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패의 호위 (2)
"져…… 졌습니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눕다시피 한 기사가 패배를 선언했다.
기사의 목 근처에 검을 대고 있던 알버트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까지."
내 말이 떨어지자 알버트가 검을 검집으로 회수한 뒤, 기사를 일으켜 세웠다.
"자네는 오른발의 움직임이 미숙해. 하체의 움직임이 느리니 자네의 행로(行路)가 읽히는 것이지. 생과 사를 가르는 싸움에서는 그 찰나의 읽힘이 패배로 이어지니 더 단련하게."
저 기사도 한평생 무(武)의 길을 걸어온 자일 것이다. 조언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하건만 오히려 알버트를 향해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동시에 내가 테이블 중앙에 있던 동전들을 내 앞으로 끌어다 놨다.
"자, 내 호위가 열두 번째 승리를 가져왔으니 이건 다 내가 가져가도 되겠지?"
동전이 드르륵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내 앞에 놓였다.
금화뿐만 아니라 은화, 동화도 그득했다.
즈보크 자작을 비롯해서 내 앞에 앉아 있는 트렛의 유력 인사들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트렛에서 난다 긴다 하는 기사 12명이 패했다.
그것도 오러를 다룰 줄도 모르는 것 같은 노인에게.
직접 알버트와 검을 맞대어 본 기사들은 느꼈을 것이다.
'이건 절대로 못 이긴다.'는 느낌이 드는 압도적인 강함을.
그래서인지 기사들은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알버트의 조언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자신은 쳐다볼 수도 없는 경지에 도달한 자가 직접 단점과 개선점을 조언해 주는 것이니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다음."
내 말에도 불구하고 더 나서는 자가 없었다.
"더는 없나 보군?"
주머니를 열어 동전을 쓸어 담았다.
짤그랑짤그랑하는 소리를 내면서 동전이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즈보크 자작이 황당한 표정과 눈빛을 하고 내게 물었다.
"공자님, 저 호위는 송곳니 기사단원입니까?"
순진한 북부 사람들, 속았다는 것도 모르겠지?
이렇게 된 김에 조금 더 속여 주고 싶었다.
인상을 팍 찌푸리고 말했다.
"어허! 송곳니를 뭘로 보는 건가! 저자는 내 예절 교육 선생일세."
한낱 예절 교육 선생이 저토록 높은 경지에 있다는 말에 모두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옆에서 투브가 콧방귀를 뀌었다.
-송곳니인지 어금니인지 다 때려 부어도 저 노인네 제압하려면 절반은 죽어야 할걸. 이렇게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고, 넌 진짜 나쁜 놈이다.
나도 굽히지 않고 말했다.
'내기는 항상 조심해서 해야 하는 거야. 특히나 잘 모르는 사람과의 내기는 더더욱 그렇지.'
***
다음 날 나는 계속 북쪽으로 향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나와 있었다.
마구간에서 일하는 아이가 말 2마리를 끌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즈보크 자작의 배려로 말에 방한 장비가 입혀져 있었다.
아이의 손에서 말고삐를 받아 든 알버트에게 물었다.
"부탁한 건 잘 전했어?"
"그렇습니다."
"잘했어."
말을 타고 조금 나가니 내성 벽의 경계에 즈보크 자작을 비롯하여 어젯밤에 봤던 여러 인사가 나를 배웅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다들 쌈짓돈을 털려서 안색이 좋지 않았다.
"다들 표정이 안 좋네. 숙취가 심한가 봐?"
내 말에 다들 눈을 피했다.
즈보크 자작이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다시 봐도 히베아 변경백을 빼다 박은 외모였다.
아버지와 딸이래도 저렇게 닮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내게 천에 감겨 있는 두 자루의 검을 내밀었다.
"미리 말씀하셨으면 좋은 검을 만들어 놓았을 텐데, 만들어진 검을 드리게 되어서 영 마음이 불편합니다."
"마음 쓰지 말게. 고맙게 받지."
두 자루의 검 중 짧은 것을 빼 들었다.
스릉 하는 작은 울림과 함께 검이 부드럽게 나왔다.
잘 벼려진 검의 날에 햇빛이 부딪혀 부서졌다.
히베아 지방에서는 질 좋은 강철이 나고, 그 명성은 제국 전역에 유명했다.
드워프제 무구만큼은 아니지만 강철제 무구들이 유명한데 기사나 군인이라면 한번 정도는 가져 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드워프제 무구는 아주 극소량이 황실에만 유통되기 때문에 하사품이 아니고는 쳐다볼 수도 없었다.
