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39화 (39/180)

피와 눈물이 흐르는 땅 (3)

어슴푸레하게 저 멀리서 태양이 존재감을 알릴 무렵, 반쯤 감긴 눈을 비비며 황자가 말했다.

"언제까지 대치만 하고 있을 셈이지?"

그러고는 더는 안 되겠는지 몸을 일으켰다.

"눈 좀 붙이고 오겠네.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을 보내게나."

황자의 말대로 창공 기사단과 괴각 기사단은 편의상 6번 구릉으로 이름 붙인 곳을 사이에 두고 몇 시간째 대치 중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두 기사단은 각 진영의 핵심 전력이니 최대한 노출되거나 손실을 입고 싶지 않은 것이다.

처음에 기습적으로 팔스타인으로 침투해 들어간 병력은 아마 다른 곳의 지원을 받은 인원일 가능성이 컸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인원을 소모한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귀족들의 지시를 받고 지원을 온 인원들을 통제하기가 힘들자 아예 그들을 한곳에 몰아 놓고 부대의 기강과 통일성을 위해 초장부터 놓고 가는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기사와 마법사의 힘이 지대하기는 했지만, 전장이라는 것이 또 그들만으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자세한 사항은 케이신리 백작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공자님, 졸리지 않으십니까?"

베이카 장군의 말이었다.

"괜찮아요. 아까 저녁 먹고 미리 눈을 붙였어요."

"언제까지 대치 상태가 유지되리라고 보십니까?"

"장군의 의견을 먼저 물어도 될까요?"

"저는 정오까지는 서로 대치할 것이라 봅니다. 밤새도록 이어진 긴장 상태 때문에 병사들이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니, 오전에 휴식을 취하게 하고 정오 이후에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일리 있는 말이군요."

답을 하려다가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었다.

'책으로만 접하던 사람과 직접 말을 나누고 있네.'

과거의 장군과 미래의 장군이었던 사람이 뜨는 해를 배경으로 앉아 전장을 논하고 있었다.

흥미로웠다.

즐거웠다.

한데 책으로 볼 때는 그렇게 완벽하고 철저해 보였던 베이카 장군도 마주하고 보니 역시 사람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는 평민에서 장군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로, 의전에서는 웬만한 귀족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결국 태생부터 귀족은 아니고, 직업 또한 군인이었다.

베이카 장군은 귀족의 생리를 몰랐다.

귀족들이 얼마나 참을성 없고 얼마나 본인 위주로 생각하는지를.

"정오까지 가지 않을 것 같아요. 아마 곧 사람을 보내 황자마마를 모셔 오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베이카 장군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기색이 지나갔다.

"허허허, 제 의견이 이렇게 정면으로 부정당한 것은 오랜만입니다. 공자님을 4군단 참모로 영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후로도 영지전의 향방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베이카 장군이 내게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느 진영이 먼저 움직일 것이라 보십니까."

"팔스타인이지요."

통신 마법사 주위에 푸른 글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팔스타인 측, 대대적 움직임 포착. 본영을 제외한 전 진영 이동 중. 창공 기사단, 기습적으로 6번 구릉 점령 시도 중."

사람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가서 황자마마를 모셔 오거라, 어서!"

베이카 장군이 명령을 한 이후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베이카 장군은 귀족의 생리를 너무 몰랐다.

평민 출신이고 병사들의 피로를 고려해야 하는 그가 사령관이었다면 오전 정도는 교대로 휴식을 취하고 오후에 병력을 움직였을 테지만, 이렇게 많은 인원을 통솔하는 것이 처음인 저 영주에게 병사들의 상태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또한, 팔스타인 백작은 간밤에 있던 기습에 굉장히 분개하고 있을 것이니 먼저 병력을 움직일 것 같았다.

'이렇게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미루어 짐작건대 저들은 영지전을 길게 지속할 생각이 없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승리하면 온 제국에 자신의 이름을 떨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멋지게 승리한다는 생각이 양측 수뇌부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제가 틀린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노장이 소년에게 가르침을 구하고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의 권위와 자리에 얽매이지 않는 이런 자세 덕에 대성한 건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했다.

