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의 태산 (1)
북쪽으로 향할수록 삭풍이 거세지더니, 대장벽 전의 마지막 도시인 스볼에서 보급품을 실은 마차와 함께 출발할 때는 하늘에서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했다.
대륙의 중앙부에 위치해서 1년 내내 온화한 기후인 수도는 지금쯤 한창 꽃이 피기 시작했을 텐데 이곳에서는 눈발이 날리는 것이 몹시 신기했다.
"이곳은 여름이나 되어야 비가 오는 정도입니다. 그 외의 날씨에는 못해도 진눈깨비가 내리지요. 그나마 봄이라서 눈이 많이 올 일은 없어서 다행입니다. 눈보다 아래 있으면 눈을 푸다가 같이 퍼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와하하하하!"
티그르 자작이 우리를 배웅하러 나와 호탕하게 말했다.
그를 올려다보고 전생의 내 키를 그와 가늠해 보았다.
나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이나타 가문 사람들은 너무 컸다.
황실 시종장, 얄츠 이나타 백작도 작은 키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북부에 남은 그의 다른 핏줄들은 근육과 지방 덕에 얄츠 백작보다 반 배는 더 커 보였다.
"그나저나 눈이 길게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눈 때문에 길이 막힐까 봐 그러는 것인가?"
"마법사 몇이 동행하니 눈을 뚫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럼?"
"눈이 오면 시계(視界)가 흐려집니다."
"앞사람이나 마차를 따라가면 될 것 아닌가."
자작이 나를 보고 말했다.
"처음 북부에 온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공자님, 눈을 경계하셔야 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감각은 얼어붙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모자 위를 할퀴는 바람과 눈은 사람을 미치게 만듭니다. 눈 귀신의 아귀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때쯤 되면 내가 걷고 있는 것조차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멈춰 서면……."
꿀꺽!
자작의 진지한 표정과 낮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죽습니다. 나는 멈춰 서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먼저 올라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리도 만무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녀석이 없어!' 하며 허둥지둥 찾으러 내려가지만, 이미 선 채로 얼어붙어 죽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퍼억!
누군가 티그르 자작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으이구, 이 화상아! 공자님한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눈 귀신은 개뿔! 공자님 눈 똥그래진 것 좀 봐! 죄송합니다, 공자님. 이이가 농담이 지나칩니다."
티그르 자작의 부인 베르타였다.
둘이 결혼한 지는 꽤 되었는데 아이가 없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베르타는 어제부터 나를 살뜰히 챙기고 있었다.
베르타가 내 모자와 장갑, 검집이 살에 닿지 않게 둘러놓은 천을 다시 한번 만져 주었다.
신분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의도가 선했기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베르타가 다시 한번 남편의 등을 퍽 소리 나게 쳤다.
"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다른 병사들이나 챙겨욧!"
아내에게 혼나는 자작을 보면서, 보급품을 나르던 병사들과 이제 대장벽에 근무하러 올라가는 병사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런 병사들의 머리 위로 회색 구름이 꾸물거리며 눈을 쏟아 내고 있었다.
***
대장벽으로 올라가는 길, 눈발과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말들이 거친 숨을 내뿜자 흰 김이 올랐다. 흰 김은 얼마 가지 못하고 그대로 말의 콧구멍 주위에 얼어붙어 길게 고드름이 내렸다.
앞에서 마법사 둘이 교대로 눈을 녹여 좁은 길을 만들어 발에 눈이 차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할 점이었다.
"제대로 가는 것 맞아?"
내가 옆에 있는 병사에게 물었다.
갓 성년이 되어 처음으로 대장벽 근무를 하러 간다는 녀석이었다.
그나마 나이가 가장 어려 말이 통할 거라면서 자작이 내 말동무나 하라고 붙여 준 녀석이었는데, 내가 말을 걸 때마다 무슨 실수나 하지 않을까 벌벌 떨었다.
하도 떨어 대니 이 녀석이 추워서 떠는 건지 무서워서 떠는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저도 처음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길잡이가 앞에서 이끄니 맞지 않을까 합니다."
-좋기만 하구먼, 뭘.
투브는 눈을 처음 본다더니 신이 나서 쏘다니고 있었다.
개의 모습이었지만, 자신의 어깨보다 높이 쌓인 눈을 헤치고 갈 때마다 눈이 좌우로 갈라지는 모습은 볼만했다.
무슨 개가 힘이 저리 좋냐면서 병사들이 놀라자 투브는 보란 듯이 더 힘차게 눈을 밀어 냈다.
"쟤만 신났네."
옆에서 벌벌 떨고 있던 녀석이 내게 말을 걸었다.
"공자님, 저 개 데리고 있지 않으셔도 됩니까? 지금도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내비 둬. 얼어 죽기 싫으면 오겠지."
어차피 내게서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질 수도 없고 서로의 위치도 느껴지니 굳이 오라 가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 앞에 가던 길잡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경계!"
보급 마차를 둘러싼 병사들이 복명복창하며 무기를 다잡았다.
