 지방의 오마탄이라는 지역일세. 낮은 언덕과 평야가 섞여 있는 지역이라 들었네."

다행히 황자는 내 실수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마 그도 내색하지 않고 있을 뿐 모의 전투가 아닌 실제 전투를 본다는 생각에 들떠있지 않을까 싶었다.

"편제는 양측 모두 공개하지 않았네. 우리가 페제 장군과 합류해서 직접 시찰하게 되면 그때 알게 될 것 같네. 양측 모두 굉장히 예민한 상태라고 하네. 제국의 온 눈과 귀가 집중되어 있는 사건 아닌가."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폐하께서도 이 일에 많은 신경을 쓰고 계시네. 그것 때문에 형님이 이 관리관 자리를 탐냈었지."

"1 황자마마께서요?"

"그래, 굉장히 하고 싶어 하셨네만 곧 있을 외국 대사들의 만찬에서 1 황자가 빠지면 안 된다는 폐하의 엄명이 있으셔서 내가 오게 되었다네."

말을 마친 황자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 덕에 이렇게 몬트라우 백, 자네와 이렇게 같이 있을 시간이 생기지 않았나, 하하하하."

왜 그러셨어요······.

정말 괜찮은데······.

[황자가 너 진짜로 좋아하는 것 같다니까? 너 황자비 될 수도 있겠다? 큭큭큭큭]

'닥쳐.'

전생에서도 2 황자, 바그안트 서비어의 인재 욕심은 끝을 모를 정도여서 그 욕심 때문에 1황자, 당시 황태자와 마찰을 빚곤 했다.

식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자네에게 줄 것이 있네."

황자가 뒤에서 잘 제본된 책을 하나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영지전 관리관이 알고 있어야 할 규범일세. 어차피 계속 마차로 이동할텐데, 틈틈이 읽어두는 것이 좋을 것이야. 이동은 같이 하겠지만 또 얼굴을 보기 쉽지 않을 것 같아 지금 주겠네."

책 위에서 금박으로 입혀진 제목이 반짝였다.

'영지전-1034개의 기본 조항 및 추가적인 세부조항과 그에 따른 중요 사례'

아버지······, 힘든 일은 없다고 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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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겅퀴로부터>

<계획은 예정대로 시행 될 것임. 이상>

불길한 예감은 불길한 일이 되고는 한다 (2)오러를 최대한 다리 쪽으로 밀어 보내서 팔크 쪽으로 몸을 날렸다.

옆구리에 팔크가 잡히자 바로 폭발적으로 오러를 운용해서 방향을 마차의 뒤편으로 꺾었다.

등 쪽에 마나로 쉴드를 만들어 어둠 속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막아 냈다.

마차의 문을 열고 팔크를 밀어 넣었다.

부욱.

옷을 찢어 살펴보니 화살을 맞은 팔크의 어깨로부터 팔과 가슴으로 검은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극독의 일종인 것 같았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팔크가 입을 열었다.

"이, 이 마차 안에만 계시면 안전하실 겁니다."

그리고 그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는 소리와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웬 놈들이냐!"

"죽어라!"

"오, 오러가 굳어 버린 것 같습니다! 으아악!"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번 했다.

"후우우……."

마나를 넓고 얕게 퍼트려서 주위의 움직임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10, 20…… 30…… 40명 이상인 것 같네. 아주 완벽히 작정을 하고 있었어."

"길이 끊긴 것도?"

"이놈들 짓이겠지. 어디선가 정보가 새어 나간 것 같아."

"목적은 아무래도 황자겠지?"

"그렇다고 봐야지. 아마도 아까 먹었던 음식에 오러가 둔해지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

수프를 입에 댔을 때 느꼈던 그 위화감이 다시 떠올랐다.

-너는? 괜찮아?

이미 팔크를 데리고 들어올 때 오러를 운용했지만, 혹시나 해서 다시 몸 안 곳곳에 오러를 돌렸다.

"괜찮아. 변환 인자 덕인 것 같아. 다행이야."

바깥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전투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주위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마나를 퍼트리는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 깨지는 이미지가 확 떠올랐다.

"윽!"

골을 울리는 충격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왜 그래!

"상대 쪽에도 마법사가 있어. 내 마법을 상쇄해 버렸어."

마법사라니.

거의 모든 마법사는 제국군 소속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군부에서 황자를 죽이려는 쿠데타인가?

누가? 왜?

마차 안에서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었다.

한 놈을 잡아 족치는 것이 빠를 것이다.

'황자를 죽이려는 것인가? 아니면 납치? 어느 쪽이 되었든 목격자가 남게 하지 않기 위해 전원을 죽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살아 나가려면 이놈들을 죽여야 한다.'

마부석 아래에 팔크의 검이 있지만, 아직 내게는 클 것이다.

또 가능하면 마나 소드를 쓰지 않고 놈들을 죽여야 했다.

마나 변환을 멈추고 한층 더 오러에 집중했다.

