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사자 (2)
"힘들 것 같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묶어 놓은 야만인에게 한참 동안 이런저런 말을 걸던 알버트가 일어섰다.
"시하 부족장과의 대화보다 훨씬 단편적인 단어밖에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까다롭네. 그래도 뭐 알아낸 거 없어?"
"누구냐, 부족, 무사 이 정도입니다. 납치나 주술사에 관한 것은 알아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말을 하기 싫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반응이 없습니다."
그때 나뭇등걸에 묶여 있던 2명의 야만인 중 하나가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고 우리를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크알라시! 아타! 휘민!"
이 외에도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는 놈의 턱에 주먹을 꽂으니 잠시 경련하다 축 늘어졌다.
"더럽게 시끄럽네."
그것을 보고 옆에 묶여 있던 다른 야만인이 벌벌 떨었다.
그 녀석의 앞에 왼손을 들이밀었다.
왼손 위에서 작은 얼음이 생기더니 불이 얼음 표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펑!
주먹을 쥐자 불과 얼음이 폭발하면서 야만인의 주위로 튀었다.
그것을 본 야만인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이를 달달 떨었다.
큰 덩치와 억센 외양에 어울리지 않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법사가 드문 땅이라더니…… 이 정도만 보여 줘도 어찌할 줄을 모르는군.'
대장벽에 주둔하고 있는 마법사 중 히베아 출신은 거의 없다.
넓은 영지와 많은 영민을 보유하고 있는 히베아지만 마나의 축복이 깃든 자는 이상할 정도로 나지 않는다고 한다.
-위로 올라갈수록 마법사가 없어집니다. 이들에게는 주술이라고 하는 고유의 술법이 있지만, 그것은 마나가 아닌 다른 영역의 것입니다.
몰이질 이후 '야만인들도 마법을 쓰면 사냥이 편할 것 아니냐?'는 내 의문에 대한 알버트의 답이었다.
'대신 오러의 질과 양은 기사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정제되지 않아 거칠지만,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흉포함은 만만치 않아.'
실제로 급습을 당했음에도 이 두 야만인은 곧바로 대응했다.
비록 압도적인 실력 차이 때문에 이렇게 잡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이들이 세력을 갖추고 군대를 만들어 남하할 경우를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콰앙!
눈물을 질질 짜고 있는 야만인의 머리 옆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주먹에 실린 오러 때문에 나무가 터져 나가면서 나뭇조각들이 흩날렸다.
"말을 못 하겠으면 그림이라도 그려서 내가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놔야 할 거다."
***
-만만치 않겠는데?
투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셋은 언덕 위에 엎어져서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위에 들키지 않는 은밀한 굴을 파고 야만인 두 놈을 하루 내내 조진 결과 유탓카 부족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멀다, 더 멀다, 많다, 우리 많다, 들었다, 납치, 있다, 주술사 정도로 짧고 간결한 소통이었다.
내 목적을 모르는 이놈들은 말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폭력과 억압에 굴복하고 말았다. 다음 날에 떠날 때쯤에는 내 눈빛만 봐도 이들은 멍들고 터진 눈을 아래로 깔았다.
법과 제도보다 힘과 권위가 지배하는 야만의 삶이 순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위에는 유탓카와 슬린나, 2개의 거대 부족이 있지만 현재는 유탓카의 기세가 커지고 있다는 시하 부족장의 말이나, 부족의 본영(本營)은 멀리 있고 인원도 많다는 야만인 두 녀석의 말이 허풍은 아니었는지, 야만인 두 놈을 잡은 곳에서 꼬박 1주일을 더 올라가서야 유탓카 부족의 본영이 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이동하면서 몇 번이고 얼굴에 유탓카의 문양을 붉은색으로 그린 야만인들을 목격하기도 했다.
