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보다 해몽 (1)
"수도를 벗어나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말 위에 올라앉은 알버트가 내게 말했다.
"너무 들뜨지는 마. 엄연히 내 호위 역으로 나온 거잖아."
"물론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남쪽으로 멀리 수도의 성벽이 보였다.
'그라스 지방의 사교도들은 잘 소탕되어 가고 있고, 역병 역시 잠잠해지고 있다. 감자에 대한 소식은 아직 없으니 한숨 돌릴 수 있겠네.'
이르면 반년 안에 나는 백작이 될 것이다.
그 전에 히베아로 가 보고 싶다고 한 것은 내 의지였다.
"귀족들이 성년이 되기 전에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간 제국 곳곳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는 것은 오랜 전통이지 않습니까? 저는 제국 북부, 히베아를 눈에 담아 두고 싶습니다. 작위가 수여되면 영지와 수도만을 오가게 될 테니, 시간은 지금밖에 없습니다."
나를 내보내고 싶지 않아 하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지극히 정론을 가져다 내밀었다.
물론 대개는 지위가 높은 가문의 자식일수록 수십, 수백의 호위를 거느리고, 휘하 영주들의 땅을 돌며 잘 먹고 잘 놀다 오는 것이 전부이긴 했지만.
"네 말에 틀린 부분은 없지만……."
어머니가 한숨을 푹 쉬었다.
영지전에서 내가 워낙 큰일을 겪었으니 저렇게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호위를 붙여 주마."
"호위는 알버트 하나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알버트를?"
아버지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좋다."
"이이가! 말려야죠!"
어머니의 외침에도 아버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시안의 말이 맞소.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경험이오. 게다가 알버트라면 일당백의 훌륭한 호위지. 좋은 경험이 될 게다. 나도 성년이 되자마자 2년간 남부 여행을 했었지."
그렇게 아버지의 허락과 어머니의 걱정을 뒤로하고, 알버트와 함께 히베아로 떠나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는 끝까지 호위 인원을 더 늘려야 한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많은 인원을 보내는 것은 페익스 이나타, 히베아 변경백에게 견제의 행위로 비칠 수 있다며 어머니를 말렸다.
그리고 어머니는 물론이고 아버지도 잘 모르시겠지만, 내가 보기에 정석적인 전투가 아니라 여행 중에 발생하는 돌발 상황에서 알버트가 누구에게 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물론 알버트와 동행하는 이유는 그의 무지막지한 강함도 있지만, 그는 실제로 이타르를 오랜 시간 본 사람이다.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말안장 옆에 매달아 놓은 바구니에서 강아지 형태의 투브가 얼굴을 내밀었다.
-여긴 너무 답답해! 내려가겠어!
펄쩍 뛰어내리려는 투브의 목덜미를 잡고 다시 바구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안 돼. 검은 개를 옆에 데리고 다니는 내 얘기가 너무 퍼졌어. 누군가 날 알아보면 귀찮아지니까 조금만 참아. 바구니 문은 열어 둘게."
모의 전투, 영지전 내내 투브가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는 바람에 내 인상착의는 몰라도 투브의 생김새는 골목의 꼬마들까지 다 아는 정도였다.
오죽하면 아이들이 검은 늑대 탈을 쓰고 다닌다고까지 할까.
아이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궁에 들어가서도 사람들이 투브를 대놓고 쳐다보는 경우가 많았다.
내 품 안에 있는 신분 증명 패보다 이 녀석의 존재가 더 확실하게 '내가 시안 몬트라우요.' 하고 나타내는 꼴이었다.
-흔들리고 답답하다고!
바구니 속으로 밀어 넣는 내 손을 피하면서 계속해서 투브가 밖으로 몸을 비집고 나오려고 시도했다.
"인적이 좀 드물어지면 나오게 해 줄게, 좀 참아라. 수도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보는 눈이 많다고!"
한참 기 싸움을 하다가 웃는 소리가 나서 보니 알버트가 고개를 숙인 채 웃고 있었다.
"사이가 좋아 보이십니다."