오감이 날카롭게 벼려지기 시작했다.

스륵. 스륵.

마차 주위로 접근하는 자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3명.

'알고 있어. 마나나 오러는 느껴지지 않아.'

숨을 죽였다.

철컥거리면서 누군가가 문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밖에서는 열리지 않는 장치가 되어 있으므로 문은 열리지 않았다.

욕지거리와 함께 무언가를 손잡이에 가져다가 휘두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손잡이에 닿는 소리가 나자마자 내가 문을 벌컥 열어 버렸다.

"어?"

당황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린 문 사이로 개의 모습을 한 투브가 튀어 나가 남자의 얼굴을 물어뜯어 버렸다.

곧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악! 살려 줘!"

"이 개는 뭐야! 죽여!"

다른 사람 둘이 투브에게 신경이 쏠린 사이 나도 뛰쳐나갔다.

투브에게 물린 남자 하나와 그 곁의 둘, 모두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게 두건을 쓰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날이 잘 선 검과 도끼가 들려 있었다.

바로 손에 오러를 돌려서 내게 등을 보이고 서 있는 놈의 등을 가격했다.

퍼석!

뼈가 부러지는 감각이 주먹에 불쾌하게 전해져 왔다.

'일단 하나.'

오러를 두른 주먹에 정통으로 가격당한 녀석은 단말마의 비명도 내지르지 못한 채, 공기 빠지는 소리만을 내며 죽어 버렸다.

놈이 들고 있던 검이 떨어져서 흙먼지를 일으켰다.

"이 새끼는 또 뭐야!"

다른 한 놈이 나를 보고 도끼를 휘둘렀다.

자기 동료 하나가 죽고 하나가 제압되었는데도 그다지 당황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잘 훈련된 티가 났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오러를 운용하지는 않고 있으니 기사는 아니었다.

휘잉.

내가 몸을 뒤로 빼자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도끼가 제자리를 찾기 전에 빠르게 몸을 앞으로 밀어 넣었다.

놈의 몸이 앞으로 훅 다가왔다.

그대로 몸을 낮춰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아이의 몸으로 어른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듯 내 몸 곳곳을 순환하는 오러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어?"

아이의 발길질에 자신이 넘어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놈이 무너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땅에 누운 놈의 몸에 올라타 놈의 양어깨에 주먹을 날렸다.

콰앙! 콰앙!

"끄아악! 뭐야! 아아악!"

거의 어깨뼈를 관통하다시피 들어간 주먹에 피와 뼛조각이 묻어 나왔다.

휙 털어 내니 옆의 낙엽에 붉은 줄이 그어졌다.

주먹에 이상은 없었다, 오러 덕이었다.

곧바로 일어나서 놈의 정강이도 밟아 으스러트려 버렸다.

칼 든 놈에게 적당히 해 줄 마음은 없었다.

주위에 다른 놈들은 없었다.

모두 황자의 마차로 몰려간 것 같았다.

그쪽에서는 아직도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들어와!"

팔다리가 모두 박살 난 놈을 마차에 던져 넣으며 투브에게 말했다.

투브는 처음 목표한 놈의 목을 한 방에 돌려 꺾고 주위를 살피던 중이었다.

가벼운 도약 한 번에 투브가 마차의 안으로 들어왔다.

쾅!

마차의 문을 거칠게 닫고 놈에게 물었다.

"뭐 하는 새끼들이야?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해."

동료들은 다 죽고 자신은 팔다리를 쓸 수 없는 상황인데도 놈의 눈에는 불길이 이글거렸다.

"더러운 제국의 개새끼 같으니! 내가 말할 것 같으냐!"

짜증이 났다.

이미 작살난 놈의 어깨에 다시 오러를 두른 손을 집어넣었다.

타인의 오러를 몸으로 직접 받아들이는 것만큼 불쾌하고, 고통스럽고, 강렬한 경험은 흔치 않다.

놈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이었지만 들어 줄 사람은 없었다.

"네가 죽으면 다른 놈 잡아다가 똑같이 하면 그만이야. 말하면 살려 줄 마음이 조금 들지도……."

"퉷!"

끈적한 액체가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 놈인 것이 분명했다.

"너 같은 귀족 놈이 가장 먼저 땅바닥에서 구를 것이다! 제국의 멸망이 머지않았다. 계급이 철폐되고 모든 이가 평등한 때가 곧 올 것이다! 아텟신의 영광이 이 땅을 비추리라! 라 홈 아테나시!"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외치자 바로 놈의 몸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꿈틀거리며 나를 향해 달려들려고 했다.

"미친!"

바로 문을 열고 놈을 밖으로 걷어차 버렸다.

이미 처리한 두 놈의 몸에서도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낙엽과 나무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적은 황자의 납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살을 염두에 둔 방법을 동원했을 리가 없었다.

'아텟신을 추앙하는 무리라면 분리 운동 당시에 민중에게 퍼졌던 사교(邪敎) 집단인데? 이때부터 이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이들이 왜 황자를 죽이려 드는 거지?'

