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44화 (44/180)

죽음에서 일어난 자 (3)

"각하! 검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언덕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성공한 것인가!"

카몰 후작이 헐레벌떡 은신처에서 나와 저 멀리 언덕을 바라봤다.

부하들의 말처럼 정말 검은 물질이 줄어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어째서 사령 마법사도 보이지 않고 스테판도 보이지 않는 것이냐!"

후작이 역정을 냈지만,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각하, 언덕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기사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언덕의 안쪽에서 사람의 형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저딴 놈들은 내 알 바 아니다! 내 아들은 어찌 되었냔 말이다!"

"계십니다! 공자님이 계십니다!"

오러를 눈 쪽으로 운용해 시야를 멀리하고 있던 기사가 외쳤다.

기사처럼 멀리 볼 수 없는 후작이 그 기사에게 바짝 붙어 물었다.

"거짓이 아니렷다? 내 아들이 살아난 것이 분명한 것이냐!"

"공자님을 어릴 적부터 봐 온 저입니다. 확실합니다. 공자님이 아래에 계십니다."

후작이 부리나케 심복들을 재촉했다.

"말을! 말을 준비하라! 아들이 돌아오는데 아비가 맞아야지! 어서!"

말이 준비되자 후작은 말고삐를 채 가듯 잡아 재빠르게 내달렸다.

'스테판이 살아났다! 그 사령 마법사 놈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어!'

얼굴로 들이치는 바람을 맞으며 후작은 생각했다.

아들을 본다는 생각에, 누군가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후작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후작의 눈에 저 멀리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죽었던 아들이 두 다리로 땅을 디디고 서 있었다.

스테판의 뒤로 핏기 하나 없이 초점을 잃고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난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괴한 몰골이어서, 움직이는 시체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스테판의 근처로 간 후작이 급히 말을 세우고 뛰어내렸다.

등자에 발이 걸려 얼굴을 땅에 박을 뻔했지만 그런 것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스테판, 돌아왔구나! 아비가 여기 있다! 아비가 여기 있어!"

여전히 눈 전체가 검고 목과 얼굴 여기저기에 검은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온 스테판이었지만, 후작이 보기에는 그저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아버지?"

스테판의 입이 열렸다.

틀림없는 스테판의 생전 목소리 그대로였기에 후작이 눈물을 철철 흘리며 답했다.

"그래그래, 아비다. 어린것이 저편에서 얼마나 외로웠느냐."

"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사령술사는 무엇이고, 이곳은 어디이며, 저는 어떻게 살아난 것입니까?"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다, 내 다 알려 주마. 우선 나를 따라가자. 이곳은 보는 눈이 많구나."

그제야 후작의 뒤를 따라온 심복들이 후작과 스테판의 앞에 도달했다.

모두 섬뜩하기 그지없는 스테판을 보고 놀라 숨을 들이마시고 입에서 신음이 나올 뻔했으나, 감히 후작의 앞에서 그런 짓을 하는 용기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는 어디로도 가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말씀하시지요."

"스테판! 사령 마법이다! 사령 마법! 누군가 너와 내가 이렇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다면 경을 친단 말이다! 어서 가자!"

스테판이 손짓하자 초점 잃은 눈으로 뒤에 서 있던 시체들이 후작 일행과 스테판을 둥글게 둘러쌌다.

그들의 몸 주위로 뿜어져 나오는 죽음의 기운에 후작 일행이 타고 온 말들이 눈을 까뒤집으며 거품을 내뿜었다.

"제 군대를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저는 어디로도 가지 않습니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모를 스테판의 검은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어렸다.

"언덕의 안쪽으로 가시지요. 안쪽에서는 누구도 우리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스테판이 발걸음을 안으로 향하자 시체들도 진형을 무너트리지 않고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체들이 다가오자 모두 그것들과 접촉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일행은 울며 겨자 먹기로 스테판의 뒤를 따라 움직여야만 했다.

후작은 아들이 멀어질세라 뛰어가 아들 옆에서 걸었다.

말없이 걷기만 하던 후작이 이상함을 느끼고 스테판에게 물었다.

"스테판, 너를 살린 사령 마법사는 보지 못했느냐? 키가 크고 빼빼 마른 녀석이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군대라고요."

후작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스테판을 봤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저를 살리려던 아버지의 노력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 그 사령 마법사 놈이 제 몸을 탐하고 있던 것은 모르셨습니다."

후작의 눈이 떨렸다.

그런 후작을 무시하고 스테판의 말이 이어졌다.

"다행히 저는 놈이 생각했던 것보다 먼저 깨어나 놈을 죽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멍청한 사령 마법사 놈은 자신의 힘까지 제게 넘겨주더군요."

"그, 그렇다면 이 사령 마법이……."

스테판이 웃었다.

