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면 (2)
"황제 폐하를 뵙는 자리입니다. 그 개를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알고 있으나 함께 들어가는 것은 안 될 말입니다."
얄츠 이나타, 시종장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누가 들어간대? 웃겨!
"그럼 건물 앞까지만 데리고 가고 들어갈 때는 두고 들어갈게요. 저와 멀리 떨어지면 불안 증세를 보여서 멀리 떨어지기는 힘들어요."
-내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질 수 없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잖아.'
시종장이 원래는 그것도 황실의 법도를 크게 어긋나는 것이지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으니 알겠다고 말했다.
'귀찮아 죽겠네. 내가 너무 옛날 생각만 했나?'
장군이 된 후의 내게는 엄청난 권한이 부여되어, 공식적으로 황제 앞에 나설 때 무장을 제거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몸수색을 시작으로 복도를 가로지를 때 몇 걸음 이상 걷지 않을 것, 사관(史官)은 없는 사람 취급할 것, 황제의 허락이 있기 전에는 절대 고개를 들지 말 것 등등 온갖 법도와 규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공자님, 잘 들으셔야 합니다. 고루하다고 느끼실 수도 있겠으나 오랜 시간 지켜져 내려온 것들입니다. 지금 잘 듣고 익혀 두시면 앞으로가 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공자님께서 폐하의 앞에 나설 일이 이번 한 번이 전부는 아닐 테니 말입니다."
"가능하면 한 번으로 끝내고 싶네요."
"하하하하! 시종장, 너무 엄격하게 굴지 말게. 급히 부르신 것이니 조금의 미비는 폐하께서도 이해하실 걸세."
"준비에 부족함은 없어야 합니다."
2황자가 내 편을 들어 줬지만 깐깐하기로 유명한 시종장이 그 말을 곱게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야 나와 2황자는 시종장에게서 벗어나 황제의 앞으로 향할 수 있었다.
***
황제가 업무를 보고 있는 건물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내관이 우리 앞에서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르며 안내했다.
거대한 문 앞에 이르자 내관이 뒤돌아 우리를 보고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준비되었느냐' 하는 손짓이었다.
'그래, 이들은 말을 못 하지.'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내관들은 애초에 귀가 들리지 않는 자를 어릴 때부터 키워 쓰거나 그렇지 않으면 일부러 귀를 멀게 한 자만 있었다.
이곳에서 오간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황제의 오러 섞인 음성만 감지하게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이 건물 안에서 자유로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황제 혼자뿐이다.
2황자가 안쪽을 향해 말했다.
"폐하! 부르심 받고 바그안트 서비어, 이 자리에 왔나이다."
황자의 입 모양을 보고 있던 내관이 박수를 두 번 쳤다.
한 번은 일행이 없음, 두 번은 일행이 있음.
박수를 친 내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폐하! 부르심 받고 시안 몬트라우, 이 자리에 왔나이다."
짝 하는 박수 소리가 나더니 문 안쪽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라 하라."
내관이 재빨리 문을 열고 우리보고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렇게 거대하지는 않은 공간에 황제와 시종장, 사관만이 있었다.
황제는 탁자에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를 쌓아 놓고 끊임없이 깃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앞으로 나가 절을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펜이 종이를 스치면서 만들어 내는 사각사각 소리만이 들렸다.
-폐하는 제국의 오만 가지 일을 처리하시느라 바쁜 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친히 공자님을 보겠다 하셨으니 기다리셔야 합니다. 절대 조급한 티를 내시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폐하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습니다.
들어오기 전에 시종장이 신신당부했던 것이라 조용히 기다렸다.
아들인 2황자도 나와 같은 모습을 하는데 감히 내가 먼저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잠시 뒤, 사각대는 소리가 멈추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구나."
"폐하의 은혜가 하해(河海)와 같사옵니다."
종이들을 한쪽으로 치우는 소리가 들리고 황제가 우리를 향해 말했다.
"고개를 들라."
바닥에 붙어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아들과 딸처럼 회색이긴 했지만 세월을 이길 수는 없는지 흰머리가 곳곳에 보이는 잘 정돈된 머리, 가로줄이 그어진 이마, 폭포처럼 아래로 처진 흰 눈썹, 그 눈썹 아래에서 무엇이든 꿰뚫어 볼 듯 흔들림 없는 눈동자, 코와 턱에서 시작되어 가슴까지 늘어진 수염.