갈수록 상황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피할 거야?"

내 마음을 읽은 듯이 투브가 물어 왔다.

"아니."

전생과 달라진 현재에는 줄지어 내 앞길을 방해하는 것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내 앞을 가로막는 것들은 다 부숴 버리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 무엇도 내 복수를 방해할 수 없다, 그 누구도 내 목에 칼을 들이밀 수는 없다.

"실수로라도 내게 대적하려던 놈들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보여 주지."

투브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마음에 들어. 강자의 눈이야."

밖으로 나섰다.

불길이 사방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불길 사이로 군데군데 쓰러진 짐꾼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들 손에 무기를 쥔 채였다.

아마 짐꾼으로 위장한 붉은방패 기사단일 것이다.

2황자를 살리는 것이 옳은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 있는 사교 놈들을 작살내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 지시 기다릴 필요 없어. 그냥 다 죽여."

-네 지시를 기다려? 웃기지도 않는구먼. 나는 그런 적이 없어.

투브와 내가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황자의 마차를 향해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

황자의 마차 옆에서는 5~6명 정도 되는 짐꾼들이 약 30명 정도의 괴한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총 50명의 붉은방패 기사단이 이번 여정에 동원되었지만, 위장용 마차 3대에 각 10명, 황자가 탄 마차에 20명이 배속되었다고 했으니 벌써 15명 이상의 붉은방패 기사단원이 죽은 것 같았다.

기사라고는 하지만 오러를 쓰지 못하면 일반인보다 체력이 조금 좋을 뿐이다.

다수의 공격에는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10명 정도 있던 시종들과 인부들 역시 명을 달리했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괴한들이 마차를 부수고 황자를 끌어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놀라운 몸놀림으로 괴한을 막고 있는 한 남자 덕분이었다.

아마 그가 이번에 황자를 따라왔다는 황제의 친위대가 아닌가 싶었다.

그의 손에 잡혀 있는 창에서 오러가 마치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며 피어올랐다.

괴한들은 마차에 접근하려다가 창 한 방에 목숨을 잃는 것을 보고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대치만 하고 있었다.

피슝! 챙!

멀리서 날아온 화살도 재빠르게 반응해서 창으로 쳐 내는 그였다.

"으아악!"

활을 날린 궁수에게 거대한 늑대의 모습을 한 투브가 달려들어 앞발로 후려쳐 버렸다.

동시에 나도 포위망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진형을 파괴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들어 낸 혼란 때문에 포위망이 출렁이자, 한 놈의 어깨를 밟고 뛰어 창을 든 남자의 옆에 가서 섰다.

"폐하의 친위대시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들은 사교 집단이며, 마법사가 있습니다."

내 말에 그가 나를 쳐다봤다.

혹시나 나중에 어떻게 알았냐고 추궁을 당할까 봐 거짓말을 했다.

"저는 제뉴인 공작가의 시안 몬트라우입니다. 제가 타고 온 마차에 마법이 날아왔으니 확실합니다."

내 쪽으로 접근하려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채서 저 멀리로 던져 버린 다음 말을 이었다.

"아마 그자가 이 무리를 통솔하는 자가 아닐까 합니다. 이곳은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이 사태의 주범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향은?"

아까 내 마나 흐름을 방해했던 방향을 일러 줬다.

"맡기겠다."

그리고 단숨에 괴한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내가 알려 준 방향으로 향했다.

"저놈이 사제님께 향한다! 막아라!"

'사제? 마법사던데?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지 따라갈 수가 없네.'

일단 그런 생각보다는 앞에 있는 나머지들을 처리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이제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몸에 불을 붙인 채로 달려드는 놈들을 처리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거기! 둘씩 짝지어서 방어만 해요! 다수에는 장사 없습니다!"

내가 살아남은 자들에게 말을 하는 동안에도 투브는 연신 뛰어다니면서 포위망을 찢어 놓고 있었다.

거대한 늑대가 자신들을 향하는데도 괴한들은 흔들림 없이 자신들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발화한 채로 투브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텟신의 이름으로! 라 홈 아테나시!"

"그분이 약속하신 날이 온다!"

"만민 평등! 그 거름이 될지어다!"

무서울 정도의 광신이었다.

몸에 불이 붙은 채로 눈을 까뒤집고 달려드는 광신도들을 밟아 뭉개는 검은 늑대의 모습은 마치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자태였다.

그걸 보고 있던 내 입에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끝내주네."

불길한 예감은 불길한 일이 되고는 한다 (3)다행히도 시간이 지나자 기사들의 굳어 있던 오러도 풀리기 시작했는지, 살아남은 기사들이 하나둘 오러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아직 얼마나 더 있을지 모릅니다! 마차 주위에서 벗어나지 마세요!"

"위험합니다!"

한 기사가 내게 외쳤다.

