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눈물이 흐르는 땅 (5)
"어느 측이든 향후 10년 동안 지금 잃어버린 것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보는가, 장군?"
황자가 베이카 장군에게 물었다.
"10년이라……. 어렵다고 봅니다. 특히나 저런 경우에는 더 쉽지 않지요."
우리의 시선이 전장의 한가운데로 향했다.
케이신리 측의 핵심 전력인 괴각 기사단이 자신들의 무력만 믿고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다, 팔스타인 측이 미리 구성해 놓은 방진에 들어가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법사들이 계속해서 상황을 전하고 있었다.
"괴각 기사단, 돌파 시도 중."
"팔스타인 측에서 괴각 기사단에 항복 권유 중인 듯."
"괴각 기사단, 재차 돌파 시도."
평시도 아니고 전장에서 항복에 응하는 것은 기사 된 자로 큰 불명예다.
첫날의 기습부대야 출신 기사단을 숨기고 전장에 참여했기에 가능했었지, 그들도 이렇게 기사단의 이름을 걸고 나선 전투에서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제대로 된 충돌이 발생하기 전인 첫째 날과는 다르게 지금은 이미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상대편에 대한 적의가 넘치고 있을 것이다.
마법사와 기사는 특히나 그 힘을 마음껏 발휘했으니 원망과 증오도 더 많이 받고 있을 것이다.
팔스타인 지휘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도 기사단을 포위하고 있는 병사들은 아마 그들을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없을 것이다.
오러를 실은 검으로 말 위에 올라앉은 괴각 기사단이 자신들을 향하는 창을 열심히 쳐 내고 있었지만, 아마 오러와 체력이 다하면 병사들의 창이 그들의 몸을 꿰뚫을 가능성이 컸다.
"제대로 된 기사를 키우는 데에는 10년의 시간도 부족하다 하는데 이렇게 많이 죽어 나가다니……."
황자가 탄식했다.
"그나마 기사와 영민은 매년 일정 수가 나오기라도 합니다만, 마법사 같은 경우는……."
베이카 장군의 말을 다시 통신 마법사가 끊고 들어왔다.
"11번 언덕에 있던 팔스타인 측 보병부대와 케이신리 측 보병부대 간 전투 개시, 다수의 마력 반응 감지, 최소 다섯 이상의 마법사가 있을 것으로 추정."
"12번 언덕에 있던 케이신리 측 부대가 11번 언덕으로 급히 이동 중. 지원부대로 판단됨."
이번에는 마법사들 간의 전투가 펼쳐지려는 참이었다.
베이카 장군의 말대로 기사와 영민은 통치를 잘하면 그나마 매년 일정 수 이상 배출할 수 있지만, 마법사는 그렇지 않았다.
어찌 보면 운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작용해야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 마법사였다.
그러니 이들이 이렇게 많이 죽는 것은 국가적인 손실이라 할 수도 있었다.
'내가 상관할 게 아니긴 하지.'
뿌옇게 먼지가 피어오르는 전장을 연신 바라보고, 전달되어 들어오는 통신에 하나하나 신경을 쓰는 베이카 장군이나 2황자와는 달리 나는 이 영지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다른 가문의 이해득실에 따라 전장에 온 기사와 마법사는 본래 소속된 가문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몸을 사려 가며 싸울 것이 분명했다.
결국 케이신리와 팔스타인, 두 지방의 능력만으로 겨뤄야 한다는 것인데, 고만고만한 백작들의 싸움이니 아마 한쪽이 완전히 패배하거나 밀리는 경우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마지막 결정은 3명의 영지관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진다고는 하지만 아마 2황자의 의견이 가장 큰 무게를 지니고 있을 것이니 그에 맞추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 영지전보다는 이곳까지 오는 길에 우리를 습격했던 사교의 정체와 카몰 후작이 날 관리관으로 적극적으로 추천했다는 사실이 영 신경 쓰여…….'
"괴각 기사단, 포위망 돌파 성공, 잔여 인원 20명 이하. 포위망을 담당했던 보병부대 1/3 궤멸."