"아버지, 기뻐하십시오. 아버지의 아들은 부분 역행 마법과 사령 마법, 두 가지를 모두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후작이 아들의 어깨를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없애라! 당장 없애! 네가 사령 마법을 쓰는 것을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어서 가자, 이곳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자. 어서!"

후작이 아들의 몸을 잡고 흔들었지만, 스테판의 몸은 미동조차 없었다.

"한적한 곳이라니요. 전대미문의 힘을 가졌는데 제가 왜 피해 다녀야 합니까? 일단 시안 그놈부터 죽여 버릴 것입니다!"

"스테판! 정신 차려라! 사령 마법은 대륙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해!"

눈앞에서 소리 지르는 후작을 본 스테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버지 같은 범인(凡人)은 이해하지 못하십니다. 저를 다시 살려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짜악!

평생을 키우면서 손 한번 대지 않았건만, 후작은 스테판의 말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거세게 뺨을 올려붙였다.

스테판의 고개가 돌아갔지만, 그의 창백한 뺨은 붉게 달아오르지도, 붓지도 않았다.

"왜 이 아비의 마음을 몰라주는…… 커헉!"

카몰 후작은 말을 잇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등 뒤에서 시체 병사 하나가 창으로 그의 배를 찌르고 있었다.

맞은 뺨을 쓰다듬던 스테판이 죽어 가는 아버지의 앞으로 다가왔다.

"생각해 보니 말입니다, 제가 가진 힘이 인간의 것을 뛰어넘었는데 굳이 인간의 관계에 얽매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스……테파…… 안 된다…… 피하거……."

"제게 첫 번째 삶을 주시고 이렇게 두 번째 삶을 주신 것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제 방식의 삶을 살겠습니다."

후작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후작의 일행이 그 모습을 보고 벌벌 떨었다.

스테판의 등 뒤에는 어둠이 넘실거렸다.

"자,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해."

***

"한 무리의 인원이 말을 타고 11번 언덕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언덕의 안에 있는 숲으로 사라진 것으로 관측됩니다."

말이 전해지자마자 케이신리 백작과 팔스타인 백작이 서로에게 삿대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놈! 몰래 사람을 보내면 모를 줄 알았느냐? 어서 빨리 사악한 의도를 고백하고 죄를 빌어라!"

붉은 망토의 팔스타인 백작이 흰 망토의 케이신리 백작을 향해 소리쳤다.

"더러운 입 다물라! 그대의 천인공노할 짓을 모두가 다 아는데, 어느 안전이라고 눈을 부라리며 거짓을 고하는가!"

케이신리 백작도 지지 않고 맞섰다.

둘이 그르렁대는 것을 보고 있던 황자가 베이카 장군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되어 가는가?"

"아직도 근방에 있던 마법사들과의 통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휴전 명령은 각 진영에 전달된 상태이며 병력이 조사를 위해 접근 중입니다."

"그들의 안전은?"

베이카 장군이 단호하게 말했다.

"최대한의 준비를 하고 접근하라는 지시는 내렸지만,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릅니다."

2황자가 내 눈치를 살짝 보더니 말을 받았다.

"스테판 유제프가 그 안에 있다는 말은 어찌 되었는가."

"확인된 것이 없습니다."

사령 마법은 나도 들어만 보았지,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마법이었다.

죽은 자를 일으키고 산 자를 눕힌다는 마법.

아주 예전에 어느 사령 마법사가 죽은 자들을 이끌고 대륙을 휩쓸었다는 전설 아닌 전설만 내려올 뿐이었다.

물론 그 후에도 가끔 사령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들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순리를 거스르는 마법이라는 것과 마법을 시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너무 흉악한 것들이 많아서 사령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국가에서 추방당하거나 사살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일단은 마법이니까 사령 마법도 내 주위에서는 위력이 약해질까?'

-아마도? 하지만 확신은 못 해. 사령 마법은 나도 들어만 봤지, 겪어 본 적 없는…… 알 수 없는 영역이야.

'문제는 마법사 하나만이 아니라는 건데…….'

마법사들은 일단 마나를 변환해서 자신이 구상한 마법으로 펼쳐 내야 하므로, 대부분의 마법사는 동시에 여러 가지 마법을 시전하는 것이 힘들었다.

마법사가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하기 힘든 이유이자 전장에서 마법을 시전 중인 마법사에게 공격이 집중되는 이유였다.

따라서 마법사를 단독으로 운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마법사를 중심으로 해서 호위의 역할을 할 다른 부대가 같이 움직이는 것이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러나 사령 마법사의 경우는 시체를 일으켜서 끊임없이 자신의 군세를 불리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자신이 만들어 낸 시체가 사람을 죽이면 또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워서 자신의 말로 쓰는 행위가 가능했기 때문에, 전설에 등장하는 그 사령 마법사의 군대는 온갖 국가의 갑옷을 입은 시체 천지였다고 한다.