뭐, 처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이루기는 했지.
***
"그래, 그 부분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수도를 떠난 지 1주일, 우리는 밤낮으로 이타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주위의 마나를 조종해서 우리의 말소리가 밖으로 퍼져 나가지 못했다.
-20여 년 전, 히베아에서 무효화 마법을 쓰는 것으로 추정되는 어린아이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마법사라는 것이 밝혀지면 평민이라도 남작 작위가 내려지고 바로 수도로 와서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될 텐데 아무런 기록도 없었습니다."
이미 캐슬린을 통해 아카데미와 제국 대학의 인물을 샅샅이 조사한 뒤였다.
무효화 마법은 변환 인자가 주위의 마법을 약화시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멋대로 붙인 이름이다. 그것은 대마법사만의 전유물로 여겨졌고, 따라서 무효화 마법을 쓰는 자가 있으면 큰 화제가 됐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무효화 마법을 쓰는 마법사에 대한 기록은커녕 그 당시에 히베아에서 수도로 온 마법사에 대한 기록도 없었다.
"아이라는 것도 이상해. 이타르는 아라크네 같은 변용 마법사가 아닐 텐데 왜 아이의 모습이지? 이타르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할 줄 알아?"
"동물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은 자주 봤지만, 아이의 모습이라……. 제가 본 기억은 없습니다."
내가 초대 황제의 기억에서 본 이타르도 노인의 모습이었다.
"황제에게 더 캐물었어야 했나?"
황제가 이타르를 알고 있다는 사실과 그 정보를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바보처럼 서 있다가 나온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혹시 정보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나 잘못된 정보를 도련님께 주었을 가능성은……."
알버트는 황제를 의심하고 있었다.
누가 듣고 신고했다면 당장에 제국군이 우리를 체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주위에 사람도 없고 소리도 퍼져 나가지 않았다.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짜 정보는 아닐 거야. 황제는 2황자를 황태자로 만들기를 원하고 있고, 내가 2황자의 지지 세력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어. 황제 스스로가 1황자와 2황자를 필두로 한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분열은 한쪽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다른 쪽을 몰아내야 끝나. 그런데 내가 2황자의 힘이 되어 주기를 원하면서 신뢰를 잃을 짓을 한다? 아무리 황제라도 그렇게 하진 않을 거야."
게다가 직접 본 황제는 분명 늙었지만, 판단이 흐리지는 않았다.
그가 아는 전부를 말했을 가능성이 컸다.
"주인님에 대한 소식을 듣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알버트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소문일지라도 어느 정도 진실을 품고 있는 경우가 있잖아? 우리는 찾아다니는 입장이니 일단 가 봐야지. 한 줄의 소문도 놓쳐서는 안 돼."
알버트를 달래며 말고삐를 짧게 쥐었다.
엘리자벳 서비어의 얼굴이 생각났다.
정확히는 그 얼굴에서 나오던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망할……. 괜한 자격지심에 이타르의 흔적을 지우라고만 안 했어도 이런 고생은 안 하잖아. 그러게 적당히 좀 하지…….'
옆의 풀숲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알버트가 말 머리를 풀숲으로 향하게 하고 검을 뽑으려 했다.
-나야.
"괜찮아. 투브야."
주위에 인적이 없어 그동안 답답해하던 투브를 내려 주었는데, 만족할 만큼 주위를 휘젓고 온 모양이었다.
절반 정도 검집에서 뽑혀 나온 알버트의 검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재밌는 걸 발견했어. 잠깐 괜찮겠어?
"뭔데?"
-보면 알게 될 거야.
알버트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투브가 발견한 것이 있나 봐. 뭔지는 모르겠는데, 잠깐 보고 갈까?"
"도련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한번 따라가 보자고."
말에서 내려 길에서 좀 벗어난 곳에 말을 묶어 두고 투브가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야! 뭔데! 말을 해 줘야 알지."
앞에서 흔들리는 투브의 꼬리를 보고 내가 말했다.
-그렇게 떠들면 깬다?