시체 하나가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바닥에 누워 내가 가까이 오기만을 노리고 있었는지, 잔뜩 독이 오른 얼굴이었다.

'가깝다!'

오러가 지척에서 타오르는 불도 막아 줄 수 있나 생각하는 순간, 살덩어리에 충격이 가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억!

몸에 불을 붙이고 달려드는 놈이 옆구리에 쇳덩어리를 맞은 것처럼 옆으로 굴렀다.

놈의 허리에는 창이 꽂혀 있었다.

탓.

내 옆에 아까 마법사를 잡으러 갔던 친위대원이 뛰어서 다가왔다.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우직.

그가 진짜 시체가 되어 버린 놈의 몸에서 창을 뽑았다.

"어찌 되었습니까?"

"놓쳤다. 자리를 피한 것 같다. 황자는 어떤가?"

"마차 안에 계신 것 같습니다. 확인하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떠난 이후로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안에 시종 하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가 마차를 흘끗 보고 아직도 앞에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쳐 내고 있는 투브를 바라봤다.

"저건 그대와 관련이 있나?"

"그렇습니다."

사교도들의 수도 많이 줄었고 친위대원이 왔으니, 내가 마차에 붙어 있을 이유도 없었다.

한마디를 하고 투브 곁으로 가기 위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맡기겠습니다."

***

-이놈들은 공포심이란 게 없나? 아니면 학습 능력이 없는 건가? 옆 사람이 죽는 걸 뻔히 보면서도 달려드는 이유가 뭐야?

투브가 한 놈을 꼬리로 쳐 날리면서 말했다.

'그것들이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을 정도로 믿는 거야.'

-믿어? 그 무슨 신을?

퍼억!

마지막 남은 놈의 가슴에 주먹으로 바람구멍을 내 버렸다.

괴한들은 단 1명도 도주하지 않고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시체에서 불이 치솟은 탓에 주위의 숲이 모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법사는 도망쳤다는데, 마법사가 여기로 내몬 사람들은 한 줌 재가 되어 죽어 간다니. 역설적이네. 고생했어.'

-고생은. 시시해서 몸 풀 정도도 안 됐어.

개의 모습으로 옆에 다가온 투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얌전히 있나 싶더니 녀석은 곧 머리를 털어 버렸다.

정리된 것 같아 황자의 마차로 다가갔다.

"끝난 것 같습니다. 추가적인 습격이 있을 것 같습니까?"

"내가 마법사를 추격할 때 더 이상의 인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습격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시종과 짐꾼은 황자의 마차에 들어간 책임자 하나를 빼고는 다 죽었다.

호위 인원은 살아남은 기사가 팔크를 포함해 고작 다섯이었다.

그리고 나, 황자, 친위대원.

30명이 넘던 인원 중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이 10명도 되지 않았다.

마부석으로 올라가 쪽창을 열었다.

"마마, 시안입니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가. 밖의 상황은 어떠한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동선을 손에 넣은 집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교도 집단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상황은 거의 정리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사교도라니!"

황자가 역정을 냈다.

그때, 앞쪽에서 말이 땅을 밟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잠시 닫아 두겠습니다. 제가 이 문을 열기 전까지 나오시면 안 됩니다."

쪽문을 닫고 동료들의 시체를 수습 중이던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몸은 좀 어때요? 오러는 괜찮아요?"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괜찮습니다."

"그럼 전투준비 하세요. 앞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소리가 나요."

그 말에 재빠르게 기사들이 허리춤에 찬 칼을 다시 뽑아 들었다.

친위대원은 이미 창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땅을 울리는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오고 있었다.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불이 만들어 낸 열기와 연기로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누구냐! 그 이상 접근하지 마라!"

내 외침에 저편에서도 큰 소리로 답했다.

"4군단 기병여단 소속 제프리 프란시스입니다. 예정된 교대 위치에 있다가 불길이 솟는 것을 보고 바로 달려왔습니다. 그곳은 위험합니다! 어서 나오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길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재빨리 쪽창을 열고 안을 향해 물었다.

"제프리 프란시스라는 군인이 저희를 맞으러 나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안에서 황자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예정된 사람이 맞네."

"알겠습니다."

쪽창을 닫고 반대편을 향해 외쳤다.

"이쪽에는 말이 없소! 말에서 내려 마차에 연결하시오!"

건너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더니 몇 명이 말고삐를 잡고 연기를 뚫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틀림없는 제국군 군복이었다.

병사들이 빠르게 마차에 말을 연결하는 동안 친위대원에게 말을 걸었다.

"고생하셨어요."

빈말이 아니었다.

이 사람이 없었으면 정말로 다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친위대를 보는 것이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했다.

황제의 친위대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여러 가지였지만 그들과 황제의 관계를 나타낸다면 딱 적당한 말이 있었다.

절대 신뢰.

시종장, 얄츠 이나타 백작이 황제가 아니라 황실에 충성하는 인물이라면, 황제의 친위대는 오로지 황제 개인을 위한 집단이었다.