시체는 사령 마법사의 수준이 높을수록 인간의 움직임과 비슷한 움직임을 가진다고 하니, 수준 높은 사령 마법사가 군사적 지식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죽음의 군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테판은 사령 마법사가 살려 낸 건가? 그렇다면 살아난 시체의 지능은 어느 정도지? 말을 하고, 가지고 있던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정도인가?'

1,000명 정도의 인원이 11번 언덕에서 죽고 지금은 사령 마법사의 군대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죽음과 공포를 모르는 존재들이다.

더군다나 11번 언덕의 중요성을 생각해 봤을 때, 그곳에 있던 병사들이 어중이떠중이들은 더욱 아닐 것이다.

"몬트라우 백, 걱정할 것 없네. 이미 4군단 인원들이 조사를 하러 갔으니 곧 안정되겠지."

"마마, 그들을 물리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어찌하여 그러나?"

내가 베이카 장군을 보고 다른 백작들 모르게 내 앞 탁자를 톡톡 쳤다.

베이카 장군이 금세 알아듣고 자연스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황자 역시 눈은 아직도 싸우고 있는 두 백작을 향해 있지만, 귀와 몸은 내 쪽으로 향해 있었다.

내가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현재 4군단은 그라스 지방의 치안권 이양을 위해 많은 인원이 빠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생사 확인이 되지 않는 통신 마법사 하나하나가 굉장히 귀중한 자원일 것입니다."

베이카 장군이 낮게 침음을 흘렸다.

"여기서 병력을 1명이라도 잃으면 안 됩니다. 사령 마법은 죽은 자를 일으키는 마법이라 합니다. 정말로 사령 마법사가 있다면 병력이 하나 손실되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령 마법사의 병력에 1명을 보태 주는 것입니다. 일단 일정 거리를 두고 11번 언덕을 포위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포위만 하자고요? 그동안 사령 마법사가 도망칠 위험이 있습니다. 아직 내부에 있을 때 죽여야 합니다. 얼마간의 희생은 항상 있습니다."

베이카 장군과 의견이 갈렸다.

누가 더 합당한 의견을 제시했는가를 시시비비로 가릴 새도 없이 우리도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시체들이 언덕을 내려오고 있다 합니다!"

한 번을 죽였는데, 두 번을 못 죽이랴 (1)시체들이 언덕을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에 황자가 두 백작을 자신에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이미 말했듯이, 영지전은 휴전이다. 이곳의 작전권은 베이카 장군이 가지게 될 것이니 양 진영은 장군의 통제를 따르라."

하는 말과 함께.

베이카 장군이 황자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재빠르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사령 마법사의 위치는?"

"마나의 움직임은 계속 느껴지고 있으나 워낙 대규모의 인원이 움직이고 있다 보니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시도 중입니다."

"저들이 향하는 방향은 어디인가?"

"현재 11번 언덕을 거의 내려왔다 합니다."

11번 언덕은 케이신리 진영과 팔스타인 진영 어디로도 향할 수 있는 길목이다.

이들의 발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작전의 방향도 바뀔 것이다.

"케이신리 측이라 합니다!"

"절대로 접촉하지 말라는 지시를 케이신리 진영에 전달하고, 양측의 궁병과 마법사를 최대한 빠르게 11번 언덕 주위로 집결시키라고 전하라. 저들이 평야 지대로 나오기 전, 원거리 타격을 통해 일차적으로 분쇄한다."

"예!"

동시에 황실 측의 마법사들과 통신 마나 파장을 맞춘 케이신리와 팔스타인 측의 통신 마법사들이 전해 오는 상황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2황자가 탁자에 앉아 머리를 짚었다.

"사교에 이어 사령 마법이라니……. 이 무슨 끔찍한 변고란 말인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제는 내가 알고 있는 과거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거야?'

-네가 너무 많이 들쑤신 것 아니야?

'내가 안 움직였으면 너는 아직도 조그만 강아지 몸이었을 거야. 조용히 해.'

내 일침에 투브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창공 기사단, 시체 군대 근처로 접근. 공격 중."

그래도 팔스타인 백작이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는지 창공 기사단을 바로 출격시켜 공격하고 있다는 상황이 전파됐다.

'숫자가 얼마 되지는 않지만, 화살에 오러를 실어 날려 보낼 수 있는 창공 기사단이다. 어느 정도의 타격은 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상황은 내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시체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더 속도를 올려 케이신리 진영을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상황을 전파하던 마법사가 말을 잇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말하라!"

베이카 장군이 일갈했다.

"차, 창공 기사단과 함께 있는 마법사의 말에 의하면, 시체들의 선두에 서 있는 것이 카몰 후작인 것 같다고……."

"무슨 소리인가!"

2황자가 마법사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카몰 후작이 여기서 왜 나오는 게야! 다시 한번 확인해!"