히베아 지방의 강철 무구 역시 오로지 이 트렛을 통해서 매년 변경백이 허용한 수량 이상으로는 유통되지 않으니 아주 비싼 가격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고위 귀족들이 가문의 기사단을 무장시키기 위해 몇 년 전부터 예약을 걸어 놓기 때문에 개인이 구매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또한 대장벽에 있는 북부군을 무장시키는 데 우선하여 쓰이기 때문에 변경백이 허용하는 반출량이 많지도 않았다.
그러니 하룻밤 만에 내가 쓸 검을 찾아다 준 자작의 수완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성인이 쓸 검이 아니라 맞는 것을 찾느라 고생을 좀 했습니다."
몇 년 사이 내 신체는 꾸준히 성장해서 또래들보다는 강건한 몸을 가지게 되었지만, 성인의 몸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 검은 임시로 쓰시고, 공자님께서 성인이 되셨을 때 제가 선물로 검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괜찮겠습니까?"
하루하루가 생사의 갈림길인 북부에서는 무기를 교환하는 것이 신의를 교환하는 것이라던 히베아 변경백의 말이 생각났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던 긴 검을 뒤에 있던 알버트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왜 제게……?"
"날 나갔잖아, 그 검."
알버트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때는 아닌 척했지만 분명 투르가의 다리를 긁을 때 날이 나간 부분이 있었다.
오러도 마나도 없었던 전생의 난, 전장에서 믿을 것이 무구밖에 없었기에 명장이 만들었다는 무구들을 긁어모았다. 그래서 만들지는 못해도 감식안만큼은 경지에 올라 있다 자부했다.
날이 나간 곳을 오러로 보조해 가며 12명의 기사를 꺾었으니, 알버트의 실력은 이미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안 받을 거야? 팔 떨어지겠어."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두 손으로 검을 받은 알버트가 자작에게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귀한 무기를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당신 같은 무인이 우리의 무기를 써 주시는 것이 더 영광이지요."
가감 없는 칭찬이 오간 뒤, 내가 자작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내 검과 알버트의 검을 집으로 좀 보내 줄 수 있나? 검만 덜렁 보내면 전사한 줄 아실 수도 있으니까, 새로운 검을 받아서 여행 잘하고 있다는 편지도 함께 보내 주면 고맙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희 가문의 문장까지 눈에 잘 띄는 곳에 박아 보내겠습니다."
확실히 정도 많고 일 처리도 확실한 사람이었다.
나도 준비한 선물이 있었다.
말에 올라탄 채로 자작을 향해 손짓했다.
워낙 거대한 체구라 말을 탄 나와 높이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자작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도시의 재무 담당관은 어떤 사람인가? 믿을 만한가?"
"재무 담당관은 대대로 저희 가문에서 일하던 사람입니다. 그만큼 공정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가 공자님에게 실례라도 저질렀습니까?"
어차피 여행하는 데 돈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어제 알버트의 활약으로 딴 돈에서 원래 내 몫인 금화 6개를 빼고 나머지를 모두 도시의 재무 담당관에게 전달하라고 이미 알버트에게 부탁해 놓은 상태였다.
알버트는 언제나처럼 내 부탁을 훌륭히 완수했고.
"어제 내기에서 딴 돈을 모두 재무 담당관에게 전달해 두었네. 얼마 되지 않지만, 병사들 회식이라도 시키게."
내가 눈을 찡긋하며 말하자 자작이 감동한 눈을 했다.
"우리만의 비밀로 해 두자고."
"공자님……."
-우리 북부 사람들이 보기에는 거친 듯해도 작은 것에 잘 감동하지.
이번에도 전생에 들었던 히베아 변경백의 한마디가 큰 힘을 발휘했다.
내 작은 호의에 자작은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분리 운동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킨 북부의 영주들이다.
혼란의 시대에 나를 지지하는 이른바 '편'은 매우 중요했다.
당장 이들을 내 편으로 만들지는 못해도 호감 정도는 주는 편이 좋았다.
지금 제국에 오롯이 내 편이라고 할 사람은 가족을 제외하면 저비스 정도밖에 없었다.
2황자가 부담될 정도의 호의를 표시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은 위험군에 두는 것이 옳았다.
4군단 사령관, 페제 베이카 장군은 저번 일로 나를 좋게 보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시간을 좀 두고 판단해야 했다.
