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처리 (2)
"나를 찾았다고?"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포츠라니 백작 가문 거주지 내의 저택에서 저비스가 나를 맞았다.
"무사는 무사지. 그 말도 안 되는 곳에서 살아 나왔으니."
"큰일을 겪으신 분치고는 너무 태평하십니다."
그리고 저비스는 자연스레 허리를 숙여 투브의 윗입술을 들어 올려 입안을 확인하고 여기저기를 만졌다.
꽤나 불쾌한 기색이었지만 투브는 아무 말 없이 저비스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꼬박꼬박 약 잘 챙겨 먹였어. 이상도 없는 것 같고. 걱정할 필요 없어."
"이쪽도 다행입니다. 동물을, 그것도 마나를 품고 있는 동물을 다루는 것은 처음이라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처음이라는 말에 투브가 나를 째려봤다.
-처음?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랬냐?
'별수 있냐? 어쨌든 지금 잘 살아 있잖아.'
우리 둘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알아챌 리 없는 저비스가 계속 투브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며 말했다.
"모습이 변하는 생물은 있다지만 마나를 몸에 품고 있는 생물을 보는 것은 아마 이 녀석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요. 정말 귀중한 자료입니다."
제법 오래 버티고 있던 투브가 몸을 뒤로 펄쩍 뺐다.
-으! 남자 놈 손길은 이제 그만.
투브가 자신의 손길을 거부하자 저비스가 아쉽다는 듯이 일어섰다.
"보자고 한 건 얘 때문이야? 그러고 보니 네 아버지는?"
"아버님은 지금 안 계십니다. 영지전에서 발생한 시체들이 만들어 내는 독기 때문에 근처에 역병이 돌기 시작했답니다. 그쪽 풍토에 맞는 약을 만들러 급히 가셨습니다."
"그래?"
역병이라니.
전생의 분리 운동 과정에서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것이 역병이었다.
처음은 어느 영지에서나 한 번쯤 겪는 작은 일이었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영세한 자작이 필요 이상의 세금을 거두자, 영민들이 소작쟁의를 일으켜 세금 내는 것을 거부했다.
추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자작이 과도한 세금을 물린 이유는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 위한 뇌물을 만들기 위함이었고,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자작은 영민들의 파업을 참수로 가혹하게 응징했다.
자작은 다른 영민들에게 반면교사가 되리라고 믿고 행했던 일이겠지만 거대한 반감만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영지 전체에 반감의 불씨가 타오르는 가운데 제대로 뒤처리를 하지 않은 시체에서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자작은 대립 중이던 영민들에게 제대로 된 조치를 하지 않았고, 역병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결국 '역병으로 골골대다 죽느니 의견이나 한번 외쳐 보고 죽겠다'는 생각이 굳어진 영민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하기 시작했다.
이는 제국 전역의 영민들에게까지 퍼져 나가 향후 10년 이상 온 제국을 뒤흔드는 분리 운동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는 건가?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겠어. 게다가 이렇게 되면 영지 수여 건은 더더욱 없던 일로 만들어야 해.'
몇 년 후라고는 하지만 영지전에 사교, 사령 마법사, 역병까지, 이런 재해가 널려 있는 땅을 영지로 받게 되는 것은 사절이었다.
역병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정도만 주시하는 편이 좋아 보였다.
물론 내 생각대로 일이 풀려 갈 때 가능한 일이겠지만.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아, 아냐. 여하튼 애 때문에 보자고 했냐는 거지."
"그것도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
"잊으셨습니까? 제게 보내신 것이 있지 않습니까."
아! 감자!
일이 워낙 많이 터져 감자는 깜빡 잊고 있었다.
내가 알아챈 기색이자 저비스가 빙긋 웃었다.
"따라오시지요. 준비해 두었습니다."
저비스는 우리를 데리고 저택을 가로질러 저택의 뒷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뒷문을 열자 저택의 몇 배 규모는 될 정도의 건물이 보였다.
"오로지 마법제약만을 연구하고 새로운 약과 치료법을 내놓는 곳입니다. 아마 민간이 가지고 있는 연구 시설 중에서는 가장 클 것입니다. 황실 소속 연구 시설과 비교해도 제1연구소나 제국 대학 마법제약 연구소 정도를 빼면 규모 면에서는 뒤지지 않을 겁니다."
"와! 장난 아니네."
깔끔하고 정갈한 건물의 크기를 보고 놀라는 나를 향해 저비스가 말했다.
"공작 각하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각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시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어린것이 벌써 아부하는 것부터 배웠네?"
