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사자 (1)
"내문(內門), 개문(開門)!"
성벽 위의 병사가 크게 소리쳤다.
쇠사슬로 연결된 도르래가 철그럭거리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강철 문이 천천히 열렸다.
대장벽으로 올라올 때 이용했던 보급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벌써 가신다니 아쉽습니다."
"작전지역에 여행객이 오래 머무르면 사기만 해치지 않겠소. 말은 두고 갈 테니 유용하게 쓰시오. 아주 좋은 말이오."
변경백이 내게 다가와 악수하며 속삭였다.
"레인저 하나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조금 내려가다 보면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안내를 받아 초소 이북 지역으로 가시면 됩니다. 또한 영주들에게 일정 기간을 두고 몬트라우 가문에 소식을 전하라 일러두겠습니다."
"주의할 점은?"
"초소를 넘어서게 되면 레인저는 사라질 것입니다. 거기서부터는 공자님의 힘으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안전과 무운을 빌겠습니다."
"고맙소."
"공자님 같은 분을 만나 영광이었습니다."
내게서 멀어진 변경백이 병사들을 이끌고 장벽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쿵 소리가 나며 문이 닫혔다.
"우리도 가자."
알버트와 투브를 데리고 아래로 조금 걸어 내려갔다.
길이 꺾여서 대장벽의 내문이 보이지 않게 될 때쯤, 길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눈처럼 흰 망토를 두른 병사가 등장했다.
"안내를 맡았습니다. 여기."
그는 묵례를 하더니 나와 알버트에게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얼굴을 가리는 후드가 달려 있는 망토를 내밀었다.
내가 망토를 두르는 동안 레인저는 투브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 녀석은 걱정할 것 없네. 내가 책임지지."
"알겠습니다. 이쪽입니다."
짧게 답한 레인저가 후드를 뒤집어쓰고 뒤돌아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러를 최소한도로 이용하면서 주위의 지형을 이용해서 툭툭 가볍게 산을 오르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런 방식도 있네."
레인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길이 아닌 곳을 이용하는지라 멀고 험할 것입니다. 힘들면 쉴 테니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럴 일 없을 걸세."
레인저는 가타부타 말이 없이 계속 위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쟤가 너 무시하는데?
투브가 나를 한번 보더니 레인저의 뒤를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오러를 운용하며 산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
"죽지 말고 살아 돌아오라고. 레인저 신병은 첫 임무 때 절반 이상은 죽으니까 말이야."
초소장이 마른 식량을 챙겨 주며 말했다.
후드를 뒤집어쓴 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망토 안쪽에서 작아진 채로 꾸물거리는 투브를 들킬까 얼른 밖으로 나섰다.
뒤에서 초소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꼬박 하루가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산을 타서 초소 중 가장 험지라는 1번 초소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하루를 머무르며 피로를 풀고 눈보라가 약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우리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고, 초소 내의 다른 병사들과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다.
살벌할 정도로 거친 경사의 길을 내려간 후, 레인저가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지도와 신호탄입니다. 지도는 대장벽에서 멀어질수록 불확실하며, 신호탄은 불을 붙이면 연기가 오를 것입니다. 초소 근처에서 사용하시면 가까이 있는 레인저가 귀환을 도우러 갈 것입니다."
"고맙네."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레인저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묵례를 꾸벅하고 눈 덮인 숲으로 사라졌다.
분명 오러의 움직임은 느껴지는데 그냥 눈으로 봐서는 무엇이 움직이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지도를 펴 보니 낯선 이름들이 적혀 있고 그 이름을 기준으로 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알……타크, 시……하, 이……차르낫, 요쓰? 무슨 이름들이 이래?"
"부족들의 이름인 것 같습니다. 이 선은 아마 부족들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겠지요."
알버트의 설명이 그럴듯했다.
이 추측이 맞는다면 장벽 가까이에 있는 부족만 4개이고 그 위쪽에 2개의 부족이 더 있었다.
-이거 하나하나 규모가 얼마 정도 되는지는 몰라도, 사람 하나 찾으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는데?
투브와 마음이 통했는지 알버트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이들이 과연 우리에게 호의적일지 모르겠습니다.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내가 목을 옆으로 돌려 우두둑하는 소리를 냈다.