황자의 분노에 마법사가 진땀을 흘리며 다시 한번 통신을 시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푸른 글자가 허공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수, 수도에 있을 때 본 카몰 후작이 부, 분명하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아들, 스테판 유제프가 죽은 말을 타고 있는 모습도 목격했다고 합니다."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다.

다들 얼이 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 때, 쾅! 하는 소리가 났다.

베이카 장군이 책상을 내려친 소리였다.

"시체 중 누가 있고, 사령 마법사가 누구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제국의 적이다. 우리는 제국을 수호하는 제국군이다. 그것만을 명심하라."

비장한 노장의 말이 혼란스러움에 눈빛이 떨리던 병사들에게 침착함을 가져왔다.

"케이신리 측 진영을 최대한 뒤로 물리라고 전하고 동원 가능한 기사와 마법사, 궁병은 모두 시체들을 막게 하라고 전하도록. 그리고 절대로 보병부대를 투입하지 말라고 전해! 기병여단은 어떻게 되었나?"

"전령이 갔으나 시간이 조금 걸릴 것입니다."

2황자가 장군에게 물었다.

"어째서 기사들만을 쓰는 것인가? 아직 남은 부대들이 많지 않나."

"그들은 상비군이 아닙니다. 징집됐을 뿐 일부를 제외하고는 평범한 영민들입니다. 준비 기간 동안 훈련을 받았겠지만, 그것은 같은 인간과의 전투이지 시체와의 전투가 아닙니다. 공포심에 붕괴할 수 있기 때문에 애초에 투입하지 않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기사들이 막고 뒤에서 마법사와 궁병이 지원해서, 기병여단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끈 뒤에 한 번에 처리하려 합니다."

내가 물었다.

"그들만으로 막기에는 숫자가 너무 부족하지 않나요?"

어제오늘, 양일간의 전투로 양측의 핵심 전력인 기사와 마법사가 절반 이상 전투 불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베이카 장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잘 버텨 주어야지요."

***

"막아라! 이곳이 붕괴되어서는 안 된다!"

"으아아! 안 돼!"

병사 하나가 시체들에 의해 끌려갔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나를 향해 뻗어 오는 시체들을 향해 검을 휘둘러야 했으니까.

주인 잃은 팔과 다리가 허공과 땅을 굴렀지만, 신체 일부분을 잃어버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시체들은 끝없이 우리를 향했다.

서걱!

뒤에서 무언가 잘리는 소리가 났다.

"몬트라우 백, 조심하지 않고."

온몸에서 오러를 뿜어내고 있는 2황자가 검에 묻은 시체의 육편을 털어 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동시에 투브가 시체 하나의 머리를 뭉개 버렸다.

그러나 머리가 뭉개진 시체는 발작하며 손과 다리를 마구 움직여 대고 있었다.

-이게 사령 마법이야? 지독하기 짝이 없잖아!

'그러게. 끝이 없어.'

관리관의 진영이 있던 언덕 아래로 눈에 초점을 잃은 제국군 병사, 팔스타인 진영의 병사, 케이신리 진영의 병사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베이카 장군의 대응책은 실패했다.

누구도 사령 마법을 상대해 본 적이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시체들의 이동을 지연시키던 케이신리 쪽의 병력이 잡아먹혔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 시체들이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통에 선두에서 시체들을 막던 기사들이 죽고 되살아났다.

그리고 되살아난 기사들이 마법사와 궁수를 사냥하듯 따라가 죽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예 중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인원들이었고, 살아 움직이는 시체가 된 뒤에는 누구보다 파괴적으로 케이신리의 진영을 돌파해 들어갔다.

죽음의 공포도 느끼지 않고 쉴 필요도 없는, 완벽한 이상에 가까운 군대.

그들과 전투한 지 1~2시간 만에 케이신리 측 진영은 완벽히 붕괴됐고, 땅에 머리를 댄 자들은 다시 일어나 방금 전까지 자신의 옆에 있던 동료를 향해 무기를 겨눴다.

그때가 돼서는 도와주러 온 팔스타인 측의 병사들도 죽거나 도망치기 바빴고, 팔스타인 백작은 포위망을 공고히 해도 모자랄 판에 살아남은 병력을 모아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2황자가 분개하며 팔스타인 백작에게 돌아오라는 통신을 하라고 마법사를 닦달했지만, 그쪽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기병여단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체들의 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어서 손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병여단이 움직였으니 제 휘하 병력이 이곳으로 오고 있을 것입니다. 버텨야 합니다!"

흐르는 피 때문에 한쪽 눈을 감고 있는 베이카 장군이 우리에게 말했다.

'온다 해도 사령 마법사를 죽일 수 있을까? 이대로 끝나는 것 아닌가?'

그때, 당장이라도 우리가 있는 곳을 점령할 것처럼 들이닥치던 시체들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3명의 사람이 우리를 향해 걸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셋 모두 내가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스테판 유제프……."

가운데 서 있는 것은 모습이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분명 모의 전투에서 나에게 죽은 스테판 유제프였다.