"경계!"
내 옆에 있던 녀석도 무기를 고쳐 잡았다.
"웬 경계? 누가 와?"
"선배들한테 듣기로는 이런 눈보라 치는 날에 야만인들이 산을 넘어 약탈을 하러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야만인? 대장벽이 있는데 어떻게?"
"대장벽은 가장 크고 넓은 협곡을 막는 건물일 뿐,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는 수많은 골짜기들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초소들이 다 설치되어 있지만 이렇게 시야가 확보되지 않고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이면 야만인들이 초소를 넘어 내려온다고 들었습니다. 이래서 제발 올라가는 날에는 눈이 오지 않기를 기도했는데……."
정말이었다.
귀로 오러를 집중시켜도 사악사악 하는 바람 소리만 거칠게 들려올 뿐, 옆 사람의 발소리조차 듣기 힘들었다.
황궁 마구간에서 지하의 비밀 공간을 찾던 것처럼 마나를 변환해서 주위에 퍼트리면 좀 나을 테지만, 그렇게 했다간 앞에 있는 마법사들이 마나 흐름이 바뀐 것을 느낄 것이다.
자연의 거대함에 내가 작아지고 있었다.
뒤에 있던 알버트에게 붙어서 물었다.
"어때, 뭐 느껴져?"
"그다지 느껴지는 것은 없습니다. 행렬 앞에서 불로 눈을 녹이는 소리 정도가 전부입니다."
눈보라가 조금 약해질라치면 저 앞에서 불 같은 것이 깜빡깜빡하는 것이 보였다.
마법사가 눈을 녹이고 있었다.
그게 보이는 것도 아니고 소리가 들리다니, 알버트의 무지막지한 오러의 양과 정교한 운용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알버트의 엄청난 능력으로도 이 행렬 바깥의 것은 감지하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문득 투브가 걱정됐다.
'야, 어디야?'
-나 지금 너네 뒤에, 후발대.
'무슨 소리야. 후발대 없이 우리가 전부라고 아까 티그르 자작이 그랬는데.'
-그럼 얘네는 누구야? 막 얼굴에 그림 그려져 있고 도끼 같은 거 들고 있는데?
'그림? 야만인이야!'
-그래? 얼굴이 비슷해서 후발대인 줄 알았네.
'처리할 수 있겠어?'
-힘들어. 여기 길이 너무 좁아. 내가 커져서 날뛰면 길이 무너지거나 눈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
'거기 가만히 있어! 아니, 그쪽에 안 들키게 잘 따라와!'
팔에 오러를 밀어 넣고 옆에 있던 신병을 들어 올려 말에 태웠다.
"으엇!"
"야! 여기 책임자 어디쯤 있어? 빨리 말해!"
***
"병력을 뒤로 집중하라니요? 갑자기 오셔서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씀이십니까."
이번 정기 교대의 책임자, 자신을 바일슨 필탄이라 소개한 남자가 내 다급한 외침에 황당한 표정을 했다.
"뒤쪽에서 야만인들이 온다고!"
그 말에 바일슨이 옆에 있던 부하에게 무언가를 물었다.
부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고 들어온 바가 없습니다."
투브가 후발대로 착각한 사람들은 야만인들이 분명했다.
야만인들은 같은 부족임을 표시하기 위해 얼굴에 동물의 피로 자신들끼리 구분할 수 있는 문양을 그린다고 하니 틀림없었다.
"나랑 같이 다니는 개가 뒤에서 야만인을 봤다고!"
"지금 개 때문에 병사들을 움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말도 안 됩니다!"
"급해! 우리는 짐이 많아 느리고 뒤에서 따라오는 자들은 몸이 가벼워! 우리가 길도 뚫어 주고 있잖아!"
"그 개는 어디 있습니까?"
"뒤에 남아서 야만인들 움직임을 보고 있어."
"이 눈보라 속에서요? 얼른 불러들여야 개가 얼어 죽지 않을 겁니다, 하하하하!"
내가 하는 말이 농담인 줄 아는 건지 바일슨은 웃으며 내 말을 무시했다.
"바일슨! 병사들을 뒤쪽에 집중시켜!"
내 외침에 바일슨의 얼굴이 굳었다.
"공자님, 공자님은 여행 중이시지만 이것은 엄연한 군사작전입니다. 더 이상 방해하시면 월권행위입니다."
바일슨의 말은 틀린 곳이 없었다.
이것은 보급 물자 운송과 더불어 대장벽에 근무하는 인원을 교대하는 작전이었다.
작전은 현장 지휘관의 판단이 최우선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야만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품에서 신분 패를 꺼냈다.
붉은 금속 위에 몬트라우 가문의 문장(紋章)인 입을 벌린 늑대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것을 꺼낸 이상 나는 여행객이 아니라 공작 가문의 대리인 자격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몬트라우 가문은 대대로 무가(武家)로 이름 높은 가문, 위급 시에는 연대급의 지휘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제국 전체를 뒤져도 이런 특혜를 받는 가문은 세 가문이 되지 않는다.