깨? 누가?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데?
내가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지만 투브는 그저 재밌는 걸 보게 될 거라는 말로 일관했다.
얼마를 더 갔을까, 엄청난 크기의 울퉁불퉁한 바위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언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바위가 떡하니 서 있었다.
멀리서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위님, 바위님. 올해 굽어살피시어 저희들 모두 배곯지 않게 하소서."
"바위님, 바위님."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바위 앞에 음식을 쌓아 놓고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누구는 두 손으로 바위를 만지기도 했고, 누군가는 바위에 두 뺨을 비비기도 했다.
'바위를 숭배하는 사람들?'
"알버트, 이 근처의 가장 가까운 도시가 어디지?"
"트렛입니다, 말을 타고 이틀 정도 가야 할 겁니다."
그래, 기억났다.
히베아 지방의 최남단에 위치한 도시이자 왕의 마지막 도시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트렛.
북부를 통일시킨 초대 황제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대륙을 평정할 것을 천명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고, 따라서 트렛을 기점으로 왕의 행보와 황제의 행보로 나누어진다 해서 트렛에는 왕의 마지막 도시라는 묵직한 이명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언덕이 있는 곳이었다.
나도 이 바위를 본 기억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트렛을 점령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주위의 나무를 모두 베어 공성 병기로 만들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바위 주위에 사는 주민들이 이 바위를 아주 신성시한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 새로웠다.
투브는 멀리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바위와 땅이 닿는 경계에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거리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허공에 냄새 맡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도 이 바위는 본 적이 있어. 가자. 히베아는 넓어. 내게 허락된 시간은 3개월뿐이야."
내 말을 분명 들었을 텐데 투브는 못 들은 체하며 혼잣말을 했다.
-이쯤 어디인 것 같은데?
"가자니까!"
억지로라도 끌고 가려고 투브를 안으려 시도했지만 내가 한가득 안은 것은 공기뿐이었다.
투브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
놀랄 틈도 없이 마치 바위에서 솟은 것처럼 투브의 목과 얼굴이 나타났다.
-역시! 내 코는 죽지 않았어!
투브가 바위에서 뛰어나왔다.
그리고 앞발을 바위에 가져다 댔다.
-여기 있지? 여기에 손을 대고 마나를 이용해서 손을 바위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봐.
"설명이나 좀 해 달라니까?"
-일단 해 봐! 이 녀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기 있는 줄은 몰랐어. 이타르를 찾는 데 도움이 되면 됐지,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어서!
녀석이 어서 하라고 종용하는 통에 할 수 없이 손을 바위에 올려놓고 마나를 변환하기 시작했다.
"어?"
분명 손이 바위처럼 단단해져야 했지만, 오히려 마나는 바위 위를 타고 흘렀다.
그리고 내 손이 닿아 있던 바위가 말랑말랑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랑말랑해지는 것 같은데?"
-잘하고 있어. 영감도 오라고 해. 넘어가자고.
"알버트, 이쪽으로 와 봐."
알버트가 가까이 왔을 때쯤에는 바위는 말랑해지다 못해 물처럼 찰랑이고 있었다.
-넘어가!
뒤에서 투브가 알버트와 나를 바위 쪽으로 밀었다.
비록 촉감은 물이었지만 보이는 것은 바위였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에 물이 닿는 것 같은 느낌이 지나간 후, 살며시 눈을 떴다.
"여긴 어디야……?"
눈앞에 바위를 등껍질로 삼은 거대한 거북이가 보였다.
바위 속에 목과 다리를 숨긴 거북의 코끝에서 거대한 방울이 생겼다가 터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투르가……."
떡 벌어진 알버트의 입에서 낯선 단어가 나왔다.
"투르가?"
"주인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거대한 바위를 집으로 삼는 거북이가 있다고."
투브가 말을 받았다.
-거북의 이름은 투르가로, 첫 번째로 난 영수야. 그리고 투르가는 배를 땅에 대고 잠을 자고,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꿈꿔. 꿈꾸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그럼 이타르에 대한 것도?"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