그리고 스테판을 기준으로 왼쪽에 서 있는 것은 팔 하나를 잃은 케이신리 백작, 오른쪽에 서 있는 것은 뒤편이 보일 정도로 배에 큰 구멍이 뚫린 카몰 후작이었다.

케이신리 백작과 카몰 후작의 눈은 흰자위만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2황자마마가 이곳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스테판이 말했다.

2황자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2황자다. 그대는 카몰 후작의 장자인 스테판 유제프가 맞는가?"

"그렇습니다, 마마. 인사를 드리기에 적합지 않은 곳이나 이렇게 인사드리게 된 점 용서하셨으면 합니다."

스테판이 능글맞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격조 있게 인사했다.

"이 천인공노할 놈!"

황자가 옆에 있던 병사의 검을 뺏어서 스테판을 향해 던졌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날아가는 검에 실린 오러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스테판에게 검이 직격하려는 찰나, 검이 잠시 멈추더니 몇 초 전의 궤도로 돌아갔다.

그것을 보고 있던 모두가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쉬었다.

사령 마법에 이어 역행 마법까지.

2개의 특수 마법을 쓰는 자가 눈앞에 있었다.

"이런! 성질이 급하십니다, 황자마마."

고개를 들고 검을 옆으로 흘려 보낸 스테판이 말했다.

검은 한참을 날아가 어느 시체에 박혀 폭발했다.

"황자마마의 능력은 꽤 쓸모가 있을 것 같으니 제 오른팔로 삼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국은 곧 망국이 될 것이니 그렇게라도 이름을 남기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무엄하다!"

베이카 장군이 소리쳤지만, 스테판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으로 하나하나 사람들을 훑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시안! 시안 몬트라우 아닌가! 이곳에 있다더니 정말이었어!"

스테판의 뒤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뻗어 나왔다.

나를 향해 뻗어 오는 그것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오러로 베어 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린놈이 까부는구나.

투브가 거대해진 모습으로 스테판을 향해 쇄도했다.

놀라운 빠르기에 스테판도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퍼억!

하지만 투브의 묵직한 앞발에 맞아 부서진 것은 스테판이 아니었다.

카몰 후작의 몸이 뭉개진 채로 사정없이 바닥을 굴렀다.

그 광경에 몇몇 병사들이 토악질했다.

아버지의 몸이 뭉개져 바닥을 뒹구는데도 스테판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시안, 개새끼 관리는 잘해야지. 그대의 개가 내 아비를 죽이지 않았는가. 아니지, 이미 죽어 있었으니 상관없나?"

스테판이 시체들 쪽으로 몸을 날리며 말했다.

"내가 널 직접 상대할 필요는 없겠지, 시안. 망자의 군대 속에 파묻힌 네 시체를 내가 직접 꺼내서 되살려 내 발을 핥게 해 주마."

투브가 계속해서 스테판을 따라 들어가려 했으나, 시체들이 필사적으로 투브의 털을 악착같이 붙잡고 매달리는 통에 쉽지 않아 보였다.

결국 몸을 작게 하고 내 옆으로 돌아온 투브가 분했는지 숨을 씩씩 내뱉었다.

시체들 사이에서 스테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다들 살아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아주 간절히요, 하하하하!"

스테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체들이 다시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황자가 소리쳤다.

"놈을 보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 죽여야 해!"

그의 몸에서 다시 오러가 치솟았다.

"마마! 자중하시옵소서! 흥분해서는 아니 됩니다!"

베이카 장군이 침착하고도 엄한 목소리로 황자에게 말했다.

"근처에 마을들이 있다! 저놈이 그곳을 덮치면 죄 없는 양민들이 희생된다! 그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장군! 또한 병력이 우리를 구하러 온다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맞는 말이었다.

우리를 구하러 오다가 망자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내가 황자를 거들었다.

"황자마마의 말이 맞습니다! 남은 인원이라도 데리고 돌파해야 합니다!"

100명이 넘게 있던 관리관 진영의 사람들은 어느새 20명 이하로 줄었다.

말을 하는 순간에도 몇 명이 망자들의 무기에 찔려 쓰러지고 있었다.

스테판이 주위에 없어 그런지 시체들이 바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시각각 시체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황자의 몸에서 다시 한번 오러가 치솟았다.

필사의 돌격을 할 셈인지, 넘실대는 오러가 마치 끈적한 액체처럼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후……."

2황자와 베이카 장군에게 말했다.

"마마, 장군. 살아 나간다면 이 자리에서 보신 것은 다 잊으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시겠습니까?"

"이 판국에 무슨 소리이십니까, 공자님!"

베이카 장군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봤지만 2황자는 그렇지 않았다.

황자는 수도에 있으면서 그동안의 내 활약상을 들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직접 만나 본 내가 범상치 않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고.

황자가 내 눈을 보고 빠르고 확실하게 말했다.

