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패의 호위 (1)
트렛을 시작점으로 해서 그 위쪽은 모두 히베아 변경백령이었다.
이른바 북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변경백령이기는 하지만 다른 백작령은 물론이거니와 웬만한 후작령도 히베아 변경백령보다 넓지는 않았다.
그것은 초대 황제가 자신의 가신이나 다름없었던 이나타 가문에게 넓은 영지를 떼어 주고, 북부의 야만인으로부터 제국의 방패가 되어 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비록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어도 사계절 내내 삭풍이 불어오고 땅이 거칠어 많은 부를 쌓기는 힘든 지역이 히베아다.
초대 황제가 통일시키기 전 땅 한 뙈기라도 가진 자들이 죄다 영주를 자칭하며 서로를 죽일 때는 북부의 야만인들과 크게 다름이 없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역사서에 실려 있을 정도였으니, 거친 환경과 그것에 단련되어 거칠어진 사람들이 사는 곳, 그것이 북부를 이르는 말이었다.
제국을 온통 뒤흔들어 내란(內亂)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분리 운동에서 히베아 백작령에 있는 도시와 영지는 흔들림 없이 굳건히 제자리를 지켰다.
애당초 초대 황제의 배려로 히베아 변경백령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아 적은 소출로도 거친 기후의 영민들이 나름대로 먹고살 만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북부는 초대 황제의 패도행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에 상징성이 컸고, 반란군에 합류한 귀족들은 그 상징성을 자신들이 이어받고 싶어 했다.
또한 변경백이 자신들의 세력에 들어오면 강인한 북부군을 통째로 삼킬 수 있으니 그것 또한 구미가 당겼을 것이다.
반란군이 왕의 마지막 도시, 트렛 앞에서 진을 치고 있음에도 히베아 변경백은 제국과 야만을 구분 짓는 거대한 건축물인 대장벽의 경비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트렛에 있는 사람에게 대피령을 내리고 다른 영지로의 이주를 돕기까지 했다.
그리고 반란군에게 단 한마디가 적힌 서신을 보냈다.
태양을 등에 진 독수리가 그려진 서신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더 이상 올라오거나 황실을 위협할 경우 남하하겠다.-
'사명 때문에 북부를 지키지만, 더 나대면 박살을 내겠다.'라는 협박.
그것이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북부 공략에 희생될 숫자에 비해 얻어 낼 것이 적다고 판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반란군은 트렛에서 더 북부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트렛은 그대로 북부의 향방을 관측하는 반란군의 전초기지가 되었지만, 몇 년 후에 동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내가 북부 등지에 남은 반란군을 정리하면서 다시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 내 서신을 받고 트렛을 탈환하기 위해 직접 정예 북부군을 이끌고 내려온 페익스 이나타, 히베아 변경백을 만난 적이 있었다.
북부의 태산이라는 이명처럼 거대하고 굳건한 체구, 눈처럼 흰머리, 강철처럼 다문 입술과 바위 같은 주먹이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거대한 망치까지.
변경백이나 장군보다는 야생의 전사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렸던 그 사내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왠지 기대가 됐다.
멀지 않은 곳에 트렛이 보였다.
***
"꽤나 번화했네."
트렛의 외성 벽에 가까이 다가가서 내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내 기억 속의 트렛은 반쯤 허물어진 성벽과 시체가 나뒹구는 곳이었기에, 잘 닦인 길에 많은 사람이 오가는 모습은 아주 낯설었다.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도련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예전에 왔을 때 이곳은 온통 숲이었는데, 이렇게 도시가 되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숲?
"언제 와 봤는데?"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다시 물어봤다.
"제국이 만들어지기 전이야, 후야?"
"이전이지요, 허허허! 북부에는 오러에 익숙한 자들이 많이 나지만 마나에 익숙한 자들은 드물다고 할 정도로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검사를 찾기에는 좋지 않은 것 같아 한번 와 보고 오지 않았습니다."
제국이 만들어지기도 전이라니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내가 어이없어하는 사이에도 우리가 타고 있는 말은 계속 발을 놀려 마침내 성문을 통과하는 인원들의 신원을 파악하는 검문소 앞에 도달하게 되었다.
병사가 보기에도 우리 차림이 예사롭지는 않은 듯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서 오시는 분입니까?"
알버트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병사에게 보였다.
제뉴인 공작 가문 소속임을 증명하는 증서일 것이다.
병사가 그것을 침착하게 읽더니 우리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한 후 상관처럼 보이는 자를 데리고 왔다.