"감입니다."

저 아래에서 팔스타인 진영의 병사들이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야.

'왜?'

-저 노인이 너를 뚫어져라 보는데?

'그게 왜?'

-황자가 널 보는 눈빛이랑 비슷해.

***

케이신리 백작은 참모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사전 조사 기간에 지형 탐사 결과 중심부에 있는 작은 구릉을 차지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굉장히 유리한 입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모든 참모, 심지어 케이신리 백작 자신도 동의했었다.

팔스타인 백작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그곳을 두고 밤새 팽팽한 신경전과 소규모 국지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팔스타인 진영의 창공 기사단이 기습적인 움직임을 통해 그곳을 점령했고, 동시에 팔스타인 측의 공세가 시작되고 말았다.

그곳을 수복하려 여러 시도를 해 보았지만 창공 기사단 특유의 정교한 궁술에 병력 손해만 봤을 뿐이다.

"쓸모없는 놈들! 창공 기사단은 기껏해야 활이나 쏘는 3류 기사라고 말한 것은 네놈들이 아니었느냐? 왜 그런 3류 기사들에게 요충지를 빼앗긴 것이냐!"

참모들이 간신히 케이신리 백작을 말렸다.

"그곳만 요충지가 아닙니다, 각하. 진정하시고 크게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기사의 질이 월등합니다. 팔스타인의 보병부대 정도는 괴각 기사단만으로도 충분히 파훼할 수 있으니, 창공 기사단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각개격파 하라는 명을 내리십시오!"

야간의 기습으로 팔스타인 측이 수세로 전환하리라 예측하고 안일하게 대응했던 것이 이런 복잡한 결과를 불러오고 말았다.

물자와 인원 보충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실제 전장과는 다르게 영지전의 보급은 오전 4시에서 오전 6시까지라는 제한이 있었다.

한쪽이 피해를 입고 보급을 위해 인원들이 빠져 있는 동안 다른 쪽이 틈을 노려 공격할 수도 있었다.

팔스타인 백작이 노리는 것도 그것이었다.

케이신리 측을 한번에 괴멸시킬 수는 없겠지만 자신보다 큰 피해를 입혀 보급에 많은 인원이 투입되게 하고, 그 시간대를 노려 다시 한번 공세를 펼칠 셈이었다.

그러나 케이신리 백작은 그런 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자신만 피해를 볼 수는 없었다.

"불에는 맞불을 놓는다. 전 병력에 진군 명령을 하달해."

팔스타인의 공세에 최대한의 수세로 맞서던 케이신리가 공세로 전환했다.

전장 곳곳에서 대격돌이 일어났다.

***

마법사 하나가 순간적으로 엄청난 마나를 변환해 가며 주위를 얼려 버리고 있었다.

미친 듯이 마법을 쓰던 마법사는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을 어깨에 맞고 쓰러졌다.

마법사는 바닥을 기면서도 입으로 끊임없이 주문을 영창했다.

이미 얼굴의 절반을 바닥에 파묻은 채로 마법사는 생각했다.

'사람에게 내 마법이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 의문만 가졌던 것이 수십 년. 이렇게 마음껏 마법을 쓸 수 있다니, 행복하다.'

많은 수의 마법사들이 이 영지전에 참여한 이유가 이것과 비슷했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공격적인 마법은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연구에 대한 갈망은 충족시킬 수 있으나 실제 위력과 개선점에 대한 욕구는 해소할 수 없기에, 위험성을 알면서도 자신의 연구 성과를 한 번이라도 실제로 보이기 위해 참전한 것이었다.

자신의 마법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을 볼 새도 없이 기사 하나가 오러로 몸을 보호한 채 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휘두른 창에 마법사는 그대로 절명했다.

그제야 주위로 퍼져 나가던 얼음이 멈추었다.

마법사가 속해 있던 측의 병사들이 달려들어 얼어붙어 있는 상대편 병사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부서진 얼음 조각 안쪽에서 피로 그린 붉은 꽃이 피어올랐다.