"제국의 2황자, 바그안트 서비어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그대가 원한다면 나를 제외한 모두를 살인 멸구하여 그대의 제안을 실행할 용의가 있다."

"그렇게까지 하실 일은 없으면 좋겠습니다."

오른손에 검을 들고 왼손을 손바닥이 위로 가게 폈다.

왼손에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몇 개의 마법 술식이 빠르게 전개되더니 거대한 화염이 왼팔을 휘감았다.

"스테판은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길을 뚫겠습니다."

죽은 자가 설치다니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내 첫 복수의 대상이 되살아나다니, 시작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는 생각에 이가 갈렸다.

시체들을 향해 불을 쏘아 보내면서 조용히 혼잣말했다.

"그래, 한 번 죽이기에는 아쉬운 새끼였어. 더 처절하고 고통스럽게 지져 주마."

한 번을 죽였는데, 두 번을 못 죽이랴 (2)손에서 나온 불이 사방의 시체들을 불태웠다.

불이 붙어 살점이 떨어져 나가 허연 뼈만 보이는데도 시체들은 우리를 향하는 발걸음을 멈출 줄 몰랐다.

"뼈까지 녹여 주마!"

왼손에 시뻘건 화염이 용암처럼 눅진하게 엉겨 붙었다.

그대로 크게 휘두르자 화염이 앞에 있던 시체들에 옮겨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살점만 녹이는 것이 아니라 뼈도 그대로 녹아 없어지는 것을 보고 일행의 얼굴에 희망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몇 번이고 화염을 만들어 시체를 녹이고 길을 뚫는 것을 반복했다.

이미 우리는 시체들의 한복판에 있어, 조금이라도 멈췄다가는 그대로 파묻힐 수도 있었다.

스테판을 죽이거나 우리가 죽거나,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서 있는 상황이었다.

어느 순간 목에서 피 맛이 느껴지고 급격한 피로감이 눈꺼풀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무리하지 마.

시체들의 공세가 잠시 멈춘 사이 숨을 고르고 있자 투브가 내게 와서 말했다.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도가 큰 마법을 쉬지 않고 연속으로 시전한 탓에 잠시 안정을 취할 시간이 필요했다.

마법이 흩어지지 않게 보조하는 데 오러를 모조리 운용하는 바람에 숨을 쉬기도 쉽지 않은 지경이었다.

호흡이 불편한 것에는 시체들의 냄새와 독한 기운도 한몫했다.

그나마 변환 인자가 내 몸 밖으로 나쁜 것들을 밀어 내 주고 있는지 나는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황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미 얼굴이 거무죽죽해져 있는 판이었다.

"고생했네. 잠시 쉬고 있게."

내가 호흡을 고르는 동안 황자가 일행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어 시체를 마구 베어 내기 시작했다.

황자의 움직임은 너무도 우아해서, 마치 숙련된 무희가 검무를 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그의 검이 지나간 곳에는 몸이 분리된 시체만이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서걱!

황자의 어깨에서 붉은 피가 솟았다.

"젠장!"

죽은 자 중에는 기사도 있고 마법사도 있었다.

아무리 황자라고 해도 멀리서 쏘아 대는 마법을 모두 베어 낼 재주는 없었다.

마법사가 쏘아 보낸 마법에 어깨를 베인 황자가 더욱 날뛰며 시체들을 처치해 나갔다.

고개를 들어 저편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끝이 안 보이게 몰려오던 시체들이었지만, 지금은 그 밀도도 낮아져 있었고 무엇보다 대열의 끝이 보였다.

'조금만 더 가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스테판을 죽이지 못하면 계속 쫓길 뿐이야.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시체들의 머리 위로 불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마! 제가 왔습니다!"

언덕 위에서 팔스타인 측 갑옷을 입은 궁병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화살을 시위에 메기고 있었다.

그 뒤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는 팔스타인 백작의 모습이 보였다.

"기회주의자 같으니! 숨어서 우리를 보고 있었던 것인가!"

베이카 장군이 격분해서 소리쳤다.

잃은 4군단 병력이 수백, 케이신리 병력은 1,000이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일찍 팔스타인 백작이 병력을 움직였다면 1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탈출을 하게 되면 위기에 빠진 황자를 돕지 않고 도망쳤다는 죄목이 씌워질까 봐 두려웠던 게지."

황자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것이 두려우면 나를 죽이면 해결될 문제건만 그럴 용기는 없는가 보지? 소인배 같으니."

팔스타인 백작의 의도야 어찌 되었건 불화살 덕에 시체들의 움직임이 많이 제한되고 있었다.

-놈이다!

투브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 시체가 된 기사들과 함께 스테판이 팔스타인 진형을 부수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앞에 있는 기사들이 팔스타인 측 병사들을 죽이면, 스테판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뻗어 나와 시체를 감싸 일으켰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은 역행 마법으로 되돌려 궤도를 바꿔 간단하게 쳐 내는 스테판의 모습이 보였다.