"트렛의 성문 경비를 책임지는 요한 바르하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실 것이라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대장벽까지 거치는 모든 곳의 영주에게 내가 갈 것을 알리고 도착할 때마다 집으로 전령을 보낼 것.
어머니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며 내게 건 조건이었다.
제뉴인에서 크루슈 산맥을 향해 가는 동안 귀족인 것을 밝히지 않고 혼자 다니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알았기 때문에 반대하고 싶었지만,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눈을 보니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아마 각 도시와 지방의 영주들은 내가 갈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곳을 맡고 있는 영주는 누구지?"
영주가 머무르는 내성으로 향하는 길, 내 질문에 안내를 자처했던 요한이 바짝 군기 든 채로 답했다.
"즈보크 이나타 자작입니다. 변경백 각하의 둘째 동생이시지요."
"나이는?"
"변경백 각하와 많이 차이 나지 않습니다. 마흔이 좀 넘으셨습니다."
"이곳을 맡은 것은?"
"20년이 좀 넘었습니다."
즈보크 이나타, 내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트렛의 영주이니 내가 트렛을 탈환할 때 분명 있어야 했거늘, 다시 생각해 봐도 그런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분리 운동 전에 죽었나?'
그냥 죽었나 보다 생각하고 성 앞에서 요한과 헤어져 호위 기사의 안내를 받아 영주를 만나러 가는 길, 성에서 일하는 시녀들이 나와 내 옆에서 걷고 있는 투브를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저 소년이 시안 몬트라우 님이라는데?"
"제뉴인 공작가의?"
"그래, 이번에 영지전 관리관이었다는 그분!"
"어머, 어머, 너무 잘생겼다."
멀리서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소리였지만 내게는 너무 잘 들렸다.
대놓고 잘생겼다 하니 얼굴이 붉어졌다.
전생에서는 워낙 삶이 바빠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누워 계실 때는 혼담을 모두 거절했다.
20대 중반부터 분리 운동을 진압하러 뛰어다니길 10년, 그리고 다시 왕국 정벌로 제국 밖으로 나간 지가 10년. 그렇게 밖으로만 돌다 보니 어느새 40대 중반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자를 대하는 것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소리들이 들려왔다.
기사와 시종이 수군대는 소리였다.
"저 개가 거대한 늑대로 변해 기사들을 마구 날려 버렸다던데?"
"수도 놈들, 허풍이 심하군."
"영지전에서 등장한 움직이는 시체들도 다 저 공자님이랑 늑대가 처리한 거래."
"믿을 수가 없어. 사령 마법이 있긴 했던 거야? 시체 몇 구 꿈틀거리는 걸 보고 지어낸 것 같은데……."
투브의 활약상은 북부에도 퍼진 것 같았다.
하지만 투브를 실물로 본 사람들은 그것을 믿기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하긴 나라도 그런 소문 듣고 이 모양을 보면 거짓말이라고 했겠지.'
-인간들은 자기가 본 것만 믿으려고 한다니깐. 세상은 너희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에요.
투브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할 때쯤, 앞에 가던 기사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앞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내 귀에 들려왔던 소리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소리의 주인공이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예정된 것보다 도착이 이르셔서 미리 나가지 못한 점 용서하소서!"
온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면서 뛰어오는 주인공을 보고 나도 모르게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히베아 변경백?"
***
트렛 내성의 연회장, 온갖 요리와 술이 테이블이 부러질 정도로 가득 올라와 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은 나와 즈보크 이나타 자작을 필두로 긴 테이블에 빽빽하게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즈보크 이나타가 일어나 잔을 들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저들끼리 속닥거리던 것을 멈추고 각자의 앞에 놓인 사람 얼굴만 한 잔에 손을 올렸다.
"여러분도 잘 아는 제뉴인 공작 각하의 아들! 시안 몬트라우 님께서 여행 중에 우리의 도시 트렛을 방문해 주셨소. 공자님의 평안한 북부 여행을 위해 건배!"
즈보크 자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이 한 번에 외쳤다.
"건배!"
올라갔던 잔이 내려오면서 테이블을 쾅쾅 치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렸다.
시종들이 바삐 움직이며 빈 잔에 술을 다시 채우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자작이 내게 권했다.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일어나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즈보크 자작의 가신들뿐만 아니라 각 장인 길드의 길드장, 상인회의 회장 등 트렛의 유력 인사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다.
이들 중 신분으로는 나보다 높은 사람이 없었기에 당당하게 하대를 했다.