"11번 언덕, 마법사들 간의 전투로 격화됨. 올빼미 연락 두절. 방어 마법 전개 중으로 예측."
상황 전파를 위해 보내졌던 통신 마법사가 방어 마법을 쓰기 위해 통신을 보내지 못한다는 전파를 들은 베이카 장군의 얼굴이 굳었다.
"어느 정도로 싸우고 있길래……. 일단 그 올빼미에게 최대한 자신의 안위를 중시하라고 전파하라."
"11번 올빼미, 11번 올빼미.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할 것. 상황 종료 후 연락할 것. 이상."
확실히 피를 봐서 그런지 더욱 격렬하게 변하고 있었다.
"4번 언덕, 케이신리 측 기병부대, 팔스타인 측 궁병 매복에 걸려 전멸."
"9번 평야, 팔스타인 측 경장보병, 케이신리 측 마법사와 공멸. 경장보병 70 이상, 마법사 둘."
"괴각 기사단 잔여 인원, 6번 언덕과 11번 언덕 사이의 협곡으로 진입. 재정비 중으로 예상."
여러 명의 통신 마법사들이 빠르게 상황 전파를 하면 그걸 전해 들은 참모들이 실시간으로 앞에 놓인 지도에 부대 배치와 인원 구성에 맞춰 말을 옮겨 놓았다.
"흠……."
두 진영이 비등비등할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먼저 공세를 시작했음에도 팔스타인 쪽이 조금씩 밀려나는 형세였다.
팔스타인 측이 영지전 초반, 창공 기사단을 기습적으로 움직여 요충지인 6번 언덕을 장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케이신리 측 괴각 기사단이 필사의 돌격으로 그곳을 빼앗은 효과가 점점 나타나고 있었다.
비록 그곳에 진영을 구축하자마자 괴각 기사단은 다른 곳을 지원하러 갔다가 포위망에 갇혀 궤멸 직전의 상황에 이르렀지만, 전장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기가 막힌 한 수였음이 분명했다.
"시찰 때 케이신리 쪽 기사들이 더 강력해 보이던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인가."
황자가 나름의 분석을 내놨다.
"창공 기사단도 분투했습니다. 다만 팔스타인 백작이 기사단을 보호할 다른 부대 없이 먼저 기사단을 6번 언덕으로 움직인 것이 패착일 것입니다. 상대방의 기사단과 자신의 기사단의 차이를 생각하지 못하고 마음이 급해진 것이지요."
내 생각과 일치했다.
창공 기사단은 궁술에 일가견이 있는 기사단이기 때문에 공격에 있어서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적을 갉아먹는 방법이, 방어에 있어서는 벽이 되어 줄 부대 뒤에서 지원하는 편이 더 강력한 것인데 팔스타인 백작이 오로지 요충지를 점령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다른 부대 없이 창공 기사단만으로 6번 언덕을 점령 및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올라올 수 있는 길이 한정되어 있고 지형지물 자체가 벽이 될 수 있는 산악 지형이라면 모를까, 주위보다 조금 높은 형태인 6번 언덕은 케이신리 측 괴각 기사단의 돌격을 막아 주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때문에 창공 기사단이 분전했음에도 요충지를 빼앗겼고, 그 결과가 슬슬 나타나고 있었다.
"지형적 우위를 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방어해 낼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베이카 장군의 말처럼 케이신리 측이 6번 언덕을 점령한 이후 팔스타인 측의 집중 공세가 이어졌지만, 언덕 위에 올라서 자리를 잡은 케이신리 진영의 병사들은 굳건히 그곳을 지켜 내고 있었다.
"팔스타인 측 병력, 11번 언덕으로 집결하는 듯."
마법사의 말에 베이카 장군과 내 눈이 지도의 11번 언덕으로 향했다.
6번 언덕이 주위의 평야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요충지라면, 11번 언덕은 주위의 험준한 산에 비해 고도가 낮아 근처에서 유일하게 병력이 통과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양측 모두 이동 거리의 이점을 가져가기 위해 마법사가 포함된 보병부대를 보냈다가 맞붙은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했다.