"아부가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우리 가문은 다른 백작 가문들에 비하면 영지의 질이 좋지 않아, 약국 사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그래, 쉬지 않고 열심히 정진해라. 나중에 후작이 될 수도 있으니까.
연구 시설 내부에는 많은 인원들이 여러 가지 기구 앞에서 실험하는 모습이 보였다.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저비스를 알아보고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저비스와 나는 그들을 지나쳐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몇 개의 문을 지나쳤을까, 별다를 것 없는 벽 앞에 저비스가 멈춰 섰다.
"다 왔습니다. 여기가 제 개인적인 연구를 진행하는 곳입니다."
"뭔가 장치가 되어 있나 봐?"
"역시 형님이십니다.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저비스가 벽에 손을 대자 손 주위에서 동심원이 그려지며 벽이 종이 접히듯 아래로 접혀 들어가기 시작했다.
벽이 사라지고 나타난 공간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저비스가 계단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나 지하에 있는 연구 시설 별로 안 좋아하는데…….'
-왜? 또 멋진 대사 하려고? '나는…… 마나 그 자체야.' 이런 거?
"이게 진짜!"
나를 놀리고 어느새 저비스 옆에서 아래로 향하고 있는 투브에게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생각이 아니라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저비스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왜 그러십니까? 어서 오시지요. 몇십 초 후에는 보안장치가 발동되어 계단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아주 골치 아파집니다."
"간다, 가!"
역시나 지하에 있던 아라크네의 연구실에 대한 기억을 애써 날려 보내며 저비스를 따라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
계단을 내려가니 꽤나 넓은 공간이 나왔다.
여러 기구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를 품고 색색의 기체를 내뿜는 것이, 마치 투브가 쓰러졌을 때 저비스와 캐슬린이 창고에 임시로 만들었던 치료실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때의 치료실보다 훨씬 정갈하고 깔끔한 것과 더불어 더욱 복잡해 보이는 기구들이 많이 있는 것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었다.
"읏차."
저비스가 책상에 있던 서류들을 마법으로 서류철로 날려 보냈다.
아마도 각자의 분류법이 있는 듯, 여러 서류가 다른 서류철로 촤르륵 들어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어서 책상 안쪽에 있던 서류 뭉치를 하나 꺼냈다.
일련의 행동이 진행되는 동안 내가 저비스에게 물었다.
"안 궁금하냐?"
저비스가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지 않고 내게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관리관 일을 수행해서 내게 어떤 것이 주어질지?"
그 말에 저비스가 손을 잠깐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다시 시선을 내리고 서류를 정리하는 일에 집중했다.
"제가 궁금해할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역시 머리가 좋아. 선도 잘 지키고. 살려 두길 잘했어.'
저비스의 인내와 내 안목에 감탄하면서 말을 했다.
"그럼 혼잣말 좀 한다. 성년이 되면 이번에 영주 자리가 공석이 된 카몰 후작령이 내게 봉토로 하사될 거래, 분가의 형태로. 그런데 말이야, 그곳은 영지전, 사교의 출현과 그에 따른 엄격한 중앙의 제어, 사령 마법의 등장과 그에 따른 역병으로 엉망이란 말이야. 내가 14살이 되었으니까 성년까지는 4년이 남았는데……."
말을 끊고 저비스를 흘낏 봤다.
전 제국을 통틀어 황제, 2황자, 아버지, 베이카 장군, 나까지 다섯만 알고 있을 만큼 중요한 일을 저비스의 앞에서 꺼냈다. 과연 보통 무게를 지닌 일이 아니란 것을 안 것인지, 저비스는 여전히 아까의 모습 그대로 고개를 내리고 있었지만 손은 멈춰 있었다.
"과연 이 영지를 내가 받는 것이 괜찮을까? 어떻게 생각하지, 저비스 포츠라니?"
내가 이름을 부르자 저비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 앞으로 서류철을 하나 밀었다.
"맡기신 감자에 대한 분석 자료입니다."
"내 물음에 대한 답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저비스가 내게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문득 아버지가 내게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그대로 해 줬다.
"중도는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최선의 선택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어. 네 생각을 들려주길 바라. 기간은……."
내 앞에 있는 서류철을 펼쳤다.
"내가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
탁.
서류철을 덮었다.
"너, 이 내용 책임질 수 있어?"