내가 습격을 하고 나서야 헐레벌떡 뛰어나왔던 시하 부족과 비교하면 세력이 훨씬 강성한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지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유탓카 부족은 울타리로 둘러쳐진 커다란 구역 내에 몇천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또한 무기를 든 야만인들이 일정 시간을 두고 거리와 목책 바깥을 순찰하고 있었다.
"때려 부수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저걸 다 부수려면 시간이 많이 들고 시선도 많이 끌게 될 것 같은데……."
"많이 거칠어지셨습니다, 도련님."
알버트가 내게 말했다.
"그 아이도 마나의 축복이 깃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얘기에 머리가 번쩍했다.
내가 마법을 쓰면 그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살아 있다면.
"해 보자고."
옆에 있는 눈을 조심스럽게 뭉쳐 공중으로 던졌다.
눈이 떨어지기 전, 마나를 사용해 언덕 아래의 유탓카 부족이 있는 곳으로 이동시켰다.
둥둥 떠다니는 눈덩이를 본 보초들이 창을 바로 쥐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 눈덩이를 앞으로 보냈다.
퍼억!
등 떠밀려 나온 야만인 하나가 떨리는 창으로 눈덩이를 세게 내리쳤다.
동시에 눈 안에 뭉쳐 두었던 마나를 해방했다.
야만인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솨아아아!
터진 눈덩이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나 실린 바람이 유탓카 부족 곳곳을 휩쓸었다.
눈발이 휘날리고 움집 문이 날아갈 정도로 거센 바람이었다.
그것에 놀란 야만인들이 각자의 무기를 쥐고 소리를 지르면서 목책 바깥으로 쏟아져 나왔다.
-힘 조절 적당히 해야지!
"너도 느꼈지?"
-안쪽, 바람이 닿기 전에 마나가 먼저 흔들려 바람이 사라지는 곳.
"찾았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마나를 감지하고 움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마법이 사라졌다.
변환 인자와 매우 흡사한 방식임이 틀림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그는 과연 이타르를 만났을 것인가.
***
꿈틀.
'움직이지 마!'
-좁은 걸 어떻게 해!
어둠을 틈타 나는 마법으로 기척을 흐릿하게 한 채 유탓카 부족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내게서 멀어질 수 없는 투브를 두고 갈 수 없기에 작게 변한 투브를 품에 꼭 안은 채였다.
'신경 좀 안 쓰이게 해 봐! 마법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초대 황제에게서 몸을 감출 때처럼 몸의 구성 물질을 주위의 것과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배경에 동화되는 정도라 그때처럼 많은 정신 집중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지속되는 마법이니 흔들리지 않는 편이 좋았다.
가끔 예민한 야만인들이 내 주위로 접근하긴 했지만 큰 문제없이 이들의 거주지를 누비고 있었다.
마나에 예민한 마법사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원인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직 멀었어?
'아까 봤을 때는 이쯤 어디였는데……?'
고개를 들자 지금까지 보아 왔던 오밀조밀하게 밀집한 움집이 아니라 좀 큰 움집들이 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를 느끼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움집 옆 어두운 곳으로 향했다.
뽀득.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발아래에서 난 소리였다.
'분명 기척을 지우고 있는데 왜 소리가? 마법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움집의 벽이 열리더니 무언가가 나를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평소 같으면 끌려가지도 않았겠지만, 긴장한 채로 마법을 쓰고 있다가 불의의 습격을 당해 얼떨결에 끌려들어 갔다.
쿠당탕탕!
움집 안에서 몇 바퀴를 굴렀다.
-뭐야!
그 통에 품 안에 있던 투브가 튀어나왔다.
"프쉬나탓! 휘민! 나스르!"
얼굴에 붉은 그림을 그리고, 가슴에 동물의 뼈로 만든 것 같은 목걸이를 찬 젊은 남자가 바닥을 구른 내 위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목에 단도를 들이대고서 위협적인 얼굴로 그르렁거렸다.