"팔스타인 측에서 6번 언덕을 주고 11번 언덕을 가져가기로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내 말에 황자가 답했다.
"마법사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 병력을 밀어 넣는 것은 위험하지 않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차지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나 봅니다."
아무래도 이 11번 언덕을 둘러싼 전투가 영지전의 향방을 가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번 올빼미는 연락 두절이니 상황을 알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교전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통신 마법사를 이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어떤가?"
어지간히 상황이 궁금했는지 물어보는 황자의 말에 베이카 장군이 딱 잘라 대답했다.
"불가합니다. 양측 모두에게서 적으로 오인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게다가 전장에서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지양해야 합니다."
-노인네, 강단이 있네.
'그러네. 황자의 말이면 고민해 볼 법도 한데 단숨에 칼같이 잘라 버리네.'
베이카 장군이 진정한 군인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황자도 자신의 말이 경솔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는지 얼른 사과했다.
"미안하네. 내가 쉬이 생각했네."
"관리관 역에 충실하신 황자마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저는 아래에 내려가 있는 병사들을 통솔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용서하소서."
꼿꼿해 보이기만 하던 베이카 장군의 완곡한 칭찬과 배려에 황자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11번 올빼미와 연결 재개. 상황 전달 바람."
때마침 11번 언덕에 배치되어 있던 마법사와의 연결이 재개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케이신리 측 마법사와 팔스타인 측 마법사 간의 격전. 양측 보병부대 모두 1/2 이상 사망. 마법사도 1명 이상 사망한 것으로 추정. 주위 마나 흐름 안정되지 않음."
통신을 들은 베이카 장군이 말했다.
"첫 번째 교전에서 11번 언덕을 차지하지 못했으니 결국 다시 힘 싸움으로 흐를 것 같습니다."
지도에는 여러 모양의 색이 다른 말이 11번 언덕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말 위에 붙어 있는 부대 편성만 대충 더해도 1,000명 가까웠다.
양측은 각각 2,000명으로 전장에 총 4,000명이 있고 전사한 인원과 움직이지 못하는 부대도 있을 테니, 끌어모을 수 있는 인원은 악착같이 모아서 11번 언덕으로 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지전 2일 차, 빼앗긴 요충지는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팔스타인 측과 이 기세 그대로 밀고 나가 승기를 잡고 싶어 하는 케이신리 측이 11번 언덕에서 충돌하려는 순간, 통신 마법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11번 언덕, 대규모 마력 반응! 11번 올빼미! 응답해! 11번 올빼미와 연락 두절!"
"4번 올빼미 연락 두절!"
"6번 올빼미 연락 두절!"
11번 언덕 근처에 배치되어 있던 군 소속 마법사들과의 통신이 되지 않는다는 보고가 연속적으로 들어왔다.
쾅
베이카 장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뒤로 거칠게 던지고 천막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와 황자도 급하게 일어나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저건 대체 무슨……."
멀리 보이는 11번 언덕에서 주위의 산을 작게 보이게 할 정도로 거대한 검은 빛기둥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11번 언덕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도 같은 빛기둥이 오르기 시작했다.
"장군, 전령을 보내도록 하지."
"영지전을 통틀어 두 번밖에 보낼 수 없는 관리관의 전령입니다. 신중해야 합니다."
개입을 막고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전령은 양 진영에 동시에 딱 두 번만 보낼 수 있었다.
그 이후에 보내지는 전령은 상대방 측의 위장 전술로 알고 죽여도 아무 책임을 묻지 않았다.
베이카 장군이 고민하는 동안, 세 번째 검은 빛기둥이 다시 11번 언덕 근처에서 생성되었다.
"양측에 전령을 보내라! 빠르게! 무슨 일인지 알아내!"
다급하게 베이카 장군이 외치자, 얼마 되지 않아 4군단 표식을 단 인원들이 말을 타고 양측의 수장들이 있는 군영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투브가 그쪽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말했다.
-뒤틀린 마법의 냄새가 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