저비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를 보고 자신을 형님으로 부르라고 하신 시안 몬트라우 님의 동생 된 입장에서 감히 말씀드리자면, 민심이라는 것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카몰 지방은 대대로 유제프 가문이 다스려 온 곳이라……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 유제프 가문을 꺾이게 한 형님께서 그곳을 영지로 받아 영주가 되는 것이 과연 괜찮을 것인가 하는 우려가 먼저 듭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는 영민을 보호하고 영민은 그 대가로 수확물의 일부를 바친다.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을 만큼 영주와 영민의 관계는 간략했지만, 그 한 줄이 수십, 수백 년 동안 대를 이어 내려온다면 간략함을 넘어 끈끈한 유대가 피어나기 마련이다.
멀리 계신 황제보다 당장 내 문제에 귀 기울여 주는 영주에게 더 충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제프 가문이 그곳에 터를 잡은 지 오래되었으니, 내가 그곳에 가서 영주가 된다면 당연히 반발이 있을 것이다.
영민들만 반발하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카몰 지방의 백작, 남작, 자작도 다리 몇 번 건너면 죄다 유제프의 핏줄일 것이고 유제프의 이웃일 것인데, 그들이 나를 곱게 볼 리 만무했다.
원래도 영지에 관심이 없었지만, 영지를 준다고 해도 하필 카몰이냐 하는 꺼림칙함을 저비스가 정확히 짚어 내고 있었다.
저비스가 내가 내려놓은 서류철을 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것을 읽기 전의 사실입니다. 만약 제가 제뉴인 공작가의 장자 시안 몬트라우이고 이 감자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다면……."
"영지를 받을 것이다?"
저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라도 빨라야 합니다."
"이유는?"
"감자의 성분 중 일시적으로 오러의 흐름을 정지시킬 수 있는 성분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몇 번이고 다시 결과를 확인한 후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자생하는 것인지 만들어 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게 이것을 가져다준 마법사는 감자를 거의 급속 냉동 수준으로 1주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송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패 직전의 수준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유통 과정이라면 부패가 시작되는 시점은 언제지?"
"짧으면 12시간, 길어야 이틀입니다."
"그라스 지방 혹은 팔스타인 지방에 그 감자가 나고 있다는 것인가. 그 성분만 추출할 수 있어?"
"표본이 부족해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비스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다만 임상을 거치지 않아, 이 감자가 어느 정도의 효과를 발휘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끓여 수프로 먹은 붉은방패 기사단원이 30분에서 1시간 정도 오러를 전혀 운용하지 못했어."
담담하게 말했지만 저비스의 얼굴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끓여도 없어지지 않고, 붉은방패 기사단이 30분 이상 오러를 운용하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이런 종류의 작물이 감자만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당장 찾아내서 세상에 모습을 더 드러내기 전에 다 불태워야 합니다. 이 작물은 기사의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뭐야, 그런 이유였어?
내 눈에 얼굴이 달아오른 저비스가 보였다.
'소년이구나. 정의를 외치고 불의에 분노하는, 때 묻지 않은 소년.'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내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자 저비스가 참다못해 내게 물었다.
"생각 중이야. 이거 누가 또 알고 있지?"
"저와 형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좋아, 태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비스가 서류철에 손을 댔다.
서류철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곧 재 한 톨 남기지 않고 말끔히 타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이 건으로 2황자마마와의 면담이 예정되어 있어."
황제를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 '황제 폐하께서 네가 배알하고 싶다고 해서 냉큼 나오실 만큼 할 일이 없으신 분 같으냐!' 하고 역정을 내던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래도 어떻게 하셨는지 2황자와의 면담은 성사시켜 주셨지.'
"다행입니다."
저비스가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게 나선 점 부디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아냐. 믿으니까 이런 얘기를 한 거지. 분석하느라 수고했어. 의견도 고맙고. 어디로 나가면 되지?"
저비스의 뒤를 따라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투브가 내게 말을 걸었다.
-너 또 나쁜 생각 하지?
아무 말 없이 씩 웃어 보였다.
-맞네. 딱 그런 생각 하는 표정이네.
저비스는 세상에 나오기 전에 다 불태워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오러의 운용을 정지시키는 성분만을 추출해서 분말 형태나 액체 형태로 만들어 주입할 수 있다면, 먹일 필요 없이 기사를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오러를 내 손으로 쥐락펴락할 수 있으면 복수로 향하는 길이 훨씬 쉬워질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저 감자를 독점할 수 있으면 기사의 종말은 내 의지에 달려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나쁜 생각 안 했어.'
-그럼?
'내가 공작이었을 때, 영지를 어떻게 다스렸던가 생각 좀 했던 것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