한 손은 단도를 쥐고, 한 손으로는 허공에 이런저런 손짓을 했다.
투브가 2단계의 모습으로 변해 남자에게 달려들려 했다.
'잠깐!'
투브를 제지시켰다.
이 남자의 손이 내 몸에 닿는 순간부터 마나의 움직임이 멈췄다.
마치 나와 이 남자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마나가 팽팽해지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남자는 여전히 단도를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허공에 이리저리 손짓하고 있었다.
무언가 자신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는지 당황한 목소리로 빠르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안 되지?"
내 말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단도를 들어 올려 내 목을 찍으려고 했다.
오러를 운용해서 빠져나온 뒤, 단도를 들고 있던 남자의 손목을 발로 찼다.
"커헉!"
단번에 단도를 놓치게 하고는 남자의 반대편 손목을 움켜쥐었다.
'찾았다.'
양쪽 다 서로의 마법이 무효화되고 있었다.
이 남자가 내가 찾는 그자임이 틀림없었다.
변환 인자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대체 무슨 방법으로 주위의 마나 변환을 무효화시키는 것인지 아직은 불분명했지만, 제대로 찾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마법은 쓸 수 없을지라도 물리력은 통한다.
검을 뽑기 위해 옆구리에 손을 댔다.
'이런.'
혹여나 불빛에 반사될까 봐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알버트에게 맡겨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별수 없이 마나 소드를 만들어 냈다.
견고한 마나 소드가 아니라 마치 꺼질 것같이 희미한 마나 소드였다.
그것을 본 남자가 놀라 숨을 가삐 쉬었다.
"내 말도 알아듣는 것 같고? 이것도 본 적이 있는 것 같네?"
움집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아무래도 안에서 한바탕 난리를 친 것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 같았다.
마나 소드를 남자에게 향한 뒤 말했다.
"협조하면 죽이지는 않아. 일단 밖을 조용히 시켜.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죽어. 알았어?"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유탓카 부족의 주술사, 카르남이 움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움집 밖에는 대주술사를 비롯해서 여러 부족민들이 횃불을 들고 모여 있었다.
대주술사가 카르남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사람이 있다."
카르남이 얼른 얼버무렸다.
"새로운 약재 실험을 하다 잠시 졸았습니다. 그래서 작은 폭발이 있었습니다."
대주술사가 놀라서 말했다.
"괜찮은 것이냐?"
"괜찮습니다."
보초 하나가 카르남의 움막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보지 마!"
카르남의 외침에 보초가 깨갱 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카르남은 젊고 남쪽 인간의 외모를 하고 있지만, 아주 신비롭고 영험한 힘을 가지고 있어 대주술사가 매우 아끼는 제자였다.
부족의 차기 대주술사가 될지도 모르는 그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카르남이 얼른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안의 정리가 덜 되어서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대주술사가 그런 카르남을 기특하게 쳐다봤다.
"그래, 늦은 밤까지 고생이 많구나. 다만 남쪽의 경계 보초가 실종된 일과 오늘 낮에 있었던 이상 현상 때문에 다들 예민해진 것이니 너무 뭐라고 하지는 말거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주술사가 주위에 부족장에게는 내가 말할 테니 다들 돌아가라고 하자 사람들이 흩어졌다.
카르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움집으로 들어갔다.
움집 문을 단단히 점검한 뒤 그가 앞을 바라봤다.
작은 모닥불 앞에 소년과 성년의 중간 정도의 외모를 하고 있는 남자와 검은 개 1마리가 보였다.
카르남이 기억을 더듬은 후 말을 걸었다.
어눌한 제국어였다.
"당신, 누구?"
소년이 대답은 하지 않고 말했다.
"질문은 내가 해."
카르남은 꿀꺽 침을 삼켰다.
저 남자의 기운은 부족장의 것 이상이었다.
강대하고 웅혼한 기운이 남자의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이타르, 알아?"
카르남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