"시간 오래 끌 생각은 없어. 더럽게 춥기도 하고, 여기서는 눈치 볼 필요도 없으니까 팍팍 치고 올라간다."
가장 가까이 있는 '시하'라고 쓰여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부터."
***
시하 부족의 족장, 흐릭은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검은 머리의 소년과 노인이 남쪽 것들의 옷을 입고 이쪽으로 달려온다는 말을 듣고, 웃기는 놈들이라며 죽여서 검은 벽에 던져 버리라고 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부족의 주술사들과 함께 계속해서 영역을 침범하는 이차르낫 부족을 어떻게 하면 부술 수 있을지 토의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밖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이어지자 주술사들은 토의에 집중하지 못했다.
"딱 기다리고 있어!"
호기롭게 주술사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고 밖으로 나간 흐릭은 재앙을 목격했다.
천막과 움집이 불타고, 부족민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혼란의 중심에 왼손에서 불과 벼락을 쏟아 내는 소년이 보였다.
"재앙이다……. 신께서 이 땅에 재앙과 천벌을 내리셨다……."
흐릭은 다리의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이런 미친놈들! 그래도 대화로 풀어 보려 했는데! 다짜고짜 화살을 날려? 물어볼 곳이 너네만 있는 줄 알아!"
잔뜩 열이 뻗쳐서 사방으로 불덩이를 날렸다.
눈이 열에 녹아 금세 바닥이 질척해졌다.
분이 풀릴 만큼 마법을 쓰고 주위를 둘러보자 사내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나를 포위하려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서 쉬이 넘길 수 없는 짙은 두려움이 흘러나오고 있었기에 가소로웠다.
"도련님, 아무리 화가 나셔도 이것은 좀 심하시지 않습니까."
"사람은 안 태웠어."
왼손을 휘두르자 움집을 태우고 들어가던 불이 내 손으로 모여들었다.
그것을 본 야만인들이 무어라 소리쳐 댔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불이 모여 있는 왼손을 주먹 쥐듯 움켜쥐자 불이 사라졌다.
덩치가 있고 가장 화려한 그림을 얼굴에 그린 사내가 헐레벌떡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수염이 덥수룩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중년이 넘어 보이는 그가 사람들에게 무어라고 소리 지르자 나를 향하던 무기들이 모두 땅을 향했다.
그리고 그가 조심스럽게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무릎을 땅에 대고 이어서 상체도 땅에 붙였다.
마치 나를 경배하는 것 같은 자세였다.
그러자 뒤의 야만인들도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가장 먼저 자세를 취한 녀석이 상체를 들더니 무언가 떠들어 댔다.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흠……. 부족장, 신의 사자, 존경. 이런 말인 것 같습니다."
알버트의 말이었다.
"야만인들의 말을 알아?"
"말씀드렸지만 저는 북부에 와 본 적이 있습니다. 다만 오래되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제 기억력이 다한 걸 수도 있고, 이들의 말이 많이 달라진 것일 수도 있지요."
알버트가 자신을 부족장이라 칭한 녀석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그러자 녀석이 매우 놀라더니 뒤쪽의 사람들에게 마구 손짓을 했다.
사람들이 일어나 길을 열었다.
부족장이 우리를 향해 이쪽으로 오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뭐라고 했어?"
"'도와주면 죽이지 않겠다.'라고 했습니다."
간결하지만 확실한 말이었다.
-이 영감이 말하니까 되게 소름 끼치네.
투브의 말과 함께 우리는 안쪽으로 안내되었다.
***
"야, 태워 주면 안 되냐?"
-너 요새 갈수록 뻔뻔해진다?
"농담이야, 농담."
우리는 눈 덮인 설원을 질주하고 있었다.
시하 부족을 덮친 것이 이틀 전, 부족장이라던 흐릭의 적극적인 협조와 생각지도 못한 알버트의 통역으로 많은 정보를 알아냈다.
-20년 전에 남쪽 인간의 마을을 습격한 일이라면 저도 기억합니다. 크고 거대한 벽이 있는 마을이었지만 우리는 성공했습니다. 맞습니다, 많은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아이 중 하나요?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남자아이, 마나? 주술과는 다른 신비한 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그 당시에 그저 동원되었을 뿐이라 많은 것을 요구할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아! 유탓카 부족의 주술사가 아이 하나를 데려갔습니다. 공양에 쓸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아마 그 아이 말고는 대부분 다 죽었을 겁니다.