그림자 속에서 황제의 안위만을 위해 움직이는 소수의 인원이 그들이었다.

몇 명이나 친위대에 속해 있는지, 그들의 나이대는 어떻게 되는지, 실존하기는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이들의 존재는 극비 사항이었다.

대장군이었던 전생의 나도 그들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그대는 식사를 하지 않았나? 음식이 이상한 것 같던데 어떻게 오러를 운용할 수 있지?"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음식이 안 맞아 모두 토했습니다. 그 덕이 아닌가 싶네요. 그쪽은요?"

피식 웃고서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손."

내가 손을 펴자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올려놓았다.

작은 구슬 같은 것이 손 위에 있었다.

마치 약 같은 냄새가 훅 피어올랐다.

"내가 직접 만든 것 외에는 입에 넣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내 우물우물 씹어 삼키는 그였다.

나도 그를 따라서 씹어 보니 은은하게 고기 맛도 느껴지는 것이, 먹을 만했다.

말을 듣고 보니 허리춤에 작은 물통도 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음식과 물을 따로 챙겨서 다니는구나. 철저하다.'

그가 건조식을 씹으면서 말했다.

"내 얼굴과 목소리는 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시안 몬트라우."

씹고 있는 음식만큼이나 건조한 목소리였다.

"혹여라도 내 신상을 밝히려 했다가는 폐하의 진노를 사게 될 수도 있으니 미리 일러 주는 것이다."

"그것은 잠시나마 같이 싸운 전우를 위한 배려인가요?"

그가 나를 한번 보더니 말했다.

"그렇다. 그대가 없었다면 나는 폐하의 분부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폐하의 분부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물어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온몸을 감쌌다.

내가 타고 온 마차까지 총 2대의 마차에 말을 다 연결했는지 병사 하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출발하겠습니다!"

자욱해지는 연기 속,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위대원도 황자의 마차로 돌아가 버렸다.

-우리도 가자.

'그래.'

그때 내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감자가 보였다.

'음식에 무언가를 탈 예정이었다면 굳이 보급이 부족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 음식 자체에 오러 운용을 방해하는 성분이 있는 건가?'

-가자니깐?

투브가 나를 보고 말했다.

'어, 어. 갈게.'

작은 감자 하나를 주머니에 챙긴 뒤 다시 마차에 올랐다.

***

습격이 있고 난 뒤 일행은 산길을 넘어 카몰 지방으로 들어섰지만, 그곳에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교가 황자를 습격한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이것을 놔두고 움직일 수는 없다고 판단한 황자가 4군단장 페제 베이카, 카몰 후작 스타리옷 유제프, 마지막으로 경계에 있긴 했지만 우리가 습격받은 곳의 영주인 그라스 백작 장 뒤누아에게까지 전령을 보내 소환한 상태였다.

나와 2황자가 앉아 있는 작은 천막 안, 군복을 입은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황자에게 경례를 올려붙인 남자가 헉헉거리면서 숨을 골랐다.

"허억, 허억……. 4군단 71사단장입니다. 페제 베이카 장군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입니다."

일반 병사가 전달할 내용을 사단장이나 되는 사람이 뛰어와서 전하는 걸 보니 황자라는 지위가 엄청나긴 엄청난 모양이었다.

"나가 보라."

사단장이 밖으로 나간 뒤 천막 밖에서 말이 거친 숨을 내뿜는 소리가 났다.

천막이 걷히고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나도 아는 얼굴이었지만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쭈그러든 모습이었다.

"황자마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스타리옷 유제프, 카몰 후작이었다.

"카몰 후작, 목소리를 낮추라. 이것을 아는 자는 극소수다."

자리에 앉은 카몰 후작이 앞에 앉은 나를 보고 흠칫했다.

애써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는 다른 곳을 보는 척했다.

다시 천막이 열리고,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엎드린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 그라스를 통치하고 있는 장 뒤누아라 합니다. 마마, 저는 모르는 일이옵니다."

그는 황자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도 처음일 것이다.

아마 황자가 자신의 영지를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황자는 아무 말도 없었으나 카몰 후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네놈의 영지에서 황자마마가 위험에 빠지셨다! 네놈이 반역을 하려 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반역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라스 백작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연신 아니라는 말을 늘어놓을 동안 또 다른 사람 하나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꼿꼿해 보이는 노인이 황자를 향해 절도 있게 경례했다.

"4군단장 페제 베이카, 2황자마마의 부르심을 받고 도착했습니다."

"간만이네, 장군. 앉지. 그라스 백작도 일어나 앉으라."

자리가 좀 진정되자 황자의 입이 열렸다.

"그라스와 카몰 사이에서 나를 죽이려 한 세력이 있었다."

그 말에 바로 그라스 백작이 외쳤다.

"마마!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황자가 손을 내밀어 그를 제지했다.

"그것은 추후 밝혀질 문제다. 이들은 사교도로 추정되며, 자연발화 하며 사라져서 증거나 포로는 없다."