무리에서 이탈한 기사 하나가 다른 기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뭉쳐져 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하는 기사가 혼자가 되었으니 처리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했다.

말마저 잃고 투구까지 벗겨진 기사를 향해 다른 기사들이 말 위에서 창을 던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서질 듯 오러를 받아들이고 있던 창이 소름 끼치는 파공음을 내며 공기를 갈랐다.

창을 피하나 싶던 낙마한 기사가 뒤에서 휘두른 칼에 맞아 바닥에 쓰러졌다.

재빠르게 일어나 오러를 운용해 출혈을 최소화하려고 했지만, 그럴 틈도 없이 계속해서 병장기가 그의 목숨을 노리고 쏟아져 들어왔다.

기사(騎士)라는 말처럼 많은 이들이 말 위에서 전장으로 나섰으나 그 말이 무색하게 땅 위에서 삶을 마감했다.

낙마한 기사 역시 그 얄궂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말 위의 기사들은 시체가 되어 버린 기사를 내버려 두고 다른 사냥감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날아드는 화살이 해를 가려 그늘을 만들었다.

그늘 안에 들어와 있던 병사들이 방패를 들어 다시 한 겹의 그늘막을 만들었다.

두 겹의 그늘막이 내리쬐는 해를 가려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분명 서늘해야 했으나, 오히려 달아올랐다.

그늘의 안쪽에서 열을 발하는 자들이 잔뜩 몸을 웅크리고 서로에게 밀착해 있었다.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귓전을 날카롭게 때렸다.

위로 향하던 촉이 아래로 향하는 순간, 화살은 방패와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방패에 창이 박히는 소리가 마치 빗소리 같다고 어느 병사는 생각했다.

화살이 만들어 내는 빗소리 안에서 병사는 미세하게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아침에 방패 손질을 한 번 더 해야 했었나.'

밤새 지속된 긴장 상태 때문에 아침을 먹으면서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병사는 구석에 처박혀 부족한 잠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것 때문에 분명 밤새 신경이 쓰이던 방패의 작은 흠을 보수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는 재수 없게도 화살 하나가 그 흠을 직격한 것이 아닐까 하고 병사는 생각했다.

'조금만 더 이쪽으로…….'

병사가 괜한 불안감 때문에 방패를 살짝 움직였다.

방어를 위한 밀집대형일 때는 절대 마음대로 방패를 움직이지 말라던 부대장의 말은 방패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앞에 한 줄기 연기처럼 흩날려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방패를 움직이며 열린 한 줄기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병사는 그 빛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자신의 무릎까지 닿아 있는 것을 보았다.

화살이 어찌나 쏟아지는지, 빛은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화살에 가려 깜빡깜빡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빠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더 불안해진 병사가 방패의 위치를 한 번 더 조정했다.

그리고 넓어진 틈으로 빛도 더 많이 새어 들어왔다.

"으아악!"

병사는 빛이 닿아 있던 무릎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힘이 빠졌다.

방패를 움직이며 생긴 틈으로 화살이 비집고 들어와 그의 무릎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병사의 눈에 들어왔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는 대열을 무너트리지 않기 위해 방패를 들고 있는 팔에 온 힘을 집중했다.

그의 비명은 살깃이 공기를 찢으면서 만들어 내는 소리와 화살촉이 방패에 박혀 만드는 빗소리에 묻혀 버렸다.

***

마차 1대가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오마탄으로 진입하려 하고 있었다.

병사가 마차를 세웠다.

마부가 병사에게 마차의 옆으로 가라는 손짓을 했다.

시키는 대로 돌아가자 가림막도 걷히지 않은 마차의 창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급한 일이 있어서 왔네."

"죄송합니다. 영지전이 진행되는 동안 허가받지 않은 사람은 들일 수 없습니다."

가림막이 살짝 걷히고, 안쪽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금속패가 나왔다.

신분을 증명하는 데 쓰이는 금속패를 본 병사가 놀라서 경례를 했다.

"황자마마만 뵙고 금세 떠날 것이니 따로 보고할 필요는 없네."

"알겠습니다."

마차가 좁은 산길을 덜거덕거리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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