만인지상(萬人之上), 제국의 황제, 마엘 서비어가 내 눈앞에 있었다.
황제가 숨을 가다듬고 내게 말했다.
"들려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재빨리 다시 고개를 내렸다.
"황송합니다."
"그대를 부른 것은 사고가 많았던 영지전을 훌륭하게 수습한 것을 치하함과 동시에 내 아들의 목숨을 구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다."
그 말을 듣고 2황자도 다시 한번 머리를 깊이 숙였다.
'역시, 2황자에게 마음이 있었군.'
장성한 두 아들을 아직 혼인도 시키지 않고, 궁 밖의 사가(私家)에 살게 하지도 않았다.
첫째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많은 이들은 황제가 2황자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지만, 의심은 의심일 뿐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종장과 호위 기사까지 있는 자리에서 아들을 구해 주어 고맙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냉정히 이야기해서 안정적인 후계 구도를 위해서는 2황자는 죽는 편이 나았다.
황제는 지금 2황자를 황제로 만들고 싶다고 돌려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건가? 하지만 시종장과 2황자도 다 들었는걸.'
시종장은 얼굴에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2황자를 흘낏 보니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제뉴인 공에게 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가 받아들인다면 분명 신흥 귀족의 탄생이지만 부모와의 교류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폐하의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내게 카몰 영지를 하사하겠다는 것과 더불어 공작 가문과의 연결 고리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발언까지.
이번 영지전 일로 황제의 마음이 2황자에게 기운 것이 분명했다.
둘째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황제는 정치적으로 상당히 무리하고 있었다.
'왜지? 내가 수도에 없는 동안 1황자가 사고라도 거나하게 쳤나?'
그때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사생아!'
1황자가 황제에 오른 후, 황자 시절에 그가 자신과 정을 통했다고 주장한 여인들이 잇따라 나왔으며, 실제로 여인들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들은 회색빛 머리카락에 다양한 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런 주장을 한 이들은 자식까지 모두 어느 순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만, 사람들은 아이가 지니고 있던 명백한 황가의 특성에 황제에 대한 추문을 수군대고는 했다.
'궁녀라도 건드린 건가?'
황제는 지금 '망나니 1황자가 진절머리 나서 2황자를 황제로 세우려고 하는데, 네 아버지와 네가 지지 기반이 되어 줄 수 있겠냐?'고 돌려 말하고 있었다.
시종장과 2황자도 모두 듣는 자리이니 이미 확고하게 마음이 섰을 것이다.
옆에서 2황자가 작게 흡 하고 숨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시안 몬트라우가 폐하께 아뢰고 싶은 것이 있다 합니다."
"고개를 들고 말하라."
2황자가 내게 눈짓했다.
"제가 성년이 되면 영지가 하사될 거라 들었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늦습니다."
"어이하여 그리 생각하는가."
차분하게 2황자에게 말한 것을 황제에게도 풀어놓았다.
게다가 현재 1황자는 나를 벼르고 있고, 황제는 내가 성년이 되기 전에 죽게 되니 길어야 3~4년이다.
당장 영지를 하사받아 탄탄하게 다져 놓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그리고 그 감자의 출처를 최대한 빠르게 찾아야 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시종장은 그라스에 대한 조사가 끝나는 대로 영지를 하사하는 것을 검토하라. 또한 그 시점을 계산하여 미욱한 신입 영주를 보좌할 인원들을 추려 보고하라."
황제가 바로 명령을 내렸다.
'역시 만만치는 않네. 감시 역도 붙이고.'
14살의 나이에 백작이 되는 것도 엄청난 일인데 수여되는 영지가 후작령 정도이니 손이 많이 갈 것이다.
그 일을 도와줄 관리를 내려보내 주겠다는 것은 황실의 정식 인가를 받았음을 상징하는 것과 동시에 확실하게 2황자의지지 세력이 될 것인지 두고 보겠다는 감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신임 영주에게 파견되는 관리가 머무는 동안 죽어라 뺑뺑이 돌려 주마.'
그리고 황제가 나를 향해 웃음 지었다.
마치 손자를 보듯 자상한 눈빛이었다.