바일슨도 모르지는 않을 터,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
"몬트라우 가문의 장자, 시안 몬트라우가 위급 상황이라고 판단, 현장 지휘권을 넘겨받겠다. 최소한의 인원만 보급 마차들에 붙어 호위하고 가용 인원은 모두 후방경계에 투입한다. 이것으로 발생하는 피해는 모두 내가 배상하겠다."
***
"빨리! 더 빨리!"
페익스 이나타 변경백은 앞에 있는 마법사에게 어서 눈을 녹이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사할트르 계곡에 있는 초소에서 야만인이 통과한 흔적을 발견했다고 보고가 들어오자마자 병사들을 비상 경비 태세로 돌리고 자신은 대기조와 함께 보급로를 향한 것이 몇 시간 전이었다.
눈보라의 위력이 약해지긴 했지만 몇 시간 동안 내린 눈이 허벅지까지 쌓여서 길을 뚫기가 쉽지 않았다.
'겨울 동안 북부 야만인들과 괴물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교대를 미룬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인가.'
눈이 오면 대장벽과 스볼을 잇는 유일한 통로인 보급로가 쉽게 막히기 때문에, 이 시기에 병력 교대나 보급품을 올려 보내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원래 4개월마다 일부 인원들을 교대해야 하는데 못 해서 지금 인원의 근무가 6개월을 넘어 7개월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교대를 미룰 수가 없어서 억지로 강행했다.
'게다가 이번 일행에 제뉴인 공작의 아들이 있다고 들었다. 상처라도 났다가는……. 골치 아파지겠군.'
변경백도 시안이 이쪽으로 온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다.
대체 이 황량한 땅의 무엇이 보고 싶어 여행을 온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좋을 대로 하라고 내버려 둔 것이 후회되었다.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눈이 그치기 시작했다.
저 멀리 올라오는 보급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굳이 눈을 녹이며 내려가는 것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길을 잃을까 봐 그런 것이었다.
짐도 없고 시야도 확보되었으니 굳이 눈을 녹이며 내려갈 필요가 없었다.
"마법사들은 빠져라! 나머지는 오러를 두르고 길을 뚫는다!"
변경백의 명령에 곰과 같은 근육을 가진 기사들이 나와서 오러를 끌어 올려 그대로 눈을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눈이 허벅지 근처까지 쌓여 있을 때 유용하게 쓰이는 방법이었다.
보급대의 선두와 만난 변경백이 빠르게 뒤를 훑었다.
분명 야만인들과 조우했을 텐데 보급 마차들은 눈이 쌓여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너무나 깨끗했다.
하지만 병사들의 수가 예정된 수보다 적었다.
변경백이 길잡이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
"시안 공자님께서 뒤에서 야만인이 온다며 지휘권을 가져가셨습니다. 이쪽은 최소한의 인원만을 데리고 올라왔습니다."
'야만인의 습격을 눈치채?'
야만인들은 하나하나가 야생동물 이상의 날카로운 본능을 가졌다.
눈보라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가며, 멀리 떨어진 목표를 기가 막히게 활로 맞힌다.
그들이 갈래갈래 찢어져 서로 싸우고 몬스터들과 생존경쟁을 하고 있어 쉽게 남쪽을 노리지 못하는 것이 다행일 지경이었다.
계속 달려 내려가던 변경백과 기사들은 이내 아래에서 올라오는 병사들과 마주쳤다.
그도 잘 아는 베테랑 장교, 바일슨이 변경백 앞에 나섰다.
"각하! 제가 반평생을 장벽에서 근무하며 보냈는데 야만인의 기척을 알아낸 건 처음 봅니다! 시안 공자님은 미쳤습니다!"
바일슨 말고도 올라오는 병사마다 다들 몸에 피만 묻어 있을 뿐,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모두 이구동성으로 시안 몬트라우를 입에 올리며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사기 충만한 부대의 모습이었다.
대체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 한쪽으로 비켜서서 굳어 있는 변경백과 기사들을 향해 병사들이 계속 인사하며 지나갔다.
그리고 행렬의 끝에 말에 타고 있는 한 소년과 노인 그리고 그 옆을 지키는 개가 있었다.
말에 탄 소년이 변경백 앞에 풀쩍 뛰어내렸다.
그가 입은 두꺼운 옷에는 온통 피가 묻어 있었다.
피가 추운 날씨에 얼어 반짝였다.
그 반짝임에 뒤지지 않는 미소를 지은 소년이 변경백에게 말했다.
"히베아 변경백! 오랜만이구려!"
북부의 태산, 페익스 이나타, 히베아 변경백은 분명 만난 기억이 없는데 오랜만이라고 말하는 소년, 제뉴인 공작의 아들 시안 몬트라우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전에 다시 시안의 입이 열렸다.
"아니! 처음 뵙겠소!"
참 당찬 소년이라고 변경백은 생각했다.
그런데 이 당찬 소년의 첫인상이 그는 싫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