자연발화라는 말에 나와 황자를 제외한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폐하께 보고가 전달되고 있을 것이다."

그 말에 그라스 백작의 얼굴이 더 하얗게 변했다.

초대 황제의 유지가 있었다.

-무엇을 믿어도 좋으나 혹세무민하는 종교는 뿌리를 뽑아라.

사악한 마법에 황자 시해 혐의까지 걸린 종교가 발견되었으니 그라스 지방은 한동안 발칵 뒤집힐 것이었다.

"또한 제뉴인 공작가의 장자, 시안 몬트라우의 말에 따르면 사교도 중 마법사가 있었다고 한다."

페제 베이카 장군이 목소리를 냈다.

"현직 및 은퇴 마법사 명단을 확인하겠습니다."

"그리하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미등록 마법사나 탈주 마법사에 대한 것도 알아보았으면 하네."

가끔, 아주 가끔 제국에 속하는 것을 거부하고 다른 왕국으로 도망친다거나 하는 마법사들이 있었다.

제국에서는 그런 행위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고, 그 즉시 처리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마지막으로 황자가 쐐기를 박았다.

"따라서 그라스 백작 장 뒤누아는 치안권을 4군단에 이양하라."

'너는 네가 통치하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것 같으니 나는 너를 못 믿겠다. 확인을 받아라.' 하는 말이었다.

영주로서 최악에 가까운 치욕이었다.

억울한 일이겠지만 그라스 백작에게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황자를 죽이려는 사교도들이 있었고 그들 때문에 붉은방패 기사단이 10명 넘게 죽었다.

목이 잘리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가 보아도 좋다."

그라스 백작이 나가자 천막 안에는 영지전을 관할하는 영주와 그 영지전의 관리관 셋만 남게 되었다.

"마마, 이대로 계속하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궁으로 돌아가시고 영지전 날짜를 조정하시지요. 다른 황족을 보내셔도 괜찮지 않습니까."

"카몰 후작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릅니다."

후작과 장군이 서로 황자에게 위험하다고 고했다.

"스타리옷 유제프."

"예, 황자마마."

"페제 베이카."

"예."

황자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내 안전은 그대들 책임이다."

"마마!"

"폐하께서 내게 맡기신 소임이다. 이를 행하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영지전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다. 일정이 흐트러지거나 내게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그대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

-엉겅퀴로부터-

-계획은 실패함. 바그안트 서비어는 살아감. 정기 연락 이외의 연락은 자제하도록.-피와 눈물이 흐르는 땅 (1)황자는 이대로 나아가기를 선택했다.

"이미 많이 지체되었다. 저녁부터 전력으로 움직일 것이니 서로 협조해서 최단거리의 경로와 최대한도의 경호 인원을 제공하라."

이미 굳은 황자의 마음을 돌리기 쉽지 않겠다고 느꼈는지 후작과 장군 모두 딱딱한 얼굴로 알겠다고 고하고 천막을 나섰다.

이미 짜 놓은 계획들을 수정하느라 바쁠 것이다.

황자가 내게 눈을 돌렸다.

"몬트라우 백, 그대가 없었다면 큰일을 당할 뻔했네.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나도 마차로 돌아왔다.

"어떻게 한답니까?"

왼쪽 어깨에 붕대를 칭칭 감은 팔크가 물었다.

화살이 조금만 더 파고들었으면 팔을 잘라야 했을 텐데, 다행히 늦지 않게 치료를 받아 큰 지장은 없을 것이라고 의무장교가 내게 말을 했었다.

"계속 간대요."

"와…… 황자님도 보통은 아니시네."

자연스럽게 마부 조수석에 앉은 내 귀에 대고 팔크가 속삭였다.

"공자님, 그런데 말입니다……."

"네?"

"개가 늑대로 변해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던데 진짜입니까?"

"네, 맞아요."

팔크가 엄청 억울한 얼굴을 했다.

"아이고, 평생 자랑거리를 놓쳤네. 다시 한 번만 변하라고 하면 안 됩니까?"

붕대가 감겨 있는 팔크의 가슴을 팍 쳤다.

"으악! 왜 그러십니까!"

"죽다 살아나고서도 그런 생각이 나요? 얼른 나을 생각이나 하세요."

팔크와 웃으면서도, 나는 영지전 직전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못내 불안했다.

***

"이제 내일이면 팔스타인으로 들어선다고 하네."

황자가 접시에 식기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이전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한층 철저히 식자재 검사가 이루어졌지만, 그래도 역시 충격이 컸던 탓인지 황자는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한쪽으로 밀어 둔 상태였다.

손도 대지 않은 음식들을 보니 감자 생각이 났다.

'잘 전달되었으려나.'

수도로 복귀하는 인원에게 습격이 있던 날 집어 든 감자를 포츠라니 백작가의 저비스에게 가져다주어서 분석하라고 일러 놓은 상태였다.