'놈은 내가 죽인다!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나도 내가 죽인다!'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온몸으로 피를 밀어 냈다.

내가 황자를 향해 말했다.

"마마, 놈을 죽이고 돌아오겠습니다."

황자 정도의 능력이라면 얇아진 포위망을 뚫을 정도는 될 것이다.

"훌륭하군. 저 사악한 놈을 죽이고 돌아오게. 그리고……."

그의 눈이 아직도 마법진과 술식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내 왼손에 닿았다.

"그것이 많은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주의하게. 아무리 황자라고 해도 목격자가 많으면 뒤처리가 힘들어지지 않겠는가."

"주의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게. 이곳은 내가 책임지도록 하지."

황자에게 고개를 까딱하고 투브 쪽으로 다가갔다.

투브는 이미 거대한 늑대의 모습을 하고 내게 등을 향하고 있었다.

-필요하지?

'어떻게 알았대?'

-복수를 위할 때만 빌려준다고 했잖아.

투브의 고개가 언덕에서 죽음의 기운을 내뿜으며 다시 군세를 불리고 있는 스테판을 향했다.

-아직 저놈에 대한 네 복수가 끝나지 않은 것 같아서.

투브의 등에 올라타자 윤기 나는 검은 털 아래로 탄탄한 근육이 느껴졌다.

모의 전투 때도 느꼈지만, 몸을 일으킨 투브의 등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새롭고 낯설었다.

평소 같으면 기분 좋은 느낌일 테지만, 지금은 어딜 둘러보나 신체 일부분이 없는 시체들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아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일단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견디질 못하겠어. 저 새끼는 사라져야 마땅해.

투브가 시체들을 마구 짓밟으며 스테판을 향하기 시작했다.

***

"쏴라! 접근하게 해서는 안 된다! 물러서지 마라!"

진땀을 흘리면서 병사들을 독촉하는 팔스타인 백작이 멀지 않은 곳에 보였다.

투브를 타고 옆으로 접근하니 그가 화들짝 놀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빠르게 말을 했다.

"병사들을 아래로 집중시켜 황자마마와 베이카 장군 일행을 데리고 빠져나가시오! 완전히 소멸시키거나 사령 마법사를 죽이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살아나니 병사들로는 대적할 수 없소!"

"공자님, 이, 이건 무슨…… 느, 늑대."

"어서! 후퇴한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를 방법은 황자마마를 무사히 구출하는 것뿐이오! 스테판은 내가 막아 보겠소!"

멍청한 표정을 한 백작에게 고함을 치고 투브에게 되살아난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피가 다 빠져나간 듯 새하얀 얼굴의 시체 기사들이 눈을 까뒤집은 채 말 한마디 없이 팔스타인 병사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오로지 팔스타인 병사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환희에 찬 스테판의 탄성만이 공기를 울리고 있었다.

"죽여라! 죽여! 너희의 주인을 위해 죽여라! 죽은 자는 내 군대가 될 것이다!"

전열이 붕괴되어 가는 병사들을 향해 내가 외쳤다.

"거리를 유지하라! 재정비하고 황자마마를 구출하는 것에 집중하라!"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리던 스테판의 검은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시안! 살아 있었다니! 직접 죽을 자리를 찾아온 것인가?"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는 스테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한 번을 죽였는데, 두 번을 못 죽이랴! 다시 죽여 주마!"

내 도발에 스테판이 기사들을 향해 손짓하며 날카롭게 외쳤다.

"죽여라! 저놈을 죽여!"

병사들을 찍어 누르던 시체 기사들이 내 쪽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그들이 타고 있는 말 역시 목이 없거나 상처가 있는 등, 기괴한 모습이었다.

'한 번에 스테판 앞으로 갈 수 있어?'

-발판을 만들면 되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과 같은 형태를 유지할 수 없을지도 몰라, 작아질 수도 있어.

'시체들을 다 뚫고 가는 건 시간이 너무 걸려. 어쩔 수 없어. 단숨에 가자.'

잠깐 사이에도 기사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가자!"

내 호령에 맞춰 투브가 스테판을 향해 몸을 날렸다.

기사들도 말에 발길질해 투브가 착지할 위치를 향했다.

타앗!

몸이 땅에 닿기 전, 투브가 허공에 마나로 발판을 만들어 그것을 딛고 다시 한번 도약했다.

서걱!

도약하는 투브를 향해 몸을 날리던 기사 하나의 목을 투브의 등에 타고 있던 내가 그대로 베어 버렸다.

"막아! 놈이 오지 못하게 해!"

고래고래 고함치는 스테판 때문인지 시체들이 스테판과 투브 사이를 빽빽하게 메우기 시작했다.

스테판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깝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한 번 정도의 도약이 더 필요했다.

'한 번 더 할 수 있겠어?'