중앙 정계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귀족원에서 귀족들이 하는 꼴을 보면 진흙탕도 청정수로 보일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놈들 중 누가 내 죽음에 관련되고, 누가 관련되지 않았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철저히 이용했으면 이용했지, 그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이미 우리 가문의 가신 비슷한 위치에 있는 저비스 하나면 충분했다.
하지만 중앙에서 촌놈이라고 멸시하는 북부인들은 거칠지만 신의를 중시하고, 무엇보다 그 강력함을 전생의 내 눈으로 확인했었다.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면 최대한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 돈은 하나도 안 쓰고 생색은 징그럽게 내요.
'감 좋은 늑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래, 내게서 나가는 돈 없이 생색낼 수 있다는 것.
이렇게 남는 장사가 또 어디 있을까.
"여행을 마치고 내려오실 때 다시 뵙겠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성대하게 연회를 열겠습니다!"
나를 배웅하는 인원 중 묘하게 혼자만 얼굴이 밝은 즈보크 자작의 외침에 주위의 사람들이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북부의 첫인상은 아주 좋았다.
***
이후 히베아 변경백이 머무는 대장벽까지의 여정은 굉장히 비슷하게 흘러갔다.
변경백령은 이나타 가문의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들르는 도시와 영지마다 이나타 성을 가진 거대한 체구의 영주들이 나를 환영했다.
대체 어떤 형질을 가지고 있기에 저렇게 비슷한 사촌들이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모두 내가 히베아제 강철 검을 차고 있는 것에 놀랐다.
"즈보크가 검을 먼저 내주었단 말씀입니까?"
대장벽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만나는 도시인 스볼의 영주인 티그르 이나타 자작의 말이었다.
그는 페익스 이나타, 히베아 변경백의 동생으로 즈보크 이나타에게는 작은오빠 되는 사람이었다.
스볼은 오로지 대장벽에 있는 상비군의 보급에 집중하기 위해 세워진 도시이니, 변경백이 동생에게 뒤를 맡길 정도로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네만?"
"그럴 리가……."
티그르 자작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가?"
"분명 매년 히베아 바깥으로 나가는 강철 무구의 수량은 형님이 판단하시지만, 그것이 어디 영지로 얼마에 팔려 갈지는 즈보크의 재량입니다. 헌데 한 자루도 아니고 두 자루나 그냥 내주었다니. 돈을 준다면 제 뺨이라도 때릴 녀석이 그렇게 쉽게 강철 검을 주었을 리가 없는데……."
돈을 주면 오빠 뺨이라도 때린다니, 그래서 내가 돈을 내놨다는 소식에 그렇게 좋아한 거였어?
다른 사람들 돈이 자기 주머니로 들어와서?
내가 내놓은 돈이 병사들 복지에 무사히 쓰이기를 기도했다.
"뭐, 투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껄껄껄껄!"
선물을 받은 사람 앞에서 대놓고 투자라고 하는 사람은 중앙 정계에는 없었다.
무례하다면 무례하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단순할 정도로 직선적인 것이 북부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황자나 황제 앞에서도 직언할 정도로 나도 직선적이라면 지지 않기에 통하는 부분이 조금 있었다.
껄껄거리면서 잔에 가득 찬 술을 다 비워 낸 티그르 자작이 나를 보고 눈을 빛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닌 내 뒤에 서 있는 알버트를 보고 있었다.
"공자님, 듣자 하니 무패의 호위와 여행 중이라 하더군요."
가는 곳마다 병사와 기사를 꺾은 알버트가 유명해진 모양이었다.
내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내기로 딴 돈을 돌려준다는 말을 듣고 덤비나 본데, 여기서 딴 돈은 그대로 들고 올라가서 대장벽에 있는 사람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쓸 걸세. 괜찮겠나?"
"어차피 여기 물자는 다 그쪽으로 올라갑니다. 공자님께서 설령 그렇게 하셔도 물자가 아니라 금전이 올라가는 것뿐이지요."
"하하하하,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하겠구먼."
뒤에 서 있는 알버트에게 말했다.
"그렇다는데, 어때?"
"북부에 오니 매일 젊어지는 것 같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일어나서 탁자를 쾅 내리쳤다.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내게 모여들었다.
"걸어라!"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내 앞으로 동전들이 짤랑이며 모여들었다.
-바보들이 여기도 수두룩하네.
내 품에 안겨 있던 투브가 한마디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투브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생각했다.
'너 뭐 필요한 거 없냐? 말만 해. 남의 돈으로 너한테 생색 한번 내 보자.'
-됐어,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