"방금 소개받은 시안 몬트라우네. 이리 환대를 해 줄 줄은 몰랐는데, 원래 기대하지 못한 선물이 더 크게 다가오는 법 아니겠나? 트렛의 이 정겨움, 잊지 않도록 하지."
내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마음껏 마시고 마음껏 먹게!"
옆에 앉은 자작을 흘끔 쳐다보고 이어서 말했다.
"자작이 낼 테니!"
내 말에 사람들이 다시 한번 '와!' 하고 웃고는 술을 비우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연회장은 금세 떠드는 소리로 가득 찼다.
자작이 내게 고개를 기울여 물었다.
"공자님, 실례지만 제 큰오빠와 만나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네만?"
"그렇다면 어째서 아까 저를 보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페익스 이나타, 히베아 변경백의 둘째 동생이라던 즈보크 이나타 자작은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내 기억 속의 변경백에서 주름을 좀 지우고 흰머리를 없앤 것과 똑같이 생겼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히베아 변경백인 줄 알고 '변경백?'이라는 말이 나와 버린 것이다.
"내 황실 시종장과 아버지께 변경백의 생김새를 들은 적이 있어 헷갈렸네. 실례했군."
"아닙니다.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어릴 때는 머리를 기르지 않았는데, 그때는 어머니, 아버지도 저와 큰오빠를 헷갈리곤 하셨습니다. 둘째 오빠도 비슷하긴 한데 저와 큰오빠가 닮은 정도에는 비하지 못합니다, 와하하하!"
자기가 말하고도 웃긴지 즈보크 자작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술을 쫙 비워 냈다.
"공자님, 그런데 말입니다."
"뭔가?"
"북부의 영주 된 자로 이런 말을 드리기에 부끄럽지만, 수도와 다르게 이곳의 치안은 그리 좋지 못합니다. 험지가 많아 범죄자들이 숨어들곤 하지요. 그것이 다가 아니라 대장벽 너머 야만인들이 산을 타고 침투하는 일도 있습니다. 1년에도 몇 번씩 그런 놈들을 소탕하려 하지만, 대장벽을 수호하는 것이 최우선인지라 인원이 부족하여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런 도시들 말고는 위험합니다."
"그래서?"
"트렛에 주둔하고 있는 북부군을 호위로 붙여 드릴까 합니다."
내가 봤던 히베아 변경백은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전투 후에는 꼭 병사들의 막사를 찾아 사망자가 누구인지 부상자가 몇 명인지 직접 챙기는 따스한 사람이었다.
그 동생인 즈보크 자작도 다르지 않은지, 알버트와 개 하나만 데리고 여행을 하려는 나를 위해 병사를 일부 붙여 주겠다는 제의를 하고 있었다.
"내가 여행을 한다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냥 보내셨을 것 같은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북부는 생각하시는 것처럼 안전하지 않습니다."
"걱정할 것 없네. 내 돌아가서 아버님께 북부에 도적이 많아 사람들 통행이 불편하다 전하겠네."
그 말에 상인들이 환호를 보냈다.
도적들이 사라지면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그들이었다.
"그렇게 쉽게 볼 것이 아닙니다."
"내 호위의 실력을 못 믿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즈보크 자작이 내 뒤에 서 있던 알버트를 흘끔 쳐다봤다.
하긴 나라도 믿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나이도 많은 데다가, 겉으로 보기에 근육도 없어 보이고 무엇보다 오러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인간이 호위라고 붙어 있으니.
"알버트."
"예, 도련님."
"몸 좀 풀래?"
"환영이지요."
즈보크 자작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어느새 연회장은 조용해지고 모두 나와 자작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못 믿겠다니 보여 줘야지."
"예?"
"이름 좀 있는 기사 하나 데려오게. 누구든 좋네."
그리고 품에서 금화를 몇 개 꺼냈다.
테두리가 떨어져 나가고 그림이 뭉개져서 제 가치를 받기 어려운 금화가 아니라, 완벽한 모양의 금화였다.
수도만 벗어나도 보기 힘든 물건이니 모든 사람의 눈이 쏠렸다.
꺼낸 금화는 모두 6개였다.
3개를 왼쪽에 두고 말했다.
"이건 알버트를 이기는 기사에게 줄 몫."
금화 하나만 있어도 4인 가족이 4개월 정도는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다고 하니, 한 가정의 1년 치 생활비가 상금으로 걸려 있는 셈이었다.
나머지 절반의 금화를 오른쪽으로 밀었다.
"이건 알버트가 이긴다에 걸 몫."
내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자, 누구든 데려오고, 얼마든 걸어 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