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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47화 (47/180)

대면 (1)

-이리저리 그만 좀 다니면 안 되냐? 움직이기 귀찮아 죽겠어.

'나도 제발 그렇게 하고 싶다, 후…….'

저비스의 연구실에서 감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약 열흘 정도 전이었다.

지금 나와 투브는 예전에 한번 방문했던 2황자 궁에 와 있었다.

원래의 목적은 영지 수여를 반려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하루빨리 영지를 수여받아 그곳에 있는 사교도들을 발본색원하고, 오러의 운용을 잠시 멈추게 하는 그 감자를 내 손에 넣어야 했다.

'아버지나 2황자나 내가 영주가 된다고 하면 그저 좋다고 할 사람들이니, 어서 빨리 영지를 하사해 달라고 하는 건 별문제가 없겠지? 황제 폐하의 입에서 직접 나왔다고 하니까 거슬릴 일도 아닐 것이고…….'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저 멀리 복도에서 누군가 급히 다가오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번 일을 겪고 한층 성장한 것인지, 굳이 운용하려 애를 쓰지 않아도 천천히 몸을 순환하는 오러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왜 저리 뛰어와?'

이미 누군가 오고 있다는 것은 예민한 기감으로 알아챌 수 있었지만, 탁탁거리는 발걸음이 내게 다가올수록 더 빨라지고 있었다.

발소리가 응접실의 문 앞에서 멈추었다.

그러곤 숨을 급히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몇 초 뒤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시안 공자님."

아직도 급한 기색이 역력한 젊은 내관(內官)이 나를 부르더니 숨과 침을 꿀떡 삼켰다.

"황자마마께서 오시고 계십니다."

"일이 있어 조금 걸릴 것 같다더니, 일찍 오시려는 모양이네?"

"그, 그것이, 2황자마마가 아니십니다."

동시에 건물 밖에서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2황자와 비슷한 정도의 오러 수준이었다.

그것을 투브도 느낀 듯 내게 말했다.

-이야, 여기는 올 때마다 재밌는 놈들이 하나씩 튀어나오네?

내관이 재빨리 말을 이어 나갔다.

"후우, 후우! 1황자마마께서 공자님이 이곳에 있다는 얘기를 들으시고 바로 이쪽으로 오시는 중입니다."

"그분께서 왜?"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공자님을 만나 보고 싶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나는 오늘 2황자마마께 볼일이 있어서 온 건데?"

"저희도 그리 말씀드렸으나 듣지 않으셨습니다."

내관이 쩔쩔매며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사이에도 1황자, 생귀니엘 서비어로 추측되는 기운이 빠르게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서 모실 준비나 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 말에 내관이 빠르게 사라졌다.

-1황자면, 나중에 2황자에게 죽는다는 그 양반?

'맞아.'

현 황제인 마엘 서비어는 자식을 늦게 둔 탓에 현재 굉장히 노령이다.

실제로 마엘 서비어 황제는 전생에서 내가 성년이 되기 전에 죽었고, 황제 자리는 당시 황태자였던 1황자, 생귀니엘 서비어에게 넘어갔었다.

1황자는 아마 내년이나 내후년 정도면 황태자로 책봉될 테지만 아직까지는 황자 신분이었다.

일반적으로 적통(嫡統)의 경우에는 이르면 말하기 시작할 때, 늦어도 성년이 되기 전에 황태자로 책봉되는 것이 관례여서, 서른을 바라보도록 황태자가 아닌 1황자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성정이 너무 급하셨다, 성정이. 나이가 들면 차분해지지 않을까 해서 황제 폐하께서도 책봉을 미룬 것인데, 그것이 원인인지 나이가 들수록 더 급해지셨다. 게다가 폐하께서 동생인 2황자마마를 총애하시는 것 같으니 더 다급해지셨겠지.

병상에 누워 계셨던 전생의 아버지가 내게 해 주신 말씀이었다.

내게는 첫 주군이 되는 사람이었지만 밖으로 도느라 이름이 적힌 교지만 많이 봤지 얼굴을 마주한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찾아온 걸까 하는 사이 문밖에서 시종인지 누구인지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1황자마마께서 드십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문이 벌컥 열리고, 역시나 황가의 상징과도 같은 회색빛 머리카락을 한 남자가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역시나 조각상에 뒤지지 않을 외모였지만 2황자와 비교하면 살짝 더 마르고 키가 큰 모습이었다.