이것이 흐릭이 털어놓은 정보의 전부였다.
이런 매끄러운 문맥을 만들어 내는 데 아주 고생했다.
알버트에게 듣기로는 자신이 아는 것과 말이 아주 달라져 '20년, 남쪽, 습격, 벽, 크다, 성공…….' 정도의 단어의 나열이라고 했다.
오죽했으면 어린아이와의 대화가 더 편하겠다고 했을까.
지도를 펴 보니 유탓카는 장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두 부족 중 하나였다.
이들의 정보는 레인저들도 확실하게 얻지 못했는지 이름만 쓰여 있을 뿐 영역의 경계선 표시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하긴 전력으로 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곳만 해도 장벽에서 굉장히 먼 곳이지.'
이곳까지 오면서 다 떨쳐 내고는 있지만 다른 야만인들이나 괴물들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가벼운 움직임을 하는 레인저들도 이곳까지 오는 길이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다만 특이한 점은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산의 높이가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히베아 지방이 더 험준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대장벽 너머에는 끝없는 산만 있다고 하더니, 그런 것도 아닌가 보네.'
자세히 알아볼 틈은 없었다.
주술사가 데려갔다는 그 아이가 과연 내가 찾고 있는 아이가 맞을지가 중요했다.
그뿐만 아니라 투르가의 말에 따르면 그 아이가 이타르를 만났을 가능성은 절반이라고 했다.
이타르를 다시 만날 단서는 그밖에 없었다.
다시 이타르를 만나 마검사의 정수를 이어받고 싶었다.
아직도 마나 소드로 스테판의 목을 찌르던 생각을 하면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나를 막는 것들을 모조리 부수고 복수를 실행하기 위해, 누구도 가진 적 없는 힘을 손에 넣는다!'
다시 한번 굳은 결심을 하고 속도를 올렸다.
***
"남쪽의 인간을 돕다니! 미친 건가, 흐릭!"
"우리가 도움을 준 것을 알게 된다면 유탓카 측에서 가만있지 않을 걸세!"
흐릭은 자신에게 성을 내는 장로와 주술사를 시큰둥하게 쳐다보았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 보게!"
흐릭이 입을 열었다.
"그는 남쪽의 인간이 아니다."
바로 거센 반응이 이어졌다.
"무슨 소리인가! 입은 옷과 생김새가, 누가 봐도 남쪽의 인간이지 않았나! 검은 것 아래에 사는 인간!"
흐릭이 자신의 움막을 나가 시안이 불태운 움집들을 쭉 훑어봤다.
움막 안에 있던 장로와 주술사가 답답했는지 따라 나와 흐릭의 옆에 섰다.
"보이나? 그자가 지나간 흔적이다."
장로도 주술사도, 시안의 압도적인 무위를 목격했기에 입을 다물었다.
흐릭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는, 아니 그분은 남쪽 인간의 생김새를 하고 있지만 남쪽 인간이 아니다. 신의 사자다. 쪼개지고 갈라진 이 땅의 사람들을 통합할 신의 사자."
흐릭이 몸을 돌려 시안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에 떠나갔지만, 그 강렬한 존재감은 아직도 시안이 곁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느껴진다. 그분으로 인해 시대가 바뀔 것이다."
주술사가 물었다.
"그,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흐릭이 코웃음을 쳤다.
"주술사는 그대가 아닌가? 별의 움직임이라도 읽어 답을 내놓아라."
***
"누가 내 얘기 하나?"
귀가 근질거렸다.
-못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네 얘기 하는 사람이 좀 많겠냐?
'말만 좀 이쁘게 하면 참 이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 투브가 걸음을 멈추고 코를 위로 들었다.
-멈춰! 누군가 접근한다.
숨을 죽이며 기다리고 있으니 내게도 오러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2명이었다.
"웬만한 기사 정도는 되겠는데?"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흐릭에게 들은 그림이 야만인의 얼굴에 그려져 있었다.
유탓카 부족의 표식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