"제뉴인 공이 아들 자랑을 어찌나 하던지 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마주하니 내가 들어 왔던 자랑은 빙산의 일각인 것 같구나. 나이에 맞지 않게 의젓하고 영특한 것에 놀랐다."
"황송합니다."
"제국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짐의 기분이 몹시도 좋다. 짐에게 청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표정 변화 없이 서 있던 시종장의 표정이 조금 떨렸다.
황제의 입에서 먼저 부탁할 것이 없냐는 말이 나오는 일이 흔치 않은 것은 나도 알고 있다.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누구를 죽였으면 합니다.' 하는 건 말도 안 되고, 물질적으로도 부족한 건 없고, 역시 이건가…….'
"사람을 하나 찾고 싶습니다."
"사람? 누구인가?"
"이름은 모릅니다. 어쩌면 제국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짐과 수수께끼를 하자는 것인가?"
"아닙니다, 마법사를 하나 찾고자 합니다."
황제의 눈이 빛났다.
노인의 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맑고 힘 있는 눈이었다.
"마법사라……."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느냐고 물을 것 같았는데 황제는 가타부타 말이 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황제의 입이 열렸다.
"사관과 시안 몬트라우만 남으라."
독대(獨對)를 하겠다는 의사 선언이었다.
***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2황자와 시종장은 빠르게 빠져나갔다.
도중에 '대체 무슨 일이냐.'는 눈빛을 2황자가 보내왔지만, 당혹스러운 표정을 한 채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라…… 어떤 마법사를 찾는가?"
내가 입을 열려는데 황제가 더 빨랐다.
"이타르인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내렸다.
"의외인가?"
"그, 그, 그것이……."
"태양달은 원래 황실에 존재했던 정보기관이지. 민간의 정보를 더 가까이 접하기 위해 분리되었지만, 대대로 그 기관의 주인은 황제다. 그대가 이타르의 이름을 물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노라."
아라크네와 만나기 전에 이타르의 정보를 모으기 위해 들렀던 정보 단체의 이름이 황제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것의 주인이라 말하고 있는 황제였다.
"초대 황제의 유지는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시행되고 있다. '이타르를 지워라.' 그러나 태양달에 이타르의 존재를 물으러 온 자만 해도 그대를 합쳐 셋이다. 짐의 치세에만 셋이니, 아마도 더 많은 자들이 알고 있겠지."
"……."
"묻겠다."
"말씀하소서."
"이타르에 대한 것을 알려 주면 2황자가 정권을 잡는 데 협조하겠는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거래에 말려들고 싶지는 않았다.
엄연히 말하면, 이타르를 만나는 것은 내 바람이지만 복수만큼 간절하지는 않았다.
"저 말고도 2황자마마를 도울 사람은 많은 줄로 아뢰옵니다."
거절 의사였다.
"……그런가. 알겠다, 나가 보라."
일어서 절하고 나가는데 문을 열기 직전 뒤에서 옥음(玉音)이 들렸다.
"20여 년 전, 히베아에서 무효화 마법을 쓰는 것으로 추정되는 어린아이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내가 몸을 돌려 황제를 쳐다보자, 황제는 무심히 한쪽으로 밀어 놓았던 종이들을 다시 자신의 앞으로 끌어 놓고 있었다.
"그것이 이타르로 추정되는 유일한 정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허리를 깊이 숙이자 다시 황제의 음성이 들렸다.
"2황자의 편을 들겠다 하면 알려 주지 않을 셈이었다."
"하면……?"
"현실보다 꿈을 꾸던 때가 짐에게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설을 찾아다니고 싶던 그 시절 말이다."
소매를 걷고 깃펜을 든 황제가 고개를 들어서 나를 보고 다시 자비롭게 웃었다.
"프리드리히 공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었다. 이미 하사품을 보냈지만, 안부를 전하라. 정말로 나가 보아도 좋다."
건물 밖으로 나가니 내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투브가 물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이 꽤나 볼만했다.
"바로 저택으로 모시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내관이 말을 하고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어땠어?
'모르겠어. 냉철한 것 같기도 하고, 감성적인 것 같기도 하고. 굉장히 정치적이면서 유연해.'
-뭐야, 그게. 역시 내가 한번 볼 걸 그랬나?
히베아…….
제국의 가장 북방에 있는 땅에서 무효화 마법을 쓰는 아이가 20년 전에 발견되었단다.
그 아이가 이타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