옛 주군의 과거 모습을 이렇게 보니 새로웠다.

1황자가 내 반대편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그대는 동생의 사람인가?"

"예?"

앉으라는 말도 없이 가타부타 편 가르기부터 하고 싶은 건가?

"제뉴인 공작 가문의 장자인 시안 몬트라우가 2황자 바그안트 서비어의 사람이냐고 묻고 있지 않은가."

-성급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배려심 없고, 쉽게 질리고. 이런 형을 두었으니 동생이 화날 만도 했겠는데?

1황자를 한번 훑어본 투브의 감상평이었다.

"어이하여 말이 없는가. 내가 친히 묻고 있지 않은가!"

1황자의 눈을 매섭게 마주하며 말했다.

"저는 누구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2황자를 만나려고 두 번이나 입궁하는 것은 무엇이라 설명할 것인가."

"황자의 초대를 거절할 수 있는 귀족이 몇이나 있겠으며, 무엇보다 이번 면담은 관리관 업무의 연장선입니다."

"하! 관리관! 카몰 지방을 뒤엎어 놓고 돌아오고서는 무엇이 잘났다고 그리 당당하게 말하는가!"

"황자마마와 저는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고 돌아왔습니다. 더군다나 그곳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점을 제국에 알리는 역할도 수행했는데,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그대와 2황자가 아니라 누가 가도 해내었을 일이니 기고만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기고만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려야 할 것은……."

숨을 한번 고르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상대는 황자라지만 나 또한 공작가의 장자다.

기본적인 상호 존대도 없는 사람에게 숙이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면 일이 이 정도에서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엄하다! 내가 갔었더라면 더 빠르고 훌륭하게 일을 해냈을 것이다."

이제야 조금 가닥이 잡혔다.

원래 황실과 귀족 측의 관리관은 바람이나 쐬고 돌아오라고 보내 주는 일종의 명예직의 성격이었는데, 2황자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여러 문제점을 발견하고 임시적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그것을 잘 봉합해 놓자 정치적인 입지가 커졌을 것이다.

반면 수도에 남아 외국의 대사들을 맞고 있었을 1황자는 2황자의 정치적 성장이 영 껄끄러웠을 것이고, 나나 가문을 빌미 삼아 기세를 한번 꺾어 보려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황. 자. 마. 마. 저는 올해 14살이 되었습니다. 마마께서는 올해 29살로 알고 있습니다. 마마께서는 지금 자기 나이의 절반도 되지 않는 아이를 필사적으로 견제해야 할 정도입니까?"

내 말에 황자 주위에 있던 시종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와 반대로 1황자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놈! 어느 안전이라고 혀를 함부로 놀리느냐!"

황자의 주위로 오러가 넘실대고 있었다.

성격은 개차반이지만 서비어의 이름을 헛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굉장한 기세였다.

"생각 잘하셔야 할 겁니다. 1황자가 2황자의 손님으로 온 공작가의 장자를 공격했다는 사실이 밖으로 퍼지면 귀족들이 누구에게 우호적으로 움직일지 말입니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다짜고짜 편 가르기를 하시고 오러를 뿜어 대고 계신 분은 황자마마이십니다. 협박당하고 있는 것은 제 쪽이지요."

황자의 몸에서 퍼져 나온 오러 때문에 주위의 시종들이 호흡곤란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호위나 기사는 형편이 좀 나은 것처럼 보였지만 황자가 워낙 분기탱천해 있어 그런지 아무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하는 듯했다.

'어떻게 된 게 여기는 올 때마다 귀찮은 일이 터지냐. 이쪽으로는 오줌도 안 싼다, 진짜로.'

변환 인자 덕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황자가 공격할 수도 있으니 나도 오러를 방출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형님!"

2황자가 엉망이 된 자신의 응접실을 보고 외치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1황자가 재빨리 오러를 회수했다.

그제야 시종들이 막혔던 숨을 헉헉거리며 다시 내쉬었다.

"제 손님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놈에게 버릇을 알려 주려던 참이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소년이 날뛰어 봤자 얼마나 날뛴다고 이리 가벼이 행동하십니까."

