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40화 (40/180)

피와 눈물이 흐르는 땅 (4)

첫날의 전투가 끝났다.

두 진영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공세를 펼쳤고, 그 결과 케이신리 측의 우익이 붕괴되어 약 3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팔스타인 측도 마냥 온전한 것은 아니라서, 케이신리의 기사단인 괴각 기사단의 필사적인 돌격에 핵심 전력인 창공 기사단의 1/3 이상이 전투 참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추가적으로 창공 기사단의 보호를 위해 보냈던 인원들 역시 괴멸당하면서 200명이 조금 넘는 피해를 입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창공 기사단이 차지하고 있던 6번 구릉을 케이신리 쪽에서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서 앞으로의 상황에서 조금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 한 방씩 먹인 셈이었다.

오전과 오후 내내 당장이라도 서로 죽일 듯 싸워 댔지만 피해가 속출했고, 해가 지기 시작하자 자연스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야간에는 소규모 작전조 외에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04시부터 06시까지, 단 2시간만 주어지는 인원과 물자 보충 시간을 갓 넘긴 시간이었다.

지금부터 09시까지는 전투 행위를 할 수 없고 관리관들이 전장을 시찰하는 시간이었다.

기존에 보고된 것과 시찰한 것 이외에 규정을 어긴 흔적이 있는지 확인차 만들어진 시간이라고 한다.

이제 2일 차 09시부터 3일 차 24시까지는 이런 중간 점검 시간 없이 완전 전투태세에 들어가게 된다.

오늘의 전투도 전 병력 간의 충돌이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탐색전에 가까운 양상이었다.

하지만 이 시찰 이후에는 전투의 색이 바뀔 거라는 소리였다.

***

"참혹하군."

황자가 말 위에서 눈을 찌푸리고 코를 가리며 말했다.

피와 시체가 섞여 진창이 된 전장이 말발굽 아래로 넘실거렸다.

"시작하라."

베이카 장군의 말에 병사들이 진창으로 걸어 들어가 생존자 확인 작업을 비롯해 미리 보고되지 않은 병장기가 사용되지는 않았는지 등등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비릿한 피 냄새와 역겨운 썩은 내가 혼재하는 곳으로 병사들이 철퍽철퍽 소리를 내면서 들어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죽어 가는 말이 마지막으로 내뱉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나마 어둠에 가려져 있던 전투 후의 참상이 빛에 의해 낱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욱."

그나마 어둑어둑해서 드러나지 않았던 전장이 태양 빛에 의해 남김없이 까발려지자 황자가 견딜 수 없었는지 말에서 내려 나무 하나를 붙잡고 안에 있던 것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시종 하나가 얼른 달려가 황자의 몸에 토사물이 묻을세라 조심스레 그를 부축했다.

"마마, 이곳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올라가 계셔도 괜찮습니다."

베이카 장군이 안쓰러운 눈으로 황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입가에 남은 토사물을 오른손으로 닦아 낸 황자가 토악질의 여파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답했다.

"보아 두겠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참상을 내 눈으로 보고…… 우웩!"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황자가 다시 허리를 숙여 음식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황가의 핏줄을 타고나서 남들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오러가 증진되며 20대 청년의 강인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2황자에게도, 전투 이후의 전장은 처음 다가오는 충격적인 광경일 것이다.

화살 박힌 시체가 뒹굴고, 마법에 당한 것인지 얼굴이 불타 버린 시체가 나무에 박혀 있고, 말이었던 것이 육편(肉片)이 되어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눈을 돌리는 곳마다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

"내 눈으로 보고 폐하께…… 으웩!"

황자는 몸을 숙였다 펼 때마다 점차 안색이 새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모셔 가라."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신물을 게워 내던 황자를 보고 베이카 장군이 한 말이었다.

황자는 계속해서 무언가 웅얼거렸지만 이미 기운이 다 빠져 시종의 부축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조심히 모셔라."