'항상 차게 유지하라고 말은 해 놨는데, 썩지나 않으면 좋겠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몬트라우 백."

그런 나를 황자가 불러 주의를 환기시켰다.

"죄송합니다. 저번의 그놈들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황자의 표정이 굳었다.

"신경 쓰지 말게. 자네는 잘해 주었네. 남은 것은 황실과 군부에서 잘 처리하겠지."

"그렇겠지요?"

"물론이네. 영지전이 잘 마무리되는 것에만 신경 쓰도록 하게.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고 수도로 돌아가면 내 직접 폐하께 자네의 헌신과 노고를 고하겠네."

이런…… 그냥 그때 혼자서라도 몸을 피했어야 했나.

얽히고 싶지 않은 인물과 계속 얽혀 드는 기분이다.

영지전 얘기가 나온 김에 계속 궁금했던 것 한 가지를 물어봤다.

"마마,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마마께서 제가 관리관에 임명되기를 굉장히 기대하셨다고 하더군요. 실례가 아니라면 어떤 이유에서 그러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황자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어린 몸으로 그 모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해서 직접 초대까지 했는데 그때 발이 묶여 고생만 하다 가지 않았는가. 그대에게 공적을 만들어 주고 싶었네. 모의 전투의 승리는 가문의 일이지만 관리관의 일은 제국의 일이 아닌가. 제뉴인 공과도 이미 말이 된 부분일세."

역시, 아버지의 입김이 들어간 일일 것 같더라니.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일로만 생각하고 그대를 관리관에 지정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고생시켜 미안하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찌 황자마마의 탓이며 고생이라 하겠습니까."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어 고맙네."

죽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했는지 황자가 한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고 깊이 숨을 쉬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그놈들은 꼭 뿌리를 뽑아 보이겠네."

손을 내린 황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허나 조금 의외였던 부분은, 카몰 후작이 관리관 자리에 그대를 강력히 원했던 것이야. 내게 직접 말을 꺼낼 정도였다네."

"카몰 후작 말씀이십니까?"

저번에 봤을 때는 마치 나를 없는 것처럼 취급하던 사람이 황자에게 직접 청원할 정도로 나를 관리관 자리에 앉히기를 원했다니 뭔가 이상했다.

귀족원에서는 도의적 책임 운운했다던데, 내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지 보라는 건가?

'비겁한 놈.'

비겁하고 좀생이 같은 놈들의 흔한 심리다.

자기가 저지른 짓은 생각도 하지 않고, 조그만 피해라도 입으면 크게 부풀려서 생각하고 갚아 주려 하는 것.

그마저도 정정당당히는 못 하고, 이렇게 뒤에서 자신이 그렇게 되게 하고 아닌 척하면서 뻔뻔스레 얼굴을 들이민다.

호부 아래 견자 없다더니, 역시 견부 아래에는 견자가 있는 법인가.

그러니 개선장군이 되어 당당하게 돌아온 내 앞에서는 눈도 못 마주치다가, 내가 죽어 갈 때가 되어서야 눈을 뒤집어 까고 달려들어 칼을 찔렀겠지.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놈들이었다.

"오늘 유독 생각이 많은 것 같군?"

고개를 드니 황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바닥을 뚫고 들어갈 듯 꽉 쥔 주먹을 얼른 풀었다.

"아, 죄송합니다. 마마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제국의 일을 맡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긴장했나 봅니다."

-너는 거짓말을 너무 해서 아마 곧 혀가 2개로 갈라질 거다.

투브의 말은 가뿐히 무시해 줬다.

긴장할 것 없다며 내게 말하는 황자에게서도 살풋 긴장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마차 옆으로 줄줄이 지나가는 우마차를 보고 팔크가 말했다.

"전투에 참여하는 사람만 양측 다해서 4,000이 넘어요. 게다가 관리관 측에 미리 보고하면 오전 4시에서 6시 사이에 전날 손실된 병력만큼의 인원을 보충할 수 있으니, 지정된 범위 밖에서 대기하는 후방 부대도 있을 테고. 그 인원들을 먹이고 재우려면 이렇게 실어 날라야죠."

내가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며칠 앞쪽으로 안 오셔서 안에서 뭘 하시나 했는데, 규정집을 보고 계셨습니까?"

"네. 군부에서 도와줄 인원이 붙는다고는 하는데, 대충대충 넘어가기도 좀 그래서요."

"귀족의 귀감이십니다, 와하하하!"

생각보다 체계적으로 규정이 짜여 있는 것을 보면서 제국 초기에 영주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방법을 동원해서 피 터지게 영지전을 해 왔을지 조금 가늠이 됐다.

규정 대부분이 변칙 행위나 부정행위의 제한과 같이, 양측의 균형을 맞추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온 제국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으니 설마 그런 짓을 할까 싶었지만, 권력에 눈이 먼 놈들이니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규정집의 딱딱한 문장들을 대충이나마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마차의 속도 때문에 옆으로 사람들이 휙휙 지나갔다.