2황자의 말에 1황자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아마도 자기 나이 절반도 안 되는 나를 이렇게 견제해야 하냐는 내 비꼼이 다시 생각난 듯했다.

뿌드득거리면서 1황자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가겠다. 채비하라."

마음대로 왔다가 마음대로 가는 1황자를 보고 2황자와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가기 전, 1황자가 나를 보고 말했다.

"내 오늘은 가지만 앞으로 조심하도록 해라."

말을 마친 1황자가 빠르게 밖으로 사라졌다.

-전 생애에서는 주군, 이번 생애에서는 적군. 관계가 기가 막히네.

***

1황자의 오러 방출로 인해 엉망이 된 응접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2황자가 나를 자리에 앉혔다.

"미안하네, 몬트라우 백. 잠시 어머니를 뵙고 온 사이 형님이 오실 줄은 몰랐네."

"괜찮습니다. 다만 화가 많이 나신 것 같던데 걱정입니다."

"걱정할 것 없네, 내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그건 그렇고 나를 보고 싶다고 한 것은 역시 그것 때문인가?"

1황자가 나를 보고 2황자의 사람이냐고 할 만큼 우리 둘의 사이를 경계하고 있었지만, 2황자는 1황자의 급습을 별것 아니라는 투로 넘겨 버리고 있었다.

둘 사이의 시각 차이가 확 와닿았다.

형은 지금 당장 황태자가 되지 못한 것에 분개해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발산하고 있지만, 동생은 차분하게 멀리 내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분리 운동이 지금으로부터 약 9~10년 후에 일어나고 그것이 10년간 지속되었으니, 2황자는 지금부터 20년을 참고 기다린 셈이야. 무서운 사람이다.'

역시 쉽게 볼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2황자가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주위의 인물들을 물렸다.

꽤 넓은 크기의 응접실에 나와 2황자 둘만이 남게 되었다.

"그대가 작위에 관심이 없다는 소리는 제뉴인 공을 통해 들었네만, 이번 일은 그런 개인적인 감정에 매여 결정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일러두고 싶네……."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일이 진행된 것에 대한 변명인지 미안함인지, 2황자는 난처한 얼굴이 되어 묻지도 않은 말을 이리저리 늘어놓았다.

"나도 폐하 앞에서 마음이 급해져 자네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너무 급하게 진행된 것이 아닌가 하고 있네만, 폐하께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셨으니 아마……."

계속해서 중얼중얼 떠들고 있는 2황자를 향해 내가 큼 하고 주의를 한번 환기시켰다.

"황자마마는 좀 아쉬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앞으로는 몬트라우 백이라고 부르면 틀린 호칭이 될 테니 말입니다."

2황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제게 과분한 자리이지만 너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하여 이만 감사히 받아들이려 합니다. 다만 2황자마마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부터 저와는 더 거리를 두어 주실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비단 1황자마마뿐만이 아니라도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지. 내 그리하겠네."

"또 하나, 아버지께 듣기로는 제가 성년이 되면 영지가 하사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네."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영지를 하사받고 싶습니다. 성년이 되기 전에 작위를 수여받거나 영지를 물려받은 경우는 수도 없이 많으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작위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았는데, 왜 그리 서두르는 겐가?"

"아무리 비밀을 잘 유지한다고 해도 제가 성년이 되기까지 4년이 남았습니다. 이 소식이 흘러 나가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다들 혼란스러워할 때 선포하는 것이 저나 황자마마나 황제 폐하 모두에게 부담이 덜할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황자가 빙그레 웃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나하나 그른 것이 없군. 아쉬워. 나를 도와줄 생각은 정말 없는……."

황자의 말은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 때문에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죄송합니다, 마마. 급한 일이 있어 결례를 무릅쓰고 이리하였나이다."

시종이 황자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황자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충분히 내 귀에 들릴 법한 거리였지만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황자가 그 짧은 순간에 오러를 이용해서 소리가 퍼지지 않게 만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말을 마친 시종이 인사를 꾸벅하고 다시 쪼르르 밖으로 나섰다.

문은 아직 열린 그대로였다.

"채비하게."

황자가 일어나 나를 보고 말했다.

"무슨 채비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궁에 들어와 있는 것을 폐하께서 아시고 잠깐 보자고 하시는군. 흔치 않은 기회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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