시종들이 황자를 부축하고 산 위의 관리관 진영으로 가는 것을 베이카 장군은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비로소 그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공자님은 괜찮으십니까?"

"좀 불편하긴 한데, 있을 만하네요."

'아무렇지 않아요.'라고 할 수는 없어서 조금 어색하게 불편한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수백, 수천 번도 더 본 장면이다, 내 마음에는 한 줄기 흔들림도 없었다.

"공자님을 보고 있으면 놀라운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어린 나이에도 이렇게 의젓하실 줄이야……. 그저 놀랍습니다."

"과찬이네요."

"하지만 금일 09시 이후부터는 양측 다 총력전에 들어갈 것이니 지금이라도 조금 쉬어 두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무리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그래, 올라가자. 여기 바닥 느낌 너무 싫어. 으, 질척질척해.

투브가 단단한 땅을 찾아 펄쩍펄쩍 뛰며 말했다.

"그럼 빠르게 한번 둘러보고 가겠습니다. 관리관 역할로 온 것인데 너무 장군께 의존하면 보기 안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겠군요. 그럼 위에서 뵙겠습니다."

베이카 장군이 내게서 멀어져서 부하들에게로 다가갔다.

-으……. 너무 별로야.

'좀만 참아. 슥 보기만 하고 갈 거야.'

오러를 끌어 올린 채로 전장을 빠르게 돌며 확인을 했지만, 딱히 규정을 위반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올라가자.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여유 시간인데 쉬어 둬야지.'

투브에게 말을 하고 말 머리를 돌려 관리관 진영으로 올라가고 있던 참이었다.

'어?'

-너도 느꼈어?

멀지 않은 곳에서 아주 작은 마력 반응이 느껴졌다.

케이신리와 팔스타인 양측의 병력 모두 이곳에 있지는 않으니 4군단 소속 마법사가 쓴 것 같았다.

'통신 마법인가?'

-확실하지 않아.

'일단 올라가자. 통신 마법이면 관리관 쪽으로 다 들어오니까 확인해 보면 되겠지.'

***

"관리관들이 내려가 있는 동안 들어온 통신이 있나요?"

"마법사들도 일괄적으로 교대를 하는 시간이라 그때 들어온 통신 마법은 없습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니에요, 시찰 중에 불빛을 본 것 같은데 관측한 마법사가 있나 해서요."

"부대 배치를 미리 마치기 위한 양측의 척후 아니겠습니까?"

"특수한 경우를 빼고 마법사를 척후로 쓰는 일은 없어요. 아래쪽에 통신해서 인원을 보내 보라고 해 주실 수 있나요?"

"죄송합니다. 곧 시찰 시간이 끝납니다. 게다가 인원들이 복귀 중이기도 합니다."

관리관 천막에서 통신 마법을 총괄하고 있는 마법사와 나 사이의 대화였다.

-함정이라도 설치한 걸까?

투브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내려가 봐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언덕길 아래에서 이미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함정을 설치하는 것이 규정에 어긋나는 건 아닌데 그 종류와 강도 같은 건 미리 보고해야 해. 위치만 기억해 두고, 영지전이 끝나면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나와 대화를 나눴던 마법사가 천막 밖으로 나와 하늘을 향해 거대한 붉은 빛을 피워 올렸다.

이내 산 아래에서도 여러 붉은 빛이 피어올랐다.

교대가 잘 이루어졌는지 점검하는 과정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마법사가 내게 말했다.

"군단장님께서도 올라오고 계신답니다."

"알겠어요."

내게 배정된 천막에 들어가 몸을 눕혔다.

짧은 잠을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국면의 영지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중간중간 오러를 운용했어도 어린아이의 몸으로 꼬박 하루 동안 자지 않고 있는 것은 꽤 힘든 일이라, 머리를 베개에 대자마자 주위의 소리가 멀어졌다.

***

"분명 성공하는 것이겠지?"