-아까 발판을 만들고도 아직 작아지지 않은 게 기적이야!

'그럼 나를 날려 보내 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투브가 공중에서 몸을 뒤틀었다.

그런 투브의 몸을 밟고 스테판 쪽으로 뛰어들었다.

-저 냄새나는 놈 꼭 죽여!

날아가면서 왼손에 바람을 모아 뒤쪽으로 분사시켜 가속을 더했다.

"망자면 망자답게 돌아가!"

오러를 잔뜩 밀어 넣은 검을 스테판을 향해 연속적으로 휘둘렀다.

검이 공기를 찢는 섬뜩한 소리가 나와 스테판 사이를 메웠다.

"주인을 지켜라!"

스테판의 영창에 시체들이 순식간에 스테판을 보호하려고 달려들어 검격을 몸으로 막아 냈다.

시체의 몸이 부서지면 스테판이 부분 역행 마법을 써서 다시 살점이 뼈에 붙는 것이 반복되었다.

끝내 검격은 스테판의 몸에 닿지 못했다.

이가 나가 버린 검을 놓아 버리고 나를 향해 손을 뻗는 시체들을 피하고자 땅으로 향했다.

땅에 착지해서 몇 바퀴를 굴러 균형을 잡자마자 스테판을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아까 시체를 녹이던 화염을 다시 만들어 내 시체들 사이로 쏘아 냈다.

화염은 시체 몇 구를 녹이고 뻗어 나가 스테판이 타고 있는 말을 직격했다.

기우뚱하던 말이 옆으로 쓰러졌다.

"죽여! 저놈을 죽여!"

시체 마법사들이 나를 향해 마법을 쏘아 댔지만 이미 내 주변으로 온 마법은 변환 인자에 의해 위력이 형편없이 약해졌고, 그것들을 피하는 데에는 많은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게 접근하는 시체들에게 불덩어리를 박아 주면서 빠르게 스테판을 향해 접근했다.

"오지 마! 오지 마!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흔들림 없이 자신을 향하는 나를 보고 스테판이 경기를 하며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를 피해 정신없이 도망치던 스테판의 몸이 아래로 꺼졌다.

작은 낭떠러지를 보지 못한 것이다.

시체들이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거침없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나도 아래로 몸을 날렸다.

"어지럽네."

포위망을 뚫을 때부터 규모가 큰 마법을 연속으로 시전했음에도 충분히 쉬지 못하고 이곳으로 달려온 여파가 밀려오고 있었다.

카아!

동공이 텅 빈 시체 하나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래도 이런 것에 당할 정도는 아니지."

왼손에 있던 마나를 오른손으로 옮겨 마나 소드를 만들어 내어 시체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마나 소드에 닿은 시체는 그대로 녹아내렸다.

앞에서 마나 파장이 느껴졌다.

스테판이 내 접근을 막기 위해 온갖 마법을 다 쓰고 있었다.

물론 나와의 거리가 멀지 않아 제대로 발동되는 마법은 없었다.

"왜! 왜!"

남은 시체들도 다 베어 버린 내 눈앞에는 검은 핏줄이 툭툭 불거진 채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는 스테판만이 남아 있었다.

스테판은 낙하할 때 다친 것인지 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뒤틀어져 있었으나 상처에서 피는 흐르지 않았다.

그 역시 시체인 것 같았다.

마나 소드를 스테판의 목에 가져다 대고 내가 말했다.

"스테판 유제프, 왜 이러냐고 물었지?"

스테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말하지 않았던가? 네가 궁금해할 것이 아니라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스테판의 목에 닿아 있던 마나 소드를 찔러 넣었다.

"크억! 크아악!"

고통스러운지 스테판이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마나 소드를 뽑아내려는 것인지 스테판이 두 손으로 움켜쥐었으나 그의 손가락만 잘려 나가 사라질 뿐이었다.

두 번이나 죽음을 맞는 기분은 어떨까?

당하는 입장은 모르겠지만 행하는 입장에서 봤을 때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엄연히 말해서 모의 전투에서는 이 녀석이 자멸한 것이지 내가 죽인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놈에게 죽음을 선사하고 있다.

"나는 내 복수를 행할 뿐이야."

그리고 무너져 가는 스테판을 향해 몸을 숙였다.

"너를 두 번이나 죽일 수 있게 돼서 좋아 미칠 것 같아."

스테판이 마지막 발악인지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닥쳐."

오러 두른 주먹으로 그대로 스테판의 입을 뭉개 버렸다.

마침내 스테판 유제프는 한 줌 검은 물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이번에는 완벽한 복수인가?

옆으로 다가온 투브가 물었다.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나라고 해. 그때마다 죽여 없애 줄 테니까. 그럴 자신 없으면 그냥 얌전히 뒈진 채로 다른 연놈들도 차례로 죽어 나가는 걸 보는 게 나을 거야."

멀리서 병사들의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승리의 함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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