대부분이 밝고 희망찬, 그늘 없는 얼굴이었다.

우마차들 때문에 마차가 잠시 서 있게 되자 그들의 말이 들렸다.

"우리가 이기겠지?"

"암! 이겨야지! 이겨서 우리 백작 각하께서 나중에 후작에라도 오르신다면 팔스타인이 훨씬 더 풍요로워지지 않겠나? 나고 자란 고향을 무시하시지는 않을 것 아닌가!"

"우리를 만만하게 본 케이신리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자고!"

마차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아주 희망적인 것 같습니다."

내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패배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희망이 있겠지요."

"그럼 공자님은 팔스타인이 패배하고 케이신리가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것도 아니에요."

"책을 보셔서 그런가? 오늘따라 영 아리송한 소리만 하십니다."

팔크가 싱겁다는 듯이 머리를 한번 털고 다시 시선을 앞쪽으로 옮겼다.

여전히 사람들과 우마차의 행렬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게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전쟁과 전투를 너무 쉽게 보고 있어서, 영 찝찝하네.'

-네가 그랬잖아, 평화의 시대라고. 전면전도 아니라서 일종의 오락거리처럼 생각하고 있는 걸 거야.

'알아. 그런데 기사인 팔크도 어디가 이기네, 어디가 지네 하고 있는 게 참 웃겨서. 과거였으면 지금은 분리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10년도 안 남은 상황인데 이렇게 느슨했나 싶어, 낯설어.'

오랜 세월 전쟁터를 누비고 전장에서 살면서 느낀 점이 있었다.

전쟁에 승자와 패자는 없다. 전쟁을 이용하는 사람과 이용당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손실 없는 승리는 없다.

온전하고 완벽한 승리는 허상이다.

이 영지전에서 어느 편이 이기든, 죽고 다치는 사람이 생기고 막대한 물자가 소모될 것이다.

아까의 그 사람은 자신의 친구나 친지가 영지전에서 죽거나 다쳐 돌아와도 승리를 기뻐할 수 있을까?

승자도 어딘가에 상처를 입는다.

"하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코부터 목까지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이미 과거에서는 다 떨쳐 냈던 것들이었다.

수도 없이 반복되는 참상에 무뎌질 대로 무뎌진 감정이었는데, 그것 자체를 어딘가에 묻어 두고 꺼내 보지 않았었던 것인가 보다.

다잡아야 했다.

이런 것에 흔들린다면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말없이 바람을 맞으며 얼마를 더 갔을까, 병사들의 군영이 보였다.

"다 온 것 같습니다. 이곳이 영지전이 벌어질 오마탄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황자도 이미 도착했는지 똑같이 생긴 4대의 마차가 보였다.

군영으로 다가가니 경계를 서던 병사가 다가왔다.

"확인 좀 하겠습니다. 이번 영지전의 관리관이 타고 계십니까?"

"그러네."

팔크의 말에 병사가 허락을 구했다.

"내부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내가 규정집의 첫 페이지를 펴서 병사에게 내밀었다.

금색의 실로 박혀 있는 정갈한 글씨가 보였다.

<본 규정집의 소유자는 그란트 유제프, 케이신리 백작과 휘긴 유제프, 팔스타인 백작 간의 영지전 관리관임을 증명함. 마엘 서비어>

그리고 아래에는 눈동자 없이 하얀 흰자위만 있는 눈의 모습을 간단히 그려 놓은 문장(紋章)이 있었다.

2황자가 내게 이 규정집을 주었던 이유는 미리 한번 봐 두기를 원했던 것도 있지만 이것 자체가 관리관의 증표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현 황제의 이름과 황가의 문장이 박혀 있는 고급스러운 책을 본 병사가 바로 빳빳하게 경례를 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여러 명의 병사들이 군영의 안쪽으로 마차를 안내했다.

다른 천막보다 크고 좋아 보이는 천막의 앞에 마차가 섰다.

"다른 관리관분들도 얼마 전에 도착하셨습니다. 규정집을 들고 들어가 주시면 되겠습니다."

투브와 함께 마차에서 내려 천막으로 걸어갔다.

천막 안쪽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들어가자 말소리가 멈추고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내 쪽으로 쏠렸다.

테이블에 놓인 다른 2개의 규정집이 보였다.

옆에 내가 들고 들어간 규정집을 놓자 각자의 규정집에서 무형의 기운이 솟아올랐다.

"오오……."

기운이 비슷하지만 다르게 생긴 2개의 문장을 만들어 냈다.

'아무래도 둘 다 유제프 가문이라 비슷한 문장을 쓰나 보군.'

무형의 기운이 다시 규정집으로 흘러들자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황자가 위엄 있게 말했다.

"관리관들이 검열과 심사를 마친 사흘 뒤, 그란트 유제프, 케이신리 백작과 휘긴 유제프, 팔스타인 백작 간의 영지전 개전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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