스타리옷 유제프, 카몰 후작이 마차 안에서 앞에 앉은 남자에게 물었다.

눈이 움푹 패어 해골처럼 보이는 남자가 답했다.

"분명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그 말에 카몰 후작이 벌떡 일어나 그의 멱살을 잡았다.

"왜 말이 달라지는 것이야! 성공시켜!"

후작의 분노를 샀음에도 남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멱살을 잡힌 채로 후작을 내려다보면서 그가 말했다.

"저는 처음부터 말씀드렸습니다. 성공하도록 노력하겠지만 실패할 수도 있다고. 그것을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것은 각하십니다."

목소리 하나 떨리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는 남자의 모습에 후작은 화가 솟았지만 결국 멱살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자를 쏘아보며 날카롭게 한마디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실패하면 죽는 것으로 알아라!"

남자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성공해도 죽고, 실패해도 죽는다니. 보수가 너무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클클클."

송장이 웃는 것 같은 그 모습에 후작은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후작의 눈에 횃불이 곳곳에 꽂힌 동굴이 들어왔다.

누군가 후작에게 다가와 말했다.

오랜 기간 후작가에서 일해 온 심복이었다.

"마법진의 설치가 끝났다고 합니다."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철저하게 확인하라."

후작과 그 일행이 있는 곳은 오마탄에 있는 동굴이었다.

이 근방이 영지전 구역으로 선정되자마자 후작은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은밀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리고 멍청한 병사 덕에, 영지전이 진행되고 있을 때 몰래 이곳으로 진입하는 것에 성공했다.

오늘만 지나면 계획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후작은 몸을 떨었다.

'그렇게만 되면 저 소름 끼치는 녀석과도 안녕이다.'

그때 심복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각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저 마법사 놈을 제국에 고발하고 없던 일로 하시는 것이……."

짜악!

후작이 심복의 뺨을 내리쳤다.

"내 아들이 죽었다! 무슨 계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안이라는 놈에게 휘말려 죽었단 말이다! 그런데 그놈이 공작가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다니는 꼴을 봐야 하는 내 심정을 네가 아느냐!"

광기에 차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후작의 기세에 심복은 붉게 부어오른 뺨을 만질 생각도 못 하고 엎드려 벌벌 떨었다.

"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후작이 고개를 돌려 마차와 그 뒤에 연결되어 있는 장치를 보았다.

장치에서는 끊임없이 냉기가 주위로 퍼지고 있었다.

마차에서 후작과 대화를 나눴던 인물은 죽은 자를 부리는 사령 마법사 네크로맨서(Necromancer)였고, 장치 안에 있는 것은 스테판 유제프의 시신이었다.

"저놈의 말에 따르면, 마법진을 발동시킬 만한 피와 시체가 더 필요하다고 한다. 멍청한 두 백작 놈들이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안달이 나 있을 테니 충분할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은 후 카몰 후작은 제국에서 벗어나 외딴섬에 혼자 산다는 네크로맨서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를 불러들여 스테판을 죽음에서 불러올 계획을 세운 것이다.

부인도 일찌감치 잃고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그에게 스테판이 없는 삶은 아무 의미 없었다.

철저하게 금지된 마법인 사령 마법을 사용하는 자를 제국 안에까지 끌어들였으니 황제의 분노를 살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염려해서 이미 재산도 다 분산시켜 빼돌려 놓은 상태였다.

아들과 함께 어느 조그만 왕국으로 망명해서 떵떵거리며 살기에는 차고 넘치는 재산이었다.

아들이 죽은 순간부터 카몰 후작은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지금에 와서는 오로지 아들을 살려 내야 한다는 광기와 강박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냉기가 쏟아지고 있는 장치 곁으로 가서 카몰 후작이 낮게 읊조렸다.

"스테판, 내가 너를 꼭 살릴 것이다."

그리고 충혈된 눈과 부들거리는 주먹을 하고 다시 말했다.

"너를 살리고, 시안 그놈을 이곳에서 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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